핼리팩스 폭발 사고는 1917년 12월 6일,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중반기에 벌어진 사고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폭발 사고(1위는 1769년 이탈리아 브레시아 폭발 사고)로 약 2,000명이 사망하고 9,000명이 부상을 입으며 대략 반경 3km 주변이 평탄화된 사고였습니다. 또한 캐나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고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고는 해외에서는 두번째로 큰 폭발 사고이고, 캐나다에서 벌어진 가장 큰 재난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잘 알려진 바가 없어 한번 작성해 보았습니다.
1917년 12월 5일, 프랑스 화물선 SS 몽블랑이 뉴욕에서 핼리팩스를 향해 트라이나이트로톨루엔(TNT), 피크린산, 고농도의 벤졸, 니트로셀룰로오스 1,000t 가량을 싣고 도착했습니다. 이틀 전인 12월 3일에는 노르웨이 화물선 SS 이모가 캐나다 핼리팩스에서 벨기에로 수송물자를 보내기 위해 핼리팩스에서 연료를 보급받고 출발하기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핼리팩스 항구 앞바다에는 방잠망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SS 몽블랑은 항구로 미리 들어오지 못하고 방잠망이 올라와 기다려야 했습니다. SS 이모도 석탄 보급이 지연되어 방잠망이 올라오기 전까지 출발하지 못하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당시 충돌 지점을 표시한 지도)
이 사고에 대해 분석할려면 핼리팩스의 배드포드 만에 대해서 봐야하는데, 베드포드 만은 매우 좁은 해협아 연결되어 있었고, 핼리팩스 항구는 그 해협의 좌편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1910년 정해진 국제해상충돌방지조약에서는 이러한 좁은 해협에서는 다가오는 배의 우현으로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이 점을 기억해주세요.
다음 날인 12월 6일, SS 이모는 오전 7시 30분 출항 허가를 받고 선장 윌리엄 헤인즈가 탑승합니다. 이모 배는 7노트 정도의 속력 제한을 둔 채로 천천히 해협을 항해하면서 좁은 해협 입구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미국의 부정기선 SS 클라라와 만나 SS 이모는 실수로 항구 서현으로 틀어서 진행했지만 다행히 서로 충돌하지는 않고 서로 배의 우현으로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인선 SS 스텔라 마리스도 또 만나면서 다트머스 해안 쪽으로 뱃머리를 더욱 꺾어버립니다. 이 때 스텔라 마리스의 선장은 SS 이모가 지나치게 과속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경고하며 해협 서부로 배를 대라고 알려줍니다.
한편, 저녁이 되기 전에 SS 몽블랑에서는 프랜시스 맥키 도선사가 탑승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방잠망이 떠오르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새벽까지 항구로 진입할 수 없었고 새벽까지 기다린 후 운항을 시작합니다. 새벽에 조지 섬을 지나 배드포드 만으로 들어서면서 도선사는 주변의 연락선들과 작은 배에만 신경을 쓰고 SS 이모에 관해서는 신경쓰지 못했습니다. 맥키는 제9부두로 배를 틀면서 SS 이모를 발견했는데, 몽블랑이 이모 배의 우현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몽블랑에서는 배의 진로를 막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때 맥키는 배가 선로 우측에 있다는 뜻으로 호각을 한 번 불자, SS 이모에서는 접근하는 배에게 비켜줄 수 없다는 뜻의 호각 2번을 불었습니다.
SS 몽블랑의 선장과 도선사는 SS 이모가 왜 해협의 반대방향에 배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몽블랑 선장은 엔진을 끄고 각도를 약간 우현으로 틀어서 다트머스 쪽의 수로로 들어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른 선박에게 우현으로 틀어달라는 뜻으로 호각을 불었지만, 반대편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의 호각을 불었습니다.
이 때 즈음 되면 근처 선박에서는 두 선박 간의 호각 대화를 듣고 충돌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파악합니다. 이 시점에서 두 선박 모두 엔진을 껐지만, 둘 모두 느린 속도로 충돌 직전에 달했습니다. 몽블랑은 폭발성 화학물을 엄청 많이 싣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을 두려워해 닻을 내리지 못했고, 충돌 직전 마지막 시점에서는 항구 방향으로 키를 두면서 뱃머리를 꺾었지만 두 선박이 서로 평행하게 되면서 SS 이모가 갑자기 호각 소리 3번과 함께 배 엔진을 역전시켰고 밸러스트와 횡방향 추력으로 갑자기 몽블랑 방향으로 틀어지면서 SS이모가 SS 몽블랑 갑판을 우현으로 2.5m나 밀어내며 충돌합니다.
