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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간화선 특강)
제1강 - 1부(2012.10.15.)
유인물(佛敎의 탄생과 종류. 계보. 禪의 八대정신.)
만물이 결실을 거두는 이때에 여기 또한 수행의 한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 이렇게 과거 조사스님의 뛰어난 가르침을 앞에 놓고 함께하고 있습니다.
교육을 스님들이 하든 하지 않든 우리들 스스로 자신의 공부는 인정 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자기 자신이 알고요. 이것이 진정한 인정이 아니겠습니까? 뭐 기만해서 인정을 하고 안하고는 사실은 지극히 지엽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수행자로써 출발했다면 죽는 순간까지 수행자의 본분을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본분이란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선이 됐든ㆍ간경이 됐든ㆍ염불이 됐든ㆍ행선이 됐든ㆍ포교가 됐든, 그 무엇을 하든 자기가 있는 분야에서 열심히 정진하는 것. 이것이 수행자의 본분입니다. 그 본분 중에 하나로써 우리가 이렇게 공부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에 걸쳐서 10강좌. 그러니까 상당한 시간이라면 상당한 시간인데요. 우리가 이 서장이라고 하는 교재를 앞에 놓고 보면 또한 짧은 시간입니다. 요즘 한국불교의 분위기가 禪위주가 됐습니다. 그 중에서도 看話禪(간화선)이 단연 아주 크게 宣揚(선양)을 하고 있고, 또 한편 남방에서 들어온 비파사나도 많은 분들의 관심선상에 올라있기 때문에, 이 시대에 우리가 看話禪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 이것은 출가한 스님들, 다시 말해서 불교의 프로들로써 당연히 분명하게 해둬야 할 문제가 看話禪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 간화선에 관한 지식으로써는 간화선 제 1지침서라고 하는 이 서장을 우리가 등한시하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시대적으로 看話禪이 대세이고, 그 看話禪에서 제 1지침서라고 하는 서장을, 이것을 우리가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시대에 아주 적절한 요구라고 보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이듭니다. 물론 스님들, 강원을 나오신 분들은 서장을 다 거쳤겠습니다만, 저도 서장을 강원에서 공부하고 강원을 졸업하면서 걸망을 지고 바로, 제가 늘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것이 일주문도 벗어나지 않고 강원에서 바로 선방에 올라간 사람은 아마 ‘내가 아닐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고 바로, 일주문도 나오지 않고 바로 선원으로 올라갔던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동안 공부하고 애지중지 아꼈던 숱한 책들을 다 버려버리고 오직 세 권을 선택해서 걸망에 넣었는데 그것이 서장이고, 그 다음 선요였습니다. 그리고 임제록이었습니다.
임제록ㆍ서장ㆍ선요. 이 세 권만 걸망에 넣었습니다.
임제록은 손바닥만 하니까 문고판, 간단한 문고판이었기 때문에 부피도 얼마 안 됩니다. 주머니에 넣어도 아주 가벼운 것이고 서장은 안진호스님이 편찬한 강원교재. 또 선요도 안진호스님께서 편찬하신 강원교재. 그 단 세 권만 달랑 걸망에 넣고 한 10여년 선방생활을 했는데요. 또 어느 해 지금부터 그러니까 이런 기회에 이런 이야기를 한번 해 볼 필요가 있겠네요. 1976년도 제가 서른네 살 됐을 때, 통도사 강주로 처음 부임해 갔었습니다.
그 때 가니까 강원이 흐지부지 돼가지고 삼과는 없고 사집 반이 있었습니다. 사집 반도제일 낮은 서장 반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강주로 가서 첫 강의가 통도사에서 서장부터 강의를 했었습니다.
