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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80
8월7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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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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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ChNshO60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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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의 제자라면 마땅히 그분의 운명을 우리의 운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오 복음 16장 24절)
오늘 복음 말씀에서 보시는 바처럼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한다면, 우리 삶에서 하나는 빼야(-)하고 하나는 더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삶에서‘자신’을 빼고, ‘십자가’를 더해야 합니다. 결국 내 인생에서 나를 덜어내고 십자가를 끌어안는 것이 적극적인 예수님 추종의 비결입니다.
나를 덜어낸다는 것은?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이겠지요. 내가 주인공이어야 하고, 내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일 것입니다.
나를 덜어낸다는 것은?
내가 지금 집착하고 있는 대상,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돈이든, 명예이든, 훌훌 털어버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를 덜어낸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우리가 가끔씩 집어드는 그릇된 선택, 우리를 죄와 악습, 허망함과 부질없음에로 이끄는 결정을 과감히 던져버리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끌어안는다는 것은?
철저하게도 나와 맞지 않는 그를 끌어안는 것이겠습니다. 때로 생각만 해도 족쇄처럼 부담스런 공동체를 끌어안는 것이겠습니다.
십자가를 끌어안는다는 것은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 현실, 결코 내가 원치 않았던,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쩔수 없이 겪게 되는 인생의 산전수전, 우여곡절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이겠습니다.
십자가를 끌어안는다는 것은 절대 원치 않았던 병고나 노화, 언젠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될 죽음까지도 기꺼이 끌어안는 것이겠습니다.
고통과 십자가에로의 초대는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나 열두 사도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나를 내세우고, 나를 일으켜 세우며 내가 중심이 되는 종교가 아니라 주님을 중심에 두는 종교입니다.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총과 축복으로 우리 인간 각자도 충만하고 거룩하게 되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내 계획을 앞세우기보다 주님의 계획을 앞세워야겠습니다.
제자란 말 마디 그대로 따르는 사람, 추종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된 사람으로서 무엇을 추종해야겠습니까? 주님의 제자라면 마땅히 그분의 운명을 우리의 운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분의 사고방식, 그분의 행동 양식을 고스란히 우리의 것으로 선택해야겠습니다.
적당히 포기하고 적당히 선택하면 참 애매합니다.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주님께도 속하고 사탄에게도 속할 수 없습니다. 어중간하게 서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확고한 의지를 바탕으로 한 정확한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의 위대하심과 자비하심, 영원하심과 불멸하심에 영원히 참여하기 위해 잠시 지나가는 덧없는 대상들과 거듭 결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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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마음을 넓힌다는 말이다>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8_zo7OWRW-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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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영성 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지금까지의 나의 주인이었던 자아를 죽여야만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시기 위해 자기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표현이 좀 극단적인 것 같아서, ‘더 온화한 표현은 없을까?’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에서는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많이 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이나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는 말이나 궁극적으로는 같은 의미입니다.
마음을 비워 자아를 죽이다시피 해야 하는 이유는 그 자아가 우리를 ‘모기’, 혹은 요즘 유행하는 ‘좀비’와 같은 존재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자신을 살리려는 마음을 자아내기에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런 종교적 세계관을 잘 나타낸 영화가 ‘웜 바디스’(2012)입니다. 좀비 영화이지만 인간을 세 종류로 표현하였습니다. 좀비이지만 아직 심장이 따듯해질 가능성이 남아있는 존재들, 그러나 심장이 따듯해질 가능성을 잃고 영원히 피만 찾아 돌아다니는 ‘보니’가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교육은 좀비로 태어난 아이들을 보니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경쟁이라는 것 자체가 남을 이겨야만 살게 만드는 체계로 그 사람의 인생을 모기의 삶, 좀비의 삶으로 빠져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경쟁교육을 통해 생겨난 대표적 인물이 히틀러입니다. 그래서 독일은 그런 교육을 버렸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수많은 사교육비를 들여가며 아이들을 좀비에서 보니로 만들어갑니다.
아무튼, 이런 세계에 인간들이 연구하기 위해 들어오고, ‘알’(R)이라고 하는 한 좀비가 그녀 남자친구의 뇌를 먹고는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뇌를 먹으면 그 사람의 기억까지도 먹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녀를 보니와 다를 바 없는 인간들로부터 살려내기 위해 생명을 포기합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며 인간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자아의 욕구를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타자의 생명을 먹어야만 합니다. 생존은 타자의 생명으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 본성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원죄입니다. 그런데 이 자아의 욕구는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이다시피 할 수는 있습니다. 바로 더 높은 수준의 누군가를 받아들임으로써입니다. 좀비였던 ‘알’이 한 인간을 사랑하여 그녀를 살게 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게 됨으로써 더 높은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김상운씨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에는 이러한 사례가 나옵니다. 한 여인이 심한 두통으로 직장까지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의사들의 처방은 진통제와 수면제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복용량은 갈수록 증가했고 그렇게 삶을 더 피폐해져 갔습니다. 그분이 이것을 치유한 것은 약물이 아니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찾아가 만난 한 의사는 약물 대신 명상을 시켰습니다.
“눈을 감으시고 머리 안에 곧 터져버릴 것만 같은 고통 덩어리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머리는 그것으로 가득 차서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나의 머리가 1m로 커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다음은 10m, 다음은 이 도시만큼, 우리나라, 더 나아가 지구와 온 우주 크기만큼 커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명상을 매일 조금씩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달 뒤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멋진 아이디어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신 이유는 우리를 품기 위해서였습니다. 팔을 벌려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 다시 말해 모든 시간과 공간 안의 인간들을 품으십니다. 원하면 누구나 그분의 사랑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자아를 죽임은 곧 타인을 받아들임과 일치합니다.
