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와 억새
갈대와 억새는 오래전부터 가을의 서정을 대변해왔다. 물론 둘의 이미지는 가을이라는 계절 앞에서 일치한다. 하지만 생김새는 엄연히 다르다. 구별하기 제일 쉬운 방법은 물가에 있으면 갈대, 건조한 곳에 살면 억새이다. 습지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판가름의 기준인 셈이다. 그 모양새 역시 대충 살펴봐도 차이가 있다. 갈대는 남성적인, 억새는 여성적인 풍이 가강하다. 따라서 갈대는 좀 거칠게 생겼고 억새는 좀 깔끔해 보인다.
흔히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 ‘갈대’라는 말을 듣는 사람은 모두가 ‘변덕스럽다’는 뜻으로 알면서도 가녀린 모습으로 바람에 하늘거리는 억새의 폼새를 함께 연상할 것이다. 말하는 사람도 억새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갈대라고 해도 모두 억새로 알아들으니 뭐라고 부르든지 의사소통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긴 식물학자를 제외하고 모두 애써 구별하지 않는다. 아니 구별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모두 알아서 새겨듣는다. 어차피 언어라고 하는 것은 마음 전달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파스칼(1623-1662)은 어릴 때부터 허약하고 심약하며 또 사색적이었다고 한다. 그의 저서 『팡세』에서 ‘인간은 덧없이 연약한 한 줄기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오늘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도 가만히 새겨보면 자신을 비유한 말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억새이다‘라고 했다면 더 실감났을 것 같다. 실제로 갈대보다는 억새가 훨씬 더 연약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적으로 ‘억새’라는 말보다는 ’갈대’라는 말의 어감이 훨씬 부드럽다. ‘억새’하면 곧바로 ‘억셈’이라고 하는 느낌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할 때 무의식중에 억새를 갈대로 바꾸어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이름에서 받는 느낌과 실물의 이미지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어찌 억새와 갈대뿐이랴, 강하기 때문에 부드러운 이름을 갖게 하고 부드럽기 때문에 강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서로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또 다른 지혜이기도 하다.
선화로 유명한 ‘달마절로도강도’는 달마대사가 갈대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 그림이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포착하여 일필휘지로 그렸다. 당시에 꽤 깊이 있는 지식과 학문 그리고 종교분야까지 조예가 있다는 양무제를 만났으나 제대로 ‘이심전심’이 되지 않아 가차없이 결별하고 소림굴로 떠난다. 그런데 선사가 양자강을 건너려니 배가 필요했다. 갈대를 그것도 한 줄기만 꺾어서 타고 간다. 성인은 상한 갈대조차 함부로 꺾지 않는 법이다. 어쨌거나 배경은 물가이다. 그래서 당연히 갈대를 타고 가야 한다. 억새를 타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갈대와 억새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억새는 억새고
갈대는 갈대인 것이다.
그런데 억새이면서 물가에 피는 물억새도 있으니 습지를 기준으로 애써 구별하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또 창녕 사람들은 화왕산의 같은 억새를 두고서 갈대와 억새라는 말로 번갈아 부른다. 가을에는 갈대 축제를 열고 이듬해 정월대보름에는 억새 태우기 행사를 거국적으로 벌인다. 그 산의 그 억새가 가을에는 갈대로 불리다가 겨울을 넘기면서 이름만 다시 억새로 바뀌는 것이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절대로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당연히 입방아를 찧었고 또 말 잘하는 지역민들은 이에 걸맞는 대꾸 논리를 개발하기 마련이다.
예전에 이 산에 용지라는 호수가 있었고 그 주변에 갈대가 무성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연못은 말라 갔고, 또 인근 지역까지 억새로 채워졌다는 것이 그 연유이다. 그래서 갈대와 억새라는 이름이 동시에 이 산중에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천 년 전부터 그 자리를 지킨 관룡사 용선대 돌부처님께 ‘저 말 맞아요?’ 하고 넌지시 물어보니 미소로만 답하신다.
이 아름다운 가을, 진짜 구별하려는 마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억새와 갈대가 함께 어우러진 곳이 있다면 그 지역을 찾아가 금풍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
출처 ; 원철 스님 / 모두 함께 꽃이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