그래 서장을 열심히 한 10여년 이상 걸망 속에서, 짊어지고 헤맬 때, 또는 방선 시간에 수시로 보아 왔던 것이고, 또 실참 하면서 서장을 보았기 때문에 그 강의에 상당히 무게가 실려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당시 통도사학인들이 “아~ 저 스님 서장강의 하는 스님” 이라고 이렇게 했습니다. 다른 강의도 할 줄 아는데, ㅎㅎㅎ 서장강의 하는 스님이라고 그래서 서장하고는 제가 인연이 참 깊고, 또 근래에는 제가 서장공부를 하면서 불교신문에 연재 하는 것 아시지요? 불교신문에 연재가 늘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래 참, 저로서는 이 강의를 맡았지요, 또 그것도 사전에 작년부터, 재작년부터인가요? 서장 강설을 불교신문에다 늘 연재를 하고, 그래서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이번 강의에 임하게 됐었습니다. 지금도 그 원고가 덜 끝났습니다. ‘한 일 년쯤 후 내년 이때쯤 되면 서장 강설 책이 완성이 돼서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시대가 이 看話禪을 선양 하는 그런 시대니까 우리 종정 스님도 간화선을 늘 선양하시고, 또 전번, 앞서 인사하신 수불스님도 선불교를 가지고 그렇게 성공했습니다. 이 회관도 오로지 간화선불교 하나 선양하는 그 덕에 이 회관이 생겼어요. 안국선원도 서울 부산 강릉 이런 등등 아주 그 지역에선 최고가는 공부 도량을 한 것도 오로지 이 간화선 덕택입니다. 간화선하나 선양해서 이렇게 포교에 큰 성공을 거두신 그런 스님이시고, 이 회상도 ‘그 결실의 하나다.’ 이렇게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요즘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냥 불교는 배울 것이 없습니다. 이제 다 갔어요. 선불교라야 이야기가 됩니다. 그 중에서도 간화선이 또 서양에서는 크게 알려져 가지고 상당히 호기심을 가지고 알고 싶어 하는 이러한 실정에 우리는 서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것을 감안해서 우리가 어떤 교재를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 간화선을 지름길로 안전히 가는 길일까? 지름길... 그것은 바로 이 간화선을 제창한 대혜스님께서 그 지침서로 내놓은 이 서장. 이것이 유일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외에 선요도 있고ㆍ선경어도 있고ㆍ몽산 어록도 있고 등등, 간화선에 관한 책자가 무수히 많지만, 서장이 그 시조로 원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서장이 그 간화선 지침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우리는 서장공부를 제대로 하고 나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참선은 누가 이야기를 해달라면 아주 자신 있게 할 수가 있고, 또 참선을 지도하는 그런 어떤 경우가 생겨도 얼마든지 이 서장에 근거해서 지도를 잘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정된 열 번의 강좌. 그것만 우리가 알뜰하게 받고 또 나눌 수 있게 필요한 메모도 하고 그렇게 한다면 아마 상당한 중요한 자리가 되지 않겠나? 이런 욕심을 가져봅니다.
오늘 우선 유인물부터 보시겠습니다.
왜 지금 看話禪인가? 佛敎의 탄생과 종류 *부처님 成道이후 成道의 내용을 녹야원에서 5비구에게 설함. *원시, 근본, 상좌, 대중, 부파, 소승, 대승, 비밀(밀교), 선(禪), 호국, 기복, 천도, 기도, 염불, (종파), (교파), 통(通), 인간(人佛思想). * 한국의 불교-화엄, 천태, 법상, 비밀, 禪, 호국, 기복, 천도, 기도, 통(通) * 선불교-觀心禪, 黙照禪, 간화선, 念佛선, 觀照선(위빠사나) * 한국의 전통선-간화선(간화선불교) 전등계보와 五家七宗, 看話禪派와 黙照禪派 대혜(大慧,1089~1163)선사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菩提達磨(보리달마)→神光慧可(신광혜가) →鑑智僧璨(감지승찬)→破頭道信(파두도신)→黃梅弘忍(황매홍인)→大鑒 慧能(대감혜능). 