저희 영성관 앞에도 작은 야산이 있습니다. 그 속엔 많은 뱀이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영성관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아가면서 거의 뱀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뱀과 그만큼 떨어져 살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곳에 사는 뱀은 더더욱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 넓어지면 자아가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잊어버립니다. 그러는 사이 그 뱀과 나 사이에는 수많은 사람이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도 하시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고도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같은 말입니다.
한 자매님이 아직 아기인 딸과 어떤 강좌를 듣기 위해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딸이 너무 우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업고 화장실로 갔습니다. 딸의 울음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 두 손으로 귀를 막았습니다. 그런데 혈관에 흐르는 맥박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졌습니다. 자기 안에서 밖으로 조금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그렇게 불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뻐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안아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가 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넓혀 아이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인으로 살게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나를 넓혀 마치 노아가 좋은 동물, 나쁜 동물 가릴 것 없이 자신의 방주에 태우는 것처럼 내 안에서 더 많은 사람이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많은 사람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모습으로 예수님께서도 들어오십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결국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넓힌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신비의 가장 중요한 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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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6,24-28
: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4절). 이 말씀은 우리 신앙인 모두의 원칙이고 강령이다. 이는 복음서 여러 곳에서 강조하신 말씀이다(참조: 마태 10,37-39; 마르 8,34-37; 루가 9,23-27; 14,25-27; 17,33; 요한 12,25).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강요가 아니다. 억지로 시키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25절). 목숨을 얻는 것과 목숨을 잃는 것은 무한한 차이가 있다. 즉 구원과 멸망의 차이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26절)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한 삶을 살면 파멸을 맞게 되며 그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목숨을 잃는 것이며 멸망하는 것이다.
“나의 가르침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으로 인하여 현세의 삶을 경멸하여 진리를 위해 죽음과 맞서기까지 하는 사람은 그 신심으로 인하여 죽음 안에서 자기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 때문에 자기 생명을 잃는 이런 사람은 오히려 생명을 구하고 지키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오리게네스, 마태오 복음 주해 12,26). 즉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26절) 이 말씀은 사람에게는 죽음을 면하게 해 줄, 즉 생명 대신 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뜻하는 말씀이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내줄 것이 없는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1베드 1,19) “값을 치르고”(1코린 6,20)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대신 내어주신 그분을 우리는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27절)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오신다고 하는 것은 아버지의 영광과 아드님의 영광이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이며, 하나의 영광이다. 이 영광이 같으므로 본질도 하나라는 말이다. 아드님이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있듯이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 영광에 참여하기 전에 그분은 심판관으로서 심판과 엄격한 판결에 대해 말씀하셨다.
“여기에 서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28절) 우리 신앙인은 이제 선택이 남아있다.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 나 자신을 끊고, 버리고, 죽이는 삶을 통하여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리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죽음을 맛보셨고, 신앙인들에게도 이미 죽음의 맛을 보여주셨다. 말씀에 행동이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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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나훔’ 예언자의 이름의 의미는 ‘위로받은 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의 역할은 이름의 뜻과 달리 ‘위로를 주는 이’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가 맹위를 떨치던 어두운 시대에, 강자의 희생자가 되어 고통을 겪던 유다 백성에게 주님의 위로와 희망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볼 수 있듯 아시리아의 패망, 유다를 향한 위로, 그리고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의 멸망에 대한 묘사는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들에게는 구원을 베푸시지만, 불경한 이들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보복하시는 분”(나훔 1,2)이심을 강조하면서, 인류의 미래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손안에 절대적으로 달려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렇습니다. 화답송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처럼 하느님께서는 희생당하는 당신 백성을 대신하여 “적대자들에게 복수하고, 원수들에게 되갚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복음 환호송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복 선언에서 볼 수 있듯 ‘의로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를 주시는’(마태 5,10 참조) 위로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됨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당신에 대한 배척, 수난 그리고 죽음을 앞두시고 적대자들에 대한 보복은 하느님께 맡기시고,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예수님께서는,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는 이의 본보기가 되십니다.
