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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기양단(執其兩端)
양 쪽을 바르게 잡아 지우치지 않았다는 뜻으로, 중용을 강조한 말이다.
執 : 잡을 집(土/8)
其 : 그 기(八/6)
兩 : 두 양(入/6)
端 : 바를 단(立/9)
출전 : 중용(中庸) 第06章
이 성어는 어느 쪽으로 지우치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중용(中庸)에서 공자(孔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子曰: 舜其大知也與. 舜好問以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其斯以為舜乎.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순임금은 큰 지혜를 지니신 분이었도다.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시고 일상적인 말도 살피시기를 좋아하시고, 악함은 숨기시고 선함을 드러내시었다. 양 극단을 파악한 뒤, 거기서 가장 적절한 말과 행동으로 백성에게 적용하였으니 이것이 그가 순임금이 된 까닭인 것이다."
(中庸)
또, 채근담(菜根譚)의 다음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겠다.
淸能有容 仁能善斷
明不傷察 直不過矯
是謂蜜餞不甛 海味不鹹 裳是懿德.
청렴하고 능력 있으면서도 너그럽고, 어질면서도 결단력이 있고, 총명하면서도 지나치게 살피지 않고, 강직하면서도 도를 넘게 따지지 않는다면, 이는 적당히 꿀을 넣어 달지 않은 음식이고 짜지 않은 해산물과 같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요즈음 세태는 흑백논리만 난무해 세상이 어지럽다. 중용을 찾아야 한다.
집기양단(執其兩端)
양 극단을 파악한 뒤 합리적 행동을 하라
흑백논리. 시급히 버려야 할 병폐다. 매사 '내 편 아니면 네 편' 식 이분법적 사고는 조직을 쇠하게 하고 구성원 간 인간성마저 황폐케 한다.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공자가 성군 순 임금의 덕을 흠모하면서, '양 극단을 파악한 뒤, 거기서 가장 적절한 말과 행동으로 백성에게 적용했다(執其端 用其中於民)'고 한 가르침은 큰 깨우침을 준다. 중용의 상생정신이다.
원문에서 보듯 가장 적절한 말과 행동은 '가운데 중(中)'으로 쓰고 있다. 되새겨 보자. 중간은 물리적인 거리나 시간의 제약을 받지는 않는다. 이동과 변환이 가능하다. 상대에 대한 사려 깊음과 세심한 배려가 전제돼 있으면 포용의 시너지는 무한대일 정도로 크다.
그렇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밸런스 유지에 힘써야 한다. 논어에 지나침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過猶不及)는 경책이 있지 않은가.
넘치는 것을 일컬어 노자에서는, '갖고 있는 게 가득함은 비어 있는 것만 못하며(持而盈之 不如其已), 단련시켜 예리하게 된 것은 오래도록 보존될 수 없다. 황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면 그것을 다 지킬 수 없고(金玉滿堂 莫之能守), 부귀하다고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입게 될 것이다(富貴而驕 自遺其咎)'고 했다.
극단을 피하라는 채근담의 훈계를 귀담아 들어야겠다. '청렴하고 능력 있으면서도 너그럽고, 어질면서도 결단력이 있고, 총명하면서도 지나치게 살피지 않고, 강직하면서도 도를 넘게 따지지 않는다면 이는 적당히 꿀을 넣어 달지 않은 음식이고 짜지 않은 해산물과 같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淸能有容 仁能善斷 明傷察
直過矯 是謂蜜餞甛 海味鹹.
裳是懿德.
집기양단(執其兩端)
양극단을 바르게 잡아 치우치지 않는다, 중용을 실천하다.
일상에서 많이 듣는 中庸(중용)의 말은 쉽다.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에 있다, 그래서 홀로 떳떳하다 등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중용은 어렵다. 뜻은 알아듣기 쉽다고 해도 실천에는 성인도 어렵기 때문이다. 몇 가지 사례만 보자.
공자(孔子)가 극단적인 경향과 소극적인 성향의 두 제자를 깨우치면서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맹자(孟子)에는 중용을 취했더라도 그것을 판단할 공정한 저울이 없으면 집중무권(執中無權)이라며 또 하나의 고집이 되고 만다는 말이 나온다.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가 엮은 '중용(中庸)'에는 서명처럼 다양하게 언급된다. 먼저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한다(知者過之 愚者不及也/ 지자과지 우자불급야)고 말한다. 또 군자가 중용을 행하더라도 때에 알맞게 해야 한다(君子而時中/ 군자이시중)고 했다.
