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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中日近現代史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출처: : http://mpva.tistory.com/(국가보훈처 공식블로그)
독립군 3대 대첩으로 뽑히는 봉오동ㆍ청산리ㆍ대전자령 대첩! 이 세 대첩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힘들었던 시기 일본군과 맞서 승리를 거둔 감격의 순간으로 기억되는데요. 무기와 장비는 물론 훈련조차 받지 못한 여건 속에서 독립군이 울렸던 승리의 순간! 함께 알아볼까요?
감격스러운 첫 승리, 봉오동 전투
봉오동 전투 기록화 (출처: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홍범도ㆍ최진동 등이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명에게 부상을 입힌 독립전쟁사의 기념비적 전투인데요! 어떤 전개과정이 있었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봉오동 전투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20년 6월 4일 홍범도, 최진동 부대의 1개 소대가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에서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 •격퇴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했고, 독립군 사령부는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에 1개 소대를 매복시킨 뒤, 약간의 병력으로 총격전을 벌이며 일본군을 유도했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독립군이 잠복해있는 곳까지 추격해왔고, 독립군은 일제히 총격전을 벌여 일본군 60여명을 사살하였습니다.
여기서 봉오동 전투는 끝나지 않는데요.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일본군은 소좌 야스카와(安川二郎)가 지휘하는 보병 및 기관총대 1개 대대를 출동시켰습니다. 일본군에 비해서 수적으로 열세했던 독립군은 작전상 요지를 점령하여 전투를 벌일 계획을 세웁니다.
홍범도
6월 7일, 이들의 계획대로 야스카와 부대는 안산 촌락으로 돌입하였고 독립군의 총격에 의해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상당한 타격을 입고 대열을 재정비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추격하여 고려령 서방으로 진출하였지만 이때 북방 및 동북방 고지에서 매복하던 독립군의 사격에 의해 또 다시 타격을 입고야 맙니다. 야스카와 부대는 두 곳에서 무려 12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 거죠.
이후 야스카와 부대는 독립군의 유도작전에 의해 봉오동으로 유인되었는데요. 독립군은 야스카와 부대의 침입을 미리 대비하여 홍범도와 최진동의 연합부대를 재편성하였습니다. 부대의 연대장이었던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직접 인솔하여 일본군의 선봉을 봉오동 어구로 통과하도록 유도하였는데 이때, 일본군 주력 부대가 독립군의 포위망에 들어설 때쯤 사격을 시행하도록 지휘하였습니다.
홍범도가 세운 작전대로 일본 야스카와 부대는 독립군 700여명이 잠복해 있던 봉오동 상촌의 포위망으로 들어왔고 잠복해있던 독립군은 지휘에 따라 협공을 하여 통쾌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일본군의 기세를 꺾을 수 있었던 청산리 대첩
청산리전투도 (출처: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일본군은 얕보던 독립군에게 뜻밖에 참패를 당하자 1920년 10월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는 물론 관동, 시베리아 등에 있던 부대까지 동원해 세 방향에서 독립군을 공격해왔습니다. 독립군은 처음에는 일본군을 피해 병력을 급히 후방으로 이동시켰으나,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일본군과 전투를 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10월 21일, 김좌진과 이범석 장군의 지휘 아래 독립군은 청산리 백운평 바로 위쪽 계곡 양쪽에 매복해 공격해오는 일본군과의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는데요. 이 곳은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고 합니다. 또한 일본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마을 노인들에게 ‘독립군은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사기가 떨어져 허둥지둥 도망갔다’는 거짓말을 퍼뜨리기도 하고, 식은 말똥을 두어 독립군이 이미 오래 전 이 곳을 지나간 것처럼 착각하도록 주도면밀 한 작전을 세웠다고 합니다.
