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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15일 한가위
제1독서 : 요엘 2,22-24.26ㄱㄴㄷ
제2독서 : 묵시 14,13-16
복 음 : 루카 12,15-21
그때에 예수님께서
15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보람 가득한, 후회 없는 삶
-찬미, 인내, 자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 추석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우리는 아침성무일도 초대송 후렴을 흥겹게, 힘차게 부르며 한가위 하루를 열었습니다.
“한가위를 맞이하여 오곡 백과를 지어내신 주님께 어서와 조배 드리세”
나름대로 마련한 오곡백과를 제대상 앞에 차려 놓고
주님께 찬미와 감사의 미사성제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저절로 인생사계人生四季, 우리 인생의 계절을 헤아려 보게 됩니다.
가을 나이에 접어들었다면 주님께 봉헌할 우리 삶의 열매들은,
믿음의 열매, 희망의 열매, 사랑의 열매 등 신망애信望愛의 열매들은
잘 익어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는 인생 가을이기도 합니다.
아침기도시 세 후렴 역시 흥겨웠습니다.
“주님의 집 안에 심어진 그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꽃 피리이다.”
“우리 주 천주께 노래 부르세.”
“그지없이 크오셔라, 주님을 찬미하라.”
참 역사가 깊은 한가위 축제입니다.
가을 계절의 한가운데에 속하므로 중추中秋요 명절이기에 중추절仲秋節이라 하여
동양 문화권에 속한 중국, 일본, 월남, 태국에서도 이날을 큰 명절로 즐깁니다.
한가위라는 말은 신라시대에 비롯된 우리 고유의 토착어요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고려가요와 동국세세시기, 열양세시기 등 한가위에 대한 소상한 기록도 흥미롭습니다.
“한가윗날은 목욕재계, 화려한 옷을 입고 ‘추석부슴’이라 하여
송편, 밤단추, 대추단자. 토란국 같은 것을 먹는다.
이와 같은 둥근 모양의 음식을 먹는 것은 달의 둥근 형상을 상징한 것이다.
추석 5일 전에 조상묘의 벌초를 하고,
추석날 자손들을 이끌어 햇곡으로 만든 음식과 햇과일, 햇곡식으로 빚은 술을 마련하여
성묘 차례를 지내는 것은 후손된 도리요 민족의 미풍이다.
낮과 같이 밝은 달 아래에서 줄다리기, 돌싸움, 씨름, 그네뛰기, 널뛰기 등
여러 가지 오락과 흥겨운 노래와 춤으로 지낸 것은
우리 조상들의 멋과 운치와 여유 있는 생활철학과 마음의 자세를 엿볼 수 있어
이 겨레됨을 자랑으로 여긴다.”
‘찬미의 노래’ 기도서의 소개된 추석에 대한 설명입니다.
정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아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민족 고유의 최대 축제날임을 깨닫게 됩니다.
매일 인생 축제의 날을 살 수는 없을까요?
후회 없는, 보람 가득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어제 읽은 재미있는 글에서 착안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후회하는 세 가지 '걸'이 있다고 합니다.
'좀 더 즐겁게 살 걸’ ‘좀 더 참을 걸', 그리고 '좀 더 베풀 걸' 이라고 합니다.
정말 이 세 가지를 꼭 기억하고 살면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 강론은 이 세 가지 ’걸’과 말씀을 연관시킨 묵상 나눔입니다.
첫째, 찬미의 삶입니다.
주님 베풀어 주신 삶에 감사할 때 저절로 찬미의 삶입니다.
찬미의 기쁨을 능가하는 기쁨은 없습니다.
‘좀 더 즐겁게 살 걸’, 바로 찬미의 삶이 저절로 즐겁게 사는 길을 열어줍니다.
바로 오늘 한가위는 가장 하느님을 찬미하여 즐겁게 사는 하루입니다.
우리 조상은 추석을 전후해 노래와 춤을 즐겼는데, 음악과 노래와 춤이 어우러져 하나 되는
‘악가무일체樂歌舞一體’의 경지를 즐겼다 합니다. 참 멋진 조상들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1독서가 가을 한가위 축제와 잘 어울립니다.
회개한 이들 위에 한량없이 쏟아지는 축제의 기쁨입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 포도주와 햇 기름이 넘쳐흐르리라.”
얼마나 흥겹고 신바람 나는 축제의 현장인지요.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한껏 배불리 먹고,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하신 주 우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오늘뿐 아니라 평생을 하루하루 기쁘고 즐거운 축제의 날을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죽을 때, ‘좀 더 즐겁게 살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둘째, 인내의 삶입니다.
