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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준비하고 있으라
누가복음 12:35-40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눅 12:35-40 / [준비하고 있으라;마24:45-51]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 36) 마치 주인이 결혼 잔치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릴 때 곧 문을 열어 주려고 준비하고 있는 종처럼 되라. 37) 주인이 돌아왔을 때 이렇게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는 종들은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주인이 몸소 시중 드는 사람의 옷을 입고서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먹는 일을 시중 들것이다. 38) 주인이 저녁쯤에 올는지 아니면 한밤중에 올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어느 때에 오더라도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복이 있다. 39) 도둑이 언제 들어 올지 알고 있었다면 대비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40) 그러므로 너희도 언제나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후회 없이 예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라고 하십니다.
깨어 있는 자의 복(35-3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말에 대한 경각심을 주시기 위해 청중이 잘 아는 일상의 장면을 들어 말씀하십니다. 허리에 띠를 띠라는 말씀은 단순한 복장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급히 움직이기 위해 옷자락을 단단히 묶는 것처럼 마음을 다잡고 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등불을 켜고 서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한밤중에도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앉거나 눕지 말고 서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와 문을 두드릴 때, 곧바로 열어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결혼 잔치는 밤늦게까지 이어졌기에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습니다. 주인이 밤 두세 시에 돌아오더라도 깨어 준비하고 있는 종이야말로 진정 충성된 종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기다리는 종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주인이 그런 종을 크게 인정하시고 오히려 허리에 띠를 띠고 종들을 자리에 앉힌 후 직접 수종 든다고 하신 점입니다. 주인은 잔치 자리에서 잘 먹고 즐기다 돌아왔지만 종이 기다리며 수고한 것을 기억하시고 이제는 내가 너를 섬기겠다고 하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에 신앙적으로 깨어 있기 어렵지만 끝까지 믿음으로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는 그날에 더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39-40) 우리가 도착을 예상하고 맞을 준비를 해두어야 할 대상은 도둑이 아니라 주인입니다. 하지만 주인인 예수님은 자신이 마치 도둑처럼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은 예고하지 않고 갑자기 찾아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경고의 시간이 언제 임할지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은 도둑처럼 예고 없이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긴장을 풀거나 안일하게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항상 깨어 있고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적용: 예수님은 예고 없이 오십니다. 당신은 지금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청지기로서 맡겨진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도록 깨어 있는 마음으로 믿음과 순종으로 삽시다.
어떤 물질이 산성인지 알칼리성인지 알아볼 때 쓰는 진단시료를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합니다. 이 리트머스 시험지에 대한 이해가 일반화되면서 오늘날 이 말은 어떤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를 증명할 수 있는 상징 언어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믿음에 대해 야고보서는 말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 26) 이를테면 행함은 믿음을 증명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셈입니다. 마음에 담긴 사랑은 어떻게든 행위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 설 교 >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라
눅 12장 32~40절 / 이은규목사(성남교회)
80대의 남성들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편감이 송해씨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국노래자랑이라는 프로그램을 벌써 25년째 맡으면서 한 주일 중에 며칠은 꼭 집을 비우며 부인에게 자유로운 시간을 준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직도 현역에서 뛰면서 틈틈이 광고에도 출연하고 하니, 그가 벌어들이는 돈은 웬만한 가장들이 감히 넘보지 못하는 금액일 것입니다.
며칠 전에 한 신문에서 송해씨를 소개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송해씨는 원래 코미디언 출신인데... 구지 등급을 매기자면 b급 정도였다는 것이지요. 같은 세대를 살며 활동했던 구봉서씨나 서영춘씨나 배삼룡씨에 비하면 확실히 그는 덜 유명했고, 맡은 배역들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송해씨가 가진 장점을 눈여겨 본 pd가 있었습니다. 당시 전국노래자랑은 시청률이 불과 5%밖엔 안 되는 b급 프로였는데요, 새로운 pd가 맡으면서 사회자를 송해씨로 바꾼 것입니다. 이미 나이가 62세였고, 키는 162cm이고, 목소리는 아주 탁하고 매력이 없게 들렸습니다. 모두가 반대하였지만, pd가 소신 있게 밀어붙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프로를 잘할 사람은 송해씨 뿐입니다.’ 이것이 그의 변이었습니다. b급이라고 해서 무시를 당하기도 하지만, 그가 참 잘할 수 있는 것... 그만이 가진 장점... 그런 것들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대목입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반드시 빛을 볼 기회가 찾아오는 것이지요.
전국노래자랑이 지금은 다른 음악프로그램이 따라올 수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요... 이 시간은 송해씨가 가지고 있었던 숨은 장점이 빛을 발하는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가르치려 들지 말고, 함께하고 공감하라!’
나이가 좀 많다 보니까 남에게 간섭을 한다든지 영향을 끼치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역주민이나 출연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공감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공연이 있는 지방에 먼저 내려가서 그 지방을 알려고 많이 애를 쓴다는 것이지요. 시장이나 목욕탕이나 식당을 가리지 않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통해서 그 곳을 익히려 합니다. 사회를 보다가도 나서서 출연자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어떤 곳에서 101살 먹은 어머니와 80살이 된 딸이 출연을 했는데... 많이 떨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송해씨가 뒤에서 그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 멋진 무대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지켜보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때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항상 챙긴다고 합니다. 한 80명 정도가 팀을 이루어서 다니는데요... 한 사람 한 사람을 알고 진정한 팀을 이루어 간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가진 철저한 책임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는 철저하게 준비하고, 주어진 자리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 놓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앞으로 얼마 동안 활동을 할지... 잘 알 수는 없지만요, 60세가 넘은 나이에 새로운 일을 맡아서... 무려 25년 동안을... 누구나 공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멋진 시간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누구에게나 장점이 있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은 앞의 단락에 이어서 읽는 것이 더 적합한 것처럼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많은 성경들이 그렇게 단락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32절의 앞에는 먹고사는 문제로 염려하는 사람들을 위로 하시고 격려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v.22) 주님은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이 대목은 앞의 말씀에 대한 결론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처럼 들려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전통적으로 읽는 오늘의 성서일과에서는 이 대목을 새로운 단락의 시작으로 구분하여서, 여기서부터 주님의 말씀이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가 정하고 있는 성서일과를 따라서 32절을 단락의 시작으로 해서 말씀을 생각하려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먼저 여기서 우리는 두려움 속에 사로잡히고 위축되어 있는 사람들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에서 나오는 적은 무리들... 그들은 주님을 전혀 모른다거나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아닐 것입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다르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마음이 위축되어 있고 소심해져 있습니다. 처음에 주님을 따를 때에 느꼈던 기쁨이라든지... 미래에 대한 기대감... 새롭게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 같은 것들은 다 사라져 버리고... 이젠 오로지 두려움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부활하셨지만... 여전히 겁에 질려서 골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정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우리가 그러하지는 않은지... 우리가 가진 믿음이 처음 믿을 때에 비해서 달라진 것은 없는지... 처음 우리가 가졌던 기쁨들... 처음 우리가 가졌던 각오와 다짐들... 새로운 삶에 대한 분명한 목적의식들... 그런 것들은 여전히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살아서 꿈틀거리며, 우리가 무엇을 결정하고 선택할 때에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인지요?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우리의 마음은 소심해지고 위축될 수밖엔 없습니다.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난 자신이 없어... 더 이상 무엇을 할 수가 없어...’ 우리는 그렇게 될 수밖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v.32) 주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실 때... 여러분이 가지는 느낌은 어떤 것인가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여전히 신임하시고 믿어주시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는 새로운 세상이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에겐 소중한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든지... 설혹 주님도 언급하신 것처럼 이 세상에서 중심에 머무르지 못하고 변두리로 밀려나 버린 적은 무리라고 하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여전히 신임하고 계시고 소중히 여기고 계시다는 것... 그것을 항상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에겐 그런 감동이 항상 있었습니다. 난 하나님께 신뢰감을 심어드릴만한 행동을 전혀 한 적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나를 믿어 주시고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이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딤전1:12b-13a) 참 부족한데... 하나님이 나를 믿어 주시고 소중하게 여기고 계시다니... 이런 깨달음... 그것이 바울을 감동 속에 살게 하였고... 감사하게 하였고...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 안에 살게 하였습니다.
‘적은 무리여...’ 세상에서는 우리가 적은 무리일지는 몰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고 우리를 향해서 여전히 기대감을 품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들도 바울처럼 그렇게... 감동 속에서... 능력 안에서... 감사하며 살 수가 있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소중한 계획을 품고 계시다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나라’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열어 주시고, 동시에 우리와 함께 이루어가실 새로운 나라를 계획하고 계시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을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분명 이 세상에서는 적은 무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고... 세상을 변화 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사람들로서 우리를 불러 주셨다면... 그래서 우리의 앞에는 그의 나라에 대한 희망과 꿈이 있고, 우리의 등 뒤엔 우리를 믿어 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소유를 팔아서 자선을 베풀어라.’(v.33) 이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 사람들... 그들이 살아야 할 삶을 예수는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때, 자신이 없고 위축되었을 때엔 그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치 우리들에게 돈을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는 상대가 생긴 것처럼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고, 하늘에다가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 마치 투자를 유치하는 어떤 저축은행이나 증권회사의 광고 카피처럼 다가오지는 않으시는지요? 우리 회사만큼 당신의 돈을 잘 보호해 줄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공연히 다른 곳에 투자했다가 다 날리지 마시고 우리 회사에 투자 하십시오... 마치 예수님이 하늘나라 증권회사의 매니저나 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는 것이다.’(v.3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하려는 말씀의 의도에 다가갈 수가 있습니다. 참 솔직하고 현실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 우리의 마음은 당연히 그것을 향하게 됩니다. 재물을 하늘나라에다가 쌓아 두라고 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시는 말씀인데요... 만일 누군가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눈에 보이는 재물을 신뢰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더 많이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을 더 많은 재물을 모으거나 소유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서 살아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이런 사람들이 삶을 참 무모하게 사는 것 같지만... 오히려 인생을 제대로 잘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발상의 전환을 주님은 지금 우리들에게 요구하십니다. ‘그저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해... 요즘처럼 모든 것이 불안하고 불확실한 시대엔 그래도 지갑이라도 꽉 차 있어야 안심이 되지...’ 우리들은 항상 어리석은 부자처럼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우리들은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돈이면 다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럴 때 우리는 이미 돈의 노예처럼 되고 맙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그러지 않았던가요? 대단한 풍년이 들었을 때... 그가 한 일이라는 것이 고작해야 창고를 더 많이 짓는 일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곡식을 다 들여 놓고서는 자기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눅12:19) 돈이 많으면 다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12:20) 도대체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술궂으실 수가 있는 것인지요... 왜 하필이면 오늘 밤일까요? 그의 영혼을 거두어 가신 날 말이지요. 부자가 곡식을 창고마다 꽉꽉 채워 놓고는 ‘이제는 됐어... 걱정 끝, 고생 끝이야...’ 이렇게 노래를 부르던 그 밤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풍성하고 행복한 밤이었는데 말이지요. 사람들은 잠자리에 들었다가 돌연사를 한 그 사람을 두고 장례식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 사람 참 고생만 하더니... 좀 살만 하니까 갔네...’
물론 우리들에겐 돈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돈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살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바르게 잘 믿는 것이며...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고마움을 항상 잊지 않고 그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항상 표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물질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이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관계의 고리를 이어가기 위한 것이지... 만일 물질로 인해서 하나님도 잃어버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단절되어 버리고 만다면... 그것은 세상을 결코 잘 사는 것이 아니라고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의 소유를 팔아라...’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움켜쥘 때가 아니라고 그것이 참 안전한 곳에 돈을 보관하는 것 같지만... 그러느라고 너희들의 마음은 위축되고 좀먹고 상처를 입고... 하나님으로부터도 멀어지고... 이웃과도 단절되고... 그러다보면 우리의 삶을 그렇게 끝날 수밖엔 없다고... 정말 소중하고 멋진 순간은 한 번도 만나보지를 못하고 그렇게 살다가 갈 수 밖엔 없는 거라고...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 참 멋지게 살았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다웠어... 사는 것은 좀 가난하더라도... 가진 것이 좀 적더라도... 그렇게 풍성하고 넉넉하게... 다른 이들에게 베풀면서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적어도 몇 사람쯤이라도 나를 기억하면서 그렇게 말해 줄 수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v.35) 주님은 또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엔 곧 우리에게 다가올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님을 기다리는 종의 상황으로 설명을 하십니다. ‘마치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곧 문을 열어 주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어라.’(v.36)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단지 문을 열어 주는 일만을 위해서라면... 종의 복장이 좀 지나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구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켤 필요까지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요... 좀 편안한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나가서 문을 열어 주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라... 이것은 단지 문을 열어 주는 행동을 넘어서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자세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출애굽기의 말씀을 연상하게 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을 때에는 이렇게 하여라.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서둘러서 먹어라...’(출12:11)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사건을 일으키시는 밤에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 ‘허리에 띠를 띠고..’ 그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언제라도 신속하게 길을 떠날 수 있는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껏 한 번도 일으키신 일이 없었던 일을 시작하면서 ‘너희들도 함께 가자!’ 이렇게 그들을 새로운 일로 부르실 때에... 미련도 없이 그 일에 뛰 어들 수 있는 마음에 준비가 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허리에 띠를 띠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이렇게 허리에 띠를 디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출애굽사건처럼 엄청난 일들을 시작하실지...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있는 사람은 항상 희망과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나를 부르실지... 어떤 일을 나를 통해서 시작하려 하실지... 그것을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남들이 다 느슨한 마음으로 있을 때에라도 허리를 동이고 마음의 준비를 합니다.
공교롭게도 그 시간이 밤이라는 것이 항상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여기에 사실 깊은 매력이 담겨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서점에 갔다가 소설가 최인호씨가 최근에 쓴 ‘인생’이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서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고 하지요. 제가 대학생 때에는 이른바 대중문화의 기수처럼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마치 연예인만큼이나 인기가 있던 작가였습니다. 꾸준히 작품이나 가정을 소재로한 글을 발표했었는데요... 지난 한 5년 동안 침샘암이라는 희귀한 암으로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런 고생 끝에 나온 책이 바로 인생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을 통해서 아주 인상 깊은 글을 읽었습니다. 인디언들의 기도는 반드시 들어 주신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가령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것이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좀 섭섭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기도보다 인디언들의 기도를 잘 들어 주실까? 그럴 리가 없어... 그러다가 제 마음이 참 부끄러워졌습니다. 인디언들의 기도가 응답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응답될 때까지 기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늘에서 비가 내리도록 기우제를 지낸다면... 그들의 그런 행위는 정말 비가 내릴 때까지 쉬지 않고 거듭된다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등불을 켜 놓고 있으라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밤중에 집을 찾아오는 주인을 위해서 일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어두워서 그 머리를 문에 들이받던지 아니면 발이 문지방에 걸려서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주인으로서는 얼마나 스타일 구기는 일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 집의 주인이라면 말이지요... 아마 집이 어둡더라도 그는 문지방에 걸리거나 부딪히는 일이 없이 자기 방을 잘 찾아 갈 것입니다. 종이 등불을 밝히는 이유... 그것은 주인을 위한 행이기도 하지만... 자기가 잠에 들지 않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요.
최인호씨가 다시금 글을 쓰고자 하는 의욕이 생겼을 때... 그는 항암치료의 후유증으로 손톱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그는 손끝에다가 골무를 씌우고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지요. 한자 한자 써가는 일이 참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에게는 그것이 바로 등불을 켜는 행위였겠지요. 설혹 지금이 깊은 밤중이라고 하여도... 등불을 밝게 켜들고 서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그 시간이 밤은 아닙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이것이 바로 주님이 생각하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는 항상 허리에 띠를 띠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항상 주님께서 자기를 통해서 이루실 새로운 계획을 기대하고, 그 희망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동시에 등불을 켜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하실 일을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인지... 그것을 찾고 이루어 가는 기쁨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마치 소설가가 병중에서도 믿음과 소망에 가득한 글을 한자 한자 아픈 손으로 써가면서 불을 밝히듯 말입니다. 주님이 지금 내 앞에 계시다고 믿으며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들... 그것은 바로 나 자신과 그 주변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주인이 와서 그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이 허리를 동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들 것이다.’(v.37) 참으로 놀라운 결말입니다. 이런 일은 전에는 없던 일입니다. 어떻게 주인과 종의 역할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주인이 종의 시중을 들려하는 일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요?
여기엔 주인의 기쁨과 감격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밤이 깊어서 다 잠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막상 집에 도착을 해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는 자기가 돌아 올 때까지도 잠자리에 들지 않은 것을 물론이거니와, 옷차림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등불까지 환하게 켜 놓았습니다. 그런 종을 대하니 주인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식탁을 준비하려던 종을 말리고... 대신 자신이 나서서 종이 마치 주인인 것처럼 식탁을 준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적은 무리여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비록 세상에서 우리가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섞여서 잘 보이지 않더라도...
*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과 희망을 잃지 않으려 한다면...
*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기꺼이 응답하려 한다면...
하나님은 그것만으로도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우리가 전혀 하지 못했던 일들을 이루려 하십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4대 자세
눅 12:35-40 / 이한규목사
< 헛된 재림신앙을 주의하십시오 >
1961년 봄, 4.19혁명 후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틈타 사이비 종말론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그때 한 시골교회의 전도사가 산 기도를 열심히 하다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도 영혼의 병자들이 꽤 많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그런 병자들이 교주처럼 행동하며 많은 사람들을 같이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 병자 전도사의 체험담입니다. 그가 산에서 기도할 때 밤에 갑자기 앞이 환해지면서 예수님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아무개 전도사야.” 그가 “말씀하소서!”라고 하자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네게 하늘의 비밀을 전해주겠노라.” 그 전도사가 말했습니다. “주님! 감사해요. 알려주실 비밀이 뭔가요?” 그러자 예수님의 모습을 한 사탄이 환상 중에 말했습니다. “올해 8월 15일에 내가 너희 마을 뒷산으로 재림할 테니 너는 교인들을 잘 준비시켜 나를 맞아라.”
