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여, 제 4의 보살지에 이르러 도가 정화된 보살은 제 5의 난승지(難勝地)에 들어갑니다.
여기에 이른 보살은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에 의해 청정한 활동이 생기고 고결한 마음이 생겼으므로 다시 다음 단계의 도를 구하면서 실다운 성품[如實性]에 도달한 자가 됩니다. 그리고 자비에 의해 중생을 버리는 일이 없이 복덕과 지혜를 닦아 점점 위를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그는 '이것은 고(苦)라는 성스러운 진리[苦諦]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인식합니다. 또한 '이는 고의 원인[集諦]이다. 이는 고의 소멸[滅諦]이다. 이는 고의 소멸로 이끌어 가는 길[道諦]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인식합니다.
또한 그는 세속적 진리와 불법의 진리에 다같이 뛰어난 자가 됩니다.
그는 '모든 존재는 헛되고 허망한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인식합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중생에 대한 위대한 연민의 정이 나타납니다.
그는 이리하여 지혜의 힘으로 모든 중생을 돌아보며,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며, 온갖 존재의 원초와 종말을 관찰합니다.
그는 어떤 선을 행하는 때에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행합니다.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모든 중생의 안락을 위해, 모든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기 위해 선을 행합니다.
그는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 기타 모든 일에 의해 중생을 교화합니다.
또 세상에서 중생 구제에 도움이 될 것, 즉 글씨, 논서, 도장, 수학, 의학, 복술 등에 대해서도 배웁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십바라밀 중, 선정 바라밀이 가장 뛰어납니다.
불자여, 이것이 난승지라는 보살지입니다.
(<화엄경> 제 22장 십지품(十地品)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오, 용사여, 너는 어찌하여 악한 일을 자랑하느냐? 너는 어찌하여 경건한 사람에게 저지른 악한 일을 쉬임 없이 자랑하느냐?
너, 속임수의 명수야, 너의 혀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해로운 일만 꾸미는구나.
너는 착한 일보다 악한 일을 더 즐기고, 옳은 말보다 거짓말을 더 사랑하는구나. (셀라)
너, 간사한 인간아, 너는 남을 해치는 말이라면, 무슨 말이든지 좋아하는구나.
하나님께서 너를 넘어뜨리고, 영원히 없애 버리실 것이다. 너를 장막에서 끌어내어 갈기갈기 찢어서, 사람 사는 땅에서 영원히 뿌리 뽑아 버리실 것이다. (셀라)
의인이 그 꼴을 보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비웃으며 이르기를
"저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의 피난처로 삼지 않고, 제가 가진 많은 재산만을 의지하며, 자기의 폭력으로 힘을 쓰던 자다"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서 자라는 푸른 잎이 무성한 올리브 나무처럼, 언제나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만을 의지하련다.
주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며,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렵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 앞에서, 선하신 주님의 이름을 우러러 기리렵니다.
오늘 화엄경에서 “그는 '모든 존재는 헛되고 허망한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인식합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중생에 대한 위대한 연민의 정이 나타납니다."를 보자.
모든 존재가 헛되고 허망한 것인데, 중생에 대한 연민은 왜 나타날까? 내가 안 것을 전해 내가 그의 중심에 놓이려는 본능적 권력 작동 시스템 때문이다. 내가 안 것이 최고라는 자기중심 사고가 생존의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같아지는 사람이 많으면 소통이 원활해지면서 살기가 편해지기 때문이다. 즉 모두가 다 영원한 생존이라는, 도무지 어찌 거부하기 힘든 이 본능 때문이다. 본능을 이기려면 본능을 뛰어넘는 제어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실로 어렵다. 그 의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귀감이 된다. 그렇다면 본능을 넘는다는 건 왜 중요할까? 모든 생명은 본래 공(空) 즉 본능이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본능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공간을 초월하는 삶에 대한 근원적 회귀가 있다는 것이다.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것은 본능이 만든 개체가 쉽사리 본능을 포기할 수 없는 시스템 때문이다. 아마 그럴 것 같다.
다음으로 “또 세상에서 중생 구제에 도움이 될 것, 즉 글씨, 논서, 도장, 수학, 의학, 복술 등에 대해서도 배웁니다.”를 보자.
남을 도우려면 무지 공부를 해야 하는구나. 남 앞에 서서 말을 하려면 온갖 것을 공부해야 하는구나. 인생은 공부라는 말이 실감난다. 머리도 나쁘고 몸도 게으르지만 닿는 데까지 공부는 멈추지 말아야겠다.
오늘 시편에서 “너를 장막에서 끌어내어 갈기갈기 찢어서, 사람 사는 땅에서 영원히 뿌리 뽑아 버리실 것이다.”를 보자.