인내의 덕이 인생가을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인내는 바로 믿음입니다.
겨울, 봄, 여름의 온갖 풍상고초를 견뎌냈기에 가을의 풍성한 수확입니다.
도대체 인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견뎌낼 때 구원입니다.
우리 분도수도자들의 정주서원도 결국은 믿음의 서원이자 인내의 서원입니다.
초지일관初志一貫. 시종여일始終如一의 한결같은 인내의 믿음입니다.
이래야 죽을 때 ‘좀 더 참을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요한 묵시록 제2독서에서 착안했습니다. 하늘과 성령의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하늘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바로 ‘주님을 믿다가 죽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주님을 항구히 인내하며 믿은 이들이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이들은 절대로 주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인내와 믿음으로 종말론적 심판의 날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심판의 날을 기뻐할 것이니 바로 심판의 날이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없는 인내로 견뎌내며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실 찬미의 기쁜 삶이 인내의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래야 죽을 때, ‘좀 더 참을 걸’하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셋째, 자선의 베푸는 삶입니다.
베푸는 자선의 삶이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돈이 없어서 베풀지 못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돈이 없어도 착한 마음, 순수한 마음만 있으면
친절과 선행, 미소로 얼마든지 어떻게든 베풀 수 있습니다.
탐욕을 경계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참 적절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요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줘도 건강을 살 수 없고, 생명을 살 수 없습니다.
생명은 재산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 인색보다, 탐욕보다 추한 것은 없습니다.
베푸는 무욕의 삶이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 줍니다.
이기욕의 감옥에 갇혀 베풀 줄 모르는 사람보다 불쌍하고 초라한 사람도 없습니다.
부자이면서도 인색으로 베풀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이들은 바로 오늘 복음의 부자처럼 땅에 보물을 쌓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입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땅에 보물을 쌓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
다음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확연히 드러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마련하면서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부자를 탓하거나 흉보지 못합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부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해 회개를 촉구하는 예화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베풀 줄 아는 이들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진정 부자들입니다.
가난한 듯하나 진짜 부자들입니다. 이래야 죽을 때, ‘좀 더 베풀 걸’ 하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 세 가지 후회를 한다 합니다.
‘좀 더 즐겁게 살 걸’ ‘좀 더 참고 살 걸’ ‘좀 더 베풀며 살 걸’
이렇게 3걸의 후회의 삶이 되지 않도록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보람찬 삶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 찬미의 삶입니다.
2. 인내의 믿음입니다.
3. 자선의 베푸는 삶입니다.
이렇게 산 이들의 마지막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유언의 고백은 셋으로 요약될 것입니다.
1. 미안합니다.
2. 감사합니다.
3. 사랑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찬미와 인내, 자선의 보람 가득한,
후회 없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마다 자신이 부러워하는 대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능력이나 재주, 소유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성격이라든지 생활습관이 부러울 경우가 있지요.
저 역시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늘 책상 위나 책상 서랍 속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스케줄 조정을 잘해서
일상을 깔끔하게 정리하며 사는 사람이 제일 부럽습니다.
저도 한 때 그렇게 해보려고 했었습니다. 바로 작년 안식년 때였지요.
습관을 들이면 분명히 저 역시 깔끔하게 정리하며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억지로라도 매일 정리와 청소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제 집을 방문한 사람들이 “신부님이 원래 이렇게 깔끔하셨어요?”라고 말할 정도로 말이지요.
이런 저였는데, 왜 아직도 정리 잘 하는 사람을 부러워할까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바쁜 일상이 계속되다보니 정리정돈은 늘 뒷전으로 밀려났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정신없이 난리법석을 칩니다.
분명히 1년 동안 연습을 잘 했다고 생각했고, 앞으로도 저의 습관이 되어서 잘 될 것 같았는데 왜 안 될까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기 때문입니다.
작년의 안식년 때에는 일 순위가 정리정돈이었으니 깨끗하게 정리하고 청소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성지의 일과 강의가 우선순위에 있으니 다른 것들을 소홀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어디에 우선순위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생활 자체가 바뀔 수 있습니다.
내가 정말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반드시 해야 할 우선순위에 넣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요한 것들을 행하지 않게 됩니다.
지금 현재 ‘새벽 묵상 글’을 16년째 거의 빠짐없이 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기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기 때문이지요.
만약 다른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새벽에 힘들게 일어나 기도와 묵상을 하고서
글을 쓰는 것을 뒤로 미루다가 결국은 하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우선순위를 두라고 하십니다.