그쯤 되면 신학을 제대로 한 사람은 금방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했을 텐데 그 전도사는 마음속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하산했습니다. 그리고 봄에 씨를 뿌리려는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8월 15일에 예수님이 우리 마을 뒷산으로 재림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씨를 뿌리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세요.” 그러면서 재산을 다 팔아 바치게 하고 집집마다 돌면서 밭 갈던 소를 한 마리씩 잡아먹으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마침내 8월 15일이 가까워지면서 그 일주일 전에 온 교인들은 하얀 한복으로 갈아입고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다 마을 뒷산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렇게 열렬히 기도하고 찬송하며 일주일을 보냈지만 8월 15일 아침이 되어도 예수님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믿음 부족 때문인 줄 알고 더 열렬히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때 한 교인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기도 중에 휴거가 일어나면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홀로 떨어질지 모르니 칡넝쿨로 모두 허리를 엮읍시다.” 그래서 칡넝쿨로 굴비처럼 허리를 엮어서 같이 휴거되도록 조치한 후 함께 기도하고 손뼉 치며 찬송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자정까지도 예수님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도 바쁘시면 하루쯤 연기할 수 있지.”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 후 열흘이 지나도록 예수님의 재림이 없자 교인들이 속은 줄 알고 점차 적개심을 가졌습니다. 상황이 심각함을 깨닫고 그 전도사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어제 하나님이 새로 주신 계시에 의하면 며칠 전 예수님이 재림하다가 여러분들의 죄가 발견되고 믿음이 부족해서 화가 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 말에 더 이상 속지 않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때 그 전도사를 추종한 몇몇 사람들이 수도권으로 올라와 시한부 종말론의 한 계보를 형성하다가 지금은 크게 성장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시한부 종말론 장사꾼은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병자에게 속아 같이 병든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 곳을 주의하라고 하면 어떤 병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막지 말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를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병을 막으려는 것입니다. 잘못된 열성 및 영성으로 자기 맘대로 계시하는 것을 다 성령의 역사로 알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성령의 이름을 팔거나 망령되어 일컫는 것은 오히려 제지하는 것이 진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갈 5:22-23). 성령의 제일 앞문은 사랑입니다. 성육신의 사랑을 외면하면서 신비한 신앙행위를 내세우고 교주를 우상화하는 것은 결코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또한 성령의 제일 뒷문은 절제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치우친 극단주의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극단주의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성령의 열매인 절제로 뒷문을 잘 단속하게 하신 것입니다.
서울 강남에 잘못된 은사주의를 비판하는 한 장로교 목사님이 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그분을 성령의 은사를 인정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막는 목사라고 비판했습니다. 저도 그분의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그분은 성령의 은사를 인정했습니다. 다만 성령의 은사를 내세워 미혹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자들은 자기 계시를 막으면 성령의 역사를 막는다고 합니다. 결국 자기가 성령인 셈입니다. 건강한 신앙을 위해서는 ‘전진’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제지’도 필요합니다. 인생에서 액셀만큼 브레이크도 중요합니다.
얼마 전, 밤늦게 강남에서 분당으로 고속국도를 타고 오는데 너무 졸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도로 앞에서 어떤 환영이 나타나 손을 흔들고 제 차를 막았습니다. 순식간에 지나쳤지만 소름이 오싹 끼치면서 졸음이 확 깼습니다. 그리고 몇 초 후에 앞에 시커먼 물체가 3차선 고속국도 중간에 떡 서 있었는데 고장 난 차였습니다. 시속 100킬로로 달리고 있어서 갑자기 설 수도 없었고 핸들을 너무 틀면 차가 전복될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최소한 적게 틀어서 간신히 몇 십 센티 차이로 앞차를 했습니다.
저도 아직도 졸 때 갑자기 앞에 나타나 손을 흔들어 제 차를 막은 그 환영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후에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가끔 성령님이 어떤 일에 대해 “속도를 줄여라! 그 길로 가지 말라!”고 손을 흔들어 막을 때도 있는데 그때는 그 막는 제지의 손길이 축복의 손길이란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전진’으로도 나타나지만 ‘제지’ 및 ‘절제’로도 나타납니다. 가장 위험한 차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차입니다.
성도는 열심히 일하면서도 때로는 잘 놀 줄도 알아야 합니다. 노는 것을 정죄하는 사회는 브레이크 없는 불행한 사회가 되고 노는 것에 죄책감을 가지는 성도는 브레이크 없는 불행한 성도가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열심히 전진하면서도 때로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최적의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동시에 기다리는 성품을 훈련하고 기다림의 축복을 배우는 절기로 삼아야 합니다.
<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 >
196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희극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는 인간 상태에 대한 유명한 풍자극입니다. 극중의 유일한 소품은 하나님이 없음을 상징하는 죽은 나무입니다. 그 극은 암시합니다. “메시야가 온다는 믿음은 인간을 왜소하게 만든다. 인간은 하나님이란 죽은 조형물 없이 자기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그 동안 사람은 속았다. 고도(God,하나님)는 오지 않는다. 하나님이 온다는 기대를 포기해야 실망도 없다.” 그런 암시를 통해 베케트는 기다림의 축복을 말살하려고 합니다.
그처럼 요새 많은 교인들도 의심과 절망 속에 주님에 대한 기다림을 포기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즐겨도 그리스도는 외면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주님의 재림과 임재와 축복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이 없는 것은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기다림과 기대가 있어야 희망도 넘치게 됩니다. 이제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재림과 임재와 축복에 대한 기다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기다릴 때 어떻게 기다려야 합니까?
1. 준비하며 기다리십시오
본문 35-36절 말씀을 보십시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밤에 열렸기에 혼인집에서 돌아올 때는 대개 한밤입니다. 그때 충성스런 종들은 아무리 한밤이라도 주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준비하며 기다립니다.
그처럼 주님을 기다릴 때는 그냥 멍하게 하늘만 바라보고 기다리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도록 길도 찾고 노력하고 준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준비하는 삶’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준비하는 삶이 없는 은혜는 은혜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심히 일하고 준비하며 기다릴 때 하나님은 삶의 의미와 보람과 행복도 주시고 축복과 건강도 주십니다.
서울에 한 신실한 여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간암이었습니다. 두 달 남았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낙심되었지만 곧 정신을 차렸습니다. 남은 두 달을 어떻게 살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먼저 재산부터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지!”라고 하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헌신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재산의 일부를 잘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또한 처녀 때 은혜 받고 선교사가 된다고 했는데 결혼 후 바쁘게 살다가 그 다짐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후방에서 ‘보내는 선교사’가 되겠다고 했는데 그 다짐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재산의 일부를 또 잘라서 선교헌금을 보냈습니다. 또한 매일 성경을 읽으며 아이들에게 유서처럼 매일의 묵상을 썼고 미웠던 사람에 대한 미움을 털고 화해할 사람을 찾아가 화해했고 평소에 전도하고 싶었던 사람을 찾아가 전도했습니다. 그렇게 2달이 지나면서 죽을 날이 가까이 되었는데 오히려 몸에 힘이 났습니다.
2달 후 어느 날, 검진 후 의사 선생님이 난처한 듯이 말했습니다. “손님! 죄송합니다. 지난번의 간암 진단은 오진 같습니다. 암 덩어리가 안 보입니다.” 그때 세상이 달라 보였고 하나님의 은혜가 달콤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사이에 병이 나았을 수도 있고 오진일 수도 있었지만 오진이라도 전혀 원망스럽지 않았습니다. 누가 물었습니다. “집사님! 오진으로 돈을 많이 써서 억울하지 않나요?” 그분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게는 지난 두 달처럼 보람 있고 행복했던 때는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종말의식을 가지고 주님 만날 준비를 하며 열심히 살면 건강도 얻고 지경도 넓혀지고 축복도 받습니다. 게다가 언제 주님이 와도 “주님! 기다렸습니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라고 하며 기쁘게 주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이제 주님을 기다릴 때 최선을 다해 준비하며 기다리십시오. 신기루와 비전의 차이는 “계획과 준비가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계획과 준비가 없이 비전만 가지면 돈키호테가 됩니다. 비전 있는 사람이란 큰 비전을 가지면서도 그 비전을 이루려고 구체적인 방법도 찾고 준비도 하는 사람입니다.
2. 인내하며 기다리십시오
고대에 주인이 혼인집에 갔다가 밤늦게 오면 종이 깨어 있다가 문을 열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주인은 종들이 그렇게 깨어 있었다고 그 늦은 밤에 허리에 띠를 띠고 종들을 자리에 앉힌 후에 거꾸로 섬겨주었습니다(37절). 실제로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이 장면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깨어 있는 성도들을 크게 칭찬하시고 상급을 주실 것이란 비유의 말씀입니다.
본문 38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당시 밤은 사경으로 구분되었습니다. 1경은 저녁 6-9시, 2경은 저녁 9-12시, 3경은 밤 0-3시, 4경은 새벽 3-6시입니다. 그런데 자정이 넘은 3경까지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을 보면 주인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영적인 의미에서 이경과 삼경은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힘든 때를 뜻합니다. 그때도 현실 이면에서 주님이 승리를 위한 작업을 하심을 믿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1982년 10월 어느 날, 위스콘신에서 벌어진 한 풋볼 경기에서 위스콘신 대학이 미시간 대학에 크게 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6만 명의 관중은 전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곳에서 70마일 떨어진 곳에서 같은 시간에 벌어진 메이저리그 야구 월드 시리즈 3차전 경기에서 밀워키 브루어스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이기고 있다는 소식을 휴대용 라디오로 듣고 기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앞의 게임에서는 크게 지고 있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게임에서는 승리하는 삶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정치인과 참된 리더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입니까? 정치인은 앞에서는 사탕발린 말을 하지만 뒤에서는 대개 권력과 돈을 따라 움직입니다. 반면에 참된 리더는 앞에서는 사탕발린 말을 잘 못하지만 따르는 영혼을 돕고 힘을 주려고 무던히 애를 씁니다. 그렇다고 물질을 대줄 수도 없고 사람에게 청탁을 다닐 수도 없기에 결국 앞에서는 찬란한 꿈과 비전을 도전하고 뒤에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새 경제가 어려워지고 취직대란이 벌어지면서 부모들도 자기 인맥을 최대한 동원해 자녀의 길을 열어주려고 암중으로 치열하게 같이 뜁니다. 저도 첫 딸이 패션과 뷰티 세계에서 멘토로 삼고 배울 그 분야의 마이스터(명인)를 찾아주려고 열심히 작업하는데 그 사실을 딸이 알았다가 안 되면 실망하니까 구체적인 진전이 있을 때까지는 딸이 모르게 소리 없이 작업합니다. 사람도 그렇게 암중으로 작업하는데 하나님이 암중으로 작업하지 않겠습니까? 인내하고 기다리면 언젠가 하나님이 작업해 만들어놓으신 최상의 현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3. 믿음으로 기다리십시오
예수님 당시의 도둑들은 당시 흔했던 흙벽돌집을 뚫고 불시에 도둑질하러 들어올 때가 많았습니다. 만약 도둑이 어느 때 집을 뚫고 들어올 줄 알면 주인이 그 벽을 뚫지 못하게 방비했을 것입니다(39절). 그처럼 늘 준비하고 있어야 전혀 예상치 못한 때 주님이 오셔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40절). 예수님은 재림 날짜를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 오실 것이라는 믿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잃고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안 되겠다! 우리 손으로 나라를 회복시키자!”고 하며 테러로 문제해결을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셀롯인들(Zealots)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좋았지만 방법은 좋지 않았기에 결국 잘못된 환경은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소멸되었습니다.
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불신으로 인한 조급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능력으로 빨리 로마 제국을 뒤엎기를 원했기에 예수님을 붙잡히게 하면 예수님이 크신 능력을 행하시면서 혁명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고 또한 최종 승리를 믿고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공중그네 곡예사들은 곡예를 할 때 ‘나는 사람(flyer)’는 철저히 나는 일만 하고 ‘잡는 사람(catcher)’은 철저히 잡는 일만 합니다. 그때 ‘나는 사람’은 나는 순간 그네에서 손을 떼고 몸을 공중으로 던지면서 회전합니다. 그 다음에 그가 할 일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날면서 자기가 ‘잡는 사람’을 잡으려고 하지 말고 그저 ‘잡는 사람’의 강한 손을 굳게 믿고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는 일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우리를 잡아주실 하나님을 굳게 믿고 하나님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기다림이 길어진다고 성급하게 다른 결정을 내리면 결국 손해만 봅니다. 반면에 참기 힘들 때 참으면 최하의 결과가 본전입니다. 거 나아가 참기 힘들 때 참고 감사까지 하면 앞날에 예비될 그의 축복은 생각을 초월하게 되고 그를 통해 환경도 변하고 인물이 나오는 역사도 조만간 나타날 것입니다.
4. 선교하며 기다리십시오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주님은 마지막 때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어 온 세상에 전파될 때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재림과 가장 깊은 관련이 있는 일은 선교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종말에 관한 말씀에 집착하고 깊이 연구까지 합니다. 심지어는 출처도 불분명하고 후세의 위작 가능성이 큰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까지 끌어들여 불안해하는 헛된 종말 운명론자가 됩니다. 아직도 1970년대 종말론 버전을 가지고 종말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사탄에게 붙잡히고 이단에 빠지는 것입니다. 너무 종말주의에 빠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종말에 대해 정확히 아는 일’보다 ‘종말을 잘 준비하는 일’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선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가장 마지막 말씀도 “성령을 받으면 땅 끝까지 선교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행 1:7-8). 성령 충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땅 끝까지 선교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이루려고 최전방에서 선교사님들이 선교할 때 그분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선교 사명에 같이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내는 기도와 물질이 오지 영혼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애쓰는 선교사님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도구가 된다고 생각하면 그 일처럼 기쁘고 복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의 신학교 동기이자 목사 안수 동기인 몽골의 임병철 선교사님은 1993년 괌 아래 축(Chuuk)이란 남태평양의 작은 섬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1년에 2백일 이상이 섭씨 36도가 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냉장고도 없는 지역에서 3년 반 동안 원주민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심장에 이상이 생기고 몸이 크게 망가져서 1996년 뉴욕으로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요양하면서 뉴욕에서 가장 부촌인 롱아일랜드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해서 몸은 편해졌습니다. 그러나 몸이 편해질수록 오지 영혼들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결국 2003년에 나이 50에 다 되어서 다시 몽골로 들어갔습니다. 1차 선교 때는 가장 더운 축(Chuuk)으로 가고 2차 선교 때는 가장 추운 몽골로 가는 그런 선교열정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열정을 우리도 공유해야 합니다.
선교사님들을 볼 때마다 가장 안타까운 일은 자녀 문제입니다. 자신은 사명을 받아 선교하는 것이지만 자녀들은 입장이 다릅니다. 좋은 아파트에 살다가 부모가 사명 받았다면서 갑자기 시골의 초가집에 가서 살면 어느 자녀가 좋아하겠습니까? 어떤 선교사 사모님은 처음 선교지에 가서 문화 및 자녀 문제로 매일 2년을 울었습니다. 그만큼 선교지의 삶은 힘든 삶입니다. 그래도 그 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 선교사님들을 위해 후방에서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며 그분들의 외로움과 고통을 덜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19세기 말 흑암 중에 살던 우리나라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라 두 선교사님이 찾아와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교회와 병원과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만큼 앞선 나라가 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성육신 하셨습니까? 죄악 많은 이 세상에서 영혼을 구하려고 일종의 선교사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 성육신의 사랑을 품고 우리도 늘 선교의 사명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최상의 준비이고 또한 주님의 재림 전에 현실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선교는 해외선교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동정이 아닌 정당한 명목으로 ‘없는 사람’과 물질을 나누는 것도 선교입니다. 문서선교도 중요한 선교입니다. 성경의 작은 일부분인 베드로전후서가 로마의 거대한 베드로성당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그 사실은 문서선교의 중요성을 잘 말해줍니다. 또한 요새 교회의 공룡화로 인한 부작용을 염려해서 사명감을 가지고 스스로 분립해 작은 교회로 가서 기쁘게 섬기는 것도 큰 의미의 선교입니다. 다수의 품에 안기면 속물이 되기 쉽지만 소수를 품에 안으면 하나님이 인물의 꿈을 이뤄주실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마지막 명령인 선교를 위해서라면 마음과 정성과 시간과 물질을 아끼지 마십시오. 인생은 참 짧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곧 천국에 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어엿하게 설 수 있도록 선교에 대해서는 항상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최대한 선교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십시오. 그 능력을 키우려고 이번 한 주간도 자신의 일터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십시오. 그리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힘써 선교에 동참해서 주님을 만날 때 기쁨으로 만나고 그 전에도 늘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눅 12장 35~40절 / 김민호목사
6월달은 ‘기다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누가 복음에 나오는 말씀으로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위에 붙여진 제목을 보면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라고 되어 있으실 겁니다. 성경에서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한 말씀이 베드로 전서 5장 8, 9절 말씀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8;9a) 아멘.
사탄이 우리의 주적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가장 극적으로 나오는 장면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은 땀 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처절하게 기도 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26:38;40;41)는 말씀을 연속적으로 세 번 하셨습니다.
죽음이라는 가장 큰 시험과 유혹이 몰려올 때 깨어 있지 않으면 사탄에게 굴복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시험을 물리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의 목숨과 영혼을 탈취하려는 사탄의 공격을 도무지 물리칠 수 없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 이기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서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대부분 종말에 관해서 연결 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깨어 있으라는 구절을 한 구절씩 읽어 드립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막 13:37),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아멘.
굳이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되는 말씀들입니다. 공관복음과는 달리 요한 복음에서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심판, 영생 이런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2;24;25;27) 아멘.
이렇듯 신약성경은 복음서와 서신서 요한 계시록까지 주님이 다시 오실 것과 심판과 영생에 대한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당연히 구원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확신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소망으로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깨어서 그 날이 올 때를 준비하라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 하신 내용입니다.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먼저 35절을 읽어 드립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아멘.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는 모습이 깨어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허리에 띠를 띤다는 성경 말씀 많이 들어보셨죠? 언제 이런 행동을 보이나요?
창세기 37장에서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죽임당했다는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창 37:34) 하였습니다. 허리를 묶는 것은 애통할 때 하는 행동입니다.
