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조와 더불어 한국의 1세대 색소폰 연주자로, 가요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천재적 작곡가 길옥윤. 그가 이룬 공적에 비해 자료는 너무나 미미하고 그나마 기록된 기사는 지극히 개인사적인 가십(gossip)과 스캔들 일색이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길옥윤의 마지막 곡 ‘이별’의 첫 가사다. 어쩌면 우리가 그에게서 쉽게 등 돌린 냉정한 사람이 아닐까 잠시 걸음을 멈춘다.
"길옥윤은 내 삶의 스승이다."
제주도에는 아름다운 풍광만큼이나 독특한 건축물들이 있다. 포도호텔과 방주교회, 두손 미술관은 건축을 전공하지 않은 이들도 반드시 찾아가는 명소가 되었다. 이 건물들을 지은이가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1937-2011, 본명 유동룡)이다.
‘이타미 준’이라는 예명은 이타미 공항(伊丹空港, 오사카 공항이 자리한 지명)의 이름과, 자신과 의형제를 맺을 만큼 친분이 있던 길옥윤(吉屋潤)의 마지막 글자 ‘윤(潤, 준은 일본식 발음)’을 따온 것이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자신의 예명에 이름자를 따올 만큼 존경해마지않은 인물이 바로 길옥윤이다.
일본의 주켄공업사(樹硏工業社)는 카메라, 시계, 자동차 회사에 정밀모터를 공급하는 회사다. 세계 최초로 백반분의 일 그램이라는 초소형 톱니바퀴를 개발하여 정밀가공업계, 세계 정상에 자리한 기업이다. 사장 마츠우라 모토오(松浦元男)는 “지금의 성공 밑거름이 바로 길옥윤이다”라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젊은 시절 길옥윤에게서 피아노와 색소폰을 배운 제자다. “나에게 장인정신을 가르쳐 준 인생의 유일한 스승이자 길잡이가 바로 길옥윤입니다. 프로라면 최고의 악기를 쓰고 자신만의 연주법을 만들라고 했지요. 장인도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 음색이 달라지듯, 컴퓨터로 제어되는 최첨단 기계도 다루는 사람에 따라 그 정밀도와 모양이 달라집니다.”
이 기사에 길옥윤의 음악인생이 모두 담겨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딴따라’의 길을 걸었지만 음악에 자신의 삶을 오롯이 헌신하고 철저한 장인 정신으로 한곡, 한곡 완성도를 높인 그는 한국 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천재 작곡가이다.
서양 음악이 밀려들어올 무렵, 이를 적극 수용하면서 한국적 색깔을 가진 음악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가요사의 큰 업적으로 남는다(두산백과)
■ '서울의 찬가' 노래비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광화문의 세종 문화화관 옆 세종로 공원에는 길옥윤의 대표곡 ‘서울의 찬가’ 노래비가 세워져있다. 길옥윤이 세상을 떠난 해, 1995년 10월 23일, 서울시가 세종로 공원에 건립한 노래비다.
서울에는 총 6개의 노래비가 있다. 마포에 있는 ‘마포 종점’, 꿈의 숲 공원의 ‘애수의 소야곡’, 용산 삼각지의 ‘돌아가는 삼각지’, 대학로의 ‘김광석’, 덕수궁 돌담길에 자리한 ‘광화문 연가’ 노래비, 그리고 제1호 노래비가 ‘서울의 찬가’다.
서울의 찬가는 1969년, 길옥윤이 만든 노래로, 패티김의 앨범 ‘하얀 집’의 6번 트랙곡이다. 당시 서울 시장이던 김현옥의 서울을 대표하는 곡을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받고 작곡하였다. 건전가요 풍의 밝고 진취적인 리듬, 서정적인 가사와 어우러진 패티김의 가창력이 더해져 대중의 인기를 끈 노래다.
'서울의 찬가' 노래비
이타미 준의 건축 작품 ‘방주교회’
■ 치과의사 가운 대신
색소폰을 택한 수재 음악도
“영변의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이른 봄, 뒷동산에 무성히 타오르는 진달래 꽃이 우거진 동네,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에 등장하는 평안북도 영변은 길옥윤(1927-1995)이 태어난 고향이다.
