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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6월 8일 연중 제9주간 금요일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마르코 12,35-37)
David himself, inspired by the Holy Spirit, said:
The Lord said to my lord,
‘Sit at my right hand
until I place your enemies under your feet.’
David himself calls him ‘lord’;
so how is he his son?”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일꾼의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한다고 말한다(제1독서). 다윗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임금이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주님 앞에서 늘 겸손했고, 죄를 지었을 때에도 즉시 회개하였다. 다윗 역시 장차 오실 메시아의 출현을 열망한 하느님 앞의 신앙인이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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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후손이시며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메시아의 기원과 계획을 가리킵니다. 율법 학자들이나 당시의 지식인들은 메시아가 다윗 가문에서 나온다고 믿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생각을 강하게 비판하시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고백을 거론하십니다. 다윗이 성령의 감화를 받고,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하고 고백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다윗 위에, 다윗보다 앞서 계시는 분으로 소개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나라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군주제’, 곧 백성 위에 군림하면서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종으로 부리는 그러한 나라가 아니라, 백성을 사랑하고 섬기는 나라임을 분명히 천명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께서 사랑과 섬김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의 시민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다윗 임금은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통치 때에는 이민족이 감히 넘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만큼 막강한 군사력이 있었습니다. 다윗 치세의 이스라엘만이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늘 식민지의 백성으로 살던 이스라엘에게 다윗은 정신적 구심점이며 희망이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자연히 후손들에게 화려하게 전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율법 학자들은 장차 올 메시아까지도 다윗 가문임을 내세워 다윗 숭배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시편을 근거로 다윗도 평범한 이스라엘의 한 사람임을 지적하십니다. 다윗을 깎아내리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 지식에 매달려 있던 유다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주님 앞에서는 위대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서는 위대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리나 업적’ 때문에 위대하다고 판단해선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주님 앞에서 인간의 ‘지위나 행적’은 보잘것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지적 교만’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진정 위대한 사람은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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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박해와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시기하고 질투하기 때문입니다. 마음대로 살고 싶은 사람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입니다.
당신은 세상의 박해와 미움을 받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과 한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8-19).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양승국신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양치기 목동에서 통일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 까지 오른 다윗의 생애는 참으로 파란만장합니다. 다윗 왕의 생애와 활약에 대해서는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 등의 구약성서에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선왕이었던 사울 왕과의 갈등, 압살롬의 쿠데타 등 높은 장애물들을 극복해나가면서 불안하고 미약했던 권력기반을 안정시킨 다윗 왕은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큰 왕, 성왕(聖王)으로 착좌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 왕 역시, 까놓고 보면 우리와 비슷한 한낱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충신 중의 충신 우리야 장군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어 억울한 죽음을 맞게 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를 차지합니다.
겉으로는 대단했던 그도 사실 알고 보면 약점투성이었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왕 중의 왕이던 그였지만 유혹 앞에 갈등하고 수시로 흔들리던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이런 다윗 왕이었는데, 율법학자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칭합니다. 물론 복음서 여러 곳에도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란 지방에 가셨을 때 바르티매오란 눈먼 거지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르코 10장 48절)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군중들 역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마태오 21장 9절)
‘다윗의 자손’이란 표현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올 ‘메시아’란 단어와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단단한 못 하나를 박으십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예수님께서는 아주 정확하고 단호하게 세상의 왕 다윗에 대한 영원한 왕, 메시아와의 차별성, 우월성을 확증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다윗 왕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우리나라의 1/4에 해당되는 소국의 왕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메시아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다윗 왕 천수를 누렸다고 하지만 그의 왕으로서의 재위기간은 40년도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님의 통치는 세세대대로 영원무궁할 것입니다.
다윗 왕,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고자 노력했고, 아주 겸손했지만, 참으로 허물 많은 인간이었습니다. 자기 한 목숨, 자기 부양가족 챙기기도 바빴습니다. 그에 비해 메시아 예수님은 무결점, 무죄, 순수 그 자체였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양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다윗의 고백대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손이 다윗입니다. 다윗의 아버지, 다윗의 왕, 다윗의 스승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다윗 왕이 어느 날 궁중의 세공인을 불러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나를 위해 있는 멋진 반지 하나를 만들라. 그 반지에는 내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환호할 때 교만하지 않고,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도록 하라.”
다윗 왕의 부탁에 세공인은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반지에 새길 마땅한 글귀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공인은 나이가 어렸지만 지혜로운 솔로몬 왕자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 왕자는 이런 글귀가 어떻겠냐고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갖은 유형의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건강과 질병,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사실 시간과 더불어 ‘이 또한 지나갑니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DNA가 숨겨져 있습니다.
