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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과 결단
마태복음 6:22~24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9월의 첫째 주일입니다. 그동안 입추, 처서 절기를 보내며 가을 기분을 내기도 했습니다만 이제는 진짜 가을입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고, 또 단풍이 물드는 아름다운 계절이기도 하지만 사색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뭔가 뿌린 것을 거둔다는 것도 그렇고 또 아름다운 단풍도 사실은 곧 잎의 생명이 다하고 떨어진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니 이런저런 상념이 많아지는 때입니다. 9월을 맞이하면서 안도현 시인의 「구월이 오면」이라는 시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그 시를 통해 구월이 오면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느냐며 묻습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느라 계절이 바뀐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여유를 가지고, 계절을 즐기며, 계절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계속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안도현, 「구월이 오면」 중 일부분)
우리에게 생각하라고 하지요?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강물이 그냥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닿는 곳마다 숨결을 나누어 주고, 들꽃이 피어나게 하여 가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이지요?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도 강물처럼, 우리의 손길이 닿고 발길이 닿고, 눈길이 닿는 곳마다 생명의 숨결을 나누어주고,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게 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시작될 이 가을에, 우리 모두 이러한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려움이나 거짓, 사심이나 거리낌이 없을 때 우리는 편안하게 상대방의 눈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관계에 이상이 생길 때마다 우리 눈은 살짝 흔들립니다. 핏발 선 눈, 섬뜩한 눈, 이글거리는 눈, 흐릿한 눈, 초점을 잃은 눈과 마주하는 일은 늘 고통입니다. 반면 넉넉하지만 깊고, 깊지만 따뜻하고, 따뜻하지만 진실한 눈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맑아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표현입니다. 그리스어에서는 몸을 가리키는 말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사륵스’라고 표현하는, 문자 그대로의 육체 곧 살덩어리를 가리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소마’라는 말인데 이것은 유한한 인간의 총체적인 존재를 일컫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몸’이라고 할 때는 일반적으로 후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눈이 온전해야만 삶이 총체적으로 온전해진다’라는 말이겠습니다. 그것은 뒤에 나오는 구절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외적 정보를 조합해 세상과 만나고 소통합니다. 오감 가운데서 어떤 감각에 유난히 예민한 이들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시각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보는 대로 판단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는 특히 시각이 독주하는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다’는 뜻의 영어 단어 ‘look’에다가 ‘주의’를 뜻하는 ‘ism’을 덧붙여 외모지상주의라는 뜻의 루키즘(lookism)이라는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외모가 경쟁력’이라느니 ‘예쁘면 다 용서된다’는 말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용합니다. 학생들에게 여름방학 동안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묻자 많은 학생들이 ‘외모 업그레이드’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 되었지요? 눈이 성치 않아 온몸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옛사람들은 밖으로 향한 눈보다는 안으로 열린 눈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자기를 살피고 또 살피는 성찰(省察)이야말로 사람됨의 기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찰은 물론 고독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홀로 있는 그 시간이야말로 자신을 살피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홀로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합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시간을 누군가와 접속하며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찰하지 못합니다. 또 거꾸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성찰이 너무 두렵기 때문에, 자신 속에 있는 부족함과 부끄러운 것들을 보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세상과 늘 접속하기를 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늘 누군가와 접속 중인 이들은 성찰적 존재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자기 속에 있는 약함, 상처, 그림자, 부끄러움 등을 살필 용기가 없는 사람일수록 남들에게 가혹한 법입니다. 그들은 늘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찾아내기 위해 두리번거립니다. 작은 티끌이라도 찾아내면 그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자기 허물을 가리려는 가련한 시도일 뿐입니다. 자기 성찰적인 사람일수록 남에게 너그럽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허물을 보고 있기에 사람들에게 너그럽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거울삼아 나 자신을 비추어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한다면 어떻게 타인에게 가혹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믿음 좋다고 하는 사람들, 정말 열심히 기도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타인에게 넉넉하지 못하고 가시처럼 뾰족해져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는 것이고 자기 신념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면 받아들이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비난합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신앙이라고 더구나 잘 믿는 신앙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찰적인 삶을 사는 이들은 남들의 허물을 찾고 또 지적하는 저열한 쾌락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당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려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이 쓰고 있던 위선의 탈을 벗기시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상처를 보이고,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사랑의 품으로 부둥켜안으셨습니다. 때로는 몰아치는 강풍으로, 때로는 따스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참삶의 길로 이끄셨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또 호명해주셨습니다. 시몬이라는 갈릴리의 어부에게서 베드로를 보시고,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던 우국지사 나다나엘에게서 간사한 것이 없는 참사람을 보셨습니다. 마치 미켈란젤로가 돌 속에 갇힌 형상을 해방시켰던 것처럼, 사람들 속에 있지만 아직 실체를 얻지 못한 참사람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꿈에 형태를 부여하셨습니다. 어부들과 세리, 그리고 열심당원 등 사회의 주변인들, 주류 세계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한 데 엮어 아롱진 새 세상의 꿈을 자아내셨습니다. 눈이 밝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철학자인 박이문 선생님은 철학을 ‘둥지’로 설명합니다. 새들은 마른 풀, 지푸라기, 작은 나뭇가지들을 부리로 물어다가 정교하게 엮어 포근한 보금자리를 만들고 그 속에 알을 낳은 후 생명을 품습니다. 철학도 이질적인 것들을 그러모아 튼실한 사유의 집을 짓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예수님이야말로 둥지를 짓는 새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출신 배경도 지향도 성격도 각각인 이들을 불러 모아 모두가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새로운 공동체를 빚으셨으니 말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예언자를 가리키는 말 가운데 하나는 ‘선견자’입니다. ‘먼저 선(先)’ 자가 있어서 앞날을 예견하는 것이 그들의 주특기처럼 생각되지만 그들은 제대로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굳이 다르게 표현하자면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과 역사를 보는 이들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신문이나 언론보도를 통해 정보를 얻지만, 세상이나 사건에 대한 판단은 성경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감찰하시는 분’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은 주인 사라에게 쫓겨나 광야를 배회하고 있던 하갈의 억울한 사정을 보셨고, 히브리인들이 겪고 있는 고난의 현실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심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 위해 개입하십니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프란치스코 교황이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 젊은이들에게 ‘교회 밖으로 나가 정의를 위한 투쟁을 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신앙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한 일을 보고 분노하는 것, 그것을 놓고 기도하는 것은 다 좋습니다. 그러나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히브리의 시인들은 "하나님, 일어나십시오. 주님의 소송을 이기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모욕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버려두지 마십시오."(시74:22) 하고 기도합니다.
