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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누가복음 13:18-30
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22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의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눅 13:18-30 / 눅 13:18 [겨자씨 비유;마13:31-32,막4:30-32]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될까? 19) 하나님 나라는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그 겨자씨는 곧 자라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누룩 비유;마13:33] 하나님 나라를 또 무엇으로 비유할까? 21) 어떤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섞어 반죽을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 22) [좁은 문;마7:13-14,21-23]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여러 동네와 마을에 들러 가르치셨다. 23) 어떤 사람이 예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 안되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24-25) 하늘로 들어가는 문은 좁으니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려고 애를 써도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주인이 문을 닫은 후에는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인님,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애원을 할지라도 주인은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하지만 우리는 당신과 함께 먹었고 당신은 거리에서 우리를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하겠지만 27) 주인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가 분명히 말해두거니와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너희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 못된 짓만 일삼는 자들아, 물러가라.' 28) 너희는 밖에 서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29) 그러나 세계 각처에서 온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을 것이다. 30) 이 짐을 명심하라. `지금 멸시를 받는 사람들은 그때에 가서 크게 존경을 받게 될 것이며 지금 높임을 받는 사람들은 그때에 가서 아무런 대우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본문에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한 예수님의 역설적이고 역동적인 주요 가르침이 담겨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 비유(18-19)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미미하고 눈에 띄지 않게 시작하지만, 그 본질적인 생명력과 확장성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마치 가장 작은 씨앗이 자라 거대한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듯이, 하나님 나라도 처음에는 소수의 믿음으로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나며 엄청나게 성장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안식처와 피난처가 될 것을 상징합니다.
누룩 비유와 여정(20-22) 예수님은 또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시는데 마치 소량의 누룩이 방대한 양의 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리듯,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 세상을 강력하게 변모시키는 영향력을 강조하셨습니다. 22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며 각 성과 마을에서 끊임없이 가르치셨다는 것을 언급하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고 그 가르침이 사람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3-30)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 자가 적은지 묻자, 예수님은 숫자가 아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라고 답하셨습니다. 이는 구원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문이 닫히면 아무리 애원해도 주인은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라고 단호히 거절한 것입니다. 이는 종교적 위치나 보이는 행위만으로는 안 되며, 삶의 변화와 진정한 순종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브라함과 선지자들, 그리고 부름에 참으로 응하는 많은 이방인이 참여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혈통적 특권이 아닌 믿음에 따른 구원이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적용: 당신은 지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어떻게 힘쓰고 있습니까? 현재 당신이 가진 어떤 특권이지만 익숙함 등과 같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방해가 될 부분이 있는지 자문해 봅시다.
바울은 복음을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행 13:47). 그는 1차, 2차, 3차 선교 여행을 통해 아시아와 유럽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테네에서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제단을 보고 이를 통해 지혜롭게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17장). 많은 이방인들이 그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문화와 언어가 달라도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소식인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삶을 살았습니다(갈 1:10). 이러한 바울의 행동은 우리에게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열린 마음과 용기를 가져다 줍니다.
< 설 교 >
부담스럽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눅 13장 18-19절 / 박은호목사
본문 누가복음 13, 18-19 작년 에, 전에 담임목회하던 교회의 장로님 한 분이 3년 가까이 간암으로 투병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때 장로님의 연세가 막 60이 되시던 해였는데, 세상을 떠나시기 마지막 몇 개월은 참 많은 고통을 겪으시기도 했습니다.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장로님의 간곡한 심방 부탁을 받고, 이미 그 교회를 떠난 뒤였지만 제 아내와 같이 심방을 갔습니다. 그 때 저는 그 장로님을 마지막 뵈었는데, 저는 그 때 뵌 장로님의 모습, 함께 나누었던 말씀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체격이 좋으셨는데,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야위셔서 가죽만 남으신 듯했고, 흑달증세로 얼굴이 까맣게 되셨는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고 계셨습니다. 많은 대화는 할 수는 없었고, 가끔씩 몇 마디 주고받는 대화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장로님이 있는 힘을 다해서 제게 기도부탁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 지금 죽으면 안 됩니다. 건강회복해서 10년만이라도 더 살았으면…." 그때, 장로님의 깡마른 두 볼에는 어느 새 금방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참을 그렇게 우시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지금 하나님 앞에 가려니까, 제가 그동안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서…, 정말 부끄러워서 못 죽겠습니다." 하시는 겁니다. 저는, 장로님의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한 인간이 그가 어떻게 한 평생을 살았던지 결국은 그 삶은 하나님 앞에 있는 삶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아하, 인생은 사명(使命)이구나"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장로님이 하신 그 말씀은 그 후에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한 가지 문제'를 던져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렇다면 장로님의 인생은 장로님 말씀 그대로 정말 부끄럽기만 한 인생이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 장로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아무것도 한 것 없는 부끄러운 인생이었다고 생각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만일 나에게도 지금 내 인생의 죽음이 닥쳐온다면, 장로님과 같은 동일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을까?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서 정말 부끄러워서 못 죽겠다는 동일한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전제(奠祭)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時刻)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義)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니,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라." 그렇다면, 이 고백은, 위대한 선교사의 삶을 살았던 바울 혼자만의 고백일 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사도 바울보다 더 멋진 고백을 하면서 내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칠 수는 없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어떤 고백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평가하고 생각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복음적인 그 기준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 스트레스의 정도(程度)가 지나쳐서 늘 패배의식을 가지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한 번 곰곰이 검토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 자녀들이 '어떤 인물'이 되기를 기도합니까? 여러 가지 내용과 다양한 표현들이 많겠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들 딸 세상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솔직한 우리의 기도가 아닙니까? 그 위대(偉大)함의 의미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다 공감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들이 늘 기도하는 것처럼 그런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아직은 아니지만 그런 위대한 인물이 되어 가고 있습니까? 문제는, 우리의 그와 같은 기도와 기대(企待) 때문에, 내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그 기대치와 삶의 현실 사이에서 오는 패배의식과 절망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우리는 늘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무조건 위대해져야만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반드시 출세해야 하고, 성공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남보다 더 뛰어나야 하고, 할 수만 있으면 2등, 3등이 아니라 꼭 1등해야만 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우리를 언제나 그렇게 만드시는 분인 줄로 생각합니다. 만일 지금 내가 그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그 스트레스가 정말 복음적(福音的)인 것인가를 한 번 물어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일등(一等)만 기억해주지 이등(二等)은 기억해 주지 않는다"는 어느 기업의 광고 카피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무한 경쟁 시대의 현실을 잘 표현해주는 말입니다. 우리를 기 죽이는 광고 카피입니다. 우리에게 불안감을 주고, 절망감을 주고, 스트레스 받게 하는 말입니다. 불행하지만, 우리는 예수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등만 기억해주시지 이등은 기억해 주시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그릇된 비복음적인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받고 있는 삶의 스트레스, 절망감, 패배의식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등(一等) 하느냐, 이등(二等) 하느냐, 아니면 꼴찌를 하느냐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 상대적인 평가와 기준으로 우리 인생을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성공하느냐, 출세하느냐, 일등을 하느냐, 이등을 하느냐, 꼴찌를 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릴 때마다 정말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저와 여러분의 삶의 자리인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최선을 다하여 일등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최선을 다했지만 이등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등에도 만족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정말 최선을 다했지만 꼴찌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때로 꼴찌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의 바벨론 포로시절 느부갓네살 왕 때,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꼴찌를 자청한 용감한 신앙인들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들의 생명을 삼키는 풀무불 속에 뛰어든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神像)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 17-18). 이들은, 오히려 꼴찌인생을 택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관심을, 오늘 본문 누가복음 13, 18-19(마 13, 31-32; 막 4, 30-32)절에 나오는 예수님의『겨자씨 비유복음』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이 겨자씨의 비유복음을 두 가지 전통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왔습니다. 그 하나는, '성장(成長)이라는 관점'입니다.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가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낸다는 겁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들도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복음을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成長)을 말씀하시기 위한 비유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장의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비유를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매우 피상적인 이해에 불과합니다. 또 하나의 관점은, '대조적(對照的)인 관점'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겨자씨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 하십니다. 그런데, 그 겨자씨가 심긴 후에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면, '큰 나물'(무)이 되고, 가지도 내고 공중의 새들도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땅 위의 가장 작은 씨앗과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된 '큰 나물'에 대한 '대조적인 관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겨자씨의 비유복음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 자라 큰 나물이 된 겨자나물에 대한 대조적인 관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하나님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투 쎄우』를 말씀하시면서, 왜 하필이면 겨자씨의 비유복음으로 말씀하셨을까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복음을 말씀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는 그저 단순하게 성장(成長)하고, 그 성장의 정도를 보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성장한다는 대조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말씀하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겨자씨와 겨자나물의 성장과 대조적인 크기보다, 훨씬 더 큰 성장(成長)과 대조(對照)를 보여줄 수 있는 다른 것으로,『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으면 더 적절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조금 신경을 써서 답(答)을 생각해 보시고 각자 답을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겨자씨 비유복음』을 들었을 때, 그들이 놀라고 기뻐했겠습니까? 아니면, 실망하고 낙심했겠습니까? 아니, 이 비유복음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비유복음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언제나 그 말씀에 기쁨으로 응답했겠습니까? 아니면, 실망하기도 하고 예수님의 그 비유복음을 오히려 거부했겠습니까? 저는, 후자(後者)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복음은 언제나 그들에게 탐탁찮은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들이 기대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대안적(代案的)인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지혜로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꿈꾸고 있던 하나님의 나라는, 에스겔서(겔 17, 22-23)와 다니엘서(단 4, 1-12)에 나오는 백향목(柏香木) 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백향목은, 세계적인 유명한 나무입니다. 그 높이가 36m정도 자라고, 나무의 몸통둘레가 9-12m까지 자라는 대단한 나무입니다. 유대인들은, 백향목을 가장 크고 아름다운 나무로 보았고, 그 나무는 언제나 중심(中心)에 우뚝 서고, 다른 모든 것보다 더 크고 장대해서 그들이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의 표상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나무라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은 백향목 같이 온 세계의 중심(中心)에 서고, 땅 끝에서도 그 중심에 선 나무를 볼 수 있는 최고(最高)의 나무로서 이스라엘,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백향목과 같은 하나님의 나라, 크고 강대했던 다윗 왕국과 같은 강대한 이스라엘의 미래를 꿈꾸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반문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비교할 대상을 찾으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 30-32)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과 그림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고 꿈꾸던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 그림과는 전적(全的)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외모로 보기에도 아름답고, 늠름하고, 잘 생긴 백향목 같은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찌보면 그것과는 정반대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겨자풀"이나 "푸성귀"로 보이는 그런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겨자 나물은, 다년생 나무가 아니고 일년생 초본, 풀에 불과합니다. 다 자라야, 겨우 1.5m나 2m정도 밖에 자라지 않는 초본(草本)과에 속한 나무입니다. 그 굵기도 겨우 손가락 굵기 정도밖에 안되는 정말 볼품없는 나물 같은 나무입니다. 겨자나무(나물)는 나물인지 나무인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는 그런 식물입니다. 아무리 크다는 것을 강조한다 해도 그저 나물과 나무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하나님의 나라』의 깊은 진리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꿈과 기대와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은, 겨자나물 같이 초라한 내 삶을 부정하고, 백향목 같이 위대한 삶을 꿈꾸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내 삶의 자리를 그대로 긍정하는 데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됩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백향목 같이 온 세계의 중심에 서야만 하고, 그 어느 것보다 높은 높이를 자랑하는 그런 세속적인 위대한 나라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나라입니다. 실망스런 나라입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 비유말씀대로 표현하면, 내가 땀 흘려서 충분히 경작할 수 있는 작은 텃밭 "내가 소유한 그 채소밭"에서 조용하고, 작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가 채소밭에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고, 공중의 새들도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되는 것처럼, 낭만적(浪漫的)이고, 자연적(自然的)이고, 목가적(牧歌的)이고, 사랑이 가득한 그런 나라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는 저희 둘째 아들레미가, 여름방학을 하면서 학교생활통지표를 가지고 왔습니다. 요즘 초등학교의 통지표를 보면, 아이들의 학업발달을 숫자로 표시하지 않고,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전체 10 과목을 공부하고 있는데, 담임선생님이 얼마나 정확하게 아이를 이해하고 파악하고 계시는지, 그 통지표를 보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아직도 학교에 한 번도 찾아가서 인사드리지 못했지만, 선생님께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우리아이의 행동 특성 및 종합의견을 보면서 저는 참 기뻤습니다. 제가 기뻐했던 이유는, 우리아이가 완벽한 아이라서가 아니라, 아직도 여전히 문제가 있고 미완성의 아이이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고 소망이 있고, 객관적으로 아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기록하셨습니다. "행동이 매우 민첩하고 순발력이 뛰어나며 명랑하여 친구들과 즐겁게 학교생활에 임합니다. 두뇌가 명석하여 학습내용을 빨리 이해하므로 전 교과 성적이 고루 우수합니다." 그 다음이 제가 가장 기뻐했던 이유입니다. "수업시간 시 산만하고, 가끔 장난을 심하게 치는 경우가 있으므로 2학기에는 고쳐야겠습니다." 저는, 우리아이의 문제를 기뻐합니다. 긍정합니다. 그 이유는, 그 문제를 넘어서, 그의 인생 속에서 이루질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저는 우리 아이들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과 기업인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축복하시되,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그들의 인생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이것이, 우리아이들을 위한 저의 기도제목 전부(全部)입니다. 사랑하는 제 아이들을 위한 저의 기도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매우 단순해졌습니다. 위대한 인물 되게 해주십시오. 세계적인 인물 되게 해주십시오. 언제나 중심에 서는 사람 되게 해주십시오. 우뚝 솟은 인물 되게 해주십시오. 저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인생인 자기 채소밭에 심겨진 겨자씨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겨자나물처럼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고, 가지를 내어서 공중의 새들도 와서 깃들일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사는 자들이 되기를 기대하고 축복합니다. 저는 정말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내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텃밭 채소밭을 긍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현재의 삶의 자리, 지위, 신분을 긍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병든 몸도 긍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요함과 가난도 긍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 남이 알지 못하는 아픔과 눈물, 외로움이 있다 해도 그것까지도 긍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크지 않다고 부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높지 않다고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과 같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절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내 인생의 채소밭에, 내 삶의 자리에, 겨자씨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씨앗이 심겨져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자리가, 인생의 채소밭이, 어떤 모양의 밭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길쭉하던지, 동그랗든지, 세모났던지 아무 상관없이 그곳에 겨자씨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씨앗이 심겨져 있기만 하면, 분명히 내 인생 속에도 우리 주님이 꿈꾸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장 작은 씨앗 같은 복음이지만, 그것이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고 가지를 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들도 와서 내 인생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 깃들이며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채소밭에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인 겨자씨가 심겨져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며 도전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가슴과 삶 속에서 꽃이 피고,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내 삶 속에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옥에 갇힌 여기 있는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먹을 것을 주고, 영접하고, 옷을 입혀주고, 돌보아 주는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언제나 높아지고, 중심에 서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고, 변방으로 가고, 어디서나 나지막하게 자랄 수 있는 겨자나물 같이 우리 안에서 조용하게 그러나 힘있게 생명력 있게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시기 위하여,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텃밭을 사용하기를 기대하고 원하십니다. 그 주님의 부르심(召命)과 기대(企待)에 복음적으로 응답(應答)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겨자씨 한 알 같은 하나님 나라
눅 13장 18~21절 / 이동휘목사(평강교회)
1. 사람이 죽으면, 그 가족들이나 친지들이 슬퍼하며 ‘이제 좋은 곳에 가서 편히 쉬라’고 말합니다. 죽은 사람이 그간 세상에 살면서 너무나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에 건네는 말입니다. 오랜 병고(病苦) 끝에 죽은 사람의 경우에는 ‘이제 아프지 말고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살라’ 고 말합니다. 너무 일찍, 채 피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이에게는 ‘이제 좋은 곳에 가서 오래 오래 살라’ 고 합니다. 살면서 한 번도 행복하게 살지 못했던 사람에게는, ‘이제 좋은 곳에 가서 정말 행복하게 살라’ 고 말합니다. 편하게, 아프지 않고, 그리고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사는 곳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기원해 보는 것입니다. 인생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면, 인생 자체가 억울한 사람, 슬픈 사람, 괴로운 사람, 허무한 사람, 그리고 불쌍한 사람이 너무도 많을 것입니다. 인생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면, 인간의 존재 가치는 짐승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은 너무나 짧습니다. 결코 길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고전15:19)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이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 104: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시 146: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사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더 구체적으로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3:19-21) (19)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21)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인간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둘 다 똑같이 죽는다는 사실이고, 죽으면 그 모든 것들이 흙으로 돌아가니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짐승보다 나은 것은, 짐승에게는 영혼이 없어 죽으면 그냥 흙으로 돌아갈 뿐이지만, 인간은 영혼이 있어서 죽으면 그 영혼은 ‘위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짐승의 혼이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은 짐승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난다, 더 이상 사후의 세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사후의 인생의 영혼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소관 하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영원한 천국에 가거나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면 모두 꿈꾸는 세계, 더 이상 아프지 않고, 고통하는 일이 없고, 눈물이 없고,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세계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 나라, 천국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계21:3-4)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현대 과학과 의학 그리고 물질 문명이 놀라우리 만치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복과 안전은 그에 비례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더 두려운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인류에게 가장 이상적인 사회와 국가를 꿈 꾸어왔지만 세상은 현실과 너무나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유대 민족은 언제나 장차 임할 황금 시대 곧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소망했습니다.
