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45년 6월 2일 중국 강남의 강음(江陰 현재 중국 장쑤성 우시시의 행정구역인 장인시江阴市, 江陰市)현의 주민들은 그들의 머리카락을 만주족의 변발처럼 깎으라는 청나라의 요구에 거세게 저항하고, 결코 변발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청나라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1645년 6월 21일, 청나라 황족이자 장군인 애신각라박락(爱新觉罗博洛 1613~1652)은 청나라에 항복한 명나라 장군인 유량좌(劉良佐 ?~1667년)에게 대군을 이끌고 강음성을 포위하라고 명했다.
1645년 6월 24일, 유량좌는 항복 편지를 써서 동쪽에서 성 안으로 쏘아 보냈다. 강음성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숙고 끝에 항복을 거부하는 답장을 보냈다. 설득이 통하지 않자, 유량좌는 성 밖의 의병들을 소탕하기 시작했고, 성 안의 세력이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도록 차단하려 했다.
1645년 7월 1일,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다. 성 안은 견고한 방어로 둘러싸여 있었고, 청나라 군대는 화살을 퍼부었다. 성벽 위의 병사들은 냄비 뚜껑으로 화살을 막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받아냈는데, 하루에 300~400발(일각에서는 30만~40만 발이라고 함)의 화살이 날아와 냄비에 꽂혔다고 전해진다.
장인의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지자, 저항을 이끌었던 강음현의 주부(主簿)인 진명우(陳明遇 ?~1645년)는 자신의 군사 조직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는 현명하고 용맹했던 전직 전사(典史)였던 염응원(閻應元 ?~1645)을 떠올려, 은퇴한 염응원을 성 방어 사령관으로 추천하려 했다.
그러나 수비대 사령관 고원비(顧元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계획은 무산되었다. 7월 5일 방어전에서 고원비는 성벽을 넘어 활을 쏘았지만, 화살은 번번이 빗나가 땅에 떨어져 의심을 샀다. 이에 수비대는 고원비를 사로잡아 그의 거처를 수색했고, 청나라 문서 한 장을 발견했다. 고원비와 그의 공범 40명은 처형되었고, 이로써 청나라와 내통하던 자들은 죽었다.
진명우는 고원비가 처형되자 16명의 부하들을 밤중에 성을 나가서 염응원의 거처로 보내 은둔 생활을 끝내고 나오도록 했다. 염응원은 "나를 따를 수 있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대들을 이끌지 않겠소."라고 말했다. 부하들은 "어떻게 감히 당신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9일째 되는 날, 염응원은 자신을 따르는 젊은이 600명을 이끌고 강음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칠리사를 지날 때, 벽에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시를 썼다. 성에 들어간 염응원은 곧바로 성 전체 주민을 샅샅이 조사하여 건장한 남자와 노인, 아이들을 구분했다. 그는 젊고 건장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민병대를 조직했고, 20만 명이 넘는 지역 병사들과 함께 성벽을 교대로 지키도록 했다. 각 성벽의 톱니 모양 부분에는 10명씩 배치하여 정해진 시간에 맞춰 교대 근무를 하도록 했다.
그는 진명우와 함께 밤낮으로 네 개의 성문을 순찰하며 성 안의 모든 행인을 엄격하게 심문하고 청나라와 내통하는 반역자를 색출했다. 군수품과 물자 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염응원은 지주와 평민들과 협의하여 재정 관리에 능숙한 사람들을 임명해 성 안의 공공 및 민간 자원을 분류하고 수집하여 통일적으로 배분하고 사용하도록 했다. 염응원의 지휘 아래 모든 구성원의 재능은 신속하게 최대한 활용되었고, 자원은 효율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업무가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7월 11일, 청나라 군대는 염응원이 지키고 있던 북문을 공격했다. 성벽에서 화살과 돌이 쏟아져 내렸고, 청나라 군대는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총사령관 유량좌는 격분하여 아홉 명의 장수에게 먼저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오르라고 명령했다. 성벽 위의 병사들은 창을 꽂아 넣었고, 다섯 명의 장수가 전사하고 네 명이 부상을 입었다. 어떤 장수는 화살에 세 발씩 맞았고, 어떤 장수는 목이 잘렸으며, 어떤 장수는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고, 어떤 장수는 불화살에 맞아 불에 타 죽었다. 유량좌는 더욱 격노하여 10개 대대에서 용맹한 장수 몇 명을 선발하고, 3만 명의 보병에게 사다리 열 개를 만들어 다음 날 열 군데에서 성벽을 내려오라고 명령했다. 도망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처형될 것이라는 엄포도 덧붙였다.