-김기현신부-
【위대한 운동선수인 마이클 조던은 처음에 대학 농구 팀에 지원했다가 고배를 마셨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조던의 키는 175센티미터를 간신이 넘겼습니다. 당연히 조던보다 20센티미터나 더 큰 다른 학생이 뽑혔습니다. 하지만 그의 DNA 안에는 풀려나기만을 기다리는 유전자가 있었습니다. 이 유전자 안에는 20센티미터의 키와 놀라운 점프 능력이 잠자고 있었습니다.
조던은 거절을 당한 후에도 여러 번 더 좌절을 겪었지만, 계속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자 어느 날 그 유전자가 발현되었습니다. 키가 크고 운동 능력이 향상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조던은 농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조던처럼 우리 안에는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잠재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제 안에 ‘말씀 선포자’ 라는 유전자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조용히 존재감 없이 일하는 것이 좋은데, 부제가 되고 사제가 되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에 제가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 자리가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처음 시작할 때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 ‘내 길이 아닌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족하고 서투른 모습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화수동에서 전례 봉사하는 분들 교육할 때, 본당 신부님은 1시간 정도 하기를 바라셨는데, 30분을 넘기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강론을 할 때 원고를 너무 많이 봐서 신자들과 눈을 거의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국어책 읽듯이 하는 강론 때문에, 당시 어떤 청년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부제님의 국어책 읽는 듯한 말투는 10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의 모습을 보면, 잠재된 ‘말씀 선포 DNA’ 가 많이 발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도 부족하고 서투른 모습이 많지만 일단 강론 원고를 보지 않고 신자 분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말투도 여전히 딱딱하긴 하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나아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제 도화동에 견진 강의를 갔다 왔는데, 예전에는 30분 말하는 것도 버거웠는데, 이젠 한 시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할 말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우리 유전자 안에 모두 담아 두셨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고 필요한 때가 되면, 그 유전자들이 드러나고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과 조상들에게서 받은 유전자가 ‘우리 유전자의 전부겠지.’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DNA가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복음에서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라고 말씀 하시는데, 그 말씀 안에는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는 일들은 다윗과 그 이후의 조상들로부터전해져 온 유전자가 능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로서 지닌 하느님의 유전자가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조상들로부터만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면, 사랑하고 기도하고 용서하고 치유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능력들은 발휘할 수 없으셨을 겁니다. 하느님의 유전자가 예수님 안에 있었고, 그 유전자들이 공생활이 시작되면서 드러나고 나타나기 시작한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안에도 하느님의 유전자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믿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한다면, 원하는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뽑힌 이유는...
-김찬선신부-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율법학자들이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기를 바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는 미국에 가기 전까지는 유대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좋은 점이 참으로 많은 우수한 민족이라는 생각도 있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유대인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습니다.
저의 부족함 때문이고 극복해야 하지만
유대인들도 문제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선민의식,
배타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저는 미국생활 후에도 여러 차례 이스라엘을 방문하며
이런 경험이 너무도 많았고,
며칠 전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구호선을 공격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하는 그들의 비인도적인 행위들은
정말 하느님께서 뽑으신 민족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제 첫째와 둘째가는 계명이 사랑이라고 대답한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칭찬하신 것처럼
하느님 나라는 사랑이 지배하고 사랑이 넘쳐나는 나라이고,
모두를 사랑하는 그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하느님께 뽑힌 백성답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의 율법학자를 제외한 대다수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자기 민족만 독점적으로 소유하려 하고
메시아도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집합니다.
그러나 마태오복음이 그러하듯
설사 족보상으로 다윗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어찌 메시아가 인간의 핏줄과 집단성에 갇힐 수 있겠습니까?
만일 예수님의 피가 B형이라고 해서
그리스도性이 피의 형에 갇힌다면
그리스도께서는 B형만을 위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얘깁니까?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는 저를 반성하자면
말은 이렇게 하면서 저도 유대인과 비슷한 속물입니다.
왜냐하면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고
독점적으로 하느님을 소유하는 그들에 대해서
화를 내고 있는 저이기 때문입니다.
화를 낸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제가 그들에게 걸려든 표시지요.
어떤 식으로 그리고 무엇 때문에 제가 걸려들었을까요?
예수님이 우리 민족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화가 난 건 아닐까요?
우리민족 중에 예수님 같은 인물이 없는 것에 화난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 때문에 돈 많이 버는 그들에 대한 시기심은 아닐까요?
월드컵의 계절이 또 다시 다가왔습니다.
이번에도 저는 그 중계를 보지 않을 것이지만
안 봐도 들리는 소식에 제 마음이 많이 출렁거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겨야 된다는 그런 생각을 넘어서야 한다는 마음과
우리가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이 교차하면서 많이 출렁일 것입니다.
오, 하느님!
이 아침,
내가 뽑힌 이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뽑힘은
하느님 사랑을 독점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하느님 대신 실천하라는 것임을....