따라서 불경한 자들에게는 보복을, 의로운 이들에게는 위로를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통하여 온전히 드러납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 할 선택이 우리에게 주어진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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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다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 생활”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린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전부 다 버린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버리지 않아도, 죽으면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욕심 부리고 집착하면서 움켜쥐고 있다가 마치 빼앗기는 것처럼 잃는 사람은 그 탐욕과 집착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기꺼이 버린 사람은 홀가분하게 그 나라로 들어갈 것입니다. 어차피 마지막에는 누구나 빈손이 된다는 점은 같은데, 그 빈손의 의미와 가치는 완전히 다르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얻는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는 뜻입니다. 그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의 시민이 되면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누구든지’라는 말은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입니다. 우리는 세속의 부귀영화를 원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현세에서의 무병장수를 원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 구원과 생명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메시아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유일한 메시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의 수많은 종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은, “예수님의 뒤만 따르는 일”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사고방식과 판단과 사상 등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을 방해한다면 모두 버려야 합니다. 글자 그대로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씀은, 원래는 죽음도 각오하라는 뜻인데,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들과 시련들을 기꺼이 참고 견디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이시니,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길에서 십자가를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기준으로만 보면, 신앙생활은 결코 쉽고 편한 생활이 아닙니다. 재미도 없고, 어렵기만 하고, 힘든 생활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기준으로 보면, 믿음, 희망, 사랑이 가득한 생활이고,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하는 생활이고, 행복하니까 하는 생활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이 말씀의 뜻은, “현세의 삶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만 추구하면서 현세의 삶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버리는 사람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예수님께 물었던 어떤 부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해서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마태 19,22) 그는 재물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슬펐던 것일까?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해서 슬펐던 것일까?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가 버린 것들을 ‘쓰레기’ 라고 표현했습니다.(필리 3,8) ‘슬퍼하며’ 떠나간 그 부자의 경우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많은 재물’도 쓰레기이고, 그 재물에 대한 애착심도 쓰레기입니다. (쓰레기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움켜쥐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로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들은, 그 나라의 기준으로는 전부 다 쓰레기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온 세상을 얻어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온 세상을 얻었다는 것은 결국 아무런 가치가 없는 쓰레기만 얻은 것과 같습니다. 요즘에는 쓰레기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창세기의 표현으로 바꾸면 ‘먼지’입니다.(창세 3,19) 세속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세속의 권력, 명예, 재물을 엄청나게 모아서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먼지’만 잔뜩 모아서 먼지 속에서 살다가 먼지처럼 사라지는 허망한 인생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행실대로’ 갚는다는 말씀은, 심판 때에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를 보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었어도 행실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았다면 구원받지 못합니다.(마태 7,21)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제대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자기 혼자서 주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의 행실은 나중의 심판에 그대로 연결됩니다. 따라서 어떤 심판을 받게 될 것인지는 지금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 탓을 할 수도 없고, 주님께 항의할 수도 없고, 환경이나 여건 때문에 그랬다고 핑계를 댈 수도 없습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2코린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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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후배 신부님의 은경축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처럼 교구 사제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9시간 30분을 차로 달려오신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저도 5시간 운전해서 갔습니다. 축하미사를 조촐하게 함께하였고, 신학교 교가를 불렀습니다. 비록 몸은 멀리 타국에 있지만 우리는 같은 못자리(신학교)에서 함께 지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거리가 멀다고 가지 않았을 텐데, 여기서는 거리가 멀어도 기꺼이 달려갔습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니 신학교 기숙사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신학생 때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저마다 자신만의 사제상을 만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군에 입대하면 주특기가 주어집니다. 운전, 헌병, 정보, 행정, 의무, 포병, 공병, 보병과 같은 주특기입니다. 같이 입대했지만 저마다의 소질과 부대의 필요에 의해서 주특기가 정해집니다. 신부님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본인의 필요에 의해서 자신만의 주특기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음악에 관심이 있는 신부님은 음향기기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걷기에 관심이 있는 신부님은 매일 3만보를 걸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함께 걷는 친구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습니다. 레고에 관심이 있는 신부님은 신기한 것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회전목마도, 에펠탑도, 쥐라기 공원도 만들었습니다. 하나하나 레고를 맞추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텐데 그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악기를 다루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시간을 내서 학교에 다니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텃밭을 가꾸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저도 하나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는 겁니다. 95년부터니까 어느덧 25년이 지났습니다. 이번 모임에도 새벽에 일어났고, 같이 일어난 신부님과 함께 산책을 했습니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사제들에게 가장 적합한 주특기는 무엇일까? 첫째는 잘 들어주는 것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전하는 것이 사제의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교우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기쁨은 함께 기뻐하고, 슬픔은 함께 슬퍼하고, 아픔은 함께 아파하는 것이 사제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겸손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시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잘 듣고, 겸손한 사제는 화려하지 않아도, 특별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잘 듣고, 겸손한 신자 역시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원하는 일만 할 수 없습니다. 때로 원하지 않았던 일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때,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어도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열쇠입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충실하게 지고 가야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주특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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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께서 나에게>
마태오 16,24-28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분께서 나에게>
나를 따라오고프면
나를 따라오렴
다만 끝까지
나와 함께하고프면
나와 함께하렴
다만 온전히
나를 닮고프면
나를 닮으렴
다만 완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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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왜 우리의 예수님은 이토록 초라한지>
+찬미예수님
신학생 시절, 성소에 대한 식별을 하면서 예수님께 가졌던 불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죄 없는 이들이 가난하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왜 고통 받아야만 하는가?”, “착하고 신실한 사람은 고통 받는 반면 왜 악하고 부정직한 사람들은 떵떵거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은 때로는 공정하게 보이지 않았고 정의롭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수반되는 질문은, “왜 우리의 예수님은 저토록 초라할까, 왜 멋있는 분이 아닐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바라보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참 연약해 보이고 초라해 보였습니다. 앙상한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속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은 사실 우리가 기대하는 화려하고 전능한 “신” 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 누가 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싶어 한다는 말입니까? 세속적인 성공, 물질적인 풍요, 끝없는 건강, 자녀의 좋은 학교 등을 위해서 흔히 우리는 기도를 하는데 사실 십자가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러한 것들과는 확실히 동떨어져 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설사 필요했다 하더라도 꼭 저렇게 돌아가셔야만 했을까?” “십자가 위에서 화려하게 승천하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후회하며 아무런 의심 없이 예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답은 쉽게 찾을 수 없었고 이 질문들은 점차 잊혀져 갔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사제가 되었고 유학을 나가 공부하던 중, 저희 아버지께서는 인도양 바다 한 가운데에서 업무 중에 순직하셨습니다. 사실 군대에 있을 때도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셨던 경험이 있기에 항상 건강이 걱정이었는데 기적적으로 회복되고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이번에는 뇌출혈로 쓰러지신 것입니다.
언제나 외국에서 일하시면서도 신실하셨던 아버지, 가족들에게 사랑이 넘치셨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쓰러지신 뒤에 시간이 있었음에도 헬기가 도착할 수 없는 거리여서 서서히 사그러진 생명. 이 모든 것이 저희 가족들에게는 크나큰 고통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선종 이후 저의 기도와 묵상의 테마는 바로 이 ‘고통’이었습니다.
