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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두번째 설교
제목: 달란트를 맡은 종들
마태복음 25:14~30
설교 목적:
대림절은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다. 그런데 재림에 대한 나의 설명은 좀 특이해서 교우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인자가 오리라’는 글이나 또는 종말과 말세에 대하여 여러 편의 글을 써서 그 개념을 정리한 바 있으므로 재림도 그와 관련하여 자연스럽게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낯설 수 있다. 나는 이런 설명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토론하면서 가다듬어 갈 계획이다.
지난 주에는 열 처녀의 이야기를 설교했다. 거기서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하여 특별히 강조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에 받아들여 굳게 붙드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것이 특별한 메시지다. 신랑을 기다리는 들러리들은 그들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언약을 기억하고 기대하는 삶에 비유했다.
이번 주에는 달란트를 맡은 종들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종들이 자신과 주인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주인의 동역자로 자신을 이해하는 종들은 자신의 일처럼 일을 했고, 주인의 의도를 왜곡하고 그 경륜에 동참하지 않는 종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세월을 허송(虛送)했다. 이 점이 이번 설교에서 중요하다.
설교 개요:
1.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2. 주님이 오셔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다
3. 열 처녀 이야기를 복습함
4. 달란트를 맡은 종들의 이야기
5. 악하고 게으른 종 – 주인의 기업에 동참하지 않음
6. 있는 자는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빼앗기리라
1.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오늘은 대림절 두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믿음으로 사셨습니까? 금년도 대림절 메시지의 가장 큰 특징은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그 말이 중요한 이유는, 주님이 예고하신 대로 다시 오셔서 행악자들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들을 건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40여년이 지나 예루살렘이 로마군대에게 함락될 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체포하여 부당한 재판을 벌이고 있던 산헤드린 공의회를 향하여 경고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왕권을 가지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옛적에 우리 선배들은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손양원, 주님 고대가)라는 노래를 부르며 주 오심을 사모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을 보면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천사들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하지만 구약성경을 잘 아는 제자들은 ‘하늘 구름을 타고 왕권을 가지고 오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바르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거의 모든 말씀은 구약적 배경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 배경을 오늘 우리 시대의 것으로 옮기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는 점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꿈과 환상이 나옵니다. 가장 먼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황금으로 된 신상을 꿈에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벨론 제국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왕은 두번째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니 하늘 끝까지 자라난 거대한 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서 7장을 보면, 다니엘이 꿈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에는 무서운 짐승들이 등장합니다. 그 짐승들은 사납고 큰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 짐승들은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사자와, 곰, 표범, 그리고 강철 이빨과 열 뿔을 가진 무시무시한 짐승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짐승은 다른 짐승들을 다 씹어 먹고 짓밟았습니다. 그 짐승들은 이 땅을 짐승처럼 무참하게 짓밟을 제국들을 가리킵니다.
다니엘이 환상에서 본 가장 놀라운 장면은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 장면은 하늘에서 심판하시는 주님이 왕좌에 앉으시고 그 무서운 짐승을 죽여 그 시체를 타오르는 불에 던지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장면이 소개됩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 7:13~14
이 환상은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의 제국들이 짐승처럼 하나님의 포도원을 짓밟을 때 하나님이 그 원수들을 모두 사로잡아 자기 아들을 위한 발판을 삼으시고 그 인자 같은 이에게 왕권을 주실 때 그 인자 같은 이는 하늘 구름을 타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서 하늘 구름을 타고 왕권을 가지고 오는 분에 대한 이야기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메시아시며 심판하시는 주님이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기뻐했을 것이며, 이 말을 들은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은 분기탱천(憤氣撑天), 노발대발합니다.
예수님이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권세를 받아서 심판하러 오신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 그대로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던 자들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그 경고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참된 메시아이시며 하늘 구름을 타고 오셔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을 그들은 똑똑히 보면서 애곡(哀哭)했을 것입니다(계 1:7).
