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탈입망한 명문 스님 1
명문 선사! 명문 대선사! 그대 어찌 그리도 자유로운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로다.
그렇다. 나의 도반, 나를 잘 알아주고 매섭게 경책해 주던 나의 도반 명문 스님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었다.
스스로 지리산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칭했고,
그래서 지리산 자락 어디쯤인가에 토굴 하나를 묻어 놓고 지리산 골짜기며 나무 숲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바람이었다.
맑고 투명한 바람과 같은 사람, 명문 스님이 열반을 하셨단다.
내가 그의 죽음을 처음 접한 것은 지난 2월 16일 실상사 도범 스님 방에서다.
선우도량 수련대회 참석 차 실상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도범 스님과 차를 마시다가 우연히 달력을 쳐다보니
2월 26일 날짜 위에 ‘금산사 명문 스님 49재’ 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처음엔 명문 스님이 아는 누군가가 금산사에서 49재를 하는 것인 줄로 알았다. 그래도 미심쩍어 도범 스님께 물어 보았더니 명문 스님이 죽었다는 것이다.
아니 이런 엉뚱한 일이 다 있나? 이제 한창인 사십 줄의 그였다. 그렇게 건장하고 곡차 잘 마시며 조선 팔도를 활개치고 다니던 사람이 죽었다니,,, 스스로 선택한 길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는 건강한 사람이었다.
평소 기발하고 엉뚱한 행동을 잘하던 그답게 죽음 또한 기이했다. 좌탈입망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토굴 방에서 좌선하는 그 자세로 얼굴에 은은한 미소까지 띄운 채 그렇게 자유롭게 떠났단다.
오래 전 지금으로부터 약 15-6년이나 되었을까?
나는 도반 돈수 스님과 함께 지리산 의신 마을 깊은 골짜기로 명문 스님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때는 여름이라 몹시 무더웠다.
초행이라 물어 물어 산길을 찾아갔다. 중간에 소나기를 만나서 급히 비를 피하기도 하고, 불어난 개울물로 계곡이 넘쳐 위험을 무릅쓰고 건너기도 했다. 우리는 연신 명문 스님을 욕하고 있었다. 아무리 수좌이기로 이렇게 깊은 곳에 토굴을 묻을 수 있느냐,
지 놈이 무엇인데 우리를 이렇게 생고생시키는가? 그렇게 고생에 고생을 더하면서 요행히도 그가 사는 토굴을 찾았다.
그의 토굴은 그야말로 토굴이었다. 맨바닥에 땅을 돋우고 구들을 깐 위에 그냥 천막 하나를 쳐 놓았을 뿐이었다.
마침 저녁을 한다고 불을 피우고 있었는데 방안까지 연기가 들어와 매캐한 냄새에 눈물이 났다. 그래도 그 매캐한 냄새가 좋았다. 그가 평소 곡차를 좋아하는 지라 곡차 몇 병과 토굴이니 반찬이 없을 것이라고 밑반찬 거리를 몇 가지 사서 들고 갔었다.
그런데 그는 우리 보고 잠깐 개울에서 목욕이나 하며 기다리라고 했다. 반가운 도반이 찾아왔으니 그냥 있을 수는 없고 반찬을 장만해야겠다는 것이다. 돈수 스님과 나는 또한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라고 했다. 사실 반찬이라고는 된장과 간장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깐 기다리란 말을 하고 나간 사람이 한 시간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목욕을 하려고 개울에 나가보니 물이 너무 차서 목욕할 마음도 싹 가시고 오히려 한기가 느껴졌다. 목욕하는 것도 포기하고 무료하게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나타났다. 알고 보니 그 길로 시오리가 넘는 산길을 내려가 마을 집에서 호박 하나를 얻어왔던 것이다. 그 집이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했다. 찾아온 도반들에게 호박 넣고 된장찌개를 해주기 위해서 멀고 험한 산길을 달려갔다 온 것이다. 태어나서 가장 귀한 된장찌개를 우리는 그 날 저녁에 먹었다.
