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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신나라(왕망)의 관계
글의 순서
1. 고구려와 신나라(왕망)의 관계
2. 고구려와 신나라(왕망)의 관계 기록
1. 고구려와 신나라(왕망)의 관계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기사는 유리왕 33년(서기14년) 가을 8월에 고구려가 고구려현(현도군에 있었던 것)을
공격하여 차지했다는 기사이다.
고구려현은 이른바 현도군에 설치했다는 3현(고구려현, 상은대현, 서개마현)중의 하나인데 그 고구려현을
고구려가 공격하여 차지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를 살펴보는데 매우 중요하다.
조금 더 정확히 기사를 보면
『왕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군시켜[進兵]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한다.>을 공격해서
차지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다.
1) 여기서 나오는 오이와 마리는 동명성왕(이름: 추모)이 부여에서 나올때 데리고 나온 3명 중 두 사람이다.
(그 세 사람이란 오이, 마리, 협보이다.)
2) 그리고 군사 2만을 동원한 것을 보면 이때부터 고구려는 대규모로 병력을 동원할수 있었음을 알수 있다.
3) 또한 양맥(梁貊)이라는 곳이 고구려 서쪽에 있음을 알수 있는데 본래는 하나의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양맥(梁貊)이라는 곳이 중요한 것은 동천왕이 쳐들어오는 관구검을 맞아 싸운 곳이 바로 양맥(梁貊)의
골짜기이다.
4) 그 다음,「진군시켜」라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현(현도군에 속한 고구려현)은 양맥보다 더 서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와 고구려현은 서로 다른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고구려가 동쪽에 있었고,
그 서쪽에 양맥(梁貊)이 있었고, 다시 그 서쪽에 고구려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제일 중요한 기사가 바로 『한나라의 고구려 현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는 기사이다.
6) 그 다음 또 중요한 사항이 고구려와 고구려현이 일정기간 병존하였다는 사항이다.
7) 현도군에 대하여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 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한(漢)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B.C.109)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는데, 옥저성(沃沮城)으로 현도군(玄菟郡)을 삼았다.
뒤에 이(夷)· 맥(貊)의 침략을 받아 군(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니 지금의 이른바 현도(玄菟)의
고부(故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여기서도 보면 고구려의 서북쪽에 현도군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고구려의 서북쪽에 고구려현이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또한, 현도군을 옮길 때 고구려가 이미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현도군을 옮겨 설치한 때는 한서 지리지 현도군 조를 보면 주석으로 나와있는데 원봉 4년(서기전 107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서기전 107년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여기서도 고구려 역사가 서기전 35년에 시작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이 아니며 고구려 역사는 줄여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하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고구려현을 공격하여 차지한 시기이다.
고구려 역사가 삼국사기에 의해서 줄여졌다는 사실을 가장 과학적으로 설명한 분이 단재선생인데 그것은
본인이 정리한 글 「 http://blog.daum.net/cdh571/264」에 있다.
그 글중에 있는 단재선생께서 쓰신 ‘사론-史論(조선상고문화사, 2008년판 안에서 볼수 있음)’에
고구려 건국과 유리왕이 즉위한 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라인이 삭감한 연대를 약 120년으로 잡고 고구려와 중국의 연조를 대조하면 주몽의 고구려 건국 원년
갑신년은 한 문제 후원 7년(기원전 157년, 갑신)에 상당하며,
유리왕(제2대 왕) 원년 임인년은 한 무제 건원 2년(임인, 기원전 139년)에 상당하고,
대무신왕(제3대 왕) 원년 무인년은 한 무제 태초 2년(무인, 기원전 103년)에 상당하며,
모본왕(제5대 왕) 원년 무신년은 한 무제 본시 원년(기원전 73년, 무신)에 해당한다.』
이것을 근거로 고구려가 고구려현을 차지한 시기를 계산해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가 고구려현을 차지했다는 때가 유리왕 33년이고, 유리왕 원년이 서기전 139년이므로
고구려가 고구려현을 차지한 시기는 서기전 106년이다.
즉, 현도군을 옮겨 설치한지 1년 후의 일이다.
다시한번 현도군의 역사를 정리하면,
원봉 3년(서기전 108년)에 옥저성에 설치하였다가 원봉 4년(서기전 107년)에 이(夷)· 맥(貊: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고 원봉 5년(서기전 106년)에 현도군 안에 있는 고구려현을 고구려가
공격하여 차지한 것이다.