(암9:13-14) (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파종하는 자가 곡식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그 땅이 너무 비옥하고 기름졌기 때문에 거두는 자들은 씨 뿌리는 자들의 바로 뒤에서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아무도 주리지 않으며, 아무도 목마르지 않으며, 그리고 아무도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은 풍요로운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렘31:12) (12)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그리고 호세아, 이사야 선지자는 인류 사회의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참된 평화와 안전의 행복한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호2:18)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사11:6-9)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65:25) (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사65:20) (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
다시는 고통과 늙는 것과 약함과 쇠퇴가 없는 하나님 나라(천국)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 천국이 도래하고 있다고 비로소 선포하셨습니다.
(마4:17)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약속되어 왔던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고 예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2.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 천국,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임하고 있는가를 비유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겨자씨와 누룩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은, 외적으로 확장되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고, 작은 누룩이 빵에 퍼져나가는 모습은, 내적으로 확장되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만을 의미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부분적이지만 지금 현재 세상에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사람들이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고쳐 주시자 눈먼 벙어리가 말도 하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 놀라 ‘이분이 혹시 다윗의 후손이 아닐까?’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이 사람은 귀신의 왕 사탄의 도움으로 귀신을 쫓아낸다.’ 며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임을 부정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싸워 갈라지면 망하고 그 어떤 마을이나 집안도 서로 싸워 갈라지면 오래가지 못하느니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이미 서로 갈라져 싸우는 것이니 그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설 수 있겠느냐? 내가 사탄의 도움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면 너희를 따르는 사람들은 누구의 도움으로 귀신을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될 것이니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면 벌써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니라.’>(마12:22-28) 예수께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내시므로 벌써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있는 사역,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부분적이지만 지금 세상에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그리고 천국은 언제 어떻게 올 것인가? 이에 대해 성경은 다양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경험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지금 임하고 있다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롬14:17)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의와 평강과 희락”은 성령의 열매들로써 성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지금’ 누리는 영적 실체들입니다. 우리 나라의 기독교 역사상 초창기의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님이 6.25동란 무렵에 목포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공산당에 붙잡혔습니다. 끌려가서 심한 고문과 조롱을 당하며 나날을 보내었는데, 어느 날 한 공산당원이 이 목사님을 끌고 가서 또 고문을 하다가 아주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영감, 내한테 천국 좀 보여 줄 수 있어?” 하고는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이 목사님은 발길에 채이면서도 “예, 보여드리지요.” 하고 말했습니다. “야, 죽어서 가는 천당 말고 지금 당장 보여주란 말야.” 하고는 또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예, 지금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라는 이 목사님의 말에 공산당원은, “어떻게 보여주냐?” 고 하며 또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그 때 이 목사님은 “예, 천국 본점이야 내 소관이 아니니까 보여 드릴 수 없지만 지점이야 내가 보여 드릴 수 있지요. 그 천국 지점이 바로 제 마음입니다. 내 마음에 천국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조롱하고 발길질하며 고문할지라도 내 마음에는 성령을 통해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7:20-21)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성봉 목사님은 육체적으로 당하는 조롱과 발길질, 그리고 심한 고문을 받아 고통스럽지만 자기 마음 속에 누룩처럼 퍼져가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이렇게 지금 세상 가운데 임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야만”하는 것입니다.
(막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anyone who wi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무엇을 받아야(receive) 하는가? 받아야(receive) 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rule of God)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완전한 믿음가운데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receive)은 바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없이 천국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결코 어떤 땅이나 영토가 아니라, 오직 인간의 마음과 심령, 그리고 인간의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왕권, 하나님의 지배를 말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일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어떤 일로 친구와 크게 다투었습니다. 마침 그때는 예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그는 여러 번 시도했으나 예수의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림이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림 제작을 중단하고 며칠 동안 명상에 잠겼다가 실패의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재주있는 손을 가졌다고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고도로 발달한 두뇌를 가졌다고 가치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을 때 나는 예술가도 될 수 없고 사람다운 사람도 될 수 없습니다.” 다 빈치는 즉시 친구를 만나 화해했습니다. 그리고 금전에 얽혔던 분한 생각을 잊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런 뒤 며칠이 지나 다시 작업실에 들어가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얼굴을 아주 만족스럽게 화폭 위에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찾는 것이 성한 눈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뜻합니다. 내 성격이나 내 욕심이 다스리는 세계가 아닙니다. 걱정과 불안과 나의 좁은 생각을 몽땅 묶어 하나님이 관리하시도록 맡기는 믿음의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은 정치적인 왕국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랑의 왕국인 것입니다. 마드리드(Madrid)에서 1958년에 개최된 세계 마라톤 대회에서 감격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결승점을 불과 1마일 앞두고 1등으로 달리고 있던 선수의 다리에 심한 쥐가 일어났습니다. 2등으로 달리다가 이것을 본 선수는 1등으로 달리던 선수를 부축하여 일으켜 함께 천천히 달렸던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둘 다 등수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경기장에 입장하여 마지막으로 운동장을 돌 때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1 등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 통치의 축복을 부분적이나마 지금 경험할 수 있는 현재 영역이며, 또한 예수님 재림 시에 완전히 경험하게 될 미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성도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입니다. 천국 역시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임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에 가기 전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통치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고 주의 말씀 앞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우리의 삶과 인생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성도 여러분의 삶이 되어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 하나님 나라의 행복한 삶을 경험하시며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4. 다음으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겨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 씨가 매우 작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작냐 하면, 비록 손바닥에 놓아준다 할지라도 일반인들이 육안으로는 겨자씨 한 알을 쉽게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작습니다. 아주 가느다란 볼펜으로 콕 찍어놓은 점보다 더 작은 것이 겨자씨입니다. 무게 1g은 물 1cc인데, 눈물 두 세 방울이면 1g, 1cc입니다. 그런데 겨자씨가 얼마나 작냐 하면, 겨자씨 725-760개의 씨앗이 겨우 1g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겨자씨가 얼마나 생장력이 좋은지 다 자라면 높이 3-4m(최고 7m)까지 자라서 마치 나무처럼 무성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나무와 그늘에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겨자씨’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통치의 형태를 바꾸는 것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가장 보잘 것 없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 개개인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실현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겨자씨의 성장과 같다는 것은, 그 나라의 시작이 매우 작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눈여겨 보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는 극히 작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과거 영국에서 (스코틀랜드) 있었던 일입니다. 시골에서 작은 교회를 시무하시던 두 목사님이 어느 날 만나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였습니다. 한 목사님이 먼저 말합니다. ‘여기서 목회를 한지 참으로 오래되었지만 교회의 부흥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목사님 역시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오랜 시간 여기서 목회사역을 감당했지만, 별다른 회심자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두 분의 목사님은 마음의 무거운 짐들을 서로에게 말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러한 곳에 저희를 보내셔서, 이러한 힘들고 암울한 상황을 만나게 하십니까?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작은 두 교회에서 위대한 믿음의 사람 두 사람이 성장하여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로버트 마핏이라는 청년이고, 또 한 사람은 리빙스턴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로버트 마핏은 나중에 아프리카 선교의 기초적인 틀을 마련한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고, 그 뒤를 이어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대륙에 본격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불을 지르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세계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새로 쓴 위대한 두 선교사가 배출된 것입니다. 작은 곳에서 하나님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작은 것에 가치는 결코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한 사람, 아담이 지은 죄로 죽음이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는 모든 사람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판정을 받게 된 것처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으로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 아담이 순종치 않으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같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될 것입니다....그래서 죄가 죽음이란 수단으로 군림하게 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롬5:18-21)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영국의 어떤 교회에서 한 어린이가 그의 용돈을 털어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이 소년은 자신이 드린 헌금으로 꼭 신약 성경을 사서 인도에 보내 달라고 목사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어린이가 낸 헌금으로는 당시 신약성경을 살 수 있는 돈이 아니었지만, 목사님이 어린 아이의 마음과 정성이 기특해서, 이 돈에 더 보태 아주 작은 신약성경 한권을 샀습니다. 이 목사님은 기념으로 아이에게 이 신약성경책 앞에 아이의 이름을 적게 하고, 그 신약성경책을 인도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소년도 잊었고 목사님도 잊고,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후 이 목사님이 선교의 일로 인도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인도의 어떤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참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마을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이 마을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까?’ 마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한 선교사가 이 마을을 찾아와서 작은 신약성경 한 권을 건넨 것이 그 마을의 복음화의 기초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을 사람들이 그 성경을 가져왔습니다. 오래되어서 다 떨어진 자그마한 신약성경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 성경책을 보고 이 목사님은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이 성경책에 20년 전 자기 교회의 한 어린아이의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 어린아이가 자신의 용돈을 털어 구입해서, 인도에 보냈던 그 성경책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역사는, 복음의 위대한 역사는 팡파레가 울리고, 나팔이 울리는 거창한 선전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겨자씨처럼 아주 작은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저와 여러분의 작은 헌신, 작은 정성, 작은 열정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귀하게 사용되어질 수 있음을 믿으십니까? 보잘것없는 죄인에 불과한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 앞에 나오면, 천하보다 귀한 천국의 백성이 됨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이처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통해서 그분의 위대하심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시작하신다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 날, 예수님의 탄생을 환영하는 환영식이 열린 적이 없습니다. 세상의 구주가 나셨는데, 만왕의 왕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사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또 그분은 마굿간의 구유에 태어나셔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적을 무찌르고 백성들을 높이 세워줄 수 있는 강력한 왕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작은 아기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작고 초라한 시작이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사53: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작고 초라한 예수님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을 보잘것없는 사람, 하찮은 사람으로 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믿고 경배하고, 찬양합니다. 예수님 뿐만 아니라 그분의 열 두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모두 보잘 것이 없는 시골출신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전 세계의 복음화라는 사명을 맡기셨고, 마침내 그들을 통해서 전 세계 곳곳에 복음이 들어가고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작은 겨자씨와 누룩같은 내 모습이 아니라, 이것을 사용하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겨자씨와 누룩같이 작고 작은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면, 하나님이 그분의 손으로 우리를 붙드신다면, 우리는 변화될 수 있고, 쓰임받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겨자씨가 자라나서 나무가 되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누룩이 발효한 그 광경을 지켜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반죽가루 속에 있는 한 줌의 누룩은 놀라운 발효의 힘을 가지고 그 자체를 키워 나가기 시작합니다. 기독교 교회 역사가 걸어 온 발걸음이 그러합니다.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그리고 질적으로도 성장해 왔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역사이며, 하나님 나라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은 이후 어떻게 성장하고 자라 왔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적으로도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우리의 언행 심사가 하나님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바뀌어나가야 합니다. 또한 내적으로도 성숙하게 변해야 합니다. 누룩이 밀가루 반죽 전체를 변화시켜 가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그 하나님 나라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고, 천국 복음을 전하는 일이 겨자씨같이 작을지라도, 날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역사가 성도 여러분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큰 나무, 큰 사람
눅 13장 18~19절 / 박경수목사
목적:많은 사람, 다른 사람을 품는 큰 나무,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빛이 되신다.
대선을 앞두고 대권에 도전하는 후보자들이 난립하고 있을 때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는 “큰 사람, 센 사람”이라는 칼럼을 신문에 기재한 일이 있었다. 앞으로 5년을 책임져야 할 대권 후보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 하나같이 센 사람은 되고 싶어 하지만, 그들에게서 큰 사람의 면모를 보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여당 측에서는 지난 5년간의 실정으로 민심 이반이 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얻은 정권을 놓치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만 기울였고, 야당 측에서는 도덕적인 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재탈환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권력과 금력, 지력과 체력을 가진 힘 있는 센 사람들은 있어도 살신성인의 자세로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을 만큼 지도자로서 신뢰받을 만한 큰 사람이 부재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도자를 택할 때, 최선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이 아닌 차악이라도 택한다는 이들이 많았다.
어느 교회를 보아도 사정은 매한가지이다. 교회는 힘센 강자보다는 만인들에게 우러러 존경을 받고 사랑받는 큰사람이 필요한 곳인데, 교회도 예외 없이 힘센 강자들이 중심에 우뚝 선다.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사 53:2~3).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힘센 사람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잠잘 곳이 없어 가장 낮은 자리인 마구간 구유에 태어 나셨다. 권세 있는 자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당당함이 없다.
아기 때만 그러셨을까? 아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시기 직전, 마귀에게 시험 받으시던 일이 있었다. 그때에도 예수님의 태도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돌이 떡이 되게 하셨는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셨는가? 일을 하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자존심 구기면서 마귀에게 절을 하셨던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를 잡으러 온 자들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체포당하셨다. 자기를 재판하는 자들을 재판하실 수 있으며,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을 오히려 죽이실 수 있는 분이셨다. 그러나 전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죽음을 목전에 둔 어린양처럼 순하게 모든 고난을 받으셨다. 예수님의 이미지 속에는 센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전혀 없으시다. 세상적으로 보면 지극히 무능력한 사람처럼 보이기만 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능력이 언제 사용되었는가? 타인들의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되었다. 예수님의 힘으로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다. 죽은 자들을 살리고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데 사용하셨다. 자기를 죽이기 위하여 칼을 가지고 왔던 ‘말고’라는 종의 잘려진 귀를 다시 붙이는데 사용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한 번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시지 않으셨다.
강남에서 출세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조건을 들어보았는가? 압구정동에 살아야 하고, 현대아파트에 살아야 하고, 소망교회에 다녀야 한단다. 지금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인수위가 준비되었는데, 인수위원장을 비롯한 사람들 중의 40%가 소망교회 소속이라고 한다. 이만하면 기독교의 힘이 강력하지 않은가?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가 25%에 도달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기독교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강남에서는 한때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이 될 것과 성경을 공부해야만 한다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지금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싶어 하는 경우가 참 많다. 안티 기독교가 생겨났는데, 그들은 기독교 박멸까지도 이야기하고 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까? 기독교가 힘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인들 중에 센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 기독교는 역대 대통령 중 2명이나 장로를 배출했다. 이명박씨까지 계산하면 3사람이나 된다. 불행히도 한 장로님 대통령 때는 가장 타락한 시대였고, 또 한 장로님 대통령 때는 제2의 국치라고 하는 IMF를 불러오는 시대였다. 센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기독교인의 숫자가 적기 때문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기독교가 힘을 얻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권위를 되찾기 위해서는, 복음의 문이 더 확장되기 위해서는 센 사람이 아닌 큰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한다. 큰 사람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을 말한다. 그에게는 허세가 없다. 자기 자랑이 없다. 어디서나 양보한다. 자존심도 없다. 높은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 남의 발을 닦아준다.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도 준다. 오리를 가자면 십리까지도 간다. 사람들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는다. 그래서 늘 손해만 본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어리석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렇게 어리석게 사신 분이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별명을 붙였다. ‘거룩한 바보’라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무덤에 모여 살았다. 예배를 드린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덤에 모여 살았다. 그런 세월이 300여년 흘렀다. 그리고 로마에 의해 국교로 인정되었다. 기독교가 언제부터 타락했을까? 묘하게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받고 부터이다. 국가에서 교회를 지어주고, 목사들 월급도 주었다. 교회가 힘을 얻었다. 강력해졌다. 세상에서 말하는 힘을 갖는 그 순간이 교회가 타락하는 시작이 되었다.
남 유다에는 참 좋은 왕들이 많았다. 그 중 한 왕의 이름이 아사이다. 남 유다를 치기 위하여 구스, 에티오피아에서 백만 대군을 일으켰다. 아사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주 그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주님, 주님께서 돕고자 하실 때에는, 숫자가 많고 적음이나 힘이 세고 약함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이 무리를 물리치러 왔으니, 주 우리의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주님,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주님을 이기지 못하도록 해주십시오!”(대하 14:11). 아무리 숫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하나님을 이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부르짖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었다. 결과는 아사의, 아니 하나님의 대승이었다.