열왕기상 20장에는 아람왕 벤하닷이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에게 무려 12만 팔천명이 죽임 당하도록 대패하여 아벡 성읍의 골방에 숨었다가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러 이르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내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왕상 20:32)라고 항복과 목숨을 구걸합니다. 허리를 동이는 것은 목숨만을 빌려달라고 빌 때 하는 행동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욘 3:6), 금식하며 기도 할 때(느 9:1),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을 대답하여야 할 때(욥 38:3),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바랄 때(벧전 1:13) 등입니다. 특히 진심으로 참회하려는 사람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허리를 단단히 동여 매고 재 위에 앉은 채로 기도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는 첫 번째 마음이 왜 허리에 띠를 띠라고 했는지 아셨을 겁니다. 6월 달 내내 말씀 드리고 있는 것처럼 참회하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참회하는 사람만이 진리되신 예수님을 붙잡고 허리에 단단히 묶어서 동행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참회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면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허리띠를 단단히 동이고 묶어 매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재림을 기다리는 가장 중요하고 첫 번째 되는 자세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진리의 허리띠는 단단히 묶여 있습니까? 묶을 채비가 되지 않았다고 하여도 주님은 그것과는 상관 없이 도둑 같이 오실 겁니다.
두번째 그 때를 기다리는 자세는 등불을 켜고 서 있는 것입니다. 등불은 마태복음 25장에 슬기로운 다섯 처녀, 미련한 자다섯 처녀 비유에 나오듯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열처녀 비유를 하신 후에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라고 하셨습니다.
등불을 들고 서 있다는 것은 항상 빛 가운데 자신을 드러낸 상태, 즉 영적 어둠에서 벗어나 밝은 빛 가운데 머물러 있는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이 금방이라도 문을 두드리면 달려나가 열어줄 수 있도록 항상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거룩과 정결함을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일들이 회개하게 하고, 거룩하게 살게하고, 깨어 기도하게 하시기 때문에, 등불을 들고 서 있다는 것을 성령 충만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해도 무리는 없을 듯 합니다.
자 그럼 두 가지를 묶어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언제 올지 모를 그 날, 그 때를 준비하며 기다리는 자세는 “참회하며, 진리 되신 빛 가운데 항상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기다림은 있을 수 없으며, 어둠(거짓, 위선, 음란, 음행, 불의, 불순종, 교만, 정죄, 판단, 포악, 간교, 분열, 분노...)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문을 열라는 신랑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서 있으라”는 마지막 말씀은 명령형으로 ‘계속해서 그렇게 하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허리 띠를 계속 매고 있어라, 등불을 계속 켜 놓아라, 그 자세로 계속 준비하며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닌 일평생 이 자세를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회개하는 삶, 진리와 거룩으로 사는 삶은 권면하고 강조할 사항을 훨씬 뛰어넘어서 강요하고 강제적으로 압박해도 괜찮을 정도로 절대적인 문제입니다. 왜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사역 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는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날 고대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하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참회하라, 거룩하게 살아라, 진리와 동행하라, 깨어 있으라, 준비하라, 기다리라”이런 말씀은 듣기도 싫어하고, 들어도 그 때 뿐인 것처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중에 우리도 포함 됩니다. 예수님은 만나고 싶고, 하나님 나라는 가고 싶은 것과 참회하며 빛과 진리 안에 사는 것은 별개인가요? 미뤄 놓았다가 나중에 해도 되는 건가요?
예수님은 오늘 우리 귀에 분명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그리고 저는 이 말씀을 풀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주님이 말씀 하시고 우리는 귀로 이 말씀을 들었으니 경각심을 느끼고 긴장감 있게 매일 매일의 삶이 진짜 그 날과 그 때를 간절히 기다리는 자로, 준비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은 이제 각자의 선택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 하시렵니까? 노력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은 여러분이 이제 몸과 마음을 제대로 움직이여서, 매일 매일 참회 하고, 매일 매일 빛과 진리 되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우리가 그토록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기쁜 마음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때를 준비하는 자세를 말씀 하신 예수님은 준비된 자들이 맞이하게 될 상황에 대해서 계속해서 비유로 말씀 하십니다. 36~ 39절을 읽어 드립니다.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아멘.
이 비유에서 혼인 집이 나오는 이유는,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는 밤 늦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언제 올지 모를 그 때를 묘사하는 적절한 배경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36~37절은 주인이 예상하던 시간에(예:늦은 밤이 아닌 저녁 즈음) 돌아왔을 때의 상황을 말합니다.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 왔을 때 기다리는 사람(종들)이 있었습니다. 예상한 시기에 왔다고 해서 다 기다린 것은 아니고 물론 이 때도 기다리지 않은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여기서 주인은 예수님이고, 기다리는 사람은 36절에서 말하는 허리 띠를 매고 등불을 켜고 서서 기다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사람을 말합니다. 준비하며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주인이 일찍 오시든, 더디 오시든, 한 밤 중에 오시든, 새벽에 오시든, 어느 시간이든이 상관 없이 주인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주인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깨어 있던 사람”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들의 자세와 태도를 보고 매우 기뻐 합니다. 주인이 말하기를 “(깨어 기다리던)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라고 했습니다.
수종 든다는 것은 섬겨 준다는 말입니다. 주인은 너무 기쁜 나머지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먹고 마시고 즐기도록 손수 시중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진실로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복이 있으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섬겨주는 것도 감동이지만 복이 있다고 말한 것이 진짜 선물입니다.
지난 주에 복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자체가 복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복중의 복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보았거나,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생명 길이 보이거나, 더럽고 불결한 죄와 악을 끊어내고 사는 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이 것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하나님 나라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주인이 기다리던 종들에게 “너희는 복이 있으리라”고 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고, 너희는 나를 보고 살 것이며, 너희는 영생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너희는 영원히 죄와 악이 침범하지 못하는 거룩함으로 살게 될 것이다. 너희에게는 이러한 복이 있으리라 라고 말씀 한 겁니다.
엄청 나지 않습니까? 주인이 언제 오실지 모를 그 날 그 때를 위해서 항상 허리 띠를 매고 항상 등불을 켜고 서서 기다리기를 계속 했더니, 이런 엄청난 대접과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길이 참고 기다리던 그 모진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만큼 넘치도록 보상을 다 받았습니다.
함께하는 복을 영원히 누리도록 하겠다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영원한 복 중의 복입니다. 이것을 받으려고 우리는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비유에 나오는 기다리고 있던 종들이 부럽고 또 부럽습니다. 우리가 만약 진실로 기다리는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으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 기다려야 하는지 이 장면 하나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38~39절은 주인이 완전히 늦게 오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경, 삼경이라는 시간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저녁 해가 질 때로부터 다음날 새벽 해 뜰 때까지를 3등분해서, 해질 때부터 밤 10시경을 초저녁으로, 밤 10시~새벽 2시경을 이경으로, 새벽 2시~해 뜰 때까지를 삼경으로 구분했습니다.
이경, 삼경은 진짜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을 자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도둑들이 새벽2~3시에 활동한다고 합니다. 39절에도 도둑이 나옵니다. 도둑이 드는 시간이 언제 인지 뻔히 알고 있다면 그 시간에 종들은 교대로라도 야간 경계를 해야 맞습니다. 아마 주인도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을 겁니다.
저녁 이른 시간이 아닌 이경, 삼경 늦은 새벽까지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린 종들 역시 복이 있으리라 말씀 하셨습니다.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벽까지 기다렸다고 해서 더 큰 상급이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예수님)자체가 복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할 수 있는 복을 받았다면 어느 누구라도 불평을 가질 수 없이 최고의 복, 최대의 복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저녁 시간에 기다린 종들, 그리고 새벽 까지 기다린 종들을 나누어서 이야기 한 것은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며, 언제까지 준비하고 깨어 있음을 흐트러트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날, 그 때, 그 시간은 하나님 아버지만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상하며 맞춤형으로 그 시간에만 한정해서 기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 전체의 시간은 단 1초도 허비하지 않고 재림의 그 날, 그 때를 간절히 기다리는 일에 집중해야 하는 것임을 일깨워주시는 비유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언제인지도 모를 그 날을 매일, 매 시간, 매 초마다 집중하고 긴장감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오신 겁니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을 굳게 붇잡아 주셔서 기다리는 마음을 놓치지 않게, 기다리는 마음 변하지 않게, 기다리는 인내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길만이 새벽까지 기다리는 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을 항상 간구 하시고, 기다리는 자에게 영원한 복이 있으리라 말씀 하시는 그 날의 음성을 기다리며 하루 하루를 성령이 주는 위로와 평안과 능력 가운데 살아가시는 충성된 기다림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 마지막 말씀 40절을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아멘.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그 날이 도적같이 이르리라, 그 날과 그 때는 알지 못하리라, 때와 시기는 아버지만 아시느니라”이런 말씀들과 느낌이 비슷한 말씀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은 앞서 35절의 ‘서 있으라’는 말씀과 동일하게 명령형으로, 문법적으로 계속해서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준비하고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이지 이런 말씀들만 보면 굉장한 부담감이 듭니다.
그런데 부담감이 들수록 사실은 굉장히 좋은 겁니다. 이런 것을 거룩한 부담감이라고 합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예수)가 오실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생각도 안하고 살아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는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자녀(종, 백성)들이기에 우리의 평생 임무는 그 날과 그 때를 한 시도 잊지 말고 “생각하며 살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와 달리 주님은 오시는 것이 임무이기 때문에 뜻하신 대로 생각하지 않은 때에 오시면 됩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신다고 약속 하셨고,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세상이 없어지는 그 날까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는 이 말씀은 사라지지 않고 온 인류에게 소망으로 역사할 겁니다.
기다리는 것에 충실한 우리들, 오시는 것에 신실하신 우리 주님, 이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이 준비하고, 깨어 있고, 기다리는 것을 모두 함축하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상황입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렇기 때문에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그렇기 때문에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당시의 제자들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가리킵니다. 나 들으라고, 나에게 대놓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준비하고, 기다리고, 깨어 있는 것이 앞으로는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익숙한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담가는 말씀이 아니라 이미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응원과 격려의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매번 듣던 싫증나는 말씀이 아니라 함께 있는 복을 주시려는 가장 큰 은혜의 말씀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여러분들의 삶이 깨어서 기다리는 삶, 그 때를 준비하는 삶, 영원히 함께함을 간절히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라며, 하루 하루가 우리 주님과 영원토록 함께하는 복중의 복을 누리는 기쁨의 시간들로 채워져 가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신실한 청지기
누가복음 12:35-48 / 이동휘목사
청지기란 말은 ‘책임을 맡은 자’란 뜻입니다. 자기의 것이 아닌 주인의 것을 잠깐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인의 권리를 위임받아 일정한 기간동안 관리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두실 때에 동산의 관리자로 세우셨습니다(창 2:15). 우리는 청지기들입니다(벧전 4:10).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언제 오실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세, 곧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비유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청지기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재물이 많은 사람의 재산을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청지기는 때에 따라서 종일 수도 있고, 종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청지기를 '집사'라고 불렀습니다. 이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는 주인의 뜻을 따라서 재산을 관리하고, 주인의 뜻을 받들어 섬김으로 그 임무와 책임을 수행해야 합니다.
먼저 칭찬 받은 신실한 청지기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 칭찬받은 청지기는 항상 깨어 준비하는 자였습니다.
본문 35절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1) 항상 깨어 있는 자는 허리에 띠를 띠고 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의 의복은 오늘날 여인들의 원피스와 비슷해서 땅에까지 치렁치렁 옷이 끌리기가 쉬웠습니다. 그래서 일하려면 먼저 하는 것이 허리를 동이는 것입니다. 유대인만 아니라 허리를 동이어야 일하기가 쉽고 힘이 생깁니다. 순례자가 길을 떠날 때나 종이 일하려고 할 때에 허리에 띠를 두룹니다. 군인이 전쟁터에 나갈 때도 탄띠를 두릅니다. 예수님도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주님도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엘리야나 세례 요한도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옥에 갇혔던 베드로를 나오게 할 때도 천사가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행 12:8)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당시, 첫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명령만 하면 즉시 떠날 준비를 한 자세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일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2) 항상 깨어 있는 자는 등불을 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는 누구나 등불을 주십니다. 이제는 산 위에 등처럼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게 됩니다. 신자든 불신자이든 그 등에 환한 불빛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캄캄한 골목에 가로등이 꺼져 있다면 그것처럼 보기 싫은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사람들은 불빛을 기대하는데 꺼져 있다면 기대했던 만큼 실망을 하고 비난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불을 밝힙니까? 진리와 사랑, 소망과 기쁨의 불을 밝힙시다.
(3) 항상 깨어 있는 자는 서 있는 것입니다.
서 있다는 것은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띠만 띠고 있거나 등불만 밝히고 누워 있거나 앉아서 기다린다면 언제 잠들어 버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청지기로서 깨어 띠를 띠고 등불을 밝히고 서서 주 앞에 아뢰기를 '주님, 여기 준비하고 있아오니 명령만 하옵소서 내가 순종하겠나이다'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청지기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칭찬 받은 청지기는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본문 36-38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고 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종들은 띠를 띠고 등불을 밝히고 문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주인이 오자 빨리 가서 문을 열어줍니다.
더 나가서는 38절에 보면 그 종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이경이나 삼경이 지난 시간까지도 기다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에서는 밤을 사경으로 나눕니다. 그러므로 이경이나 삼경은 새벽을 말합니다. 종은 그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순종적입니까? 아마 처음에는 많은 종들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시간 두 시간 기다려도 주인이 오지 않으니 불평이 많은 종들은 하품을 하며 '에이, 주인은 안 오는가보네, 잔치 술에 취해서 어디서 자고 있겠지'라면서 그들도 어디 가서 잠을 자거나 술을 먹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의 종들만은 끝까지 기다리라는 주인의 말에 순종하면서 충성했습니다. 주인은 어쩌다 보니까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종들이 다 자러 간 줄을 알고 와보았더니 그 종만은 여전히 그 순종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감동을 받아서 큰 칭찬과 상급을 주었을 것입니다. 순종하는 청지기는 주인이 시키는 일을 아무 불평 없이 다 지켜 행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많은 예배보다도 단 한번의 진정한 순종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3. 칭찬받은 청지기는 사랑을 나누어 주는 자였습니다.
42절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고 했습니다.
청지기란 헬라어로 '오이코노스'입니다. 이는 큰 부잣집의 살림을 맡아 보는 집사를 말합니다. 이 집사는 부잣집의 모든 재산의 수입, 지출을 관리하고 종들의 수급 등, 인력관리를 하고 소작인들을 다스리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인 청지기는 무엇보다도 지혜와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많은 재산을 잘 관리하여 점점 재산을 증식시켜야 합니다. 동시에 진실하여야 합니다. 주인의 재산을 슬금슬금 뒤로 빼돌리는 진실치 못한 자는 차라리 지혜가 없는 진실한 자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청지기는 덕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부리는 종들을 잘 덕으로 다스리므로 사기를 높여 줄 뿐 아니라 주인에게 욕이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오늘 45-48절에 나오는 악한 청지기처럼 종들이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혹은 뇌물을 안 바친다고 자기 멋대로 때리고 삯을 제대로 안 주거나 마음대로 해고해 버리므로 온 종들의 원망이 거세지고 결국 그런 종을 그냥 방치하는 주인에게 욕이 돌아간다면 주인은 이 소식을 듣고 그 청지기를 엄히 때리고 내어 좇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청지기는 덕이 많습니다. 종들에게나 소작인들에게 후하게 대합니다. 야단칠 때 야단치지만 인정을 베풀 때는 인색하지 않습니다.
어느 종의 가정에 누가 아프면 약을 사다주면서 '이것은 주인이 사다주라'고 해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어느 소작인 가정에 아기를 낳으면 미역을 사다주면서 '이는 주인이 보내는 것입니다.'라고 전갈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누가 혹 실수를 해도 덮어주고 주인에게 변명해 줍니다. 그랬더니 종들이 주인을 만날 때 인사를 하기를 '지난 번에 아팠을 때 약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거나 어느 소작인은 '지난번 우리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그 귀한 미역을 보내주셔서 너무나 고마웠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은 누가 그런 좋은 일을 행했는가를 알아보고 그런 일을 행한 청지기가 너무 귀하여 44절의 말씀대로 주인은 그 모든 소유를 다 맡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 맡긴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재산, 우리의 지식과 재주, 우리의 식구와 건강은 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잘 관리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는 움켜쥐려고 하지,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데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임명받은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떤이는 열심히 지식이나 학벌만 획득하려고 하지 그 지식을 나누어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느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열심히 움켜주려고 하지, 그 높은 지위를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아무 일도 안 하려고 합니다. 어느 분은 재물을 열심히 움켜쥐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재물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없는 자들을 업신여기기를 다반사로 합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도 그런 하대를 받으며 고달픈 삶을 사는 분들이 있을 터인데 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우리 교우들이 드리는 십일조 헌금은 천금과도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만이라도 그런 아픔과 차별대우를 받는 교우들의 안식처가 되고 그 분들이 존귀한 대우를 받고, 그들의 이름이 대접을 받게되는 천국을 만들어 가야 옳습니다.
이제 한국교인들이 성숙되어저야 합니다. 언제까지 우리 한국교인들 중의 많은 분들이 겉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까? 교회에서는 일등 신자 같은데 가정이나 사회 돌아가면 세상 사람들이나 다른 것이 하나도 없는 삶들을 살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마태 25:35에서 그런 배고픈 자, 목 마른 자, 나그네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를 선대한 것과 박대한 것을 바로 자기를 박대한 것으로 인정하여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주변에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랑을 받을 사람들이 있는데 성도가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내 집에 일하러 오는 배고픈 사람을 박대한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얼마나 분노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배고픈 자, 목 마른 자, 나그네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를 박대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혹 그런 이들에게 그런 아픔을 주었다면 회개해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세월이 지난만큼 주님의 재림의 시간이 임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청지기로서 칭찬 받을 자인가, 아니면 책망받을 자인가를 점검해 보면서 항상 깨어서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서 순종의 삶을 사십시다. 그리고 사랑을 나누어주는 삶을 사는 칭찬 받는 청지기, 신실한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
눅 12장 35~51절 / 이동휘목사
1. 방범 보안업체 에스원의 범죄예방연구소는 지난 21일 2018년 침입범죄 동향을 발표했는데, 도둑 범죄 사고 발생시간은 0~6시(78%)가 가장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특히 어둡고 인적이 드문 밤 3시(22%)에 도둑의 침입이 최다로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침입 유형별로는 창문(39%)을 통해 침입한 비율이 가장 높았는데, 대부분이 잠그지 않은 창문(66%)을 통한 것으로 조사되어 집을 비울 때는 작은 창문까지 꼼꼼히 점검해야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일별로는 토요일(17%)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최근 주말을 활용한 여가에 관심이 높아지며 토요일에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그래서 휴가철에 집을 비우게 될 때 방범 목적으로 집안의 불을 켜두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백열전등이나 형광등은 장시간 켜 놓으면 과열되어 전기화재의 원인이 되어, 방범을 위한 대응책이 오히려 더 큰 재산피해를 내게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도둑 언제 올지 모릅니다. 도둑이 온다는 약속도 없고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며 ‘주인이 밤 몇 시에 오든 상관없이 깨어 있는 사람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 어느 주인이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집에는 종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종은 신혼여행을 떠났던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릅니다. 집 주인이 돌아올 때 밤이라 해서 불을 꺼두고 잠결에 잠옷 바람으로 맞이 하지 않도록 하라. 언제라도 집 주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옷을 단정히 입고 불을 밝혀 주인을 영접할 수 있도록 깨어 준비하고 있는 종들이 복되도다.>
계속되는 또 한 비유는 이렇습니다.