공자가 요(堯)임금의 뒤를 이은 순(舜)임금을 평해 큰 지혜로 치우침이 없었기에 성군이 될 수 있었다고 했다. 바로 성어가 나오는 '양 극단을 바르게 잡아 가장 적절하게 백성에게 행하였다(執其兩端 用其中於民/ 집기양단 용기중어민)'는 부분이다.
이처럼 어려운 중용이니 우왕(禹王)에게 선양하면서도 신신당부한다. '오직 정성을 다해 하나 돼야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으리라(惟精惟一 允執厥中/ 유정유일 윤집궐중).' 이 말은 서경(書經)에 있다.
부족해도 만족함을 알고 넘치는 것을 더 경계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다른 데서도 많이 접한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의 구절을 떼어 보자. 운이장(運夷章)이다. '황금과 보옥이 집에 가득 있더라도 그것을 능히 지킬 수 없고(金玉滿堂 莫之能守/ 금옥만당 막지능수), 부귀한 지위에 교만이 더해지면 스스로 허물을 입게 될 것이다(富貴而驕 自遺其咎/ 부귀이교 자유기구).'
홍자성(洪自誠)의 채근담(菜根譚)에는 중용을 터득한 수양자를 이렇게 나타낸다. '청렴하고 능력 있으면서도 너그럽고, 어질면서도 결단력이 있고, 총명하면서도 지나치게 살피지 않고, 강직하면서도 지나치게 따지지 않는다(淸能有容 仁能善斷 明不傷察 直不過矯/ 청능유용 인능선단 명불상찰 직불과교).'
설명이 많은 만큼 어렵다는 것을 알겠다. 성인도 어려운데 보통 사람이 욕심을 제어하기는 불가능하다. 욕심이 아니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 최상이라고 고집하며 다른 의견을 묵살하는 것도 예사다.
세상이 양극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데 중간지대는 양쪽에서 회색분자라며 욕한다. 상대를 가장 넓게 인정해야 하는 정치권에선 그야말로 사생결단이니 중도는 더욱 어렵다. 조금만 내려놓으면 상생이 가능한데도 욕심이 앞서니 예나 지금이나 중용이 희귀한 모양이다.
중용(中庸)의 진정한 의미
중용(中庸)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또 중용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철학은 어떤 것일까?
도대체 중용(中庸)이란 무엇인가?
요즘처럼 보수나 진보 좌우 대결이 심할때는 더욱 고민(苦悶)에 빠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것이 좋다며 '중용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흔히 중용이란 '중립을 지킨다' 또는 '중간의 입장' 등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심지어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라는 인식으로 중용을 이해한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유교의 교육 및 교양 서적으로 유교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책이다. 사서(四書)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말하고, 삼경(三經)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을 말한다.
기원전 5세기경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이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중용(中庸)'을 집필했는데, 중용(中庸)은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이 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는 오늘날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사상(思想)이다.
그렇다면 중용(中庸)의 참된 뜻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어떠한 일에서나 사실과 진리에 맞도록 하여 편향, 편중(偏重)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인간적 욕심과 도덕적 본성이 함께 내재되어 있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인간적 욕심이 없을수 없으며,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도덕적 본성이 없을수 없는데 두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이치가 중용(中庸)이라 했다.
도덕적 본성상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도록 하고 인간적 욕심이 매번 도덕적 본성의 명(命)을 듣게 하는 것이 중용(中庸)의 도(道)를 실천하는 길인데
이를 위하여 성(性), 도(道), 교(敎)라는 개념으로 천도와 인도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성(性)은 하늘이 준 사람속에 있는 하늘의 속성이고, 도(道)는 하늘이 부여한 본연의 성(性)을 따르는 것인데, 효도와 자식사랑, 형제간의 우애, 가정의 화목, 이웃 사랑이 도(道)인 것이다. 교(敎)는 도(道)를 마름질 하는 것으로 도(道)를 구체화한 교훈, 예절, 법칙, 제도 등으로 구체화된 것을 말하고 있다.
중용(中庸)의 반대말은 '극단(極端)'이다.