물론 세상의 것들이 더 중요해보이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통해
세상을 보다 더 쉽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과연 필요한 것일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필요하지 않은 것들에 매어 있다가
정작 하느님 나라에서 필요한 것들을 행하지 못해서 후회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과연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을까요?
오늘은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이지요.
한가위를 맞이하여 특별히 우리들은 돌아가신 조상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갖습니다.
그리고 조상님 영혼이 주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으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는 내 자신이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묵상하게 됩니다.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한가위-계절의 정의대로 베푸시는 하느님 사랑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주었다.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올해 따라 오늘의 제 1독서 요엘서를 읽다가 다른 해에는 지나쳐간
<정의에 따라>라는 말씀이 특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비를 주시는 것이 정의에 따라 주시는 거라니 이것이 무슨 뜻일까?
올해는 왜 이 말씀이 유독 내 눈 안에 들어온 것일까?
정의에 따라 비를 주신다는 것은 불의한 사람에게는 안 주신다는 뜻일까요?
불의한 사람에게는 비를 안 주신다면 그것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하느님께서는 똑같이 비를 주신다는
주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정의에 따라>는 인간의 정의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느님 당신의 정의에 따라 비를 주신다는 뜻일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기분 내키는 대로 비를 주시기도 하고
안 주시기도 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계절의 정의대로 비를 주십니다.
그런데 계절의 정의란 말이 생소하시겠지요?
그렇지만 진정 하느님은 계절의 정의대로 은혜를 베푸시어
마침내 가을이 되면 모든 풀과 나무들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정의대로 하면,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계절의 정의대로 하면
자연은 우리에게 풍성한 결실을 맺어주고 올해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이 가을 벼농사를 다 뒤집어엎는답니다.
쌀값이 반으로 뚝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랍니다.
지구촌 어느 곳에서는, 아니 멀리 갈 것 없이 우리의 북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우리나라는 재고 쌀이 많아 농민들이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남는 쌀을 북한이나 가난한 나라에 보내준다면
우리 농민들도 살고 굶주리는 지구촌 사람들도 살게 될 텐데
자기 곳간만 가득 채우려고 하다가 오히려 서로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는 결실을 많이 거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실을 잘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고
우리 신앙인에게는 이 나눔이 더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결실을 거두는 것은 하느님께서 해주셔야만 되는 일이지만
결실을 나누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는 계절의 정의대로 풍성하게 거두게 해주시지만
결실을 나누는 것은 우리의 사랑 만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없이 욕심만 많다면 서로 자기 곳간만 채우려다 모두 빈곤해지지요.
사랑은 모두 풍성하게 하지만 욕심은 모두 가난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산해진미와 똑같이 긴 젓가락을 가지고 있지만
지옥에서는 모두 자기 입에만 넣으려다 아무도 먹지 못하지만
천국에서는 서로 상대의 입에 넣어주시기에 모두 배부르다는 얘기대로지요.
많이 거두는 것보다 잘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모두가 깨닫게 되는 올해 한가위 명절이기를 빕니다.
그래서 우리의 나날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올해 한가위만 같게 되기를!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많은 분들이 가족들과 함께 정겨운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저는 지하철로 가면 되지만, 자가용을 이용하는 분들은 어쩔 수 없이 교통체증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이 조금 힘들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가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지도를 보면서 운전을 했지만 요즘은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운전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잠깐 딴 생각을 하면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지나칠 경우가 있습니다.
의정부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5번이나 길을 놓쳤습니다.
동부간선도로에서 길을 놓쳐서 외곽순환도로를 탔습니다.
송추 쪽으로 가야 하는데 또 잘못해서 별내 방향으로 갔습니다.
북부간선도로를 타야 하는데 이번에도 깜빡해서 구리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돌아서 동부간선도로를 만났습니다.
석관동에서 내부순환도로를 타야 하는데 이것마저 지나쳐서 청량리로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안으로는 명동 갈 거야’라는 위로의 말을 들었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습니다.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명동으로 왔으니 참 다행입니다.
어찌 운전만 잘못된 길을 가겠습니까? 바른 인생길을 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겨우 다섯 번 길을 놓쳤지만 수도 없이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길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고, 잘못된 길인지 알면서도 방향을 돌리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금 잘못된 길로 가고 말 거라고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이끄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근심’입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근심 때문에 지금 기쁜 마음이 사라지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걱정하고, 근심하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로 오십시오.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굳이 단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오로 사도도 박해의 상황에서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두 번째는 ‘교만’입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과 멀어진 첫 번째 잘못도 교만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권력이라는 옷을 입은 사람들은 교만하기 때문에 커다란 낭패를 보곤 합니다.