< 집 주인이 어느 밤에 도둑이 드는지 알았더라면 문도 잠그지 않은 채 밤 늦도록 집을 비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다.>
이러한 비유를 듣던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님,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2)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 생각하고, 주인의 뜻을 행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으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주인이 돌아와 엄히 벌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2. 앞서 말씀하신 신혼여행을 떠났던 ‘주인’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주인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둑이 생각지 않은 때에 침입한다는 것은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는 것처럼 세상 종말 혹은 ‘인자’가 되시는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 비유 말씀에서도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인자되시는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천국에 대한 비유 말씀에서도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마25:1-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은 언제 오실지 알 수는 없어도 반드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며 늘 깨어있고 준비된 삶을 살 것을 거듭 강조하신 것입니다.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는 이처럼 깨어있고 준비된 청지기를 말합니다.
3. 먼저 모든 인생들이 알아야 할 분명한 사실은 인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약속하신대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세상이 종말을 고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이를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4:27-44)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예수께서는 또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4:1-3)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오십니다. 그러나 그 때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행1:7)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그러나 반드시 오십니다. 인간의 주인 되시는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약속하시고 반드시 그 약속을 지켜오셨습니다. 성경 신구약에 하나님의 약속이 3만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세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께서 구세주로 세상에 오시겠다는 약속입니다.(초림) 예수 탄생 약 사천 년전에 주님이 오신다 오신다 하시더니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아브라함 자손, 유대 지파, 다윗의 계보에서 나신다 하시더니 그대로 나셨고 처녀 잉태하신다더니 그대로 처녀 마리아 몸에서 나셨고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더니 그대로 그곳에서 나셨습니다.
(사7:14)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1:22-23)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애굽으로 피난 가신다더니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는 바람에 애굽으로 피난 가셨습니다.
(호11:1) (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마2:13-15)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나사렛 사람이라 하시더니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고, 성령이 그에게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신다고 약속하시더니 그대로 사셨습니다.
(사61:1-3)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눅17:17-19)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진리가 충만하신다더니 그 입술에서 진리의 생수가 강같이 흘러 나왔고 한 식탁에서 떡 먹던 자가 발꿈치를 들어 찬다 하더니 12제자 중 한 사람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았으며, 은 30에 판다고 하더니 그대로 은 30에 팔렸고, 죄인들 틈에 죽는다고 하시더니 두 강도 틈에 못박혀 죽으셨으며, 겉옷은 나누고 속옷은 제비 뽑는다고 하더니 그대로 겉옷은 로마 병정들이 나누어 가지고 속옷은 통으로 짰기 때문에 제비 뽑아 가졌습니다. 부자 무덤에 장사한다더니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지내고, 주의 거룩한 자로 썩어짐을 보지 않는다고 하더니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위로 승천하신다더니 40일 만에 5백 여 명이나 보는 데서 승천하셨습니다. 주님에 대한 모든 약속은 다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둘째로 주신 약속은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다더니 열흘만에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사 2천년 동안 성령의 시대로 각처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며 나 같은 죄인을 회개시키시고 거듭나게 하여 하늘의 생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사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셋째로 주신 약속은 말세에 신랑되시는 주님이 공중에 오시어 신부되는 성도들을 영접하시며 세상에 대해서는 심판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사르신다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신다는 약속이 신약에만도 직접 간접으로 3백여 번이나 있습니다. 과연 그는 성경대로 이 세상에 오셨고 성경대로 사시다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부활하시고 성경대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성경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는 것을 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두 천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1:10-11)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4. 이렇게 주께서 다시 오실 때 가장 복된 사람은 깨어 준비된 사람,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는 깨어 준비된 사람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란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산이나 재능, 지식, 생명 등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해서 하나님께 유익함이 되어야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좋은 한 예를 보겠습니다. 구약 시대에 솔로몬 왕은 어린 나이에 왕에 등극하자 가장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솔로문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하여 솔로몬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면서 자신은 하나님 앞에 “종”, “작은 아이”에 불과하며 자신이 다스리게 될 “큰 백성”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 하지 않고 “주의 백성”이라고 표현하므로 자신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청지기”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솔로몬의 마음과 정신에 크게 만족하신 하나님께서는 “네가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며 “하나님의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릴 지혜뿐만 아니라 구하지도 아니한 “부와 영광”을 덤으로 주셨습니다.(열왕기 상 3:4-13) 나라의 대통령은 권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청지기입니다. 재벌들은 기업을 위임받은 청지기들입니다. 학자들은 지식과 지혜를 위임받은 청지기들입니다. 이들 모두가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아니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이 모두 제것인양 제 맘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나라와 사회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뿐만 아니라 주인의 뜻도 잘 알아서 주인의 재산과 소유를 잘 관리하며 적절한 때에 주인의 노예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그러나 악한 청지기는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는” 종입니다. 자기 신분을 망각하고 주인의 소유를 남용하는 사람으로 모든 것을 자기 것처럼 제 맘대로 처리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제 뜻대로 사는 사람이 바로 악한 청지기입니다. 그는 주인의 뜻과 명령에 따라 그 의무와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주인으로 모셔 섬겨야 합니다. 청지기 의식을 제대로 가져야 우리 사회가 당면한 모든 문제들과 위기를 극복해나갈 수 있습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늘 무서운 줄 알고 자기 자신과 이웃에 대하여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며, 공동체를 위해 진실과 최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장차 우리에게는 청지기에 대한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인”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재림) 때에는 모든 인간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있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청지기는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돌아오신다는 사실을 알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주인을 맞을 준비를 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고자 하면 주인 되시는 예수께서 언제 다시 오실까? 보다는 예수는 반드시 다시 오신다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언제 죽을까 보다는 나는 반드시 죽는다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언제까지나 주인 행세하는 청지기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해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 청지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 예수 다시 오실 때 복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면 무엇보다 먼저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주인 되시는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은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잠자는 자”라고 말합니다.
(엡 5:14-21)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비취시리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사도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므로 어둠 가운데 거한다고 했습니다.
(요1:9-11)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신 예수께서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2:35-38)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그리고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빛의 아들, 낮의 아들로 어둠에 있지 아니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어둠, 밤에 속한 어둠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요일 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살전5:4-10)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깨어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항상 간직하여 언제 주님이 오실지라도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빛이 되시며 참 생명이 되십니다. 참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 빛의 자녀가 되는 생명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요한복음1:9-12을 보겠습니다.
(요1:9-12)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알래스카 지방에서는 일 년 중 6개월 동안은 밤이 되고 6개월은 낮이 됩니다. 밤이 될 때에는 북극에서 발하는 극광(極光)이라는 아름다운 빛, 오로라(aurora)가 생기는데 그 밝기가 때로는 햇빛보다 더 밝습니다. 이 극광은 북극에서만 생기는 현상인데 증기의 작용이라고도 하고 대기의 작용이라고도 합니다. 다만 이상한 것은 그 빛이 아무리 밝아도 열기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 영광이 극광처럼 아름답고 밝을지라도 참된 생명은 주지 못합니다. 또한 세상에는 극히 아름답고 선한 빛처럼 보이지만 생명과는 무관한 거짓된 빛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참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되실 뿐만 아니라 그 빛 가운데 있는 뜨거운 열기로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는 인간을 뜨겁게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열기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밝게 할 뿐만 아니라 병든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도 치료하여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을 발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반면, 어둠은 사탄이 지배하는 곳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슬픔, 낙심과 좌절 등은 인간의 어두운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있기 마련입니다. 앞뒤 좌우를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한 삶의 어둠에 빠져 고통과 좌절 속에 눈물로 지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부부관계가 어두운 사람, 어둠에 빠진 자녀를 둔 부모, 직장을 잃거나 얻지 못해 경제적 어둠에 살 길이 막막한 사람들, 한 순간에 사업을 날려 절망의 늪에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 몸과 마음에 깊은 병이 들어 아픔과 슬픔에 빠진 사람들, 인간관계에 어둠이 찾아와 고독에 몸부림치는 사람들, 혹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던 인기가 하루아침에 폭락하여 한 뼘 거리의 사망을 기웃거리는 사람들 등, 누구에게나 어두운 구석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어두움을 벗어버리고 밝고 영원한 아침을 맞이하는 인생이 되고자 하면 반드시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어두움과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신의 삶에 받아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부활 생명의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어둠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은 자신의 지난 날을 회고하면서 하나님께서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 왕의 손에서 구원하신 은혜를 감사드리며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사무엘하 22:29)고 고백했습니다. 세상은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지만 인류 문명사에 지금까지 어두움이 빛을 이긴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 무대에서 한 번도 진리와 정의, 진실과 사랑이 거짓과 불의, 미움과 증오에 진 적이 없습니다. 속성상 어두움이 빛을 대적해오고 있지만 누구든지 빛 가운데 거하면 자연히 어두움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어두움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밖에 없습니다. 어두움의 인생이 되지 않고 빛의 아들이 되는 방법은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12:44-46)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그러므로 인생의 명암이 나누이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때문에 어두움에 거하지 않는 삶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아야만 합니다.
호레이쇼 스패포드(Horatio G. Spafford)는 당시 43세의 시카고의 성공한 변호사였을 뿐 아니라, 린드 대학교와 시카고 의과대학의 법리학 교수요, 신학교 이사 및 운영위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자 무디(Dwight L. Moody)의 절친한 친구 사이로서 무디교회의 회계 집사였습니다. 그런데 1871년의 시카고의 대화재가 그의 전 재산을 쓸어가 버렸습니다. 이 재난 직전에는 그의 4세된 아들도 폐렴으로 잃었습니다. 이러한 연거푸 임한 엄청난 시련 앞에서 스패포드와 그의 가족은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1873년 그는 그의 아내와 네 딸과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가기로 계획했습니다. 영국에 있는 동안 스패포드는 무디와 생키(Sankey)의 전도여행을 돕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스패포드는 그의 출발을 연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몇일 후에 뒤따라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의 아내와 네 딸을 계획대로 배에 태워 보냈습니다. 1873년 11월 15일, 많은 승객들과 함께 스패포드의 아내와 네 딸들을 실은 프랑스 여객선은 뉴욕항을 출발하여 순항합니다. 모두 깊은 잠이 든 22일 새벽 2시, 그 배는 대서양 한 가운데서 영국 철갑선 ‘라키언’(Lochesrn) 호와 정면 충돌했습니다. 배는 226명의 생명을 안고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 와중에 스패포드의 딸들은 모두 배와 함께 잠기고 부인만 물위에 떠올라 구명정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9일 후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웨일즈의 카디프(Cardiff)에 도착한 스패포드의 부인은 “혼자만 구조됨”이라는 짤막한 전문을 남편에게 보냈습니다. 스패포드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딸들을 잃고 정신없이 헤맬 부인이 걱정되어 부인을 데리러 가기 위해 배에 올랐습니다. 순항을 하던 어느 날, 선장실에서 차를 같이 하자는 전갈이 왔습니다. 차를 나누는 도중 선장은 딸들이 잠긴 물위를 지나게 될 것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는 선실로 돌아와 아픔과 슬픔으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새벽 3시에 아직까지 체험해보지 못한 평안이 그의 마음에 깃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자신을 향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It is well with my soul)이란 가사입니다.
< 413장>
1.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2.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겠네.
4.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후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주님 다시 오실 때 큰 나팔이 울려날 때, 그 때가 언제 일지라도 깨어 있어 준비된 성도는 겁 없으리라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일찍 데려가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평안함을 고백한 것입니다. 어두움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오직 빛 가운데 있을 때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약속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그 믿음을 지켜 빛을 잃지 않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십니다.”(요일1:5)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과 그 약속의 말씀대로 사는 신앙생활로 여러분의 삶에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하나님의 빛으로 충만하시어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시기 축원합니다.
천국시민의 삶
눅 12장 35절 / 피종진목사
이 지구상에 어떤 시설, 무기, 그 리고 과학 시스템, 모든 가전 제품 시설을 다 갖추어도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가치가 있고, 복이 있고, 안전 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 나님이 함께 하신 곳은 바로 지상에 서 천국의 맛을 보면서 생활할 수 있는 어려움이 있어도 안전이, 고난 이 있어도 행복이, 핍박과 환난이 있어도 하나님의 상급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 어느 곳이든지 하나님이 안 계신 곳 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배 반하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 이 가장 미워하는 우상을 섬기고 하 나님의 말씀을 역행하는 곳에는 천 재지변이나 환난, 그리고 저주와 온 갖 기근과 궁핍,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을 모신 여러분들과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와 여러분의 가정에 하 나님이 함께 하여 주심을 믿습니다. 사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천국의 시민들입니다. 우리가 강대 국의 시민권을 받아도 여러모로 혜 택과 편리를 누리게 되는데, 여러분 에게 더 좋은 것은 바로 천국의 시 민권입니다.
또 여러분이 강대국의 시민권이 없어도 여러분들은 절대 좌절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천 국의 시민권을 함께 받은 줄로 믿으 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이방인들과 구별되 게, 또 우리는 사탄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과 전혀 다른 생활의 모습 이 우리에게 있어야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천국 시민은 어떠 한 삶을 살아야 되는가에 대해서 말 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 고자 합니다. 첫째, 진리로 띠를 띠고 살아야 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35절상) 이 띠는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6:14에 보면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라고 말씀했습 니다. 바로 이 띠는 진리의 띠를 말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32에 보 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했고, 베드로전서 1:22에 보면 "진리 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이 깨끗하 게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 진리로 무장하고 진리로 띠를 띠는 사람들 은 그에게 하나님이 자유와 평강을 주시고, 주님께서 그 모든 일을 도 와주시고, 감싸주시며, 보호해주시 고, 역사해주시며, 책임져주실 줄 믿 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옷을 입고 띠를 띠지 않아 보세요. 어쨌든 띠 를 띠지 않으면 바지가 흘러내리겠 지요. 군인들이 전쟁에 나갈 때 강 한 벨트(요대)를 멥니다. 거기에는 실탄도 달고, 권총도 달고, 심지어는 물통까지 달고도 힘있게 달려 갈 수 있습니다. 띠가 든든하기 때문입니 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정말 띠 가 든든해야 됩니다. 오늘 이 띠는 진리인데, 진리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라"(요 14:6)고 했습니다. 바로 ①예 수님 자체가 진리입니다. 오늘 예수 님을 모신 사람은 진리의 띠를 띤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지 예수님의 띠를 띠고 살아야 됩니 다. ②진리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저 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 를 받지 못한다"(요 14:17)고 했습니 다. 오늘 예수 믿는 사람에게 하나 님의 영이 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의 증인이 되었고, 또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영이 성령의 전이 되어서 거룩하게 그리고 능력 있게, 권세 있게, 의롭게 우리를 이 끌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악 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악한 생각을 품게 됩니다. 악한 행동을 하게 됩 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선 한 생각을 하게 되고, 아름다운 생 각을 하게 되고, 착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로운 행동을 하 게 되고, 착한 행동을 개시하게 됩 니다.
또한 그 사회가 아름다워지고,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 는 축복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 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제일 우리에게 귀한 것이 많지만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구약에는 특수한 사람을 살펴서 성령을 주어 서 크게 역사하는데 말세에는 남종 과 여종에게 성령을 물붓듯이 부어 주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말씀 했습니다(욜 2:28). 아무리 연약하고 어리석어도 성령이 함께 할 때 능력 의 사람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 다. 권세있는 사람이 되는 줄 믿으 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가대원들이 성령이 충만할 때 그 찬양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다윗이 거문고를 칠 때 에 사울왕의 악귀가 물러갔듯이 주 의 백성들이 찬양할 때에 성령의 역 사가 함께 하여주셔서 어둠과 시험, 근심과 불안, 공포도 사라질 줄 믿 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때때로 고 독해지고, 불안과 염려, 근심에 사로 잡히고, 심지어 사탄에게 사로잡히 면 그는 거기에서부터 불행한 사람 이 되어집니다. 이것을 오늘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만 되는 것입니 다. 그래서 이 진리를 순종하고 따 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둘째, 등불을 켜 들고 서 있어야 합니다.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35절하) 여기에서 등불은 신앙의 등불을 켜 들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 있으라는 것은 행동을 개시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등불을 켜서 가만 히 들고 서 있으면 의미가 없습니 다. 이 등불을 들고 열심히 활동을 하며 일을 하고, 행동 개시를 해야 됩니다. 하룻밤에 드러누워서 국회 의원도 되고, 장관도 되며, 총리도 되고, 대통령이 되는 등 제멋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검사가 되려면 피눈물나는 고시 공부를 해 서 고시에 합격을 해야 되고, 진학 을 하려면 열심히 노력해서 공부를 해야 되고, 사업가가 되려면 기초부 터 없는데서부터 시작해서 정말 피 눈물나는 뼈를 깎는 살을 찢는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하나님 앞에 복 받을 일을 하고, 복을 심고, 말로도 복을 심고, 행동으로 개시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실 줄 믿 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신앙의 등불을 켜 들고 있어야 되는데, 우리가 신 앙의 등불을 켜 들고 있으려면 ①성 령의 기름이 마르지 않아야 됩니다. 마태복음 25:8에 보면 "미련한 자들 이 슬기있는 자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누어 달 라"고 했습니다. 기름을 충분히 준 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소모만 하고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여 러분,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달릴 때 에 중간 중간에 주유소가 있지요? 차에 기름을 한 번 가득 채우고 달 린다고 해서 그것이 평생에 달려지 는 것이 아닙니다. 중간 중간 급유 를 받아야 됩니다. 때로는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성령의 급유를, 때로는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고 금식하고 새벽기도, 철야기도, 하나 님 앞에 정말 성경 읽고, 간절한 마 음으로 애통하고 회개하며 주님 뜻 대로 살려고 구할 때마다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채워주십니다. 빈 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영혼 을 무성하게 해주십니다. 견딜 수 없는 불안과 공포와 우수사려 속에 시달려서 살 용기가 없어지고, 죽음 을 택하는 그런 사람도 성령의 역사 를 체험하면 일평생 하나님 앞에 크 게 쓰임받고 위대한 그릇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 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진심 으로 원합니다. 받았다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 충만 받으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을 세계 위 에 높이 쓰시는 것입니다. 이 지구 상에 하나님이 쓰신 분들은 다 성령 이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역 사하는 곳에는 황막한 땅, 사막과 같은 빈 들에 마른 풀 같은 적막한 어두움과 사탄이 지배하여 무너지고 타락한 도시도 에덴 동산처럼 하나 님이 만들어주십니다. 여러분 가정 에 행복을 안겨주십니다. 마음에 기 쁨을 안겨주십니다. 우리는 하루에 목욕을 해도 또 해야 되고, 세수를 해도 또 해야 됩니다. 머리를 감아 도 또 감아야 되듯이 얼마나 오염이 많습니까? 얼마나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악의 세력이 강합니까? 그리고 얼마나 불행들이 이 땅에 많습니까? 정말 신을 신고 돌아와야 안심이 되 고, 비행기를 타고 내려야 안심이 되고, 차를 몰고 가도 집에 들어와 야 안심이 되고, 아침에 인사했던 가정이 저녁에 음성을 들어야 안심 이 되는 그런 불안과 공포가 쌓이는 세상이 아닙니까? 그리할 때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됩니까?