청산리계곡에 매복 해 있던 독립군은 마침내 청산리계곡으로 야스가와가 이끄는 추격대가 들어오자 총을 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그들을 전멸시켰습니다. 뒤이어 야마타가 지휘하는 본대가 도착했지만, 독립군은 이미 지형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일본군은 독립군의 정확한 조준사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날 오후에는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일본군 400여 명을 사살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다음날인 22일 새벽 갑산촌에서 다른 부대와 합류한 김좌진 부대는 그 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그리곤 그 곳으로 이동해 일본군 기병중대를 전멸시키게 되었는데, 이들은 독립군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던 아즈마 부대의 일부였다고 해요.
[청산리대첩의 격전장. 출처:독립기념관]
이후에도 김좌진 장군과 독립군을 포위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내는 1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는데요.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크고 작은 전투로 이루어진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적의 연대장을 포함해 무려 3,000여명을 살상하였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었습니다.
김좌진 장군
중국군과의 연합으로 일본군을 격파한 대전자령 전투
1933년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이란 이름의 중국 항일의용군 2000여명과 함께 험준한 계곡으로 이어진 천연의 매복 장소인 대전자령에 잠복했습니다.
1,300명의 일본 정규군은 이런 사실을 모른 채 대전자령을 지나고 있었는데요. 당시 이들은 연변에서 철수하고 있었던 상태라 군수물자를 잔뜩 싣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독립군과 중국군 연합부대는 이들에게 일제히 공격을 가해 일본군을 거의 궤멸시키다시피 했습니다.
제93주년 한국독립군 봉오동, 청산리, 대전자령 대첩 기념식
한국독립군의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대전자령 전투는 국권 상실 후 간도 지방 등 동북 3성으로 이주한 민족 지도자와 의병, 민초들로 구성된 한국독립군이 무기와 장비는 물론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독립을 향한 불굴의 투혼으로 일본군과 당당하게 맞서 대승을 거둔 독립전쟁입니다. 정부에서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감하게 싸운 한국독립군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매년 봉오동, 청산리, 대전자령 대첩 기념행사를 있는데요.
올해 10월 21일 오전 11시 국회의원회관에서 각계인사와 회원, 시민 등과 함께 [제96주년 봉오동 창산리 대전자령 대첩 기념행사를 열어, 일제와 맞서 싸워 끝내 승리를 얻어낸 조선의 3대 대첩의 영웅들에게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를 맞아 훈터 여러분도 독립군의 전투를 기억하고,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선열들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봉오동(鳳梧洞)과 청산리 대첩
봉오동(鳳梧洞) 전투는 당시 독립군의 국내 진공전에서 비롯됐다. 1920년 6월 4일 신민단 소속의 독립군 30명가량이 중국의 화룡현 삼둔자(三屯子)를 출발,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江陽洞)으로 진입해 그곳에 주둔한 헌병 순찰 소대를 격파한 뒤 강을 넘어 귀환했다. 일제는 독립군의 잇따른 진공 작전을 막기 위해 경비를 강화했는데도 또다시 기습을 당하자, 조선군 제19사단 소속 국경수비대의 니미(新美) 중위가 이끄는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 1개 중대와 헌병 중대를 동원해 독립군을 추격하게 했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삼둔자 근처에 잠복한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군에 격퇴당하였다.
삼둔자 전투에서 패배하자 일본군 19사단 사령부는 독립군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250여 명 규모의 월강(越江) 추격대를 편성해 간도로 침투시켰다. 소좌 야스카와(安川)가 이끄는 추격대는 니미 중대의 본부와 합류해 두만강을 건넌 뒤 7일 새벽 길림성 왕청현 봉오동 입구인 고려령(高麗嶺)에 이르렀다. 훈춘과 연길의 중간 지역인 봉오동은 최진동의 가족을 비롯해 1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독립군 근거지 중의 하나였다. 특히 봉오동은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인 계곡 지역으로, 삿갓을 뒤집어놓은 것과 같은 지형을 띠고 있었다.
