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농사를 권장하는 글
임금이 전교하기를,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 것인데, 농사하는 것은 옷과 먹는 것의 근원이므로 왕자(王者)의 정치에서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 농사는 백성을 살리는 천명에 관계되는 까닭에, 천하의 지극한 노고로 복무(服務)하게 하는 것이다.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誠心)으로 지도하여 거느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백성들이 부지런히 힘써서 농사에 종사하여 그 생생지락(生生之樂)을 누릴 수 있겠는가? ……(중략)…… 크게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께서 천운(天運)에 순응하여 나라의 터전을 여시고, 제일 먼저 전제(田制)를 바로잡아 백성을 도탄에서 건져 내어 농사의 이로움[利]을 누리게 하였으니, 그 농사를 권장하신 조목이 모두 법령에 갖추어 있다.
태종이 왕업을 계승하시어 씨 뿌리고 수확하는 일을 더욱 힘쓰셨다. 특히 어리석은 백성이 심고 가꾸는 방법에 어두운 것을 염려하셔서 유신(儒臣)에게 명령하여 우리나라의 말로 농서(農書)를 번역하게 하여 중앙과 지방에 널리 반포하시고 후세에 전하였다. 덕이 부족한 내가 왕업을 계승하여서는 밤낮으로 겁내고 두려워하노니, 삼가 이전 시대에 행해왔던 것과 조종(祖宗)에서 법도로 삼은 것을 생각하고자 한다. 돌아보건대 농무(農務)는 마땅히 백성에게 가까운 관리에게 책임을 맡겨야 하는 것이므로, 그들을 신중히 선택하여 임명하고 친히 격려하고 효유하였다. 또 차례로 주현(州縣)을 살펴보게 하고 그 땅에서 이미 시험한 결과를 모아서 『농사직설(農事直說)』을 만들어 농민들이 쉽고 훤하게 알게 하기에 힘썼으며, 혹시나 농사에 이로울 만한 것은 마음을 다하여 연구하여 실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힘을 다하고 땅에는 버려 둔 이로움이 없게 되기를 기대하였는데, 백성에게는 저축할 여유가 없어서 한번 흉년이 들 때마다 번번이 굶주린 얼굴들을 하니, 이것은 관리들이 나의 가르침을 받듬에 힘쓰지 않고 권농에 종사함이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이니 내가 매우 염려하는 바이다. 일찍이 옛날의 어진 수령들을 살펴보건대, 능히 한 지역의 이로움을 일으켜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게 하는 것이 그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공수(龔遂)가 발해(渤海)의 수령이 되어서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힘써 권장하였는데, 백성이 도검(刀劍)을 차고 다니는 자가 있으면 그것을 팔아서 소와 송아지를 사게 하였으며, 봄에는 밭에 나가 일하기를 권하고 겨울에는 곡식들을 거두어 모으게 하니, 백성이 다 부유하고 충실하게 되었다.
소신신(召信臣)은 남양(南陽)의 수령이 되었을 때에 백성을 위하여 이로운 일을 하기를 좋아하여 몸소 농사 짓는 것을 권장(勸奬)하느라고 들에 나다니면서 편안히 앉아 있는 때가 적었다. 다니다가 물이나 샘을 보면 도랑을 만들어 관개(灌漑)를 넓히니, 백성들이 그 이로움를 얻어서 농사에 힘쓰지 않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임연(任延)이 구진(九眞)의 수령이 되었는데 그곳의 풍속은 사냥을 생업으로 하고 소를 부려 농경하는 것을 알지 못하여 번번이 곤핍(困乏)하게 되었다. 이에 농기구를 주조(鑄造)하게 하여 개간을 가르치고, 해마다 개간을 넓히니 백성들이 자족자급하게 되었다. 신찬(辛纂)은 하남의 수령이 되어서 농상(農桑)을 독려하고 권장하되, 친히 살펴보고 부지런한 자에게는 포백(布帛)과 물화(物貨)를 주어 돕고, 게으른 자에게는 죄를 주었다. 주문공(朱文公)은 남강(南康)의 수령이 되었을 때, 게시문(揭示文)을 인쇄하여 백성에게 농사를 권장하였는데, (그 게시문에는) 갈아엎고, 거름을 주고 씨를 뿌리며, 제초(除草)하는 절목에서부터 삼과 콩을 심는 법과 제방과 못을 수리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기술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거듭 타이르며, 때로는 친히 들을 순시하고 가르친 대로 하지 않은 자는 처벌하였다.
무릇 이런 일들이 어찌 그렇게 해야 할 이유 없이 번거롭고 소란스러움을 좋아서 하였겠는가. 대체로 보통 사람의 심정은 이끌어주면 스스로 힘쓰고, 놓아두면 게을러지는 것이다. 앞선 현인(賢人)이 말하였기를, ‘낮은 벼슬을 받는 선비라도 진실로 남을 사랑하는 데에 마음을 두면, 남에게 반드시 도움되는 바가 있다’라고 하였다. 하물며 지금의 감사와 수령의 책임을 맡는 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잡고 있어서 한 지방의 안락과 걱정이 그 한 몸에 달려있다. 만약 성심으로 어루만지고 불쌍히 여긴다면 어찌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겠는가.