오늘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준 비해야 됩니다. 여러분 주변에 보세 요. 성령 충만한 사람은 버림받고, 실패되고, 좌절한 사람이 있습니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이 세상을 허 무하게 비관 자살한 사람이 있습니 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남에게 깡통 들고 얻어먹고 구걸하는 사람 보았습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은 절 대 비굴하게 살지 않습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없으면 주님 앞에 기도해서 받습니다. 그리고 없 어도 하나님이 부자이시기 때문에 자기도 부자인 것을 믿음으로 하나 님의 기적을 체험합니다. 여러분, 하 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랑하는 것 만큼 하나님이 여러분 가운데 역사 해주십니다. 기쁨을 안겨줄 줄 믿으 시기 바랍니다. ②하나님의 빛의 조명을 받아야 됩니다. 해바라기가 해 따라 가듯이 자나 깨나 주여, 안고 서나 먹고 마 시나,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라는 찬송 가 가사 그대로 되어야 합니다. 어 떤 사람은 시간만 있으면 고민할 자 리 찾아가고, 시간만 있으면 안방 뒷방 이불 속에 들어가서 한숨쉬고 탄식하는 사람들, 그것은 무서운 습 관입니다. 또 걱정 근심이 있으면 세상적인 방법으로 풀어보려고 술에 취해서 잊어보려고 합니다. 어디에 가서 마음껏 놀아보면서 무아경 속 에 자기 자신을 잊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술이 깨면 고통이 배나 더 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의지 해서 호소하며 도움을 받아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는 거지 처럼 구하며, 지렁이처럼 뒹굴어도 괜챦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더욱 더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죽을 죄를 범했을지라도 가슴을 찢지 말 고 마음을 찢고 회개해보세요. 하나 님이 다시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입 니다. '나는 틀렸다, 끝장이다'라고 생각하면 그는 영원히 어두움 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주여,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주님이 나의 구세주이 십니다.
주님이 나의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나를 살려주시는 영이십니 다. 오, 주여, 나의 복의 근원되신 주여, 내 주님이 함께 하시는 나는 성공할 수가 있나이다. 이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이 역사해주실 줄 믿 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34에 보면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짓 지 않는 생활이 바로 빛을 나타내는 생활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이름도 없고 빛도 없어도 경건하게 사는 사 람은 천사처럼 아름답습니다. 지위, 명예, 권세를 가져도 온갖 죄를 다 범하고 산다면 그는 탕자요, 깡패요, 악명 높은 사람이요,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죄 많은 세상에 산다고 세상 사람들처럼 죄를 짓고, 함께 쓸려가 면 안됩니다. 빛이 빛을 잃고, 소금 이 맛을 잃는다면 그것은 끝장입니 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빛을 어떻 게 하든지 매일처럼 조명 받아서 여 러분이 볼 때에 예수가 보이고, 천 국이 보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 고, 진리와 은혜가 무엇인 것을 세 상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 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장사가 아닙 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주님을 찾아야 됩니다. 주님은 분명히 외면 하지 않으시고, 부르짖는 자의 기도 를 들으시고, 환난 날에 건져주시고, 인도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빛의 조명을 받 아서 신앙의 등불이 될 때에 하나님 께서는 그를 통하여 큰 영광을 받으 시는데 ③착한 행실을 보여야 합니 다. 마태복음 5:16에 보면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 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 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착한 행 실 자체가 등불을 들고 비치는 생활 과 같습니다. 셋째, 깨어 있는 삶입니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 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37 절) 주인이 와서 보니까 어떤 종들 은 쿨쿨 자고, 어떤 일꾼들은 세상 모르게 나태해 자빠져 있는데, 어떤 종들은 주인이 보거나 안보거나 자 기의 맡겨주신 사명을 잘하기 위해 서 깨어서 경성하고, 그래서 그 주 인이 그것을 볼 때에 얼마나 기쁜지 '그 종들에게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왕이면 우리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 하는 복보다도 하나님이 성경에 말 씀하신 복은 받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이 산다면 얼마나 삽 니까? 한평생 고생만 하다가 가는 인생이 된다면 얼마나 불쌍하겠습니 까? 우리는 천사처럼 아름답게도 살 수 있고, 악마처럼 저주스럽게 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오늘 정 말 의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원합 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하나님 께서 힘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 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말 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 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했 습니다. 기도할 때 마귀가 무서워합 니다. 기도할 때 좋은 일이 있게 됩 니다. 마태복음 26:41에 "시험에 들 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한 것은 기도하면 시험이 물러간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이 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시험 물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환난이 와도 핍박이 와도 내 주만 위해 내가 살 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강하고 담대 해야 됩니다. 앞으로 세상은 점점 강퍅해져 갑니다. 성경에 말씀한대 로 디모데후서 3:1이하에 보면 말세 의 징조에 대한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말세에는 인간들이 점점 사 나워진다(3절)고 했습니다. 이런 점 점 포악해져가는 이 세대에서 정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의롭 고 순종하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 시는 이런 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는 기도로 깨어 있어야 됩니다. 죄 를 짓지 말고 깨어 있어야 됩니다. 사탄과 싸워 승리하도록 깨어 있어 야 됩니다. 입을 벌려 달려 든 사탄 은 베드로전서 5:8에 "근신하라 깨 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 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넷째, 예비된 삶을 살아야 됩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 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 라 하시니라."(40절) '예비'(하라크) 라는 말은 '완전 표준에 준하여 참 예하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완전 표준 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동차도 선을 따라서 완전 궤도에 따라 그의 길을 달려가면 서로 충돌함이 없습니다. 이탈하면 서로 마주쳐서 중앙선에서 비참한 사고를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예비하고 있으라 는 것은 바로 완전 표준에 준하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이 원하시는 그 표준에 준비하여 있 으면 하나님이 그 준비된 것에 대해 서 하나님께서 준비된 모든 것으로 함께 연결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 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표준에 준비 되어 있어야 됩니다. 은혜 받을 표 준, 사명자로 들어쓰임 받을 표준,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복을 받을 표준, 그 수준에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해주실 줄 믿습니 다.
저는 지난 주간 대만에서 성회하 면서 참 우리 한국에 대해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대만은 작은 나라인데 생각 밖에 언 어가 9개 방언으로 각각 다릅니다. 자기 나라 사람이면서도 말을 9가지 나 쓰기 때문에 서로 통하지 못합니 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 사람은 어디에 가서 말을 해도 다 통합니 다. 그래서 민족복음화 하기가 얼마 나 쉬운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힘차게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됩니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를 가 지고 계십니다. 정말 이 종말의 시 대에 한민족을 통해서 민족복음화는 물론 아시아와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우리는 몸도 바치고, 마음도 바치고, 정성을 다 바쳐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로 띠 를 띠고, 신앙의 등불을 켜들고, 깨 어 있고, 예비된 삶을 살면서 천국 시민으로서 멋있게 아름답게 주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면서 귀 하게 살아가십시다. 주님이 여러분 을 축복해주십니다.
깨어 있는 종의 복
눅 12장 35~40절 / 장경준목사
시편103:19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했습니다. 역대하 20:6을 보면 “가로되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만유와 모든 나를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골로세서 4:1을 보면 “ 상전들아.... 너희에게도 하늘의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했습니다. 기독교인이란 하나님을 상전 즉 주인으로 삼은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언급합니다. 스가랴 5:11을 보면 “....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오랜 옛적에 건축되었던 전을 우리가 다시 건축하노라....”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 했습니다. 다니엘 3:26을 봅니다.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했습니다. 구약에서 많은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종이라 불렀습니다. 사도행전 2:18은 “...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했습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아 초대교회를 이루었던 모든 성도들을 종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종입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12:35-40은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했습니다. 깨어 기다리는 종에는 주인이 종을 높은 자리에 앉히고 수종을 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주인을 잘 섬기는 것은 주인에게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깨어 있는 종이 되어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깨어 있는 종이 받을 복은 어떤 것일까요?
1. 하늘나라 상급을 받는 복
요한계시록 22:12들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14은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했습니다.
하나님께 받는 상은 어떤 상입니까?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상에 앉아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복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서 생명의 면류관(계 2:10), 의의 면류관(딤후 4:8), 영광의 면류관(벧전 5:4)을 쓰는 것입니다.
(눅 22:28-30)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계 2:10)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벧전 5: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공산주의 치하 한 마을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 열두명이 체포 되었습니다. 얼음이 언 강가운제로 데려가 사람이 들어갈 만큼 크기의 구멍을 뚫게 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빨가벗게 하고는 구덩이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군인들은 구덩이 옆에 불을 피워놓고 예수믿는 사람들에게 ‘만약 예수를 안 믿겠다’하면 얼음 구덩이에서 꺼내어 불을 쬐어 주고 먹을 것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한동안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얼음 구덩이에 있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살려달라며 예수를 안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군인 중 한 사람이 환상을 보았습니다. 얼음구덩이 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위에 천사가 강림하는데 열두개의 빛나는 면류관을 갖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예수를 부인하는 순간 그 면류관이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없어지는 면류관을 보며 그 환상을 본 군인은 자기 옷을 벗고 얼음 구덩이에 뛰어들어 자시가 예수를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순교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죽기까지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예비 된 하나님 나라의 상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즐거움을 향유는 복
사람은 기쁨을 우리기 위해 삽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여러 가지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①욕구가 충족됨으로 얻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성적 욕구를 채우는 즐거움, 돈을 버는 즐거움들이 이런 종류의 즐거움입니다. 또한 ②지적인 것을 깨닫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숨겨 있던 자연적 즐거움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과학자들에게는 있습니다. ③선행을 할 때에 느껴지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도움을 받는 사람 보다 갑절의 즐거움을 느낍니다. 한번 선행을 하면 그 주간이 즐거워집니다. 이와 같은 값진 즐거움을 향유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더 큰 차원이 다른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성경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10-2을 보면 (롬 5:1-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바울이 말하는 즐거움을 영적 즐거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영적 체험을 했습니다. 이로인해 세상 것으로 얻을 수 없는 영적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것이 신명기 12:12에서 말하는 바 “....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의 내용입니다.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2:19의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의 내용입니다. 종 된 사명의 길을 잘 감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적 즐거움을 소유하고 누리고 나누는 복을 주십니다. 한우리 모든 교인들에게 이런 복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께 속한 자유자의 복
하나님의 종 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에게는 참된 자유의 복을 주십니다. 한 시인은 아래와 같은 시를 썼습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아무도 그대가 준 만큼 나 자신을 깊이 발견하게 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대 앞에 서면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대가 준 만큼의 자유를 내게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967년 4월21일 세상이 놀라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스탈린의 딸이 미국으로 망명을 했습니다. 미국에 망명한 스탈린의 딸은 망명 이유에 대해 “나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나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미국에 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7:22-23은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 된 종의 삶을 살면 그렇게 사는 만큼 하나님을 진실 되게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진실 되게 만나는 사람들은 자신을 깊이 발견하게 되고, 있는 그대로 정직한 자아를 누리게 되면서, 세상의 모든 것에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4. 더욱 아름다운 지위와 담력을 얻음
21세기는 혼돈과 불안과 위기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더욱 참된 리더를 찾게 됩니다. 이 시대를 영향력 있게 이끌 리더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도덕적 능력, 인간관계 능력 등이 있습니다. 어디에서 이런 능력이 나올 수 있을까요? 성결성에서 옵니다.
신약시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은 말틴 루터입니다. 말틴 루터에게 어느날 사탄이 찾아와 루터의 죄의 목록을 두루마리로 만들어 “잠잠하지 않으면 온 세상에 죄를 공포하리라”했습니다. 사탄은 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가로 막습니다. 이 때에 루터는 “나는 예수의 피가 나의 모든 죄를 깨끗이 했다”고 했습니다. 사탄이 즉시 물러갔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1:20에서 바울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위대한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잘든지 죽든지 그리스도의 존귀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옵니다.
디모데전서 3:13은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의 종 된 성결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담대한 지도자 이 땅에 나오기를 축원 드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종된 사명을 잘 감당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그리하여 놀라운 대우를 해 주시는데 누가복음 12:37에 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친이 하나님의 종들을 수종드는 축복이 임합니다. 아시 누가복음 12:37의 말씀을 합독함으로 오늘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할렐루야 !
기다리는 사람
눅 12장 35~40절 / 엄기호목사
유대인들에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그들의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을 지킬 때 부르는 노래가 하나 있는데, 그 제목이 ‘아니마밈’이라는 노래입니다. ‘아니마밈’이란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600만 명의 유대인을 무참히 죽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 가운데서 죽음을 앞에 놓고 가장 험악한 삶을 살고 있던 유대사람들이 함께 부르며, 서로 위로를 받았던 노래가 곧 ‘아니마밈’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하여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 간단한 가사를 계속 반복해서 부릅니다. 그러다가 죽음을 향해 끌려가는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자매, 친구와 이웃들의 모습을 볼 때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들은 이 찬송 뒤에 한 절을 더 넣어서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때때로 메시아는 너무 늦게 오신다.’
그러나 한 외과의사는 절대로 그 마지막 가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둔 시간이었지만 몸과 마음과 행동을 단정하게 하고 끝까지 믿음으로 섰습니다. 마침내 그는 수용소 문을 나오면서 ‘아니마밈’의 마지막 절 가사를 이렇게 고쳐서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너무 서둘러서 믿음을 포기할 때가 많다.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그래서 믿음을 포기하는 자가 많다.”
현대는 무엇이든지 빨라야 합니다. 먹는 음식만 보더라도 과거에는 곡식을 절구에 찧어서 쌀을 만들고 반찬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먹었습니다. 느긋하게 기다렸다가 음식을 먹었습니다. 요즘에는 인스턴트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것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녀를 얻기 위해 어머니는 열 달 동안 기다리면서 마음의 준비와 말할 수 없는 기다림의 날들을 지새워야 합니다. 나무에서 목재를 얻기 위해서는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야 하고,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여러 달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세례도, 의의 소망도, 우리의 부활도, 우리의 영혼 구원도 인내가 없고 기다림의 은혜가 아니고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만 인생에게 기다리는 훈련을 시킨 후에 좋은 것을 주는 분이십니다. 무슨 일이든지 참고 기다리는 자는 가장 좋은 것을 얻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모든 신자들은 모두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기다립니까?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과연 기다리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 속에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소망이 없는 사람이요, 꿈과 희망이 없는 사람은 절망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 때 그것을 이겨 나갈 수 없습니다. 기다림이 멈추는 곳에서 인간의 삶은 멈춥니다.
인내는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는 미덕입니다. 등록금을 대고 학원비를 대느라고 등이 휘도록 일을 하고 고생하는 부모도, 비록 그 육신은 피곤해도 자식 잘되기를 인내하고, 성공하기를 기다리는 행복이 있습니다. 직장과 사업 때문에 서로 떨어져 살아가는 부부는 외롭지만 만나는 그 날을 인내하며 기다릴 때 행복합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 ‘기다림’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만일 기다림이 없다면 우리의 생활에는 윤기와 생기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유혹에 물들지 말고, 정욕에 물들지 말며, 탐욕과 물욕에 물들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것과 나의 것을 구분하며, 예수님 만날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인생은 이 세상에 출생하면서부터 확신 속에 기다리는 인생으로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되기를 기다리고, 병든 사람은 병 낫기를 기다리고, 학생은 속히 학교를 졸업하기를 기다리고, 청춘 남녀는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하기를 기다리고, 부모는 자녀들이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기릅니다. 그런데 이 기다림은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확신이 있는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사업가는 성공의 확신이 있어야 하고, 등산가는 정상을 정복하는 꿈과 확신이 있어야 하고, 자녀를 위하여 고생하는 부모는 좋은 날을 보리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자동차 운전도 확신이 있을 때 달릴 수 있고, 원하는 목적지까지 분명히 데려다 줄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면 나을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내 몸을 맡깁니다. 확신이 흔들리면 기다림도 흔들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확신이 없으면 구한 것을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확신이 흔들리면 세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림은 헬라어로 ‘파루시아’로써 “가깝다”, “나타난다”, “곁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오실 때까지, 확신을 가지고 잠자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기다리기를 바랍니다. 소망 중에 슬픈 자를 서로 위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깨어 경성하고 기도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준비해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슬기로운 여인들은 기름준비를 함으로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기름 준비를 하지 못한 미련한 여인들은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하여도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다리기만 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출가할 처녀는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고, 가을에 추수를 기다리는 자는 봄에 씨를 뿌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의 구령사업을 위하여 30년 동안 준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고 14년의 준비기간을 거친 후에 선교여행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의 기다림 끝에 이삭을 낳았고, 야곱은 20년을 기다려 고향에 돌아왔고, 요셉은 13년의 기다림 후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준비 없는 기다림은 헛수고가 됩니다.
