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 보아도 스님인 사람, 학성 스님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 눈이 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하며 세상일에 물 안 들고,,,“
이 글귀는 이산 혜연 선사 발원문에 나오는 것이다.
아이 때 출가한 것을 절집안에서는 보통 동진출가라고 말한다.
세속에 전혀 때묻지 않고 천진한 성품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스님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동진출가한 스님들은 대개 성품이 맑고 천진하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출가를 하면 소위 ’중물이‘ 잘 들어 수행자로서 일상 언어와 행동거지가 몸에 잘 배기 마련이다. 동진출가를 또 올깎이라고도 말하는데 우리 도반들 중엔 이런 올깎이 동진출가가 많다. 그 중에서도 천진한 성품으로는 학성 스님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학성을 처음 만난 것은 부산 금정산 범어사에서다.
나는 그 때 범어사 청풍선원에서 겨우 첫 철 안거를 겨우 지낸 신출내기 선객이었다. 도반 경선 스님과 나는 한 달 정도 만행을 다녀오고는 여름 안거도 범어사에서 보낼 양으로 해제 철을 그냥 보내고 있었다.
그 때 학성이 봄 햇살을 등에 지고 범어사를 찾아 왔다. 여름 안거를 범어사에서 보내겠다고 바랑 하나를 제법 맵시 있게 메고 찾아온 것이다.
그는 처음 보기에도 선객 물이 흠뻑 들어있었다. 나는 큰절이라야 범어사가 전부인데, 학성은 이미 해인사와 통도사 극락암 등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몇 철을 지낸 어엿한 선배 선객이었다. 그 시절 우리들, 출가의 시기도 비슷하고 세속 나이도 비슷한 또래들은 선객의 자긍심이라고 해야 할까, 도 닦는 사람의 긍지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이 대단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마음으로 도인이 다 되어 있었고, 행동거지도 도인 흉내내기에 익숙해 있었다. 그래서 또 더욱 천진하게 보이기도 했으리라.
한번은 학성과 같이 금정산 등산을 하게 되었다. 일행이 땀을 흘리며 열심히 산길을 오르고 있는데 앞서가던 학성이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있는 두꺼비 한 마리를 손으로 감싸 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아주 귀엽고 소중한 그 무엇이나 되는 듯이 바라보면서 “발보리심 하라. 발보리심 하라.“를 몇 번하고는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하던지 범접하지 못할 위엄까지 있었다.
흡사 신라시대 원효 스님의 존경을 받았던 대안 스님이 미물에게까지 자비를 베풀던 그 모습이라고나 해야 할까?
사람이란 순수하고 진실할 때 아름다워 보이는 법이다. 그리고 순진하고 진실하다는 것은 또 탐욕을 위시한 삼독심이 없는 마음일 것이다. 사심이 없는 학성의 천진한 행동은 그래서 아름답게까지 보였다.
학성 스님과 함께 통도사를 다녀온 일이 있다. 그 당시 범어사에서 통도사 가는 길이란 비포장 산골길이었다. 차가 한참 달리는데 안내양과 시골 할머니가 싸우고 있었다. 할머니는 차비를 깎아 달라고 하고 안내양은 안 된다고 했다. 그것이 결국은 욕설이 오고가는 험악한 분위로로 까지 갔다. 그러자 학성 스님이 그 할머니 차비를 대신 내주고 차장을 달랬다.
그것으로 끝냈으면 되었을 것을 학성은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몽땅 다 털어서 그 할머니께 드렸다. 오죽 돈이 귀앴으면 차비를 깎기 위해서 어린 차장에게 욕을 먹는 수모를 당하겠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 덕에 우리 둘은 차비가 없어 돌아올 때는 금정산을 넘어 걸어서 범어사까지 돌아오는 생고생을 해야 했다. 그래도 마음은 즐거웠다.
그 후 그와 나는 통도사 극락암 경봉 노스님 화상에서 같이 살았고. 해인사에서 혹은 오대산 상원사 청량선원과 문경 봉암사 희양선원에서도 같이 살았다. 그 때마다 그는 항상 천진했고 욕심이나 사심 없이 행동했다. 말과 행동을 아무 거리낌 없이 무애자재롭게 함부로 하는 듯했지만 그것을 주위 사람을 항상 즐겁게 하는 것이었다.
