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내장과 수박 / 황선영
어린이날 아침. 은하한테 문자가 왔다. '집으로 와. 아무도 없어.' 과자 두 개를 챙겼다. 열린 현관으로 인기척 안 하고 들어갔다. 옥이도 와 있다. 다들 시무룩해 인사 한마디가 없다. 좋은 대학 가자고 의기투합했는데 반년도 안 돼 사그라들었다. 공부가 힘들다. 티브이를 켜고 과자를 텄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다. 볼 만한 게 없다. 옥이가 입을 열어 다음 달 모의고사를 걱정하고 짝사랑을 끝낼지 말지 의견을 물었다. 심드렁히 아무 소리 안 하던 은하가 방바닥을 두드린다. "야야, 저것 좀 봐." 화면 오른쪽 위에 '한국의 명산, 내장산'이라고 써 있다. 내장? 이름에서 냄새가 난다. 계절 따라 달라지는 산을 보여 준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니 초록이 시커멓다.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계곡에 발을 담근다.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옆에 수박과 참외가 있다. 그리고 가을, 겨울이 되었다. "우리 가자! 저기서 수박 먹을래. 그러면 공부 잘 될 것 같아." 뜬금없는 선포에 어리둥절했지만 눈이 반짝이고 가슴은 뛰었다. 은하가 브리핑한다. 날은 6월 5일과 6일. 오늘부터 용돈을 한 푼도 쓰지 말 것. 분식집 금지. 외박 허락을 위해 몸을 사릴 것.
5월은 공부만 했다. 아니 척했다. 떡볶이와 순대를 한 번도 안 먹고, 동전 노래방도 안 갔다. 얼마나 연기를 잘했던지 몸 챙겨 가며 공부하란 소릴 들었다. 모두 어렵지 않게 외박을 허락받았다. 어른들은 독서실에서 자는 줄 안다. 6월 5일. 학원을 결석하고 역으로 먼저 가 표를 끊었다. 옥이와 은하는 1교시만 듣고 조퇴했다. 제사와 배탈이라는 사유를 댔다. 선생님이 집으로 전화하는 최악의 일은 운명에 맡기기로. 일곱 시. 목포역 화장실에 모였다.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기차에 올랐다. 이제야 숨을 크게 쉰다. 은하가 가방에서 달걀을 꺼낸다. 사이다 없이 건배했다.
정읍역에 내렸다. 목포랑 느낌이 다르다. 비릿한 바다 냄새도 없고 역 광장과 주변이 차분하다. 편의점에서 먹을 걸 사고 주변 돌며 잘 곳을 탐색했다. 건물이 깔끔하고 이름도 단정한 '청운장'으로 정했다. 은하가 앞장선다. 유리문을 여니 곱게 단장한 할머니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방 하나 주세요." 우릴 위, 아래로 훑어보고는 어디서 왔냔다. 내장산에 가려고 목포에서 왔다고 공손히 말했다. 학생이냐고 묻는다. 일어서더니 카운터를 나와 우리에게 왔다. "가방 좀 보자." 메고 있던 걸 내려 지퍼를 열였다. 세 개를 꼼꼼하게 살핀다. "술 없지?" 202호 열쇠를 건넨다. 계단을 올라 우리 방 문을 열었다.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치고 얼싸안았다. 고생한 한 달을 추억하며. 옥이는 울먹이며 18년 산 날 중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1초도 쉬지 않고 수다를 떨며 과자를 먹었다. 기운이 달려 졸음이 쏟아지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말과 웃음을 멈췄다. 주먹으로 쾅쾅 친다. "누구...세요?" "학생, 문 열어 봐." 아, 할머니.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더니 화장실 문을 열어젖힌다. 농도 활짝 연다. "남자는 없고만. 그려, 어여 자드라고."
일어나니 아홉 시가 넘었다. 씻고 짐을 챙겨 나갔다. 열쇠를 반납하고 할머니께 인사드렸다. 내장산 가는 버스 시간표가 적힌 쪽지를 주신다. 아침 먹을 백반집도 알려 준다.