2. 주님이 오셔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다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예고하신 대로 다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고 교회를 위한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무너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무장한 교회 공동체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작은 밀알이 희생함으로 수많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그렇게 성장하고 또 자라났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세상을 성도들에게 주실 때마다 이 땅에 찾아오십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출애굽과 시내산 언약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대리인 공동체로 살았습니다.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갈보리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대리인 공동체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교회를 향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옛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면서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악한 무리들이 일어나 괴롭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오셔서 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는 그 날을 여호와의 날(사 2:12, 13:6,9, 겔 13:5, 30:3, 욜 1:15, 2:1, 11, 3:14, 암 5:18, 20, 습 1:7, 14, 슥 14:1) 또는 주의 크고 두려운 날(욜 2:31, 말 4:5), 주의 권능의 날(시 110:3)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죽인 도시 예루살렘에서 새 언약의 백성으로 살면서 주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기를 깨어 기도하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열 처녀 이야기나 달란트 이야기 등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고 가르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주의 권능의 날이 다가오자 성도들은 유다를 떠나 산으로 도망가서 은둔했습니다. 마치 소돔성에 불과 유황의 심판이 내리기 전에 롯의 가족들이 대피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는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했으며 신실한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사도 바울 같은 열심 있는 일군도 일어나고 수많은 신자들이 복음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새 이스라엘로서 하나님과 맺은 새 언약을 기억하고 주님이 자신들 가운데 함께하시며 그들을 통해서 일하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새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점점 많아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박해가 있고 때로는 세속적인 유혹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때마다 교회는 옛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바로잡으실 것을 바랐던 것처럼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처럼 ‘왕권을 가지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리라’고 하신 언약대로 예루살렘에 심판을 행하신 일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에도 찾아오셔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이 ‘대림신앙’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역사를 돌아볼 때 깨닫는 것은, 모든 세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그 대리인적 소임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기다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모든 수고에 대하여 상 주실 것을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는 마치 예수님의 수고처럼 열매를 맺어 어떤 이들은 생전에 그들의 결실을 거두었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자손들의 세대에 풍성한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그렇게 각 세대는 예수님이 들려주신 열 처녀 이야기와 달란트를 맡은 종들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분명히 다시 오시며 속히 오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 지금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셔서 만물과 만민을 통치하시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속히 오셔서 사탄을 우리의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의심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 열심을 내어 주의 백성들을 섬겼습니다.
3. 열 처녀 이야기를 복습함
지난 주에는 열 처녀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열 명의 처녀들은 모두 신부의 들러리들로서 다섯은 지혜롭고 다섯은 미련했습니다. 지혜로운 처녀들은 등불과 함께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기름이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기름은 신앙의 등불을 밝히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등불을 밝히는 기름은 우리의 소망을 든든하게 하고 뜨겁게 하는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잘 준비하여 소중하게 간직하는 사람은 등불에 기름을 채운 사람처럼 어둠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결국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노래로 만들어 부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언제나 밝고 희망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혜 있는 처녀들처럼 빛나는 얼굴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4. 달란트를 맡은 종들의 이야기
오늘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두 번째 이야기인 달란트를 맡은 종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이야기의 내용은 어떤 사람이 먼 나라에 갈 일이 있어 집을 떠나기 전에 종들을 불러 각각 역량에 맞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종들 중에 두 사람은 바로 가서 장사를 해서 두배로 재산을 불렸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땅을 파고 그 달란트를 묻어 두었습니다. 주인이 돌아오자 종들은 자신이 맡은 달란트를 어떻게 관리했는지를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크게 기뻐하면서 그들을 주인의 잔치에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땅에 묻어둔 달란트를 캐내어 그대로 주인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 25:24~25).
주인은 그 종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태복음 25:26~30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득 이인성 장로님이 생각났습니다. 장로님 부부는 동대문시장에서 자수공장을 운영하십니다. 그런데 두 부부는 해마다 여름이면 미국에 있는 딸을 방문하고는 했습니다. 방문 기간은 보통 두 달 정도 됩니다. 그래서 공장을 직원에게 맡깁니다. 그런데 어떤 직원이 들어오자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장로님 부부가 미국에서 돌아오면 상당히 많은 이윤을 남겨 보고했다고 합니다. 주인도 없는 공장을 운영하여 그렇게 이윤을 많이 남긴 것을 보고 이장로님은 그 직원을 칭찬하며 보너스를 듬뿍 주었다고 합니다.