신앙의 열정
-강우현 신부-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감내하신 분입니다.
초대 교회의 박해자였던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 사건을 통하여 한 생애를
박해받는 자로 오직 그리스도 그분만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전파하다 주님의 품으로
간 분입니다. 오늘날엔 ‘박해’라는 말 자체가 종적을 감춘
듯합니다. 예전처럼 숨어서 신앙을 살 이유가 없는 우리는 너무나 좋은 시절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성당을 찾아서 미사에 참여할 수 있고, 공동체 모임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너무 손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서인지 예전의 순교자들이 지니셨던
신앙의 열정은 반감된 듯한 느낌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교회를 찾아
세례를 받고 매일 평일 미사에 참여하고 교회의 모든 활동에 참여하는 시대.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미사를 봉헌하기 위하여
험한 산길을 마다하지 않고 넘나들었던 순교 성인들의 정신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 순간 사도 바오로처럼 뜨거운 열정과
피로써 믿음을 고백한 우리 신앙 선조들이 마냥 부럽기만 합니다.
산을 보려면 산에서 나와라
-전삼용신부-
외국에 처음 나와서 살게 되면 문화의 괴리를 적지 않게 느끼게 됩니다.
제가 처음 유학 나왔을 때 머물 게 된 곳은 신부님들이 사는 기숙사였습니다. 저만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신부님들이 미사 드릴 때 혼자만 밑에 있었습니다. 물론 아무 말도 못 알아들을 때였습니다.
한국 신학교에서 나름대로 엄격한 교육을 받은 저로서는 유럽 신부님들이 미사 드리는 것은 하나의 충격이었습니다. 먼저 어떤 신부님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미사를 드리셨습니다. 또 어떤 신부님은 감기가 드셨는지 경문 읽는 소리가 다 묻히도록 연신 코를 크게 푸셨습니다. 또 어떤 신부님은 팔짱을 끼고 한 다리를 장궤틀에 올려놓고 짝 다리를 집고서서 미사를 드리셨습니다.
나중에서야 그런 것들이 여기에서는 큰 문제가 안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유럽이 그래서 참 자유로운 나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하는 것처럼 무심코 재채기를 하였는데 또 그것은 여기에서는 예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코를 아무리 크게 풀어도 괜찮지만 재치기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재치기를 소리 내지 않고 하는 법을 익혀야했습니다.
한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또 다른 나라에서는 어리석게 보이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미녀들의 수다를 보면 이런 문화적 차이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들은 한국 어린이들이 그렇게 공부에 시달리는 것이 가장 불쌍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어머니들은 공부 안 하고 노는 아이들을 가장 불쌍하게 생각 할 것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이렇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닐 수 있구나!’라고 느끼며 마음과 시야가 조금씩 넓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유학생활 몇 년을 하고 한국에서 공부한 사제들이 왔습니다. 저는 부제였고 복음을 읽을 때였습니다. 한국은 복음을 읽기 전에 손을 합장을 하고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그러나 저는 습관대로 손을 벌리면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라고 하였습니다. 미사 끝나고 이것에 대해 한국에서 공부하신 신부님으로부터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한국 신학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데 유럽은 좀 엉망이라는 것입니다.
다행히 일행 중에 전례를 공부하는 신부님이 계셔서 전례 상으로는 손을 벌리던 모으던 아무 상관이 없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본질보다는 형식주의에 매여 살도록 교육을 받아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먼저 문제제기를 하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정말 성경에서도 다윗의 별이라든가 다윗의 왕좌를 영원히 이을 메시아가 예견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까지 적혀있습니다. 그래서 동방박사 세 사람에게 율법학자들이 메시아가 날 곳에 베들레헴이라고 일러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런 믿음을 지니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마태오는 그의 복음에 처음서부터 예수님의 족보를 쓰며 다윗의 후손임을 명확히 밝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없음을 다윗 스스로가 쓴 시편을 근거로 들면서 증명합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메시아는 겉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이렇듯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하는 이들도 찾아내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분을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여 성경을 적용시켜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모자이크와 같은 것입니다. 한 부분을 떼어내서 전부인양 말한다면 오류에 빠져 이단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보아야 더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의지도 없고 열심히 살려고도 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를 기준으로 판단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니 저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들의 전부를 본다면 어떤 면에서 나보다 못한 사람일지라도 나보다 더 큰 인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저도 많이도 배우고 변하게 되었습니다.
장기를 직접 두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제 삼자가 되어 훈수를 두면 잘 보이는 것을 경험하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더 잘 보이게 마련입니다. 산 속에서는 산이 보이지 않습니다. 부분을 보지 말고 전체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정말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파는 사람만큼 위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욥은 아무 죄도 없지만 수많은 고통을 받습니다. 당시의 믿음으로 보면 의인이 고통 받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까지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 욥을 나무랍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하느님의 뜻이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완전한 진리는 오직 하느님 한 분입니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나와 또 많은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도 하느님의 절대적 진리 앞에서는 틀릴 수도 있다는 유연한 마음으로 삶과 사람을 보고 이해하려해야겠습니다.
