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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장 바람, 또 바람 (7)
이번 사건의 주인공은 분명 최저(崔杼)라는 사내였다. 지금까지의 일은 결국 최저를 무대 위로 올리기 위한 준비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제영공(齊靈公)은 성밖에 이르러 있었다. 남은 것은 최저가 제영공을 맞아들여 도성에 남아 있는 고무구와 포견 일파를 숙청하고, 타국에 나가 있는 국좌를 고립시키는 일뿐이었다. 그것만 성사되면 최저(崔杼)는 일약 제나라 제일의 권력자로 부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란 뜻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결과부터 말하면, 최저(崔杼)는 이번 사태의 주인공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최저만이 단독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으로 부상하는 것은 아니다. 최저의 계획에 들어 있지 않은 또 하나의 인물이 느닷없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 날 밤, 최저(崔杼)는 자택에서 느긋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의 계산상으로 제영공의 도착은 빨라야 내일 밤이었다.
매사 빈틈을 보이지 않는 최저였지만, 심부름을 간 성맹자의 측근 내관이 이토록 빨리 제영공을 모시고 돌아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 시각 제영공(齊靈公)이 임치성 북문 밖 숲 속에 숨어 간절히 성안으로부터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날 밤의 북문 경비 책임자는 안약이었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북문 성루로 나갔을 때 부책임자인 남곽언(南郭偃)이 긴장된 표정으로 안약을 맞이했다.
"이상한 보고가 들어와 있습니다."
안약(晏弱)은 성벽 위로 올라갔다. 남곽언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멀리 어둠 속에서 횃불 하나가 천천히, 크게 원을 그리고 있는 게 보였다.
"언제부터 저 불빛이 있었소?"
"반 시진 정도 됐습니다. 아이들이 불놀이 하는것 같지는 않습니다."
"신호로군."
남곽언(南郭偃)이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도적 떼일까요?"
"글쎄요. 그런것 같지는 않소. 하지만 성밖에서 성안으로 무엇인가를 알리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구려."
횃불의 움직임은 단순했다.
반복해서 원만을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세밀한 내용은 이미 양측간에 약속되어 있다는 증거다.
"어째서 계속 신호를 보내는 것일까요?"
"그거야 성안에서 호응하는 신호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평소 안약(晏弱)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확실치않은 일은 나서지 않는 성품이다. 그런데 이따금씩 그는 주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 주곤 했다. 생각지도 않은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십수 년전, 소동부인으로 인해 발생했던 진나라와의 외교마찰 때에도 그는 고고(高固)대신 목숨을 걸고 단도행을 감행한 바 있다. 살아서 돌아오긴 했지만 그 때문에 포로가 되는 위기를 겪었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안약(晏弱)의 마음속에 또 이런 모험의 욕구가 솟구쳐 올랐다.
"우리가 한번 저들을 유인해보지 않겠소?"
"유인이라니요?"
"저자들이 횃불로 원을 그리고 있으니, 우리도 이쪽에서 똑같이 해보자는 말이오. 물론 우리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하겠지요. 만일 걸려든다면 저들뿐만 아니라 안에 있는 내통자까지 소탕할 수 있을 것이오."
"작은 무리의 도적들이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혹여 우리 도성을 노린 적(狄)의 대군이라면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화가 되지 않을까요?"
남곽언의 신중함에 안약(晏弱)은 자신 있게 고개를 내저었다.
"오랑캐는 아니오. 저들이 큰 무리를 이룬 정규군이라면 저렇듯 단순하고 볼품없는 신호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오."
"그렇군요."
안약(晏弱)은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먼저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을 주변에 배치한 후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다.
"우리는 성문을 열 것이다. 저들은 약탈을 목적으로 한 도적일 수도 있고, 성안으로 잠입하려는 첩자들일 수도 있다. 도적 떼라고 판단하면 주저없이 베되, 첩자들이라면 생포해야 한다."
준비가 완료되자 남곽언(南郭偃)이 성벽 위로 올라가 천천히 횃불을 움직였다.
"저길 보아라."
반 시진이 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어 초조해질 대로 초조해진 제영공이 별안간 외쳤다. 멀리 어둠 속 성벽 위에서 횃불 하나가 큰 원을 그리고 있었다.
오늘 밤을 틀렸나보다, 여기고 단념하려던 측근 시자(侍者)들도 낮은 함성을 질러댔다.
"이제야 최저 대부가 성문으로 나온 모양입니다."
"자, 성안으로 들어가자."
제영공(齊靈公)은 날렵하게 풀숲에서 뛰어 나왔다.
"걸렸다!"