다음 날인 7월 12일, 청나라 군대는 다시 북문을 공격했다. 성 밖에서는 대포를 쏘고 함성을 질렀다. 3만 명의 병사들은 열 개의 부교를 건설하고 동시에 외곽 해자를 건너 열 군데의 공성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염응원은 성벽 위의 병사들에게 벽돌과 돌을 던지고 창으로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한동안 돌이 날아다니고 대포가 빗발치며 양측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 보고 자신감에 찬 어느 만주족 장군은 갑옷을 세 겹으로 껴입고 허리에 두 자루, 등에 두 자루의 칼을 차고 양손에 두 자루의 칼을 들었다. 그는 직접 공성 사다리를 타고 성벽 위로 올라가 칼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성벽 위의 수비병들은 그 만주족 장군을 향해 창을 찔렀지만 갑옷이 두꺼워서 뚫을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얼굴을 찔러라!"라고 외치자 군중은 그의 얼굴을 찌르기 시작했다. 탕(湯)이라는 소년이 쇠낫을 휘둘러 그의 목을 사정없이 베었다. 요이(姚邇)이라는 대나무 세공인이 만주족 장군의 목을 베었고, 그의 시신은 땅에 쓰러졌다. 청나라 병사들이 시신을 수습하러 달려들었고, 성벽에서는 북과 징을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벽돌과 돌, 작은 화살들이 쏟아져 내려 천 명이 넘는 청나라 병사들이 죽거나 다쳤다.
유량좌는 병사들에게 만주족 장군의 목을 내놓으라고 명령했지만, 염응원은 거부했다. 유량좌는 은으로 목을 되갚겠다고 제안하며, 은을 은칼집에 넣어 성 안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성벽 아래에서 "장군의 목을 돌려주시오!"라고 외치라고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염응원은 노란 개의 머리를 갈대로 싸서 던져버리고, 만주족 장군의 목은 성벽에 매달아 두었다. 유량좌는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성벽 아래에서 간절히 애원하여 마침내 목을 내려놓았다. 청나라 병사들은 목을 되찾아 몸에 다시 꿰매 붙이고 사흘 동안 상복을 입었다.
염응원은 북쪽 성벽에 대한 공격을 격퇴했지만, 청나라 군대가 곧 더 큰 규모의 공격을 감행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적극적으로 방어 도구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청양 출신의 '석궁의 왕' 황명강(黄鳴崗)을 비롯한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성 안으로 들여보내 천 정의 소형 석궁과 수만 발의 화살을 만들어 방어하는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또한 그는 화약을 화살촉에 발라서 사람한테 맞으면 즉시 죽도록 했다. 석궁은 길이가 30cm가 넘었고 화살은 13cm 길이로 150m 거리에서도 목표물을 맞출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내화벽돌과 목포(나무로 만든 대포)를 만들도록 명령했다. 내화벽돌은 폭이 7~10cm 정도였으며 사람이 닿으면 불이 붙었다. 목포는 은색 칼집처럼 생겼으며 길이 105cm, 폭 5~7.5cm의 나무로 만들어졌고 안에 화약이 숨겨져 있었다. 적군이 도착하면, 그들을 던져 넣으면 장치가 폭발하고 나무 껍질이 산산조각 나면서 쇠못이 튀어나와 닿는 자는 누구든 죽게 될 것이었다.
염응원은 또한 여러 개의 갈고리가 달린 쇠붙이와 뒤쪽에 면 로프를 묶어 만든 석궁을 직접 제작했다. 이것을 던져 적을 낚아채 목을 베는 방식이었다. 그는 또한 옛 방식을 모방하여 화염구와 로켓을 만들었는데, 이 모든 것이 정교하고 기발했다. 따라서 청나라 군대는 수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을 보기만 해도 두려움에 떨며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어 만주족 장군들조차 그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질렸고, 매번 포위 공격에서 살아남은 것을 자축했다.
유량좌는 성을 함락시키는 데 실패하자, 직접 노래까지 지어서 다시 한번 백성들을 설득해 항복을 권유하려 했다. 염응원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유량좌는 성 밖에 천막을 치고 장기전에 대비했다.