일본군 추격대가 봉오동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전 정보를 입수한 독립군이 기습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독립군은 700여 명 규모로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安武)의 국민회군이 통합한 대한북로독군부군(大韓北路督軍府軍)과 이흥수(李興秀)의 신민단 소속 한 부대로 이뤄져 있었다. 독립군 연합부대는 골짜기 입구에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한 분대를 배치하고, 나머지는 모두 골짜기를 포위한 채 매복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완전히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자, 독립군은 홍범도의 공격 신호에 따라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기관총으로 응사하면서 격렬히 저항했으나 이미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독립군을 당해 내지 못하고 이날 오후 퇴각하였다. 봉오동 전투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하고, 20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반면 독립군에서는 전사자 4명, 중상자 2명에 그쳤다. 지형을 이용한 주도면밀한 전술과 연합부대의 일사불란한 대응이 일군 대승이었다.
봉오동 전투 이후 일제는 간도 지역의 독립군을 아예 소탕하기 위해 1920년 10월 2일 훈춘 사건을 꾸몄다. 그해 8월 작성한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 계획’이라는 대규모 토벌 작전에 따른 것이었다. 훈춘 사건은 일제가 중국 마적(馬賊)을 매수해 무기를 마련해 주고, 훈춘의 민가와 일본 영사관 분관 등을 습격하게 해 일본인 13명, 한국인 순사 1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일제는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중국에 대해 “피해 보상을 하지 않으면, 일본군을 간도에 투입해 마적단을 토벌하겠다.”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면서 일제는 “마적단에는 조선인과 러시아 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포함돼 있다.”라며 중국을 압박했다. 중국 영토 안으로 대대적인 병력을 투입할 계획을 미리 세워놓고, 중국이 이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약점을 잡으려는 의도였다. 일제는 중국의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대규모의 군대를 간도 지역으로 침입시켰다. 그 병력은 조선군 19사단 주력 부대와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 북만주 파견군, 관동군을 합친 것으로 2만 명에 가까웠다. 이들은 서북간도의 독립군을 목표 삼아 사방으로 포위 작전에 들어갔다.
독립군은 일제의 토벌 작전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중국군이 일제의 강요로 토벌 작전에 참여하게 됐다는 정보를 입수하면서다. 독립군은 우선 중국군과 협상하여 피전(避戰)을 약속한 뒤, 8월 하순부터 각 부대가 안도현 방면의 백두산 기슭을 향해 근거지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대규모의 일본군과 정면 승부를 벌이면 간도 지역 한인들이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그 이전부터 독립군들이 마련해 놓은 대비책이었다. 이에 따라 연길현 명월구에 주둔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시작으로 의란구에 있던 안무의 국민회군, 봉오동에 위치한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등이 속속 이동했고, 왕청현 서대파(西大坡)에 근거지를 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사관연성소 졸업식 일정 때문에 다소 늦게 합류했다.
이로써 각지에 산재한 독립군은 10월 중순 안도현과 접경인 화룡현 2도구(道溝)와 3도구에 집결하였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3도구에 위치했고,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나머지 독립군 부대들은 2도구에 자리 잡았다.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10월 21일 삼도구 청산리 골짜기의 백운평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패퇴시킨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26일 새벽까지 엿새간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를 말한다.
대규모의 독립군이 한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일본군은 아즈마(東) 지대 5,000명의 병력을 3도구를 공격할 야마다(山田) 지대와 2도구를 공격할 아즈마 지대 주력 부대로 나눠 독립군 집결지로 보냈다. 이렇게 하여 10월 21일 야마다 지대의 전위부대인 소좌 야스카와가 이끄는 1개 중대가 백운평 쪽으로 밀어닥쳤다.
