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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와 중국은 환관이 있는데 일본에는 없다. 이는 중국에서 환관이 탄생한 사정과 배경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근본적으로 환관의 기원은 이민족을 정복해 포로로 잡고 그 남성들을 거세해 노예로 쓰기 시작한 데서 유래한다. 하지만 고대부터 중세에 걸쳐 일본은 이민족과 큰 전쟁을 한 일도 없으며, 정복한 일도 없다. 그러한 섬나라의 특성이 있었기 때문에 환관은 생겨나지 않았다고 보면 맞다. 아무튼 환관이 명나라에서는 막중한 임무를 담당했다. 홍치제는 환관이 몰래 양육을 하였다. 6세 때야 비로소 부친을 대면할 수 있었으며, 이복형이 요절(夭折)한 관계로 황태자로 책봉될 수 있었다. 그러나 황태자 되어서도 늘 만귀비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힘들게 생활해야 했다. 흉악한 만귀비의 위협으로 인해 극적인 유년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홍치제는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것은 홍치제의 영민한 성품이기도 하지만 교육의 힘이기도 했다.
그런 그는 즉위하고 우연한 기회에 환관 이광의 치부책을 보았다고 한다. 치부 책에는 문무 대관들이 준 황미, 백미 각 천백 석을 주었다고 적혀 있었다. 홍치제는 '이광은 어째서 그렇게 쌀을 많이 먹는가?' 라고 묻자 한 신하가 '그것은 은어입니다. 황미는 황금, 백미는 백은을 의미합니다' 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명사(明史)에 실려 있다. 아마 황제는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다. 효종 홍치제의 시대는 비교적 평온했다. 홍치중흥이라 불리울만큼 정국이 안정되었다. 이는 환관들을 잘 다스렸다는 이야기다. 중국 역대 황제들의 골치였던 북쪽 기마민족들과 대외관계에서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북방의 문제가 사라지면서 안정적이고 평온한 시대가 이어졌다. 또 내부적으로는 환관들의 전횡을 견제하고 간신들을 낙향시켰으며, 커다란 토목공사가 없어서 백성들이 비교적 편안한 시기였다고 평가를 한다.
그러니까 최부는 환관들을 견제하고 간신들을 낙향했다는 명서 구절에 나온 역사의 현장을 바로 지켜 본 셈이다. 홍치제가 이렇게 된 뒤에는 충신이 있었다. 천하궁각노(天下穷阁老; 천하에 둘도 없는 가난한 재상)라 불렸던 왕오는 환관들이 황제를 유흥으로 이끌자, 주 문왕(周 文王)은 사냥과 오락을 삼가야 한다고 간곡히 청하엿고 홍치제는 이를 따랐다. 하지만 충신이 있으면 무엇하겠는가. 군주가 말을 들어야지. 홍치제의 아들 무종 정덕제는 황제가 된 뒤에 미녀를 후궁으로 삼아 쾌락을 즐기는 음탕한 생활에 빠졌을 뿐만아니라 환관을 사랑하고 라마교를 광신했으며, 유희를 좋아하여 국비를 낭비하였다.
아마 왕양명(王陽明)이란 이름을 들어본 사람들도 있겠다 싶은데 그는 철학자이자 관리자로서 그의 사상과 철학은 2천년 중국 철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때 황제가 바로 정덕제 주후조. 주후조는 `8호`라 불리는 여덟 환관에 둘러싸여 향락에 빠진 채 정사를 도외시했다. 35세의
병주부사 왕양명은 격무 중에도 항상 강학을 열어 후진 양성에 주력하면서 계속되는 황제의 기행에 8호를 내쫓아야 한다고 앞장서서 주장한다. 그러나
주후조는 충언을 올리는 대신들을 파직하는 등 군신 간의 소통(疏通)을 스스로 차단했다. 그 상황에서 왕양명은 36세 때 신상에 중대한 사건을
맞는다. 그는 당시 큰 권력을 쥐고 있던 부패한 환관(宦官) 유근(劉瑾)을 탄핵하다가 투옥된 한 검열관을 옹호했다. 이 때문에 자신도 40대의
곤장을 맞고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혔다가 귀주성(貴州省) 역승(驛丞)으로 좌천되는 등 질곡(桎梏)의 세월을 보냈다.
일당 백이란 말이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고구려 때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믈 잘 안다. 조선이 어쩌거나 6백년 가까이 존립한 데는 바로 이런 의식에서 비롯하지 않은가 싶다. 그 다음 대목을 보면 고개가 바로 끄덕여진다. 3월22일 홍제현을 지나 3월23일 정해현을 지날 때였다. 최부는 한 광경을 보자 바로 이거다 싶었다. 그는 부영에게 대뜸 수차를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고 청을 한다. 그는 지난 번 소흥부를 지날 때 호수 언덕에서 수차를 돌려 힘은 작게 쓰고 물은 많이 퍼 올리는 것을 보고 가뭄에 쓰면 그만이다 싶어 꼭 챙겨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부영이 자기는 잘 모른다고 말을 하자 또 다시 최부는 간청을 한다. 최부의 말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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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똑같은 생각을 했을까 싶은데 이것이 바로 이용후생이고 국가를 튼튼히 하는 기본이 아닌가 싶다. 애국자, 일당 백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느껴지는 마음 뿌듯한 대목이다. 3월24일 천진위성에 이르렀고 3월25일 하서역에 닿았는데 이곳에서 부영과 헤어진다. 최부로서는 실로 아쉬운 부영이 아닐 수 없다. 최부와 헤어지는 이유도 상세하고 당부도 아주 친절하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겨싣는다. 미리 말을 하는 것인데 최부와 부영은 4월 2일 다시 만난다. 회동관 문을 나오다가 부영을 만나 옥하교 가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적고 있다. 그 이후는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마 그들은 나름 정도 들어 옥하교에서 짧은 인연이지만 석별의 아쉬움을 나누었을 테다. 왕에게 보고하는 글에 차마 눈물을 흘렸다는 둥의 감정 섞인 말을 써 놓을 수는 없으니 그는 옥하교 가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가름했을 것이다.
<원래 당신들은 4월1일까지가 시한입니다. 내가 표문을 받들고 와서 시한에 맞추지 못할까 하여 이 역에서 역마를 타고 먼저 경사로 가겠습니다. 훗날에 병부앞에서 만날 때 읍례를 하여 서로 아는 내색을 해서는 안 되니 이는 새 천자의 법도가 엄숙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