7월 15일, 유량좌가 지휘하는 청나라 군대는 성의 북동쪽을 공격했다. 유량좌는 남서쪽에서 포격을 가하고 북동쪽에서 공격을 감행하여 성벽을 무너뜨리도록 명령했다.
그러자 강음성 안에서는 화염구와 화살로 저항했다. 맹공격을 견디지 못한 청나라 군대는 후퇴를 시도했지만, 유량좌는 후퇴를 중단시켰다. 염응원은 계속해서 성벽에서 돌과 벽돌을 던지도록 명령했다. 청나라 군대는 피할 수 없어 수백 명이 전사했다. 유량좌는 수치심과 공포에 휩싸였다. 그는 천막을 3겹으로 치고 공격하지 않고 방어에 나섰다. 천막 안에는 아홉 개의 들보와 여덟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었는데, 화살과 돌멩이가 튕겨나가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자 염응원은 사람의 배설물과 오동나무 기름을 섞어 끓여 청나라 병사들에게 부으라고 명령했다. 소가죽은 뜨겁게 달궈졌고, 살은 썩어 문드러졌다. 불에 타지 않은 청나라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뿔뿔이 흩어졌다. 성 안에 있던 병사들은 석궁으로 도망치는 청나라 병사들을 쏘았고, 잡힌 병사들은 성 안으로 끌려와 참수당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청나라 병사들은 혼란에 빠져 도망쳤다. 더 이상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유량좌는 강음성 주민들의 저항을 피해 진영을 옮기라고 명령했다.
그러는 사이, 강음성 주민들은 사방의 항청 세력들한테 도움을 요청했다. 황비(黃蜚 ?~1645년)와 오지규(吳之葵)는 군대를 이끌고 태호로 향했으나, 청나라 왕자 박락의 군대한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염응원의 인품을 존경했던 수적 고삼마자(顧三麻子)는 함대를 이끌고 강음성을 도우러 왔지만, 사흘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패배하고 돌아갔다. 의양왕(義陽王)도 강음을 도우러 왔으나 사산(砂山)에서 패배했다. 김광(金鑛)이라는 수재(秀才 명나라 시절, 관리가 되기 위한 첫 단계인 '향시-향촌 시험'에 합격해 현縣의 학교에 입학할 자격을 얻은 사람-생원을 일컫는 공식적인 명칭)은 400명이 넘는 의병을 모아 강음성을 도우러 왔지만, 주강 부근에서 유량좌의 3천 기병에게 전멸당했다.
이리하여 강음성은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고립되었다. 그럼에도 유량좌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다시 공격하지 않고 밤새 강음성의 북쪽 성벽에 포격을 가했다. 포격으로 성벽은 몇 미터나 무너져 내렸다. 염응원은 석공들에게 성벽을 재건하라고 명령했지만, 석공들은 두려움에 떨며 망설였다. 염응원이 진심을 담아 열정적으로 이야기하자 석공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자 그들은 목숨을 걸고 성벽에 올라가 흉벽을 말끔히 보수하여 원래대로 성벽은 단단해졌다.
7월 16일, 청나라 군대가 항복을 권유하는 틈을 타 염응원은 성에서 노인을 보내 "항복 예물"을 전달하는 척하면서 몰래 화약을 청나라 진영에 설치하여 2천 명이 넘는 청나라 병사를 죽였다.
7월 17일 밤, 염응원은 용맹한 병사 천 명을 선발하여 남문을 통해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게 했다. 도끼, 단검, 또는 장대를 든 병사들은 청나라 군대를 습격하여 천 명이 넘는 적군에게 부상을 입혔다. 다른 군대가 지원군으로 도착했을 때는 염응원의 군대는 이미 성으로 돌아간 후였다. 이 전투 후, 유량좌는 다시 후퇴하여 십방암(十方庵 암자. 큰 절에 속해있는 규모가 작은 절을 가리키는 말)에 진을 쳤다.
7월 18일, 유량좌는 십방암의 승려들에게 성벽 앞에서 무릎 꿇고 울라고 명령하고는, 항복의 장단점을 설명하며 강음의 병사와 백성들에게 어서 항복할 것을 간곡히 호소했다. 성 안의 백성들은 모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고, 유량좌에게 어서 떠나라고 재촉했다. 그날 저녁, 승려들은 다시 항복을 설득하러 왔지만, 군중들에게 쫓겨났다.