“인간은 왜 죽어야만 하는가?”,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에 맞서야만 하는데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고통을 주실 거라면 인간을 왜 창조하셨는가?”라는 질문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저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신학생 시절의, ‘초라하고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질문’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얻게 된 답은, 만약 우리의 예수님의 모습이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다면, 제가 기대했던 화려하고 전능한 모습이었다면 고통 중에 있는 우리들은 결코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고통스러운 죽음을 서서히 맞이하신 예수님의 깊은 상처, 쉼 없이 쏟아졌을 예수님의 붉은 피. 이 모든 것은 바로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육신의 모든 고통을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제 더 이상 십자가의 예수님의 모습은 초라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곧 비록 저 처참한 죽음이 있을지라도 사흘 후 일어나게 될 영광스러운 모습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갖게 해 주는 것이었고, “내가 고통을 당해봐서 안 단다, 많이 힘들지? 힘을 내렴.” 이라고 속삭이시며 우리의 어깨를 토닥여주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위로의 결정체였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얼핏 보면 우리에게 고통스럽고 힘든 삶을 종용하는 듯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십자가의 참 의미를 상기해보면 이제 십자가는 더 이상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사랑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현세의 물질적 풍요와 명예를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것은 그저 도구에 불과한 세속적 가치일 뿐입니다. 반면 주님은 인간의 고통을 위로하시고 함께 하시는 분, 그 고통의 깊이를 이해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안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미사 중에 십자가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함께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나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려하기보다는 그저 피하고 싶은 장애물이라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다시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과 더불어 고통을 함께 하시는 주님, 우리의 손을 꼭 붙잡아 주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우리 역시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걸으며 타인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묵묵히 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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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성시간 강론)
<예수님의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군대에서 제대를 할 무렵,
외국에 계신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태평양 한가운데서 심장을 움켜쥐고 쓰러지셨고 급하게 후송되어 의식이 없으셨습니다. 그와 함께 들은 소식은 아버지가 죽음을 앞두고 있으며 설사 생명을 건지더라도 반신불수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가족 혹은 가까운 이웃의 죽음을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던 저에게 죽음이란 그만큼 생각해본 적도 없는 어색한 사건이었습니다. 군대 막사 뒤에서 눈물을 흘리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간곡히 기도하는 일뿐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계실 어머니의 손이라도 잡아드리고 싶었지만 군대에 있었으므로 그럴 수도 없었고 어떻게든 응급실에 가서 직접 수술의 경과를 듣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계신 병원은 호주의 응급실이었습니다.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어떻게 해서든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앞으로는 정말 열심히 신학생으로써 살아가겠다고 기도뿐이었습니다. 그때 쏟아지던 눈보라와 매서운 바람,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원망과 제 자신의 무기력함으로 오는 고통을 저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이처럼 가족이 고통 중에 있을 때, 특별히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우리 인간은 어마어마한 상실감과 고통을 느낍니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원망스럽기도 하고 대신 고통 받을 수 없음에 안타까워합니다.
오늘 성시간의 복음에서 우리는 성모님께 대한 시메온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시메온은 요셉과 마리아를 축복하고 나서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 예언은 바로 예수님의 전 생애에 있을 사람들의 존경과 비난을 동시에 예언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십자가 위에서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목격하게 될 마리아의 고통을 예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다룬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면 예수님의 수난을 직접 바라보는 마리아의 끊임없는 신음과 눈물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로부터 채찍질을 받고 가래침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동안 그를 바라보는 마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꺽꺽 대는 신음 소리를 냅니다. 그 와중에 오버랩되는 장면이 바로 예수님의 어린 시절입니다. 그 장면에는 마리아를 보고 반갑게 달려오는 어린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어머니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달려오던 아기 예수님은 그만 중심을 잃고 길의 한 가운데에 넘어집니다. 이를 보고 마리아는 깜짝 놀라 걱정스런 얼굴로 아기 예수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고는 괜찮다, 괜찮다 달래줍니다.
이 장면은 곧 아들 예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사랑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그를 키워낸 인간적인 어머니의 마음은 어느 부모의 마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스럽고 애틋한 아들이, 사람들의 비난과 폭행 속에 비참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갑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의 숨이 서서히 끊어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러한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하는 자신의 입장이 말할 수 없이 비참했을 것입니다. 이 고통이 바로 오늘 시메온이 이야기하는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한 번도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그런 시련을 주시는 하느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게 될 거대한 구원의 업적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참아내야 할 고통이었습니다. 한편 오늘 말씀의 중심에는 한평생 구세주 그리스도를 기다려온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으며 매일 매일을 의롭고 독실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그는 사랑스런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으며 “이제야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며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 시메온의 찬가는 마리아의 고통을 더없이 찬란하게 빛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마리아가 겪게 될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크겠지만 이를 통해 이뤄질 업적은 모든 민족들에게 있어서 계시의 빛이요 영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은 마리아의 인내와 시메온의 찬양을 통해, 우리는 오늘 성체를 앞에 모신 상태로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많은 어려움들과 고통들을 상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체험하고 싶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과 대화와 친분을 나누며 종국에는 하늘나라에 불리움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 각자는, ‘내가 지금 받고 있는 세상의 어려움을 기꺼이 감내하고 있는지, 그 고통 중에 이를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내게 주어진 십자가가 말할 수 없이 무겁게 느껴질 때 하느님의 모든 의중을 파악하고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적으로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끝까지 하느님을 따르며 그분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것, 묵묵히 그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은 바로 우리가 신앙인으로써 가져야할 올바른 자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8월 성시간 강론을 마무리 지으며 시 한편을 읽어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분의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은 적다.
