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대한 비판적 시각 중의 하나는 삼국사기를 지을 때 중국측 기록에 의지하였고, 우리쪽 기록을 무시하였다는 시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러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의 가치를 저평가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어불성설에 불과합니다. 물론 삼국사기에도 그 사서가 가지는 한계라는 것이 있지만, 그것이 지어진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에 이 삼국사기의 존재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문제는..삼국사기를 지을 때 김부식을 비롯한 집필진들은 무슨 기록을 참조했을까...
극단적인 대륙론자들은 이것이 조작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혹은 중국측 기록만을 신뢰한 사대주의적 산물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삼국사기에 중국측 기록이 많이 참조되어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그렇다면 중국측 기록에서 찾을 수 없는 삼국사기의 기록들은 무엇일까요?? 쉽게 이야기 해서 삼국사기에 나타난 다양한 왕들의 이름만 하더라도 중국측 기록에 나오지 않은 것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다 창작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삼국사기라는 책을 만들기 이전에 고려에 전해지는 역사서가운데 三國史라는 책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부식은 그러한 역사서에 만족하지 않고 체계적으로 유가적 역사관에 입각한 기전체 사서를 만들기에 이릅니다.
그것은 통치권력의 주체집단이 권력의 정당성과 체제유지의 명분을 제공하기 위해 시간적 배경으로부터 국가의 과거와 미래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작업입니다. 당연 이러한 중요한 정치적 작업에 당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김부식이 주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그가 유학자인만큼 유교적 역사관이 철저하게 투영되어 재탄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따라 김부식이 참조하였을 삼국사라는 역사서는 누가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대체로 당시 유가적 가치관에는 상당부분 어긋난 내용이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김부식 외에도 삼국사를 보고 언급한 기록을 남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동국이상국집을 지은 이규보입니다.
다음 계축년(癸丑年) 四월에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서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를 보니, 그 신이한 사적(事迹)이 세상에서 이야기되고 있던 바보다 더 자세하였다.
(중략)
하물며 국사(國史)는 직필(直筆)하는 책이니 어찌 그 사실을 망전(妄傳)하겠느냐? 김공(金公) 부식(富軾)이 국사를 다시 편찬할 때 동명왕의 사적을 매우 간략하게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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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글에서 우리는 몇가지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1)옛 삼국사라는 책의 존재
2)동명왕본기라는 형식, 즉 기전체 사서라는 점과, 왕마다 본기가 있었다는 점(기본 기전체에 충실)
3) 삼국사기보다 더욱 원색적이리라는 추측
4)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재편찬한 것(중찬이라는 표현)
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삼국사기가 기본적으로 옛 삼국사라는 모체로부터 당대 입맛에 맞게 재정리, 재구성한 역사서이며 중국측 기록은 의존한 것이 아니라 참조한 것이라 여겨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예로 중국측 기록과 우리측 기록이 상이할 경우 양 기록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찬이 다소 등장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고증적인 모습인데 삼국사기 곳곳에서 김부식이 고증을 통해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는 흔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삼국사기의 진정한 가치를 분석하여 삼국사기에 대한 이해와 관찰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조건적인 신뢰나 비난을 하는 비역사적사유를 지양하고 고대사 기본텍스트로서의 삼국사기를 재발견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만약 김부식이 아니고 묘청이 승리하여 삼국사기와 같은 역사기록을 서술햇다면 어떻게 썻을까 생각도 합니다. 삼국사기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유일한 진기한 기록이지만.. 한편으로 유가적입장과 그가 신라출신이라는 점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됩니다. 신라출신이니 잘못됐다는 뜻이 아니라..
신라에 백제병합후 200년 태평성세?와 중국에 대한 사대적 정서가 이미 기정사실화 되는 시대를 거쳐 고려가 건국된이후로도 고려조정에 상당한 정치적 영향을 가진것으로 알고 잇습니다. 백제병합과 나당전쟁이후 469년이나 지나서 저술된 삼국사기에 사료적가치나 현대의 정보와학술교류가 매우 빠른 현대의 사학자들의
요즈음 삼국사기를 읽고 있습니다만 참으로 자주적이며 객관적으로 편찬되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대적이라고 폄하된 것은 일제 치하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의 민족의 자주적 독립투쟁을 선동하기 위한 그의 역사 관점과 그를 따르는 근대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비롯된 영향이 큰것 으로 알고 있습니다.
첫댓글 맞습니다. 삼국사기를 많이들 무시하는 분들이 계시더군요. 저도 물런 그랬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우리 고대연구에 교과서입니다. 삼국유사, 일본서기, 중국정사등은 참고자료입니다.
우리 고대사에 있어 삼국사기란 말하자면 칠흑의 어둠속 한줄기 빛이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기본적인 역사편집의 의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묘청의 난에 대한 단재의 한탄은 결코 헛소리가 아닙니다.
만약 김부식이 아니고 묘청이 승리하여 삼국사기와 같은 역사기록을 서술햇다면 어떻게 썻을까 생각도 합니다. 삼국사기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유일한 진기한 기록이지만.. 한편으로 유가적입장과 그가 신라출신이라는 점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됩니다. 신라출신이니 잘못됐다는 뜻이 아니라..
신라에 백제병합후 200년 태평성세?와 중국에 대한 사대적 정서가 이미 기정사실화 되는 시대를 거쳐 고려가 건국된이후로도 고려조정에 상당한 정치적 영향을 가진것으로 알고 잇습니다. 백제병합과 나당전쟁이후 469년이나 지나서 저술된 삼국사기에 사료적가치나 현대의 정보와학술교류가 매우 빠른 현대의 사학자들의
기록을 놓고 볼때 현대의 학자들의 저술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됩니다. 개인생각. 400여년전 임진란전쟁의 역사와 기록을 400여년이 지난 현대의 학자가 풀어서 해석해서 저술을 했다면 하고 한편으로 생각됩니다. 그나마 삼국사기라도 잇었던 것은 매우 다행이라 생각됩니다.
누군가 나에 대한 애기를 네가 쓰는 입장과 나에 라이벌이 나에 대한 입장을 쓰는 문제는 매우 크지 않을까 생각도 합니다.
요즈음 삼국사기를 읽고 있습니다만 참으로 자주적이며 객관적으로 편찬되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대적이라고 폄하된 것은 일제 치하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의 민족의 자주적 독립투쟁을 선동하기 위한 그의 역사 관점과 그를 따르는 근대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비롯된 영향이 큰것 으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