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렴주구
우연히 재미있는 자료를 접했다. 조서 후기 탐관오리(貪官汚吏) 대명사로 고부군수(古阜郡守)였던 조병갑(趙秉甲)과 경상우도(慶尙右都)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였던 백낙신(白樂莘)을 들고 있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병갑은 탐관오리의 상징으로 지나친 수탈과 학정을 거듭해 원성과 지탄의 대상이었다가 끝내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全琫準)의 대변되는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 1894년)의 발단이 되었다. 한편 무관(武官)이었던 백낙신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일하며 탐관오리로 악명을 떨치다가 끝끝내 진주농민봉기(晋州農民蜂起 : 1862년)라는 민란(民亂)을 일으켰다. 그 뿐 아니라 유사 이래 가장 규모가 컸던 임술농민봉기(壬戌農民蜂起)의 방아쇠를 당기는데 일등공신 노릇을 했다. 이들이 한 짓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가렴주구(苛斂誅求)로 날이 새고 저문 탐관오리의 전형이다.
가렴주구를 직역한다면 “가혹하게 거두고 강제적으로 빼앗(수탈)는다”로 정의할 수 있다. 이를 좀 더 넓은 뜻으로 확대 해석하면 ‘가혹하게 세금을 거둬들이고 재물을 강제로 수탈하는 관리 혹은 그러한 정치 상황 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힘들다’는 의미가 된다. 이 말과 동의어 혹은 유의어는 참으로 다양하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주구무이(誅求無已), 탐관오리(貪官汚吏), 할박지정(割剝之政), 어궤조산(魚潰鳥散), 횡정가렴(橫征苛斂), 손상박하(損上剝下), 조걸위악(助桀爲惡), 백골징포(白骨徵布), 무단향곡(武斷鄕曲), 취련지신(聚斂之臣), 도탄지고(塗炭之苦), 기렴각리(箕斂榷利), 타가겁사(他家劫舍) 따위가 그들이다.
이 말의 유래는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우선 구강서(舊唐書)의 목종기(穆宗紀)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양공(襄公)* 삼십일년(三十一年)에 나타난 ‘가렴(苛斂)’과 ‘주구(誅求)’를 합한 ‘가렴주구(苛斂誅求)’라는 기록이 있다. 다음은 공자(孔子)가 제자들과 태산(泰山)을 찾아가던 길에서 했던 경험을 통해 설파했다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들 두 설(說)과의 만남이다.
구강서(舊唐書)의 목종기(穆宗紀)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양공(襄公) 삼십일년(三十一年)에 관련된 내용이다. 아마도 당(唐)나라 헌종(憲宗) 시절에 가난으로 나라가 몹시 어려운 세월이었던 것 같다. 그런 때문에 헌종은 황보박(皇甫鎛)을 발탁해 재상(宰相)으로 임명해 어려운 나라살림을 타개하려고 시도했다. 그런 왕에 뜻과는 정반대로 그(황보박)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고 힘들게 다그치기를 거듭해 원성이 자자했던 모양이다. 그 상황을 기술한 원문 내용이다.
/ 세금을 가혹하게 부담시키고 야박하게 굴어(加斂剝下 : 가렴박하) /
이 때문에 하나같이 그(황보박)에 대한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지며 민심이 예사롭지 않게 나빠지자 헌종은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고 한다. 여기서 ‘세원(稅源)에 근거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징수하는 세금’인 가렴(苛斂)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한편, 중국 춘추시대 정(鄭)나라 정치가였던 자산(子産)*은 자기 나라가 여러 강대국 틈에 끼어 평소에 이런저런 어려움과 서러움을 겪어야 했던 처지를 빼거나 더함 없이 곧이곧대로 말했던 내용 원문이다.
/ 가혹한 요구가 때를 가리지 않는다(誅求無時 : 주구무시) /
이렇게 강대국들이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가혹한 요구를 해오는 때문에 편안히 지내거나 마음을 놓을 수 없어 무척 불안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정당한 법적 근거 없는 징구(徵求)’를 뜻하는 ‘주구(誅求)’라는 말이 생겨났다. 위의 두 사실에서 생겨난 ‘가렴’과 ‘주구’를 합쳐져 생긴 게 ‘가렴주구’이다.
또 하나의 설이다. 중국 춘추시대 공자의 조국인 노(魯)나라에서 조정을 좌지우지 하던 계손자(季孫子)가 가혹한 세금을 거둬들이던 시절에 공자(孔子)와 관련된 일화에서 생겨난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에서 비롯되었다는 얘기다.
공자가 제자들과 태산(泰山)을 찾아 가던 길에 깊은 산중을 지날 때 어느 여인이 3개의 묘 앞에서 섧게 통곡하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한 공자가 제자 자로(子路)에게 그 연유를 알아보라고 했다. 자로가 다가가 사연을 물었더니 “지난날엔 시아버지와 남편이 호환(虎患)을 당했는데, 이번에는 아들이 또 당했습니다.”라고 했다. 그에 자로가 “그렇다면 이곳을 떠나 살면 될 터인데 왜 고집스럽게 여기에 눌러 사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 말에 여인이 “이곳은 가혹한 세금이나 부역을 강요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말은 전해들은 공자가 “가혹한 정치는 백성들에게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다” 즉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고 설파했다. 이 얘기의 주인공인 여인은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까지 호환으로 잃고도 그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가혹한 세금이나 힘겨운 부역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목숨을 앗아가는 호랑이보다도 가혹한 학정(虐政)이 무섭다는 사실을 에둘러 웅변하고 있다. 한편 이 설화를 통해 ‘가정맹어호’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리고 ‘가렴주구’는 이 ‘가정맹어호’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이다.
가렴주구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일거에 씻어낼 말은 무엇일까. 그 옛날 학정을 일삼는 탐관오리가 있었는가 하면 정반대로 청렴결백한 관리인 청백리(淸白吏)나 염근리(廉謹吏 혹은 염직리(廉直吏))가 있다. 이들은 ‘청렴결백한 관리(官吏)*로 녹선(錄選)*된 인물’이었다. 그런데 염직리는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뽑히고’, 청백리는 ‘사후(死後)에 추서(追敍) 된다‘는 점이 서로 다르다. 이 제도는 중국의 한(漢)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조선시대 이들로 녹선(錄選)된 숫자는 출처에 따라 다른데 200명 안팎에 이른다는 전언이다.
“후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 말이 있다. 개인이든 국가이든 가렴주구에 눈이 멀어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던 경우의 결말은 하나 같이 비운을 피해가지 못했던 게 세상 이치이다. 물론 사적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임을 우리는 많이 보고 들어왔다. 그 때문일까. 궁핍을 면치 못해 궁상맞은 삶을 살았다 해도 지조와 긍지를 지켰던 염근리나 청백리가 훨씬 격조 높은 삶이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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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공(襄公) : 중국 춘추시대 송(宋)나라의 군주로서 재위(在位) 기간은 기원전(紀元前) 651~637년이다.
* 자산(子産) : 중국 춘추시대 정(鄭)나라 정치가로 공손교(公孫僑)라고도 호칭되던 정나라 귀족 출신이다.
* 관리(官吏) : 관리자(官)와 실무자(吏)를 통틀어 지칭하는 개념이다.
* 녹선(錄選) : 추천을 받아 뽑음을 의미한다.
현대작가, 제19호, 2024년 3월 10일
(2024년 2월 2일 금요일)
첫댓글 교수님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