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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7 / ‘나 돌아갈래!’를 외치자 (창26:12-25)
매년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으로 한 해를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들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이치도 그러하겠지만, 성경에서는 복 받기를 원하면 복을 받을만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복을 받을만한 태도’란 게 어떤 것이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때. 여러분이라면 복이라 할 때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금 되짚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결과가 아니라 상태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복을 받을만한 태도’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삭의 경우를 보면 흉년이라는 원치 않는 일들이 있을 때와 원치 않는 여러 시련과 고난 등을 맞닥뜨렸을 때 오히려 더 많은 복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했던 걸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도 이삭처럼 하는 일들이 성공하고, 사는 중에 풍성한 복을 받으며 살 수 있겠는지요?
먼저 믿음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12절을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열매를 얻었다고 했는데, 좀 이상합니다. 본래 이삭의 직업은 조상 때부터 이어져 온 목축이었는데 느닷없이 웬 농사란 말인가요?
당시 이삭은 흉년을 피해 블레셋 영역의 그랄 지역으로 이주해 온 형편이라 가축 떼를 끌고 여기저기를 이동할 수 있는 상황이 못되었습니다. 해서 부득이 농사일을 병행해야만 했는데, 평생을 목축으로만 살아온 이삭에게 농사는 생소하고 서툰 분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삭이 농사를 짓던 첫해에 백배나 되는 수확을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농사로 치면 초짜가 농사 첫 해에 백 배의 수확은 얻었다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런데 12절 말씀을 보면 말미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이삭이 놀라운 수확을 거둔 것에 대하여 성경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런 복을 받고자 하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는 말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앞서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께서 함께 계셔 주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계시며 복을 주셨다’고 하면 ‘아멘’하는 게 아니라, ‘그런데 나랑은 왜 함께 계셔 주시지도, 복을 주시지도 않는가?’라고 반문하며 서운해하고 심지어는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계셔 주셨다는 말에서 핵심은 주어가 하나님이 아니라 이삭이라는 데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즉 본문은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하셨다.’라고 해석할 것이 아니라, ‘이삭이 하나님과 함께하였다.’는 말인 것입니다.
누가 주어인지에 대한 이 차이를 아시겠지요?
여러분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신다면 이제부턴 내가 하나님과 함께하려는 것에 더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잊지 마세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 주시지 않아 여호와께서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많았기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복을 주시지 못하시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너희가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고, 예수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우리에게는 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박하사탕이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나 돌아갈래.’라고 절규하며 기차에 치여 죽는 장면에서부터 영화가 시작되면서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과거의, 그나마 희망이 있던 시절로 돌아가기를 소망하는 한 남자의 좌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는 게 그렇습니다. 지난날의 좋았던 시절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릅니다. 우리에게 있는 믿음은 우리를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좋을 시절’로 나아가게 해 줍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 나 돌아갈래’라는 외침이 최후의 절규로만 끝이 나지만 믿음에서는 누구라도 외쳐야 할 신앙고백이 ‘나 돌아갈래!’여야 합니다.
이는 마치 누가복음에서 인생 나락에까지 떨어진 탕자가 아버지를 향해 ‘나 돌아갈래’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매 순간순간마다 복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하나님께로 ‘나 돌아갈래’를 외쳐야 하며, 실제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믿음을 발휘해야만 합니다.
그리할 때면 ‘함께 계셔 주시는 하나님’이 나와도 함께 하시므로 나에게도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의 은혜와 복이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복 받고 사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라면 남은 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결단뿐입니다.
먼저는 살아가는 중에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곧 원하는 결과를 보기까지는 현재까지 되어진 일만으로 결코 끝났다고 결론짓지 말라는 말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보다 먼저 오는 게 시험이라고 했던 것을 상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시험의 시작은 늘 의심에서 출발한다는 것도 꼭 기억해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진실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원치 않는 일들이 있게 됩니다.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원치 않는 일들만 생긴다면 순간적으로나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무의식 중에 ‘이렇게 믿기만 한다고 될까?’라든지, ‘내가 이렇게 기도하는 게 맞나?’라고 하는 의심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의 반대말은 사탄의 시험이고,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인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면 인생에 원치 않는 일이 있던 것이 이삭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삭은 유목민으로 들에서 가축을 치는 것을 업으로 삼았기에 가축에게 먹일 우물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이삭의 복이 하나님 때문인 것을 모르는 원주민들은 재수 좋고 운 좋아 보이는 이삭을 시기하여 이삭 소유의 우물들을 다 메워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들에 대한 이삭의 반응을 보면 이삭은 그랄 사람들이 메우면 메울 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또 다른 우물을 파고 또 팠다고 했습니다.
이삭의 이런 모습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세상에서 시도할 것은 다 해 보자!’는 결단입니다.
간혹 믿다가 낙심하는 분들이라든가, 기도하다가 실망하는 분들을 보면 대개가 이 부분에서 실패하는 걸 봅니다.
