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 '육룡이 나르샤'라는 드라마가 인기라지요. 여기에 한 누리꾼의 댓글이 화제가 되었답니다.
'개혁은 정몽주처럼, 혁명은 정도전처럼, 인생은 하륜처럼'이라는 댓글에 답글이 달렸습니다.
'화장은 길태미처럼!!'
삼한 제일검이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나요? 그렇지요. 다 재밌자고 하는 얘기입니다.
재미지게 그러나 분명하게 사도세자 죽음의 비밀에 한번 접근해 봅시다.
먼저 뭐...저는 영화 '사도'를 보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제가 거론하는 내용은 '송시열과 그 들의 나라''조선 왕 독살사건''사도세자의 고백'-이덕일,
'영조의 세가지 거짓말'-김용관 등의 책에서 거론되는 사실만을 바탕으로 합니다.
또 하나의 전제는 한국 사학계의 두가지 갈래입니다.
일제 조선총독부내 조선사편수회의 총무였고, 조선총독 데라우찌의 양자였던 이병도박사가 이끌었던
식민사관론자들을 편의상 강단사학이라 부릅니다. 해방후 대학 강단으로 많이 진출하였기 때문이죠.
이에 반해 강호사학, 재야사학, 민족사학으로 대표되는 인물이 위에 언급한 책들의 저자들입니다.
따라서 다음에 적시할 사실들이 어느 쪽의 시각인가는 미루어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한번 썰을 풀어봅시다.
먼저 사도세자의 큰 아버지를 알아야 합니다. 경종입니다.
경종의 아버지는 숙종입니다. 엄마는 장희빈입니다.
숙종의 큰 마누라가 인현왕후 민씨입니다.
당시 노론은 인현왕후, 소론과 남인은 장희빈.
숙종의 절묘하고도 거듭된 환국책으로 장희빈은 사사당합니다. 남인의 몰락.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소원을 말합니다.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게 해달라.
부름을 받고 달려온 아들의 아랫도리를 장희빈은 저주를 퍼부으면서 훓어버립니다.
숙종의 씨를 끊겠다며. 그 결과 경종은 생식능력을 잃어버리고 또한 정신적 충격도.
숙종 사후, 경종이 등극합니다. 당연하지요, 세자니까.
노론은 호시탐탐 경종의 목숨을 노립니다. 장희빈의 복수가 시작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경종은 면벽참선(?)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노론은 초조해집니다.
사실 경종은 그 참혹한 일을 겪은 후 트라우마로 인해 통치능력은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마침내 경종이 병석에 눕습니다. 경종의 후사가 없어(없을 수 밖에 없겠지요...)
왕세제로 책봉된 연잉군(영조)이 병구완을 맡습니다.
실제로도 형제의 우애는 돈독했다 합니다. 다만 배가 달랐을 뿐...
연잉군(영조)은 숙종의 세번째 부인인 숙빈 최씨의 아들입니다.
무수리출신이라고 알려진... 드라마에선 '동이'라고 부르지요.
이 동이를 숙종에게 밀어넣은 인물이...김춘택입니다. '사씨남정기'를 지은 김만중의 장조카입니다.
노론이지요. 김춘택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어쨌든, 진시황을 잉태시킨 채 소양왕에게 조희를 들여보낸 여불위에게서 힌트를 얻었다고...
까지만 말씀드립니다.
경종의 병석. 갑자기 대비전에서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내립니다.
이 때 대비는 인원왕후 김씨입니다. 노론 집안에서 컸고, 숙종의 계비입니다.
때는 음력 8월. 게장은 식중독을 일으키기 쉽고, 생감은 소화가 잘 안되는 음식입니다.
게장과 생감을 먹은 경종은 심한 복통과 설사로 탈진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왕세제 연잉군은 인삼과 부자를 처방케 합니다. 어의 이공윤은 극력 반대합니다.
그러나 왕세제의 고집을 꺽지 못하고 인삼과 부자를 진어하고, 다음 날 새벽 경종은 승하합니다.
노론의 사주를 받은 영조의 경종 독살설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과거장에서 영조를 비난하는 글을 쓴 선비 둘을 영조가 친국합니다.
왜 나를 욕하는가?- 몰라서 묻소? 군이 왕이 된 이후로 나는 게장과 생감을 먹지 아니하오.
이인좌의 난도 경종 독살의 죄를 묻기 위한 거병이었습니다.
이 때 신기전을 동족에게 쏘도록 명령한 사람도 영조입니다.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 광증이 있습니다. 사람을 때려죽이기도 합니다.
그 증상이 나타나기 몇 년전, 사도세자가 새벽월담을 합니다.
말을 달려 큰 아버지, 즉 경종의 묘에 도착합니다.
울면서 고뇌합니다. 사직을 바르게 보존해야 되오리까, 부정을 따라야 되오리까...