이 다음에 3대 대무신왕 11년(서기전 92년: 단재선생께서 정정한 년도에 근거함)에 한나라의 요동태수가
쳐들어 오는데 이는 고구려가 고구려 현을 차지했기 때문에 취한 한나라 요동태수의 반응으로 볼수 있다.
그 다음에 왕망이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려 했다는 이야기나 무슨 강제로 보냈다느니,
고구려 후(句麗侯) 추(騶)를 베었다 하는 이야기는 별로 신용이 없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유리왕 31년조에 실려 있는 이야기인데 유리왕은 그 후로부터도 6년을 더 오래 살았고
고구려왕 어느 누구도 중국 사람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 임금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구려니 뭐니하는 것도 말장난 붓장난인데 이런 것은 대대로 강한 상대에게 했던 말장난이다.
그 예로 흉노(흉칙한 노예), 몽고(무지몽매한 것들) 등등이 다 그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중국 한족들은 강한 상대에게 당하면 우선 말장난 붓 장난부터 한다.
고구려에게 병사를 부탁했으나 거절당하고 오히려 어처구니없는 부탁에 화가 나 요서 대윤 전담까지 죽이자
이런 말장난 붓 장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도 보이는 어처구니없고 황당하며 돼먹지 않은 생각 때문에 중국인(한족)은 끊임없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
2. 고구려와 신나라(왕망)의 관계 기록
< 삼국사기 고구려 제2대 유리명왕 본기 >
31 년 (AD 12) : 왕망이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호를 정벌하려
[번역문]
31년(서기 12) 한(漢)나라의 왕망(王莽)이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왕망이] 강제로 보내었더니 모두 새외(塞外)로 도망쳤다.
그래서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였으나 죽임을 당하자 [한나라] 주군(州郡)에서는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아뢰었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에 명해서 위안하여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부여의 무리 중에 반드시 따라 응하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흉노(匈奴)를 아직 누르지 못한 터에 부여와
예맥(獩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입니다.”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하여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서 수도로 보냈다.
<양한서(兩漢書)와 남북사(南北史)에서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베었다.』고 하였다.>
왕망이 기뻐하고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고쳐 부르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래서 [고구려는] 한나라 변경 지방을 더욱 심하게 침범하였다.
위 기록에 관하여
<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 >
왕망(王莽)의 초(初)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가 호(胡)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국경을 넘은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遼西)[군(郡)]의 대윤(大伊)[註032]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중국의] 주(州)·군(郡)·현(縣)이 그 책임을 [고(高)]구려후 추 (句麗侯 騊)에게 전가시키었다.
엄우(嚴尤)는,“맥인(貊人)이 법(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추(騊)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죄(罪)를 씌우게 되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왕망(王莽)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우(尤)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명하였다.
우(尤)는 [고(高)]구려후 추(句麗侯 騊)를 만나자고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天下)에 포고하여 고구려(高句麗)란 국호(國號)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이 때에 [고구려는] 후국(侯國)이 되었는데,...(하략)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
왕망(王莽)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 |
33년 (AD 14) : 무휼을 태자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번역문]
33년(서기14) 봄 정월에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가을 8월에 왕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군시켜[進兵]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한다.>을
공격해서 차지하였다.
위 기사에 관하여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우리측 사료인 구삼국사 또는 해동고기 등에서 가져온 내용이다. 따라서 중국 측 사료에는 위 내용이 없을 것이다. |
고구려와 선비(鮮卑)의 관계
글의 순서
1. 고구려와 선비(鮮卑)의 관계
2. 고구려와 선비(鮮卑)의 관계 기록
1. 고구려와 선비(鮮卑)의 관계
고구려는 일찍부터 선비(鮮卑)를 속국으로 삼았다.(유리왕 때)그리고 그 후 고구려는 종노릇을 하는 선비를
동원하여 전쟁에 나섰다.
선비는 원래 중국 종족이 아니다.
그러나 나중에 선비족은 전연을 세워 중원에 진출하고 후연이 또한번 중원을 확보했으며 북위를 세워 화북을
통일하고 서위 북주를 세워 또한번 화북을 통일하더니 수나라를 세워 드디어 중국을 통일한다.
그 뒤를이어 당나라를 세워 중국을 호령한다.
이로써 중국의 주인이 된 종족이다.
선비(鮮卑)의 정체는 정확하지 않다.