大鑒慧能→1.南嶽懷讓(남악회양)→馬祖道一(마조도일)→百丈懷海(백 장회해)→黃檗希運(황벽희운)→臨濟義玄(임제의현)=(臨濟宗)→興化存獎 (흥화존장). 百丈懷海→潙山靈祐(위산영우)→仰山(앙산)=(潙仰宗). 興化存獎→寶應慧顒(보응혜옹)→風穴延沼(풍혈연소)→首山省念(수산성 념)→汾陽善昭(분양선소)→石霜楚圓(석상초원). 石霜楚圓→楊岐方會(양기방회)=(楊岐派)→白雲守端(백운수단)→五祖法 演(오조법연)→圜悟克勤(원오극근) 石霜楚圓→黃龍慧南(황룡혜남)=(黃龍派) 圜悟克勤→大慧宗杲(대혜종고)=(看話禪) *대혜스님은 임제스님의 11대 법손 圜悟克勤→虎丘紹隆(호구소륭)→應菴曇華(응암담화)→密菴咸傑(밀암함 걸)→破菴祖先(파암조선)→無準圓照(무준원조)→雪菴慧郞(설암혜랑)→及 菴宗信(급암종신)→石屋淸珙(석옥청공)→(韓)太古普愚(태고보우)→幻庵混 修(환암혼수) 大鑒慧能→2.靑原行思(청원행사)→石頭希遷(석두희천)-藥山惟儼(약 산유엄→雲巖曇晟(운암담성)→洞山良价(동산양개). 石頭希遷(석두희천)→天皇道悟(천황도오)→雪峰(설봉)→雲門文偃(운문 문언)=(雲門宗). 雪峰(설봉)→玄沙師備(현사사비)→羅漢(라한)→法眼文益(법안문익)=(法眼 宗). 洞山良价→雲居道膺(운거도응)→同安道丕(동안도비)→同安觀志(동안관 지)→梁山緣觀(양산연관)→大陽警玄(대양경현). 洞山良价→曹山本寂(조산본적)=(曹洞宗). 大陽警玄→投子義靑(투자의청)→芙蓉道楷(부용도해)→丹霞子涥(단하자 형)→宏智正覺(굉지정각)=(黙照禪). *서장은 大慧書, 또는 大慧普覺禪師書다. 서기1134년 46세부터 1159년 71 세까지의 사대부들과 간화선과 불교적 견해에 대해서 주고받은 편지글 이다. 간화선불교의 지침서로서 고려 보조스님이후 8백여 년간 강원의 교과서다. *書狀의 大旨--斥邪解顯正見(척사해현정견) *禪機(선기)의 선양. 선기란 선의 체화, 인격화다. 禪機는 선의 8가지 의미와 또는 선의 8대 정신으로 표현한다. 1 簡素. 2 脫俗. 3 自然. 4 幽玄. 5 枯高. 6 靜寂. 7 變化. 8 不動. 禪佛敎의 特長(선불교특장)--聖解不留 凡情脫落(성해불유범정탈락). 즉 禪은 성스러운 견해에도 머물지 않고 범속한 생각도 벗어난 사람 의 삶이다. |
왜 지금 看話禪인가?
아마 이것은 ‘시대의 요구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여기에는 많은 이론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우선 불교의 탄생과 종류를 우리가 일거 해보면 우리가 어떤 경전이나 어떤 어록을 보더라도 처음에 이런 것 한번 쭉~~ 이렇게 그 始原(시원)을 더듬어 보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始原을 더듬어 보는 것이 또 지금 서장을 공부하게 된 그런 소위 그 까닭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늘 저는 강의를 처음 시작할 때, 지금 서장에 오기까지 불교가 탄생하고, 그 始原을 간략하게나마 한 번 더듬어 봅니다.
부처님 성도이후 성도의 내용을 녹야원에서 5비구에게 설했습니다.
그래서 원시불교, 근본불교, 상좌부불교, 대중부불교, 부파불교, 소승불교, 대승불교, 밀교 = 비밀불교, 선불교, 심지어 호국불교, 기복불교, 천도불교, 기도불교, 염불불교, 온갖 종파 교파가, 난립했었습니까? 1700년의 긴 역사니까 당연한 그런 현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통불교라는 말을 듣습니다. 通불교.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불교를 “通불교” 그래요. 참 편안하지요. 좋은 표현입니다. 그리고 제가 주로 많이 주창하는 불교가 인간불교. 그것은 人佛思想(인불사상)이라. 사람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면 그것이야말로 부처님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깨우쳐주고자 했던 그런 정신이 바로 人佛思想. 사람이 곧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사상. 그래서 “사람이 부처님이다.” 또는 “당신은 부처님.” 하는 경전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국불교는 우리가 짚어보면 화엄종, 천태종, 법상종, 비밀 = 밀교, 禪, 호국, 기복, 천도, 기도, 通불교, 이런 등등으로 볼 수가 있고요.