성경은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였다고 기록한다. 주변 나라에서는 스스로 조공을 갖다 바치고, 전쟁을 하면 승리를 거두니 확실한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다.
아사 왕 36년에 북 이스라엘이 쳐들어오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사는 급하게 아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람이 북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 어쩔 수 없이 북 이스라엘로 하여금 스스로 철군하도록 만든 것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참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는 이 일이 하나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선견자 하나니를 통하여 경고하신다. 하나님 아닌 아람을 의지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아람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그 눈으로 온 땅을 두루 살피셔서, 전심전력으로 주님께 매달리는 이들을 힘 있게 해주십니다. 이번 일에, 임금님께서는 어리석게 행동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임금님께서는 전쟁에 휘말리실 것입니다.”(대하 16:9). 모든 태평성대가 끝이 나고, 전쟁을 계속해서 만날 것이라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나지 않는다. 아사는 즉각 하나니를 감옥에 가두고, 억울한 백성들을 붙잡아다 감옥에 집어넣는다. 사람이 갑자기 변했다. 3년 후 아사는 발이 썩는 병에 걸리는데, 그 일로 인해 죽게 된다. 단지 발이 썩었다는 것만으로 생명을 잃은 것이다. 힘이 센 사람은 사람들 중에서 커보일지 모르겠지만,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도 크지는 않다.
노래를 할 때 자기 목소리를 있는 힘껏 소리 내서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틀린 방법이다. 자기 목소리의 70~80% 낼 줄 아는 사람이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다. 사랑을 할 때 100% 모든 힘을 다 기울이는 것은 사랑이 아닌 집착이다. 사랑은 자기가 줄 수 있는 힘의 80%만 주면 된다. 절제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크시다. 크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지만, 모든 것을 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만약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하신다면?
그래서 그럴까? 예수님께서 매력을 느끼시는 사람은 스스로 강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부족하다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셨다. 그래서 그들을 가까이 하시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변화산에서 자기 손으로 예수님을 위해 집을 지어드리고 싶었고, 자기 손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지켜드리고 싶었다. 그런 그의 마지막은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하고 도망치는 모습이었다.
베드로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을 체험했다. 그리고 나서 변화되어졌다. 사도행전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에서 시작된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다. 그때 다른 날과 다름없이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보았다. 이전의 베드로라면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으로 앉은뱅이에게 주고자 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다르다. 베드로가 주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행 3:9). 예수님의 이름이다. 자기가 주고 싶은 것이 있다 해서 앉은뱅이에게 얼마나 소용되겠는가? 자기 생명을 준다고 해서 앉은뱅이 삶에 큰 유익이 되겠는가? 주어야 할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주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베드로를 통해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기가 할 수는 없지만, 자기가 믿는 예수님을 기꺼이 나눠주려 했던 베드로를 통해서는 초대교회가 세워진다. 센 사람이고자 할 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만, 큰 사람이고자 할 때는 성령님께서 그를 통해 새로운,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세상에서는 성공주의를 지향한다. 성공하는 사람이 최고이다. 반대로 성공하지 못하는 인생은 실패작이다. 너무나 분명하게 구분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은 힘이 아니라고 한다. 일등이 아니면 다 꼴등인 것만 같다. 많이 가져야만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봉고를 타고 관공서에 들어갔다가 퇴짜를 맞은 적이 있다. 나중에 보니 검은 그랜저를 타고 가면 문까지 열어주던데 말이다.
우리는 비전을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비전은 야망과 다르다. 야망은 이기적이지만, 그러나 비전은 타자본위이다. 야망은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지만, 비전은 자기 지경을 축소하고 다른 사람의 지경을 넓히고자 한다. 야망은 죽음이며 지옥이지만, 비전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꿈이다. 우리에게는 야망이 아니라 거룩한 비전을 품은 사람이 필요하다.
갈등을 겪는 교회들이 많다. 어떤 교회들은 예배를 드리면서 두 패로 나누어 드린다. 이쪽에 앉은 사람들은 목사파, 이쪽에 앉은 사람들은 장로파다. 헌금도 따로 드리고, 따로 관리한다. 그게 도대체 뭘하는 짓들인지…….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 5:23~24). 형제 안에 화목을 이루고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신다. 무한 경쟁인 예배에는 하나님 자신도 참석을 거부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성도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하나님께서 찾고자 하시는 사람은 센 사람이 아니라 큰 사람이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후레더릭스벅 전투에서 있었던 일이다. 후레더릭스벅 지역은 작은 땅이었지만 남군과 북군 모두 중요한 전략적 위치로 양쪽 군은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큼 전쟁은 치열했고, 많은 사상자가 났다. 후레더릭스벅 지역은 총소리로 뒤덮였고, 포탄연기로 뿌옇게 안개가 내려앉을 정도였다.
그러는 동안 남군 북군 할 것 없이 사망자의 수는 급격히 늘어만 갔다. 부상자들의 신음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그들은 모두 ‘물을 달라’고 외쳐댔다. 이를 보다 못한 북군의 한 병사가 대위를 찾아가 말했다.
“대위, 저들에게 물을 먹이게 해 주십시오. 저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그러나 대위는 단호히 거절했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는 데다 빗발치는 총알 속으로 뛰어 들었다가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대위님, 제발 허락해 주십시오. 저들은 모두 저의 친구들입니다. 총소리는 요란하지만 물을 달라는 소리는 너무나 똑똑하게 들립니다.”
이제 병사는 무릎을 꿇고 대위에게 매달렸다. 대위는 할 수 없이 허락했다. 병사는 대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물 한 동이를 떠서 총알이 빗발치는 곳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총알은 병사의 곁을 쌩쌩 스쳐 지나갔으나 병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물을 달라는 병사들에게로 가 물을 먹이기 시작했다. 적군이고 아군이고 가리지 않고 물을 먹여 주었다. 죽어가던 병사들은 그 물을 받아먹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병사를 향해 일제히 총을 쏘아대던 남군은 병사가 하는 일을 알아내고 곧 사격을 멈추었다. 이제 더 이상 총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병사가 죽어 가는 이들에게 한 모금의 물을 먹여주며 마지막 위로의 말을 속삭여 주는 두 시간여 동안 전쟁은 휴전된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과 같은가? 그것을 무엇에다가 비길까? 그것은 겨자씨의 다음 경우와 같다.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눅 13:18~19).
사람은 사람을 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을 품으면 품을수록 큰 사람이다. 큰 나무에 온갖 새들이 날아와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큰 사람에 온갖 사람이 모여들어 쉼을 얻을 수 있다.
일명 ‘과일 샐러드 나무’라 불리는 나무가 있다. 오렌지 나무인데, 자그마치 11종류의 열매가 열린다. 이 나무를 구경하기 위해 관광객들도 제법 많이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20080104 팝뉴스). 성경에도 이와 유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도시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흘렀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내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입니다.”(계 22:2).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강물이 있는데, 그 강물이 흐르는 곳에 이토록 기가 막힌 나무가 있다는 것이다.
누가 생명의 강물에 심긴 나무인가?
누가 그곳에서 12가지 열매를 맺고 있는가?
누가 큰 나무, 큰 사람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쉬어 가게 하는가?
누가 큰 나무, 큰 사람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품어주고, 사랑하고, 용기를 더하는가?
그 사람에게는 저주가 없다. 하나님께서 친히 빛이 되어주시는 천국에서 늘 살고 있으니까.
두려움에 이끌리는 세대
눅 13장 18~21절 / 김영준목사
목적에 이끌리는 삶, 또 목적이 이끌리는 교회라는 문구는 릭 워런 목사가 개발해서 대중화시킨 것입니다. 정말로 이상적인 삶은 목적에 이끌리는 삶이고 정말로 이상적인 교회는 목적에 이끌리는 교회라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는 목적에 이끌리는 사회라고 말할 수 없고 그 대신 두려움에 이끌리는 사회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무엇에 이끌리기는 이끌리는데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목적에 이끌리는 게 아니고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두려움에 이끌려서 삽니다. 자녀교육 문제에 있어서 가장 현저하게 이것이 나타납니다. 부모가 자식을 닦달하는 이유는 무엇을 만들이 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 안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거지가 안 되게 하고 실패자가 되지 않고 낙오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남에 비교해서 뒤지는 것, 낙오되는 것에 대한 거대한 두려움이 부모들의 심리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젊은 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세대의 가장 큰 문제는 취업난도 아니고 88만원 세대도 아닙니다. 두려움입니다. 낙오자가 될까 두려워하는 것이고 인생의 어려움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경제신문에 며칠에 걸쳐서 국내 기업인 · 문학인 · 지도자들이 젊은이들과 함께 대화하는 내용의 기사를 주의 깊게 읽어보았는데 이분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은 ‘고생을 두려워하지 말라! 인생을 부딪쳐라! 남의 눈치를 보지 말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라! 동기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가 좀 어렵다 하더라도 한국전쟁 직후보다 어렵겠습니까. 보릿고개를 겪을 때보다 어렵겠습니까. 오일 쇼크 때보다 어렵겠습니까. 지금보다 더 어려웠던 때도 많았는데 그것을 우리는 극복해 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정도의 어려움을 가지고 두려워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은 젊은 계층뿐만이 아니고 인구 전체가 마찬가지에요. 우리 인구의 40가 계층 상승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여론 조사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더 잘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얘기인데 소위 부익부 빈익빈, 빈부격차, 계급격차가 더 벌어진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만일 우리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떻겠느냐?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상민 간의 건널 수 없는 격차가 있던 시대였습니다. 남자와 여자 간에 건널 수 없는 격차가 있는 시대였습니다. 거기에 비교하면 우리는 엄청나게 바뀐 것입니다. 사람들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다 이런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일단 용이 되보고 그 말을 해보라고 하세요. 용이 될 만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제가 듣겠는데 용이 될 것도 같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용이 될 만한 사람은 어디든지 찾기 어렵습니다. 개천에만 없는 게 아니고 다른 데에도 없습니다. 이건 용이 될 만한 인물도 아니면서 불평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밖에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거기에만 그치는 게 아닙니다. 젊은 미혼 여성 사이의 고요한 두려움을 저는 감지합니다. ‘이러다 시집 못하는 거 아닐까?’ 나이가 한 살 씩 먹을수록 그 두려움은 점점 더 커집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입니다. 인구의 절반이 남자라는 사실. 오히려 남자가 더 많습니다. 눈에 차는 남자가 없을 수는 있지만 남자가 없는 게 아닙니다. 조금만 눈을 낮추면 쎄고 쎈 게 남자입니다. 강남의 커피숍에 앉아서 남자가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남자가 있는 울산이라든가 포항이라든가 거제도라든가 이런 데를 가면 거기는 여자가 없다고 야단이에요.
사람이 두려워하는 한은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의 눈동자를 보세요. 정함이 없습니다. 불안정합니다. 두려워하는 짐승과 비슷합니다. 두려워하는 짐승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사냥을 하는 사자를 보면 멀리 쳐다봅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디로 달릴지를 생각합니다. 사자는 처음부터 달리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천천히 상황을 파악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질주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사자가 뛸 수 있는 시간이 40초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0초 안에 승부를 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힘을 배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한 목적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는 한은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성도님들을 접할 때 왜 스스로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자신의 신앙의 가능성과 능력에 대하여 좀 더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못할까 의아하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왜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자신의 믿음의 가능성에 대하여, 결과에 대하여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것은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신앙으로 사는 비결을 저는 두 가지에 비교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장기투자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장기투자. 원래 제대로 된 투자는 장기적인 것입니다. 단기 투자는 투자가 아니고 투기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우량주를 사서 한 삼십 년 동안 묻어두면 돈을 못 벌 사람이 없습니다. 우량주라면. 부동산을 사서 한 삼십 년 동안 갖고 있으면 돈을 못 벌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기다리지 못합니다. 단타를 합니다. 그래서 일주일 사두었다가 오르지 않으면 팝니다. 그런 식으로 하다가는 쪽박 차기 십상입니다. 장기투자의 원리는 돈뿐만이 아니고 모든 일에 적용됩니다. 포도주. 오래될수록 값나가는 게 포도주가 아닙니까. 신앙도 장기적인 것입니다. 신앙도 장기적으로 내다봐야 됩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사람이 예수를 믿어서 당장 변하는 것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저희 교회가 십일 년이 됐는데 십일 년 동안 과연 성도들이 얼마나 변했을까. 그건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십일 년은 짧은 기간입니다. 한 삼십년, 오십년, 백년, 오백년을 내다봐야 됩니다. 예수님은 이천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이천년이 됐는데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놀라운 어마어마한 변화가 있지요. 그러니까 단기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예수를 믿어서, 우리 집이 교회를 다녀서 당장 무엇이 달라졌느냐? 당장 보면 달라진 것을 보기가 어렵지만 그것을 좀 더 장기적으로 오십년, 백년, 천년, 이천년을 보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에 비교하시고 누룩에 비교하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왜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맡기시고 승천하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만일 예수께서 장기적인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면 떠나가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맡기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당신이 오래 살아서 모든 것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삼년 반만 목회하시고 떠나가셨어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시고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면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시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떠나가셨습니다. 기독교가 이처럼 부흥할 수 있었던 비결이 제자들의 능력에 있습니까? 제자들의 인격에 있습니까? 그들의 헌신에 있습니까? 아니에요. 제자들이 어떠한 사람이었던 간에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일뿐. 제자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도 사람이에요. 우리와 같은 사람이에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특별했기 때문에 교회가, 기독교가 이처럼 부흥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에는 누룩과 같고 겨자씨와 같은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땅에 심기면, 그것이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면 그 사람이 어떠하든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야만인이든 문명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죄인이든 의인이든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의 말씀이 사람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당장은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두고두고 보면 그것이 나무가 자라나듯이, 누룩이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듯이 전체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알고 계셨고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일찍 떠나가신 것은 예수님의 실패가 아니요, 예수님의 실수가 아니요, 예정된 것이요, 예수님이 의도하신 것이요, 계획하신 것이요, 알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가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숫자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는 사람들,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들어본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이건 엄청난 영향력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는 압니다. 인간의 정신과 문명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말씀하신 것처럼 가라지도 있지만 그렇지만 기독교가 없었다면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우리는 상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목사님, 무슨 말씀인지 알겠는데 저는 그렇게 장기적으로 내다볼 여유가 없고, 저는 당장 임대료를 내야 되고, 당장 우리 아이 결혼 시켜야 되고, 우리 아이 대학 보내야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다고 당장 급한 일이 없으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 예배 끝나고 나가시면 떡이라도 드셔야 되고 커피라도 마셔야 되는 것 다 압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다만 우리는 굳이 신앙과 관계된 것이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교육,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백년을 내다보고 교육한다는 얘기입니다.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것입니다. 또 결혼, 인간이 장기적으로 내다보지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뭣 하러 결혼합니까. 그냥 동거하고 살지. 그러나 가정에 대하여, 자녀에 대하여, 가문에 대하여 장기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입니다. 장기적인 믿음이 있지 않다면 결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친구도 장기투자입니다. 당장 놀기 위한 친구가 아니고 앞으로 살면서 두고두고 서로 벗이 되고 도움이 되라고 친구를 사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장기적인 해법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결코 하지 않을 일들도 있습니다. 그 하나가 빚을 지는 것입니다. 지금 빚을 지는 것은 장기적으로 내가 갚으리라고 믿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장기적으로 돈을 갚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빚을 지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지요.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도 장기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이지 지금 오염시키고 내일은 난 모른다, 그건 미련한 사람이지요.
이처럼 신앙에 관계되지 않은 일일지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는 것처럼 신앙도 그런 것입니다. 신앙은 지금 당장 좋은 것을, 그것만을 위한 게 아닙니다. 만약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원한다면 신앙처럼 불편한 게 없습니다. 차라리 신앙 없이 내 뜻대로 세상 즐거운 대로 사는 게 낫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것은 적어도 내세를 내다보기 때문이요, 영생을 믿기 때문이요, 그것뿐만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고 내 말을 따르는 자는 천대까지 복을 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단기적으로 유익을 준 것보다는 장기적으로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만들어지고 그 혈통을 좇아 메시야가 태어나고 그리고 메시야를 통하여 온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까지 내다봤어요. 하나님이 하늘의 별을 보여주신 목적이 그것입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의 믿음으로 그 믿음이 두고두고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아브라함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수천 년 전 중동의 이름 없는 어떤 아저씨의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 사람이 믿음을 가진 것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유익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에요. 다윗이 믿음으로 당대에 열매를 거둔 것뿐만 아니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임금이 되고 그의 혈통이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 혈통을 좇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믿음의 효과를 당장 결과로만 판단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멀리 내다보아야 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당장 혜택이 있나? 이건 소인배나 하는 이야기이고 예수는 내가 믿지만 혜택은 자식이 받는다, 후손이 받는다, 남들이 받는다, 이런 식의 넓은 안목을 가져야 됩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깡패를 만나서 한 말이 있습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구원은 네가 받았다.’ 이 말은 ‘내가 만일 예수님을 안 믿었으면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라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게 믿음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믿지만 혜택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받게 돼 있어요.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지만 그 혜택은 앞으로 두고두고 오게 돼 있습니다. 이게 믿음의 능력이에요.