7월 19일, 유량좌는 말을 타고 성벽으로 가서 염응원을 설득하며 말했다. "홍광제(남명 정권의 첫 번째 황제, 1645년 청군에게 사로잡혀 북경으로 끌려가 1646년 처형당했다)은 이미 북쪽으로 갔고, 강남 전체가 항복했다. 자네가 불운을 기회로 바꿀 수 있다면, 자네의 지위는 분명 나보다 낮지 않을 것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고생하느냐?"
염응원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강음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삼백 년을 살아오며 나라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있는데, 결코 항복할 수는 없습니다. 저 염응원은 명나라의 관리로서 대의를 깊이 생각하며 결코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러는 장군님이야말로 대군을 지휘하면서도 중원을 수복하러 진격하지도, 강동을 지키러 후퇴하지도 못하는데 어찌 충신인 강동 백성들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유량좌는 크게 부끄러워하며 청나라 조정의 칙령을 보여주었다. 칙령에는 강음 사람들에게 사면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염응원은 크게 외쳤다. "당신은 항복하지만, 나는 항복하지 않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폭죽이 일제히 터졌고, 유량좌는 말을 타고 떠나며 한숨을 쉬었다. "강음 사람들은 이제 구제불능이다!"
청나라 황족인 도도는 강음성이 오랫동안 포위 공격을 받았지만 함락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그는 먼저 청나라에 항복한 명나라 장군인 공유덕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공격을 지원하게 한 후, 청나라 황족들인 박락(볼로)과 니칸을 보내 대포를 갖춘 청나라 군대를 이끌고 강음을 공격하게 했다.
이때 박락은 2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강음 성벽으로 향했다. 그는 한때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했던 유량좌가 강음처럼 작은 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한 것을 보고 그를 꾸짖었다. 박락은 산에 올라 강음성의 방어 시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이 성은 남쪽과 북쪽 끝이 있는 배 모양이다. 북쪽이나 남쪽에서 공격해서는 함락시킬 수 없다. 오직 가운데를 공격해야만 함락시킬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황비와 오지규를 묶어 성벽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황비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라고 지시했다. 황비는 "성 안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써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오지규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어 염응원에게 항복을 간청했다. 그의 말에는 슬픔과 비통함이 가득했다. 염응원은 그를 꾸짖었다. "포로가 된 신하는 어서 죽어야 한다. 왜 괜히 실랑이를 벌이느냐?" 오지규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황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염응원이 물러서지 않자 박락은 총공세를 개시하여 군대를 여러 곳으로 나누어 각 마을에서 들어오는 증원군을 차단했다. 그런 다음 대나무 우리에 대포를 설치하고 북과 나팔 소리를 울리며, 포수들은 붉은색 옷에 화려한 장식을 하고 진격했다. 그는 사흘 안에 성을 함락시키겠다고 공언했다. 7월 20일부터 27일까지 청나라는 성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염응원은 방어선을 지휘하며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벌였고, 결국 강음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8월 초, 밤낮으로 성을 지키던 강음성의 민병대는 지쳐 쓰러지기 시작했고, 일부는 항복하기 시작했다. 청나라 병사들은 성 밖 곳곳에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며 강음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고, 청나라 군대에 항복하려고 성밖으로 빠져나가 머리를 삭발한 자들은 가까운 친척이라 할지라도 성벽 위의 병사들에게 욕설을 퍼부어야했다.
강음성의 방어가 허술해진 것을 본 염응원은 백성들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모아 성벽 아래로 던져 적을 유인했다. 청나라 병사들은 크게 기뻐하며 유량좌에게 보고했다. 유량좌는 "가서 수비대가 정말 머리를 삭발했는지 확인해 보아라."라고 말했다. 조사 결과, 유량좌는 그것이 염응원이 항복을 가장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오랜 포위 공격에 지친 박락은 다시 한번 강음성 주민들한테 항복을 설득하려 애썼다. 명나라 부흥의 깃발을 내리고 청나라의 깃발을 네 개의 성문에 게양하면, 주동자 몇 명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심지어 주동자들이 삭발을 거부하면 군대를 철수시키겠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염응원은 박락의 속임수를 간파하고 반박했다. "나만 죽인다고? 난 아무 죄도 없는데 왜 내가 죽어야 하느냐!"