삼국지를 쓴 진수가 「옛날에 오환과 선비는 동호라고 불렀다.」라고 하는 바람에 사기 흉노 열전에 있는
동호가 묵둘 선우에게 패한 일을 연결시켰고 그래서 동호의 일종인 선비는 묵돌 선우에게 패하여 선비산으로
달아나 종족을 보전했다고 해서 선비족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는 정확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진수가 삼국지를 쓴 것은 265년~297년 사이이고 동호가 묵돌 선우에게서 패한 것은 서기전 210년 경이다.
사기집해의 주에 의하면 묵돌 선우가 즉위한 해가 서기전 210년 이다.
즉, 진수가 약 500년 전의 일을 어떻게 알고 오환과 선비가 동호라고 단정했는지 알수 없고 동호가 오환 선비
인지 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진수는 그가 살기 전 부터 오환 선비가 흉노의 동쪽에 살았기 때문에 동호라고 그냥 부른 것 으로 보인다.
그러나 호(胡)란 사마천이 쓴 사기에 많이 등장하는 명칭인데 보통 흉노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동호(東胡)란 흉노의 동쪽에 거주하는 종족을 가리키는 말로써 한나라 초기 흉노의 동쪽에 있었던
종족은 고조선이기 때문에 단재선생께서는 동호를 고조선이라고 하셨다.
결국 묵돌 선우에게 패한 동호가 오환 선비라는 증거는 없다.
즉 오환 선비가 언제부터 흉노의 동쪽에 살았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선비족은 하나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여러 부족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모용부, 탁발부, 우문부, 걸복부, 독발부. 단부 등이다.
모용부는 전연 후연 남연 북연을 세웠고, 탁발부는 북위, 우문부는 서위 북주, 걸복부는 서진, 독발부는
남량을 세웠다.
이중에서 고구려에게 속국이 된 부족은 모용부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선비 모용부는 활동을 시작한 기록이 238년 6월부터 나오는데 그때는 산상왕이 내분을 일으켜
받아들였던 호(胡)가 고구려를 배반하고 떠났다는 209년 10월 경으로부터 불과 30년이 지난 시기이기 때문
이며, 처음 정착한 지역도 고구려와 지역적으로 제일 가까운 요서이기 때문이고, 가장 어려웠을 때인 북연때를
보면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결국 다시 돌아온 곳도 바로 고구려이기 때문이다
2. 고구려와 선비족의 관계 기록
< 삼국사기 고구려 제2대 유리명왕 본기 >
11년(서기전 9) 여름 4월에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선비(鮮卑)는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가 된다.
만약 이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후한 상을 줄 것이다.”
부분노(扶芬奴)가 나와서 아뢰었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굳은 나라이고 사람들이 용감하나 어리석으므로,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왕은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하였다. “사람을 시켜 배반한 것처럼 해서 저들에게 들어가 거짓으로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고 겁이 많아서 움직이기 어렵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필시 우리를 업신여기고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그 틈이 생기는 것을 기다렸다가 정예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가서 수풀에서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왕께서 약한 군사를 시켜 그 성 남쪽으로 나가게 하면 그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때] 신이 정예 군사로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친히 용맹스런 기병을 거느리고 협공을 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왕은 그 말에 따랐다. 선비(鮮卑)가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내어 뒤쫓았다.
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왔다.
부분노는 관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 매우 많은 [적을] 목베어 죽였다.
왕은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자 계책이 다하고 힘이 꺾였으므로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食邑)을 상으로 주었으나, [부분노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왕의 덕입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고 하고는 결국 받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위 기록에 관하여
내용으로 보아 우리측 사료인 구삼국사 또는 해동고기 등에서 가져온 내용이므로 중국측 사료에는 그 내용이 없었을 것이다. |
< 삼국사기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 본기 >
69년(121) 여름 4월에 왕은 선비 8천 명과 함께 가서 요대현(遼隊縣)을 쳤다.
위 기록에 관하여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 건광(建光) 원년(元年: 121년) 여름에 (태조대왕이) 다시 요동(遼東)의 선비(鮮卑)[족(族)] 8천여명과 함께 요대(遼隊)[현(縣)]을 침공하여 관리와 민간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
고구려와 전한(前漢)과의 관계
글의 순서
1. 고구려와 전한(前漢)과의 관계
2. 고구려와 전한(前漢)과의 관계 기록
1. 고구려와 전한(前漢)과의 관계
고구려와 전한前漢)의 관계는 한무제가 설치한 현도군을 공격하여 옮기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수 없다.