형제를 독살한 아비의 단죄 여부에 대한 카오스적 번민이 시작되고,
이 일은 노론의 입을 거쳐 영조의 귀에 들어갑니다.
매일 밤 자객을 보냅니다. 남인이 연잉군에게, 노론이 훗날 정조에게 보냈듯이.
밤마다 처소의 지붕 기왓장 밟는 소리를 영,정조는 이겨냈지만, 사도세자는 견디지 못했습니다.
자식을 암살하려는 아비가 무서울 뿐이고.
조선조 마지막 개혁군주 정조의 즉위일성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입니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씁니다. '恨中錄'이 아니라 '閑中錄'입니다.
恨이 맺혀 쓴 글이 아니라 閑가할 때 쓴 글입니다.
한중록은 총 4편입니다. 1편은 정조때 쓰여집니다.
나머지 2,3,4 편은 정조 사후 순조때 쓰여집니다.
정말 한가할 때를 기다렸나 봅니다.
1편에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이렇다 할 언급은 없습니다.
정순왕후(영조의 계비)가 죽고난 후 쓰여진 4편에서 적극적으로 친정 풍산 홍씨의 변명에 나섭니다.
정조 즉위후, 사사한 혜경궁 홍씨의 삼촌인 홍인한, 동생 홍낙임,
그리고 실각한 아버지 홍봉한의 명예회복을 손자인 순조에게 한중록을 통해 부탁합니다.
사도세자의 뒤주 사건을 배후에서 기획했다는 역사의 오점을
노론 명문인 친정이 지지않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친정조카의 부탁을 받은 71세의 노구가.
한중록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남편은 아버지가 무서워 미쳐버렸다. 그래서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직접 미친 아들을 죽였다. 우리 친정은 연.관.이. 없.다. 입니다.
조선시대 여성은 시집을 가더라도 남편 성을 따르지않고 자기 성을 썼습니다.
일본이나 미국과 달리.
조선시대에도 여성의 위상이 높았다는 반증이라 말들 합니다. 역사학자들이.
두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하나. 여자따위에게 절대 우리 집안의 성을 주지못한다는 여성비하적 관점.
둘. 시집가더라도 우리 집안의 성씨를 꼭 지키라는 가문독존의 관점.
역사는 그런 것입니다. 해를 등지고 섰는가, 아님 바라보는가.
영어 표현에 "God's mill grind slow but sure"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의 맷돌은 느리지만 확실히 갈아준다는 뜻입니다.
진실의 맷돌은 더디지만 언젠가는 드러납니다.
한 쪽의 시각이라 논란이 있을 것입니다. 급히 쓰다보니 오류도 좀 있겠고요.
하여 태클 환영합니다.
저는 내일 서울 갑니다.
간 김에 경복궁이나 함 갔다오죠...머...
첫댓글 아이고 역사는 돌고 도는구나. 초창기에 수필집만들때 접미사 하나가지고 선배님들이 그렇게 떠들시더니만 그걸 그나이되니 십년후에 그대로. 그냥 한발 물러나 이런 관점으로도 볼 수 있구나 생각합시다. 역사를 배울려는 목적중의 하나가 사실을 따지기보다 지평을 넓히기 위함이 아닙니까?
인형 왕후 민총무 조상 아녀?
더 추잡한 사연이 있는 일본이 성공한 이유가 여러 있는데 언어학자관점에서 볼때는 일본어 억양이 좋타는 점을 강조하더리고요. 그래서 저도 말할 때 억양을 똑박똑박 좋게 하려고 노력하죠. 어떤 사실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그런 차원입니다
아유~~ 이 사랑스러운 수석 총무님은 글도 우찌이리 재미나게 썼을꼬? 기냥 내용이 파악되네... 물론 강호학파 시각적으로..
역사학자들도 지 관점으로다 역사를 재단하는 작금에 논쟁의 불을 지피는구만!
민수석총무야 생강의 좀해라 ㅡ일본우익전문가가 ㄱ
갱식이형님 나보다 더 박식하네
재밌습니다.
작년에 한참 빠져서 봤던 sbs 퓨전 사극 드라마 '비밀의 문'도 생각나고ㅎㅎ
서울 구경 잘하고 오이소~
약속대로 경복궁 인증샷 입니다. ㅋㅋ
술취해서. 유식한척합니다. 진실이 전부다 진리는 아닙니다. 못믿는 역사도 왜생겼나 밝히고 그것이 왜 실재로 있었다고 믿어졌을수 밖에 없었냐고 드러내는게 역사학자의 의무이자 평생 지니고 있을야할 숙명.
옛날 예비고사칠때 국사를 거의 빵점받은 저같은 사람은 뭔말인고 잘모릅니다. 다시다시 읽어봐야겠슴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