이 두 이야기는 주인의 것을 맡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부지런히 일하여 이윤을 남긴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주인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면 나에게도 상을 주시겠지 하는 기대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주인과 가족처럼 가까워서 주인의 일이 곧 나의 일이라는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주인이 평소에 베풀어 준 은혜를 갚을 기회라고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부지런히 일한 종들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칭찬과 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왜 일을 하지 않고 그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을까요?
우선 그 종의 말을 그대로 들어보면, 그는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굳은 사람이란 가까이하기에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다른 종들과는 달리 주인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주인에 대해서 오해도 하고 있습니다. 즉, 주인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는 사람과 뿌리지도 않았는데 모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우선 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시장에서 상인들의 돈을 갈취하는 폭력배입니다. 그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상인들이 수고한 것을 거두어 가는 악당들입니다. 종이 주인을 그런 분으로 생각한 것일까요? 종들에게 실컷 일을 시키고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놀고먹는 그런 사람으로 본 것일까요? 그런 불만이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것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다음 구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6:25~26
사람이 심지 않아도 하나님은 공중의 새들이 먹을 것을 들에서 자라게 하시며 만물이 성장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자기가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듯이 주인의 일도 그렇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괜히 자신이 나서서 무언가를 하는 것은 도리어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종이 주인을 오해한 것은 사실입니다. 주인이 종의 말을 듣고 얼마나 답답했는지 주인을 그런 분으로 알았다면 돈놀이하는 사람들에게 그 돈을 맡겨 이자라도 받게 할 것이지 땅에 묻어두는 것이 웬말이냐고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있는 사람에게 주라고 하면서 그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쫓아 내버렸습니다.
5. 악하고 게으른 종 – 주인의 기업에 동참하지 않음
주인은 그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비유는 누군가를 빗대어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종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각각 줄로 재어 준 구역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말을 들을 사람도 있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을 사람도 있습니다. 달란트를 맡은 종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 두 종류의 사람들이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선 착하고 충성된 종들은 즉시 가서 일을 했고 게으르고 악한 종은 그 돈을 땅에 묻었습니다. 나중에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이 말한 것을 중심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악하고 게으른 백성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하고 게으른 종은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엄하고 까다로운 분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일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하여 매우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조폭 같은 분이 아니며 모든 일을 혼자 다 처리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며 세상을 관리하기 위하여 동역자와 대리인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우리들을 부르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여 그 영광과 즐거움을 함께 누리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을 알지 않으려고 하는 삶은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오해하기 때문이며, 그 결과 하나님의 의도와 다른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죽이려 모의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동네에서 쫓아내려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인 산헤드린 공의회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달란트 맡은 종이 주인에게 자신이 맡은 달란트를 드리면서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25절, 표준새번역). 여기에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행동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악한 일이었음을 자신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어떻게 당당하게 그 일을 집행하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고,
큰소리로 “그가 하나님을 모독하였소.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들이 더 필요하겠소?
보시오, 여러분은 방금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대답하기를 “그는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하였다.
마태복음 26:65~66, 표준새번역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이 지금 어떤 판결을 내리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일이 당연하다는 듯이 서로 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벌이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하는 자들이 벌이는 극악무도한 일이 이와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들은 정의를 수호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어찌 심판이 내리지 않겠습니까?
6. 있는 자는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빼앗기리라
지난 주에 저는 열 처녀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 기름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처녀들과 같이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대림절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달란트를 맡은 종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대림절에 우리가 점검해야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이 달란트 이야기는 단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는 교훈을 말하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더 열심히 일하라는 교훈을 말하려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오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른 종들은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자기 혼자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있으면서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주인의 의도를 이해하고 주인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는데 자신은 주인을 두려워하고 소극적으로 살아갑니다. 주인이 맡겨준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눈을 가졌으나 볼 수 없는 눈뜬 맹인이며, 그는 부자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가난하고 헐벗었습니다.