2. 고구려와 전한(前漢)과의 관계 기록
1)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 관계 기록 없음
2)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
『한(漢)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樂工)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현도군(玄菟郡)에 나아가 [한나라의]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받아갔는데, [현도군의] 고구려령(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현도(玄菟)]군(郡)에 오지 않았다.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城)을 쌓고서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幘溝漊)라 부른다.
구루(溝漊)란 [고]구려 사람들이 성(城)을 부르는 말이다.』
위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있고 현도군이 있으며 고구려 (현)령이 각각 따로 있음을 알 수 있다. |
3)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전
『한(漢)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B.C.109)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는데, 옥저성(沃沮城)으로 현도군(玄菟郡)을 삼았다.
뒤에 이(夷)·맥(貊: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군(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니
지금의 이른바 현도(玄菟)의 고부(故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위 기록을 보면,
현도군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음을 알수 있다. 여기서도 또한번 현도군 설치 당시와 현도군이 옮겨갔을 당시에도(서기전 107년) 고구려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 역사가 서기전 35년에 시작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사실이 아니며 확인 할수 있는 것만 72년 줄여졌음을 알수 있고 그 이상 더 많은 햇수가 줄여졌음을 다시한번 확인 할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이른바 현도군에 설치했다는 고구려현은 각각 다른 실체임을 간접적으로 알수 있다 |
4)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한(漢)] 무제(武帝)는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도(玄菟)에 속하게 하였
으며, 북(고,鼓)과 관악기(管樂器)와 악공(樂工)을 하사하였다.』
위 기록에 관하여
1) 여기서도 고조선이 망할 때(서기전 108년) 고구려가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 할수 있다.
2) 그러나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 현도에 속하게 했다는 말은 후한서를 쓴 범엽이 제멋대로 내린 오판이며 거짓말이다.
그 근거는
첫째, 후한서보다 더 오래 전에 쓴 삼국지에 의하면 그런 말이 없다. 후한서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지에는 그런 말이 없다는 말이다.
삼국지에는 그냥 「한(漢)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樂工)을 하사하였다」고 되어있는데 후한서를 쓴 범엽은 ‘한(漢)’과 ‘북과 피리 악공’사이에 「무제(武帝)는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도(玄菟)에 속하게 하였다.」는 말을 제멋대로 끼어 넣은 것이다.
또한, 삼국지에는 고구려가 현도군에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다고 되어 있으며 [현도군의] 고구려령(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고 되어있다.
다시말해서 고구려와 고구려(현)령, 현도군이 각각 따로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서 현도군에 속하게 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둘째, 한사군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한서(漢書)에도 「무제(武帝)는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도(玄菟)에 속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셋째,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에 썼던 사기(史記)에도 「무제(武帝)는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도(玄菟)에 속하게 하였다」는 말이 없다.
넷째, 같은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 전을 보면
『[한(漢)] 무제(武帝)가 조선을 멸망시키고서 옥저 땅으로 현도군(玄菟郡)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군(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라고 되어 있어,
현도군은 처음에 옥저에 있었고 옮겨 간 곳도 고구려의 서북쪽이라고 해서 고구려가 따로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현도군이 처음 설치된 때에도, 현도군이 옮겨간 뒤에도 고구려는 따로 있었고 고구려라는 나라 자체가 정복되어 현도군의 한 개 현이 된 일은 없었다.
넷째, 삼국사기 유리명왕 본기 33년(서기14)조를 보면
『가을 8월에 왕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군시켜[進兵]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한다.>을 공격해서 차지하였다.』라고 해서
고구려가 고구려현을 공격하여 차지했음을 말하고 있다. 고구려는 고구려현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고구려와 고구려 현은 엄현히 다르고 위치도 고구려는 동쪽에 있었고 고구려현은 먼 서쪽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고구려와 고구려현 사이에는 양맥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또한, 고구려와 고구려현은 고구려가 고구려현을 차지할 때까지 공존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고구려와 고구려현의 관계는 어떻게 된 것일까?
‘고구려현’이라는 이름은 현도군이 옥저에서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갔을 때 고구려의 이름을 따다가 현도군 내의 하나의 현, 고구려현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예는 한무제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한사군을 세웠을 때 지은 이름에서도 볼수 있다.