그리고 신앙으로 사는 또 하나의 비유는 줄을 잘 서는 것입니다. 북한 사람들이 남한에 대해서 이런 말하기를 좋아하지요. ‘당신들은 줄을 잘 서서 잘 살고 우리는 줄을 못 서서 못산다.’ 누가 줄을 잘 못서라고 했습니까. 그때는 그게 옳은 줄 알았겠지요. 이렇게 될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제라도 북한이 줄을 다시 서지 못하는지 저는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줄을 선다는 말에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다는 건 사실이에요. 마치 누구를 의존하는 것 같은 뉘앙스가 있지만 우리가 만일 부자에게 줄을 선다든가 권력자에게 줄을 댄다든가 심지어 어느 특정교회에 줄을 댄다든가 그건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줄을 대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건 당연히 해야 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줄을 서서 일찍 주님을 따르고 일찍 주님을 알고 주님에게 충성하고 나와 내 집은 주님을 섬기겠노라 일찍 믿음의 삶을 선포하는 것, 그건 정말로 지혜로운 것입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면 그가 멕시코 만에서 새우 잡이로 돈을 벌어서 어느 과일회사에 투자했다고 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에게는 그게 과일회사로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회사 로고가 사과였기 때문에. 애플 회사였어요. 그게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80년대는 아직 애플이 작은 회사였는데 그 주식을 지금까지 갖고 있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상상이 되시지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줄을 대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작게 시작해서 점점 좋아집니다. 멀리 봐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아직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후손을 바라봤던 것처럼 우리는 멀리 내다보고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그러면 믿음대로 됩니다. 할렐루야!
믿음대로 됩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소극적으로 갖고 있지 말고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게 해야 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을 위하여 역사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럴 때 그 믿음의 위력을 경험할 것이고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역사하시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생명의 능력으로 전진하는 하나님의 나라
눅 13장 18~21절 / 최승윤목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 위에 임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천상의 나라입니다. 천상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분은 하나님 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상의 권위로 존재하는 나라,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나라, 그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나라는 모든 면에서 완전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이 전혀 없고, 불의한 것이 전혀 없는 나라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천상의 나라인 완전한 나라가 불완전하고 찌그러지고 타락한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로마 제국처럼 수많은 병력과 무력으로 한 나라를 점령하는 방식으로 이 땅에 임한 것이 아닙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모든 사람들이 놀랄만한 방식으로 임하지 않았습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이 땅에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천상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가 불완전하고 찌그러지고 깨지고 상한 사람들에게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나라는 자신의 영광과 위용을 자랑하고 드러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동원합니다. 세상 나라는 무가치하고, 있으나 마나 한 사람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비웃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그들과 함께 합니다. 그들과 교제를 나눕니다. 그들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모든 부끄러움과 수치를 벗겨줍니다.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 억누르고 있는 모든 것을 풀어줍니다.
천상의 완전한 나라가 깨지고 찌그러지고 타락한 세상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모습과 그 분께서 사셨던 삶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죄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죄인들과 먹고 마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각종 질병과 귀신이 들려서 사람 구실을 못하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도 없고, 군대도 없고, 제도나 그 제도를 실행하는 기관도 없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안에, 그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그것 자체가 놀랍고 신기한 것이었지만 사람들 안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작고 보잘것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들은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무지하고 엉뚱하고 비겁한 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에서도 우리가 믿고 의지할 만한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들이 희망을 걸만한 어떤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의 인생과 삶 전체를 맡길 만한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대단히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말만 들었습니다. 그것도 직접 들은 것이 아닙니다. 2000년 동안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전하고 전해진 것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읽은 것뿐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면 그만입니다.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는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무지하고 엉뚱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는데 사도 행전과 서신서에 기록된 그들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복음서에 기록된 모습과 사도 행전에 나타난 모습을 비교해 보십시오. 전혀 다른 모습이 아닙니까? 무엇이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렇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오순절 교단에서는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바꾸어 놓았다고 강조를 합니다. 오순절 성령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기 전에는 제자들은 비겁한 사람들이었고, 두려움에 떨었던 사람들이었는데 오순절에 성령 하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임하심으로 제자들이 완전하게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주장이 맞는가? 틀렸는가? 하는 것을 지금 이 시간에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신 일련의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의 삶이 완전하게 변화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미약하게 보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들의 모습은 180도 완전하게 변했습니다. 천상에 계신 예수님께서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그렇게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억압이나 강요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시키는 대로, 마지 못해서 억지로 그렇게 산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권세를 갖고 있었던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다”(행전4: 21절)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던 이유를 그들은 분명하게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승천하셔서 천상에 계시면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시고, 크신 권능과 은혜로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을 그렇게 바꾸어 놓았고, 그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고, 그 예수를 전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분명한 각성, 자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제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믿음, 분명한 각성을 갖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존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의 삶의 동기요, 이유요, 목적이 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만이 최상의 권위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러분들의 삶의 위로를 주고, 소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있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습게 여기고, 하찮게 여긴다고 하여도 여러분들은 예수님 만을 의지하고 따라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삶 전체를, 이 땅에서의 삶과 저 세상에서의 삶 전부를 예수님께 맡길 마음을 갖고 계십니까?
2010년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까? 어떤 분은 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의 모습만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먹을 것을 걱정합니다.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를 걱정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출렁거리는 바닷물을 보고 겁을 내며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를 안 돌아 보십니까?”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귀신을 내어 쫓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도 조그만 일에도 두려워서 어찌 할 바를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모습일 것입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여도 속으로는 모두 떨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해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도 믿을 수 없는 그런 모습을 갖고 있었을까요?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런 정도 밖에 알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런 정도 밖에 믿고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움은 어떻게 드러나는 것입니까? 바로 그 나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고 의지할 때 그 능력의 모습은 영광스럽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신앙이 부족하고 미미하면 하나님 나라의 능력 또한 미미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의 모습에서 사도 행전과 서신서에 기록된 사도들의 모습으로 옮기셔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고 믿고 있었던 정도만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한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하신 다, 천상에 계셔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시고, 영광 가운데 지금도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믿고 있지 아니하면 우리도 별 수 없습니다.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으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사도 행전과 서신서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알았던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정도를 벗어나서 사도 행전과 서신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깨닫고 마음 속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초두에 기록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삼 주, 길어야 한 달 정도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그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이 오랫동안 섬겼던 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믿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환난과 극한 가난과 어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근으로 고생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많은 헌금을 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는 주변 도시에 퍼져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칭찬할 정도였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무슨 대단한 신학과 교리와 사상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그 복음을 듣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바로 그들에게 임해서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놀랍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단지 그들 만이 그렇게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믿은 사람들은 한결 같이 그렇게 변했습니다. 에베소 지방에서는 마술을 하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자신들이 보고 연구하던 마술 책들을 모두 갖고 와서 태워버렸습니다. 그 책값만 해도 은 오만 개라고 했습니다. 은 오 만 개란 노동자 한 사람이 오 만 일 동안 일해서 벌어야 하는 돈입니다. 엄청난 양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 그런 일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는 바로 복음이 전파된 역사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와 같은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지금도 선교의 현장에서, 세계 곳곳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000년 동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많은 실수와 죄악을 저질렀던 것도 사실이요, 지금도 이 땅에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리들이 벗어 버려야 할 것이요,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문제이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매이지 않습니다. 그 복음을 진실히 믿고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더욱 분명하고 뚜렷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신 말씀이 바로 교회의 역사 가운데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풍성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역사선상에 저와 여러분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우리들에게 도전이 되는 말씀이요 동시에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처럼 작고 미미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해서 하찮게 여기고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전이 될 것입니다. 그 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게 되면 그 나라가 주는 구원과 능력과 영광과 자비와 은총에서 제외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작고 사소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습니다. 그 나라를 볼 수 없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은 무시하고 깔본다고 하더라도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들, 그 나라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큰 능력과 은혜로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작고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큰 나무처럼 자라게 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누룩이 두 세 말 되는 반죽을 발효시키듯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나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생명력은 바로 그런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작다고 주눅들지 마십시오. 모이는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작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 스스로 과연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는가 의심하지 마십시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마태 18: 20절 참조). 단지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 깨닫는 정도가 모일 때마다 점점 깊어지고 넓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온전하게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잘 알지도 못하고, 그 분의 말씀도 믿지 아니하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고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함께 한다고 하여도 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의 모습만을 평생 갖고 산다면 어떻게 그 나라의 영광이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그 능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말로 하는 신앙 생활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신앙생활,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의 말씀을 내 마음과 몸으로 이루어가는 생활.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의와 평안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란 크기와 규모의 문제가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주는 의로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하늘의 영광과 기쁨이 그 안에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그와 같은 것들이 있다면,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작아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찾고 찾아서 더욱 풍성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은총과 특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왜 그런가? 무엇 때문에 우리 안에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스럽게 드러나지 않고 있는가? 주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돌이킬 것을 돌이키고, 털어내야 할 것을 털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겨자씨와 누룩과도 같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은 상태로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가 영광스럽게 드러나고 전진해서 큰 나무처럼 되고, 온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으로 작용할 때까지 우리는 예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이 말씀을 붙잡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그 말씀대로 하지 아니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겠습니까? 아무런 관심도 없고, 아무런 노력도 없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임했지만 작고 사소한 것이기에 감추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 있지만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일들에 눈이 덮여서 볼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크고 놀라운 모습으로 드러났다고 하여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누룩처럼 작고 사소한 것이다. 그러니 주의해라. 찾고 찾아라.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점점 영광스럽게 자라나고 확대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작다고 실망하지 말아라. 지금 작다고 무시하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모이는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그 나라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것이다. 내 이름으로 모이는 그곳에 나도 그들 가운데 함께 있음으로 내 능력과 자비와 은총을 베풀어 줄 것이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서든지 실망하지 말아라. 어떠한 어려움이 온다고 하여도 불안해 하지 말아라.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너희에게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찾아라. 사모하고 사모해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때가 되면 모든 것이 확연하게, 영광스럽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믿고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기다려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어디에 서 있습니까?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우리 안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보고 계십니까? 그 나라의 능력을 사모하고 계십니까? 그 나라가 큰 나무로 자라는 것을, 큰 영향력으로 나와 교회와 사회와 세상을 바꿀 것을 기대하고 사모하고 계십니까? 그런 날이 도래할 것이라고 믿고 계십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만족한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십시오. 사모하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지도록 사모하며 간구하십시오. 여러분 가정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평안과 기쁨이 넘치도록 간구하십시오. 우리 교회 안에서 그 나라의 능력과 구원의 은총이 풍성하게 나타나도록 모일 때마다 기도하십시오.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복음서에서 보는 제자들의 모습을 털어내고 사도 행전과 서신서에서 볼 수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이 모습이 될 수 있도록 엎드리고 또 엎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과 간구에 주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시고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믿고 구하십시오. 그러면 받게 될 것입니다.
참 생명의 사람들
눅 13장 18~21절 / 최응희목사
예수님께서는 천국 비유를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이 어떻게 생겼느냐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의 복된 삶을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참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말씀하실 때, 천국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깊에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천국비유를 잘 읽어봐야 합니다. 겨자씨와 누룩비유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천국비유중의 하나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이야기에 담긴 뜻이 무엇입니까?
겨자씨와 누룩은 작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겨자씨도 작은 알맹이요, 누룩도 작은 알맹이 입니다. 겨자씨는 좁쌀 알만한 작은 씨앗입니다. 누룩은 거의 눈에 안 보이는 균들을 뭉쳐놓은 덩어리입니다. 둘 다 모두 작은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하필이면 이 작은 것들을 천국비유에 사용하셨을까? 그 속에 들어있는 생명의 놀라운 능력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나 누룩을 이 천국비유에 사용하신 이유는 작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작으나 그 속에 생명이 있다는데 있습니다. 작지만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내는 겨자씨, 보이지 않지만 밀가루 속에서 온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 그 속에서 생명의 역사를 보신 것입니다. 작은 것만 생명의 역사를 이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작아도 생명이 있는 것은 그렇게 생명의 역사와 변화를 이루어 낸다는 것이 이 비유의 의미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그 영혼의 생명에 있는 것이지 결단코 그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영혼이 죽어 있으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겉모양이 초라하다 하여도 영혼이 생명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이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물을 들어 쓰실 때 언제나 이런 믿음의 기준으로 쓰셨습니다. 다윗을 택하시고, 골리앗을 물리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삼백 병사로 미디안 십만대군을 물리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나 숫자로 일하시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누누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멧세지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선택하려고 이새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 형제들이 그 앞으로 나아옵니다. 첫째가 나섰습니다. 그는 키가 훤칠하고 허우대가 듬직한 것이 왕이 될만 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속으로 기뻐하며 말합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여기 있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상 16:7
그리하여 나이도 어리고 아직 키도 작은 목동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 어린 다윗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고 택하여 세우신 것일까요? 작지만 그 속에 있는 생명을 보신 것입니다. 그 속에 있는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 생명을 가진 사람을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외모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외모에 주눅들게 마련입니다. 겉모양을 내 세우는 사람은 겉모양을 두려워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생활태도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큰 일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육신이 나약할 때에도, 내 환경이 어려울 때에도, 나의 조건이 부족할 때에도 믿음을 굳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작은 겨자씨가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내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누룩도 변화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외모가 출중한 분들입니까? 감사하면서 더 크게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겨자씨 같이 작은 씨앗도 생명의 역사를 통해서 새들이 깃드는 나무가 되는데, 도토리처럼 큰 씨앗이 그 생명력을 가지고 자라난다면 큰 기둥같이 쓰임 받는 거대한 나무로 성장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핵심은 작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진흙과 반죽 속에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냅니다.
겨자씨와 누룩이 제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면, 반드시 진흙 속에 들어가서 싹을 티워야 하고,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서 반죽에 변화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 흙 속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스스로 굴러다니면 그 운명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말라서 자신의 생명마저 사라지던지, 아니면 새에게 쪼아 먹히는 것입니다. 만약 누룩이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면 그냥 볼품없는 찌끼 같은 존재로 굴러다니고 말 것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 믿음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세상을 등지는 신앙태도입니다. 세상은 더러운 세상, 죄많은 세상, 그러므로 세상을 등지고 오직 말씀과 기도로 살아가겠다는 태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한 믿음 같지만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기독교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이 겨자씨 비유에서 겨자씨가 그냥 더러운 흙속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혼자 떼굴떼굴 굴러다니는 모습과 같습니다.
둘째는 세상에 빠지는 신앙태도입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흙 속에 들어가서 흙이 되어버리는 겨자씨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들어가야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야 하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태도입니다. 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모습입니다. 겨자씨가 겨자씨가 되려면 흙 속에 들어가되 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같이 흙이 되어서는 결코 흙을 변화시키거나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썩어 흙이 되었기에 생명이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앙태도입니다. 흙 속에 들어가되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흙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흙 속에 들어가서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흙 속에 있되 흙이 되는 것이 아니며, 같이 있되 물들지 않는 것이며, 함께 있되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말씀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나라를 잃어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을 거부하여 저항하거나 산 속에 들어가 무관심 속에 산 것이 아니라, 그 체제에 순응하여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그 나라의 관리가 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왕의 충성스런 신하로서 충실하였지만 자신의 신앙과 믿음은 절개있게 지켰습니다. 이로 인해 생명의 위협이 왔지만 결국은 왕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드디어는 온 나라에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내는 변화의 역사를 이루어 낸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겨자씨와 누룩 비유에서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요, 오늘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지고 있어야 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자신의 변화를 통하여 다른 것을 풍성하게 합니다.