중국의 전국시대때 양주(楊朱)라는 사상가가 있었다. 그는 '세상에 이로움이 될지라도 내 털 하나 뽑아주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위아(爲我)주의자였다.
또 묵자(墨子)는 '세상에 이롭다면 내 몸을 산산이 부서뜨려서라도 돕겠다’는 극단적인 겸애(兼愛)주의자 였다.
그러자 자막(子莫)이라는 사람은 이 두 사상이 매우 극단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는 중도(中道)를 취했다. 반쯤은 나를 위하고 반쯤은 세상을 위해서 마음을 쓰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이런 자막(子莫)의 태도가 극단적인 위아주의(爲我主義)나 겸애주의(兼愛主義)보다는 낫지만 반드시 중용(中庸)은 아니라고 했다.
경중을 고려하지 않고 항상 고정된 중도(中道)를 취하는 것은 중용(中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있는 '중간을 지킨다'는 것은 진정한 중용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진정한 중용(中庸)은 단순한 중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의 중간인 중도, 부자와 빈자의 중간인 중산층, 우월과 열등의 중간인 평범 등은 중용이 아니다. 진정한 중용이 되려면 양극단을 모두 이해하고 품을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중용(中庸)은 상황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항상 중간(中間)과 같은 지점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맞는 중용(中庸) 즉 시중(時中)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시중(時中)이란 중용(中庸) 2장의 '군자가 중용을 이룸은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다' 라는 문장에서 비롯되었다(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맹자는 여러 성인(聖人)을 열거하면서 공자를 성인 중에서도 때에 딱 맞게 대처하신 분(聖之時者),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성인 중 맑은 사람(聖之淸者), 이윤(伊尹)은 성인 중 맡길 만한 사람(聖之任者), 유하혜(柳下惠)는 성인 중 화합하는 사람(聖之和者)으로 처세가 고정되어 있는데 비해, 공자는 어느때든 알맞게 대처 하는 분으로 높이 받들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중용의 시중(時中)이란 어느 한곳에 고정되어 있는것이 아니라 사안과 사태에 따라 가장 알맞은 판단과 결정을 내릴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결정을, 때로는 극단적으로 진보적인 결정을 내릴수도 있다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바른일에는 언제나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 칭송하고 그릇된 일에는 언제든 가차없는 질타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차는 사정을 보아주는 것이나 용서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기회주의자나 무원칙과는 다르다. 기회주의자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고, 무원칙은 주관이 없는 사람이지만 시중(時中)은 공평무사함과 뚜렷한 주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래서 진정한 중용을 실천하기란 어렵다.
마음을 비우고 사욕을 내려놓되 전체를 '나'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인(仁)의 심성으로 관조(觀照)하되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낼수 있는 지(智)의 능력을 겸비(兼備)해야 한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끊임없이 성찰하고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중용(中庸)이라는 글자가 만들어진 저변을 살펴보면 중용의 한자는 가운데 중(中)자와 쓸 용(庸)자로 만들었다.
중국 청나라의 언어학자 단옥재는 '갑골문에 보이는 '중(中)'자는 깃발이 펄럭이는 모양이다' 라고 했다. 깃발은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상하, 전후, 좌우로 나부낀다.
그러나 그 실체는 깃대라고 하는 주체(主體)이다. 깃발은 바람의 상황과 여건에 따라 펄럭이지만 축인 깃대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깃발은 깃대에 묶여 있어야 할 필연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갑골문으로 본 중(中)자는 중심(中心), 중점(中點) 혹은 센터(center)라는 의미소를 낳고 있고 안팎을 의미하는 내외(內外)에서 '안(內)'을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이는 '중(中)이란 늘 자기와 타인, 안팎의 연관성에서 판단되거나 설정되는 개념어' 라고 말하고, 또 어떤이는 '중(中)자는 나와 너, 혹은 내면과 외면, 중심과 주변, 상과 하 사이의 긴장(緊張)관계 그 사이의 무게 중심이나 기준을 일러주는 잣대에 해당하지만
그것은 시간적, 공간적, 다중적 양단(兩端)을 보여 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中)이란 정도와 적중을 말하는 것으로서 산술적, 기계적 평균이 아니란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용(中庸)을 '행복한 삶'이라고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 단단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강해지면 만용(蠻勇)하게 되고, 약하면 한없이 비겁(卑怯)해 짐으로 중간이 바로 용기(勇氣) 즉, '용기가 중용(中庸)인 것이다' 라고 말했다.