선불교에 들어와서도 또 觀心禪(관심선). 해가지고 초기에 선불교는 달마스님께서 觀心一法이 總攝諸行(관심일법총섭제행)이다. 그랬습니다.
觀心一法이 總攝諸行이다. 마음하나 잘 관조하면 “거기에는 모든 수행을 다 아우르고 있다.” 이 말입니다. 모든 수행이라고 하는 말속에는 6바라밀 내지 10바라밀, 기타 간경, 참선, 온갖 고유사, 기도,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수행인데, 그 모든 수행을 마음하나 관하는 것으로써 전부 그 속에 포함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한 마디로 觀心一法總攝諸行. 이렇게 표현하지요. 그래서 초기에 선불교는 觀心禪입니다. 관심선. 그 다음에 발전된 불교가 默照禪(묵조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默照禪은 앞으로 서장에서 누누이 이야기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看話禪. 그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 다음에 念佛禪(염불선)이라는 말씀도 들어 보셨을 겁니다. 많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우리 선방에서 念佛禪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몰래합니다. 누가 무슨 화두를 들었는지 소개하지 않으니까... 또 화두 아니고 다른 것으로 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 뒤에 觀照禪(관조선)이 있는데, 이것은 요즘 남방불교에서 들어온 소위 위빠사나. 비파사나라고 우리 능엄경에서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이 결국은 위빠사나인데, 이것은 지금 남방에 가서 공부해 오신 스님들도 있고, 또 간접적으로 공부하는 스님들도 있고 해서 상당히 많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화선하는 분들은 오히려 위기를 느낄 정도로 “아이고 간화선이 이제 위기를 맞았다. 왜냐? 위빠사나가 밀려와 가지고 곳곳에 수행처가 있습니다. 또 우리불교 T V같은 그런 방송 매체에서 보면 위빠사나를 아주 크게 선양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방에 앉아 있어도, 제가 간접적으로 얼른 들었는데 열 명에 한 두 사람은 화두 안 들고 위빠사나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 정도로 상당히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선불교가 있는데, “한국 정통 선은 지금 간화선이다.” 이렇게 봅니다. 한국의 정통 선은 뒤에 법맥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요. 간화선이라고 일단 이렇게 정의를 하겠습니다.
우선은 대혜스님의 傳燈系譜(전등계보)를 통해서 보면 어디쯤에 있는가? 그리고 또 이것은 우리들이 공부를 하든 못하든, 제대로 깨달았든 못 깨달았든 간에 우리는 이 순간 이 시대에 그 법계를, 부처님의 법의 정통을 자리 매김하고는 있습니다. 확철대오 해서 당당하게 법을 설명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 시대에서는 우리 힘이 여기까지입니다. 그래서 지금 어떤 상황이 됐든 간에 우리는 그 법을 이어받은 것이고, 또 그 법을 책임지고 후배들에게 전해줘야 하는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까지를 우리가 생각을 하고 대혜선사를 한번 보면 五家七宗(오가칠종)을 우리가 말할 수가 있고, 看話禪派(간화선파)ㆍ默照禪派(묵조선파). 이런 것들이 나눠지는데,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二十八祖 보리달마 → 혜가 → 승찬 → 도신 → 홍인 → 혜능. 이렇게 6조까지 내려오지요. 그 다음에 6조 스님 밑에 남악회양이 있고, 도표 밑에 보면 청원행사. 이렇게 두 분이 양대 큰 산맥인 것 잘 아시지요? 줄을 그으세요. 1번 = 남악회양. 2번 = 청원행사.
남악회양 밑에 사람들은 전부 남악회양 후손이 되고, 그 다음에
청원행사 밑에 사람들은 도표 밑에 宏智正覺(굉지정각)=(黙照禪)까지가 말하자면 청원행사 밑에 벌어진 法脈(법맥)입니다.
남악회양은 쭉~~ 내려가서 石屋淸珙(석옥청공)--(韓)太古普愚(태고보우)--幻庵混修(환암혼수)까지 남악회양 밑에 벌어진 法脈입니다. 이것이 6조 스님 밑에 양대 큰 산맥이 되는 것이지요.
대강 살펴보면 대감혜능 밑에 남악회양ㆍ청원행사.