겨자씨가 땅에 묻히어 변화를 일으키고 싹이 나서 성장하니 많은 새들이 와서 깃들었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이렇게 세상에서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신앙, 거듭난 신앙은 반드시 향기가 나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그 향기를 좋아합니다. 그 그늘에 와서 지친 영혼이 위로 받고 싶어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다 큰소리 치는 듯 하여도 모두가 상처받은 영혼이요, 고독한 영혼들입니다. 모두가 인생의 길을 알지 못하여 방황하는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성도는 영혼의 눈을 떠서 이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 속에 들어가서 지친 영혼에 위로를 주고, 방황하는 영혼에 쉼을 주어야 합니다. 작은 누룩이 반죽 속에 들어와서 변화하니 전 덩어리에 퍼져서 반죽을 부풀렸습니다. 천국을 소유하는 믿음은 이렇게 세상과 주변을 풍성하게 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이 너무 각박해졌습니다. 그저 남 잘되는 것 못 보는 세상이요,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그저 물고 늘어지고, 욕하고, 두들기고, 뒤엎어버리는 세상입니다. 인터넷이 세상을 편하게 하기도 하지만, 인터넷이 세상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왜 이렇게 악하고, 독하고, 모가 나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영향력을 퍼뜨렸으면 좋겠습니다. 온유 겸손, 존경과 섬김, 칭찬과 세워줌, 그런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성경구절이 떠오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11:6-9
우리 성도들이, 생명의 사람들인 성도들이 이런 아름다움을 세상에 확산시키고, 평화를 세상에 심고, 사랑을 전파하는 겨자씨와 누룩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세상은 거대합니다. 골리앗처럼 기세가 등등합니다. 거기에 비해 우리의 믿음은 겨자씨와 같이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씨앗 속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볼품없는 누룩 속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를 만나기만 하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가정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씨앗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의 누룩입니다. 여러분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어느 곳에 가던지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제사장들로서, 있는 곳을 누룩과 같이 변화시키는 믿음이 되기 바랍니다. 겨자씨와 같이 새들이 와서 깃드는 삶을 만들기 바랍니다. 사랑과 화평과 기쁨과 감사의 전달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은 마치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생명을 가진 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일주일에 빛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룩 같은 그리스도인
눅 13장 20~21절 / 이병일목사
남한의 기독교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본의 지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일침을 가합니다. “한국교회는, 개발독재가 ‘하면 된다’는 구호를 외칠 때 ‘믿으면 복 받는다’고 설교해 놀라운 부흥을 일으켰으며 파시즘이 물러간 후 새로운 지배자인 자본의 선동 도구가 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본주의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기독교가 잘 어울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과 자본주의는 서로를 부추기며 잘 조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예수님의 활동과 성서를 살펴보면, 예수 운동과 자본주의는 절대로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 현실이 우리가 처한 아이러니이고, 우리가 극복해야 할 딜레마입니다.
자연인으로서 여러분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을 고민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라는 곳과 세상이라고 하는 곳에 양 다리를 걸치고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 교회에 다니느냐에 따라서 교회 다닌다고 하는 것이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게 하기도 하며, 반대로 교회 다니며 예수를 믿는 다는 그 사실이 사회에 적응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앞에서 말한 우리 앞에 놓인 아이러니와 우리는 난처하게 만드는 딜레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룩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누룩은 항상 부정적인 의미(악한 성향)로 받아들여졌는데, 과월절 전날 누룩을 제거한 빵을 먹는 것은 불결한 것을 제거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로도 누룩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했는데(1고린 5:6-7), 그에게 있어서 누룩은 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마태 16:5ff; 마가 8:14). 성서에서 누룩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은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한 곳뿐입니다.
그런데 누룩 자체로 보면 몰가치적입니다. 누룩 자체를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누룩은 가루반죽에 파고들어 그것을 다 부풀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조심하라고 하신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란 그들의 율법적 틀 속에 모든 민중을 가두려는 그들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킬 수 있는 것을 하루하루 자기의 생명을 연장시키기에 급급한 모든 민중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의 누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자신의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서 민주열사의 피를 빨아먹고, 통일을 위해 죽어간 이들의 생명을 갈취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여기에 반하여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누룩의 행위에 비유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반죽에 들어간 효모가 반죽을 부풀리는 것처럼 확장되기 위해서는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가진 사람들이 반죽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이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접하는 오늘, 우리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 들어가 그 세상을 변혁시킬 누룩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오늘 세상이 원하는 것을 따라 가기에도 급급하지 않은가?’ ‘돈이 주체가 되어 최고의 엘리트, 최후의 승자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나는 또 하나의 객체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들에게 세상은 바리새파의 누룩과 하느님 나라의 누룩,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누룩은 반죽 속에 들어가서 반죽을 부풀게 합니다. 이미 부풀어 오른 반죽에서 누룩을 다시 분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반죽은 누룩으로 말미암아 이미 변화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냐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사람들을 율법이나 자신들의 권력, 지금으로 말하면 돈에 종속시키게 만들 것인지, 하느님 나라처럼 모든 사람이 더 나아가서 모든 생명이 온 누리가 부드러워 져서 살맛나게 만들 것인지. 어떤 누룩이 되든지 우리 앞에는 자본주의적 세상이 있고, 이미 우리는 그러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특히 남한 그리스도인들은? 한신대 학술원 신학연구소에서 “한국 개신교와 산국 근현대사의 사회 문화적 변동”이라는 책을 냈는데, 각 종교 별로 여러 가지 인식의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 통계가 있습니다.
# 종교생활을 하는 가장 큰 이유 :
종교인 -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49.7%),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24.2%), 진실한 삶을 위해서(13.6%)
개신교인 -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54.0%)
가톡릭교인 - 마음의 평안을 위해(53.9%), 진실한 삶을 위해(20.2%)
불교인 - 마음의 평안을 위해(72.1%)
# 성직자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
종교인 - 설교 성례(34.1%), 심방 전도(16.2%), 지역사회봉사(13.8%)
개신교인 - 설교 성례 - 심방 전도 (≒70%)
비개신교인 - 설교성례 - 지역사회봉사 - 사회정의활동
세상에서 교회는 무엇을 했습니까? 현재의 상황으로 봐서는 그리 긍정적인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남한은 현대사의 출발을 미군정으로 시작했습니다. 테러와 암살을 통해서 출범한 이승만 정권 때에 기독교는 이미 정치권력과 밀월여행을 함께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제헌국회의원을 비롯한 초기 각료의 40% 이상이었고, 제헌국회 개회식에 식순에도 없던 기도순서가 있었고, 대통령 취임식 선서는 헌법이 아니라 성서에 손을 놓고 진행되었습니다. 일요일과 성탄절이 공휴일로 지정되고, 군목제도와 형목제도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친정권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1956년 선거 때에는 <한국기독교선서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교계신문은 이승만의 자유당 선거홍보지가 되었으며, 이승만을 모세로 이기붕을 여호수아로 칭송하였습니다. 그 후 얼마 전까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까지 예외적인 소수를 제외한 교회는 권력과 긴밀한 야합관계에 있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 살기만 하면 된다는 자본주의에 편승해서 잘 사는 것이 축복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수용함으로써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전락시킨 것과 같습니다. 콘스탄틴의 승리와 통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부와 권력, 야망, 개인 관계, 사회 조직, 종교 문제에 있어서 콘스탄틴의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모순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콘스탄틴이 자신의 ‘종교적 소명’이라고 하는 것 즉, 세상을 지배하려는 야망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모순되는 콘스탄틴의 가치가 마치 그리스도의 가치인 것처럼 전도되어 중세 유럽의 역사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가치 전도일 뿐입니다. 콘스탄틴은 자신의 생애에서 정치와 기독교를 통합했으나 그의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는 제국의 지배권을 얻으려는 그의 사적인 전쟁에 협력하였고, 그 과정에서 기독교는 왜곡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변형되었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자기의 생존권을 팔아 국가종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모습,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속에서 함께 살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우선 예수님을 믿는 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생각합니다. 나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길이 보이는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일이 드러나는가? 그 일과 그 길은 하루 아침에 이루거나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혼자 힘으로도 어렵습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함께 그리고 많은 노력을 하면, 조금씩 이루어지고 만들어질 것입니다.
신과학 이론 중에서 형태발생장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생물체가 다 고유의 모양을 갖추고 있는데, 형태발생장이란 바로 이런 모양새, 꼴을 일으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본틀을 말합니다. 그 틀에 따라 모든 생물체가 자기의 모습을 이뤄갑니다. 그런데 이 형태발생장은 영구불변하는 게 아니라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하는데, 모든 식물과 동물의 모양새를 지워주는 기본틀의 노릇을 합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형태장을 일종의 '기억'이라고 하는데, 과거에 살았던 조상들이 지닌 모양새의 기억입니다. 자기가 속한 종의 형태장에 모든 개체들은 기억을 보태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모양새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전체 형태장에 영향을 주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또한 형태공명이란, 비슷한 것끼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개념인데, 과거에 비슷한 꼴을 가졌던 개체로부터 현재까지 영향이 미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소나무는 옛날에 살았던 모든 소나무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쌓여있는 기억을 근거로 형태공명이 울려납니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서. 우리는 모두 우리들의 조상으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습니다. 사실 우리는 과거에 살았던 모든 인간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행태가 집단무의식 속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작은 행동이나 기도는 허공에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발생장에 축적되고 형태공명을 통해서 우리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에게 퍼지고,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전달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 함께 이루는 공동체적 삶의 모습이 미래의 세상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힘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일이 멀고 험한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까지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믿음, 하느님 나라의 누룩이 되려는 마음에 희망을 잃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조건
눅 13장 20-21절 / 이정익목사
옛날 시골에서는 밀주라 해서 술을 담가 마셨습니다. 술 담그는 것을 보면 밥을 해서 넣고 밀기울을 넣고 그곳에 반드시 누룩가루를 넣었습니다. 이 누룩이 필수입니다. 그리고 며칠 놔두면 속에 있는 내용물들이 모두 발효되어서 그릇 가득히 부풀어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술이 됩니다. 그때 이 누룩가루는 내용물을 발효시켜서 부풀어 오르게 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또 빵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밀가루를 반죽할 때 그곳에 반드시 누룩 가루를 넣었습니다. 그러면 이 누룩가루가 밤새도록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서 부풀게 만듭니다. 그러면 밀가루 반죽이 아주 부드럽게 발효되고 부풀어 올라서 맛있는 빵이 만들어 집니다. 누룩가루는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게 활용되던 누룩이 오늘날에는 아주 작은 양의 발효제가 개발되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이 누룩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할 때 소금이 되라고 말씀했고 빛이 되라고 말씀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겨자씨로 비유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누룩이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룩은 몇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능이 바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과 같습니다.
“행동”
누룩 가루가 반죽에 들어가면 일제히 발효를 위해서 행동으로 나섭니다. 밀가루 반죽에 들어간 누룩가루는 하나도 그냥 있지 않고 일제히 일어나서 밀가루 전체를 부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것이 누룩 가루의 힘이고 능력이고 역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바로 그런 역할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행동 없이 그냥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소금이 되라, 겨자씨가 되라, 빛이 되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그 말씀들은 모두 행동하라는 액션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행동이 없으면 본의 아니게 직무유기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동안 이 세상은 자꾸만 나누이고 분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꾸만 분열하고 나누이는데도 그것을 막지 못하고 보기만 하는 것도 직무유기에 해당됩니다. 적이나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나누이고 분열하고 갈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누이고 분열하면 힘이 약화되고 분산되어서 아무 일도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나누이고 분열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오늘 한국 기독교가 가지는 최대의 약점은 이 나누이고 분열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기독교가 힘이 없는 것입니다. 적은 약화되는 곳에 침투합니다. 6,25때 우리나라는 분명 사분오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힘이 약화되어서 외침을 불러왔을 것입니다. 가장 큰 취약점은 사분오열됨 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합병하고자 할 때 그 때도 우리나라는 사분오열되어 있었을 때 입니다. 그러니까 국력이 가장 약화되었을 때 치니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당했을 것입니다. 이 분열, 나누임, 불화는 결국 사분오열을 가져오고 마침내 힘을 약화시켜 스스로 무너지게 됩니다. 그것이 적이 노리는 것이고 사탄이 하는 바라는 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을 보면 “너희는 하나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도 하나이시요 하나님도 한분이시고 성령도 하나이시고 세례도 하나이요 교회도 하나이니 너희도 하나 되라“ 나누이면 약화되기 마련입니다. 가정도 분열하고 불화하고 나누이면 약화됩니다. 교회도 국가도 분열하고 불화하고 나누이면 약화됩니다. 무엇이나 하나 되면 아주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 되라고 했습니다.
인도 히말라야 산 밑에 있는 숲에는 반딧불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산다고 합니다. 이 반딧불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숲에는 밤인데도 대낮같이 밝다고 합니다. 반딧불 하나는 참 보잘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많이 모여질 때 어둠을 몰아내고 대낮같이 밝힌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은 매우 약합니다. 개개인으로 볼 때는 약합니다. 그러나 다 같이 모이면 강한 빛을 발휘하고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뭉치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러면 반죽에 들어간 누룩과 같이 모두를 부풀어 오르게 하는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 삶”
누룩을 반죽에 넣으면 이 누룩이 밤새 자지 않고 발효시키느라 수고를 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보면 모든 반죽을 그릇 가득히 부풀려 놓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누룩에 비유했을 것입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은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알고 나면 생각과 이상과 의식이 적극적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그것은 복음이 들어간 나라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알게 되면 우선 가장 먼저 눈이 뜨입니다. 뜻이 세워집니다. 이상이 세워집니다. 그리고 사고가 적극적이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인 나라들은 한결같이 적극적입니다.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인 서구의 나라들은 세계의 나라들이 어둑하게 잠자고 있을 때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고 아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새 세계를 발견해서 국기를 꽂고 다녔습니다. 그때 개척자들에 의해서 발견된 대표적인 땅이 오늘의 미국이고 하와이고 호주라는 땅입니다.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던 해가 1598년입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이후 170년 후에 호주가 발견되었고 179년 후에 하와이가 발견됩니다. 그리고 미국은 20년 후에 발견됩니다. 참 생각하면 할수록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그때 이 나라에 이미 서구의 나라들처럼 기독교가 들어와서 이순신 같은 사람이 세계를 향한 눈이 뜨였더라면 이순신이 그렇게 좁은 진해 앞바다만 뱅뱅 돌고 다녔겠습니까. 그는 그 시대에 거북선을 창안해서 몰고 다녔습니다. 그런 선각의 안목에 기독교적 안목과 넓은 시야가 주어졌더라는 그분은 분명 그때 그 넓은 세계를 향하여 가슴을 열고 거북선을 타고 넓은 바다로 향하여 나아가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분명히 그때 호주 아니면 하와이 둘 중 하나는 발견해서 우리 땅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전혀 부질없는 망상이 아닙니다.
그때 서구의 사람들은 이미 기독교 복음을 받아 세계를 보는 안목과 눈이 뜨이고 적극적인 사고의 영향으로 현재의 삶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기 위해서 목숨을 내 놓고 바다를 안마당처럼 휘젓고 돌아다닌 결과 그렇게 주인 없는 땅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세상에 기독교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세상을 볼 줄도 몰랐고 우리나라 말고 더 넓은 세계와 땅이 있는 줄도 상상도 못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모르고 살면 생각과 그 인생의 초점이 자기에게 맞추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알기 전의 인생은 안목이 좁아서 자기입장만 생각하고 이생만 생각하고 자기 집 앞만 보고 알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삶은 대부분 자기 자랑과 나타냄과 과시적 삶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은 경쟁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또한 자신의 부족한 점은 꼭꼭 숨기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예수를 모르고 살아가는 전형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 삶으로는 하나 되고 대화하고 나누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적극적인 삶은 불가능합니다. 모두 더 넓은 세계를 모르고 생각과 안목이 닫혀서 소극적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알고 난 후의 삶은 소극적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변화됩니다. 예수를 알고 보면 모든 사람들이 내 이웃이고 내 형제이고 나와 함께 할 사람들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며 살게 되고 그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용기이고 적극적 사고이고 열린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알면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힘이고 지혜이고 삶의 수단입니다.
어떤 분이 자식 하나가 불구아였습니다. 이 사람은 자식이 불구아인 것이 아주 부끄러웠고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늘 집안에 숨겨놓고 밖에 데리고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아이를 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아이나 부모나 얼마나 불행한 인생을 살아갑니까. 그런데 그 분이 어느 날부터인가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고와 생각과 인생관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습니다. 그 분은 그 때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숨김없이 사람들 앞에 내 놓고 보이고 손잡고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것이 변화입니다. 변화도 적극적으로 변화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식의 변화는 모든 생활에 그대로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면에 적극적이 되게 만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래서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엊그제 책한 권을 읽으면서 그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미국 플로리다 주 오렌지 파크에 사는 어느 해군 군인이 있습니다. 이 군인은 아주 독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군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얼굴이 없는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얼굴에 있어야 할 뼈가 자라지 않아 얼굴 없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 아이를 보고 의료진들이 하는 말이 이 아이는 지금까지 불구아로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최악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지금 나이가 4살인데 그동안 14번 수술을 받았는데 앞으로 30여 차례 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아버지의 태도입니다. 해군군인인 그 아버지는 말하기를 사랑스러운 이 딸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며 이 아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주시지 않는다, 이 딸은 분명 모든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줄 것이 있기 때문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얼굴 없는 아이가 태어났어도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감사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신앙의 삶이고 복음의 삶입니다. 그것이 신앙 말고 다른 마음과 생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복음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삶의 질의 변화, 이것이 신앙이 주는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그런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역할을 하지 못하면 세상에서 버려지고 밟히고 욕을 당하게 됩니다. 맛 잃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버립니다.