무지막지하게 살벌하다.
다음으로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서 자라는 푸른 잎이 무성한 올리브 나무처럼, 언제나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만을 의지하련다.”를 보자.
나무는 늘 좋은 일에 비유의 대상이 되는구나. 열심히 공부해보자.
<식물의 죽살이>에 나오는 글이다.
[식물호르몬은 식물의 성장과 발달 전반을 조절한다. 또한 식물의 형태를 만들고 성장을 조절하며 꽃이 피는 시기, 꽃의 성, 잎의 노화, 과일의 성숙에 영향을 준다. 지금까지 대표적으로 알려진 고전적인 식물호르몬은 옥신, 시토키닌, 지베렐린, 아브시스산, 에틸렌이 있다. 그 외에도 최근에 식물호르몬 범주 안에 넣은 물질에는 브라시노스테로이드, 살리실산, 자스몬산, 스트리고락톤 등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폴라아민, 산화질소, 펩타이드까지 넣는 경우도 있다.]
식물호르몬 용어를 자유롭게 쓸 줄 알면 전문가이고, 그렇지 못하면 비전문가이다. 수목생리학에서 말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비전문가이다. 내가 하는 것은 나무에 의미 부여를 하고, 전달이 뛰어난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사실 나무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노력은 하고 있다. 그런데 너무 어렵다.
<꽃의 제국>에 나오는 글이다.
[진화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영원한 생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지구상에 있는 약 1천만~3천만 종의 생물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종의 일부에 불과하다. 지구상에 나타났지만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종도 많아서 현재 있는 종에서 약 150만 종만이 학술적으로 명확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름이 있는 종들은 다시 종, 속, 과, 목, 강, 문, 계, 군의 분류단계로 구분된다. 계통적으로 유사한 종들은 한 ‘속’에 속하며 유사한 속은 다시 한 ‘과’로, 유사한 과가 모여 ‘목’으로, 유사한 목이 모이면 ‘강’, 유사한 강이 모이면 ‘문’, 유사한 문이 모이면 같은 ‘계’, 유산 계는 같은 ‘군’을 이룬다.]
인간 종(種)은 언제 사라질까? 최후까지 남는 종(種)이 될까? 그것보다 나란 개체는 언제 없어질까? 궁금하기는 하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자.
[쥐피앵과 샤를뤼스 씨의 몸짓도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제 다윈에 따르면 국화과라고 지칭되는 꽃들이 곤충을 유혹하려고 어쩌면 멀리까지 그 모습을 보이기 위해 두상꽃차례의 꽃 부분을 높이 쳐드는 몸짓만큼이나 나의 관심을 끌었는데, 이는 흡사 어떤 암술대의 길이가 다른 꽃이 곤충에게 길을 내주려고 수술을 뒤집거나 구부리는 혹은 세정수를 제공하는 몸짓, 아니면 단지 꽃가루의 향기나 꽃부리의 광채가 이 순간 곤충을 마당 안으로 유인했던 몸짓과도 같았다.]
꽃의 구조는 오로지 매개 동물을 유인하기 위한 지적 설계의 몸짓일 것이다. 그러면 곤충의 몸 구조가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면 곤충은 꽃의 구조에서 의해 몸을 약간씩 바꾸었을까? 이런 논문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걸 봐야 전문가가 되는데, 그냥 생각만 한다. 언젠가 보게 될 것이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사실 그의 영혼은 장사하는 데 가 있지 않았다. 물론 자기가 카말라에게 갖다줄 돈을 버는 데에는 사업이란 유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업을 통하여 자신이 필요로 하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영혼 없이 장사하는 데 돈은 벌었다고 한다. 재주가 참으로 용하다. 나는 왜 갈수록 싯다르타에 대해 반감을 키우고 있을까? 나중에 깨달을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이런 구조를 취했을 텐데, 군더더기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 읽는 게 힘들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문득
불경 강론으로 돈을 벌고
성경 강독으로 돈을 벌고
식물 강의로 돈을 벌고
문학 수업으로 돈을 버는
분들이 부럽다
실체도 근거도 쓰임새도 없는
이 글들로 아무 돈도 벌지 못하는 데
왜 이리 하고 있을까?
오로지 내 영혼이 흐트러지지 말라는
오로지 내 마음이 안정되라는
글쓰기 명상인데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게
내 삶에 와 있을까?
무언가 이걸 통해 꼭 얻고 싶은 목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얻기 어려운
명예와 권력과 돈이다.
비우지 못하는 욕심 때문에 더더욱 못 얻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말한다.
목표와 욕망과 욕심과 노력만이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준다고
누가 뭐라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그냥 열심히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