그분의 위안을 구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분의 시련을 살피는 사람은 적다.
그분과 잔칫상을 나누려는 사람은 많으나, 그분의 재에 참여하는 사람은 적다.
누구나 다 예수님과 함께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그분을 위하여 어떠한 고통이라도 겪겠다는 사람은 적다.
많은 사람들이 빵을 쪼갤 때까지는 예수님을 따르지만
예수님의 수난의 잔을 마시는 데까지 가는 사람은 적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곤란을 당하지 않는 때만 사랑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기리고 그분께 기도하지만 자기가 위로를 받을 때만 그렇게 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숨기시고 잠깐 그들을 떠나실 것 같으면 금세 원망하기도 하고, 낙담하기도 한다.
오늘 성체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신앙이 무엇인지, 그 뜻이 무엇인지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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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흥주 베드로 몬시뇰]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기본적인 삶의 자세를 분명하게 정해주시는 말씀이다.
성덕은 다른 데 있지 않고 바로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버려야 하고,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버리지 못하거나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외면하고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성덕의 길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싶다면 결코 십자가 없는 그분을 찾지 마시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뜻보다는 먼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자세를 뜻한다. 곧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먼저 찾고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이웃 형제에 대한 실제적인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결국 모든 삶의 원칙과 중심을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두어야 하며, 나 자신보다는 하느님과 이웃 형제에 대한 사랑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다른 이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리고 비우는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십자가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희생이며 사랑의 기본 원리다. 자신을 버리고 비우는 십자가 없이는 자신은 물론 가정과 이웃 형제가 참 기쁨과 행복을 체험할 수 없다. 이렇게 하느님과 이웃 형제를 위해 자신을 비우는 십자가는 자신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 형제 모두를 살리는 길이 된다. 자신을 버릴 때 모두가 함께 사는 구원이 시작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려는 열망에서 기꺼이 자기를 버리고 극기와 희생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 나섰던, 그리고 계속적인 자아 포기의 극기와 작은 희생 중에서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기쁘고 명랑하게 생활했던 아기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을 찾지 않을 때부터 제가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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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내 뒤를 따르려면>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새로운 제안을 하신다. 이것은 하나의 제안이지 강요가 아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는 사람에게는" 제안이 아니라 강요이고 반드시 실천해야할 의무이다.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방법이고 길이다.
즉 "나를 따라야 한다."는 의무이지 "나를 따라도 좋다. 또는 나를 따르면 좋겠다."는 권고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의무요,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내 뒤를 따르려는 사람"이란 새로운 출애급을 하려는 사람이다. 즉 자기를 따르는 삶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제시하신 새로운 길을 걸으려는 사람이다. 나 중심으로 하는 삶에서 "예수"라는 분을 중심으로 하고 나는 다만 그분을 따라가는 삶으로 바꾸겠다는 사람이다.
나를 추종하는 삶에서 예수를 추종하는 삶으로, 나를 섬기는 삶에서 예수님을 섬기는 삶으로 살으려는 사람이다.
내 욕망을 채우는 삶에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선적으로 하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겠다는 사람이다.
이제부터 내 인생에서 예수님을 마치 "낮에는 어김없이 구름기둥으로 앞길을 인도하여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 길을 비추어 주시는 분"(느헤 9, 19)으로 섬기며 살겠다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 뒤를 따르는 사람"의 삶이란 새로운 출애급이다. 무슨 출애급인가? "나"에서 "예수님"이라는 낮선 곳으로의 출애급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사용했던 모든 생활 필수품들, 집, 일터를 버리고, 모세라는 새로운 지도자를 따라 하느님이 인도하시는 가나안 땅을 향해 갔듯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신앙인들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새로운 모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출애급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출애급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한 조건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이다.
그럼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급급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찾아다녔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이의 것을 앗아왔다. 그래서 다른 이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언제나 어디에서나 자신을 내세워야 했고,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그렇게 하는 모든 행동들은 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우리 모두는 너 나 할 것 없이 다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다. 이런 모습은 본래의 나의 모습이 아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나의 욕망이 만들어낸 거짓 자아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 동안 참 자아로 살지 않고 거짓 자아로 살아왔다. 그래서 점점 더 하느님으로부터 또 참된 자기 모습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이렇게 하느님과 참된 자아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는 욕망 즉 거짓 자아를 버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따르는 것이요, 거짓 자아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 동안 거짓자아인 자기 욕망을 좇아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계속해서 거짓 자아를 만들어 가는 나의 욕망은 이미 자기 자신과 동일시 되어버렸다. 즉 자기 신체의 일부분 또는 자기 신체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즉 자기 욕망을 실현시켜나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요, 삶의 의미가 되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일종의 죽음이다.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과 같이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무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은 매순간 자기의 거짓 욕망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취하라는 말이다.
이미 자기 자신이 노예가 되어 있는 거짓 욕망을 버린다는 것 자체는 이미 하나의 커다란 십자가이다.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는 반드시 지고 가야할 십자가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나의 십자가를 대신 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를 자기 혼자 지고 가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를 탈출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까지 홀로 가야했다면 아마 그들은 거의 대부분 에집트로 돌아갔던지 아니면 광야에서 배고파 죽고 목말라 죽고 외롭고 고통스러워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훼 하느님은 그들의 십자가를 그들에게 모두 지우지 않으시고 그들의 인도자 모세를 앞 장 서서 그들을 인도하게 하시고 "낮에는 어김없이 구름기둥으로 앞 길을 인도하여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 길을 비추어 주셨다."(느헤 9,19)
이처럼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셨지만 그 십자가를 그들에게만 지게하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동반해주셨고 거들어 주셨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다.
