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포
강 문 석
밤사이 바다를 점령했을 어둠이 물러나면서 햇살이 서서히 퍼지고 있었다. 몽환적인 풍광을 연출하던 짙은 새벽안개가 햇볕에 보석처럼 영롱한 미립자를 산란하면서 사라져갔다. 멀리 가물거리기만 하던 수평선도 해수면과 하늘의 경계가 점점 도드라지고 있었다. 하얀 안개와 몸을 자주 섞다보니 모래사장도 안개 빛깔을 닮은 듯했다. 바다가 생긴 이후 가루처럼 입자가 고운 뽀얀 은모래가 될 때까진 얼마나 긴 세월이 걸렸을까.
만리포 백사장은 수줍음 타는 새색시마냥 해맑은 얼굴을 서서히 내밀었다. 그동안 황해라는 호칭 때문에 서해바다는 동해나 남해만큼 물이 맑지 못할 거라고 예단했던 사람에게 쪽빛바다는 무언으로 그 실체를 보여주었다. 만리포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편이다. 그러고 활처럼 휘어진 모래사장이 넓고 길게 이어진데다 수심마저 얕아 여름철이면 피서인파가 몰린다.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데는 해변에 붙은 울창한 송림도 한몫을 했을 것 같다.
만리포를 거느린 태안반도 해안선은 유달리 바닷물에 의한 침식작용으로 육지가 깎이어 패인 사구가 많았다. 만리포해수욕장도 바닷물에 의해 모래가 육지로 밀려오면서 긴 백사장을 만들어 생겼다. 1955년 이곳 해수욕장이 개장되면서 전국에서 피서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해수욕장을 찾는 피서객들을 수송하기 위해 인천에서 만리포를 오가는 여객선도 등장했다. 당시에는 육로교통이 열악해 사람들은 주로 뱃길교통에 의존하고 있었다.
동란이 끝난 5년 뒤 세상에 나온 노래 ‘만리포 사랑’이 크게 유행했었다. 전화의 잿더미 위에서 다시 시작하는 팍팍한 삶을 위무하느라 그랬던지 당시 유행가들은 비탄조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도 ‘만리포 사랑’만은 가사에도 희망이 담겼고 곡조마저 경쾌하여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만리포는 당시 주경야독하던 서울에서 그리 머지않아 직접 찾아보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그땐 무전여행이란 게 성행하여 만리포를 다녀오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인생체험을 한다는 이유를 들어 무일푼으로 나서는 여행을 그렇게 불렀다. 너나없이 어려울 때여서 당시의 우리 사회도 어느 정도는 그러한 젊은이들의 탈법적인 만용을 용인해주는 측면도 있었다. 무전여행을 주로 여름철에 벌이는 것도 열차나 버스는 무임으로 해결하고 잠은 요즘 노숙자들처럼 터미널 대합실 같은 곳을 이용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당장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힘든 때여서 나의 만리포 행은 그때 이루어지지 못했다.
직장생활을 만리포에서 머지않은 대전에서 시작했지만 끝내 만리포는 찾지 못한 채 반세기 넘는 세월이 꿈같이 흐르고 말았다. 노랫말처럼 똑딱선에 몸을 싣고 시원한 여름바다를 달리는 낭만을 즐기지 못한 아쉬움에 만리포는 나에게 지금껏 그리운 바다로 남았는지 모른다. 만리포에 닿자 도로 양쪽으로 들어선 공영주차장이 텅 비어 있었다. 피서객들이 타고 온 차들을 해변도로나 숙소와 음식점 앞 도로에 세워 차량통행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내 차 한 대라면서 저마다 이기심을 드러낸 것이 도로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화강암에 새긴 ‘만리포 사랑’ 노래비가 해수욕장 초입을 지키고 서있었다.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래였으니 만리포를 알리는데 노래비보다 나은 방법은 없었는지 모른다. 노래비는 아예 작사가 이름만 붙여 ‘반야월 노래비’로 부르기도 했다. 반야월은 워낙 많은 가사를 썼고 진방남이란 가수로도 활동한 때문에 그런 예우를 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유족이 노래비를 걸어 기초단체에 1500만원을 청구하면서 벌어진 소송은 어찌 이해해야하나. 놀랍게도 법원은 2012년 타계한 작사가의 자녀들이 저작권 소유를 두고 벌인 법적소송에서 유족 손을 들어줬다. 작사가가 남긴 5천여 곡의 저작권은 사후 70년이 되는 2082년까지 보장되며 저작료는 매년 1억 원 가량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래비 옆에 붙여 바닥에 설치한 ‘정서진’ 표지는 참 뜬금없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2005년 이곳 기초단체인 태안군이 나서서 정서진이라는 개념을 대한민국 영토의 서쪽 맨 끝으로 재해석하고 만리포를 정서진으로 지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서진은 정동진의 대칭위치로 임금이 살았던 광화문에서 말을 타고 달리면 나오는 육지 끝 나루터 즉 오늘날 경인아라뱃길 인천터미널 위치이다. 그런데도 만리포의 옛 명성을 이어가기 위한 기초단체의 노력은 칭찬받을 만하다.
전국적으로 만리포를 찬양하는 시를 공모해서 당선작품 '만리포 연가' 시비를 노래비 옆에 세웠기 때문이다. 앞으로 만리포를 찾는 사람들도 이 작품을 통해 지역에 더욱 애정을 가질 수 있으리라. 그런데 사진으로 접한 시비는 노래비와 너무나 부조화가 심했었다. 시커먼 색상의 울퉁불퉁한 바위 모양이 예술작품이라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만리포를 찾은 날 시비는 어디로 숨겼는지 현장에 보이질 않았다. 시 전문을 옮겨본다.
만리포 연가
박 미 라
멀어서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마른 모래바람이 가슴을 쓸고 가는 날이면 만리포 바다를 보러 오시라. 오래된 슬픔처럼 속절없는 해무 속에서 지워진 수평선을 가늠하는 붉은 등대와 닿을 수 없어서 더욱 간절하다고 아득히 잦아드는 섬이 있다. 누군들 혼자서 불러보는 이름이 없으랴. 파도소리 유난히 흑흑대는 밤이면 그대 저린 가슴을 나도 앓는다.
바다는 다시 가슴을 열고 고깃배 몇 척 먼 바다를 향한다. 돌아오기 위하여 떠나는 이들의 눈부신 배후에서 고단한 날들을 적었다가 지우며 반짝이는 물비늘 노을 한 자락을 당겨서 상처를 꽃으로 만드는 일은 아무렴 우리들 삶의 몫이겠지. 낡은 목선 한 척으로도 내일을 꿈꾸는 만리포 사람들. 그 검센 팔뚝으로 붉은 해를 건진다. 천 년 전에도 바다는 쪽빛이었다.
시인은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는 백팔번뇌를 마른 모래바람에 비유했다. 그리고 고단한 삶에 좌절하는 사람들을 향해 만리포의 아름다운 등대와 섬과 붉은 해가 위안을 안겨줄 거라고 말한다. 이처럼 시는 60여 년 전 경쾌한 멜로디에 희망과 애정을 담았던 노래 '만리포 사랑'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제대로 만든 시비가 자리를 잡고 들어선다면 시인의 간구대로 만리포는 삶에 지친 영혼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안겨줄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