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원의 자취가 서린 부안 반계서당에서 유관을 생각하다,
서울의 우산각골(우산각리, 우선동)은 동대문구 신설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세종 때 정승 하정夏亭 유관柳寬이 청렴결백하여, 작은 오두막집에서 살았다. 하루는 비가 오자 방안에서 우산을 받고 있던 부인이 말했다.
“우리 집은 명색이 정승 집인데, 비만 오는 이런 집에서 살아야 하나요.?” 그 말을 들은 유관이 그 부인에게 답했다.
“우리는 우산이라도 있어서 새는 비를 피하지만, 우산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견디겠소.”
자기 자신도 새는 집에서 살고 있으면서 어려운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였다 해서 이 마을을 우산각골, 또는 한자로 우산각리라 하였으며, 그 말이 변하여 우선동이라고도 한다.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남길 유산이랄 것이 없으니, 청빈을 대대로 자손들에게 물려주기 바란다.”
한나라의 정승을 지내고 있으면서도 집은 주룩주룩 비가 새는 생활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것이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삶의 자세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중에 살기가 어려운 백성들을 걱정했다는 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그가 살았던 초가집에서 살았던 사람이 유관의 4대 외손인 동고 이희검李希儉이었고, “집은 비를 막는데 족하고, 옷은 몸만 가리면 족하고, 음식은 배만 채우면 그만이다.(家足以이 雨, 衣足以이 身. 食足以充陽”라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그는 병조판서에 지경연사라는 벼슬을 겸하고 있었지만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서 친척과 친지들이 돈을 추렴하여 장례를 치렀다.
그의 아들이 <지봉유설>을 지은 지봉 이수광李晬光이었고 그는 그곳에 ‘겨우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으로 비우당庇雨堂이라는 집을 짓고 살았다.
“내가 못나서 예전에 선조들이 살던 집을 그대로 지탱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주춧돌 하나 기둥 한 토막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어찌나 송구하던지 그 옛터에 그만한 집을 새로 짓고 집 이름을 ‘비우당‘ 이라 하여 한가롭게 쉬는 곳으로 삼았다. 비우당이란 겨우 비를 가리는 집이란 뜻으로 비새는 방안에서 우산으로 비를 가리던 선조의 유풍을 기린 것이다.”
그가 지은 <동원 비우당기>라는 글인데, 이수광은 평생을 ‘간소함으로써 번거로움을 누르고(簡而制煩)고요한 가운데 분수없는 행동을 삼간다.(靜而制動)’ 는 여덟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일생을 살았다.
유관의 9대 후손이 부안 우반동에서 <반계수록>을 남긴 반계 유형원으로 유관이 공을 세워 받은 전답이 있는 이곳으로 낙향하여 벼슬에 대한 생각을 끊고서 학문에 매진했다.
부안의 우반동, 이곳은 살아생전 살고 싶은 곳 중의 한 곳으로 <꿈속에서도 살고 싶은 마흔 한 곳>이라는 책에 실은 지역이다.
우반동에 큰 흔적을 남긴 인물이 또 있으니 바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반계 유형원이다. 유형원은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였다. 서울에 살던 그가 우반동에 내려와 학문을 연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에 집안의 농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형원은 서울에서 태어나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에 《서경》 〈우공기주편禹貢冀州編〉을 읽자 사람들이 매우 감탄하였다고 한다. 외숙인 이원진과 고모부인 김세렴을 사사한 그는 문장에 뛰어나서 21세에 《백경사잠百警四箴》을 지었다.
1653년(효종 4)에 부안현 우반동에 정착한 그는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심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나라 곳곳을 유람하였다. 1665, 1666년 두 차례에 걸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농촌에서 농민을 지도하는 한편, 구휼을 위하여 양곡을 비치하게 하고, 큰 배 4, 5척과 마필馬匹 등을 갖추어 구급救急에 대비하게 하였다. 유형원은 그의 저서인 《반계수록》을 통하여 전반적인 제도 개편을 구상하였다. 중농 사상에 입각하여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도록 전제田制를 개편, 세제·녹봉제의 확립, 과거제 폐지와 천거제 실시, 신분·직업의 세습제 탈피와 기회 균등의 구현, 관제·학제의 전면 개편 등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은 훗날 이익, 홍대용, 정약용 등에게 이어져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공직을 맡는 다는 것은 개인의 영광이고, 가문의 영광이라 여겼기 때문에, 자신의 영달로 여기지 않고, 청렴하게 살다간 사람들이 많아서 우리나라가 이만큼 발전하고, 세계 속의 작지만 큰 나라로 성장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여러 상황을 바라보면 고개를 갸우뚱할 때가 많다. 그만큼 걱정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배우자,
2020년 9월 30일 구월의 마지막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