나의 십자가이지만 나 혼자 그 십자가를 지고 가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약하다는 것을 예수님도 잘 아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라."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동반해주시고 그들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주님이 앞장 서 서 나를 인도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것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항상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점 점 더 이기주의가 된다. 점점 더 이기주의가 된다는 것은 점점 더 욕망이 커지고 따라서 거짓자아가 더 크게 자리잡아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자기 자신 안에 갇혀버리고 자기 목숨을 잃어버릴 것이다.
반면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거짓 자아를 버리고 반대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완전한 사랑의 행위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이요, 영원히 사는 길이다.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요한 13, 35. 15, 17)라고 말씀하신 대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랑의 삶을 사는 이는 이미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이다.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생명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따라서 선물을 선물로 남에게 베푸는 사람만이 또한 더 많은 선물을 받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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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서현승 베드로 신부님]
<사제직과 십자가>
적어도 신학생 시절엔 십자가를 지고 열심히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노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름대로 포기한 것도 많았고, 그래서 하느님께 변명할 말도 많았습니다.
몇 년 전, 어느 선배 신부님과 대화를 하다가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속으로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랬습니다.
“나는 성인이 되고 싶습니다.”
분명 신학생 시절엔 나도 그랬었는데, 왜 그 말이 그렇게도 낯설게 들렸을까요? 시간이 지나고, 그동안의 노력들이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면서부터 서서히 포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선배 신부님의 그 말씀을 듣던 무렵엔 성인이 되는 일은 아예 꿈도 꾸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그분의 순수한 열정에 대한 부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사제직을 지망한 이유가 바로 이 일을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신자들이 그런 노력을 포기하고 있을 때, 체념하지 않도록 용기를 불어 넣어주어야 할 사람이 사제가 아니던가?
그렇습니다. 나약한 자신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내 삶이 아무리 부끄러워도 신자들이 거룩함을 향해 정진하도록 권고하는 일이야말로, 사제로서 오늘 내가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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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는 야심 찬 목표를 자주 세웁니다. 특히 새해가 되면 거창한 목표들이 줄을 잇지 않습니까? 물론 작심삼일로 싱겁게 끝나는 때도 있고, 그 이상을 채워서 하나의 습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목표를 채우지 못하고 그냥 포기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요? 실패를 더 많이 경험하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목표를 세웁니다. 이렇게 실패를 반복하면서 계획을 세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일도 모레도 내 삶이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 모레라는 미래의 삶이 없다면 그 어떤 사람도 계획을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계획과 의지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강력한 요소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은 모든 계획을 수포로 만들면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이 죽음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부활을 통해 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나의 나약함과 무력함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힘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 목숨을 잃는 것, 세상을 잃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대해 훈계를 하신 다음, 제자들 가운데 더러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의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베드로의 반박 이후 곧바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장차 고난을 겪으시리라는 말씀을 듣고는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반박하지요. 곧바로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원칙만을 내세우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춰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반대자, 사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는 삶을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고난과 죽음까지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는 삶,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삶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삶이며,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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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이 너무 많은 세상에 사는 우리>
탈무드에 나오는 한 가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상점에서 외투 한 벌을 샀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입어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주머니 안에 값비싼 보석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순간, 이 사람의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내가 산 옷에 들어 있는 보석이니 가져도 되지.’라는 마음과 ‘내 물건이 아니니 빨리 주인을 찾아 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서로 치열하게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마음의 갈등을 안고서 현자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산 것은 외투이지, 보석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이 산 것은 외투일 뿐 보석이 아닌데도, 자기 손에 들어온 보석에 대한 유혹을 이기기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마음이 이렇지 않은가요? 그래서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집중을 통해서 세상 안이 주님의 뜻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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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구원의 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화두같은 말마디는 누구나의 관심 주제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바로 좋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제 졸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벌써 출간된지 13년이 지났습니다. 우선 제목을 보고 읽는 책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바로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잘 살 때 참으로 잘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바로 오늘 복음의 소제목이 답을 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막연한 질문이 더 구체화됩니다. 답은 간단명료합니다. 복음 말씀대로 예수님을 따라 살면 됩니다. 참으로 생명에 이르는 진리의 길, 구원의 길은 십자가의 길 하나뿐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은 결코 ‘나를 사랑하라’, ‘나를 믿으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단 하나 ‘나를 따라라’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가 복음(9,23) 말씀대로 ‘날마다’를 집어 넣었습니다. 몇날이 아니라 평생 죽을 때까지 날마다 십자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저 또한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십자가의 길을 가듯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강론을 씁니다. ‘혼자alone’가 아닌 ‘더불어together’ 걷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함께 주님을 따르지만 양상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환경도, 자기 버림도, 십자가도 다 다릅니다. 똑같은 인생, 똑같은 십자가는 없습니다.
그러니 각자 삶의 우열이나 호오의 비교는 부질없는 일입니다. 사람마다 각자 고유의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는 다 다릅니다. 도중에 포기하지 말고, 그저 묵묵히, 충실히, 항구히, 끝까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제 페이스대로 평생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이런 십자가의 여정은 그대로 비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회개의 여정은 구체적으로 이렇게 십자가의 여정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라 이 십자가의 여정에 항구할 때 날로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여정은 바로 예닮의 여정, 구원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날로 쉬워져가는, 가벼워져가는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날로 힘들어지고 무거워지는 십자가의 길, 바로 이것이 영적전쟁의 현실입니다. 심신心身의 노쇠老衰와 더불어 병마病魔와의 싸움 때문입니다. 하여 하루하루 깨어 겸손히 기도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해 가는 것이 얼마나 본질적이고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삶은 선물이냐 짐이냐? 참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십자가의 삶은 선물이 아니라 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여 고백성사 보속 처방전 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여러분 대신에 반드시 형제자매들의 세례명을 써 줍니다. 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 갈 때 십자가의 짐은 선물로 변합니다. 참으로 더욱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자발적 기쁨으로 예수님을 따라 살게 됩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방향을 잃어 방황이요 표류요 ‘일상의 늪’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랑은 앞서 가시는 예수님 ‘방향’이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헛것들인 우상이나 이념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각자 제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공부, 하느님 공부는 우리의 평생공부에 속합니다.