또 '너무 금욕적(禁慾的)이면 그것도 문제'라고 했다. 이는 자기를 헤치기도 하지만 사회를 원활하게, 건강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또 '지나친 탐닉(耽溺)도 안 좋지만, 지나친 인색(吝嗇)도 안 좋고 지나친 낭비(浪費)도 안 좋다'고 했다. 적절한 절제, 적절한 관대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진정한 중용(中庸)이다.
이처럼 중용이란 우리 사회의 전반에 걸처 근본(根本)이 되는 것이며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반드시 지켜야할 사상이고 행해야 할 표상(表象)이다.
그래서 중용(中庸)이 바로 쓰이는 사회는 정의롭고 훈훈하여, 열심히 일하고 정당하게 대우 받고, 해야할 일은 넘쳐나서 사람들은 행복하고, 언제나 서로를 보듬고 따스하게 손잡고 함께한다. 어느 한곳에 치우침이 없이 과하거나 부족함도 없으며 언제나 떳떳하다.
이제는 중용(中庸)을 지향하는 자, 스스로를 중도(中道)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움직여 진정한 중용이 살아 숨쉬는 사회와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더 이상 침묵하는것은 중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 執(잡을 집)은 ❶회의문자이나 형성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执(집)의 본자(本字)이다. 幸(행; 쇠고랑)과 丮(극; 꿇어 앉아 두 손을 내밀고 있는 모양)의 합자(合字)이다. 따라서 그 손에 쇠고랑을 채운다는 뜻을 나타낸다. 또는 음(音)을 나타내는 (녑, 집)과 丸(환; 손을 뻗어 잡는다)로 이루어졌다. 죄인(罪人)을 잡다의 뜻이 전(轉)하여 널리 잡다의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執자는 '잡다'나 '가지다', '맡아 다스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執자는 幸(다행 행)자와 丸(알 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執자의 갑골문을 보면 죄수의 손에 수갑을 채운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執자는 이렇게 죄수를 붙잡은 모습을 그려 '잡다'라는 뜻을 표현했다. 후에 금문과 소전을 거치면서 수갑은 幸자로 팔을 내밀은 모습은 丸자가 대신하면서 지금의 執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執(집)은 ①잡다 ②가지다 ③맡아 다스리다 ④처리하다 ⑤두려워 하다 ⑥사귀다 ⑦벗, 동지(同志) ⑧벗하여 사귀는 사람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잡을 액(扼), 잡을 파(把), 잡을 구(拘), 잡을 착(捉), 잡을 포(捕), 잡을 조(操), 잡을 나(拏), 잡을 나(拿), 잡을 지(摯), 잡을 체(逮), 잡을 병(秉)이다. 용례로는 일을 잡아 행함을 집행(執行), 정권을 잡음을 집권(執權), 어떤 것에 마음이 늘 쏠려 떨치지 못하고 매달리는 일을 집착(執着), 고집스럽게 끈질김을 집요(執拗), 마음에 새겨서 움직이지 않는 일념을 집념(執念), 붓을 잡고 작품 등의 글을 씀을 집필(執筆), 의사가 수술을 하기 위해 메스를 잡음을 집도(執刀), 나라의 정무를 맡아봄 또는 그 관직이나 사람을 집정(執政), 주인 옆에 있으면서 그 집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집사(執事), 사무를 봄을 집무(執務), 병의 증세를 살피어 알아냄을 집증(執症), 정의를 굳게 지킴을 집의(執義), 허가 없이 남의 토지를 경작함을 집경(執耕), 뜻이 맞는 긴밀한 정분을 맺기 위한 계기를 잡음을 집계(執契), 고집이 세어 융통성이 없음을 집니(執泥), 자기의 의견만 굳게 내세움을 고집(固執), 편견을 고집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음을 편집(偏執), 굳게 잡음을 견집(堅執), 집착이 없음을 무집(無執), 거짓 문서를 핑계하고 남의 것을 차지하여 돌려보내지 않음을 거집(據執), 남에게 붙잡힘을 견집(見執), 제 말을 고집함을 언집(言執), 어떤 일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고 굳이 움직이지 아니함을 의집(意執), 서로 옥신각신 다툼을 쟁집(爭執),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고집하는 일을 망집(妄執), 갈피를 잡지 못하고 비리에 집착함을 미집(迷執),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여 양보하지 아니함을 확집(確執), 전하여 주는 것을 받아 가짐을 전집(傳執), 마땅히 나누어 가져야 할 재물을 혼자서 모두 차지함을 합집(合執), 뜨거운 물건을 쥐고도 물로 씻어 열을 식히지 않는다는 뜻으로 적은 수고를 아껴 큰 일을 이루지 못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집열불탁(執熱不濯), 더우면 서늘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집열원량(執熱願凉), 융통성이 없고 임기응변할 줄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자막집중(子膜執中), 고집이 세어 조금도 변통성이 없음 또는 그 사람을 일컫는 말을 고집불통(固執不通) 등에 쓰인다.
