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이씨 시조 고려말 사재 동정 이무재
광평(廣平)은 성주(星州)의 고려 때 이름으로, 성주(星州)는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하여 본래 신라 본피현(本皮縣)이었던 것을 757년(경덕왕 16)에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하여 성산군(星山郡)에 속하게 하였다. 그 후 벽진군(碧珍郡)으로 개칭하고 치소(治所)를 지금의 성주읍(星州邑)에 두었다. 고려 940년(태조 23)에 경산부(京山府)로 개칭하였다가 981년(경종 6) 광평군(廣平郡)으로 강등한 바 있으나, 995년(성종 14) 대주(垈州)라 칭하여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다.
1012년(현종 3) 단련사(團練使)를 폐하고 1018년(현종 9)에 경산부(京山府)로 승격, 1308년(충렬왕 21)에는 성주목(星州牧)으로 하였으나 1310년(충선왕 2)에는 경산부(京山府)로 강등하였다. 조선 태종(太宗) 때 성주목으로 다시 승격, 그 후 1895년(고종 32) 성주군(星州郡)으로 개칭하였다. 광평 이씨(廣平李氏)의 시조(始祖)는 성산(星山: 성주의 고호)에 토착 세거(土著世居)한 사족(士族)으로 고려 말에 사재 동정(司宰同正)을 지낸 이무재(李茂材)이며, 그의 증손(曾孫) 능(能)이 나라에 공을 세워 광평(廣平: 성주의 고호)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광평(廣平)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지금은 성산(星山)으로 쓰고 있다. 본래 성주(星州)에는 여섯 가문의 이씨(李氏)가 세거(世居)하면서 조선(朝鮮) 정조(正祖) 이전까지는 다같이 본관을 성주(星州)로 사용했으나, 그 후 각각 성주(星州)·광평(廣平)·성산(星山)·경산(京山)·벽진(碧珍)·가리(加利)로 본관(本貫)을 달리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호성(好誠)이 조선 세종(世宗)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벼슬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옥포 만호(玉浦萬戶)를 지낸 희조(希祖)는 호성의 손자로 부모 봉양을 위해 벼슬을 사양했으며 조부(祖父 : 호성)를 위해 동산정(東山亭)을 세웠다. 순조(順祖)는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성종조(成宗祖)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으나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개탄,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했다. 그외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전장에서 순절한 령(伶)은 통정대부(通政大夫)·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고, 명신은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지냈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와 이 괄(李 适)의 난 때 공훈이 있어 훈권(勳券)을 두차례나 받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평·성산 이씨(廣平·星山 李氏)는 남한에 총 16,812가구, 67,5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광평이씨 시조 고려말 사재 동정 이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