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숨
정 끝 별
허공에 거미줄을 치는 거미처럼 종일 제 거미줄에 걸려 있는 거미처럼 모른 듯 모든 걸 걸고 내민 엄마 손을 잡는 아가손처럼 엄마 손을 놓고 달려가는 아가손처럼 모른 듯 모든 걸 놓고 벼락에 몸을 내준 밤나무가 비바람에 삭아내리듯 절로 터진 밤송이가 제 난 뿌리로 낙하하듯 남은 숨을 군불 삼아 피워올리겠습니다 매일 아침 첫 숨을 앗 숨으로!
*앗숨(Ad Sum) :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뜻의 라틴어.
- 시집〈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문학동네 -
디폴트값*
오래 말을 해본 적이 없나요? 얼마나 오래 날짜와 날씨와 요일과 요즘을 잊나요? 얼마나 오래 거울에서 얼굴을 보지 않나요? 얼마나 오래 여기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나요? 얼마나 자주 자기를 웃어넘기나요? 얼마나 자주 누군가의 말과 눈빛에 베이나요? 얼마나 자주 이가 상할 정도로 이를 악무나요? 얼마나 자주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얼마나 자주 칼날에 혀를 대보나요? 얼마나의 해저를 산 채로 파고들어 저를 묻고 적을 묻다 두 눈이 불거지고 온몸이 투명해져 스스로 빛을 낼 때면 눈물에 부력이 생기고 가슴에 부레가 차올라 마침내 심해의 바닥을 치고 솟아오른다 언제나 너는
* 영어의 'Default value' 에서 유래한 말로, 별도 설정을 하지 않은 초기값, 즉, '기본 설정값'을 의미한다.
늦여름 물가
검은 물잠자리 한 쌍이 길을 내며 날았다 조심조심 날아도 연두 방아깨비가 튀었다 하얀 취꽃을 알려준 건 너였고 새빨간 떡맨드라미꽃을 일러준 건 나였다 헬리콥터가 하늘을 가르고 지나면 구름은 다른 몸이 되어 흘렀고 흰 모터배가 물살을 가르고 지나면 강물은 다른 쪽으로 물비늘을 눕혔다 잠시였다 갈라진 것들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앞서 날던 검은 물잠자리 한 쌍이 서로의 긴 꼬리를 휘어잡고 강물과 구름 사이에 동그란 허공을 만들었다 우리 결혼할래요?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 예스24
몸으로 리듬을 타는 시시 모르는 사람에게도 시에 눈을 뜨게 할 시물음이 답을 품고 답에 날개가 돋는 언어의 춤문학동네시인선 123 정끝별 시집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가 출간되었다.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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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시집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문학동네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