중동지역에 나가서 건설에 참여한 한 남편을 둔 여인이 있었습니다. 1년 동안 떨어져 있던 남편이 돌아온다는 편지가 날라 왔습니다. 편지를 받은 여인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이 노래지고 경색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은 남편이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부정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여인에게 남편이 다시 온다는 것은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중동에 남편을 보내고 1년을 떨어져 살면서 남편이 돌아올 날만 기다리던 또 다른 여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시장을 보아다가 김치를 새로 담근다, 별식을 만들려고 각종 요리를 한다 하면서 준비를 하고, 이부자리를 깨끗이 빨아 집안을 정돈하고, 귀국일 하루 전엔 목욕하고 미장원엘 다녀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생활은 희망적인 생활이요, 준비하는 생활이요, 성결한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이 땅위에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먼저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인생은 분명히 기다림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강도의 기다림도 있고, 방탕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고, 음탕한 여인의 꿀물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혼의 사냥꾼의 그물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족적으로 조국 통일의 날을 두 손 모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능력을 기다립시다. 기도하면서 주실 때까지 기다립시다. 재림하실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립시다. 꿈을 가지고 인내하고 확신을 가지고 기다립시다.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예수님을 기다립시다. 모든 행복은 기다림 속에서 옵니다.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눅 12장 35~40절 / 피종진목사
‘예비’란 헬라어에 보면 ‘미리 자격을 갖춘다, 미리 준비를 한다, 미리 표준을 맞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이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미리 준비하고, 표준을 맞추고, 자격을 갖출 것을 성경 말씀은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성도들은 영적인 잠에서 깨어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존재로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예비하고 있어야 할까요?
첫째, 주의 쓰심에 합당하게 예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눅 12:35a) 허리는 힘을 쓰는 곳입니다. 욥기 40:16에 보면 “그 힘은 허리에 있고 …”라고 말씀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겉옷은 길고 그 통이 넓은 것으로 일을 할 때는 겉옷을 허리띠로 졸라매야만 했습니다. 여기에서 허리에 띠를 띠었다는 것은 혼인집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맞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는 영적인 잠이나 게으름에 빠지지 말고 항상 깨어 일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아멘’으로 대답하고 일할 수 있도록 주의 쓰심에 합당하게 예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언제 무슨 일을 맡겨도 감당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의 쓰심에 합당한 자가 되려면 일하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0에 보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가리지 않고 주의 일 하기를 좋아할 때 주의 쓰심에 합당한 자가 되어집니다. 주의 일을 시킬 때 ‘글쎄요, 생각해보고요, 안되는데요, 불가능한데요, 어려운데요’라고 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쓰임 받지 못합니다. ‘예, 아멘, 가겠습니다, 꼭 하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라는 자세를 가지면 하나님께서 크게 들어 쓰십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그 순간부터 선교사다. 해외만이 선교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곳이 바로 선교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생명을 얻은 우리는 예수를 모르는 자들에게 전심전력을 다하여 예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곧 우리의 선교지입니다.
둘째, 주님 맞이할 신부로서 예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 12:35b) 마태복음 25:1~13에 보면 열 처녀 비유가 나옵니다. 신랑이 더디 올 때에 신랑 맞을 준비를 철저히 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혼인 예식에 들어갈 수 있었던 반면,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모르는 우리는 항상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영적으로 깨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되, 신랑 되신 예수께서 언제 오시든지 자신 있게 맞이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이할 신부로서 ①신앙의 등불이 항상 켜져 있어야 합니다. 앞을 못 보는 맹인들도 등불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앞을 보지 못하지만, 그 등불을 보는 사람이 자기를 피해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등불을 들고 다니면 마귀들이 우리를 피해갈 줄 믿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9) ②말씀의 등불이 항상 켜져 있어야 합니다.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③기도의 등불이 항상 켜져 있어야 합니다.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요즘 ‘모기와의 전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밤에 잠을 자는데 모기가 있으면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그 모기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모기향을 피우면 됩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이 기도의 향을 피우면 어떠한 사단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계 8:4)
셋째, 상 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상’(賞)이란 헬라어에 보면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해주십니다(갈 6:7). 요한계시록 22:12에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했고, 마태복음 10:42에 보면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에는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금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등이 있습니다. 이런 상을 다 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3:14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상관없이 주의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세상일은 헛된 수고도 많이 있지만, 주의 일을 위해 하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하는 자들은 상 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로서 영적인 잠이나 게으름에 빠지지 말고 항상 깨어 일하는 자세를 갖추어 주의 쓰심에 합당하게 준비된 삶을 살고, 주님 맞이할 신부로서 항상 신앙과 말씀과 기도의 등불이 켜져 있도록 예비하며, 상 받을 준비를 함으로 주님이 오실 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하며 기쁨으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인 앞에 크게 쓰임 받는 종
눅 12장 35~43절 / 피종진목사
우리에게는 모두 섬기는 주인이 있습니다. 우리의 참 주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 즉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한자로는 ‘임금 주(主)’자를 쓰고, 영어로는 ‘Lord’로 표기합니다. 우리는 주인이 있는 몸입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혼인집에서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자세에 대한 비유로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35, 36절에 보면 주님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서 주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리자마자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4~30절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를 보면 종들 중에도 작은 일에 충성하여 더 많은 것을 맡길만한 착하고 충성된 종이 있는가 하면, 있는 것까지 빼앗긴 악하고 게으른 종, 무익한 종이 나옵니다. 그러면 주인에게 크게 쓰임 받는 종은 어떠한 종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허리에 띠를 띠고 있는 종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35절상) 당시 유대인들이 입었던 겉옷은 길고 그 통이 넓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을 할 때나 여행을 하거나 전시에는 겉옷을 허리띠로 졸라매야만 했습니다. 여기에서 허리에 띠를 띠었다는 것은 이미 일할 준비를 갖추고 허리띠를 맨 상태에서 현재 일을 하고 있는 상태로서 혼인집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맞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님께 크게 쓰임 받는 성도는 재림의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며 깨어 있어 항상 준비하는 성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의 사명 중에 가장 귀한 것은 일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시킨 명령에 순종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특히 허리는 힘이 있는 부분입니다. “그 힘은 허리에 있고”(욥 40:16) 우리는 항상 일할 힘이 준비되어 있어야 됩니다. 성령과 믿음과 말씀과 지혜가 충만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항상 무장해서 언제 사탄이 도전해 와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 등불을 켜고 서 있는 종입니다.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35절하) 여기에서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한 것은 등불이 켜 있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의미입니다. 등불이 계속 켜 있게 하려면 등에 기름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등에 기름이 없으면 불이 꺼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크게 쓰임 받는 종이 되려면 성령의 기름이 항상 충만해야 됩니다. 등불을 켜는 목적은 어두워진 이후에도 계속 일을 하며 기다리던 주인을 영접하기 위함입니다(마 25:1~13). 주님께 크게 쓰임 받는 성도는 주님이 언제 오실지라도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열심히 잘 감당하며 항상 깨어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성도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너무 너무 감사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부족하고 연약한 점이 많이 있어도 성령이 충만하면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어주시고, 능력이 되어주시며, 하나님의 모든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역사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 원하는 것은 세상의 어떤 기술과 달변, 처세술, 수단과 방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주의 백성들을 쓰실 때 원하시는 것은 오직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엡 5:18). 성령 충만은 바로 주님께 쓰임 받는 일꾼의 첫째 조건입니다. 아무리 큰 일도 성령이 충만하면 쉽게 해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세상 일은 힘의 논리로 밀어붙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할 수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 충만한 성도가 많을수록 부흥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케 해서 신앙의 불을 밝게 켜야 합니다. 신앙의 불을 밝게 켜면 자기 발이 실족치 않게 되고, 다른 사람이 그 빛의 혜택을 받게 됩니다. 등불을 들고 있는 사람의 뒤를 따라가면 어두운 길도 잘 갈 수 있듯이 성령의 불을 켜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서 천국 길로 잘 따라오게 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캄캄한 밤과 같습니다(롬 13:12). 지금은 사탄이 최후로 발악하는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성령의 불이 밝혀지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여러분만 잘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빛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주님 자신이 ‘세상의 빛’(요 8:12)이라고 말씀하셨고, 우리도 ‘세상의 빛’(마 5:1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항상 성령의 불이 조명되면 밝은 마음과 밝은 생각,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통해서 주님께 크게 쓰임 받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종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42,43절) 여기에 보면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는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인이 자기에게 맡긴 식량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분배함으로써 그것을 낭비하지 않고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 자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크게 쓰임 받는 종이 되려면 교회에서 각자 자기의 맡은 일을 충실히 잘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축복 받는 길은 쌓아놓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주는데 있습니다. 물은 자꾸 쌓아놓는 데서 좋은 물이 고이는 것이 아니라, 자꾸 퍼낼 때 좋은 물이 고이는 것입니다. 샘물은 자꾸 퍼낼수록 물이 맑아지는 것입니다. 실내의 공기도 뽑아서 밖으로 내보낼수록 통풍이 잘되고, 우리 육체도 사용할수록 건강한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자는 시험에 들 사이가 없습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부(富)는 보물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보물을 사용하는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재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고 부자가 아닙니다. 그것을 잘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T. 에드워드는 ‘수의(壽衣)에는 돈주머니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모래 하나 하나가 쌓여지면 큰 성이 됩니다. 또 끝없는 사막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다 힘이 약하고 미련한 것 같아도 한국 격언에 보면 ‘모기도 모이면 천둥 소리를 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힘과 마음과 정성을 모아서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선한 청지기 노릇을 잘하려고 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귀한 것을 맡기고 축복해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재림을 아주 먼 미래의 일로 생각하며 현재의 삶에 신앙의 긴장감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안일해지고 나태해지기 쉬운 때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재림의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며 깨어 있어 항상 준비하는 종,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케 해서 주님이 언제 오실지라도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열심히 잘 감당하며 신앙의 등불을 밝게 켜는 종,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님께 크게 쓰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이 있는 종
눅 12장 35~43절 / 피종진목사
본문 43절에 보면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일꾼을 ‘종’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하나님 앞에 종의 자세로 임하는 자가 참된 주의 일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은 하나님의 종된 자에게 얼마나 큰 영광이고, 축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같은 종이지만 어떤 종은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종이 있고, 어떤 종은 저주를 받는 종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악하고 게으른 종은 주인의 집에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충성된 종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아름다운 칭호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부여해주고, 또 주인의 즐거움의 참여하는 특권까지 부여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일꾼들이고 또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이왕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될 바에는 복이 있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복이 있는 종은
첫째, 허리에 띠를 띠고 있는 종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눅 12:35) 허리는 힘을 상징합니다. “그 힘은 허리에 있고 …”(욥 40:16) 복이 있는 종은 ①믿음의 띠를 띠어야 합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엡 6:16) 마귀를 이기고 악한 자의 화전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방패 즉 믿음의 띠를 띠어야 합니다. 믿음은 성도에게 날아오는 불화살을 막을 수 있는 영적 방패요, 세상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②진리의 띠를 띠어야 합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엡 6:14) 복음의 진리의 띠를 띨 때 악한 세상을 이기고 복이 있는 종으로서 인정을 받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정로(正路)는 바로 진리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③마음의 띠를 띠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이 띠를 띠는 것입니다.
둘째, 등불을 켜고 있는 종입니다.
“등불을 켜고 …”(눅 12:35) 등불을 켜고 있다는 것은 어두워진 이후에도 계속 일을 하며 기다리던 주인을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눅 15:8) 우리는 ①성령의 등불이 켜 있어야 됩니다. 성령의 불이 꺼지면 신랑 되신 주님이 오실 때 맞이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불이 꺼지면 죽음과 절망입니다. ②말씀의 등불이 켜 있어야 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말씀의 등불을 항상 켜고 있는 자는 복이 있는 종입니다. ③신앙의 등불이 켜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실지라도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열심히 감당하면서 항상 신앙의 등불을 켜 들고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서 있는 종입니다.
“서 있으라”(눅 12:35) 복이 있는 종은 누워있지 않고 서 있는 종입니다. 누워있다는 것은 게으른 것을 말합니다. 누워있다는 것은 일을 중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 있다는 것은 일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입니다. 일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하는 것을 기뻐해야 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치고 신앙이 성장하거나, 신앙이 뜨겁거나, 신앙으로 크게 축복 받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일하는 사람들이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의 일거리는 하나님의 복거리다’라고 말합니다. 일거리가 많으면 복이 많고, 일거리가 적으면 복이 적습니다. 일하기를 게을리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기쁨으로 하고 감사로 하면 누가 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해야 합니다.
넷째, 주인을 기다리는 종입니다.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눅 12:36) 당시 유대의 혼인잔치는 밤중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주인이 돌아올 때는 모든 사람이 잠드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올 때까지 깨어서 주인을 기다리는 종은 복이 있는 종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문을 두드릴 때 깨어 기다리는 사람이 주인을 맞이하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노크할 때 ‘주여, 어서오시옵소서’하고 그 주님을 영접할 수 있어야 복된 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허리에 믿음과 진리와 마음의 띠를 띠고, 성령과 말씀과 신앙의 등불을 켜 들고,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며 서 있는 종, 언제 주님이 오실지라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고 깨어 기다리는 복이 있는 종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깨어 있는 종
눅 12장 37절 / 장경준목사
누가복음 12:35-40까지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주인에 비유하시며, 타출하였다가 돌아오는 주인을 밤늦기까지 기다리는 종과 같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명하십니다. 12:37은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했습니다. 깨어 기다리는 종에는 주인이 종을 높은 자리에 앉히고 수종을 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주인을 잘 섬기는 것은 주인에게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복을 받는 종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세
요한계시록 19:5은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했습니다.
흔히 공경이란 두려움과 존경이란 말입니다. 약할 때에 아주 강한 것을 만나면 두려움의 감정이 생깁니다.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날 때에 우리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의기가 약해 절망할 때에 큰 능력의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 앞에 엎디어 ‘나는 연약한 종이로소이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혜가 없어 방황 할 때에 참지혜가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앞에 엎디어 ‘나는 미련한 종이로소이다’ 고백하게 됩니다. 추한 자아를 바라보며 선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앞에 엎디어 ‘나는 추한 종입니다’라는 고백을 드리게 됩니다.
지난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 수도원의 수도승들이 하나님 공경을 표할 때에 나타내던 공경의 자세가 있습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손바닥을 하늘을 향하게 하고 머리를 조아리는 자세입니다. 우리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손바닥을 하늘을 향하고 눈을 감고 하나님께 공경을 올립시다. 잠시 조용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끝에 ‘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라는 고백을 돌립시다.
2.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자하는 자세
종이란 주인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종은 주인을 뜻을 알고 그 뜻대로 따라 행해야 합니다. 자신의 뜻을 내세우는 사람은 종된 사람이 아닙니다.
감리교를 창시한 웨슬리는 위대한 어머니 밑에 자랐습니다. 웨슬리의 어머니는 무려 17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녀는 큰 방 양쪽에 침대를 만들어 정한 시간이 되면 자녀들을 눕히고 잠이 들 때까지 성경을 매일 읽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자녀들에게 알게 했습니다.
웨슬리의 어머니는 “자녀에게 순종을 알게 하라. 자신의 뜻대로 사는 자녀는 사탄의 뜻에 맡기는 것이다”고 말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양육된 그녀의 자녀 가운데 위대한 설교가 요한 웨슬리, 위대한 찬송의 사람 찰스 웨슬리가 있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6:6은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주인)의 뜻을 행하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종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인줄 모르다가 세 번째에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의 삶 속에 당신의 뜻을 알려 주시고 인도하시기 원하십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매일 하나님의 뜻을 듣고 알고 순종하여 나아가는 참된 종 되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세
출애굽기 14:31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6:5은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했습니다.
종은 주인의 뜻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종을 불러 아브라함의 고향에 가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아내감을 선택해 오라는 명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말을 듣고 믿음을 갖고 떠납니다. 하나님이 함께 동행 하시리라는 믿음, 하나님이 이삭의 아내감을 만나게 하리라는 믿음, 하나님의 좋은 아내를 얻게 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순종하여 떠납니다. 이런 믿음이 어디서부터 옵니까? 주인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명령을 받았다는 주인에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베드로는 풍랑이는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바다위를 걸어오라고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바다로 뛰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그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믿음이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바다에 뛰어 들 수 있겠습니까? 종의 주인에 대한 믿음은 베드로의 믿음 같은 것입니다.
창세기 33:14은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이 그를 죽이려는 에서에게 한 말입니다. 자신을 형의 종이라 일컬으며 형이 앞서 가면 그 인도함을 받아 뒤 따라 가겠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후에 40년 동안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으며 뒤 따라 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종들의 순종의 모습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순종함으로 사는 것이 종의 삶입니다.
4.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자세
(눅 19: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종은 주인의 일을 자신의 일로 삼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서 주인은 종들을 불러 자신이 돌아 올 때까지 장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충성되다 여김을 받은 종은 주인의 명을 받아 장사를 했습니다. 장사란 일을 해서 이익을 거두는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열매 맺는 것입니다. 충성되다 여김을 받은 종은 기약 되지 않은 때까지 열심히 했습니다.
로마서 8:36은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19:17은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했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충성하기를 죽기까지 충성하는 일꾼 되는 종이 되십시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몰몬교는 기독교 이단이라 배척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단임에도 불구하고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몰몬교에서는 입교하는 순간이후부터 바로 둘 씩 짝을 지어 세계 곧곧으로 나아가 몰몬교를 전파합니다.
우리는 바른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나 어떤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성도님들은 한우리교회에 등록을 한 교인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우리교회를 위해 얼마나 일하고 있습니까.... 마음 속에 ‘내가 주의 종이오니, 주의 몸 된 한우리교회를 위해 일하기 원하나이다’는 소원이 생기기를 축원 드립니다. 교회의 모든 일이 이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의 자원하는 봉사와 헌신에 의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종으로 택해 주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기 위하심입니다. 깨어 있을 때 하나님께 복 받는 종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 하나님의 뜻을 배우기 원하는 자세, 하나님을 앞 세워 순종함으로 따라가는 자세, 하나님의 일꾼으로 열심히 일하는 자세를 가져 복된 종 되십시다.