남악회양 밑에 마조도일→백장회해→황벽희운→임제의현. 그 유명한 임제스님. 그 다음에 흥화존장이 있습니다.
또 백장스님 밑으로 내려오면 위산영우→앙산=(潙仰宗).
다시 흥화존장→보응혜응→풍혈연소→수산성념→분양선소→석산초원.
석산초원→양기방회(양기파)ㆍ황룡해남(황룡파). ←이렇게 이 두 분을 합해서 칠종. 칠가 라고도 하고, 칠종이라고 하기도 하고, 흔한 표현으로 五家七宗입니다. 양기방회ㆍ황룡해남 ←이 두 분이 들어서 七이 되지요.
석산초원→양기방회(양기파)→백운수단→오조법연→원오극근. ←그 유명한 대혜선사의 스승 원오극근입니다.
원오극근→대혜종고(看話禪). 간화선을 창시한 대혜스님은 임제스님부터 치면 11대 법손입니다. 우리나라 법손을 따지면 원오극근 밑에 대혜종고 쪽으로 가지 않고, 호구소륭 쪽으로 내려갑니다.
원오극근→응암담화→밀암함걸→파암조선→무준원조→설암혜랑→급암종신→석옥청공. 들어보셨지요. 石屋淸珙. 石屋淸珙스님밑에 가서는→(韓)태고보우스님이 법맥을 이어오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소위 한국 선불교가 면면히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청원행사 밑으로의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그 밑에 가서 굉지정각선사의 묵조선 ←이것만 기억하시고요.
서장은 大慧書. ←이렇게도 표현하는데요.
大慧普覺禪師書(대혜보각선사서). ←이렇게 했습니다. 우리 책 표지에도 보면 大慧普覺禪師書 라고 이렇게 했는데요. 이 서장은 서기 1134년 대혜스님이 46세 때부터 1159년 71세 때까지 사대부들과 간화선, 그리고 불교적 견해에 대해서, 간화선을 중심으로 하지만 그 안에 불교적인 여러 가지 견해가 많이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내용들을 주고받은 편지글입니다. 편지를 중국말로 “書狀” 그래요. 그래서 간화선 불교의 지침서로써 고려 때 그 유명한 보조스님이후 800년간 강원의 교과서로 정해져 있습니다. 보조스님께서는 육조스님의 육조단경을 스승으로 삼고, 이 서장 책을 도반으로 삼고 항상 옆에 두고 자기의 견해를 바로 잡아갔다. 그리고 자기 공부를 바로 잡아가는데 이 서장이 큰 역할을 했다라고 하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조스님께서 초발심자경문을 써가지고, 계초심학인문을 가지고 그 당시 定慧結社(정혜결사)를 하시면서 청규로 삼았고, 結社대중의 청규로 삼았고, 육조단경과 이 서장을 가지고 당시 定慧結社 대중들을 가르치는 교과서로 삼았었습니다. 그 후 보조스님 제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보조스님의 영향을 받아서 육조단경과 이 서장이 면면히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장은 강원교재로써 서장을 잘 보고, 그 다음에 소위 捨敎入禪(사교입선). 禪이 무엇인가를 알았으니까 이제, 敎를 버리고 禪에 들어가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옛날에는 4주 공부하고 바로 선방에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그랬어요. 그러다가 대교까지 졸업을 하고 선방에 가게 되고요. 그런 현상이 있었지요.
그 다음에 서장의 大旨(대지)는 斥邪解現正見(척사해현정견).
흔히 서장의 大旨를 그렇게 표현합니다. 삿된 소견ㆍ삿된 견해를 물리친다 = 斥邪解 = 삿된 견해를 물리치고, 그 다음에 正見 = 바른 견해를 드러낸다ㆍ바른 견해를 드러낸다. 이것이 불교에 대한 삿된 견해와 바른 견해를 이야기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서는 간화선, 선불교에 대한 삿된 견해, 바른 견해를 여기서 분별한다고, 그 다음 수행자로서ㆍ수행하는 사람으로서 간화선을 보고, 불교다 제쳐두고 수행자로서, 특히 참선 수행자로서 그 바른 견해가 무엇인가? 이런 것을 드러내는 그런 내용이 서장이기도합니다.