제대로 보는 사람이라야 삶이 비루해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빛이 흐려져 제대로 보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에 휘둘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합니다.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가 되어 삽니다. 눈이 밝아야, 제대로 볼 줄 알아야 세상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본문은 눈이 성하지 않으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온몸이 어둡다는 말은 자기 인생의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산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철이 없다는 말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말하듯이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면 허물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고, 나아갈 때가 있으면 물러서야 할 때도 있습니다. 때를 알고 살면 무의미한 순간은 없습니다. 쓰라림이야 없을 수 없지만 그 때문에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어둠이 지극하면 빛이 다가옴을 알기 때문입니다.
눈과 몸의 상관관계를 가르치던 본문은 느닷없이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눈이 어두우면 참 주인을 모시기 어렵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섬김의 대상은 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재물입니다. ‘섬기다’로 번역된 헬라어 둘류오(δουλευω)는 봉사와 섬김을 뜻하는 디아코네오와는 조금 달리 쓰이는 단어입니다. 둘류오는 뭔가에 예속된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종이라는 뜻의 ‘둘로스(δουλος)가 나왔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똑같은 예속 상태가 하나는 자유를 주고 다른 하나는 부자유를 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과 접속되어 있을 때 우리는 깊은 자유와 안식과 기쁨을 누립니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하나님과의 접속이 단절된 데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물론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돈은 우리에게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닷물을 들이키면 목마름이 심해지듯 돈도 가지면 가질수록 배는 더욱 고파집니다. 그러니 돈에 집착하는 이들은 노예입니다. 집착은 내가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욕망과 집착의 뿌리는 결핍감입니다. 결핍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그것을 채우기 위해 이웃의 삶에 무관심해집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고독이 찾아옵니다. 고독하기 때문에 더욱 소유에 집착하게 됩니다. 악순환입니다.
지금 제 귀에는 여호수아의 외침이 우렁우렁하게 들려옵니다. 치열한 전투 끝에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해준 여호수아는 그들이 함께해 온 시간을 반추합니다. 삶의 고비마다 함께하시고, 그들이 일구지 않은 땅에 살게 하시고, 세우지 않은 성읍에서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면서 성실하고 진실하게 주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선택은 언제나 그들의 몫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말합니다.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수24:15)
신앙은 결단입니다. 결단은 버릴 것은 버리고, 붙들 것을 확고하게 붙드는 것입니다. 한번 정하면 굳건히 지키는 것입니다(主一無適).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재물을 섬길 것인가? 우리는 양자택일 앞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머리로는 뻔히 알겠는데 마음속에서는 다른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면 돈은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냐? 우리가 제대로 믿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가난해져야 한단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요점은 우선순위입니다. 까마귀가 날라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고 살았던 엘리야의 이야기는 먼 과거의 전설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가치가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사람들이 재물의 신인 맘몬에게 속절없이 끌려다니는 이유는 자기 내면이 헛헛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속이 든든한 사람은 어지간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저는 신앙인이란 ‘일상의 신비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일상 속에 깃든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영적 예민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꾸만 일상의 흐름을 끊고 멈춰 서야 합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짧은 시가 전 국민의 애송시가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단순하지만 울림이 큰 시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비로소 사물이나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대충, 흘낏 바라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두리번거리며 삽니다. 시간의 향기를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 일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숨결과 만나는 사람의 얼굴은 환하고 마음은 관대합니다. 말끝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을 달고 살면서도 얼굴빛이 어둡고 속 좁은 이들이 많습니다. 이제는 ‘언제나 어디서나 기독교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선생께 어느 기자가 지금도 열심히 연습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백건우 선생은 그렇다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연주자라면 당연히 연습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매일 꾸준히 5-6시간 연습합니다. 그 이유는 수준을 유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음악이 새로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대가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음악이 늘 새로워져야 하기 때문에 하루에 5-6시간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하루에 몇 시간이나 노력하고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눈은 어둡지 않습니까? 보아야 할 것은 보지 않고, 보지 않아도 괜찮은 것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우리 삶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을 버렸습니까? 버릴 것을 버려야 꼭 붙들어야 하는 것을 붙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 ㅁ두가 눈빛 맑은 자유인이 되어,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상기시키는 이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