많이 받은 사람입니까
눅 12장 35~48절 / 성홍모목사
목회자로서 함께 동역하는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를 만나게 됩니다. 총회라든지, 노회라든지, 아니면 교계의 세미나에 참석하여 많은 목회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의 관심이 교회성장을 위한 마케팅 이론과 교회경영의 원리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업을 성공적으로 경영한 사람들이 주장한 이론을 교회에도 적용하였더니 부흥하였다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모세의 경영전략", "최고경영자 예수", "예수의 인간경영과 마케팅 전략" 이런 책들이 날개돋친 듯이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시장정신이 목회자의 정신을 압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경영자 정신이 목자의 정신보다 우선하면 교회가 세상을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더럽히는 이것은 역전이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를 진단하는 학자들의 연구를 깊이 살펴보면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을 외면하고 소비자 취향에 맞추어 따라가기에 급급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이란 학자는 미국 복음주의 교회를 진단하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정체성의 위기는 우리 문화 깊숙이 배어 있는 소비자 심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교회는 소비자 취향에 맞추어 소매점이 되었고, 신앙은 일개 상품으로 전락해버렸다"라고 했습니다. 찰스 콜슨박사가 개탄하고 있는 것은 종교 소비자들의 소비심리가 문제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의 내면과 영적인 욕구는 자아실현, 자아분석, 자아존중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다 내가 잘되어야 교회도 다닐 만 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내가 무시당하거나,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신앙이고 목사고 교회고 다 필요 없다는 생각입니다. 오로지 교회를 통하여 내가 존중받아야 하고, 나를 실현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하고, 내가 잘 되어야 하고, 복을 받아야 다닐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전통적인 영성, 성서적이며, 자기 희생, 자기 부정,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 현대인들은 들으려고도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미국교회를 진단하는 말이니 다만 참고할 뿐입니다. 실제로 미국교회의 신앙을 점검하려고 유에스 투데이(U.S. Today)에서 왜, 무슨 이유로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지를 설문 조사하였는데, 미국인의 56%가 교회를 출석하고 있으며 그 중 45%는 "자신들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에", 26%는 "마음의 평화와 정신적인 안정 때문에 나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미국 교회의 성도들 대부분이 자아 만족과 실현을 위하여 교회를 나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미국 교회에서 가장 성행하는 목회 프로그램이 고객 만족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내적 치유 세미나', "가정 회복", "아버지 학교, 어머니 학교" "결혼과 이혼 상담"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다. 지금 미국교회를 말하고 있지만 우리 한국교회도 미국교회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나설 소수의 의인이 되라고 하면 그것은 이 다음에 인생을 화려하게 살고 나서 아무런 힘이 없고, 갈 데도 없고, 오라는 이도 없을 그 때에 가서 교회에 열심을 내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배공동체이지 시장공동체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혹시 성장이 둔화되어도 교회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본질에 충실한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영성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세는 어느 정도 무장되어 있습니까? 정말 예수님을 갈급하게 찾고 있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갈급하게 찾아보셨습니까? 은혜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말씀을 깨닫고 감격스러워해야 합니다. 오늘 좋은 말씀을 들었다고 좋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강림하신 이후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를 종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란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지막 시대, 오늘의 시대, 종말을 살고 있는 시대는 마치 노아의 시대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노아 시대의 특징이 무엇이었습니까? 영적 무관심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대수롭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 교회와 말씀의 순수성, 그런 것이 별로 매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냥 즐기는데 있습니다. 마24:37-39에서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러한 21세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다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터키의 서부 브르기아 지방의 한 도시인데,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였고, 신전이 즐비하고 극장이 있었고, 상업도시요, 교통의 요지요, 금융의 중심지로 번성하고 잘 사는 도시였습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지적하면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니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라고 하셨습니다. 이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미지근한 신앙이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고 하셨습니다. 이 라오디게아 지방은 온천물이 나오는 히에라볼리라는 도시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히에라볼리는 현재의 파묵갈레(Pamukkale)라는 곳으로 목화성이라고 부르는 온천지대가 있습니다.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온천물이 약 10km 정도 흘러오다 보면 미지근해집니다. 차라리 뜨겁든지 아니면 차든지 해야 마실 수 있지 미지근한 물을 구역질만 난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주 적은 유적만을 남기고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의 내면적이고 영적인 상태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영적인 눈이 멀었습니다. 우리 시대에 많은 사람이 자기는 괜찮은 사람인 것으로 속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기술문명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질문명으로 채울 수 없는 공간이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가장 중요한 영적 생활을 상실하였으면서도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노아의 시대나 라오디게아의 영적 상태나 오늘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1-12)고 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끝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삶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잠깐이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인생이란 아주 제한된 인생입니다. 이 짧고 제한된 시간을 잘못된 목적과 쾌락을 얻으려고 허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75세가 넘어서 입원하시면 자녀들에게 하실 말씀 다 하시고 입원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갈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한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18:8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고 했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지금 우리 주님이 찾아오신다면 "저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라고 하실 것이 있어야 합니다. 표준개정역 성경에서는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믿노라고 하면서도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에게 기도하기를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세요.", "성경 좀 읽으세요", "우리 전도합시다" 이런 말들이 매력이 없습니다. 수없이 들어본 말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으로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일상생활만이 아니라,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준비성'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진리의 하나는 준비하는 만큼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세상 모든 일에 다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땅에서 보내는 시간은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하는 사람들입니다. 준비하는 것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근 1000년을 살아가던 시대가 있었는데, 죽음을 모르니까 죄악이 차고넘쳤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수한을 1/10으로 줄여놓았습니다. 이것은 하고싶은 것 다 해보라는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가장 준비성이 많은 사람을 들어보라고 하면 구약의 다윗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성전을 건축함에 있어 얼마나 많이 준비하였는지, 이 성전을 솔로몬의 성전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다윗이 준비한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생각합니다.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한데,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성전은 극히 웅장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윗은 "내가 이제 그것을 위하여 준비하리라" 생각하고 다윗이 죽기 전에 "많이 준비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준비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까? 우리 주님 앞에 서실 수 있도록 준비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일생이란, 우리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하는데 필요한 정도의 시간만큼만 주어졌습니다.
고후4:14 말씀에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 앞에 서게 하십니다.
눅21:36에 "이러므로 너희는 정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우리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죽어야 하고, 죽은 다음에 인자이신 주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이 왜 힘든 일이냐 하면, 죽는 것보다도 사실은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것이 더 힘든 일입니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실상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하셨습니다. 롬14:10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하셨습니다.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는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변론하려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시려고 서시도다"(사3:13)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책임적인 존재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전 삶은 우리가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선택하고 자기가 결단한 인생에 대하여 그 책임을 물으시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가 되시면서 우리의 삶을 판단하시는 심판주가 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평등하신 하나님은 아니시고,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공평한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천국이란 단순한 평준화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단순한 결과만 보시지 않습니다. 어떤 직분이나, 직함도 그를 평가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충성도를 보십니다. 일하는 과정을 눈여겨보십니다. 많은 받은 사람인데, 적은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데, 그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보다는 아주 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자의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교하시고 있습니다. 아주 많은 중에 조금 드린 것과 가난한 중에 생활비 전부를 드린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절대로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단순 평등이 아니라, 주신만큼 달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각 사람은 부당한 심판이라고 항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먼저 35-40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준비하라는 말씀을 가지고 세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혼인집에 가신 주인을 기다리는 종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으며, 다시 갑작스럽게 도둑이 들어오는 것을 예로 삼고 있으며, 다시 주인과 종의 관계로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인이 오실 때까지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여야 합니다. 옷을 벗어놓고 잠에 들어가면 그는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있어야 하고, 등불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주인이 집이 오시는 기척이 있으면, 문을 열고 주인을 영접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시간을 알 수 없습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고 하셨습니다. 혹 주인이 이경이나 삼경에 오시려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맞이하려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과 준비하라고 하시면서 두 번째로 도둑이 들어오는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먼저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가지고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도둑과 주인의 관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둑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시간에 들어옵니다. 도둑이 들지 않도록 철저한 방어 대책을 세워야 하고, 도둑이 들어오는 시간을 대비하여 우리 집을 뚫지 못하게 방비하여야 합니다. 4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41절 말씀부터 48절의 말씀은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의 비유입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는 주인으로부터 그 집 종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준다고 하셨습니다. 한번은 주인이 와서 청지기가 잘 하고 있는지를 보았는데, 여러 종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면서 잘 먹여서 건강한 모습으로 집안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런 청지기를 복이 있습니다. 주인이 가만히 있지 않고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길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고 자기만 먹고 마시고 즐기고 있다고 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주인이 와서는 그 청지기를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고 말 것입니다.
교회에서 주님은 보이지 않고, 높은 교회당 첨탑만 보입니다. 십자가의 복음보다는 교회 안에도 물량주의가 들어왔습니다. 고난의 복음보다는 기복주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다시 오시는 재림의 주님, 우리의 구원이신 주님을 높이고 선포하고 드러내어야 합니다. 이러한 종들이 복된 종이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47-48절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고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많이 받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적게 받은 사람입니까? 많이 맡은 사람입니까? 적게 맡은 사람입니까? 많이 받은 사람, 많이 맡은 사람에게는 많이 달라, 내놓으라고 하십니다. 목사님과 장로님만 많이 받은 사람, 많이 맡은 사람이요, 나는 적게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동안 받은 은혜를 생각하시면서 많이 갚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특권이란 언제나 남다른 의무를 동반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무를 등한히 하였습니까? 그러면 그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특권이 화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허리에 띠를 띠고 있어야 합니다. 허리띠를 풀지 않고 맨다는 것은 언제라도 일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등불도 가지고 있는데 기름도 따로 준비하여야 합니다. 우리 안에 어둠을 물리치고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 앞에 서실 때에 많은 것을 요구하실 때에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많이 달라고 하실 것입니다.
칭찬 받은 청지기
눅 12장 35~48절 / 김태복목사
이제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다 저물고 한 달만 남았습니다. 지난 일년 동안, 우리 교회는 45주년 행사로 너무나 분주다망한 날들이었습니다. 또한 저도 그 어느 때 보다도 바쁜 한 해를 보내야 했습니다. 영락교회수습전권위원장, 서울노회 교역자 회장, 서울시 연합당회 부회장의 일, 그리고 월간목회지에 일년 동안 연재, 그리고 창립 45주년사(史) 원고 집필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한 해를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일년 동안 교회와 저의 사역을 은혜 가운데 지켜 주셨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나름대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신 분들이 있는 반면에, 일년 동안 별로 행한 것이 없다고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일년 동안 잘해 오신 분들이나 그렇지 못한 분들이나 한 해를 잘 마무리하심으로 다시 주어지는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다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칭찬 받은 청지기와 책망 받은 청지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과연 칭찬 받은 청지기가 되려면 어찌해야 되는가? 본문에서 세 가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1. 칭찬 받는 청지기는 항상 깨어 있는 자입니다.
본문 37절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항상 깨어 있는 청지기는 어떤 자인가?
35절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항상 깨어 있는 청지기를 세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l)허리에 띠를 띠고 있는 지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의 의복은 일본인의 의복과 흡사했습니다. 땅에서부터 치렁치렁 끌리는 옷을 입었습니다. 유대인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허리를 동이어야 일하기도 하고 힘이 생기기도 합니다. 순례자가 길을 떠날 때에 띠를 띱니다. 군인이 전쟁에 떠날 때에 허리에 탄띠를 착용합니다.
예수님도 허리를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드렸고, 엘리야도 가죽 띠를 띠었으며, 세례 요한도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본 주님도 가슴에 금띠를 하고 계셨습니다. 옥에 갇혔던 베드로를 출옥시킬 때도 천사가 명하기를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고 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있다는 것은 일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언제 부르더라도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무엇이든지 명령만 하옵소서. 내가 순종하겠나이다.”라는 자세를 말합니다. 주님이 무엇을 시키시려고 아무리 불러도 “주여, 지금은 결혼식에 가야 하므로 못하겠나이다.” “지금은 사업을 하러 가야 하니까 나설 수가 없나이다. 나중에 불러 주옵소서.” “주님, 지금은 교회의 일을 하기에는 너무 젊습니다. 이 다음에 은퇴한 다음에 열심히 기도도 하고 심방도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핑계를 댑니다.
주님은 그런 청지기를 쓰기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이상하게 바쁜 사람을 찾으셔서 일하자고 하십니다. 양떼를 몰고 다니던 모세를 부르시고 양떼를 지키던 다윗을 불러서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고기잡이에 정신이 없는 베드로의 일행을 부르시고 세관에 있는 세리를 향해 “나를 따르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아까운 시간들을 쪼개서 드리는 헌신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2)깨어 있는 청지기란 등불을 켜고 있는 자입니다.
35절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모든 신자들에게 등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성도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등에 불을 환하게 밝히고 삽니다. 진리와 사랑의 빛, 기쁨과 감사의 빛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정전이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손전등을 찾다가 서랍 귀퉁이에 있는 손전등을 찾았습니다. 얼마나 반가운지요.
그러나 아무리 키려고 해도 망가져서 안 됩니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이 커서 집어던지고 맙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산 위에 세운 등입니다. 이제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등이 있는 곳에 모든 사람들은 환한 빛을 바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아무 빛도 없으면 실망하여 침을 뱉고 돌을 던지고 말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평안할 때 환한 때에는 기독교인을 오히려 귀찮게 여깁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할 때는 기독교인들에게 찾아와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 때 사랑의 불을 밝히면 얼마나 감동이 될까요? 어느 집사님의 간증을 들어보니까, 자기가 사는 아파트의 옆집 사람에게 아무리 전도해도 전혀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집 남편이 의자에 올라가 무엇을 고치다가 헛디뎌 다리뼈가 상했습니다. 남편은 비명을 지르고 부인이 안절부절합니다.
너무 급한 나머지 부인이 그 집사 댁에 와서 도움을 구합니다. 그 때 그 남편 집사님은 그 환자 분을 업고 땀을 흘리며 자기 자가용으로 병원까지 모시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이 입원해 있는 동안 부인 집사님은 그 가정을 돌보며 틈틈이 반찬을 해다 주었습니다. 그러자 큰 감동을 받고 결국 나중에는 교회까지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사랑의 등불을 환히 밝히고 있어야 합니다.
(3)깨어 있는 청지기란 서 있는 자를 말합니다.
35절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서 있다는 것은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의 띠만 띠고 등불만 밝히고 무작정 일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아닙니다. 열심히 깨어서 충성을 합니다. 깨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깨어서 사랑의 삶을 삽니다. 그런데 어느 성도는 무작정 때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하기를 “주님, 내게 큰 물질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러면 무엇도 하고 무엇도 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큰 물질이 생길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성도는 기도하기를 “주님, 내게 건강을 주옵소서. 그러면 분골쇄신 충성하겠나이다.”라면서 완전한 건강이 생길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면서 모든 충성을 멈추고 있습니다.
혹은 기도하기를 “주님, 내가 너무 시간이 없나이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면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때까지 모든 아무 충성도 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적은 일을 충성하는 자에게 큰 일도 맡기시는 분이십니다. 적은 수입에서 십일조를 내는 자에게 큰 십일조도 내게 하십니다.
또한 약한 건강에서 충성을 하는 자에게 강한 건강도 주시고 바쁜 시간을 쪼개서 충성하는 자에게 많은 시간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에서 세 번씩이나 총회장을 역임한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자익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조덕삼이라는 부잣집의 마부였습니다. 조덕삼씨는 금산리 일대에서 제일 큰 부자였습니다. 그 집 있는 곳을 늘 지나다니며 기도하시던 데이트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이 어느 날 이곳을 지나다가 조덕삼씨 집 문간방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때 조덕삼씨가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 때 이미 그 집에 마부로 있던 이자익이란 청년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던 때입니다. 그들이 성경공부를 하는 곳에 지주인 조덕삼씨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로써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집에서 마부를 하던 이자익씨가 나중에 장로 투표에서 먼저 장로가 되었습니다.
주인이었던 조덕삼씨는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였겠습니까? 그러나 보십시오.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화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감사했습니다. 장로투표가 끝나자 조덕삼 씨는 이렇게 나와서 말했습니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모두가 감동했습니다.
그렇게 말만 한 것이 아니라, 그는 이자익 마부를 먼저 장로로 모셨고 그 후 자기가 장로가 된 다음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게 한 후 목사가 되었을 때 다시 금산교회 당회장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이자익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과거에 머슴이었던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아멘, 아멘, 하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자익 목사님도 훌륭하여 세 번식이나 총회장으로 추대 받은 분이지만, 더 훌륭한 분은 조덕삼 장로님이십니다.
양반 쌍놈을 지독하게 따지던 시대에서도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자기 집 머슴 출신을 장로로 먼저 세우고 나중에는 신학교까지 졸업하게 한 후 자기 교회 목회자로 모시고 충성했으니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어느 중직은 교회 요람에 자기보다 표를 덜 받은 사람을 먼저 썼다고 울근불근하는 것과 얼마나 대조가 됩니까?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충성하여야 하되 적은 시간, 약한 건강, 적은 수입 적은 능력이라도 개의치 마시고 충성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상급을 받으시는 청지기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칭찬 받는 청지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하는 자입니다.
36-38절을 보면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 와 수종 하리라 주인이 혹 이경이나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이 복이 있으리로다”고 했습니다.