<<짧은 묵상>>
며칠 전 성지순례 하시던 신자들이 우리나라 월드컵 축구 대표 팀을 우연히 독일 뮌헨 공항에서 만났습니다. 다른 신자들은 선수들과 사진 찍느라고 난리였는데 한 개신교 신자인 선수는 수녀님께 와서 대뜸 ‘교황의 무류권’에 대해서 설명해 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수녀님은 왜 교황님이 오류가 없는지 설명해 주실 수 없으셨습니다. 사실 오류가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왜 교황에게만 오류가 없어야하는지 설명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어떤 사람도 오류가 없을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특히 육체적인 감각들은 오류들로 휩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달을 보면 달이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이고 별을 보면 바로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달은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것이고 우리가 보는 별들의 빛 중엔 수십억 년 걸려 도착한 빛들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인류가 생겨나기도 전의 과거의 빛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겉모습으로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하기 때문에 명품 가방이나 큰 차들이 인기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자신들을 꾸미는 행위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도 사람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도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다윗의 후손인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진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고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다윗과 아담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이십니다. 육적으로 사는 사람의 눈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육은 영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어도 마귀의 힘을 빌려서 그 일을 하고 있다고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적인 사람은 오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진리의 성령’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예수님이나 성모님은 모든 것에서 오류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것을 그대로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보느냐고 물으십니다. 모두가 세례자 요한, 엘리야나 예언자로 보지만 오직 베드로만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아버지라고 하시며 베드로 위에 바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에 하느님의 권한인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십니다. 즉,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는 하느님의 성령을 통하여 시작된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진리의 성령을 충만히 내려주셔서 올바로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음을 확인하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는 교회는 없고 사실 교회도 성령강림을 교회의 공식적인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졌고 그 성령을 통해 교회가 오류 없이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오류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그 위에 세운 교회는 성령님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거룩함이 아닌 성모님의 깨끗함이 함께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모님께 성령님이 가득히 내려 성자께서 사람이 되셨듯이 성모님을 포함하고 있는 교회엔 그 깨끗함 속으로 성령님이 충만히 오실 수 있고 그로인해서 교회가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믿을 교리들은 오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을 먼저 인정하지 않으면 교회의 무류권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 아님을 명확히 하시기 위해 다윗이 지은 시편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는 것은 이렇게 진리가 됩니다. 성모님께는 성령님의 ‘은총’이 충만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성모님의 무류성은 인정해야 합니다. 또 교회가 시작될 때, 즉 성령강림 때 성모님께서 베드로와 사도들과 함께 계셨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또 요한 묵시록에 신부, 즉 교회와 성령님이 함께 신랑이신 어린양께 ‘오소서!’하고 계신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모두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처음부터 마리아와 성령님과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황은 그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오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대표로서 공표하는 교리가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엔 바로 마리아와 성령님께서 교회 안에 함께 하신다는 조건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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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의 정통성
-조용상 신부-
메시아란 ‘기름부음을받은자’, 곧 왕이란 뜻이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 선택되었고 또 하느님 마음에 든 왕이었다. 그래서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는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것이 구약의 예언이고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철석같은 믿음을 뒤집는 말씀을 하신다.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는 말씀이다. 그런데 많은 군중이 이 말씀에 기뻐했다고 복음은 전한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믿음과 사고는 사실 일종의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믿음의 본질은 메시아의 정통성을 이스라엘의 왕정에 두고 싶었던 이스라엘 지배계급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 아니었을까? 사실 메시아는 하느님께서 보내는 사람이고, 그가 다윗의 자손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인성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지만, 그것은 예언을 완성하기 위한 일이었지, 메시아의 정통성을 부여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메시아의 정통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윗의 자손 여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의 행위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요즘 나는 모 방송국의 대하사극 <대왕 세종>을 열심히 시청하고 있다. 왕자로 태어났지만 왕세자가 아니기 때문에 백성을 위한 어떤 행보도 왕권을 욕심내는 행위라 하여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백성을 위한 일을 계속하려는 충녕 대군의 노력이 참으로 감동적이다.
충녕 대군이 후일 ‘대왕’의 칭호를 받는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장자에게 주어지는 왕권의 정통성을 받았거나 위대한 업적들 때문이 아니라 참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리라.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어떤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왕이라서 또 메시아라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기 때문에 왕이고 메시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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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양승국신부-
<Anyway>
제목도 특별한 ‘Anyway’(켄트 케이스 저, 더난 출판사)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참 의미심장한 구절을 접하고 음미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정말 어려운 존재다. 때로 사랑하기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다. 게다가 자기중심적이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참기 어렵다. 그래도 사람들을 사랑하라.”