사기 조선열전을 보면
『...이로써 (위)만(滿)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小邑)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眞番)과 임둔(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한사군이 있기 전부터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나온다. 한사군을 세우기 전부터 진번과 임둔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고 한사군을 만들때 진번(眞番)군 과 임둔(臨屯)군은 한사군을 세우기 전부터 그 지역에 있었던 이름, 진번과 임둔을 따서 지었다는 말이다.
이와같이 현도군이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 갔을때 현도군이 고구려의 이름을 따다가 자기네 현 이름으로 삼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후한서를 쓴 범엽은 한서 지리지에 고구려현이 있음을 보고 드디어 「한무제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서 현도(玄菟)에 속하게 하였다」고 오판을 내리고 제멋대로의 소설을 쓴 것이다.
다시말해서 범엽은 고구려가 고구려현을 차지할 때까지 고구려와 고구려현이 일정기간 공존했다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이와같은 오판과 제멋대로의 소설을 쓴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보았을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수 있다.
「한무제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서 현도(玄菟)에 속하게 하였다」는 것은 범엽이 저 혼자 내린 판단이지만 그것은 오판이며 소설(허구)이지 사실이 아니다. |
5)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전
『[한(漢)] 무제(武帝)가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서 옥저(沃沮) 땅으로 현도군(玄菟郡)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위 기록에 관하여,
위 기록은 후한서가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 전을 베낀 것이니 같은 내용이다. |
* 조공의 실체
글의 순서
1. 조공은 물자교역이다.
2. 조공이라는 이름은 거짓과 과장이 섞여있다.
3. 조공이라는 것은 한족들의 유아적인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출발하였다.
4. 종합, 결론
1. 조공은 물자교역이다.
조공이란 서로간의 물자교역이며 지금말로 하면 무역이다.
조공은 물자교역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물자적 이익 통하여 한족(漢族)이 다른 민족을 다루어 보려는
(조정해 보려는) 수작이다.
물건을 주고 받는 것이며 물건을 받고 물건을 줄때 경제적 이익을 더 줌으로써 중국 변경의 안정을 꾀하고
경제적 이익을 미끼로 다른 민족을 조정해보겠다는 것이 한족들의 얄팍한 수작이며 여기에서 나온 것이
이른바 조공이다.
중국과 교역하는 상대방 나라가 경제적 이익이 있을 때는 교역을 지속하고 경제적 이익이 없을때는 언제든지
이를 뒤집어 엎고 도리어 공격하여 경제적 이익을 취하려 것이 상대방 나라가 취하는 태도이다.
1) 경제적 이익이 있을 때 교역을 지속하려는 예는 고려와 송나라의 교역을 들수 있다.
송사 고려전 경원(慶元) 연간(1195~1200년)조를 보면
『일찍이 고려(高麗)의 사신이 들어옴에 있어 명주(明州)·월주(越州)는 그들의 대접으로 시달리고,
조정(朝廷)에서는 관우(館遇)· 연뢰(燕賚)· 석여(錫予) 등의 비용이 수만냥을 헤아렸는데,
이것도 고려왕(高麗王)에게 하사한 예물은 포함되지 아니한 것이다.
우리 사신이 [고려(高麗)에] 갈 적에는 언제나 두 척의 신주(神舟)를 탔는데, 그 비용 역시 막대하여 삼절
(三節)에 관리(官吏)들이 자기 직위(職位)에 따라 녹봉(祿俸)에서 덜어 내놓은 돈을 모두 현관(縣官)에게
의뢰하였다.
예전에 소식(蘇軾)이 선조(先朝)에 아뢰면서, “고려(高麗)에서 들어와 조공(朝貢)하는 것은 다섯 가지 손해만
있습니다.”고 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려는 송나라와 조공무역을 더 많이 하려고 하였고 송나라는 고려의 교역을 억제하려고 하였으며
되도록 끊으려고 하였다.
2) 경제적 이익이 없을 때 중국을 뒤집어 엎어 공격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예는 중국 명나라때 있었던
‘토목의 변’을 들수 있다.
1406년 영락제는 몽골 부족들에게 조공무역을 허락하였는데, 마시(馬市)라는 형태로 교역을 하여 영종까지
관례화되었다.
명나라는 이들로부터 말과 가축 등 그 부산물을 수입하고, 비단 등의 의류와 식량 등을 수출하였다.
처음에는 50명 정도의 사절단 규모가 에센 때에 이르러 3,000명까지 늘어났고, 주변 위구르의 상인들까지
가세하여 무역량이 늘어나고 밀무역도 성행하였다.