아프리카에 내란으로 휘말렸던 르완다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한때 국민 절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이었고 그 나라에 교회도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내란에 휘말리게 되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창 내란에 휘말릴 때는 시가지는 온통 강탈과 살육전과 무법천지로 변했습니다. 그때 그 살육전과 강탈에 온 국민들이 무법을 저질렀고 마침내는 그리스도인들과 성직자들까지 가담해서 만행을 저질렀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가 마침내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어느 선교학 교수가 한국교회에 이렇게 충고를 했습니다. “오늘 한국에 교회가 많고 그리스도인이 다수이지만 한국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진정 따르고자 하는 제자의 삶을 배우고 실천하지 않으면 르완다처럼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 충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면 그것은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맛냄의 삶”
잘 발효된 부드러운 빵은 맛이 있습니다. 냄새가 고소합니다. 보기도 좋습니다. 그리고 부드럽고 달콤하고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발효되지 않은 빵은 맛이 없습니다. 그 빵을 무교병이라고 합니다. 무교병은 맛이 없고 질기고 뻣뻣합니다. 아직 숙성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또 다른 의무가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맛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룩의 역할입니다. 맛은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순교사화를 보면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로마군인 들이 물웅덩이에 40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빠트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사람도 항복하지 않고 모두가 자랑스럽게 찬송을 부르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마인들과 군인들이 찬송을 부르며 의연하게 죽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으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 마지막 순간에 물속에 있던 한사람이 그만 항복하고 기어 나왔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마 병사중의 한명이 그 웅덩이 속으로 뛰어 들어가 빈자리를 채운 채함께 순교해 죽었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모습입니까. 그날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를테면 멋이고 맛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맛과 멋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복음화 되고 그 복음으로 이 세상이 정복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멋과 맛은 그냥 앉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소금이 물에 들어가면 산산이 녹아 물이 되어버립니다. 촛불은 모양도 존재도 흔적도 없이 다 타버립니다. 누룩이 반죽에 들어가면 모두를 부풀게 만들어 놓고 자신은 맛으로 변해버립니다. 그것이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할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보면 개중에 맛을 잃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가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와 신자들이 모여서 새로 교회를 건축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일 밤 기도했습니다. 그때 한 신자가 슬그머니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제 교회를 지으면 건축헌금을 해야 하니 안할 수도 없고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에 가 보니까 그 교회도 내년에 교회를 짓기로 계획하고 기도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이번엔 새로 지은 교회로 갔습니다. 새로 지은 교회에 가야 건축헌금 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는 교회를 건축하고 빚을 갚느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자 부부는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런 삶에는 감동도 용기도 변화도 끼칠 수가 없습니다.
이 시대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맛도 있고 멋도 있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룩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 세상에 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을 수록 이 세상은 건강해지고 밝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요?
누가복음 13장 22-30절 / 조영식목사
들어가는 글
오늘은 12월 첫째 주일이며, 대림절 첫 번째 주일로 지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각 마을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22절). 어떤 사람이 예수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23절). 주님은 왜 구원을 받는 자가 적은지에 대하여 답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동문서답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합니다(24절). 오늘날 우리도 교인 수가 적으냐와 많으냐의 숫자 놀음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신앙인지를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고 각자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우리가 어떻게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힘써서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합니다(24절). 이 구절을 두 문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자와 후자 중에서 어느 것을 더 강조합니까? 전자보다 후자입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전자만 강조한다면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지만 후자에서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결정권은 집주인 되신 주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님께 허락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의 방법대로 힘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대로 힘써서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방법대로 힘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대로 힘써서 좁은 문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시간에 맞추어야 합니다. 주님은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고 합니다(25절). 여기서도 우리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과 주님이 문을 닫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집주인 되신 주님이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결정권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자신이 들어가는 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들어오는 때를 결정하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주님이 정한 때를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합니다(고후6:2). 오늘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받는 때와 구원의 날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날 교회에서 정해진 시간에 예배하며 은혜받는 것도 내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시간에 맞추는 것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시간에 맞추어서 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우리가 어떻게 주님이 아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과 주님이 나를 아는 것이 일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좁은 문이 “닫힌 그 때에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라고 합니다(26절). 그러나 주님은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합니다(27절). 여기서도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과 주님이 나를 아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주님이 우리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잘 안다고 해도 주님이 나를 알지 못한다고 하면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만족에 빠진 신앙이 되지 않으려면 주님이 나를 알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전에 교회를 개척하고 부족한 것이 많다 보니 자기만족이 채워지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개척한 교회가 부족한 대로 드리는 예배도 주님은 기쁘게 받아주셨을 것입니다. 솔직히 오늘도 주님은 나를 알지 못하는데 내가 주님을 안다고 열심히 설교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지는 것은 없는지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기만족에 빠지는 신앙이 되지 않기 위하여 주님이 나를 아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고 합니다(27절). 여기서 ‘행악하는 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가르치신 대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잘 안다고 말해도 주님이 나를 알지 못한다고 하면 행악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행악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믿어야 합니다. 오늘도 예배하면서 자기만족을 채우는 것보다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믿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이 가르친 대로 믿을 때 행악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고 주님이 나를 아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좁은 길을 통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치신 대로 믿고 주님이 나를 아는 자가 되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좁은 길과 좁은 문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첫째로 좁은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 단계입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합니다(마7:13,14). 여기서도 좁은 길과 좁은 문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입니다. 넓은 길이 좁은 문으로 연결될 수 없는 것처럼 좁은 길을 통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연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좁은 길로 가는 것을 강조하면서 구원받는 것을 너무 어렵게 만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는 바리새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는 것이지 너무 힘들어서 어렵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넓은 문은 여러 사람이 함께 들어올 수 있지만 좁은 문은 협착하여 겨우 한 사람씩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한 사람씩 들어올 때 주님께서 그 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주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의 예배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바늘구멍을 오직 믿음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당시에 예루살렘 성의 큰 성문은 아침에 열었다가 저녁이 되면 닫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멀리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저녁이 되면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성문 옆에 좁은 문을 만들어서 ‘바늘구멍’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바늘구멍은 너무 좁은 문이라서 말을 타거나 짐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성 밖에 내려놓고 겸손히 머리를 숙이고 혼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은 험한 길을 힘들게 가라는 것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믿음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좁은 문이 험하고 힘든 길이라면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29절).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험한 길을 힘들게 가는 것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은 자신이 소유한 것보다 더 가지려고 힘쓰기 때문에 다툼이 생기지만,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려놓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눅 13장 22~24절 / 김양인목사(목양제일교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실 때였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나아와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우리도 때로 이 사람과 비슷하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구원을 받을까?”
“나는 교회생활을 오래했으니 구원받을 것이 틀림없어”
“나는 모태신앙이니까 당연히 구원 받을 거야”
그러나 구원은 유대인이라고 무조건 받는 것이 아니고, 또한 우리가 원한다고해서, 또는 구원 받은 것을 확신한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라고 믿는다고 구원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누가 그에게 선택 받은 자들이라고 말해 주었습니까?
그뿐 아니라, 구원 얻을 자가 얼마나 되는지에 관해서도 우리가 관심을 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원 얻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에 관심 갖지 말고 “너 자신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서 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나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며, 좁은 문은 좁은 길과 연결되어 있으나 넓은 문은 넓은 길로 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좁은 문보다 넓은 문을 좋아하고 좁은 길보다 넓은 길을 좋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넓고 곧고 포장이 잘 된 고속도로를 좋아하지, 좁고 울퉁불퉁하고 굽은 비포장도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살아도 고생 없이 편하게 살려 하지, 땀 흘려 수고하는 삶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과 관련해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불편을 감수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힘쓰라”는 말은 시합에 나간 선수나 전쟁터에 나간 군인처럼 분투하라, 죽을힘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받을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유대인들의 주장처럼 본디부터 구원을 보장 받은 민족이란 세상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위치는 유리한 조건이지만 그것 자체가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죄를 사하는 것이지 우리 공로는 조금도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로지 예수님을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좁은 길을 가는 것은 진실하게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비유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고 따르려면 많은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믿고 싶지만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는 예수님을 믿기로 마음 먹고 교회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좁은 길을 가는 것이 힘들고 재미없어 다시금 넓은 길로 가버린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킵니다.
한국동란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4일을 기점으로 후퇴하는 유엔군과 국군을 따라서 수백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 때는 일 년 중 가장 추운 시기였습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기차나 자동차를 쉽게 이용할 수 있던 때가 아니어서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걸어서 남하했습니다. 피난 열차마다 짐칸과 지붕 위에도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영하 20도, 30도를 넘나드는 날씨에 차가운 철판으로 된 짐칸이나 열차 지붕에서 추위와 찬바람을 견뎌야했습니다. 왜 그런 힘든 길을 선택했을까요? 그것만이 사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산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북한에 남았을 것이나 더러는 피난길의 어려움을 감수하기 싫어 남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그 후에 공산당의 통치 아래서 많은 후회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피난길을 택한 사람들은 대한민국에 와서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고난의 피난길을 택한 것과 같지만 결국은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꺼이 좁은 문을 들어가서 좁고 불편한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은 복 있는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대로, 기독교인이라고 다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이면서도 넓은 문,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인도 아래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나온 이스라엘 자손은 장정이 60만 명이나 되었으나 그들 가운데 다수가 불신앙으로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새 세대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기독교인으로 살아왔지만 실은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자들 가운데도 있고, 목회자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이들은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눈은 속여도 주님의 불꽃같으신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구원의 기회는 사람이 원하면 언제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눅 13:25)라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원하면 언제라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을 줄로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열려 있었던 구원의 문이 닫힐 때가 있는데, 곧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를 말합니다. 그 때 구원에서 제외된 자들이 주님께 와서 호소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이 사람들은 주님을 알지 못한 자들이 아니라,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적도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과의 관계를 상기시키면서 선처를 부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르시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방심하여 게으르지 말고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연조나 직분을 내세우지 말고, 과거에 충성했던 것을 자랑하지 말고, 지금 열심내고 충성함으로 주님의 인정을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생을 피하고 편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다보니 요즘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는 것도 가급적이면 편하게 믿고 싶어 합니다. 할 일 다 하고, 놀 것 다 놀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예배하러 교회에 나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가급적이면 긴장을 피하고 비난을 받지 않으려다보니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소신껏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이 같은 상태에 있다면 그 안일한 신앙자세를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하기를 “값싼 은혜가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원수다. 우리는 값비싼 은혜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서 은혜 받으려는 것은 값싼 은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 가운데는 경제위주의 시대에 걸맞게,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경제 원리를 적용하려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하나님을 섬겼으니까 하나님께서도 내가 한 만큼 복을 주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세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적인 기복과 무속적 기복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복이란 복을 빈다는 뜻이므로 기복 신앙이란 말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복이란 단어가 빈번하게 나오며, 우리 하나님을 복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복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자들에게 상급으로 주시는 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먼저이고 복 받는 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첫 번째 목적은 그것이 인간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 받는데 관심을 집중할 것이 아니라, 먼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7-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문이시므로 그를 믿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지만 좁은 문, 구원의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인 노릇을 하는 것만 가지고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위선을 버리고 진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것은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 체포되었어도 로마 황제 가이사를 퀴리오스 곧 주(主)로 인정하고, 황제의 신상 앞에 향을 사르면 무죄 방면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 가이사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주님으로 인정했으며 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기독교인이 기꺼이 순교를 택했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콜로세움이라는 원형 경기장이 남아 있는데, 그곳은 기독교인들이 맹수들에게 잡혀 먹히거나 화형을 당하여 순교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구(舊) 로마 근교에 카타콤이라는 지하에 조성된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층계로 내려가면 지하에 바둑판처럼 사방으로 뻗은 통로가 나오고, 그 통로를 따라가면서 좌우 벽에 시체를 넣은 공간들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간혹 수십 명이 모일만큼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이 초대교회 당시 박해 받던 기독교인들의 예배장소였다고 합니다.
약 250년 동안 수많은 기독교인이 순교의 각오로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주후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고, 그 얼마 후에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틴은 교회를 후원하고 성직자들에게 특권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황제의 눈에 들기 원하는 고관들이 교회로 몰려왔고, 백성들도 교회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회개의 관문을 거치지 않은 교인들이 많아졌습니다. 콘스탄틴에 의해 핍박이 사라졌지만 동시에 기독교의 타락이 시작되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회개를 거쳐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회개의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은 값싼 축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런 신자는 아무리 많아도 주님을 따르는 진실한 성도로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확고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은 세속을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의로운 행실을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받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곧 성도다운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전에는 자기를 위해 살았으나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우리는 지옥 백성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자기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셔서 천국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사는 목적이 이전과는 달라졌습니다.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 하신 대로, 성도들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이 찬송이 우리의 진실한 고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성도들에게는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어렵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쉬운 방법으로 주님을 섬길 수 없을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핍박을 받지 않고 칭찬 받고 대접 받으면서 주님의 인정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올바로 믿으려면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생애의 마지막 시점에,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붙들고 만류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다가 그만 자아가 살아나는 바람에 실패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자아가 생생하게 살아있으면 주님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곧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날마다 자아를 부인하기 위해 치열하게 영적 싸움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좁은 길로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렵고 힘들더라도 자기를 부인하고 좁은 문, 좁은 길로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대속의 십자가는 오직 예수님께서만 지셨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우리 각 사람이 주님을 섬기기 위해 감수해야 할 어려움을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려면 인내와 용기가 있어야 하고,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충돌을 피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고 하셨습니다. 부모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보다 그들을 더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믿지 않는 가족들이 항의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남편인 나, 둘 중에 누가 더 소중하냐?”고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부모와 배우자와 자식을 사랑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어려움을 두려워 말고 기쁨으로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너나 할 것 없이 그리로 들어갑니다. 반면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험해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합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가는 괜한 고생을 할 것 같아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좁은 문을 버리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머지않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면, 넓은 문을 선택한 사람들과 좁은 문을 선택한 사람들 중에 과연 누가 현명한 선택을 하였는지 판명 날 것입니다. 또한 어느 길이 멸망의 길이고 어느 길이 생명의 길인지도 확실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넓은 문과 좁은 문, 넓은 길과 좁은 길, 둘 가운데 어느 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하신 주님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영생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좁은 길을 걸어가는 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영광스런 천국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영생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쫓기는 자의 위험
눅 13장 22~30절 / 박조준목사
예수님께서는 쉬실 사이도 별로 없이 각 성, 각 촌, 즉 사람이 많이 모이는 데나, 사람이 적 게 사는 데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이 렇게 전도 여행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 먼저 이 사람이 예수님 께 물은 질문부터 생각해 봅시다. 이 질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께 이와 같은 질문을 한 사람은 유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은 자 기들만 구원을 얻지, 다른 사람들, 말하자면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볼 때는 멸망의 자식으로 보 았기 때문에, 사람으로 취급하지를 않고 개나 돼지처럼 취급하였습니다. 여기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 하고 묻는 데서도 자기 자신의 의를 드러내 며 다른 사람을 얕잡으려는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나 같은 사람 말고 누 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는 뜻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이런 질문을 예수님께 하지 아니합니까? 주님, 그 아무개같은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흔히 바리새인들을 독 선적인 사람들이라고 판단하지만 우리 스스로도 그런 데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나와 다른 사람 을 비교하며 다른 사람의 신앙을 얕잡는 태도는 바리새인의 자세보다 다른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형제의 눈 속의 티를 빼라고 하기 전에 내 눈속의 들보를 먼저 빼야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호기심에서 묻는 질문입니다. 주님, 구원받는 사람이 적습니까? 사람에게는 누 구에게나 호기심이 있습니다. 호기심이 좋은 방면으로 쓰여지면 많은 발전을 가져옵니다. 뉴우 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한 결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였습니 다. 많은 사람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관심하게 생각 없 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아무런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뉴우턴은 호기심 을 가지고 연구하는 가운데 인류에 공헌하는 만유인력의 원리를 발견하였습니다. 발명왕 에디슨 같은 사람도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나 무심하게 보지 아니하였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보고, 연구하고 많은 것을 발명하여 인류 역사에 큰 공헌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는 쓸데없는 일에 호기심을 가집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는 일에 호기심을 가져서 자신의 발전에 지장을 초래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호기심 자체가 물론 죄는 아닙니다. 그 러나 쓸데없는 방면의 호기심은 백해무익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서 제자들을 만나 조반을 함께 하신 후에 베 드로를 따로 세우시고 사랑을 다짐하며 내 양을 먹이라 는 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더러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다니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늙어지면 팔을 벌리겠 고 남이 네게 띠를 띠워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라고 하시면서 너는 나를 따르 라 하셨습니다. 이때 주님이 말씀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짐작한 베드로는 자기는 그렇게 되겠지 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될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하여 물었습니다. 주님, 이 사람 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내가 올 때까지 그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 나의 뜻이라 한들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도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위 하여 나라를 세우실 때가 이때입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으 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다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 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공연한 호기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하늘 나라에서는 어떤 말을 쓸까? 주님 이 다시 오시겠다고 하셨는데 언제 오실까? 라며 궁금해 합니다. 이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쓸데 없는 일입니다. 내가 할 것을 하면 그만입니다. 쓸데없는 호기심에 붙들려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심문조의 질문입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 그러면 누가 구 원받겠습니까? 대답해 보세요. 이렇게 따지며 대드는 자세입니다. 주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질문 입니다. 구원하고 안하는 권한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께 있습니다. 사람은 어 디까지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할 수도 없으며 하려고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니다.
