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번지 가지산 자락에 위치,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신라시대 창건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 사찰이었으며,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3보림이라 일컬어졌다.
서기 759년 경, 원표대사가 이곳에 절을 세워 가지사라 하고 이후 도의선사와 염거선사를 거쳐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의 법맥을 이어받은 보조선사 체징에 의하여 '보림사'라는 이름으로 재창건된다.
보조선사는 김씨로서 충남 공주 사람인데 860년경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가지산에 들어와 , 대찰을 창건하고 선종(禪宗) 도입으로 맨 먼저 선종이 정착된 가지산문의 중심사찰로 발전시킨다.
이후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주석하기도 했으며 조선 명종 때 회암사의 주지, 국사 보우가 이곳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그 뒤 끊임없는 중창과 중수를 거쳐 6·25전쟁 때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 이 었다.
근세에 6.25 전쟁으로 국보 제204호였던 대웅전 등 20여 동의 건물이 불타고, 천왕문과 사천왕·외호문(外護門)만이 남았던 것을 이후 대적광전을 다시 지어 대웅전에 있었던 비로자 나불을 모셨다. 1981년에 대웅보전을 복원하였다
외호문에는 지금 '迦智山寶林寺(가지산보림사)' 편액이 걸려 있다.
사천왕문 (유형문화재 제85호) 안에 봉안된 사천왕상은 1780년(정조 4)에 조성된 국내 목각상의 대표적인 것으로, 최근 중수하여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였으나, 복장 속의 비장품은 도굴꾼들에 의하여 망가진 상태로 방치되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44호인 보림사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제117호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155호인 보림사동부도, 보물 제156호인 보림사서부도, 보물 제157호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 보물 제158호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 등이 있다.
보림사의 외곽은 ‘迦智山寶林寺(가지산보림사)’라 이름 붙여진 일주문을 기점으로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이란 일주문 속의 현판이 우리나라에서 선종이 처음 시작된 보림사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일주문 , 천왕문 지나 2기의 삼층석탑과 석등까지 일직선으로 놓여 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는 보물 제1254호 보림사 목조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데 다른 절에서 보다 훨씬 크다. 지금까지 조선시대 사천왕상 가운데 조성 년대가 가장 빨라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는 유일하다. 천왕문에 걸려 있는 목판의 <보림사 천왕 금강중신 공 덕기>에 의하면 중종 10년(1515)에 조성되었고 이후 1666년과 1772년 2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고 한다.
사천왕이란 수미산의 동서남북을 다스리는 천왕들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들이다. 보림사의 사천왕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여러개의 나무를 잇대어 천왕상을 만들었다.
사천왕상 자체 가치와 함께 복장물로 1995년 2월에 사천왕상의 무릎과 발등에서 국보급 희귀본인 월인 석보 제25권을 비롯하여 고서 250여권이 발견 되어 당대의 인쇄문화와 언어,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개의 경우 사천왕상이나 본존불 등의 배나 등 쪽을 파고 그 속에 복장유물들을 보관하는 것은 많이 있지만 보림사 사천왕상의 경우 발바닥 속까지 임진왜란 이전의 언해본들을 포함한 유물들을 빼곡히 채워 넣은 것은 드물다 그런 이유로 도굴의 손을 타지 않은듯 싶다.
성보박물관
국보 제117호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보림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로 만든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잃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불상의 왼팔 뒷면에 신라 헌안왕 2년(858)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이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어서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달걀형의 얼굴에는 약간 살이 올라 있다. 오똑한 콧날, 굳게 다문 입 등에서 약간의 위엄을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다소 추상화된 모습이다. 아랫부분이 넓고 크다.
통일신라 전성기(8세기)의 불상에 비해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고,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모아지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지만 탄력을 잃은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표현은 신라 불상에서 보여주던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후퇴하고 도식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9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이 작품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여 당시 유사한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과 함께 동시대의 철조비 로자나불이다. 금박으로 덧쓰여져 지나다가 2007년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목구비는 확연히 대비된다.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 자나 부처님과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 부처님은 비교가 된다.
국보 제44호 장흥 보림사 남북삼층석탑 및 석등(국보 44호)이 대적광전(大寂光殿) 앞 마당에 있다, 1가람 2탑 양식에 맞추어 서 있는 2기 석탑과 석등은 1934년 해체, 복원할 때 나온 탑지(塔誌)로 탑의 조성연대 (870년, 경문왕 10년) 및 중건 사실이 밝혀져 다른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보림사삼층석탑은 남쪽 석탑이 높이 5.4m, 북쪽 석탑이 5.9m이며, 석등은 높이 3m이다.
