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지만 부드러운 지선 스님 1
사람은 누구나 주위 환경의 영향을 받고 산다. 환경의 영향을 받아 인격이 형성되고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건을 현장에서 경험한 사람은 그것에 의해 인격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물론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역사를 경험했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각기 처해 있는 입장이 다르고 의식이 다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정도가 각기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적인 사건을 시점으로 세대를 구별하기도 한다. 8. 15세대니, 4.19세대니, 5.16세대니 하는 구별이 그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사건은 일어난 시접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서 어떤 기운을 형성한다. 그 기운은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을 규정짓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는 어떤 사람에게는 벼락출세의 기회를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슴에 한이라는 멍에를 안겨준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역사와 세계를 보는 안목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5.16이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를 열었다면, 5.18은 전두환, 노태우 군사 정권 시대를 열었다.
그 중에서 전두환, 노태우씨로 대표되는 군부들은 매우 치밀하고 교활했으며 잔인했다.
이들은 10,27이라는 법난을 일으켰고 이것은 불교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 변화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불교계의 인물이 지선 스님이다.
지선 스님은 10.27법난으로 인하여 출가 승려로서 역사에 눈을 뜨게 되었고, 5.18을 겪으며 광주 시민으로서 민중의 한과 멍에를 가슴에 끌어안는 민중 투사로 변신을 하게 됐다. 이 변신은 지선 스님 개인사에도 커다란 혁명의 사건이지만 불교 현대사에도 하나의 큰 획을 긋게 되었다. 언젠가 사석에서 지선 스님은 “노태우와 전두환씨가 나에게 선지식이다. 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고맙다”라는 말을 했다.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자기 자신을 불교운동의 선봉장이 되게 한 것이 전두환, 노태우씨라는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저들이 자신으로 하여금 변신하여 새로 태어나게 했으며 한 사람의 승려로 역사 앞에 서도록 했다는 것이다.
나는 제주도 관음사에세 지선 스님을 처음 만났다. 그 때 나는 바랑 하나를 지고 떠도는 운수객이었고 지선 스님은 교구본사인 관음사 주지 스님이었다. 당시 나이가 30대 중반으로 본사 주지로서는 가장 어린 나이었다고 한다.
지선 스님이 제주도 관음사 주지로 오기 전부터 나는 제주도에서 몇 철을 지내고 있었다. 섬나라인 제주도는 별도로 하나의 특수한 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제주도는 육지와는 다른 제주불교가 있고, 활동하는 스님들도 제주도 스님들이 따로 있다. 이렇게 지역성이 강하기 때문에 육지에서 들어간 스님들이 활동하기란 여간 힘든 곳이 아니다.
이러한 제주도에 그것도 제주도 불교를 대표하는 교구 본사 주지로 젊은 스님이 온 것이다.
처음 지선 스님을 보았을 때의 인상은 영리하고 핸섬한 미남이었다. 그리고 차가운 지성미가 있었다. 모두들 저렇게 젊고 여려 보이는 스님이 어떻게 주지를 할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그러한 우려와는 달리 법문도 잘하고 신도관리도 잘해서 신도들에게 단번에 대단한 인기를 얻어냈다.
관음사는 제주 시내에 포교당이 한 있어서 주지 스님은 포교당과 큰절을 오르내리며 매우 바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런 바쁜 중에도 스님은 난을 기르고 수석을 모았다. 근자 지선 스님이 티비에 나오고 민주화 운동을 하는 모습만을 본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탐미적인 사람인가를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 때 잠시 관음사에서 봄과 여름을 살았기 때문에 그를 잘 안다. 나 역시 당시에 서예의 아름다움에 심취해서 열심히 글씨를 익히고 있었는데 지선 스님은 붓을 들면 글씨 또한 호쾌하게 쓸 줄도 알았다. 수석의 아름다움을 나는 지선 스님의 소장품을 통해 알았다. 한번은 어른 주먹 두 개 정도 크기의 돌 하나를 주워왔다. 공항에서 손님을 배웅하고 오는 길에 길옆에 뒹굴고 있는 것을 주웠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의 못 생긴 돌멩이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선 스님이 돌을 물에다 씻고 수반 위에 앉혀 놓으니까 명품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하나의 돌멩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것과 같았다. 이렇게 돌이란 것이 아무나 물가에 가서 주워다 놓으면 되는 것인 줄 알기 쉽지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선 돌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야 하고 돌에다 생명을 불어넣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창작 예술이다.
지금도 지선 스님은 돌을 누구보다도 아끼고 있다. 수석을 하는 사람들은 민주인사 지선‘보다는 ’수석가 지선‘을 더 알아준다고 한다. 작년 여름이던가?
처음으로 종태 스님과 함께 문빈 정사에 있는 스님의 거처를 찾아갔을 때 나는 가장 먼저 수석을 안부부터 물었다.
민주인사고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독재 권력과 맞서야 했고, 치열하고 가열찬 삶을 살고 있지만 아직도 돌을 만지면서 고운 심성을 가꾸고 있는 지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다행히도 스님의 방에는 고아한 돌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제주도에서 보았던 눈에 익은 것도 있어서 더욱 반가웠다.
이렇게 돌을 사랑하고 난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심성을 지닌 분이 지선 스님이다. 1980년대 우리 사회가 너무나 경직되어 숨이 막히고 있을 때 나는 성남의 외진 산 밑에 웅크리고 들어앉아 있었다. 그 때 오직 우레와 같이 들려오는 이름은 지선 스님과 진관 스님이었다. 옛 관음사 주지 지선을 알고 있는 나는 처음에는 동명이인인가 하고 의심까지 했었다.
지선의 모습을 민주화운동의 형장에서만 보아온 사람들은 과격한 사람, 또는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 가슴에 한이 맺힌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선의 한쪽 면만을 본 것에 불과하다. 지선 스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가 광주 사람이라는 것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 광주의 5.18을 이야기로 전해들은 타 지역 사람과 직접 겪은 광주를 위시한 전라도 사람들의 감정은 같을 수가 없다. 호남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5.18의 하한이 큰 못으로 가슴에 박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광주 사람, 광주 스님이라고 다 민주 인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한을 가슴에 담아두고는 있을지언정 누군가가 나서서 자신들의 한을 풀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에 광주를 대표하고 불교를 대표하여 지선 스님이 분연히 앞장을 선 것이다.
난을 사랑하고 돌을 볼 줄 아는 지선으로 멈추어 있지 않고, 혹은 본사 주지나 하는 권승으로 나아가지 않고 역경과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돌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때로는 대중 앞에서 분노의 사자후를 하고, 저 간악한 독재의 무리들을 향하여 철퇴를 가하는 말을 하지만, 그의 정서는 여전히 아름다운 난이고 돌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아름다움이 형상에만 있지 않음을 알 것이다. 돌을 볼 줄 아는 눈, 돌에 생명을 불어넣을 줄 아는 사람은 아름다움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볼 줄도 아는 것이다. 진선미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992년 10월에 실천승가회가 생기고 부터 나는 지선 스님을 자주 만나고 있다. 같은 마당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나도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옛날 서예를 익히고 당시를 읽고 고문진보를 이야기하길 좋아하던 그 사람이 아니다. 80년대 시대상황의 영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발전적으로 변화하여 만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또 얼마나 의미가 있고 좋은 일인가?
지선 스님을 향한 나의 마음과 감회가 어떠한지를 지선 스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출처 ; 효림 스님 /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