사람이 여기에 어떤 불평이나 원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현재는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 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차는 이해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 하고 묻는 말에 예수님은 직접 대답하지 아니하시고 다른 방향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호기심이나 만족시키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4절). 마태복음 7장 13∼14절에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 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 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했지 만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구원받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 을 고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입니 다. 나아가 누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에 들어가려면 힘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적습니 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길은 험한 길입 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너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 니다.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죽이지 아니하고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 수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좁은 문 과 넓은 문 의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가시 없는 장미는 없다 는 격언처럼 이 세상에서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보통 이상의 고(苦) 를 맛보았고 그래서 보통 이상의 소 득도 차지한 것입니다. 유클리드가 그의 기하학을 완성하여 애굽 왕 어전에서 강의하였습니다. 이 강의를 듣고 있던 왕은 좀 더 쉽게 배우는 법은 없느냐? 고 물었습니다. 이때 강의를 하고 있던 유클리드가 배움 의 길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땅 위에서도 소득을 위한 정당한 고(苦) 를 싫어하고 쉬운 길을 택해 가다가 멸망으로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 까? 그래서 사도행전 14장 22절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콘스탄틴 대왕이 기독교 박해령을 중지하고 로마 천지에 복음을 장려함으로 일시에 수천 명씩 세례를 받고 입교하게 된것은 좋았으나, 사실은 그때가 기 독교가 가장 타락했던 때라고 역사가들은 평하고 있습니다. 소수의 무리가 역경에 처하여 고난 과 싸우며 지켜나간 그 신앙이 순수하고 귀했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여 주는 사실입니다. 오 늘처럼 교회의 수가 늘어나고 교인이 급증했다는 것은 내적으로 부패하기 쉬운 때인 것을 기억 해야 합니다. 여기에 조심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양(量)으로 성공하고 질(質)에서는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생명의 문은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 25절 하반 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였습니다. 좁은 문을 찾기는 하나 힘쓰지는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힘쓰지 않으면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도 힘써야 합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했듯이 힘써야 합니다. 죄와 사탄과 대항하여 싸우는 것도 힘써야 합니다. 그것도 문 닫기 전에 힘써야 합니다. 25절에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했습니다. 주 님의 문도 언제나 열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들어갈 기회가 있습니다. 이 문은 구별의 문입니다. 구원받는 자와 멸망하는 자를 구별하는 문입니다. 계시록 11장 1∼ 2절에 보면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 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 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문은 거절하는 문입니다. 자비와 은혜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닫힐 때가 있습니다. 일단 닫히면 거절의 문이 됩니다. 닫히면 들어갈 길이 없습니 다. 노아의 방주 문이 열렸을 때는 누구나 그 방주 안으로 들어가 안전히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 다.
그러나 그 문이 닫힌 후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홍수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습니 다.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들이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 나 나는 모른다고 하겠다 고 하셨습니다. 여기 보면 망하는 사람도 주님의 손님이 되었습니다. 주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가룟 유다도 같은 식탁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 니다.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어도, 주님의 가르치심을 들었어도, 좁은 문까지 찾아왔어도 그것 으로는 부족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들어오기를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좁은 문으로 들어 오셨습니까? 이 좁은 문을 통과하려고 힘쓰십니까? 이 문은 하도 좁기 때문에 나 하나밖에는 들 어오지 못합니다. 내 명예나 지식이나 재물이나 권세의 옷을 입고도 들어오지 못하는 문입니다. 적나라하게 죄인 된 이 몸 그대로라야 들어올 수 있는 문입니다. 의식이 용납되지 아니하는 문 입니다. 체면이 소용없는 문입니다. 이 좁은 문은 회개의 문이요, 구원의 문입니다. 이 좁은 문은 소망의 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문에 들어오셨습니까? 아직도 들어오지 못하고 언젠가는 내가 그 문을 들어가야겠는데 하면서 밖에서 서성거리는 분은 없습니까? 사람 보기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넓은 문, 넓은 길을 가고 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여호수아 7장을 보십시오. 여호수아의 군대는 아이 성에서 아간의 범죄로 크게 실패하였습니 다. 아골 골짜기에서 그를 쳐죽인 후에야 이스라엘이 승리하였습니다. 아골 골짜기는 괴로움의 골짜기입니다. 그러나 소망의 문이 되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골 골짜기를 통과하지 아니하 고는 희망이 없습니다. 승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골 골짜기를 통과하셨습니까? 그러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한 사람의 벌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내가 너희를 알지 못 하겠다. 너는 내 식구가 아니다. 너는 내 것이 아니다. 너는 내 가지가 아니다 라고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노릇입니까? 둘째로, 너는 악을 행하는 자다 라고 정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그것이 바로 악입니다. 봉사해야 할 줄 알면서 도 하지 아니한 것 그것이 바로 악입니다.셋째로, 나를 떠나가라 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떠나면 지옥 아닙니까?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기억합시다. 29∼30절에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였습니다. 오래 믿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을 걸으십니까? 좁은 문입니까? 넓은 문입니까? 내 모든 죄를 주님께 회개하고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좁은 길이라도 못 갈 길도 아닙니다. 우 리 믿음의 선배들이 이 길을 갔고, 예수님이 가셨습니다. 우리도 다 함께 갈 때 능히 갈 수 있 을 것입니다.
좁은 문, 구원의 문
눅 13장 22~30절 / 이수영목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며 각 성과 마을에서 가르치실 때에 예수님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하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24절 이하 전체는 이 한 가지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이 예수님의 답변 속에서 우리가 깨달아야할 구원과 구원 받은 자의 삶의 자세에 관한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에게 던져진 물음은 "구원을 받는 자가 적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종종 그러셨듯이 이 물음에 대해 구원을 받는 자가 적다든가 아니면 많다든가 하는 직접적인 답은 하지 않으시고 동문서답 같은 말씀들만 하셨습니다. 던져진 물음에 어느 정도라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어 보이는 대답을 굳이 찾는다면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으로부터 드러나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어쨌든 누구든지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구원을 받는 자가 많은지 적은지는 우리의 알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문제는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맡겨야 하는 것이고,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일은 다른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으로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할 그것은 무엇이라는 말씀입니까?
그 첫 번째 답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본문 24절)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는 말씀은 잘못하면 오해될 소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마치 사람들이 치열하게 경쟁해서 쟁취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구원은 누구에게 있어서나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은 확고하고 영원한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편안하지도 않고 부대끼는 일도 많고 양보도 해야 하고 인내도 필요하듯이, 구원 받은 이들의 삶은 그리 쉽고 편하기만 한 것이 아니며 많은 희생과 인내를 요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보다 넓고 쉬운 문을 택하겠다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열심히 힘써야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가 갑자기 편해지는 것 아닙니다. 예수 제대로 믿으려면 오히려 평소의 삶이 불편해지고 자유롭지 못하고 눈치봐야할 일도 많고 손해도 많고 피곤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가 뭐 이렇게 힘들어. 나 안 해. 그냥 이대로 살다 죽을래" 하고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한량없는 은혜로 택하여주셨기에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복된 삶을 누리는 특권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자녀라면 이 세상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것을 요구하시는 것인데 그것이 귀찮다고, 피곤하다고, 신나게 놀지 못한다고 영원히 복된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고 아무리 애써도 들어가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이 쌔고 쌨지만 그 문이 아무리 좁다 해도 너는 그리로 들어오는 길에서 떠나지만 않고 기다리기만 하면 확실히 넣어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잠시를 못 견뎌서 그 좁은 문을 버리고 떠나가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고3 학생이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하고 들어가기만 하면 최고의 영예와 장래의 취업과 출세가 보장된 일류대학에서 입학을 약속 받은 것과 같습니다. 다른 학생은 밤잠 안 자며 죽기로 공부하고서도 합격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데 고3 1년간 학교에 성실히 출석하고 수업시간에 착실히 공부하며 불량학생 같은 행실을 삼가고 정상적인 생활만 하면 무조건 입학이 약속되었을 뿐 아니라 4년간 전액장학금과 졸업 후 해외유학과 귀국 후 교수직이든 다른 직장에서의 중직이든 임용이 다 보장되었는데 고등학교에서의 남은 1년간의 성실한 학교생활이 갑갑하다고 불평불만하고 뛰쳐나가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의 경우도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신 말씀의 뜻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심을 받아 구원 받고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따라서 좁은 문으로 들어오라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와 관련해 우리가 명심하고 주의해야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5-28절의 말씀입니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이 말씀을 요약하면 집 주인이 일단 문을 닫은 후에는 더 이상 아무도, 무슨 말을 해서도, 들어갈 수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나라의 비유입니다. 그것은 28절에서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신 말씀이 분명히 해줍니다. 그런데 이 비유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의도하신 것은 두 가지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심을 받아 구원 받고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따라서 좁은 문으로 들어오라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저하거나 지체하지 말고 즉각적이고 흔쾌히 응답해야 할 것을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르심의 은혜를 입은 이들의 후회하지 않을 삶이라는 것입니다.
25-28절의 비유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다른 하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삶에로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싫어서 보다 넓고 들어가기 쉬운 다른 문을 찾아 떠났던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들어가려던 문이 진정한 문이 아닌 것을 뒤늦게 알고 좁은 문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문은 닫쳤고 밖에서 아무리 문을 두드리며 열어달라고 소리 질러도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인은 안에서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대답할 뿐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되돌아오는 대답은 역시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했습니다. 즉 그들은 한때 주님을 따라다니며 주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모른다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에 들락거리며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다고 해서 곧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사람이라는 보장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쉽고 편한 넓은 문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오라"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는 하면서도 그대로 행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떠나가라" 하셨습니다. 또한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자들임을 알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셨습니다.
29-30절 말씀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지는 않으면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들이 할 말 즉 "주여 열어 주소서 ...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는 말에 대해 주님께서 내놓으시는 반박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주님의 말씀 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삶을 살지는 않으면서 "내가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내가 성경지식이 얼마나 많은데 하나님께서 나를 천국에 안 들여보내시겠느냐?" 하며 착각하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자들 아니더라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천지사방 어디에서도 언제라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문은 좁은 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신앙생활 하기가 때로는 너무나 힘들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 받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백성이 이 세상에서 살 삶은 본래 좁은 문의 삶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모든 위로와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생을 원하면 좁은 길로 가라
눅 13장 22~30절 / 황광민목사
신앙생활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은 육신의 생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하나는 삶의 참 가치성, 즉 가치있는 삶의 모습이요 또 하나는 영생입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합쳐 영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생명 곧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목적으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수양을 위해서 입니까? 친교를 위해서 오셨습니까? 심심해서 놀이차 오셨습니까? 어떤 이유에서 나오셨든지 이제는 바른 목적을 찾고 신앙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곧 생명, 영생을 구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우리가 살다가 천국에 가는 것만 뜻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참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에는 그럴 듯하게 살았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실지, 후손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답게 살았다고, 참되게 살았다고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생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또 그렇게 아름답게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러 영생을 얻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여러분!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천국에 이르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반드시 오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의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60년, 80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천국은 영원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더 중요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학생들에게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확신이 있느냐고 물으니 눈만 껌벅껌벅하고 앉아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실감 나겠습니까? 그들에게는 고등학교 들어가는 것이 바쁘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지 천국은 이차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언젠가는 그 날이 오고야 맙니다. 그 날이 되면 천국에 들어간 자와 지옥에 간 자의 희비가 분명하게 갈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28-29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한 자와 밖에 쫓겨나 이를 갈며 슬피우는 자들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 23절을 보겠습니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주님은 동문서답을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3-14에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동문서답식으로 대답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는 구원받는 수가 문제가 아니라 구원얻는 방법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합격선을 정해놓고 필요한 숫자만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숫자와 상관없이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구원 얻는 이가 적으니이까?"라고 묻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자신을 포함하여 적은 사람만 구원받았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묻는 이의 생각에는 자신은 분명히 구원받는 소수에 들어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의 질문에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숫자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구원 얻는 방법을 언급하셨습니다. 묻는 이도 힘쓰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것이지 자동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십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그리고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고 답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와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이 대조적으로 보입니다. 즉 천국은, 영생은 구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구하는 자세를 넘어 힘쓰는 자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힘쓴다는 말은 "고통을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영생을 얻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보여줍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영생을 얻지 못한 자들이 하소연하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이 말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과 다른 느낌을 주지 않습니까?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이것은 친교를, 또는 소속감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형제자매가 되어 형제애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에 속하므로 친교하고 소속감을 즐길 수 있습니다. 큰 일이 있을 때 교우들이 함께 하므로 위로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신앙의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런 것만 바라고 신앙생활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삶 속에서 위로 받을 수는 있으나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장례식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한 청년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저도 이제 교회 나가야 하겠습니다. 산에까지는 친척들도 몇 명 오지 않는데, 이렇게 교우들이 함께 하니 큰 위로가 되고 보기가 좋습니다" 옳습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하는 현 세태속에서 잃어버린 대가족의 풍성했던 것들을 교회가 대신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은 친교와 소속감을 즐기는 것 이상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식당에서 수백그릇의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해도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또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이 말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교육받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것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요청하고 있습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우십시오. 그러나 배우는 재미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문은 매우 습니다. 편하게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땅 짚고 헤엄치듯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줄만 잘 서면 들어갈 수 있는 그런 문이 아닙니다. 고통을 감수하고야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좁은 길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좁은 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넓은 길, 편한 길을 찾아 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좁은 길을 택해야 합니다. 넓은 길, 편한 길은 세상 사람들이 선호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들 다 그렇게 사는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것을 두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로 나쁜 삶의 방식을 합리화하는데 쓰는 말입니다. 이것은 좋은 말이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 다 그렇게, 그렇게 살더라도 따라가지 마십시오. 세상이 어디로 가든 성도는 성도의 갈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으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별의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서울에 산다고, 특별시민이라고 자부심 갖고 있지요. 제가 마산에서 오니 시골에서 왔다고 그럽디다. 마산도 창원을 합쳐 100만 도시인데, 시골서 왔다고 그럽디다. 물론 좋습니다. 특별시민의식 갖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별의식을 가지십시오. 또 이전에는 미국에 간 사람들이 스스로 자부하기를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들이라고 하며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미국시민권에 대한 특별의식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런 때가 있었지요. 좋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이상의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별의식을 가지십시오. 세상사람 다 그렇게, 그렇게 살더라도 성도는 특별한 길을 택해야 합니다. 좁은 길,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진리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어떤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자신의 삶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16:24)고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차원에서 다를 수 있겠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 자기 십자가를 지고."를 생각해 보십시다.
좁은 길을 가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포기와는 다른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자기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주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이면, 제한하는 것입니다. 좋아보여도, 남들 다해도 진리가 아니면 제한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도 제한합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도, 명예에 대한 욕망도 제한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고전 9:27)이라고 하였습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려는 사람이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딸 수 있습니까? 하고 싶은 것 절제하고 훈련에 집중해야 금메달도 딸 수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연주자가 저절로 됩니까? 모진 훈련에, 하고 싶은 것 제한하고 절제하고서야 좋은 연주자가 됩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어떤 여자 목사님이 우정 스포츠센타에 가보니 부인들 거의가 120만원자리 속옷을 입고 있더랍니다. 그런데 안 입은 사람은 초라해 보인다는 것이예요. 그래서 장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욕구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남들 다 입으니 나도 입겠다는 것은 편한 생각입니다. 성도는 특별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고 진리만은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과 다른 길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길을 가지요, 직장생활도 잘 해야 합니다. 가정생활도 잘 해야 합니다. 똑같이 사는 길에서 잘해야 합니다. 문제는 삶의 방식입니다. 같은 길을 가더라도 특별하게 가야 합니다.