어떤 분이 매일 같이 ‘하나님 복권 한 번만 당첨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하루는 하나님이 ‘이 사람아. 일단 복권을 사야 당첨되게 하든가 말든가 하지.’라고 하셨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웃자고 한 얘기겠지만 시사하는 바도 큽니다. 내가 복권 당첨이 안 된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복권을 사지 않은 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내가 하는 그 일’을 통해 나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사는 우린 믿음도 좋아야겠지만 그만큼 세상일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열심과 시도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한 번 했는데 안 됐다고 안 된다고 하지 말라는 거고, 이거 했는데 안 됐다고 저거마저 안 될 거라 포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도 믿음이지만 하나님을 믿기에 인생을 열심히 살되 이것저것 시도하며 도전하며 사는 것도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내 믿음이 하나님만 믿는 믿음으로 끝나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면서 세상일에서도 열심히, 힘써,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자성어로 ‘실건실제’라는 말이 있는데,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세상에서만 통하는 얘기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믿음을 잃는 것. 곧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잃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원치 않는 일들이 있어 사는 게 어렵고, 힘들고, 초조할수록 더욱 믿음을 붙들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성가 중에 ‘오 신실하신 주’라는 곡을 보면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창세기 28:15절에서도 보면 집에서 쫓겨나 노숙하게 된 야곱을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는 약속의 말씀이 나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나를 떠나지도 않으시고, 버리지도 않으시고,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고 한 복음성가의 고백이 오늘 이후를 살아가는 여러분의 믿음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창세기 28장의 약속이 야곱에게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야곱과 함께하시며, 지키시고, 약속을 끝까지 이루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기에 우리에게 원치 않는 일이 있게 될 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도 동행하시며, 우리에게도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믿음의 자녀들이 복 받는 인생을 살게 하시기 위해 언제든 함께 하고 계심을 늘 기억하셔서 원치 않는 일들이 있게 되면 만사 제쳐놓고 언제든 하나님께로 ‘나 돌아갈래’를 외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에서 돌아온 탕자를 위해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어 주셨듯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매 순간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인생의 복이 넘치는 잔치 날들이 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복 받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라면 인생 터전을 하나님의 집 곧 교회로 삼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이삭이 숱한 역경 끝에 르호봇에 우물을 팠을 때 성경은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다툼이 그쳤기에 이삭에게 있었던 고난과 원치 않는 일들은 일단 끝난 듯이 보입니다. 이제 옛날얘기의 결말처럼 잘 먹고 잘 사는 일만 남은 듯했습니다. 그런데 23절을 보면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이 거기서 비로소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고 하나님께로부터 아버지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이삭에게로 이어질 것이라는 보장을 받게 되자 이삭이 그곳에 정착하여 제단을 쌓고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이미 르호봇에 머물러도 충분히 살만하게 살 길이 열렸다 싶은데 이삭은 왜 또 브엘세바로 이동해 간 걸까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브엘세바”라고 하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창세가 21:30-31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 때에도 블레셋의 그랄 땅에서 우물을 팠는데 당시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암양 새끼 일곱을 주고 브엘세바를 샀다고 하는 증거 기록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브엘세바는 블레셋이 아닌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본문 23절은 이방을 떠돌던 이삭이 드디어 하나님의 땅 가나안으로 옮겨 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신앙적인 면에서 보자면 이제까지는 이방 땅에 있었기에 복 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삭을 찾아오셔야만 했다면 브엘세바로의 이주는 이제야 이삭이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니 당연히 복도 있는 곳입니다.
이렇듯 이삭이 최종적으로 안착한 브엘세바는 오늘날 우리가 인생의 베이스캠프로 삼아야 할 교회인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곳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23절 말씀은 하나님의 성도들은 세상 그 어느 곳에 있든 간에 반드시 돌아와야 할 곳은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리에 있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이 거하기를 원하신 곳은 애굽도 블레셋도 아닌 하나님이 계시는 가나안 땅이었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 상황이 잘 나가면 잘 나가는 대로, 못 나가면 못 나가는 대로 우리는 매 순간을 ‘하나님께로 나 돌아갈래’라고 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매 순간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결국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로 들어서도록 인도해 가십니다.
이삭의 경우, 파는 우물마다 대적이 와서 메꿔버립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우물을 파면 적들이 다시 와서 또 메꾸는 일들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이 사실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원수가 우물을 메꿀 때마다 그래서 이삭이 우물을 팔 때마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샘이 솟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젠 됐다 싶을 때면 원수가 다시 와서 타의에 의해 거처를 이동하게끔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반복되는 중에 어느날 둘러보니 이삭은 자신도 모르게 약속의 땅 브엘세바에 가까이 와 있더라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역사이자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요셉이 복 받는 과정을 봐도 하나님은 이삭과 똑같은 케이스를 밟게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요셉은 변방 나라 이스라엘에서 그것도 어느 빈들에서 양을 치고 있는 목동이더라는 겁니다.
그런 요셉이 형들의 질투와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릴 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힐 때, 그때마다 하나님은 요셉을 복 주시는 역사를 베푸시는 한편 그런 역사가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요셉을 애굽으로 불러, 왕국에 들여, 바로를 만나,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완벽히 이루어 가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린 세상을 살지라도 우리 믿음만은 하나님이 계신 약속의 땅 브엘세바에 있어야만 합니다. 나를 위한 매 순간의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결국엔 나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린 본문 24절을 읽으며 가장 핵심적인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일까요? 24절에서 복을 주시겠다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살면서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게 됩니까?
크게 보면 두 가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닥쳤을 때나 혹은 행여라도 일이 잘못될까 염려되고 불안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 한,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한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나 잘 안될 것 같은 일들일랑은 모두 하나님이 능히 감당할 힘을 주시고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내가 해준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진정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떤 환경이나 어떤 형편에 거하여 살든 간에 그 자리가 각자의 브엘세바가 되게 하기 위해 쉬임 없이 하나님을 찾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기도함으로써, 저나 여러분 모두의 인생에도 백 배의 복이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 또 충만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