우리 사회는 그것을 ‘갑질’이라고 부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교만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당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첫째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려고 하십시오.’
하느님의 아드님이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겸손함입니다.
세 번째는 ‘욕심’입니다.
산에 둥지를 트는 새는 가지 하나면 만족합니다.
사람만이 산 전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샘에서 물을 먹는 다람쥐는 목을 축이면 미련 없이 길을 떠나기 마련입니다.
사람만이 샘을 자기의 것인 양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가난, 질병, 헐벗음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구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구별에 넘치도록 풍요로움을 주셨습니다.
다만 우리의 욕심 때문에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은 이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물은 끊임없이 아래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비로소 넓은 바다에 이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황금의 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살아갑니다. 분명 황금의 제국은 매력이 있습니다.
돈이 주는 힘과 매력은 아주 크기 때문입니다.
좋은 집, 멋진 차, 화려한 식탁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좋은 집으로만은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멋진 차만으로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를 할 수 없습니다.
화려한 식탁으로만은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감사하는 마음, 고마워하는 마음, 나누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둥근 보름달이 태양보다 더 크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저 달은 태양보다 작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 화려해 보이고, 좋아 보이지만 영원한 생명과 바꿀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진주를 발견한 농부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농부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진주를 산다고 하였습니다.
진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금으로는 얻을 수 없고, 명예로는 가질 수 없으며,
권력으로는 뺏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근심, 교만, 욕심’이라는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오늘은 추석입니다.
덤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종로의 막걸리 집에 사람들이 글을 벽에다 적어 놓았습니다.
보통은 ‘지연 영철 사랑해, 개똥이 왔다 가다, 왔노라, 마셨노라, 취했노라.’와 같은 글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새로운 십계명’이라는 글을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하긴 예수님께서 진복팔단을 알려주신 지 2000년이 지났으니
새로운 계명이 나올 때도 된 것 같습니다. 한번 읽어 드릴까요?
1. 일일이 간섭하지 말 것
2. 이말 저말 옮기지 말 것
3. 삼삼오오 모이는 곳에 열심히 참석할 것(구역, 반 모임입니다.)
4. 사력을 다해 싸우지 말 것
5. 오기로 일 그르치지 말 것
6. 육체적 스킨십을 많이 할 것
7. 칠십 퍼센트로 만족할 것
8. 팔팔하게 활동할 것
9. 구구 절절 변명하지 말 것
10. 십 퍼센트는 남을 위해 살 것
저는 그중에서 10번째가 가장 맘에 들었습니다.
‘십 퍼센트는 남을 위해서 살 것!’
여러분은 어떤 계명이 맘에 드셨는지요?
탐욕의 끝
전삼용 요셉 신부
남미를 여행할 때 잉카인들의 유물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금이 많아서 짐승까지도 금으로 장신구를 만들어 치장시킬 정도였습니다.
그들에게 금은 단지 몸을 치장하는 금속일 뿐 그것이 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금은 해님의 땀, 은은 달님의 눈물로 불렸습니다.
그들에겐 돈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모든 가치는 노동력으로 측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532년 피사로라는 사람이 엘도라도의 전설을 찾아 잉카를 찾았습니다.
엘도라도는 금으로 치장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금이 가득 찬 연못일 수도 있고 금으로 된 산일 수도 있습니다.
까하마르까 전투를 거친 후, 안데스 산맥의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현재까지 채굴된 은은 62,000톤입니다.
당시 잉카인들은 왜 유럽인들이 금과 은에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겐 금과 은은 휴대할 수 있는 권력이며 가치의 저장소이고 계산의 단위였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강제 노동제를 적용하였는데, 포토시에 들어간 사람 8명 중 1명은 살아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약탈당한 잉카인들을 포함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거의 멸종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금과 은을 들여온 스페인은 더 부유해졌을까요?
그 당시는 스페인 경제가 살아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내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고 경제는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은을 많이 들여오면서 그 값어치가 떨어지는 반면 물가는 치솟았기 때문입니다.
이내 은화는 쓰레기처럼 취급되게 되었고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해졌습니다.
탐욕은 타인만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종국엔 자신까지 죽입니다.
어떤 탐욕스런 논의 주인이 위에서 내려오는 물을 자신만 받아쓰고 밑으로 흐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논으로부터 물을 받아야했던 논들의 벼는 약해져서 병이 들게 되었습니다.
쌀값이 오를 것을 기뻐하던 탐욕스런 주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밑에서 시작된 병충해가 자신의 벼까지 모두 죽이게 된 것입니다.