길옥윤의 본명은 최치정(崔致禎)이며 평양 종로 초등학교를 거쳐 1947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조부와 부친이 모두 의사로, 부친의 권유에 따라 1949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서울대 치과대학 전신)에 입학하였다. 고교 때부터 트럼펫, 피아노, 기타 등 악기연주를 즐겨했던 그는 의학 공부보다는 음악에 더욱 관심을 쏟았다.
이 학교에서 길옥윤은 자신의 인생행로를 바꿀 한 사람을 만난다. 같은 학교 선배인 김영순(예명은 베니김)으로 미 8군에서 활동하던 악단장이다. 김영순은 머리가 좋고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길옥윤을 악단 멤버로 영입하였다. 길옥윤은 당시 음악인들에게 꿈의 무대인 미 8군 쇼단에서 연주하며 그곳에서 재즈를 발견하고 재즈에 매료된다.
치과의사가 되기를 강권하던 선친의 뜻을 꺾고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 길옥윤은 일본으로 밀항을 감행한다. 1950년 동경으로 건너간 길옥윤은 일본의 색소포니스트 오자와(小澤秀夫)에게서 본격적으로 재즈 음악과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재즈 음악가로 활동하던 당시, 자신의 본명 최치정 대신 요시야 준(吉屋潤의 일본어 표기)이라는 예명을 사용한다.
한국을 떠난 지 10년 후인 1960년, 길옥윤은 ‘동경 스윙 오케스트라 악단’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온다. 첫 작품 ‘내 사랑아(1962, 현미 노래)’를 발표하고 1966년 작곡한 ‘서울의 찬가(패티김 노래)’가 큰 반향을 일으키며 국민가요로 급부상하였다.
이어 ‘사랑하는 마리아’, ‘사랑이란 두 글자’, ‘구월의 노래’ 등이 잇따라 히트하면서 길옥윤은 60, 70, 80년대, 가요무대와 음반 시장을 움직이는 실력자요 천재적인 작곡가로 기록된다.
“인생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길옥윤이 자신의 앨범 서문에 남긴 글이다.
치과의사라는 안정된 행로를 마다하고 오로지 열정에 이끌려 부침과 굴곡이 교차하는 음악도의 길을 선택한 길옥윤. 항상 단정한 슈트 차림으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무대에 오르던 그의 천재성과 품격 높은 음악 정신은 한국을 넘어 일본인들에게 인생의 귀감이자 스승으로 존경받게 된 큰 이유일 것이다.
■ 길옥윤의 대표음반
* 길옥윤 테너 색소폰 무드 연주곡(1986)
길옥윤의 주옥같은 대표곡들을 그가 직접 색소폰으로 연주한 앨범이다. ‘이별’을 비롯하여 ‘서울의 찬가’, ‘사랑이란 두 글자’ 등 패티김이 불러 히트시킨 곡들과, ‘감수광’, ‘당신은 모르실거야’, ‘새벽비’, ‘제3 한강교’ 등 혜은이가 부른 히트곡들을 망라한 앨범이다. 길옥윤 특유의 부드럽고 서정적인 색소폰 연주가 돋보이며 아마추어 색소폰 주자들이 즐겨 연주하는 친숙한 곡들이 수록되어있다.
* 길옥윤 경음악 애수의 색소폰(1978)
길옥윤의 또 다른 히트곡들을 색소폰으로 연주한 앨범이다. ‘빛과 그림자’, ‘구월의 노래’, ‘사랑은 영원히’, ‘서울의 모정’ 등 주로 애잔한 발라드 곡들이 담겨있다. 절제된 감성과 따뜻한 색소폰의 음색이 잔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 영원한 뮤즈 패티김,
짧은 사랑 그리고 긴 이별
1982년 9월에 제작한 앨범 ‘어깨너머 되돌아보는 그 세월이 아쉬워도’에는 의미심장한 글귀가 눈에 띈다. 평소 음악적 재능 뿐 아니라 시적 감수성이 풍부하던 길옥윤은 시화전을 열만큼 글 솜씨도 뛰어났다.
그는 자신의 앨범 서문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겼다. “인생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로 시작하는 앨범 서문은 이렇게 말맺음을 한다. “... 노래와 술과 낭만의 어제는 아름다웠었다.”