‘그래도 사람들을 사랑하라’ 참으로 어려운 과제 한 가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고마운 것은 부담스런 과제만 주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힌트 하나를 덧붙여주더군요.
“때로 사람들이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때는 그들이 다른 논리와 다른 이성 체계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른 관점이나 다른 경험을 갖고 있으면 같은 사실을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생각해보니 참으로 지당한 말씀입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수시로 상처 입는 우리들, 관계 회복의 실마리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우리들에게 좋은 삶의 지침이 될 말씀입니다.
유다인들 사이에 강생하신 예수님, 공생활 기간 동안 무수히 많은 비논리적인 사람들, 비이성적인 사람들, 극단적 자기중심주의에 빠진 사람들 대하시느라 무수한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율법학자들과의 대립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의 설전이었습니다. 유다 의회와의 마찰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을 아리송하게 만드는 율법학자들의 발언에 조금도 분개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기쁘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들은 참으로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께 올가미를 뒤집어씌우려고 말도 되지 않는 말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끝까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계속되는 모함과 시기와 질투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이 한 길, 사랑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참 자유인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타인을, 원수까지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사랑의 실천에 있어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지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지지하지 않는다 해서, 그들이 비논리적이라고 해서, 그들이 극단적 자기중심주의를 고수한다고 해서, 사랑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해서, 그들을 포기하거나 그들을 향한 사랑을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선택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사랑은 무한대로 확장되는 특별한 것입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의 말처럼 사랑이란 비타민, 미네랄, 단백질처럼 인간의 성장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상대방이 누구든 사랑을 주고받지 않는 것은 본성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피아노나 풍금을 칠 때라도 그 모든 음표가 주님께 대한 사랑의 행위가 되게 하십시오.”(치맛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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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인간이란?
-김찬선신부-
지금 저는 대전 수련소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티모테오서를 묵상하며
그리고 우리 수련자들을 생각하며
사도 바오로와 티모테오 관계를 통해
양성에 대한 성찰을 해 보았습니다.
양성(Formation)은 한 인간을 성숙에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프란치스칸에게는
인간적 성숙,
그리스도교적 성숙,
프란치스칸 성숙 세 차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숙한 인간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성숙한 인간의 첫 번째 조건으로서
저는 뚜렷한 인생의 목표를 갖는 것을 꼽고 싶습니다.
왜 사는지를 모르는 사람,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삶 전체가 갈팡질팡, 방황일 것입니다.
그에 비해 목표가 뚜렷한 사람은 머뭇거림이나 좌고우면함 없이
목표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숙한 인간은 고통에 대해 성숙합니다.
어린 아이는 고통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거부하고
작은 고통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가던 길이나 하던 일을 쉽게 포기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고통을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 있어서 겪게 되는 것으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에
고통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고통이 아무리 커도 잘 견디어 낼 뿐 아니라
고통 때문에 가던 길이나 하던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성숙한 사람은 자기 인생을 사랑합니다.
미성숙한 사람은 삶의 고통이 곧 삶의 불행이고
그래서 고통으로 좌절하고 불행한 자기 인생을 비관하고 원망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고통이 아무리 커도 행복할 줄 알고
하여 자기인생을
목표인 행복을 향해 가는 여정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합니다.
네 번째로 성숙한 인간은
자신의 현재를 겸손히 받아들이고 사랑합니다.
미성숙한 인간은 이상에 집착하여 현재를 부정하기에
언제나 자기를 미워하고 자아가 분열되어 있지만
성숙한 인간은 이상을 추구하기에 늘 현재에서부터 출발하고
완전한 자기통합을 이룹니다.
그리고 성숙한 인간은 사회적 통합을 이룹니다.
미성숙한 인간은 다른 사람을 자기의 목표와 이상의 걸림돌로 여기고
그래서 다른 사람과 늘 갈등하고 경쟁하며
다른 사람에 대해서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가지지만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기에
늘 다른 사람과 함께 자기의 목표와 이상을 향해 가고
함께 일을 도모하며 성취할 줄 압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익혀 왔고
자신의 생활목표와 믿음,
자신의 인내와 사랑을 잘 본받아 살아 왔다고 칭찬합니다.