禪機(선기)의 선양. 그랬습니다. 禪機의 선양. 선기란 선의 體화, 내용적인 것을 말하는 體화, 인격화. 이것을 선기라고 하며, 또 禪機는 선의 여덟 가지 의미와 선의 여덟 가지 정신을 표현한다. “禪機” 하면 애매합니다. 사실 상당히 애매해요. 그런데 여기 여덟 가지 정신. 또는 여덟 가지 의미가 “禪機.” 말하자면 禪이라고 하는 그 자체. 선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잘 드러내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서장 안에서 이런 여덟 가지 명제를 가지고 말하지는 않지만, 곳곳에 녹아 있습니다.
1 簡素(간소). 간결ㆍ소박한 것.
그 인격이 간결ㆍ소박해야 되고,
그 삶이 간결ㆍ소박해야 됩니다.
그 사람이 끌고 다니는 차도 간결ㆍ소박해야 되고,
그가 있는 방도 간결ㆍ소박해야 되고, 그 禪房(선방)을 두고 합니다.
선방은 아주 질서정연 합니다. 댓돌 위에 신발 벗어놓은 것하며, 또 방석을 가지런히 정돈 하는 것하며, 가사를 벗어놓은 것하며, 그것이 선의 정신에서 표현 된 예입니다. 그것이 간결ㆍ소박입니다. 그래야 됩니다. 그것을 근거로 해서 참선하는 사람들의 인격도 역시 간결ㆍ소박해야 됩니다. 온갖 여러 인연들, 온갖 볼일 다 보고, 그러면 거리가 멀지요. 그 다음에
2 脫俗(탈속)해야 됩니다. 俗氣(속기)를 벗어야 됩니다 俗氣.
선에는 탈속이 아주 중요합니다. 간결ㆍ소박과 간소도 중요하지만, 탈속입니다. 또
3 自然(자연)스러워야 됩니다.
저절로 그러해야지, 이것은 다른 어떤 자연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우리가 말하는 그런 자연이 아니고, 저절로 그러함. 생활이ㆍ그 삶이 저절로 그러해야지 조작이 있으면 안 됩니다. 조작이 있는 삶은 그것은 선불교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自然이라는 말을 불교에서 쓸 때는요? 산천초목을 두고 하는 소리가 절대 아닙니다. 산천초목을 두고 자연이라고 하는 표현은 불교 안에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것 아셔야 됩니다. 자연이라는 말을 잘 쓰는데 무슨 뜻이냐? 저절로 그러함입니다. 저절로 그러함. 자연스러움입니다. 그 다음에 그것으로 끝이냐?
4 幽玄(유현)해야 됩니다.
사람이 깊이가 있어야 됩니다. 아주 그윽하고 깊이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幽玄입니다. 그 다음에
5 枯高(고고). 아주 자존심이 높아야 됩니다.
이것은 마를 枯ㆍ높을 高자지요? 비유컨대, 설악산 저~ 높은 봉우리에 수 100년 된 주목이 말라 죽었어요. 아주 깡말라가지고 수 100년 동안 비바람에 견뎌내고, 그러면서도 그 枯高한 자태ㆍ그 높은 자존심. 禪을 하는 사람은 비실비실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저기 아부하고 이해관계에 흔들린다든지ㆍ명예에 흔들린다든지ㆍ이 선객의 고고한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은 천하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운 그런 자존심입니다. 치문에 보면 그런 말이 있지요.
《고경법사가 분양태수에게 보낸 편지.》
분양태수가 해인사 같은 절을 많이 지어놨어요. 그리고는 주지 살라고 고경스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제가 아주 근사한 절 한 채 지어놨습니다. 그러니까 스님 와서 주지 좀 사십시오.”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古鏡和尙(고경화상)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내가 살다 살다 별꼴 다 보겠다. 萬古長江水惡名洗不得(만고장강수오명세부득)이라. 만고에 흐르는 장강의 물로 나보고 주지 살라하는 그 더러운 소리 도저히 씻을 길이 없구나. 하~~ 기가 막힌 자존심 아닙니까?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 ‘분양성 태수가, 내가 아무리 수행이 부족하기로서니 내한테다 주지 살라고 편지 한 장 달랑 보내놓고, 그런 초청을 한단 말이냐?’
南陽忠國師(남양충국사)는 처음 출발이 그렇지요.