논쟁은 결론 없이 끝났다. 박락은 다시 청나라의 깃발을 네 개의 성문에 게양하면 즉시 군대를 철수시키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염응원은 함정임을 알고 여전히 거부했다.
한편, 청나라에 항복한 명나라 장군인 왕해방(王海防)은 강변에 도착해 소와 양을 도살하며, 강음성 주민들이 항복한 후에는 살육과 약탈을 금지하겠다고 장수들과 맹세했다. 왕해방은 강음성의 주민들한테 항복하도록 설득하겠다고 나섰지만, 아무도 그의 제안에 응답하지 않았다.
이후 청나라 황제인 순치제를 대신해 섭정을 맡고 있던 청나라 황족인 도르곤이 사면령을 내리자, 박락은 성 안으로 화살을 쏘아 올리며 성은 이미 함락되었으니 방어는 무의미하다고 선언했다. 이에 염응원은 사람을 시켜 편지 말미에 "포격을 당하더라도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라는 문구를 덧붙여 청나라 군대를 향해 쏘아 올렸다. 청나라 군대가 여러 차례 항복을 권유하자, 성문 세 곳의 병사들이 망설이기 시작했지만, 염응원이 북문을 지키며 죽을 때까지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결국 그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오랜 기간 포위 공격을 받은 강음성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고, 전투력은 날마다 약해졌으며, 석회 재고가 바닥나 무너진 성벽을 수리하는 작업이 불가능해졌다. 쌀 또한 부족해 앞으로 닥칠 쌀 부족에 대비해 백성들에게 징발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염응원은 이틀에 한 번씩 쌀을 배급하도록 명했고, 미리 배급하는 것을 금지했다.
중추절 무렵, 백성들은 항아리와 잔을 들고 성벽으로 나와 마음껏 술을 마셨다. 허용(許用)을 비롯한 선비들은 초나라 노래를 모방한 '오경 곡'을 지었고, 숙련된 가수들은 높은 곳에서 이 노래를 생, 피리, 소, 북 반주에 맞춰 불렀다. 그때 하늘은 맑았고, 밝은 달이 높이 떠 있었으며, 들판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칼과 창 소리는 멈췄지만, 성 서쪽 적의 망루에서는 석궁 소리, 북소리, 얼후 소리가 울려 퍼지며 애절한 노래가 하늘에 메아리쳤다.
청나라 병사들은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앞으로 달려나갔다. 어떤 이들은 저주를 퍼붓고, 어떤 이들은 애통해하며, 심지어는 울부짖는 이들도 있었다. 노래는 다음과 같았다.
"의흥(宜興 현재 중국 장쑤성 우시 시의 행정구역인 이싱시) 사람들은 총 한 자루, 무석(无錫 중국 장쑤성 남부의 도시인 우시시) 사람들은 향 한 다발, 정강(靖江 징장시는 중국 장쑤성 타이저우 시의 현급 행정구역) 사람들은 해변에 무릎 꿇고, 상주(常州 중국 짱수성 남부의 도시인 창저우시) 사람들은 딸과 어머니를 바치고, 강음 사람들은 80일 넘게 싸우다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리라."
다른 노래들도 많지만, 의미는 대략 같다. 유량좌는 병사들에게 항복 연설을 지으라고 명령했고, 병사들은 함께 그 연설을 불렀다. 유량좌와 그의 참모들은 천막에서 술을 마셨다. 곧이어 성벽에서 대포와 화살이 발사되었고, 군은 흩어졌다.
8월 21일, 박락은 수백 명의 병력에게 200문이 넘는 대포를 이동시켜 성벽의 북동쪽 부분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대포는 13겹의 성문과 여러 겹의 나무를 뚫고 수 미터 깊이까지 파고들었다.
그날은 폭우가 쏟아졌고, 대포에는 포탄 장전을 위한 소가죽 천막이 설치되어 있어 성벽은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 적의 맹렬한 포격 때문에 성벽 위의 병사들은 포격이 보이면 성벽 뒤로 숨었다. 포격이 잦아들면 다시 성벽 위로 올라왔다. 이를 본 청나라 군대는 일부러 공포탄을 쏘고 연막탄만 피워 하늘을 가렸다. 시야가 극도로 나빠진 것이다. 수비대는 천둥 같은 대포 소리만 듣고 청나라 군대가 빨리 들어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해자를 건너 연막 속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허를 찔린 수비대는 무너져 내렸고, 결국 강음성은 함락되었다. 청나라 군대가 성벽에 이르렀을 때, 민병대는 그들을 향해 진형을 갖추었다. 매복을 두려워한 청나라 군대는 반나절 동안 공격을 망설였다. 해가 질 무렵, 성 안은 소란스러워졌고 민병대는 흩어졌다. 그제야 청나라 군대는 용기를 내어 성벽을 내려올 수 있었다.