티모테오는 인간적으로 성숙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으로도 성숙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인생의 목표인 행복을 하느님에게서 찾고
행복의 비결을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에서 찾으며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어 모든 어려움을 견디고 이겨내고
하느님 사랑으로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칸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티모테오가 바오로의 모범을 잘 따랐듯이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잘 따라
그리스도의 길을 성실히 끝까지 가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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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양성(인성과 신성) 불가론
-이기태 신부-
요즘 참 보기 드문 것이 있다면 십원짜리 동전입니다. 그래도 어린이 미사 마치고 헌금을 보면 볼 수 있습니다. 가끔 십원짜리 동전을 보면 동전의 한 면을 깨끗하게 갈아서 새겨진 글이나 그림을 전혀 볼 수 없도록 만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동전을 볼 때 이것도 십원으로 인정할까? 아니면 오원으로 인정해야 할까? 그래도 우리는 십원으로 인정하며 삽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른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도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사람의 한 면만 보고 말을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판단은 두 면을 다 보고 나서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인가?라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다윗 자신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며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다윗의 혈통을 이어 받은 자손이십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려 하지 않으려 하며 또한 메시아에 관해서 말할 때도 현실적인 정치적인 메시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율법학자들의 이 질문은 하느님의 아들이 어떻게 인간의 후손이 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의 양면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바라볼 때 신적인 면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인간적인 면만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의 인간적인 면과 신적인 면을 동시에 보지 못한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같은 경우에 본당에서 보면 신자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우리 신부님은 너무 무섭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우리 신부님 참 좋은 분이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때로는 무서운 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부드러운 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자기 입장에서 한 면만을 보고 이야기하니 본당 신부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보니 때로는 많은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동전의 한 면이 달아서 없어져도 동전은 동전이듯이 예수께서 비록 인간의 모습을 취해 이 세상에 오셨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아들이듯이 본당 신부가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부드럽다 하더라도 신부는 신부입니다. 신부의 양면성은 모두 신자 여러분들을 위하다 보니 그렇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신자들이여! 여러분을 위하여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교육할 때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부디 오해하지 마세요. 사랑해요...............◆
새벽을 열며
어제는 오시겠다는 순례객이 많아서 야외에서 미사를 했습니다. 갑곶성지에서 미사 참례를 하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곳은 미사 후에 성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미사가 끝난 뒤에 성지 설명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점점 날이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약간 불안했습니다. 사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보았거든요. 따라서 저는 성지설명을 하면서도 비가 오면 어떻게 할지를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천막을 쳐 놓았으니, 비가 오더라도 이곳에서 계속 설명을 할까?’
‘아니야. 오늘은 연세 드신 분들이 몇 분 되시는 것 같던데, 이곳에서 설명을 하면 감기 걸리실 지도 몰라. 경당으로 옮겨서 설명을 하자.’
결국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던 성지 설명을 중간에 멈추고, ‘비가 오니 경당으로 옮겨서 설명을 하겠다.’고 말씀드렸지요. 솔직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 많은 분들이 들어가기에는 경당이 너무나 비좁았거든요. 그래도 비를 피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라는 생각에 경당으로 옮기는 선택을 과감하게 했습니다.
잠시 뒤, 경당에서 성지 설명을 이어서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비좁을 것 같았던 경당이 전혀 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300명 가까이 되시는 순례객 중에서 성지 설명을 듣기 위해서 경당으로 오신 분은 20명도 되지 않았지요. 아마 비가 오니 얼른 식사를 하고서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래서 설명 듣는 것은 포기하시고 식사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저는 경당으로 오신 분들에게 성심성의껏 성지설명과 함께 제가 이곳에서 체험한 것들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설명이 모두 끝났고, 이 분들은 다시 일행이 계신 곳으로 식사하러 가셨습니다.
잠시 뒤, 사람들이 제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세요.
“신부님, 아까 경당으로 가서 신부님 설명을 들으셨던 분들이 너무나 좋다고 하던데……. 저희들에게도 그 말씀 다시 해주시면 안돼요?”
저는 이 말에 “성지 설명이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되기 때문에, 저는 하루에 한번만 설명합니다. 다음에 다시 오셔서 설명 들으세요.”라고 말씀드렸지요.
조금 얄미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들은 어떠한 희생 없이 누릴 것 다 누리겠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제 자신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간단히 한번 기도하고 아주 많은 것을 얻겠다는 얌체 심보를 가졌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도 사람들의 겉모습을 보면서 얄미운 생각이 드는데, 하물며 속마음까지 모두 보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이중적인 모습에 얼마나 얄밉게 보일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확실하게 말씀하시지요. 왜냐하면 인간들의 제한된 생각으로 주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도 우리들은 주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자기 자신의 희생은 전혀 없이, 좋은 것은 모두 자기에게만 주셔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기적인 기도를 하고 있지 않나요?
우리들도 보기 싫은 얌체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얌체를 주님께서는 좋아하실까요? 스스로의 희생을 아끼지 않으면서 진실하게 다가오는 사람이 되길 소원하여 봅니다.
