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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함께걷는예수의길] "부모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루카 2,41-52) 복음 묵상
12월 3일 비상계엄령 사태 이후 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저녁마다 시국 집회를 이어 가는 가운데 ‘성탄 팔일 축제’의 주일을 맞습니다. 세상에 오신 메시아를 맞이한 기쁨으로 가득해야 할 이 축제 시기에, 많은 이가 추위에 떨며 거리 한복판에서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도무지 성탄 축제의 기쁨이 느껴지지 않을 법한 상황이 계속 벌어지고 있건만, 민중은 절망 대신 희망을 품고 거리와 광장을 민주주의 축제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성탄 팔일 축제’ 중의 주일이며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로 보내고, 특히 한국 천주교회는 이 축일부터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이 이룬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주님을 가정의 중심에 모시고 온 가족이 화목하게 살아가기를 기도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이번 축일에는 조금 더 우리의 시야를 넓혀 혈연 가정보다 더 큰 가정, 우리나라 공동체를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라며, 혈연에 얽매이는 삶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더 우선에 두셨습니다. 이는 혈연 가족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니라, 내 부모와 형제자매를 소중하게 여기듯 이웃과 이방인을 가족처럼 대하고,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인류가 서로 사랑하는 형제자매가 되어 더 큰 가정 공동체, 참 가족을 이루라고 초대하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혈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둔 가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양아버지인 요셉의 조상들 이름을 나열하며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고 밝히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신 그분은 사실상 그 가문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이 땅에 구세주를 보내시려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 성령으로 잉태하였고, 아버지 요셉은 내 아이도 아닌 생명을 잉태한 여인을 외면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따라 아내로 맞이해 아기와 그 어머니를 보호했습니다. 이 부부는 호적 등록을 하러 길에 따스한 방 한 칸도 구하지 못하고 마구간에서 출산할 만큼 가난했습니다. 게다가 불의한 임금이 자기 권력을 지키고자 내린 비상계엄령과 같은 끔찍한 횡포, 두 살 이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이라는 폭력적인 명령 때문에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의 생명을 지키고자 이집트로 피난 가는 난민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길에서 태어나고 길에서 떠돌아야만 했던 가난한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예수님은 어린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마리아, 요셉과 아기 예수. (이미지 출처 = Pixabay)
오늘 복음에서는 열두 살 청소년이 된 예수님이 부모를 따라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순례 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연히 친척, 친지들 사이에 있을 거라 여겼던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을 때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 동안 아이를 찾아다니며 얼마나 애가 탔을지, 본문에는 상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그 행간에서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애타게 찾아온 부모를 보고도 미안한 마음은커녕,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반문하여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라는 다음 구절이 괜한 빈말처럼 느껴질 만큼, 윗사람의 말이나 의견에 순순히 따른다는 ‘순종’의 말뜻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지상 부모의 뜻에 무조건 순종하기보다 더 큰 부모이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며 우선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둔 나자렛 성가정에서 참으로 순종하는 자녀의 모습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시민 사회에서 공권력과 국민의 의무를 십계명 중 넷째 계명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신명 5,16; 마르 7,10)라는 효도 계명과 연계하여 설명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듯, 우리의 선익을 위해 사회 안에서 하느님께 권위를 부여받은 이들도 공경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공권력이 그렇게 공경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공동선을 위해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공권력의 명령이 도덕이나 기본 인권이나 복음의 가르침 등에 어긋날 때, 시민들은 양심적으로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의무가 있다”(2242항)라고 가르칩니다. 아울러 “교회가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할 때에는 정치 질서에 관한 일에 대하여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정당하다.... 이것은 교회의 사명에 속하는 일이다”(2246항)라고 밝힙니다.
대통령의 비상계엄령은 공권력의 ‘정당한 통치 행위’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정치적 이유로 긴급 상황이 아님에도 야밤에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군대를 동원해 헌법을 무시하고 국회의 의결을 막으려 한 행위, 정치 견해가 다른 이들을 적대시하며 처단하려 한 행위, 심지어는 북한을 도발하여 전쟁을 일으켜 이를 정당화하려 한 상황이 정당한 통치 행위가 될 수 있을까요? 이를 용인하며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참된 하느님의 뜻일까요? 우리의 양심은 어떻게 말합니까?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이번 사태가 대통령 한 사람을 심판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한국 사회 전반이 개혁되는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갈라져 반목하며 서로 적대시하거나 인간 생명을 존중하지 못했던 현실을 돌아보며, 낡은 세상 질서에 순응하기보다 사랑과 평화의 새 세상을 열어 가자는 각오를 다지기도 합니다. 정치에 무관심해 보였던 젊은 세대가 먼저 앞장서고 있고, 나이 든 세대는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이들과 함께합니다. 추위에도 거리에 선 이들을 응원하며 차와 음식 선결제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재현하는 모습, 고립된 농민들 곁을 지키려 밤새 연대하는 모습, 평소 그냥 지나치던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들이 늘어나는 모습에서 우리 사회가 이전보다 더 따스한 사랑과 평등,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로 변모하기를 바라는 희망이 움트고 있습니다.
이번 성가정 축일은 2025년 희년이 지역 교회에서도 시작되는 희년 개막일이기도 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라는 말씀을 화두 삼아 시작되는 이번 희년에 한국 사회가 새롭게 거듭나기를 바라는 희망을 품고, 우리 신앙인들이 그 희망을 함께 열어 가는 ‘희망의 순례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리 형제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희에게 베풀어 주신 믿음과 성령을 통하여 저희 마음에 부어 주신 불타는 사랑으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리라는 복된 희망을 저희에게 다시 일깨워 주소서. 악의 세력이 패배하고 아버지의 영광이 영원히 드러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확신에 차 기다리며 온 인류와 우주가 떨쳐 일어나도록 아버지의 은총으로 저희가 복음의 씨를 뿌리는 성실한 일꾼이 되게 하소서. 희년의 은총이 희망의 순례자인 우리 안에서 천상 보화를 향한 갈망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우리 구원자이신 주님의 기쁨과 평화가 온 세상에 흘러넘치게 하소서. 영원히 복되신 하느님께서는 세세 대대로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2025년 희년 기도)
이미영
우리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s://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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