남양혜충국사는 천자가 세 번이나 불렀어요. “왕사 좀 해주십시오.” 라고, 천자가 세 번 불렀는데도 안 갔습니다. 어지간한 왕 같으면 처형해버리지요. 그런데 세 번이나 불러도 안 갔습니다. 3ㆍ4회 세 번이나 불렀는데도 끝내 사양하고 안 갔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하늘을 찌르는 천자가 오히려 불교를 더 높이 봤습니다. ‘야~~ 얼마나 도덕이 훌륭하면 천자가 부르는데도 산문을 나오지 않고, 저렇게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부터 남양충국사 뿐만이 아니고, 먹물 옷만 보면 무조건 예배할 꺼야. 무조건 존경할 꺼야.’ 이렇게 돼버린 겁니다. 그 후로 그 천자는 정말 불교를 아주 높이 숭상하고, 스님들 공부 하는데 뒷바라지 잘하게 됐습니다.
그래 古鏡스님이 그랬어요.
“남양충국사 하고 나하고 비교하면 물론 하늘과 땅이다. 그 도력이 하늘과 땅과 차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분양태수. 네가 절하나 지어놓고 나한테 주지 살라? 참 더러워 죽겠네.
萬古長江水로 惡名洗不得이라. ‘야~~ 근사하잖아요.
만고에 흐르는 저 강물로도... 그 강물이 그냥 낙동강 물이 아닙니다.
長江이뭡니까? 양자강 물. 그 많은 양자강 물로 씻어도 다 씻을 수 없는 그런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회답을 보냈습니다.
枯高라고 하는 이 말 속에 선객들은 구절과 내용을 그 정도까지는 안 되더라도 거기에 만분의 1이라도 좀 돼야 되지 않을까?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선의 8대 정신 중에 枯高입니다. 그 다음에
6 靜寂(정적). 寂靜하고 다릅니다.
靜寂. 고요할 靜ㆍ고요할 寂. 그 많은 정말 저~~ 깊은 바다 속같이 고요해야 돼요. 그러면서도 변화해야 됩니다. 일곱 번째
7 變化(변화). 변화무쌍할 줄도 알아야 됩니다. 꼭 막혀가지고 요지부동.
어디든 원칙 하는 소리엔 옴짝달싹 못하고 하는 그런 맹꽁이 같은 그런 소견 가진 선견. 그것은 선불교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변화가 일곱 번째입니다. 그 다음에 여덟 번째
8 不動(부동). 이것은 八風不動(팔풍부동)입니다.
利ㆍ衰ㆍ毁ㆍ譽ㆍ稱ㆍ譏ㆍ苦ㆍ樂(이쇠훼예칭기고락).
이익 준다고 움직이고, 자기에게 손해 준다고 움직이고, 칭찬한다고 움직이고, 비방한다고 움직이고, 여기저기 어떤 명예나 이익에 흔들린다든지 이것은 참선 禪자도 모르는 사람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이것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선의 여덟 가지 정신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이 서장에 다 무르녹아있습니다. 서장뿐 만이 아니고, 다른 禪書에도 많이 스며있습니다.
이 서장은 특히 스님에게 보내는 편지가 두 통이고, 그 나머지는 거의 전부 사회 인사들ㆍ일반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러다보면 세속적인 어떤 그 생활과 선 수행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많을 것 아니겠습니까? 문제되는 것이 보통 많은 것이 아니지요. 출가한 스님들에게만 상대한다면 단순합니다. 간단합니다. 모두 자의에서 참선 하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 세속의 보살도 있습니다. 보살과 내지 거사 분들은 정말 누가 떠밀어서 수행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수행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속생활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거기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 그 갈등을 어떻게 해소했는가? 이것을 현재 우리들 하고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설사 수행하겠다고 스스로 지원해서 승려가 됐지만, 솔직하게 그대로 세속생활 하잖아요. 그대로 세속생활입니다. 이해관계에 휘둘리고, 명예관계에 휘둘리고, 숱한 그런 속된 일들에 휘둘리는데 그것을 생각해 보면 여기에서 세속사람들과의 그 어떤 관계 속에서 정말 제대로 불교수행자로서 어떤 길을 모색하는 그런 가르침들이 정말 이 시대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적절한 가르침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