(충돌 직전 두 배의 진행로)
오전 8시 45분, 두 배가 충돌했습니다. 그런데, 아까 SS 이모가 엔진을 역전하면서 충돌하자마자 바로 튕겨나갔고, 이로 인해 몽블랑 선체에 불꽃이 튀어 피크린산 증기에 불이 붙게 되었습니다. 이 불은 배 측면으로 빠르게 번졌고 벤젠 드럼통이 새어나와 밖으로 분출되었습니다. 이미 이 시점에서 화재는 진압 불가능이였기에, 선장은 승무원들에게 배를 버리라고 지시하고 주변 선박에게 이 배가 곧 폭발하므로 피하라고 알렸습니다.
핼리팩스 시민들은 항구쪽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 무엇이지? 하면서 구경을 하러 나왔습니다. 그러는 동시에 충돌한 배는 조류 때문에 6부두 근처의 리치몬드로 떠밀려 내려갔습니다. 그 순간....
(폭발 직후 평탄화된 핼리팩스)
오전 9시 4분 35초, 몽블랑 갑판의 화재가 TNT, 피크린산, 벤젠, 톨루엔 등이 싣어진 화물칸에 옮겨붙으면서 대폭발, 맨 위의 사진과 같이 폭발했습니다. 선박 잔해는 공중 300m까지 날라가고 중심부 온도는 5,000℃에 달했으며 철파편 비가 다드머스와 핼리팩스에 내렸습니다. SS 몽블랑에 달려 있던 포신 하나는 북쪽으로 5.6km 떨어진 알브로 호수로 떨어졌고, 앵커 부분은 남쪽으로 3.2km 떨어진 아르모델 마을로 떨어졌습니다.
연기는 고도 3,600m까지 올라갔으며 충격파는 음속의 23배로 가면서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까지 충격이 느껴졌습니다. 주변 160헥타르 지역이 파괴되었으며, 폭발로 인해 배가 있던 자리의 물이 순식간에 증발해서 쓰나미가 일어나 핼리팩스와 다트머스를 덮쳤습니다.
이 폭발 직후 1,600명이 건물 붕괴, 충격파 등으로 즉사하고 9,000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반경 2.6km 이내의 건물 12,000호가 붕괴되었고, 도시 전역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해 퍼졌는데 노스 앤드 구에서는 중심지 전체가 대화재가 일어나 주민 전부가 사망했습니다.
(폭발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부분을 찍은 모습. 오른쪽 물가가 폭발 장소 바로 옆인 6부두입니다.)
사진과 같이 6부두에 있던 아카디아 제당, 힐스&선스 파운드리 벽돌 공장은 흔적도 없이 파괴되어 노동자 전원이 사망했고, 폭발 지점에서 1.5km 떨어져 있던 노바스코샤 방적 회사는 폭발로 인해 붕괴했습니다.
이 폭발은 광범위한 범위에 피해를 주었는데, 16km 떨어진 로어 새크빌 및 윈드소르 정선 지역에도 충격파로 일부 건물이 파손되었고, 100km 떨어져 있던 투르로, 뉴글래스고우에는 건물이 흔들리고 선반 위 물건이 떨어지는 피해가 있었으며 215km 떨어진 샬럿타운과 360km 떨어진 케이프브레턴 섬에도 진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고 가운데에서도 여러 의인들이 존재했습니다.
캐나다 식민지 횡단 철도의 운행 관리원이었던 패트릭 빈센트 콜먼은 폭발이 발생한 6부두에서 400m 떨어진 곳에서 열차를 운행하고 있었는데, 그는 몽블랑 배에서 폭발물에 불이 붙어 대피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뉴브런즈윅의 세브르존에서 오늘 여객열차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모스 부호를 통해 긴급 경고를 보내고 친구와 함께 대피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혼자 돌아와 다음과 같은 긴급 메시지를 폭발직전까지 계속 보냈습니다.
Hold up the train. Ammunition ship afire in harbor making for Pier 6 and will explode. Guess this will be my last message. Good-bye boys.번역 : 지금 즉시 모든 열차를 정지시킵시오. 항구 6부두에서 인화성 물질을 싣은 배에 불이 붙었으며 곧 폭발할 것입니다. 아마 이게 제가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일 것입니다. 안녕 친구들.콜먼의 전보로 핼리팩스로 향하는 열차는 모두 정지했으며 세인트존에서 출발한 열차는 즉시 정차해 300명의 승객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폴만 자신은 전보를 계속 보내던 중 폭발로 인해 즉사했습니다.
