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와 연주원에게는 공통점이 많다. 깐깐하고 답답하며 융통성 없는 성격, 백제를 구성하는 팔성귀족의 가주라는 것과 좌평의 직위에 나이와 팔성귀족이라는 후광을 이고 오르지않고 철저히 능력으로 오른, 귀족치고는 제법 깨어있고 능력이 출중하다는 평가를 다름아닌 백성들에게 받고있다는 것과 서로를 굉장히 인정한다는 것, 서로를 굉장히 미워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 진씨 귀족가에서 서로 술을 치고 있다는 것.
"만약 자네가 아닌 다른 자가 위사좌평이 되어 병사들을 완전 무장시키고 귀족들을 연금하고 귀족들의 사가를 탈취했다면 나는 그를 반역의 수괴로 몰았을 걸세."
연주원이 대뜸 말했다.
"뒤에 두개는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연가주님."
진무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술잔을 입으로 털어넣으며 말했다.
"무릇 장수란 자신의 부하의 잘못도 끌어안을줄 알아야하는 법일세."
연주원이 진무의 잔에 술을 한잔 따라주며 쏘았다.
"저도 가주님께서 조정좌평이 아니셨다면, 그 자가 누구였건 해주휼을 맡기지 않았을 겁니다."
연주원이 술잔에 입에 갖다대다 말았다.
"설사 황명이더라도?"
연주원이 확인하려는 듯이 말했고 진무가 도장을 찍었다.
"황명이더라도. 차라리 조정부 옥사를 들이쳤을겁니다."
연주원이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굳이 내가 몰필요도 없겠군. 내가 방금 자네가 한 말만으로도 자네 목 매달수있는 거 아나?"
"무릇 대신이란, 임금께서 잘못된 일을 하시려 들면 목이 달아날때 까지 말려야하는 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진무가 술잔을 비웠다. 연주원이 희미하게 웃었고 이번엔 진무가 연주원의 잔을 채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엇이 말인가?"
연주원이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아니하시지요?"
진무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자네는 어떤가."
"저를 잘 아시지않습니까."
연주원이 긴 함숨과 함께 웃음소리를 냈다.
"들어오시게. 먹 냄세가 진동을 하는 구먼."
문이 열리고 입고 있는 백의에 몸 온통 먹이 뭍혀져있고 수염이 멋드러지게 기른 문장(文將)이 나타났다. 진무가 일어서려는 것을 손짓으로 만류한 그가 말했다.
"술냄새가 진동을 해서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먹향 보다는 주향(酒香)에 약한 것같아."
"오셨습니까, 작은 아버님."
진무의 작은 아버지이자, 진씨 귀족가의 현재 최고 연장자, 그리고 가주의 직위를 버린 진가모가 방안으로 들어서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허락없이 연주원의 잔에 술을 채우고 마시더니 진무와 연주원이 서로 술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자네들 둘이 서로 사이좋게 술을 치고 있는 모습이라니. 내 생전에 그런 모습을 보게 될줄은 몰랐군 그래."
"잘 지냈나보구만."
연주원이 자신의 술잔을 다시 가져와 술을 담으면 말했다.
"부귀와 영화를 버리니 책과 먹이 아주 달아지더군."
기실, 현재 진무가 맡고 있는 작위는 전부 진가모가 양보했다고 보아야 한다. 아마, 진가모가 가주의 직을 진무에게 양보하지 않았다면 진무는 현재까지 이름없는 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초고 대왕이 승하하고 조카 진무가 고구려 정벌전에서 크게 공을 세우자마자 바로 자신의 모든 직책을 던져버리고 초야에 묻혀버린 사람이 바로 진가모다.
"뭐가 그리 걱정인가 들?"
진가모가 대뜸 물었다. 진가모의 직설적인 화법과 식견에 대해 익히 아는 연주원과 진무는 진가모가 질문 하기도 전에 이미 대답을 알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아, 폐하께서 하는 일에 불만들이 많으신가 보군."
"자네는 그 일이 타당하다고 보나?"
연주원이 다시 잔을 가져가는 진가모의 손을 보면서 말했다.
"뭐가 말이야? 위사부 군사가 팔성귀족들 집을 털어대는것 말인가? 아니면 팔성귀족들중에 다섯개 귀족각가 지금 국청장에 연금되어 있다는 거? 아니면 대역죄인 해주휼이 반역자 신분에서 병관좌평이라는 직책까지 단번에 뛰어오른 것을 말함인가?"