대체로 말해서, 농가의 일이란 것은 농사 시기를 일찍 시작한 자는 수확도 또한 이르고, 힘을 많이 들인 자는 수확도 또한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농정(農政)에 있어서 소중한 것은 오직 그 적절한 시기를 어기지 않고, 그 농사에 바칠 힘을 빼앗지 않는 데에 있을 뿐이다. 온갖 곡식은 심고 씨 뿌리는 것이 각각 그때가 있는 것이니, 때를 한번 잃어버리면 해가 다하도록 다시는 따라갈 수 없다. 백성의 몸은 이미 하나이니 힘을 둘로 나눌 수는 없는 것인데, 관에서 그것을 빼앗는다면 어찌 농사에 힘쓰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인사(人事)를 이미 다하였다면, 비록 천운이 동반되지 않더라도 또한 그 재해를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이윤(伊尹)의 구전제도(區田制度)1)와 조과(趙過)의 대전제도(代田制度)2)가 바로 그것이다.
근일에 경험한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정사년(1437, 세종 19년)에 궁궐 후원에 농사짓는 것을 시험하여 사람의 힘을 더할 수 없이 다하였는데 과연 가뭄을 만나도 재앙이 되지 않고 벼도 자못 잘 영글었다. 이것은 우연히 천재를 만나더라도 사람의 힘으로 구제할 수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전(傳)에 말하기를, ‘백성의 살아가는 길은 부지런한 데 있으니, 부지런하면 빈한하고 궁핍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게으른 농부가 스스로 편안하여 힘써 수고로움을 짓지 아니하고 밭이랑에서 일하지 아니하면, 훗날 피와 기장의 수확이 없으리라’ 하였다. 따라서 힘써하는 노동이 지나칠지언정, 태만하고 게으른 데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성이 부지런히 힘쓰고자 하더라도, 관에서 권하고 시킴이 성실하지 아니하면 그 힘을 발휘할 곳이 없을 것이다.
또 망종(芒種)이라는 절기는 사람의 힘이 넉넉하지 못하여 비록 다 일찍 하지는 못하였을지라도, 이때까지만 심는다면 오히려 가을에 곡식이 성숙할 가망이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특히 망종이라는 절후를 한정으로 하여 늦어서 농사를 망치는 것이 이때를 맞추어 파종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요, 반드시 이때를 기다려서 파종하는 시기로 하라는 것은 아니다. 농서(農書)에서도 또한 대개 일찍 파종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수령들은 예전의 습관에 익숙해서 비록 파종 때를 만나고도 스스로 말하기를, ‘망종(芒種)이 아직 멀다’라고 하고는, 모든 농지에 관계되는 소송 사건을 즉시 처결하지 아니하며, 종곡(種穀)과 양곡을 빌려주는 등의 사무를 항상 빨리 처리하지 아니하여 번번이 시기를 놓치게 한다. 혹은 수령이 비록 감사에게 신속히 보고하여도, 감사는 호조에 이첩(移牒)하고, 호조에서는 의정부에 보고하며, 의정부에서는 사유를 갖추어 계문(啓聞)해야 하므로, 전전해서 서로 문서를 왕복하고 있는 동안에 망종은 이미 지나가고 만다. 혹은 농경의 적절한 시의(時宜)를 알지 못하고 한갓 권농해야 한다는 명분에만 힘써서 너무 일찍 심기를 독려하기 때문에, 종묘가 자라지 못하고 도리어 농사를 해치는 경우가 있으며, 혹은 참으로 절후(節候)의 이르고 늦은 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의 계획이 어설퍼서 일의 시기를 잃는 경우도 또한 있으니 이것이 어찌 근심을 나누어 백성을 사랑하는 자의 도리일 수 있겠는가. 누구든 나와 함께 정치를 같이하려는 자들은 나의 위임한 뜻을 본받고, 조종(祖宗)이 백성에게 두텁게 하신 법을 준수하며, 전현(前賢)들의 농사를 권과(勸課)한 규범을 보고, 널리 그 지방의 풍토에 마땅한 것을 물으며, 농서에 실린 내용을 참고하여 미리 시기에 맞출 것을 조치해서, 너무 이르게도 말고 너무 늦게도 하지 마라. 더구나 다른 직무를 주어 농사를 짓는 시기를 빼앗아서도 안되며, 각각 자신의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이 근본을 힘쓰도록 인도하라. 농사에 힘쓰게 하여 우러러 어버이를 섬기고, 굽어 자녀를 길러서 나의 백성의 생명이 장수하게 되고, 우리나라의 근본을 견고하게 한다면, 거의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예의를 지켜 서로 겸양하는 풍속이 일어나서, 시대는 평화롭고 해마다 풍족하여 함께 태평시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종실록』권105, 26년 윤7월 25일(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