예종(이황李晄)과 성종(이혈李懅)의 장인, 한명회
퇴계 이황의 한자 표기는 退溪 李滉으로 발음은 이황으로 같지만 한자가 다르다
한명회(1415~1487)는 조선 초기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세조의 즉위를 돕고, 예종과 성종의 장인(상당부원군)으로서 권력의 중심에 선 킹메이커이자 훈구파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압구정을 지어 유유자적했으나, 말년에 성종과의 갈등과 연산군 때 부관참시라는 극적인 흥망성쇠를 겪은 인물입니다.
핵심 정보 및 생애
킹메이커: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의 핵심 참모로 활약하며 권력을 장악했고, 세조, 예종, 성종 3대에 걸쳐 권신으로 군림했습니다.
성종의 장인: 넷째 딸이 성종의 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로 책봉되면서 성종의 장인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예종(셋째딸 장순왕후)에 이어 두 왕의 장인이 된 유일한 인물입니다.
권력과 몰락: 영의정을 역임하며 권력을 독점했으나, 성종 대에 이르러 압구정 연회 문제 등 왕권과 대립하다 권력에서 밀려났습니다.
압구정(狎鷗亭): 한강변에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 '압구정'이라 불렀으며, 이 지역이 현재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사후: 연산군 때 폐비 윤씨 사건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훼손함)를 당하는 등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한명회는 계유정난을 주도한 불의한 권신이라는 비판과, 세조를 도와 조선 전기의 제도 정비를 이끈 능신이라는 양면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한명회는 장녀가 신숙주의 며느리, 차녀긴 세종의 서녀 정현옹주의 며느리였다. 그중 셋째 딸은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이고 넷째 딸은 성종의 왕비 공혜왕후로, 왕의 장인인 국구(國舅)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장순왕후와 공혜왕후가 모두 요절하면서 왕가로 시집간 딸들에게서 외손을 얻지 못해 대대로 외척은 되지 못했다.
장순왕후 한씨는 1460년(세조 6년), 15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세자 이황과 가례를 올리고 부부가 되었으니 이 때 나이가 16살이었다. 당대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한씨는 온순하고 바른 태도와 몸가짐으로 시아버지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1461년(세조 7년) 음력 11월 30일 왕위 계승 서열 2위의 원손을 낳았으나 1461년(세조 7년), 음력 12월 5일 녹사(錄事) 안기(安耆)의 집 사제에서 산후병으로 향년 17세에 요절했다.
세조는 총애하던 며느리의 죽음에 비통해하며 '온순하고 너그럽고 태도나 몸가짐이 아름다운 것'을 장(章), '유순하고 어질고 자혜로운 것'을 순(順)이라 하여 세자빈 한씨에게 '장순(章順)'의 시호를 내리고 '장순빈(章順嬪)'으로 삼았다. 훗날 장순왕후의 제부이자 시조카인 성종[4]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를 장순왕후로 추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