밥을 먹고 마트를 찾아 수박을 샀다. 버스가 온다. 셋이 맨 뒷자리에 앉았다. 은하가 수박을 꼭 안는다. 엄마같다. 한 시간쯤 달렸다. 기사님이 내리란다. 그런데 산이 아니고 식당만 즐비하다. 내장산에 오면 바로 계곡이 있는 줄 알았는데. 수박을 받아 안았다. 좀 걷다, 옥이한테 주었다. 그렇게 번갈아 들었다. 6월 볕에 눈이 부시고 정수리가 뜨겁다. 그래도 시원한 물을 만날 생각에 숲으로 계속 걸었다. 그런데 안 나온다. 작은 골짜기도 말라있다. 지나가는 아저씨를 붙잡고 어디로 가야 계곡이냐고 물었다. 요새 가뭄인 줄도 모르냐며 혀를 찬다.
수박이 더 무겁다. 땅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내가 말했다."그냥 집에 가자." 옥이는 "수박은?"이라고 묻는다. 은하가 "목포 가서 먹자."라고 한다. 다시 안고 일어섰다. 이놈의 것이 징그럽다. 은하는 저만치 앞서 가고, 옥이와 뒤처졌다. 눈치를 살피더니 손가락으로 숲을 가리킨다. 울창하다. 눈을 크게 뜨고 입모양으로 말한다. '버, 리, 자.' 대번에 알아 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힘껏 던졌다. 수박이 따라올 것 같아 무서워 소리를 지르며 내달렸다. 은하가 멈춰 뒤돈다. 빈손인 걸 보고 눈을 째린다. "잔인한 년들."
어깨동무하고 걸었다.
첫댓글 하하하. 18년 전에 수박 버린 세 여인의 이야기가 아주 재밌네요. 정읍 이야기라 더 흥미롭게 읽었어요.
사실 잊고 지내다 선생님이 정읍이라해서 생각났어요. 여름에 쓰려고 여태 참았네요.
정읍에 다른 추억도 많답니다.
큭큭큭, 그 수박이 주인을 애타게 찾았다는 풍문입니다.
오메, 으짜까요.
너무 재밌어요.
헤헤, 고맙습니다!
친구들과 재미있게 잘 놀았군요. 그래서 글도 웃기면서 구성도 짱짱하고요.
네, 저런 날도 있었네요. 고맙습니다.
'수박이 따라올 것 같아'
이런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나오나요?
초등학교 1학년 땐가?
담임 선생님이 쓰레기 버리면 결국 자기한테 돌아온다고 했거든요.
어릴 땐
그 말이 진짜 무서웠어요.
귀신이 되어 따라온다고 생각했어요. 하하.
선생님은 재미있는 추억이 많군요. 그것을 글로 잘 풀어놓는 능력까지 있어서 그 시절이 더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네, 고맙습니다.
그립네요. 그 시절.
여인숙 할머니의 방 수색도 재미있습니다. 친구들과 추억이 참 흥미롭습니다.
네, 할머니가 좋으셨어요.
꺼이꺼이 웃습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해서 첫 엠티갈 때 수박을 들었답니다. 다른 짐은 2인 1조로 들어야 하는데 수박은 달랑 혼자 들면 되겠더라구요. 우와, 진짜로 무겁더라구요. 왼손 오른 손으로 바꾸어 들었다가 가슴에 안기도 했는데,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지고 갔습니다.
하하하. 저도 선생님 댓글에 크게 웃어요.
요새 수박 좀 싸더라고요. 그래도 들고 가기 힘들어서 안 사요. ㅎ
역시 재밌네요.
간 큰 여고생들이었네요.
그땐 간이라는 장기가 없었던 것 같아요.
무거운 수박을 번갈아 들고 내장산 찾아 갔던 추억이 눈에 보이듯 선명하군요.
선생님 정말 글 재미있게 잘 쓰네요.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하하
어떻게 버릴 생각을, 대단한 친구들이네요. 하하하!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