참으로 이렇게 한결같이 '넘어지면 다시 곧장 일어나' 주님을 따를 때 영적탄력도 유지되며 죄악의 유혹이나 헛된 환상에 빠지지 않고 내적평화와 안정 중에 살 수 있습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도 십자가의 여정뿐입니다. 참 기쁨과 행복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오늘 나훔서도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나훔이란 이름의 어원도 반갑고 고맙습니다.
나훔은 ‘위로받은 이’를 뜻합니다. 위로를 받았기에 다른 이들도 위로할 수 있는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훔과 어근이 같은 유명한 이름으로는 ‘주님께서 위로하신다’를 뜻하는 느헤미야가 있습니다. 참으로 나훔은 예수님처럼 어두운 시대에 희망의 힘으로 지탱해 나아가게 하는 위로와 위안을 자기 백성에게 가져다 준 예언자였습니다. 오늘 나훔서의 서두 말씀은 그대로 이 미사중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시러 오시는 주님을 상징합니다.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 유다야, 축일을 지내고 서원을 지켜라. 불한당이 다시는 너를 넘나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완전히 망하였다.”(나훔2,1)
이어 마지막까지는 죄악이 만연했던 니네베의 멸망에 관한 처절한 내용입니다. 이 또한 역설적으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면서 십자가의 길에 항구하고 충실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십자가의 여정은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함께 하는 도반들과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주님은 힘겹게 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웃 형제들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위로하면서 함께 가도록 하십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도 있듯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갈 때 끝까지 완주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등수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끝까지 완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주십니다.
사실 고백성사를 주며 상담을 하다보면 형제자매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조언이나 충고가 아닌 귀기울여 잘 듣는 것과 격려와 위로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께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기에 이웃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다음 바오로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시길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2코린1,3-4)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어 함께 하는 도반들과 위로와 격려를 나누며 우리 모두 ‘더불어together’ 십자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 고백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을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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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를 사랑하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성당에서 살다시피 한 신자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고통이 없을까요? 그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뜻과 정의와 양심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잘못보다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고통이나 결함이 없는 행복만이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 안에서 버림받은 예수님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수난과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감당하시고 세 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내가 걷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먼저 걸어가셨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인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기의 견해, 주장, 생각, 바람들을 접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내 생각이나 바람에 하느님의 말씀을 꿰어 맞추고 합리화 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다는 것, 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분에게 나를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더 큰 것을 위해 보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은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이 더욱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시련과 고통, 고달픔을 감당해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부활이라는 참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으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미 오래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우리의 모범으로 기억되고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앞으로도 기억될 것이며 믿는 이들의 가슴에 살아있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 안에 예수님의 진리와 생명을 품고 살면 죽어도 살아있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 날에 그 십자가가 나를 져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입니다.”(마태16,27)
“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내가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성녀 빌리아르)
“당신이 제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코린1,22)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편안함과 안전함, 편리함의 주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고 소파를 신발로 바꾸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친구들이여, 예수님은 모험의 주님이십니다. 항상 무엇인가 ‘넘어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편안함과 안전함, 편리함의 주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고 소파를 신발로 바꾸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 신발은 여러분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고 꿈꾸지 않았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그 길들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줄 수 있고 기쁨을 맛보게 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 기쁨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자비의 모든 행동과 태도를 남기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우리 하느님께 ‘미쳐버린’ 사랑을 따르는 것이고 그 길은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아픈, 결국 잘 풀리지 않은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피난민들, 이민자들, 홀로된 이웃을 만나도록 가르칩니다.
그리고 우리 하느님의 길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활동적인 정치인들, 타인을 생각하는 사람들, 사회를 좋게 인도하는 정치인들이 되도록 초대합니다.
보다 더 경제적으로 연대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모든 상황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인생을 하느님과 이웃에게 바치는 선물이 되도록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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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따름과 그 보상에 대해 들려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 "자신"과 "십자가"는 양립 불가능한 가치입니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제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더 편하고 더 올라가고 더 가지는 쪽에 매력을 느끼지요. 당장의 찬사와 욕구 충족과 쾌락을 좇으며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윗자리, 윗자리처럼 보이는 허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십자가는 그 반대입니다. 더 내려가고 더 비우고 더 낮아지길 바랍니다. 저 아래 맨끝에 계신 주님 곁으로 가려고, 그분을 닮으려고 애쓰지요. 그러니 모욕과 업신여김과 무시를 감수하며 자신보다 타인을, 인류와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염려합니다.
자신을 굳게 고수한 채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인생살이에서 마냥 십자가를 피할 수도 없으니 자기가 십자가를 지는 게 아니라 십자가가 자신을 지는 형국으로 질질 끌려가기도 하고, 예수님께 자기 십자가까지 덤으로 얹어버리기도 하고, 아니면 주변의 애먼 이들에게 제 십자가를 넘겨 고통을 가중시키기도 하지요.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결국 모든 사람은 십자가를 진 만큼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건 타인의 십자가건 제 안위와 이익과 생명보다 더 귀하게 받아 안은 그것 덕분에 하느님과 영원히 누릴 생명, 즉 진짜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진 기쁜 소식과, "피의 성읍" 니네베에게 내린 가혹한 선고가 울려퍼집니다.
