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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16일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1코린 15,12-20
복 음 : 루카 8,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공동체의 신비神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신비중의 신비가 공동체의 신비입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의 신비는 그대로 파스카의 신비와 직결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이 공동체의 중심이 되시며
우리 모두가 파스카의 주님의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파스카의 신비를 살고 있습니다.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평화를 살고 있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이 주신 선물이 바로 기쁨과 평화입니다.
부활신앙에 기초한 그리스도교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전제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일부 코린토 교회 신도들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력히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 죄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아예 이 미사도 없습니다.
공동체도, 끊임없는 용서도 불가능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이 계시기에 미사도, 공동체도 가능합니다.
파스카의 주님의 계시지 않다면 우리는 영원히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음은 파스카의 믿음 때문입니다.
이어 계속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파스카의 주님이 우리의 구원이요 불멸의 희망입니다.
이런 파스카의 믿음이 있어 주님을 위한 순교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헛되고 덧없을 것이며
순교 역시 참으로 무의미한 일일 것입니다.
얼마 전 염 추기경이 자비의 특별 희년 선포 및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성극 ‘요셉 임치백’의 첫날 공연에 카메오로 출연, 포도대장의 갖은 회유에도
“내 양들을 저버릴 수 없다”고 외치며 포졸들에게 끌려가는 연기를 펼쳐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는 기사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포도대장역을 맡은 배우 유태균(토마스)씨가 극 중에
“네놈이 안성 출신의 파주 염씨 집안, 염수정 안드레아가 맞느냐?”고 묻자,
무릎을 꿇은 염 추기경은 “다 아는 얘길 왜 묻소?”라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포도대장은 “6대째 천주학쟁이로, 조상 중에 순교자가 나왔으며,
조선을 대표하는 세 번째 추기경이라 하여, 널 따르는 자가 구름떼처럼 많아,
나라님도 무서워하는 대물이라 들었다”고 호령했고,
염 추기경은 “착각은 자유요, 내가 무슨 대물이요? 나는 천주님의 도구일 뿐이오”하고 맞받아쳤다.-
염 추기경 역시 잠시 연극에 출연하면서 부활신앙을 새로이 했을 것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신앙입니다.
이런 부활하신 주님께 기초한 파스카의 공동체가 진정 강한 공동체입니다.
매일 미사은총이 견고한 파스카의 공동체를 이루어 줍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공동체가 참으로 이상적 공동체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이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상호보완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 당대 이스라엘에서 여자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일이 었습니다.
예수님과 열두제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외적 활동에 전념하였으며,
많은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드는 내적활동에 전념하니
참 아름다운 상호보완, 섬김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공동체의 신비이자 자랑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이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기에 가능합니다.
상호경쟁이 아닌 상호보완, 상호협력의 형제적 공동체가 우리 믿는 이들의 파스카 공동체입니다.
각자 받은 은사대로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의 지체가 되어
그 책임에 충실함으로 끊임없이 성장, 성숙하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며칠 전 써놓은 ‘공동체의 신비’란 글을 나눕니다.
-아무도/무엇도/판단하거나 비교하지 마라
모양/색깔/자리/높이/깊이/넓이/다 다르다
획일화/동일화/규격화/정형화 할 수 없다
하나하나/신비로운 고유의 존재들이다/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모두가/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
파스카의 주님이 공동체의 중심이 자리잡고 계시기에 이런 이상적 상호보완,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파스카의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공동체를
당신 뜻에 맞는 사랑의 공동체로 새롭게 리모델링해 주십니다.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 하리이다.”(시편17,8;15).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신부님의 차를 탈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에 타자마자 신부님께서는 주유를 하고 가겠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리고 주유소를 찾아가는데 성당에서 한참 떨어진 곳을 가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주유소는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의 정반대이기도 했습니다.
왜 이 주유소를 찾았을까요? 다른 주유소보다 리터당 10원이 더 싸다는 이유더군요.
여기에 차 무게가 무거워서 기름을 많이 먹는다고 주유도 절반만 합니다.
기름도 나오지 않은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절약을 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솔직히 절약을 한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30리터 정도 넣었으니 성당 앞 주유소보다 300원 절약했습니다.
그러나 이동한 거리를 생각해보면 300원 이상을 더 쓴 것 같습니다.
실제로 종종 이런 분들을 많은 것 같습니다.
본인은 절약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따지면 절약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가져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신부님은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계속된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싼 주유소를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차를 통해 절약하는 방법을 많이 알고 계시더군요.
브레이크를 한 번 밟을 때마다 거의 50원씩 든다면서 가능한 한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에어컨 켜는 것도 기름이 많이 소비된다면서 에어컨을 켜지 않습니다.
그런데 창문을 열면 공기저항이 생긴다며 창문도 열지 못하게 합니다.
누군가는 꼭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야 하느냐고 불편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끼며 사시는 신부님이기에 사목활동 안에서도 허투루 낭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돈만 모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필요할 때에는 아낌없이 쓰면서 참으로 많은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몇몇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에 대해 복음은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당시에는 여성의 지위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대단한 행동을 해도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복음에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웬만한 남자들보다 훨씬 더 대단한 봉사와 나눔을 실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노력들이 주님의 활동을 도왔고, 주님의 기쁜 소식이 세상 끝까지 전파되는데 커다란 힘이 된 것입니다.
앞서 신부님께서 낭비하지 않고 절약하면서 주님의 일을 해 나가고 있는 것처럼,
또한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노력들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은 누구 한 명의 노력만으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해야 가능합니다.
"열 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밝혀주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늘나라”에 대한 복음 선포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십니다.”(루카 8,1).