최초로 생존자들이 구조를 시작했으며, 이후에는 경찰서, 소방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구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구호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HMS 하이플라이어, HMS 나이트템플러, HMS 칼가리안 등이 핼리팩스에 도착했고 연안구호정 USCG 모릴도 지원에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이 폭발이 독일 제국군의 공습으로 추정되었으나, 이후 시민들의 여러 증언과 정황상을 통해 사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호 작전에도 불구하고 사고 다음날인 12월 7일 핼리팩스 전역에 눈폭풍이 불어 41cm의 눈이 쌓였고, 캐나다, 미국에서 출발한 열차가 멈춰섰고 전보 시설도 끊겼으며 많은 생존자가 추위로 사망했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구조대는 눈보라 속에서도 계속 구조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조 노력이 있었지만, 핼리팩스 반대편의 다트머스에는 쓰나미 피해를 입어 100명 가까이가 사망했으며, 근처의 캐나다 원주민 미크마크인 거주지는 20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쓰나미 피해로 전멸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 지역의 공동체는 사고 이후 "소멸"하여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 외에는 알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핼리팩스 대폭발로 인해 좌초된 SS 이모)
이 폭발로 인해 최종적으로는 2,000명이 사망하고, 사고 직후 폭발, 붕괴, 충격파 등으로 1,200명이 즉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구조 노력은 1919년까지 이어져 1919년 여름까지 계속해서 시체가 발굴되었습니다. 6,000명의 중상자를 포함한 9,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1,630채의 집이 완전 파괴, 12,000채 이상의 집이 파손되었으며 6,000명이 난민이 되고 25,000명이 실향민이 되어 제대로 된 시설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이 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사망한 노바스코샤 주의 사망자보다 더 많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재산 피해는 1917년 당시 가치로는 3,500만 캐나다 달러, 현재 가치로 5억 4,500만 캐나다 달러(한화 5,135억원)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사고 이후, 1917년 12월 13일 핼리팩스 법원에서 핼리팩스 대폭발 진상규명위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1918년 2월 4일 위원회에서는 SS 몽블랑의 선장 르 메디치와 도선사 맥키, 방잠망 총책임자 F. 에반 와이엇에게 충돌을 막지 못한 책임이 있다고 발표했고, 3명은 모두 체포되었습니다. 세 사람 모두 과실치사와 직무 태만 등의 혐의로 소송에 넘겨졌는데 노바스코샤 주 대법원의 판사 벤자민 러셀은 혐의에 대한 증거가 없음을 지적하여 1918년 4월 17일까지 모든 재판이 기각되었습니다.
조사위원회의 재판관은 1918년 4월 27일 민사소송을 시작하여 1919년 5월 19일 캐나다 대법원의 판결, 1920년 3월 20일 영국 런던의 추밀위원회의 판단에서는 몽블랑 호와 이모 호 모두 동등한 책임이 있다고 결론내렸습니다.
이후, 몽블랑 호의 선장 르 메디치 선장은 프렌치 라인 회사에서 계속 근무했으나, 와이엇 사령관은 핼리팩스를 떠나 선원으로 근무했으며, 프랜시스 맥키는 핼리팩스에 계속 남았습니다. 이후 맥키는 도선사 자격증을 반납하고 1921년 사망했습니다.
이 핼리팩스 폭발의 여파는 계속 남았는데, 이후 뉴욕타임즈는 히로시마 핵 투하에 대해서 "핼리팩스 대폭발의 7배 위력"이라고 설명하는 등 현대에서도 그 이름이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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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하게 핼리팩스 대폭발 사고에 대해서 써보았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글을 자주 쓸려고...는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많이 올리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첫댓글 이게 핵폭발보다 더 세나요?
히로시마 폭발의 1/7, 대략 TNT 2.7Kt 정도됩니다.
@two2019 근데 싣고 있던 화물은 1천톤인데 폭발력이 그보다 2.7배 강하다면, 싣고 있던 물질들이 TNT보다 더 폭발력이 강한 물질들인건가요? 석탄 운반선과 충돌했지만, 석탄은 폭발할 정도로 인화력이 좋지는 않으니까...
@앙겔루스 노부스 벤젠+피크린산 증기폭발 + 톨루엔 등등 위험물질을 다수 싣고 있었는데 저것들이 섞이면서 강력크한 폭발이 나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휴~~무섭내요
이탈리아는 뭘까
1769년 브레시아의 화약고에 번개가 떨어졌는데 거기에 5만톤의 흑색화약에 불이 붙어 폭발해 3천명이 사망한 사고입니다
@two2019 당시 브레시아 시가지의 60프로가 증발했습니다
우와. 엄청나네요.
대단한 사건인데 전혀 알려지지 않았군요 한국에는... 흥미... 롭다기엔 비극적이지만 하여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리역 폭발사고와 비교해 보고 싶군요...
선장은 어떻게 산건지 궁금하네요
말머리 달아주세요.
오늘 하루종일 폰으로밖에 접속을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