내가 더 가지면 그만큼 타인이 적게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탐욕은 폭력입니다.
그런데 탐욕은 결국 자신까지 죽이게 되어 있는 자신에 대한 폭력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가 벌어 내가 쓴다는데 무슨 폭력이니 죄이니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게으르고 나는 부지런하고 그들은 흥청망청 쓰고 나는 절약해서 부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마존 부족이나 혹은 북한에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살 수 있을까요?
성경의 부자와 거지 나자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부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지옥에 가게 됩니다.
부자인 것 자체가 어쩌면 폭력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부자일 수는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누군가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재회가 돌아가게 하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진 사람은 그만큼 더 나누어야 하는 의무까지 함께 주어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내어주는 호수입니다. 자신도 생명으로 가득 찼고 주위도 생명으로 가득 찼습니다.
반면 갈릴래아로부터 물을 받아들이는 사해는 그 반대입니다. 내어주지 않습니다.
자신도 죽었고 물을 쭉쭉 빨아들이기 때문에 주위도 황량한 소금사막으로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노력해서 내가 많은 돈을 쌓아놓겠다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진 것을 내어놓지 않으면 분명히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아 호수가 받아들인 불을 강물을 통해 내어보내야 하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무언가를 가진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혼자서 살게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듯이 지나치게 탐욕을 내어 쌓아놓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교만이 숨어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 안에서 부자가 창고를 늘리는 바로 그날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쌓아 놓은 이유는 내일도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관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생각하기에 내일도 당연히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총량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세상 것은 믿을 수 없고, 세상 것을 믿으면서 하느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믿는 것과 한 운명을 맞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있으면 영원할 수 없습니다.
가라앉는 배를 꼭 쥐고 있으면 그 배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갈릴래아 호수처럼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가진 것을 내어줄 줄 알아야합니다.
그렇지만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한다면 무엇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어떻게 나눌 줄 아는 사람에게 더 많이 채워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밭에 밀알 하나가 떨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내가 나누는 것은 수십 배의 보상으로 돌아옵니다.
어느 마을의 최부자 가문은 오랜 세월을 부자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가훈이 ‘돈은 똥이다’라는 이유였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으면 썩어서 나에게 해를 입히지만
나누면 거름이 되어 더 많은 이익이 되어 돌아온다는 진리를 품고 있습니다.
나누는 사람을 굶게 만드시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나무가 참나무라고 합니다.
참나무는 잎도 약으로 쓰이고 나무는 단단하여 목재로 쓰입니다.
그리고 오래 타서 불을 때기에도 좋고 숯은 참숯을 알아줍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내어준다면 사람들이 더 많이 베어서 멸종이 되어야할 텐데
어떤 나무보다도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어놓는데 있습니다.
가뭄이 들면 더 많은 도토리를 맺는 참나무는 음식이 부족할 때 동물들에게 더 많은 식량을 제공합니다.
동물들은 그것들을 나르다가 놓치기도 하고 다람쥐는 자신이 파묻어놓은 도토리들을 많이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것들이 모두 땅에서 자라나 나무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내어주면 더 많이 받게 되어있는 것은 하늘의 이치고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모든 재물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웃들에게 흘러가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막아버리면 하느님께도 이웃들에게도 목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피가 흐르지 않으면 죽듯이 모든 것도 나에게 들어와 다시 나가지 않으면 썩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풍요로운 한가위, 우리 모두가 풍요롭게 되는 길은 바로 나눔뿐입니다.
풍요를 위해 가두어 놓은 것을 열어 세상을 비옥하게 합시다.
어떤 부자 가문은 돈을 똥으로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머물러 있으면 내 안에서 썩어버리지만 밖에 뿌려지면 곡식이 많이 달려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우리의 한가위입니다.
명절을 통해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고향은 옛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과거의 고향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의 행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의 수확은
주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가 진실로 믿는 것입니다.
곡식을 수확하시듯
우리의 행복을 무르익게 하시는 분 또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주님은
탐욕을 내려놓게 하시는
순리를 일깨워주시는 주님이십니다.
탐욕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모든 생명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생명은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겸손한 생명입니다.
더 많은 재산과 재물이 아니라
우리의 목숨에 기뻐하는
한가위 명절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욕심과 기대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의 부유함이
우리의 어리석음을 치유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시간에
함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리 또한 무의미하고
우리의 수확 또한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생명과 기쁨의
한가위 축제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소중한 분들 모두
하느님 안에서
기쁨과 용기를 되찾는 한가위 되십시오.
무엇이
참으로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먼저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