얌체가 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이봉하수사-
수도생활을 하고부터 지속적으로 묵상하는 시편 구절이 있습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여행을 할 때 저도 모르게 이 구절을 흥얼거리며 노래로 부르기도
하고 평소 복음 묵상을 할 때 시작기도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수도생활의 나이가 더해지면서 자칫 틀에 갇히고 무디어 갈 수 있는
여러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못된 성질과 마음이 이 구절을 통해 저절로
부드러워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쁜 세상살이 안에서 틈나는 대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의 말씀에
맛 들여간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성경을 읽기보다는 일반 서적 읽기를 더 좋아하고, 영혼에 기쁨이 되는
모임보다는 육신의 만족을 위한 모임이나 강의 등을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 주님을 따르고 영성생활을 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단 한 구절의 시편이나
복음 말씀에 맛 들여갈 수 있도록 스승이신 예수님께 가르침을 청하는
예수 성심 성월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박경수 신부-
◆오늘 복음에서 당시 유다인들에게 전해진 메시아와 실제로 예언된 메시아의 근본적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이 가르치고 바리사이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다윗 가문 혈통의 왕으로서 강력한 군사적 지도력을 지닌 정치적인 메시아였기에 그들에게 “메시아가 누구 자손이냐?”라고 물으면, “다윗의 자손입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했을 것으로 보입니다(마태 22,42).
따라서 예수님은 메시아를 현세적인 정치인으로 잘못 가르치는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시고, 말씀이신 주님이 사람이 되시어 육신으로 지상에 오실 때에는 예언된 대로 다윗 가문의 자손으로 오셨지만 세상 창조 이전부터 말씀으로 계셨던 당신의 신성과 단절되지 않았음을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하지만 성전에서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이 진정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양승국신부-
<가장 절실한 언어, 희망>
미사 다녀오다 운전 중에 우연히 들은 소식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의 저자이신 신영복 교수님이 정년퇴임을 앞두고 오늘 마지막 강연을 하신답니다.
암울했던 지난 세월, 단지 ‘확고한 신념’, ‘맑은 정신’, 아닌 것을 아닌 것이라고 외칠 수 있는 ‘의로움’을 지녔다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세월을 차디찬 감방에서 보내셨던 분입니다. 1988년 가석방된 후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신 교수님께서 이제 후학들과 함께 했던 17년간의 세월을 마무리 짓는 고별강연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궁금증에 확인해보니 한 말씀 한 말씀이 어찌 그리 가슴에 사무치는 말씀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인지요?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사람은 머리만 있어서는 안 되고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가져야 합니다.”
“비판적인 담론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고 인간적 애정이 담겨 있을 때 진정한 의미의 담론과 사상이 될 수 있습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언어가 바로 ‘희망’입니다. 인내가 현재의 상황을 무작정 견디는 것이라고 한다면 희망은 견디기는 견디되 곤경의 건너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날 강의의 주제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이었답니다. 석과란 앙상한 나뭇가지에 마지막으로 남은 과실이라는 뜻이지요. 결국 석과불식을 풀이하면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해서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겨울의 입구에서 앙상한 가지로 서 있는 나무는 비극의 표상이며 절망의 상징이지만 그 앙상한 가지 끝에 달려있는 빨간 감 한 개는 글자 그대로 ‘희망’입니다.”
제게 가장 큰 감동과 긴 여운을 남긴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한 기자가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교수님께서는 20년간이나 감옥생활을 거치셨는데도 사회에 대한 분노를 품고 계시지 않은 듯합니다.”
교수님은 온화한 표정으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제가 출소하니 서대문 구치소도 없어졌고, 그 무시무시하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도 박정희 대통령도 돌아가셨더군요. 제가 처음 취조를 받던 남산 수도경비사령부도 한옥마을로 바뀌고,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도 잔디가 푸른 체육구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바뀐 상황에서 증오를 갖는 것은 증오의 대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봤습니다. 역사의 격동기에는 일정한 숫자의 사람들이 감옥을 채우는 법이고 저는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고. 우리 사회가 겪어나가야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에 제가 해당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스로 내 속의 사회, 시대의 모습을 좀 더 많이, 넓게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환원해 갖지 않도록 노력하지요.”
감옥에서 보낸 20년의 세월이 당신에게는 의미로 충만했던 대학 학창시절이었다고 고백하는 교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정말 큰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이 암시하는 바같이 유다인들은 다윗가문에서 출생한 메시아, 힘과 능력을 갖춘 정치인으로서의 메시아, 결국 로마의 압제로부터 민족들을 해방시켜줄 해결사로서의 메시아, 그래서 이스라엘을 온 세상의 중심이 되게 하는 정복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허무맹랑한 기대를 무너트리십니다. 그들의 그릇된 메시아관에 반박하십니다. 당신은 철저하게도 비폭력주의자로 처신하십니다. 완벽한 평화주의자이십니다.