또 좁은 길을 가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남들은 다 편하게 살려해도 성도는 십자가 지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세상사람 다 이익이나 챙기고 손해보지 않으려고 해도 성도는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조금 손해 보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 십자가 지신 것 생각하고 십자가 지면서 가야 합니다. 그것이 좁은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눅 13장 22~35절 / 허남길목사
◈ 서 론 ◈
좁은길로 들어가라 어려운 말씀이다. 맞는 말씀이지만 참 힘들다는 느낌이 든다. 넓은길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다. 세상의 넓은 길은 멸망의 길이다. 절대로 세상사람들과 놀지도 말고 기도 열심히 하고 교회잘 오고 그래야 구원받는다는 말이 맞는 말씀이긴 하다. 하지만 힘들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은 많다. 그건 쉬운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망하는 길인 것이다. 오늘 좁은 길은 복된 길이고 쉬운 길이라는 시간 되시길 바란다. 예수님께서는 윤리에 대해서는 많이 말씀하시지 않는다. 인간의 근본적이고 구원의 대한 말씀을 항상 많이 하신다. 오늘 본문도 윤리적인 말씀 같아 보인다. 세상사람들의 방탕함 넓은 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곧 좁은 길이다. 예수 믿지 않고 우리가 지식적으로 배우고 훈련받고 기능하는 것이 넓은 길인 것이다.
1. 좁은 길
1)주와 같이 먹고 마셨으며(교제)
계3:20 이 말씀은 먹고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 이다. 교제를 할 때 같이 먹고 마시고 하는 것이다. 육신으로 예수님이 계실 때에 먹고 교제하고 만나고 했지만 구원은 못받았다. 구원은 만나고 교제한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우리 구주로 영접해야 받는 것이다. 성경에는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비유를 해 놓았다. 육신으로 계신 예수님과 친하고 교제하고 먹기도 했지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는 않았다. 이것은 구원과 관계없이 교제만을 나눈 것이다.
2)길에서 가르쳤으며(지식)
이 뜻은 지식적인 가르침을 받고 배우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적으로만 안다. 아무리 배워도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 성경을 많이 알아도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 구원은 예수님을 나의 주로 믿는 것이다. 그분을 주인으로 내 맘속에 영접하는 것이다.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해석이 이렇게 된 이유는 성경이 말씀해주고 있다.
◑창 1:27-8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만들셨을 때에 하나님 형상으로 우리를 만드셨다. 모든 만물을 하니님 형상으로 만든 적이 없다. 형상이란 말은 하나님이 영이듯이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 하나님이 인격적이시듯이 인간도 인격적이다. 지혜도 있고 감정도 있고 동물에게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이 되셨다는 말씀은 영혼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대상으로 삼았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닮은 사람을 좋아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인간으로 지은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저주 아래있을 때 주님은 친히 오셔서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할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사랑하신 이유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인 것이다. 이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불신앙하고 마귀의 말을 듣고 죄를 지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로 3:23)- 이 죄는 윤리와 도덕죄가 아니고 하나님을 안 믿는죄인 것이다. 불신앙 하는 죄인 것이다. 이 죄의 상태는 어떤 상태이냐면 엡2:1(허물과 죄로 죽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을 제일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다. 사람의 문제를 정확히 아시는 분도 하나님 이시다.그래서 사람의 문제는 정치적이나 윤리나 도덕이나 경제문제가 아니고 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죄가 하나님께 범죄해서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죽은 상태가 인간의 상태인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고 생기를 부었기 때문에 영과 육이 있다. 짐승은 육신이 죽으면 끝이다. 그러나 죽음은 2가지 인데 영적인 죽음과 육신적인 죽음이 있다.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고 육신적인 죽음은 영혼이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육신적으로는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사람이 있다.또 어떤 사람은 죽은 것 같지만 산사람이 있다. 왜냐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이 성경에는 그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그래서 성경에는 예수믿고 육신이 죽는 사람을 죽었다고 하지않고 잔다고 말씀 하신다. 자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다른 점은 똑같이 있을 때는 모르나 자는 사람이 새벽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낮에도 일어나지 않고 밤에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는 육신이 잠깐 동안 자지만 주 님 오시는날에는 우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무엇이냐면 우리가 하나님앞에 영적뿐만 아니라 육신적으로도 다 영원한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은 영과 육이 있기 때문에 하나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다 구원을 받아야 한다. 엡2:2 상태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다. 하나님이 떠나서 영적으로 죽은 상태는 마귀에게 잡힌 사람이다. 어둠은 빛이 없어서 오는 것이다. 낮에는 태양이 있기 때문에 어둡지 않은 것이다. 빛되신 주님이 떠나시면 어두움 안에 있게 되어 있다. 이것이 저주다. 엡2:3 인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건강, 돈, 명예 모든 것이 저주가 된다. 그래서 사실은 돈이 없어서 망한 사람보다 돈이 많아서 망한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돈이 많으면 인간은 부패되게 되어 있다. 교만하게도 되고 생각도 잘못하게 되기도 한다. 가정도 파괴되고 정말 많다. 잘사는 나라가 훨씬 많기도 하다. 결국은 돈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필요에 따라 적당하게 바르게 주심을 믿는다. 지식도 지식이 많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다. 예수님 믿지 않고 , 사람을 무시하고 그것이 다 부패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사람이 귀중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지식이 많으면 그것을 더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얼마나 잘못된 관념과 가치관 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사람을 무시하고 지식 때문에 사람을 속이고...거짓말은 나쁜 것이다. 거짓은 할 때마다 모두 들통이 나야한다. 그래야 담에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둑질도 마찬가지로 들켜야 되는 것이다.그래야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것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영적인 문제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영적인 문제인 것이고, 하나님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이것은 교제하고 친해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 것은 지식으로 가르치고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배우고 가르치고 훈련받고 교제하면 신앙생활한다고 말한다. 숙달되면 신앙이 좋다도 생각하지만 주님과 관계없는 것이다. 신앙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 이다. 그 분을 나의 주인으로 믿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아브라함,야곱과 이삭은 메시아를 그리스도로 믿은 사람들이다. 바리새인들은 배우고 가르치고 하는 수준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신앙은 배우고 가르치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예) 1+1+1=3 이것은 수학이다. 하지만 1+1+1=1 이것은 성자하나님, 성부하나님, 성령하나님 이분은 한분이시다. 이것이 성경인 것이다. 성경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홍해가 갈라졌다는 것도 이것이고, 처녀가 아들을 낳았다는 것도 이것이며 광야에서 맛나 먹었다는 것도 이것이고 반석에서 물이 나왔다는 것도 이것인 것이다. 수학적인 계산법으로는 틀린 계산법이다. 이것은 생명이 없을 때 해당하는 계산법이다. 사람들은 머리가 이런 머리로 성경을 보니깐 안 맞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틀리고 믿기 어렵고 갈등한다는 말은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이다. 이것은 성경공부를 하면 할수록 신앙이 없어진다. 응답도 되어지지 않고 교회에 와서도 문제가 된다. 신앙이 오래될수록 교회에 걸림이 되고 전도에 걸림이 되고 기쁨이 없는 것이다. 이유가 바로 저 예의 설명 때문인 것이다. 신앙을 오래할수록 마이너스 신앙이 온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신앙을 믿고 있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은 믿으면 믿을수록 믿음이 좋아져야 한다. 또한 믿으면 믿을수록 응답이 되어져야 한다. 또 전도가 되고 교회에 충성스럽고 귀중한 사람이 되어야지 바른 신앙인인 것이다. 이러 현상이 나오는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가고 있다. 멸망의 길인 것이다. 신앙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데 이것이 좁은 길이다.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그분을 찬송하고 경배하고 알아가고 이것이 바로 좁은 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 지식으로 배우고 숙달하는 것으로는 불신앙만 커진다. 왜 여기서 영적가족이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알고 믿는 이렇게 주님이 하는 방법으로 믿는 이렇게 믿어야 하는 것이 영적 사실의 말씀을 듣고 응답이되고 말씀이 성취되고 하나님이 현장에 인자하심을 믿으셔야 우리가 믿을수록 신앙인이 되어야하고 주님을 바르게 알고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에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고 같이 살면서 가르치지 않고 길에서 가르치셨다. 제자들을 길에서 가르치지 않고 방에서 가르치셨다. 왜냐면은 방에서 가르치시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게 하셨다. 그래서 진리라는 것은 우리가 강의해서 배워서 진리를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그것을 숙달해서 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는 것이다. 이 문제가 노력과 수고와 열심히 교제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성도끼리 교제하고 사랑하는 것이 기쁜것인데 주님없이 하면 허전하고 힘빠지게 되고 무너지는 것이다. 하나님 자녀가 되고 사랑해야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자녀가 되기 전에 인간을 아무리 사랑해도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자녀가 돼서 사이 좋게 지내야지 그렇지 않고 사이 좋게 지내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데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분 바로 이분을 우리는 메시야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 우리가운데 거하시매...오셔서 대신 죽으셨다. 왜냐면은 하나님의 법은 죄의 삵은 사망인 것이 때문이다. 우리가 죽어야될 그 죄값을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거기서 다 건져 놓으셨다. 문제를 해결하셨다.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 친교를 한다고 구원받는 것은 절대 아니고 관계를 맺여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 만나는 길이 되셨다. 바로 선지자가 되셨다. 우리가 해결할수 없는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시는 분이시다. 왜 마귀는 천사가 타락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마귀를 이길수 있는 것이다.
◑창 3:15 마귀가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이것이 바로 마귀 머리가 깨어지는 순간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떠나가는 것이고 승리하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지금도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다. 십자가에 모든 죄와 저주를 못박았다.(제사장)그래서 예수를 영접하면 해방한다. 해결하셨다는 증거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이다. 그리고 승천하시고 모든 영으로 우리 속에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죄없이 오셔서 죄없이 죽으시고 죄없기 때문에 우리를 다 해결하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다 믿는자 속에 영원히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며 소원이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고 배우고 열심히 하는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우리의 구주로 믿는 것이다. 예) 우리가 주님을 끝까지 붙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넘어질 때도 일으키면서 가고 힘없을 때도 힘주시면서 가고 우리가 걷지 못하고면 업어서 끝까지 가고 그것이 신앙인 것이다. 우리는 믿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가시는 것이다. 요셉이 노예로 팔릴지라도 예수님은 붙들고 가신다. 다윗이 또한 그렇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문제를 알고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이 신앙이다. 이 분을 성경적, 지식적으로 배우고 아는 것이 아니고 교제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을 대부분 사람들이 이렇게 알기 때문에 넓은 길이라고 한다. 신앙은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모시고 기도하고 믿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믿는 것!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고백했는데 주님이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신앙은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믿으면 하나님께서 은혜주셔서 주님의 기쁨에 헌신이 되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감격 때문에 우리가 하는 것이다. 그 사랑 때문에 기쁨으로 헌신되는 것이 우리의 드려지는 삶이다. 이것이 헌신이다. 이런 관점 속에서 넓은길과 좁은길을 이해하여야 한다. 바리새인들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넓은 길이다고 말한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믿으니깐 좁은길이라고 말한다.
**24절 구하는데 자꾸 이렇게 갈급하는데 나도 구원받겠다고 열심히 노력하는데 정성들이고 예수님은 믿지는 않는다 구주로. 교회 안에서도 예수님은 안 믿고 숙달하고 찬송하고 그것는 다 할수 있다. 그러나 주님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10년, 20년 관계없다. 그러나 하루를 다녀도 구주를 영접하면 구원을 받는 것 그것이 자녀되는 것이다. 이것이 좁은길이다.
**25절 이 말씀에서 노아방주의 닫기는 것이 생각난다. 하나님께서 한번 구원의 문을 닫으면 열 자가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의 생명이 있는 동안 구원의 기회를 주셨다. 그리고 육신의 생명이 있는 것도 은혜받는 시간들이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게 말씀을 전해주고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된 일임을 믿는다. 아무 때나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는 않는다. 구원은 복음을 전해주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중요 한 것은 구원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축복이다. 은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 우리의 복이다. 우리가 지혜로운 자 되길 축원합니다. 은혜받을 때 은혜받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아프고 병들고 누워있으면 은혜받지 못한다. 듣고 싶어도 못 듣고 전도하고 싶어도 성가대하고 싶어도 못한다. 기회 있을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자. 기회라는 것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26절 예수님이 육신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있을 때 우리는 구주로 믿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떡도 먹고 얻어먹고 했지만 주인으로 믿지 않다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다 배웠다. 제자 훈련도 많이 받았다.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이 중요하고 그 분을 내 삶 속에서 나의 주인으로 믿고 모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너희들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 하셨다. 신앙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다.
**27절 행악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주를 보냈는데 그 구주를 거부하는 것이 악하다는 말이다. 그 악의 길로 가니 모든 윤리의 부패까지 오게 된다.
**28절 지옥 같다는 말씀이다. 이를 갈만큼 너무 고통스럽다는 말씀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선지자.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언약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구원 받았지만 너희는 가까이 있으면 내게 선생이라고 말하고 배우기를 좋아했지만 나를 구주로 믿지는 않지 않느냐...신앙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주, 우리를 위해서 대신죽고 3일만에 살아나셔서 지금도 믿는 자 속에 계신 그분을 우리 주인으로 믿어야 한다.
**29절 이방인들이 구원 받는다. 우리들도 동서남북에서 와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다.
**30절 유대인이 먼저 되었지만 사실은 이방인들이 구원받고 먼저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이다. 개인적으로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교회를 와서도 기능 배우고 친교하고 이것만 하면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다. 마음을 열고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면 신앙이 자꾸 성장해 나간다. 그래서 몇 년 되지 않아도 신앙이 성장하고 전도도 되어지고 기쁨과 감사도 있는 것이다. 10년 20년 믿어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 믿을수록 이상하게 신앙생활한 사람들이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자꾸 성장하고 생명이 있지만 조금 이렇게 하면 성장하지 않고...무서운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만나서 구원받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31-2절 그리스도의 메시아의 구속에 완성을 하리라는 말씀이다.사람들은 자꾸 바리새인들의 말,즉 헤롯이 당신을 죽이리라는 말에 관심이 있다. 주님의 관심은 죽고 삶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는데 그리스도의 모든 사명이 있다. 지금 관점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것이다. 우리가 정말 신앙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 앞에 내가 정말 바른 신앙을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내가 신앙생활하는 모습이 좁은 길인가 넓은 길인가가 더 중요하다.
**33절 어떤 어려움과 핍박과 죽음의 길이 있을지라도 나는 메시야의 길로 가겠다고 말씀하신다. 저와 여러분이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속지마시고 예수님 믿는 성도되시길 바란다. 절대 믿음 흔들리지 말고 속지 말자. 정말 믿는 좁은 길로 가는 성도가 되길 원한다. 예수믿는 신앙인으로 가길 원한다. 그분을 의지하는 길로 가고 그분을 주인으로 믿는 길로 가고. 인간이 쓰는 방법과 수단 그런 방법이 아니라 지식적으로 보고 훈련하는 하는 방법이 아니고 그를 믿는 이런 방법은 뭐냐면 삶속에서 영적 가족속에서만 성장할수 있는 비밀이다. 그래서 자꾸만 초대교회에서 영적가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안 그러면 자꾸 사람들의 생각속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쪽으로 가면 바른 신앙이 아니고 영적가족의 길로 가는 것이 바른 신앙의 길인 것이다. 또 믿음의 사람, 주님을 믿는 자가 된다는 말인 것이다.
**34절 우리 주님은 이런 자들도 모으고 구원하기를 끝까지 하심을 믿는다. 우리가 복음 전할 때 한두번 안 듣는 다고 이야기 안된다고 말하지 말고 끝까지 그 사람을 기도하고 사랑하고 복음 전할때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 안 돌아와도 할수 없지만 끝까지 우리가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복음 전하는 것이 마땅할줄 믿는다.
**35절 (요14:19) 예수님께서 세상사람들에게 세상은 나를 알지 못하고 너희는 나를 알 것이고....너희는 나를 보리라 어떻게? 예수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있을 때는 세상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봤으나 영으로 오실때는 예수믿는 사람밖에는 보지 못한다. 예수 믿는 자에게만 보인다. 이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보면 나중에 돌아온다고 되어 있는데 언제 보냐 회계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 너희가 나를 보리라 하셨다. 영은 영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으로서는 알수 없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지만 알수가 없다. 그래서 그분의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믿을 때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분을 알고 보게되는 것이다. 신앙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이다. 메시야로 믿는 것이다. 그분의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구주가 되는 것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