한번은 명문 스님이 나에게 하동읍 시장을 같이 가자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나는 그를 따라 시장에 갔다.
곧바로 신발가게 앞에 서더니 나에게 운동화 한 켤레를 골라주면서 신어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색한 미소를 짓고 혼잣말처럼, “돈이 몇 푼 생겨서 스님 운동화나 사주려고 나온 것이야” 했다.
그때서야 왜 시장을 함께 오자고 했는지 알아차렸다.
그 며칠 전에 몇 명 가까운 도반들과 쌍계사 마당가에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한 스님이 몹시 낡고 빛이 바랜 내 고무신을 보고는 “신발이 왜 그 모양이요, 좋은 운동화나 한 사 신지 그려” 하길래. 나는 돈이 없어 못 사 신는다며 농담조로, “도반이 돈이 없어서 신발도 못 사 신는데 하나 사주면 안 되는가?” 하고 말했다.
그 때 명문 스님도 같이 있었다.
그 지나가는 농담을 예사로 받아넘기지 못하고 그는 며칠을 벼르고 벼른 뒤에 나에게 신발을 사주기 위해서 시장까지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정작 운동화 값을 치르려고 보니까 돈이 모자라는 것이 아닌가? 명문 스님의 그 난처해하는 얼굴이라니,,,
슬그머니 내 곁에 오더니 비상금 꼬불쳐 놓은 것 있으면 만원만 꾸어 달란다. 못 이기는 체 하고 나는 또 만원을 꾸어주고,,, 그렇게 해서 나는 처음으로 고급 운동화 한 켤레를 얻어 신어 보았다. 운동화 값이 그렇게까지 비싸다는 것도 그 때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당시 칠십 년대의 우리들은 가난한 수행자였지만 이렇게 멋이 이는 우정을 나누었다.
명문 스님.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은 돈이 없어 토굴에서 반찬 하나 제대로 사먹지 못하면서도 도반에게 고급 운동화를 사 줄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디서 좋은 것이 생기면 먼저 도반에게 자랑해야 되고 그것을 또 기어이 도반 손에 쥐어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지난 여름에도 실상사 도범 스님을 뵈러 왔다가는 내 방에 와서 어디서 웅담이 하나 생겼다면서 그것을 주머니에서 꺼내더니
술에 녹여서 기어이 우리들에게 한 모금씩 먹였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가다니!
그는 매우 야성적인 사람이다. 파월장병 출신으로 전쟁을 경험한 그는 성격이 직선적이며 단순하다.
치사하고 졸렬한 사람, 잘난 체 하는 사람을 보면 면전에서 면박을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깊이 사귈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끄는 사람이다. 맑고 투명한 심성과 단순 소박한 천진성이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그의 공부가 고준한 것을 익히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가 우리에게 좌탈입망으로 보여준 죽음의 모습은 새삼 우리 수행자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수행자가 죽을 때 평소의 좌선하던 자세로 죽으면 조사 열반이라고 한다.
이번 명문 스님의 좌탈입망 자세는
뒤늦게 찾아간 보살이 방문을 열어 보고도 그냥 앉아 좌선을 하는 것으로만 여겼을 정도라고 한다.
무엇보다 그는 한 달 전부터 열반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미 본인의 세상 인연이 다했음을 안 것이리라.
여러 선원에 대중공양도 내고, 가난한 도반에게는 약값도 보내고
불사하는 곳에는 시주금도 내고 해서 자신의 살림살이를 깨끗이 정리했다고 한다.
더구나 열반한 당일 밤에는 이 곳 저 곳 도반들에게 전화로 공부 열심히 하라는 당부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고 인사를 차리고 할 일을 다 마친 뒤에 밤이 깊어지자 조용히 앉아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한 것이다.
아! 거룩하다. 명문 스님. 사바세계에 와서 연극 한 번 잘하고 가셨구려.
출처 ; 효림 스님 /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