이에 심각한 문제를 겪던 명나라는 오이라트 부족에 대한 무역을 제한하였고 1448년 사례감 왕진은 실제
인원에 대한 조공무역만 허용했으며, 말 값도 오이라트가 제시한 가격의 20%만 지급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오이라트는 정통제 14년(1449년) 명나라 변방인 산시 성 다퉁(大同)으로 침입하였다.
이에 명나라 영종은 오이라트족을 친정하고자 50만의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으나,
오히려 오이라트에게 대패하여 명 영종 자신이 생포 되어 잡혀갔다.
이것을 ‘토목의 변’이라고 한다.
이와같이 조공이란 서로간의 물자교역이며 지금말로 하면 무역이다.
그러나 중국과 교역하는 상대방 나라가 경제적 이익이 없을때는 언제든지 이를 뒤집어 엎고 도리어 공격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중국 상대방의 나라가 취하는 태도이다.
다시말해서 조공이란 상하관계를 뜻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종속관계를 뜻하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물자교역 물물교환의 경제적 이익관계를 한족들이 자기들을 높이는 용어로 자기들에게 물건을 바쳤다는 조공
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지 사실은 물물교환이며 물자교역이고 경제적 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2. 조공이라는 이름은 거짓과 과장이 있다.
1) 청나라 말기 영국 왕이 조공하였다는 것은 거짓.
청사고, 인종본기 가경 10년 10월 병신일 기사를 보면,
「영국 왕이 청나라에 들어와 조공하였다(英吉利國王入貢: )」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세상사람들이 다 아는 거짓
이다.
영국이 청나라와 수교와 교역을 한 일은 있었으나 조공을 한 일이 없고 더구나 영국 왕이 청나라에 와서 조공한 일이
없다는 것은 전세계 사람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는 전형적인 춘추필법 식의 거짓 기록이다.
진실은 영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수교를 하고 교역을 한 것이고 이것을 중국 사람들은 영국 왕이 청나라에 들어와 조공
하였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2) 전쟁 중에 사신을 보낸 것도 조공이라고 한 것, 역시 거짓.
삼국사기 고구려 보장왕 7년(648년) 봄 정월 조를 보면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중국 사료에서 따온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도 춘추필법 식의 거짓이다.
이때는 고구려와 당나라는 한창 전쟁을 하는 도중이었다.
당나라 1차 침입은 645년 4월부터 10월까지 있었고, 2차 침입은 647년 2월부터 7월까지 있었으며
3차 침입은 바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는 그때(648년 정월)에 시작되었다.
서로 죽이겠다고 칼부림으로 맞장 뜨는데 무슨 조공이 있는가?
조공을 바치는 정도라면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따라서 전쟁 중에 조공 했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더구나 1차 침략때는 당태종이 직접 왔으나 패해 도망갔고, 2차 침입때에도 패해서 도망갔으며, 3차 침략때에도
당나라가 패해 달아난 끝에 649년 당태종이 죽었다.
이렇게 고구려가 이긴 전쟁에서 무슨 조공이 있는가?
다시한번 조공이라는 것이 거짓임을 확인 할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은 무엇일까? 그냥 사신을 보낸 것이다. 사신은 왜 보냈을까? 적정(敵情) 탐지이다.
이것은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조서에서도 나온다 그것을 보면 “사인(使人)을 보낼 때마다 소식(消息)을 밀탐
하여 가니...”이렇게
수양제 스스로 고구려가 사신(使臣)을 보내는 것이 적정 탐지라고 증명하고 있다.
3. 조공이라는 것은 한족들의 유아적인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출발하였다.
한족들은 다른 민족들이 자기들에게 물건(특산물)을 바치고 벼슬을 받아간다는 이른바 조공 책봉의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였다.
이른바 자기 중심적인 유아적(幼兒的) 태도이다. (이를 인정한 것은 바로 유학을 배운 사대주의자 들이다.)
4. 종합, 결론
이와같이 조공이라는 것은 한족들의 유아적인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출발한 것인데 그것의 본질은 물질적
교류였으며 경제적 이익관계를 이용하여 다른 민족을 조정해보려는 한족들의 얄팍한 수작으로 발전하였으며
과대포장되어 거짓과 과장이 섞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하 관계를 뜻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주종관계를 뜻하는 것도 아니며, 중앙과 지방정부를 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