"니네베가 망하였다! 누가 그를 가엾이 여기겠느냐?"(나홈 3,7)
니네베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의 수도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과 원수지간이지요. 주님께서는 당신께 불충한 이스라엘을 아시리아를 통해 벌주시지만, 제 분에 겨워 살육과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은 니네베를 결국 벌하십니다. 그들이 자신을 쓰신 주님의 뜻을 넘어 제 탐욕을 채우는데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화답송)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의 생사여탈을 주관하는 분이십니다. 누구도 이 권한을 주인에게서 빼앗을 수 없지요. 그저 인간은 흥망성쇠와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파도 위에서, 그분의 공정과 정의, 진실과 자비에 의탁해, 주어진 십자가를 성심껏 지고 균형 잡으며 나아갈 뿐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기애로 똘똘 뭉친 자아에서 자신을 떼어내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너끈히 질 수 있다면 십자가가 아니니, 마냥 쉬운 길이 아님은 분명하지요. 하지만 가볼만한 길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이고 우리와 함께 걸으실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길의 끝에는 그분과 누리는 영원한 생명, 진짜 목숨이 보장되어 있으니 힘내어 나아갈 가치가 충분하지요.
사랑하는 벗님! 각자 제 십자가로 힘겨워하면서도 묵묵히 인내롭게 걷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하늘 나라가 여러분의 것"(복음 환호송 참조)이라고 주님께서 약속하셨으니 기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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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자신만의 문제라고 착각하지 말 것
보통의 개인은 (사실)자신은 부족한 존재라 여기며 내면의 가장 밑바닥에 열등감을 숨겨놓는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것은 무엇일까? 한 톨의 결핍도 없는 상태가 정상이라면 과연 결핍 없는 삶은 존재하는가?
프로이트가 규정한 정상의 기준이 약간의 히스테리, 약간의 결핌증, 약간의 강박증이듯 정상이란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라 약간의 상처, 약간의 결핍, 약간의 부족함을 의미할 테다. 삶에는 여러 형태가 있으며 우리는 각자 모습으로 살아가는 소수의 존재들일 뿐.
♣(사실) 당신이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랐건 (사실) 당신이 어떤 문제와 결핍을 가졌건 그 무엇이건, 다 정상이다. 사람들은 불행을 꽁꽁 숨겨두기에 모를 뿐 세상에 보편적이지 않은 불행은 없다.
-김수현,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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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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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의 길을 함께 가려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런데 그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라는 말 속에는 ‘원하기면 하면 누구나’ 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가 이방인이든 죄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병자든,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려면” 이라는 말 속에 있는 ‘누군가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그의 제자 됨을 말해줍니다. 앞서 가는 자가 아니라, 뒤따라가는 자가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을 따라 당신이 걸어야 하는 수난의 길을 따를 자를 모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합니다.
오늘은 강론을 대신해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에 따른 기도를 드려봅니다.
주님!
제게는 오늘도 걸어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당신의 제자가 되는 세 가지 길입니다. 곧 그 길은 제 자신을 버려야만 갈 수 있는 길이요, 제 십자가를 지고서야만 갈 수 있는 길이요, 스승을 따라가야만 갈 수 있고 형제들과 함께 가야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제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단지 제 욕심을 비우거나 제 뜻을 버리거나 제 자신을 포기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제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신뢰를 두는 일이요, 제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을 믿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 자신을 당신께 바칩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싶고, 사랑하니까요.
또,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원하지 않는 고통을 지거나 범한 죄를 지거나 저 자신을 지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품듯 죄와 허약함을 품는 것만도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당신께 대한 희망을 지는 일일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희망 말입니다. 저를 짊어지신 당신을 희망하는 일, 그것 말입니다. 바로 당신이 저를 희망하니까요. 저는 당신의 소중한 자녀이니까요.
또한, ‘스승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당신 없이는 갈 수 없는 길, 사랑이 아니면 갈 수가 없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당신과 함께가 아니라면, 아예 가지 못할 길이요, 오로지 당신의 사랑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제 몸에 당신의 생명이 살아나게 하는 길, 그것은 애시 당초 당신으로 하여 가는 길이니까요.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이니까요.
주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소서! 고통을 피하거나 회피 하지도 말게 하소서!
제거하거나 없애려 하지도 말게 하소서! 해결하거나 해소하려 하지도 말게 하소서!
극복하고 견뎌 내거나 참아내려 하지도 말게 하소서!
초월하고 뛰어넘으려 하지도 말게 하소서!
적당히 타협하고 무관심하지도 말게 하소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하지도 말게 하소서!
당신께서 하신 것처럼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듯이 가슴에 끌어안게 하소서!
사랑으로 끌어안게 하소서! 그 속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은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데에 있으니까요.
당신이 그것을 원하시니까요.
주님! 이제 감히 고백합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저도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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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마태 16,24)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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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N1p-_9wgVA&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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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 26)
목숨으로
시작되는
생명의
십자가입니다.
목숨 속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랑하기위한
십자가이며
다시 태어나야 할
목숨입니다.
소유할 수 없는
목숨이며
대신 지고
갈 수 없는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목숨과
십자가를
아우를 수
있는 그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갈 순
없습니다.
사람이 되어
가게 하는
십자가이며
목숨입니다.
목숨에 던져진
대답은
십자가입니다.
목숨을
깨닫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목숨임을 알기에
하느님을 향합니다.
목숨은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께
복종하게 되며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게하는
목숨이며
십자가입니다.
목숨을 살리는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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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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