연주원이 말없이 진가모를 노려보았고 진가모는 천연덕스럽게 술을 마신후 잔을 내려놓았다.
"크, 좋군. 조정에서 하는 일에 타당하고 말고가 어디있겠나, 옳고 그른 것은 또 어디있겠고?"
"허나,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진무가 조용히 연주원을 거들었다.
"명분? 그거야 지어내면 그만이지. 이번에 꽤 많은 비밀장부들이 발견되었다지? 그걸 이용한다면 명분은 수백개라도 만들수 있을거야. 뭐가 문젠가?"
"폐하께서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 문제일세."
연주원이 나지막히 말했고 진가모가 술을 따르다 말고 연주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네 왜 이러나."
연주원이 '응?'하는 표정을 지었고 진가모가 말했다.
"그 냉정하신 폐하께서 왕손을 죽이려한 해주휼을 구명하시면서 까지 귀족들을 털어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 자네도 이미 짐작 할테니."
연주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해서, 아니었으면도 했었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진무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한심하다는 듯이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연주원을 눈길을 느끼며 얼굴을 붏혔다.
"자네가 많이 도와주어야 겠군."
연주원이 말했고 진가모가 웃음을 띄었다.
"이 다 늙은 노학사(老學士)에게도 할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 반가울 따름일세. 이보게 가주, 지금 폐하께서 가장 염려하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는 가?"
"예? 지금 백제에 걱정할일 이 있습니까?"
진무는 다시한번 그 낯뜨거운 눈길을 받아야했다.
"골육살쟁(骨肉相爭)일세. 뼈와 살이 싸우듯, 태자와 진사 왕자가 서로 물어뜯을 것을 염려하시는 걸세. 그 전날 훌륭한 나라들이 망해갔을때 항상 그 나라에 내란이 일어났거나 일어나기 직전이었다는 것이 좋은 예가 될걸세. 그리고 그 훌륭한 나라들이 그랬듯이 아무리 강한 군대와 탄탄한 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안에서 싸우기 시작하면 그 나라는 무너졌었네. 옛적 중국의 진과 한이 그러했고, 지금 중국에서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그 골육상쟁 말이야."
진무가 얼굴을 찌푸렸다가 말했다.
"굉장히 무서운 예견이십니다만, 골육상쟁이 왜 일어난다는 말씀이십니까?"
진가모가 갑자기 연주원을 쳐다봤다.
"왜?"
"술값하게, 친구."
연주원이 신음했고 진무는 웃음을 참기위해 급히 술잔을 노려봤다. 잠시후에 연주원이 설명을 시작했다.
"진사왕자님은 훌륭하신 장수일세."
"좋은 시작이야. 그럼."
진가모가 맞장구를 쳤다. 연주원이 진가모를 잠시 노려본 후에 다시 말했다.
"아무래도 이건 전장을 함께 보낸 자네가 더 잘알겠군."
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장수이시자 훌륭한 지휘관이십니다. 그 분께서 왕이 되시면 용맹한 백제의 왕이 되실거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유가 바로...."
"훌륭한 지휘관이고 장수지만 훌륭한 왕은 되지 못할걸세."
연주원이 말했고, 진가모가 덧붙였다.
"적어도 이 난세에서는."
"그래, 난세. 그걸 빼먹었었군. 진가주, 자네는 장계를 미리 검열할수 있는 위사좌평의 자리에 있으니 알것 아닌가. 지금 국경이 여간 심상치 않은 것이 아니야. 중국은 저들끼리 서로 못잡아먹어서 안달이니 그렇다치더라도. 지금 삼한의 정세는 그렇지가 않아. 가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가 서로 동맹을 맺으려한다는 말이 오가고 있는 것은 자네도 알테지?"
진무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백제에게 필요한 건 용병술과 용맹이 뛰어난 왕이 아니라, 외교에 뛰어난 왕이야. 다시 말해서...."
연주원이 진가모를 쳐다봤고, 진가모는 취하지도 않는 지 술잔에 다시 술을 채워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진사보다는 태자가 낫다. 지금의 백제에는."
"허면 폐하께서 지금 팔성귀족들을 흔드시는 것은...."
"사전 포석이네. 적어도 진사와 침류사이에서 아무런 견해도 내비치지 않은 연씨 귀족가와, 진씨 귀족가 그리고 진사파 귀족가들 사이에서 버려진 해씨 귀족가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침류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할수 없도록 눌러두려는 걸세."
"그리고 이 친구는 칼싸움을 막기위해 주먹으로 사람들을 쳐야하는 이 모순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고."
연주원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댓글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