석탑은 신라 전형의 양식인 2층 기단 3층 탑신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두 기단에는 각각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으며 각층의 옥개받침이 5단씩이고 정상에는 각형 2단의 굄을 마련하여 그 위층의 몸돌을 받치고 있는데 2, 3층 몸돌이 상대적으로 축약이 심하다. 옥개석 낙수면은 경사가 급격하고 날카롭게 반전을 보이는 것 등으로 미루어 아주 경쾌하고 가벼운 느낌을 준다. 특히 양쪽 탑의 상륜부는 모두 완전하여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보주의 순으로 각부의 부재를 갖추고 있는데, 앙화석 까지는 양쪽 탑이 같은 양식수법이나 보륜이 남탑에는 삼륜, 북탑에는 오륜으로 만들어져 있다. 양쪽 탑의 앞에는 각기 1좌의 배례석이 놓였는데 정면에 3구, 측면에 1구의 안상을 음각하여 신라시대 배례석의 통상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석등도 삼층석탑처럼 통일신라기의 전형적이고 완벽한 형태이다. 사각의 지대석과 3단의 굄 위에 놓인 하대석은 팔각의 아래받침에 각각 안상이, 그 위에는 복련이 조각되어 있다. 복련의 모서는 영판이 조각되어 있고 끝은 말려서 귀꽃의 모양을 보인다. 짧은 팔각의 간주석 위 상대석에는 꽃잎 속에 작은 꽃모양이 장식된 한 겹의 앙련이 있고 그 위에 네 면이 뚫린 화사석(火舍石)이 있다. 옥개석은 평평하고 넓으며 추녀 밑에는 경미한 반전이 있으며 위에는 귀꽃이 표현되었으며 정상 주위에는 복련을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복련을 조각한 받침 위에 보륜이 있고 그 위에 보개, 보주가 차례로 얹혀 파손되지 않은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삼성각
명부전 지붕 위의 용마루가 특이하다. 다른 사찰에선 볼 수 없는 모습인데. 지혜를 상징하는 사자상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생동감 있는 용(龍)의 모습을 표현해 놓았다.
조사전과 미타전
미타전에 모셔져 있는 전남 유형문화재 제191호 장흥 전(傳)의상암지석불입상은 원래 전라남도 장흥읍 제암산 중턱에 있는 의상암 절터에 있던 것인데, 1994년 보림사로 옮겼다고 한다. 몸 뒤의 광배(光背)와 목 부분에 약간의 파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게 표현되었고 얼굴은 계란형이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 위까지 U자형 주름을 이루고 있다. 양 팔에 걸쳐진 옷자락은 물결 모양의 주름을 만들면서 무릎까지 길게 드리워졌다.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마타여래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원만한 얼굴, 높은 머리묶음, 상체의 옷주름 등으로 보아 9세기 후반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근래에 조성된 가지산보림사사적비
보물 제158호 장흥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는 보조선사 지선의 탑비로,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보조선사(804∼880)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어려서 출가하여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흥덕왕 2년(827)에 계율을 받았다. 희강왕 2년(837)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고, 문성왕 2년(840)에 귀국하여 많은 승려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헌안왕 3년(859) 왕의 청으로 보림사의 주지가 되고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그의 시호를 ‘보조선사’라 하고, 탑이름을 ‘창성’이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의 머리가 용머리를 하고 있어 이목구 비가 뚜렷한 사나운 모습이며, 등 뒤에는 육각형의 무늬 가 전체를 덮고 있다.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에는 구름과 연꽃을 새겨 장식해 놓았다. 몸돌에는 보조선사의 기록이 새겨져 있고, 김영이 비문을 짓고 김원과 김언경이 글씨를 썼다. 한비석에. 두사람이. 글씨를 쓴 드문 경우이다.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의 모습을 웅대하게 조각하였고, 앞면 중앙에 ‘가지산 보조 선사비영’이라는 비의 명칭을 새겼다. 통일신라 헌강왕 10년(884)에 세워진 비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보물 제157호 장흥 보림사보조선사 창성탑은 보조 선사의 사리탑이다.
탑은 바닥돌부터 지붕돌까지 모두 8각으로, 통일신라 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탑신(塔身)을 받치는 기단(基壇)의 아래받침돌에는 구름무늬를 매우 입체적으로 조각하였고, 가운데받침돌은 아래위로 띠를 두른 약간 배가 부른 모습이다. 8개의 큰 연꽃조각 위에 놓여진 탑신의 몸돌은 앞·뒷면에 문짝 모양을, 그 양 옆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새겼다.
두터워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서까래를 표현해 놓았고, 윗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파여져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완전한 모양은 아니지만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탑신의 몸돌이 지붕돌에 비해 지나치게 커 보이고, 지붕돌의 질감이 달라서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럽다. 일제시대 때 사리구를 도둑맞아 쓰러졌던 것을 복원한 바 있는데 이때 일부분이 손상되었다 한다.
보림사 설화
조선 초 세조기에 발간된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사적기"에는 보림사 창건설화가 전해온다. 신라의 명승 원표대덕이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참선중 한반도에 서기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살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았다. 어느 날 유치면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선녀가 나타나더니 자기가 살고 있는 못에 용 아홉 마리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살기 힘들다고 호소해왔다. 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갔는데 유독 백룡 만이 끈질기게 버텼다.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었더니 마침내 백룡도 못 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 때 용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용문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못자리를 메워 절을 지었다. 그래서 보림사 주위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