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1편 (근대 축구의 소개)에 이은 2편입니다.
1편에서 1882년 한국에 처음 근대축구가 소개되었던 일화를 말씀드렸는데요. 1편에서 언급했다시피 당시 영국인들은 근대 축구를 한국인들에게 소개해주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축구는 어떻게 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쳐주지는 않은채 사라졌습니다. 이 때문에 본격적으로 한국땅에 축구가 도입되고 또한 보급되어 각 지역마다 축구팀이 생겨나는건 1900년대 이후 외국인 교사들과 그 밑에서 축구를 배운 개화 지식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2편에서는 이들에 대한 얘기를 해보도록 하죠.
1895년 갑오개혁 이래 조선정부는 근대화교육기관을 양성하면서 외국인교사들을 하나둘 초빙하기에 이릅니다. 또한 비슷한 시기 외국인 선교사들이 배재학당 (오늘날의 배재고등학교) 등 교육기관을 세우게 되지요. 이들 외국인교사와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에게 근대학문 보급과 더불어 서양체육을 가르치게 됩니다. 특히 조선정부가 운영하는 외국어학교에 부임했던 프랑스인 마텔씨는 축구를 비롯해 육상, 맨손체조 등을 한국인 학생들에게 지도했는데요. 이 때 마텔씨가 가르친 것 중 가장 호응도가 높은 종목은 단연 축구였다고 합니다. 맨손체조와 육상과 같은 운동은 지도자가 일일이 지도해야하고 또한 반복하다 보면 지루해지는 반면에, 축구는 공과 공터만 있으면 누구든 즐겨 배우고 또한 수십명이 어울릴 수 있으니 그 장점이 컸기 때문이라네요.
이처럼 외국인교사들과 그 아래에서 근대학문을 배운 젊은 한국인 청년들이 축구를 전파한 결과, 축구는 근대교육기관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가게됩니다. 1902년 배재학당에서 축구반이 편성된 것을 시작으로, 동년인 1902년 경신학교 (오늘날의 경신고등학교), 1906년 보성학교 (오늘날의 고려대학교), 1907년 휘문의숙 (오늘날의 휘문고등학교) 이 잇달아 축구를 시작하기에 이르죠. 1907년부터는 평양신학교에 축구팀이 창단된 것을 시작으로 평양, 부산, 대구 등지의 근대교육기관들에도 축구반이 편성되어 축구는 바야흐로 전국구 스포츠로 발돋움하기에 이릅니다.
이 때 축구반은 지금처럼 엘리트 축구인 양성소라기 보다 취미반 운영에 가까웠으며, 매년 4월 내지 9월에 개최된 학교연합운동회에서 각 학교를 대표해 축구반원들끼리 축구경기를 벌이곤 했습니다. 경기는 서울의 경우, 주로 삼선평 공터 (오늘날의 성북구 한성대입구역에 위치한 삼선교), 보성학교 운동장 (오늘날의 조계사 자리), 장충단 공원, 구 훈련원터 (오늘날 동대문운동장 근처) 에서 벌어졌다고 하네요.
당시 축구는 소위 동네축구의 전형으로, 상대팀과 머릿수만 맞으면 3~4명이든 수십명이든 참가할 수 있었고, 골을 넣으면 득점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룰도 일체 없었기에 매우 거친 플레이가 난무했습니다. 특히 제대로된 골대가 없던 형국이라 골이 들어갔네 마네로 말다툼을 벌이다 단체 패싸움으로 번지는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당시까지 축구는 제대로된 경기장, 심판, 규칙없이 공과 사람만 존재하는 과도기적 형태를 띄고 있었습니다. 요컨대 축구부는 늘어나고 있었지만, 이들을 관리하고 지도할 룰이 없는 상태였지요. 때문에 이후 한국축구는 룰을 만들어줄 심판과 축구와 관련한 일련의 활동을 담당할 축구협회, 그리고 이들의 지도하에 벌어지는 공식 대회를 출범시키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편에서 계속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