종은 주인이 오지 않으면 자리에 누워 있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졸더라도 긴장을 잔뜩 하였다가 무슨 소리라도 나면 달려가 문을 열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거나 늦게 열 때에는 게으른 종이라 책망을 받거나 심한 경우에는 내어 쫓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지금 기다리는 분은 우리의 주인 되시는 재림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종으로 언제나 깨어 등불을 밝히고 서 있다가 영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첫날 밤 신부는 신랑을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고 기쁘게 영접하여야 합니다. 어쩌다가 아주 늦은 시간에라도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38절에 보면 이경이나 삼경에라도 기다리고 있을 때에 주인이나 신랑은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에서는 밤을 4경으로 나누었던 반면 유대에서는 3경으로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식의 분류입니다. 그러므로 2경이나 3경이란 밤늦은 시간이나 새벽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밤을 밝힌 것입니다. 옛날에 어느 신부가 첫날밤 신랑이 더디 온다고 쿨쿨 자고 있다가 문도 제 시간에 열어 주지 못했다면 소박을 맞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반대입니다. 우리나라 결혼 풍습은 너무 도에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결혼식 전에 신랑 친구들이 함을 지고 신부 집에 쳐들어가서 ‘돈 내라’고 난리법석을 꾸미므로 신부 집이나 동네 사람들이 낯을 찡그리게 만듭니다. 더 한심한 것은 짓궂은 신랑의 친구들이 신혼여행지까지 쫓아가서 첫날밤 신랑을 불러내어 밤새도록 술을 퍼 먹임으로 기다리는 신부를 골탕 먹이게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느 신부는 화가 난 나머지 이혼하자고 그냥 올라오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경우에도 신부가 호텔 방에서 옷을 벗지 않고 밤새도록 앉아서 기다렸다면 아마 신랑은 너무나 황송하여 일생 빚진 자로 매여 지낼 것이요, 그 신부에게 큰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부들인 성도들은 언제 어느 시각에 신랑이신 주님이 오시더라도 깨어서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영접한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언제 신랑 되시는 주님이 오실 것인가? 그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나 예수님은 몇 가지 말씀으로 그 시점에 대해서 표현하셨습니다. ‘한 밤 중에’ 혹은 ‘종들이 조는 시간에’ 혹은 ‘생각지 않은 때에’ 혹은 ‘도적같이’ 임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지금이 무슨 말세냐, 역사의 종말은커녕 세계는 평화 무드로 가득 차지 않는가?”라면서, “왜 기독교인들만 '종말이니 말세이니'하면서 사람들 에게 불안감을 심어 주는가?”라고 비웃습니다.
아닙니다. 금년 한 해만 돌아볼 때도 얼마나 많은 지진과 해일, 태풍과 허리케인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아마 내년도에는 더 심해질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이여, 언제 어느 시간에 주님이 오시든지 우리는 종의 자세로서, 신부의 자세로서 깨어서 등불을 밝히고 기다리고 있다가 “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영접할 수 있는 지혜로운 청지기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칭찬 받은 청지기는 나누어주는 일에 힘쓰는 자입니다.
본문 42절에서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고 했습니다. 청지기란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로 옛날의 큰 부잣집의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집사직을 말합니다.
부잣집의 농산물의 모든 관리, 즉 소출과 집안의 제반 지출을 관리하고, 소작인들과 종들을 주인 대신 관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세력이 있는 위치였습니다. 청지기는 세 가지를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l)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청지기는 자기의 위치를 언제나 잘 알고 있는 자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이나 지위도 전부 주인의 것이요, 자기는 지금 그 모든 것을 잠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임을 언제나 명심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맡긴 재산과 책임을 지혜롭게 잘 관리하여 재산을 점점 증식시키려고 애쓰는 자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청지기는 처음에는 그것을 잘 명심하다가 자기 지위가 높아지고 주인이 차기를 철저히 신임하여 모든 것을 맡기면 모르는 사이에 교만하여 자기 욕심을 위해서 마음대로 물질을 써 버리고 소작인들과 종들이 와서 쩔쩔매면서 뇌물성 선물도 바치니 까, 점점 교만해집니다. 나중에는 자기가 주인인양 횡포를 부립니다. 주인이 나중에 이 사실을 알면 당장 그날로 해고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2)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재주가 좋고 운영의 능력이 뛰어난 지혜로운 청지기라도 진실하지 못하여 주인의 재산을 뒤로 슬금슬금 빼내거나 뇌물을 먹고 소작인들과 종들과 결탁하는 모습을 주인이 안다면 결코 귀한 일을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자보다는 차라리 지혜가 없는 정직한 자가 더 낫습니다.
때로 지혜가 많은 자 중에 진실이 없으면 나중에는 주인에게 결정적으로 해를 끼치는 존재가 되기가 쉽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렇습니다. 그는 지혜가 많은 자여서 회계 일을 맡기었는데 진실하지 못함으로 나중에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은30냥 파는 자가 된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진실하게 잘 관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무엇보다도 청지기는 덕이 있어야 합니다.
주인으로부터 큰 책임을 맡은 청지기는 자기가 부리는 종들을 잘 덕으로 다스리어 사기를 높이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45-48절에 나오는 악한 청지기를 보십시오. 종들이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때리고 뇌물이 작다고 어느 소작인을 좋은 농토는 뺏고 산비탈의 박토를 소작으로 주거나 어느 소작인은 뇌물을 안 바친다고 자기 마음대로 해고를 시킵니다.
그리고 주인이 멀리 여행을 떠난 후에 언제나 술이나 먹고 이 여자 저 여자와 놀러 다니는 일 때문에 모든 종들이나 소작인들의 원망을 사므로 주인에게 욕을 돌린다면 주인이 와서 이 사실을 알고 그런 청지기는 엄히 때리고 내어 쫓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청지기는 덕이 많아서 어느 가정이 아이를 낳으면 미역과 쌀을 사다 주면서 주인께서 보낸 것이라 일러줍니다.
종들 중에 누가 아프면 의원을 불러다 치료해 줄 때 너무 감사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면 주인이 보내신 것이니 주인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누가 혹 실수를 저질러도 주인에게 변명합니다. 어느 날 주인이 어느 종이 아프다고 하여서 방문했더니 그 종이 너무 감사면서 인사하기를 “지난번 보내신 약을 잘 받았습니다.”라고 합니다.
길에서 어느 종을 만났더니 깍듯이 인사하기를 “주인님, 지난번 우리 집사람이 아기를 낳았을 때 미역과 쌀을 보내주셔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주인의 마음은 얼마나 기쁘고 감동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주인의 이름으로 덕을 베푸는 청지기에게 44절 말씀대로 그의 모든 소유를 다 맡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사회의 큰 문제를 보면 너나없이 움켜쥐려고만 하지,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너나없이 점점 이기주의로 치닫고 있습니다. 지난달 24일자 신문에 보니까, 끔찍한 뉴스가 실려 있습니다. 아들이 가정불화와 재산 문제 등으로 어머니와 짜고 아버지를 살해한 후 사체를 인적이 드문 곳에 버린 것입니다.
24일 인천 서부경찰서에 따르면 권모(27.자영업)씨는 어머니 심모(51)씨와 함께 아버지(55)를 살해하기로 공모한 뒤 “주소 이전을 해야 한다.”며 지난해 12월11일 아버지를 강원도 횡성 자신의 집으로 유인했습니다. 권씨는 같은 날 오후 8시께 아버지가 자신의 안방에 누워 있는 틈을 이용, 발로 가슴을 밟고 둔기로 머리 부위를 10차례 가격하여 살해한 후 아버지 소유의 승용차에 사체를 싣고 인천에 올라가 인적이 드문 농수로 다리 밑에 버렸습니다.
경찰 조사결과 권씨는 아버지 소유의 땅과 방앗간 등 5억원 상당의 재산이 자신에게 분배되지 않는데 감정을 품고 있다 아버지를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고, 권씨 어머니는 30년 전에 결혼한 남편이 의처증을 보이며 자신을 수시로 때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무시해 아들에게 살인할 계획을 먼저 제의했다고 경찰은 전했습니다. 이제는 탕자의 비유도 새롭게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얼마나 많이 소유했느냐에 좌우되지 않고 얼마나 즐겁게 나누어 주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많이 움켜만 쥐고 조금도 나누지 못한다면 그 물질이 나를 해하는 독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과학자가 쥐 100마리씩 두 그룹으로 나누어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첫 번째 그룹인 100마리에게는 환경을 잘 꾸미어 주고 음식도 배가 부르도록 잘 먹인 다음 암을 유발하는 성분을 주사하였더니 암이 65%가 걸리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100마리에게는 충분히 먹이지를 않았고 환경도 좋지 못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암을 유발하는 성분을 주사했더니 놀랍게도 4% 뿐이 안 걸리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조사해 보았더니 첫 번째 쥐들은 너무나 과식함으로 병원균과 싸워 이기게 하는 T임파구가 무력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움켜 주기만 하므로 많이 소유하는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은 하나님이 맡긴 것이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나누어주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행복을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수도가 계속 흐를 때에만이 새물이 계속 공급됩니다. 그러나 수도가 잠기어 있으면 새물이 공급되지 못하므로 있는 물마저 썩고 맙니다. 주는 자에게 계속 새 것으로 넘치게 부어 주신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미국의 한 젊은이가 선교의 꿈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아프리카에 도저히 적응하지 못함으로 1년 뒤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젊은이는 선교의 사명을 버릴 수가 없어서 포도 주스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직접 선교는 못하나 재정적으로 선교를 돕자는 생각에 의해서 입니다.
그의 이름은 웰치인데, 지금도 ‘웰치 포도 주스’가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습니다. 그는 연간 2백만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는 20억원을 선교비로 지출하는데 그것은 그의 총수입의 절반이라고 합니다. 그가 열심히 부는 대로 선교를 위해 나누어 줄수록 하나님도 아낌없이 그에게 부어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주님께 붙잡혀 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내 안에 사신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한해가 다 저무는데 여러분은 지금 칭찬 받는 청지기인가, 아닌가? 여러분은 남은 한 달과 신년 새해에도 항상 깨어서 등불을 들고 충성하면서 주님을 기다렸다가 영접하는 자, 지혜와 진실, 덕이 있는 청지기가 됨으로 주님 오실 때 다 칭찬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청지기 인생
눅 12장 35~48절 / 김양인목사(목양교회)
오늘 본문은 혼인집에 간 주인을 기다리는 청지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인들은 주로 낮에 결혼식을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밤중에 결혼식을 했습니다. 신랑이 저녁 무렵에 신부 집에 도착하면 잔치가 일찍 시작되지만, 신랑이 자정이나 되어서 오면 한 밤 중에 잔치가 열렸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청지기들은 혼인 잔치에 간 주인이 언제 돌아올는지 알지 못합니다. 혹 이경에 올지 삼경에 올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경은 요즘 시간으로 밤 9시부터 자정까지를 말하고, 삼경은 자정부터 밤 3시까지를 말합니다. 혹은 하루나 이틀쯤, 또는 닷새 쯤 머물다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주인이 오래지 않아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부류의 청지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로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서 주인이 언제라도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주인이 집을 비운 동안에도 평소와 같이 집안에 있는 종들에게 일을 시키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줍니다. 또 하나는 미련하고 악한 청지기로서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마치 자기가 주인인양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주인이 돌아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 때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는 곧장 나가 문을 열고 반갑게 주인을 맞이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자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손수 허리에 띠를 띠고 종들을 대접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맡겨서 관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미련하고 악한 청지기는 술에 취해서 골아 떨어졌기 때문에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는데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에 주인이 심히 노하여 이 청지기를 엄히 때리고 벌을 내렸습니다. 오늘 저는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을 살펴봄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 각 자는 청지기로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주관이 강해서 남의 간섭 없이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자신이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십니다. 기독교에서 살인이나 자살을 금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함부로 끊을 수 없습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가 평복을 입고 백성들의 형편을 살피던 중 한 군인을 만나서 길을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군인이 어찌나 거만한 태도로 대답하는지 황제가 그에게 “당신의 계급이 어떻게 되지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군인은 “한번 맞추어 보게.”라고 했습니다. 황제가 겸손하게 “당신, 중사인가요?”라고 묻자, “아니, 그 위일세.”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소위인가요?” “아니, 그 위야.” “그러면 대위이십니까?” 그제야 군인은 빙긋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번에는 대위가 황제에게 “자네도 계급이 있는가?”하고 물었습니다. “네, 대위님. 한 번 맞추어 보십시오.” “자네, 일등병 아닌가?” “아니, 그 위입니다.” “그러면 자네 하사인가?” “아니, 그 위입니다.” 그렇게 해서 중위, 대위, 대장에 이르렀지만 황제는 계속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면 원수 각하십니까?” “아니, 그 위요.” 원수보다 위라면 니콜라이 황제뿐이었습니다. 대위는 그만 “폐하”하면서 땅에 엎드려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황제가 대위를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일어나라. 너나 나나 마찬가지다. 우리 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을 여러 계층으로 나누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똑같습니다. 재산이 많든 적든, 학식이 있든 없든, 신분이 높든 낮든, 남자든 여자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어른이든 아이든, 모두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통해서 태어났더라도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 자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건강, 시간, 물질, 재능, 지식, 등 어느 것 하나 본래부터 우리의 것이라곤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유용한 것은 다 주님의 것을 잠시 빌려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춥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잘난 맛에 도취되어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에 대하여 성경은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장사 밑천을 나누어주되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금 두 달란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금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주인이 떠난 후에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갑절의 이문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을 파고 그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을 불러 결산을 보는데,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말하기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이 와서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말하기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말하기를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말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그리고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달란트는 곧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재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 시간, 물질 따위를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장사해서 갑절의 이문을 남겼다는 것은, 열심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산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무관심하게 산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큰일을 이루고 크게 성공했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지 않은 사람은 한 달란트 받은 악한 종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지혜를 가지고 자기 영광과 즐거움을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다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받은 달란트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것을 주님을 위해 선용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청지기는 주인이 집을 비운 동안 종들에게 때를 따라 일을 맡기고 양식을 나누어주고 보살폈습니다. 이것은 그가 봉사의 삶을 살았음을 말합니다.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봉사 생활은 가진 것이 많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봉사와 헌신은 세상의 기준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고 하셨습니다.
한번은 주님께서 성전의 헌금함 맞은편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 넣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 때 부자들은 여럿이 와서 많은 돈을 넣었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겨우 렙톤 두 개를 넣었습니다. 렙돈은 가장 값어치가 낮은 동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를 보십시오.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아낌없이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자기 머리털을 풀어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가룟 유다가 이 광경을 보고 화를 내면서 “어찌 이같이 낭비하느냐?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겠도다.”고 하니,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만 두어라. 이 여자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일은 좋고 선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고하든 우리는 가진 모든 것을 선용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드릴 때 나의 것을 드린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것을 도로 주님께 드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아무리 많이 드리고 열심히 봉사할지라도 아깝지 않고 드리면 드릴수록 더욱 더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는 항상 주인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주인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인도 선교사였던 와일더 박사가 하루는 인도에 도착한 미군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 장교가 “선교사들이 굳이 여기까지 와서 일할 필요가 있나요? 미국에서도 충분할 텐데 인도인들에게 기독교가 필요할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와일러 선교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장교님, 만일 당신의 사령관이 오늘밤 당신에게 군대를 이끌고 필리핀으로 가라고 하면 당신은 떠납니까?” “그렇지요. 명령이라면 가야지요.”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사령관이신 예수님께서 명령하셨기에 나는 그 명령에 따라서 지금 여기에 왔습니다.” 청지기 인생은 주님의 명령 앞에 “예”만 있고 “아니요”는 없습니다. 언제나 내 인생의 사령관이신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청지기의 비유는 이 땅에서 우리의 사는 날이 한정되어 있음을 말해 줍니다. 혼인 잔치에 갔던 주인이 돌아온 것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제라도 강림하시면 인류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껴서 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 땅에서 가장 가치 있고 보람된 일이 무엇일까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을 즐기는 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라고 노래합니다. 또는 이 땅에서 성공 출세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야고보 선생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3-16)
성공하는 것이 죄가 아니고, 장사하고 사업을 경영해서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지 않고 오로지 세상일에만 몰두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언제나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충성을 다하며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설 만반의 준비를 갖추면서 살아가는 지혜로운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 째로, 이 비유는 우리에게 주님의 강림을 준비하라고 일깨워 줍니다.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는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올 것을 알고 깨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하던 전 날 밤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행할 바를 명하시기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 12:11)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언제라도 떠날 태세를 갖추고 유월절 어린양 고기를 먹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청지기는 주인이 언제 올지라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오는 것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의미합니다. 주인이 혼인집에 가셨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 집에 가셨으며, 머지않아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고 계시는데, 처소가 다 준비되면 구름을 타시고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신 그대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강림은 성도들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주님의 강림은 한갓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으며, 천사들이 증거했으며,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성경에 기록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그 날, 무덤에서 잠자던 성도들이 부활의 몸으로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살아있던 성도들은 홀연히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공중으로 주님을 영접하러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혼인집에서 돌아온 주인이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를 칭찬하시고 그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맡긴 것처럼, 강림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진실하게 주님을 믿은 성도들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 이르기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이 받을 상급에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1절에 이르기를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라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3장 13절 이하에는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모두 차별없이 받지만, 상급은 각 사람이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충성되이 청지기의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강림을 믿고 성실하게 믿음을 지켜나가는 성도들을 보고서 비웃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도들이 살아 있을 당시부터 계속해서 말세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때에도 주님의 강림이 가깝다고 했는데, 벌써 이 천 년이나 지났지 않느냐, 그러니 예수님의 강림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던 것 같이, 저들은 주님의 강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이 세상 일에 몰두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록 1장 7절에 보니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애곡하는 자들은 주님의 강림을 믿지 않고 아무 준비 없이 세상일에 몰두하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주님의 강림이 심히 가까운 때입니다. 다니엘서 12장 4절에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하였는데, 과연 오늘날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하여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고 있으며, 정보화 시대가 되어서 나날이 지식이 더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주전 600년 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언한 이 말씀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오늘 이 시대에 성취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말세의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라’(마 24:7)고 하셨는데, 과연 이 말씀과 같이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민족 분규와 국가 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기근과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이 빈발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고 하셨는데, 과연 오늘 이 세계는 불법이 성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이 식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끝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 보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지만 시대의 징조들을 보아서 그 날이 매우 가까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강림 일시를 알려 주지 않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깨어서 주님의 강림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혹 주님의 강림이 우리의 생애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 각 자는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갖추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호흡을 거두시면 언제라도 “예” 하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사는 것이 아니고 길어야 백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한 번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날이 언제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이 주님 앞에 서는 날인 것처럼 여기고 항상 준비하는 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 엘는지, 밤중 엘는지, 닭 울 때 엘는지, 새벽 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막 13:35)고 하셨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서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청지기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깨어서 재림의 주님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인생은 청지기 인생입니다. 청지기 인생은 언젠가 주인 앞에서 결산할 날이 있기 마련입니다.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언제 어느 시에 오시든지 반가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이제라도 “오라”고 부르시면 두려움 없이 그 앞에 설 자신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늦기 전에 깨어서 믿음의 삶을 살아갑시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시간과 물질과 건강과 재능을 가지고 주의 일에 힘씁시다. 여러분 모두, 항상 영적으로 깨어서 등잔에 불을 밝히고 주님의 강림과 하나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는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