당시 독립군은 일본군이 집결지를 공격하려 한다는 첩보를 미리 입수했고, 이에 따라 김좌진은 골짜기 통로의 좌우 산허리와 산기슭 등에 북로군정서 독립군 600여 명을 매복시켜 둔 상태였다. 이를 알 리 없는 일본군 전위부대가 골짜기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자, 독립군은 김좌진의 명령에 따라 일시에 기습 공격을 했다. 600여 정의 소총과 4정의 기관총, 2문의 박격포를 앞세운 독립군의 공격에 일본군 200여 명은 20분 남짓 만에 거의 전멸했다. 이들은 독립군이 어디에 은폐해 있는지를 알지 못해 제대로 싸워 볼 수도 없었다.
독립군에서는 20여 명이 희생됐을 뿐이다. 뒤이어 골짜기에 도착한 야다마 지대 주력 부대도 결사 응전했으나, 절벽 곳곳에 매복한 독립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300명의 전사자만 낸 채 숙영지로 패주했다. 이것이 청산리 대첩 가운데 첫 번째 벌어진 백운평 전투다.
김좌진 장군
청산리 대첩을 총지휘했던 독립군 북로군정서의 우두머리였던 김좌진 장군의 흉상이다.
두 번째 전투는 2도구의 완루구에서 21일 늦은 오후부터 22일 새벽까지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 연합부대와 아즈마 지대 주력 부대 사이에 벌어졌다. 완루구 전투에서도 홍범도의 철저한 매복 작전에 일본군은 400명의 전사자를 내고 물러났다.
이어 독립군은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천보산, 고동하곡 등지에서 잇따라 일제의 토벌군을 무찔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표에 따르면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은 1,200명이 전사하고, 2,100명이 부상했다. 독립군 전사자는 130명, 부상자는 220여 명이었다. 항일 무장 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최대의 승첩(勝捷)이었다.
일제는 그 보복으로 서북간도의 한인을 학살하고 한인 사회를 초토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10월 말, 일본군은 용정촌 장암동에서 40대 이상 남성 주민 33명을 포박한 채로 교회당 안에 몰아넣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으며,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을 칼로 찔러 몰살시켰다. 5~6일 후 일본군은 만행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다시 마을로 가서 가족들에게 시신을 한곳에 모으게 한 뒤, 시신 위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이처럼 일본군은 10월부터 2개월간 서북간도 8개 현에서 3,600여 명의 한인을 살해하고 170명을 체포했으며, 부녀자 70여 명을 강간했다.
이들은 또 가옥 3,200채와 학교 41곳, 교회 16곳을 불태웠다. 이를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 학살 사건이라고 부른다.
대전자령대첩
1933년 6월 28일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의 연합부대는 노송령(老松嶺)을 거쳐 진군하였는데 이때 요녕성 무순시(撫順市) 인근의 대전자(大甸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독립군 연합군을 공격하려고 접근해오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연합군은 일본군을 맞아 섬멸시키기로 하고 대전자에서 5리지점에 있는 노모제하(老母諸河)에 부대를 주둔시켰다. 연합군은 일본군이 1933년 7월 3일 대전자령을 통과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7월 2일 오후 6시까지 대전자령의 요지에 병력을 배치 완료하였다.
이 대전자령의 지형은 Z자로 된 험준한 고개인데 길이가 20리나 되는 골짜기가 있으며 그 양편에는 높이가 수백 미터가 되는 절벽이 솟아있는 심산의 밀림지대였다. 이곳에 배치된 우군 병력은 한국 독립군이 2천 5백명, 중국길림구국군이 6천명인데 한국독립군 전원과 길림구국군 2천이 전위부대로 편성되었으며 공격의 주동은 역시 한국 독립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한·중연합군의 매복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일본군은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듯이 꽃을 꺾어들고 노래를 부르며 행군을 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대전자령을 반쯤 넘어 행렬의 끝이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한중연합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일본군들은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극소수를 제외하고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이 대전자 전투는 한국독립군의 완전한 승리였으며 항일전투사상 특기할 만한 대승리였다. 이 전투에서 군복 3천벌, 박격포 10문, 소총 1천 5백정 대포 3문 등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