열 처녀의 이야기를 종합하시면서 예수께서는 ‘깨어 있으라’는 교훈을 주셨습니다(13절). 그런데 달란트 비유에서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2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있는 자는 더 풍족해지고 없는 자는 그것마저 빼앗긴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부익부 빈익빈처럼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진다는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맡은 것을 관리하지 않은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심판의 말씀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달란트를 받은 민족임을 잘 아셨습니다. 달란트는 노동자가 15년 동안 일한 품삯과 같다고 합니다. 그처럼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이스라엘은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과 성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세상 모든 나라에게 복을 주는 축복의 통로가 될 제사장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통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살도록 초대되었고 언약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보니 그들은 자신들의 받은 임무를 땅에 묻어버리고는 이제 태연하게 흙 묻은 그 달란트를 꺼내서 여기 있다고 내놓습니다. 그들의 이런 행동은 마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마태복음 21장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한 행동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태복음 21:19
무화과나무가 무슨 잘못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예언행동’입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운명이 이와 같다는 ‘심판선언’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비유를 들어 예루살렘에 대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마 21:33~46). 왕의 아들이 혼인잔치 하는데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이 왕이 보낸 군대에 의해 진멸된 것과 예복을 입지 않고 무례하게 들어온 사람들이 쫓겨난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마 22:1~14). 마태복음 23장에서는 아예 한 장을 통째로 할애하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화 있을진저!’ 라고 일곱번이나 외치시면서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예루살렘이 어떻게 무너지게 되는지를 들려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그들이 받을 심판에 대해서 들려주셨습니다. 그들은 미련한 다섯 처녀들처럼 이미 꺼져버린 등불을 들고 기름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도 잊어버리고 이방인처럼 돈과 명예와 권력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왕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마치 한 달란트를 맡은 종처럼 자신의 본분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너무 경건하신 분이라 두려운 나머지 잃을까봐 달란트를 숨겨 두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하시는지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 언약을 내팽개쳐버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이 어찌 심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분노를 담은 말씀이 이것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30절)
많은 사람들이 달란트를 맡은 종들의 이야기에서 달란트를 설명하기를, 그것은 우리가 받은 재능이나 물질 또는 시간이라고 해석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고전 10:31).
그러나 예수께서 달란트를 맡은 종들의 이야기를 누구에게 왜 들려주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 그 어느 민족도 받지 못한 귀한 것을 받았으며 그들이 이 임무에 동참한다면 그들을 통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언약을 깨뜨려버리고 아무 것도 받지 않은 사람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겨우 몸에 할례를 받았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성경을 배우고 있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그를 통해서 겨자씨와 같이 누룩과 같이 많은 사람이 유익을 얻을 세상을 이루자고 외치시는데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은 멀었고 그들의 귀는 막혔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완고하여 하나님의 꿈에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남은 것을 다 빼앗아서 열 달란트 맡은 자에게 주십니다. 열 달란트를 가지고 있는 종은 누구입니까? 그는 비록 레위인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지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받고 기뻐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 보화를 얻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천국을 침노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들려주신 하나님의 꿈에 자신의 인생을 맞추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제사장의 직분도 맡기시고 옛 것과 새 것을 곳간에서 내어와 집안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서기관의 임무도 맡기십니다.
예수께서는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림절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무엇이 없습니까? 예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요한계시록 3:11
우리는 한 달란트 맡은 종이 바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이며 특히 그 백성의 지도자들임을 확인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가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본래 돌감람나무인데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택하신 족속이며 거룩한 나라, 그리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주님은 전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시고 그들에게 열매를 찾으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주님 앞에 내어놓을 열매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충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이미 꺼진 등불에 기름도 없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미 받은 언약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마치 달란트를 땅에 묻어버린 종과 같은 것입니다.
이 대림절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대림절에 금식을 하거나 선행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그리스도 예수의 보배로운 피로 정결하게 씻으시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점검을 통해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깨닫고 사명을 발견한다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받은 달란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달란트는 그냥 재능이나 물질 또는 시간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달란트는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본분입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가 하는 선한 노력과 봉사일 때가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25장의 마지막 이야기인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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