장난을 좋아하고 몸이 날렵해서 축구를 할 때나 등산을 할 때도 지칠 줄을 몰랐다. 몸놀림을 보면 아무 격식이나 폼이 없이 움직이지만 그런 중에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심한 장난에도 다치는 법이 없었다.
상원사 청량선원에서다. 겨울 안거 중인데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여럿이 장난을 하는데 갑자기 학성 스님이 마루 끝에서 마당으로 다이빙을 하는 것이 아닌가? 눈이 상당히 쌓여 있기는 했지만 그는 놀랍게도 몸에 아무 상처없이 거꾸로 처박혀 있다가 태연하게 눈을 털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상원사는 축대의 높이가 무려 사람 키 두 길은 족히 되는 곳이다. 이렇게 겁도 없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장난을 해서 주위사람을 놀래키기도 했다. 천진한 마음은 육체까지 유연하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너무나 자유분방한 그도 군대를 갔다. 내가 봉암사 희양선원에 있을 때인데 추운 겨울날 휴가를 나왔다. 봉암사 뒤 희랑대토굴에서 군대에서 겪은 세상 이야기를 밤새도록 재미있게 들었다. 그 동안 스님 하느라고 못해본 것을 군대 생활하는 동안 다 경험해 보았다고 자랑했다. 주로 술 먹은 이야기며 아가씨를 사귄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나는 말 그래도 다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들이니 만큼 침을 삼키면서 들었다.
특히 아가씨와 연애했다는 이야기는 얼굴을 붉히면서 들었다. 하지만 그는 역시 천상 스님이었다. 제대하기가 바쁘게 사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이내 군대 물은 다 빠져버리고 옛날의 천진한 스님 모습으로 돌아왔다. 세상 경험이 전혀 없는 그에게 잠시 절집 안을 떠나서 세상 젊은 청년들로 살아본 군대 생활은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 자기는 군대에 있으면서도 화두 하나는 놓치지 않고 챙겼다고 말했다.
옛 스님이 수처작주라고 했다던가. 그는 고된 군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본분사를 잊어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학성 스님을 만나 본 지도 벌써 십 년은 된 듯하다. 강원도 정선 땅의 정암사 뒤쪽 깊숙한 산속 토굴에서다.
그가 그 곳 토굴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십오 년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십 여 년 전 가을, 내가 그 토굴을 찾아갔을 때 벌써 토굴에 들어온 지 사 오 년은 된다고 했다. 머리는 깍지를 않아서 허리까지 내려왔고, 옷은 낡고 해져서 흡사 걸레쪽 같았다. 도를 깨닫기 전에는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고 한 마리 산짐승처럼 살겠다고 했다.
들은 이야기로는 학성 스님이 태백산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인 그 토굴에 들어가기까지는 여러 가지 사연도 있었고 마음의 갈등도 많았다고 한다. 수행자로서 열정이 없이 타성에 젖은 사람이면 모르겠거니와 적어도 진실한 구도자라면 어찌 마음의 갈등이 없을 것이며 고뇌가 없을 것인가?
주위사람들이 구도자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고, 절집 등 주위환경마저 도를 닦는 수행자를 받아 주지 못할 때 수행자는 한없는 고독감과 비애감을 느낀다. 그리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철저하게 고독해지고 처절하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돈수 스님도 삼 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무문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말이 그렇지 깊은 산중이나 혹은 무문관 안에서 몇 년씩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혹은 바깥세상을 보지 않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참으로 도를 구하는 일념이 아니면 하루도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 때 찾아간 나에게 학성은 하룻밤 쉬어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실로 오랜만에 만난 도반이지만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마당 앞을 돌아 나오는데 큼직한 돌들로 축대를 쌓아 놓은 것이 보였다.
어떻게 저 큰 돌들을 운반해다가 축대를 쌓았느냐고 물었더니 학성의 말이,
“외로움 마음이 한번 밀려오면 견딜 수 없는 공포감으로 변하더군. 그 때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하든지 일을 해야 하는데 마땅한 일감이 없을 때는 저쪽 돌밭에서 돌을 굴려다가 축대를 쌓고 탑을 쌓기도 한다네”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돌들은 다 학성 스님의 도를 닦는 마음이 담긴 것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는 어줍잖게 한 수를 지어 그를 향한 내 마음을 대신했다.
장부의 굳센 마음 바위들을 굴리고 깊은 산에도 도를 닦으니 부처님을 닮았네.
출처 ; 효림 스님 /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