참된 메시아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이 세상을 초월하는 왕입니다. 다윗 왕을 훨씬 능가하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이집트뿐만 아니라 온 세상 전체를 다스리실 왕 중의 왕이십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그런 만왕의 왕, 온 누리의 주님께서 어찌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고,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잠시 지나갈 이 현세에 기반을 둔 왕이 아니라 영원한 도성,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기반을 둔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 만왕의 왕은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왕, 힘의 논리에 의존하는 그런 왕이 절대 아니셨습니다. 거듭되는 폭력과 압제, 비인간화 앞에서도 끝까지 견뎌내며, 끝까지 용서하며, 박해자마저 사랑으로 감싸 안은 사랑의 왕이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신 분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2티모 3,10-17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복 음 : 마르 12,35-37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10,47)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리코라는 동네에 들렀을 때 앞 못 보는 거지 하나가 나자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간절히 부르짖으며 애원하던 소리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여러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을 정도로 소경이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을 외치자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 소원을 물으시고 볼 수 없던 그의 눈을 치유해 주셨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시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12,35-37)
우리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증명해 주는 대목을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1,1)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족보나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루카1,27) 마리아에 의한 아기 예수 잉태와 탄생이 그 예이지요.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 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루카2,4)
또 구약의 여러 예언서에서도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며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이 드러나 있습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예레23,5)
이렇게 예언서와 신약성경 등에서 분명하게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임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오늘 율법 학자들에게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12,37)고 하시며 다윗의 자손이 아닌 듯한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만의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사시던 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다윗 가문에서 나타날 하느님의 구원자, 메시아였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망하던 ?다윗의 후손?이라는 호칭 속에는 이스라엘을 회복할 정치적, 민족적 정복자로서의 왕의 의미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에 정복을 당하여 고통을 겪고 있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로마에서 해방시켜 줄 지상 왕국의 건설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라는 호칭의 의미를 똑바로 알려주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과연 다윗의 후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지상 왕국의 건설자, 정복자로서의 이스라엘만의 그리스도 개념을 고치시려고 하신 것이지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며 다윗의 후손이십니다. 그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써 단지 다윗 나라의 영광과 가문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인물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 모습을 알리고 그 분 안에서 참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주며 온 인류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온 인류의 구세주이시지 이스라엘만의 구세주가 아님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이런 질문을 던지신 것이지요.
예수님을 단지 나의 현세적인 평안함과 내가 바라는 일들의 성공을 위해서 나를 지켜 주시는 분이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옛날 유다인들이 생각하던 것과 똑같은 생각이지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나만의 예수님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인류의 구세주이시지요. 편협한 나만의 기도와 축복만을 바란다면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기도가 바로 나를 위한 기도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문갑 신부-
이번주 복음은
예수님과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층간의 치열한 전쟁을 전해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본격적인 수난의 길의 가시기로 결심하시고
그 결심의 증거로 이스라엘의 중심부인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중심부인 성전을 정화하시는 사건을 시작으로
메시아로서 당신의 소명을 강렬하게 표출하셨고
이것은 스스로 하느님과 제일 가깝다고 믿고 백성을 가르치던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와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권한에 대해
집요하게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지난 화요일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아가려고 했고
지난 수요일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도 부활 논쟁을 통해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부정하려 들었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 또 한번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예수님의 권위를 깍아 내리려고 합니다.
다윗의 아들이라는 메시아의 칭호는
예수님의 부활 이전까지의 모습은 담을 수 있지만
부활 후 예수님의 모습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칭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메시아의 권위를 부정하는 율법학자들에게 시편 110편을 인용하시면서
다윗 또한 메시아를 주님으로 불렀음을 깨우쳐 주시며
참으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다시 한번 선포하십니다.
이토록 집요하게 예수님을 깍아 내리려는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왜저러나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안스러운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모습과 지금 우리의 모습이
조금은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 우리도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처럼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더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더 칭송받고
다른 사람에 비해 내가 더 높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사람의 본성일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송받으며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높아 보이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하기에
많은 힘이 들어가는 방법이기에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방법은 좀 더 쉬운 방법입니다.
내가 높아지기 힘드니까
다른 사람을 끌어내려서 상대적으로 내가 높아지는 방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방법은
상대방을 많이 깍아 내리면 내릴수록 내가 더 많이 올라 가는 것처럼 보이기에
너무나도 쉽고 매력적인 방법 같지만
결국 상대방도 나도 그 자리에 항구히 멈춰 버리는 허무한 방법입니다.
예수님께 이 방법으로 다가 갔던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이 방법을 통해 자신들이 더 높아진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들이 믿던 가장 중요한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어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사랑하며 살라는 가장 큰 계명을 들었습니다.
내가 인정받고 싶고 더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에 눈이 가려
정작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가장 소중한 ‘사랑’을 놓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