그런데 이러한 일에 홀려 숙식을 같이 하며 온갖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따라다니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열 두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또 한 부류가 있었으니,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시중드는 여인들 이었습니다”(루카 8,3).
그들 중에는 오늘 복음에 이름이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등 입니다.
도대체 이들은 예수님을 왜 따라다녔을까? 그리고 그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이 되고 싶은 이를 따라 다닙니다.
정치가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정치꾼들을 따라다니고,
돈을 벌고 싶은 이는 장사꾼들을 따라다니며,
주먹 잡이가 되고 싶은 이는 싸움꾼들을 따라다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다양한 직종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모두가 한 결 같이 하늘나라와 그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믿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믿는 분을 따라나선 이들,
곧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들”(앙드레 루프)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제자 되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그 길은 여섯 개의 동사로 드러납니다.
곧 “함께 있다”, “함께 다니다.” “따르다”, “선포하다와 전하다”, “시중들다.” 라는 동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기도에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그러나 그저 함께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다녔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다니는 이들’입니다.
어디를 가든 주님과 함께 다니는 이들이요, 주님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 이들입니다.
그토록 그들은 그분을 주님으로 추종하며, “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그분을 따라서 그분께서 선포하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선포한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신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주님께 봉사하고 “시중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섬기고 시중드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단지 행동만으로 따르는 것을 너머, 자신의 정신과 뜻을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하여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시중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과 함께 다니고,
주님께서 하신 바를 따르고, 주님이 선포한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또 복음을 전하고,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야할 길인 것입니다. 아멘.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추석에 가족들과 함께 모이셨는지요?
저는 형님 가족과 어머니와 함께 연도를 드리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동생 수녀님은 본당에 미사가 있어서 오후에 집으로 온다고 합니다.
저도 본당에 있을 때는, 추석 당일에는 가족들과 함께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안경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다촛점 렌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안경 아래쪽은 돋보기와 같은 기능을 하기 때문에 가까이 있는 것이 잘 보입니다.
안경 윗부분은 멀리 있는 것들을 잘 볼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저의 눈이 가까이 있는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마트 폰, 컴퓨터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웃과 소통할 수 있고, 제가 모르는 정보를 검색할 수 있고, 이렇게 글을 쓰기도 합니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자는 것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人間’은 서로에게 기대어서 사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Homo'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사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해주고, 사랑하며 산다면
이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고, 이곳에서 영원한 생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를 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질주의, 산업화, 자본주의, 과학의 발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통과 문화를 구태의연한 것으로 버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과 문화에는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깊은 영성이 있습니다.
나눔, 비움, 희생, 봉사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것은 풍요와 발전만이 아니라,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명예, 권력, 재물이라는 바벨탑을 쌓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죽은 사람을 장례지내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커다란 피라미드, 중국의 진시황제의 능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낮은 밤에게 하루의 반을 내어 주듯이, 우리의 삶은 죽음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낮과 밤이 있어야 온전한 하루가 되듯이, 삶과 죽음이 있어야 비로소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난 신앙인들이 천상에서 영원히 살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천국에서 성인들이 우리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이것이 가톨릭의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시중을 들고, 자신들의 재산을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
그 여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세상을 따르는 것 보다, 훨씬 좋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보험을 들은 사람들은 보험회사가 망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희망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역시 우리들의 신앙, 우리들의 교회가 더욱 발전하고 성장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로자
반영억 라파엘 신부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그에 걸 맞는 응답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하게 되면 더 큰 감사를 할 기회가 옵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녀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쌓아 놓으면 쌓아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논리입니다. 사랑은 베풀면 베풀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는데
제자들과 막달라 여자 마리아,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도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일찍이 악령과 질병에 시달린 사람도 있었는데 주님을 만나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악령과 고통이라는 시련을 통해서 주님을 만났고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했기에 모두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따름으로써 주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었고
나중에는 십자가 곁에도 설 수 있었고(루가23,49)
천사들로부터 주님 부활의 소식을 듣고 이를 사도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루가24,10).
여인들은 주님을 만남으로서 행복했고 자기의 것을 내놓음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베풀었지만 보답을 바라지 않았고 자기네 재산을 바쳤지만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숨은 공로자들입니다.
그들은 “은혜를 베푼 것은 모래밭에 새기고 은혜를 입은 것은 돌 판에 새겼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도직 단체의 구성원이 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궂은일을 도맡아 합니다.
때로는 오해를 사고 무시당하는 일도 있지만 '하느님은 아시니까' 하면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숨은 공로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1디모6,8-9).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화가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부자 되었다 해도, 그 가산이 늘었다 해도 너는 두려워하지 마라.
죽을 때면 아무것도 지니고 갈 수 없으며, 영화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하리라”(시편49).
따라서 여인들이 자기네 재산을 주님의 일에 쓴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그리할 때 우리 모두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로자가 됩니다.
지금 감사하십시오! 절대 미루지 마십시오!
그러면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만날 것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 3)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시대의 진실 된 순교는
진실 된 봉사임을 생활 안에서 깨닫게 됩니다.
신앙의 순교 또한
봉사의 영역 안에 있습니다.
봉사가 빠져버린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어려운 이들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들 속에서
함께 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진실 된 봉사는
언제나 진실 된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성숙한 신앙이란
우리자신이 예수님의
건강한 조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믿음의 조력자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언제나 공동체의 큰 기쁨입니다.
건강한 도움은 참된 기도와
함께하는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물질적인 기부 또한
단순한 물질적인 나눔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는 나눔이 되어야합니다.
순교와 봉사는
진실 된 예수님을 닮는
진실 된 우리의 실천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 시대의 진실된 순교는
진실된 봉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