성읍이 함락되었을 때, 염응원은 동쪽 망루에 앉아 붓을 들고 성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80일 동안 머리카락 한 올을 낭비하지 않고 1만 명의 병사가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명나라 영토 삼백리를 지켜냈다."
글씨를 다 쓴 염응원은 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전투에 나서 수많은 청나라 병사를 죽였지만, 서쪽 성문을 뚫고 나가려는 시도는 청군의 두터운 포위망에 막혀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부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백성들에게 내 죄를 대신 사과하라. 나라에 대한 나의 의무는 다했다!" 그는 단검을 뽑아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호수에 몸을 던졌다.
이때 유량좌가 군대를 이끌고 도착했다. 유량좌는 염응원과 과거 인연이 있다며 그를 산 채로 사로잡으려 했다. 이에 청나라 병사들은 염응원을 호수에서 끌어내 묶어 목숨을 살려주었다. 유량좌는 명나라 불당에 앉아 있었다. 염응원이 도착하자 유량좌는 벌떡 일어나 염응원의 등을 두드리며 울었다. 염응원이 말했다. "울 일이 뭐가 있겠는가?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으니 죽음밖에는 없다. 어서 나를 죽여라!"
현청에 앉아 있던 박락은 급히 염응원을 불러들였다. 염응원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굳건히 서서 끊임없이 저주를 퍼부었다. 그때 한 병사가 창으로 그의 정강이를 찔렀다. 염응원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박락은 그를 사찰에 감금하라고 명령했다. 그날 밤, 사찰의 승려들은 "어서 나를 죽여라!"라는 외침을 끊임없이 들었다. 새벽녘, 그는 마침내 살해당했다. 한 달 후, 그의 아들은 짚으로 덮인 관을 열고 더 값비싼 관으로 바꿔 통주에 다시 묻었는데 , 그의 시신은 마치 살아있는 듯했다.
염응원이 죽은 후, 그의 하인 열 명 이상이 남았는데, 모두 항복을 거부하다 처형당했다. 강음성의 관청에서는 남녀노소 마흔세 명이 분신자살했다. 진명우는 칼을 들고 청나라 군인들과 싸우다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는 칼을 쥔 채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벽에 기대어 숨을 거두었다. 교관 풍후돈(馮厚敦 ?~1645년)은 목을 매 자살했고, 그의 아내와 여동생은 우물에 몸을 던졌다. 허용과 그의 가족들은 분신자살했다. 선비 허왕가(許王家)가 청나라 군대에 붙잡혔을 때, 누군가 그에게 "너는 명나라 황제를 섬긴 적도 없으면서 어찌 그를 위해 죽으려 하느냐?"라고 충고했다. 허왕가(徐王家)는 “군주와 신하 사이의 의리는 누가 군림하느냐 마느냐와는 상관없소.”라고 대답했다. 청나라 군대에 사로잡힌 대부(大夫)라는 선비는 처형 직전에 “나는 미천한 사람이지만 오늘 용맹을 얻었으니, 충의와 의를 위해 죽는 것은 죽어서도 사는 것이라.”라고 한숨을 쉬었다. 그의 표정은 처형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8월 22일, 청나라 군대는 강음성 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끝까지 저항하거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먼저 죽는 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많은 여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심지어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조차 처형을 불사하고 용감하게 맞섰다. 아무도 굴복하지 않았다. 청나라 군대의 학살 이틀 후 , 백성들을 달래기 위한 포고령이 내려졌다. 그때 강음성 안에는 어른과 아이를 합쳐 53명 만이 남았다.
강음성의 학살 이후로도 강음 지역 사람들은 청나라 조정에 대해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며 청나라 관직을 맡지 않았고, 청나라가 내세우는 어떤 직책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건륭제 시대에 건륭제가 강음성에 염응원을 기리는 사찰을 세우고 강음성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부터였다.
|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6.07.23 0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