70년대를 지나온 중년세대들은 기억할 것이다. 주말 저녁, 당시 부부였던 패티김과 길옥윤이 출연하여 노래를 부르고 담소를 나누던 작은 콘서트 겸 토크쇼 프로그램이 있었다.
한 사람의 작곡가와 가수만 출연하여 진행하던 보기 드문 프로그램으로, 지금도 그 유례를 찾기가 힘들다. 한국 가요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화제를 불러일으킨 커플이자 필생의 음악동지인 패티김과 길옥윤. 이들은 TV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여 신곡을 발표하고 히트곡을 들려주며 당대 최고의 작곡가와 디바로 천상의 하모니를 들려주었다.
패티김이 뛰어난 가창력과 감수성으로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를 때, 옆자리에서 부드럽게 색소폰 반주를 넣어주며 사랑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짓던 길옥윤. 이 시기가 그에게는 개인적으로도 가장 행복하였고 가장 왕성한 음악활동을 펼친 때이다.
비록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지만, 음악으로 맺은 인연은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혼 발표 후, 이듬해인 1973년, 동경국제가요제에 참가하여 ‘사랑은 영원히’로 동상을 수상한다.
패티김이 다시 길옥윤의 노래를 부른 무대는 1994년, SBS 방송의 ‘길옥윤 이별 콘서트’였다. 연이은 사업 실패 그리고 골수암 판정을 받고 병마와 싸우면서도 마지막으로 콘서트를 열고 싶다는 길옥윤의 간절한 소망에 그녀가 답한 무대이다.
이혼 이후 길옥윤 노래를 거의 부르지 않던 패티김은 마지막 콘서트에서 피날레 곡으로 ‘이별’을 불렀다. “산을 넘고 멀리 멀리 헤어졌지만, 바다 건너 두 마음은 멀어졌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은 잊을 수는 없을거야.” 무대 뒤에는 휠체어에 의지한 채, 그녀를 바라보는 길옥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 때 사랑했던 여인이 부르는 노래 가사에는, 바로 자신들의 사랑과 이별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오래 전 함께 연주하고 노래하던 옛 시절을 떠올리며 길옥윤은 그녀 옆에서 얼마나 색소폰을 불고 싶었을까.
이별 콘서트를 마친 이듬해 1995년 3월, 숨을 거두기 전까지도, 길옥윤은 300여 곡을 악보에 기록해두었다고 전해진다.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든 길에서 음악을 만나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주옥같은 노래를 남기고 떠난 천재 작곡가 길옥윤. 그의 ‘어제’는 누구보다 찬란했고 낭만과 꿈으로 가득찬 ‘영원’이었다.
글 | 전현숙 객원기자
‘길옥윤 이별 콘서트’
길옥윤 경음악 앨범 '애수의 색소폰' (1978)
첫댓글 시대의 천재군요
저도
길옥윤님과 패티김을 무척이나 좋아 햇는데.....
길옥윤님의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이별 들을수 없지만
길옥윤님 수많은 좋은곡들 감사합니다
길옥윤. 패티김 그들의 사랑이야기
오래전에 들어서 알고있는 내용이지만
다시 그들에대해서 읽어보니 가슴이
뭉클하네요
패티김의 사랑은 영원히
하늘에있는 길옥윤님이 이노래를
제일 좋아할것같군요....
패티는 영원한 길옥윤의 뮤즈
있을때 좀 잘하지
친구 좋아하고 술좋아하니
패티처럼 바른생활 여인이 견디기 힘들었을듯 ㅎ
결국은 참다 참다 ㅠ
@애니 그래서 길옥윤님은 마지막갈때
쓸쓸이 갔네요. ㅠㅠ
있을때 잘해 노래가 생각나네요
@레지나 1 근데 예술하는 사람들은 어쩔수 없는가봐요
우리 일반인의 잣대로 잴수없는
@애니 딸같은 여자하고 낭중에 결혼해서 딸도 또 낳았어요
@애니 예술을 하는사람들은 우리 보통사람들
하고는 다르겠지요
문득 떠오르는 영감도 얻어야하고
그래서 술 담배 마약들을 하나봅니다
여자도 좋아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