안약(晏弱)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것은 쾌재라기보다 긴장감이었다.
생각해보면, 저들의 행동은 상당히 비상식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신호를 보내는 시각이 불투명했다. 대체로 신호를 교환할 때는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게 마련이다.
그시각이 지나면 일단 실패한 것으로 보고 신호를 중지한다. 그런데 저들은 어떠한가. 반 시진이 넘도록 끈질기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성안의 내응자를 여간 믿지 않는 한 저런 무모한 신호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저들은 대체 누구이며, 규모는 얼마나 될까. 저들을 낚으려다 오히려 이쪽이 당하는 것은 아닐까.'
순간적으로 공연한 짓을 했구나, 하는 후회감도 일었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졌다.
성밖의 정체불명의 무리는 대범하게도 횃불을 밝힌 채 성문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또 한 번 안약(晏弱)은 긴장했다.
'정신나간 자들이 아니고서야.........'
남곽언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 타국에 사는 백성들이 성안의 가족을 남몰래 만나기 위해 온 것은 아닐까요?"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소. 어쨌거나 횃불을 끄고 성문을 열어봅시다."
성문 주변은 암흑에 싸였다.
어둠 속에서 굳게 닫혔던 성문이 조심스럽게 아가리를 벌렸다. 정체불명의 무리는 여전히 횃불을 훤히 밝힌 채 다가왔다,
이윽고 선두에 선 횃불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대략 20여 명쯤 되었다. 무기는 들고 있었으나 전혀 경계하는 태세는 아니었다. 무력 행위를 노린 도적 떼 같지는 않았다.
마지막 그림자가 성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안약(晏弱)이 큰 소리로 외쳐댔다.
"성문을 닫고 저자들을 포위하라!"
문 주변에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뛰어나왔다.
창을 들이대며 정체불명의 무리를 에워쌌다. 동시에 안약(晏弱)이 선두로 나서며 일갈했다.
"정체를 밝혀라!"
수십 개의 횃불이 커졌다. 그들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
앞에 서 있던 얼굴 하나가 몹시 낯이 익었다.
"앗!"
안약(晏弱)은 태어나서 이때만큼 경악한 적이 없었다. 도깨비를 보아도 이보다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정(鄭)나라 땅에 나가 있어야 할 제영공이 어떻게 이시간,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과정이 짐작되지 않았다.
"주공 -!"
더욱이 제영공의 얼굴은 누구에게 얻어맞은 듯 퉁퉁 부어 있는 게 아닌가.
안약(晏弱)은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좀체로 입을 열지 못했다.
놀라기는 제영공(齊靈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성문을 열어준 사람이 당연히 최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가. 순간적으로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더욱 그를 두렵고 불안하게 만든 것은 안약이라는 인물이었다.
안약(晏弱)이라면 이번 반역을 주도한 고무구 계열의 대부가 아니던가. 스스로 호랑이 굴 속으로 뛰어든 셈이었다.
한동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사태를 수습한 것은 안약 쪽에서였다. 무릎을 꿇으며 공손하게 물었다.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하온데 주공께선 어찌하여 이 곳에......무슨 변이라도 생기셨습니까?"
이때쯤 해서는 제영공(齊靈公)도 어느 정도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무엇보다도 안약이 자신을 해치기 위해 북문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렇다고 안약을 자기편이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급히 귀국할 일이 생겼소."
제영공은 걷기 시작했다. 안약과 남곽언이 재빨리 달려가 자신들의 수레를 대령했다. 제영공(齊靈公)은 그런 안약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고는 말없이 수레에 올랐다.
예전에 없이 싸늘한 행동이었다.
안약(晏弱)은 가슴이 섬뜩해지는 가운데서도 수하 군사들에게 명했다.
"주공을 호위하라!"
제영공이 탄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약과 남곽언이 도보로 그뒤를 따랐다.
열심히 발을 놀려 달리는 중에 안약(晏弱)은 또 한 번 놀랐다.
제영공을 태운 수레는 공궁으로 직행하지 않았다. 수레가 멈춘 곳은 남문 근처의 거리에 있는 한 커다란 집이었다.
측근 시자(侍者)가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대문이 열리고 문지기가 얼굴을 내밀었다. 잠시 무슨 말인가 오가더니 문지기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갔다.
별안간 집 안이 시끄러웠다.
불이 대낮같이 밝아지며 누군가가 맨발로 달려나왔다.
수레 뒤편에 서서 대문을 활짝 열어대는 집 주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안약(晏弱)은 자신도 모르게 낮은 비명을 내질렀다.
"최저(崔杼)........!"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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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연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밋게 읽고있습니다.
연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