▶️ 其(그 기)는 ❶상형문자로 벼를 까부르는 키의 모양과 그것을 놓는 臺(대)의 모양을 합(合)한 자형(字形)이다. 나중에 其(기)는 가리켜 보이는 말의 '그'의 뜻으로 쓰여지고 음(音) 빌어 어조사로 쓴다. ❷상형문자로 其자는 '그것'이나 '만약', '아마도'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其자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키'를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其자를 보면 얼기설기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바구니가 그려져 있었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받침대를 그려 넣으면서 지금의 其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其자는 본래 '키'를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나 '만약'과 같은 여러 의미로 가차(假借)되어 있다. 그래서 후에 竹(대나무 죽)자를 더한 箕(키 기)자가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其(기)는 ①그, 그것 ②만약(萬若), 만일(萬一) ③아마도, 혹은(그렇지 아니하면) ④어찌, 어째서 ⑤장차(將次), 바야흐로 ⑥이미 ⑦마땅히 ⑧이에, 그래서 ⑨기약하다 ⑩어조사(語助辭)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어떤 정해진 시기에서 다른 정해진 시기에 이르는 동안을 기간(其間), 그 나머지나 그 이외를 기여(其餘),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을 기타(其他), 그 역시를 기역(其亦), 그 세력이나 형세를 기세(其勢), 그 밖에를 기외(其外), 그 벼슬아치가 그 벼슬을 살고 있는 동안을 기등(其等), 그때를 기시(其時), 실제의 사정이나 실제에 있어서를 기실(其實), 그 전이나 그러기 전을 기전(其前), 그 가운데나 그 속을 기중(其中), 그 다음을 기차(其次), 그 곳을 기처(其處), 그 뒤를 기후(其後), 각각으로 저마다 또는 저마다의 사람이나 사물을 각기(各其), 마침내나 기어이나 드디어를 급기(及其), 어린 아이를 귀엽게 이르는 말을 아기(阿其), 한 달의 마지막이라는 뜻으로 그믐을 이르는 말을 마기(麻其), 마침내나 마지막에는 급기야(及其也), 그때에 다다라를 급기시(及其時),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중간쯤 되어 있음을 거기중(居其中), 알맞은 자리를 얻음을 득기소(得其所), 일을 일대로 정당하게 행함을 사기사(事其事), 그 가운데에 다 있음을 재기중(在其中), 마침 그때를 적기시(適其時), 그 근본을 잃음을 실기본(失其本), 절친한 친구 사이를 일컫는 말을 기이단금(其利斷金), 또는 기취여란(其臭如蘭), 모든 것이 그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됨을 이르는 말을 각득기소(各得其所), 가지와 잎을 제거한다는 뜻으로 사물의 원인이 되는 것을 없앤다는 말을 거기지엽(去其枝葉),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매우 많음을 이르는 말을 부지기수(不知其數), 어떠한 것의 근본을 잊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불망기본(不忘其本),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다는 뜻으로 말만 꺼내 놓고 실행이 부족함을 일컫는 말을 언과기실(言過其實), 겉을 꾸미는 것이 자기 신분에 걸맞지 않게 지나침을 일컫는 말을 문과기실(文過其實), 훌륭한 소질을 가지고도 그에 알맞은 지위를 얻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부득기소(不得其所), 그 사람의 고기를 먹고 싶다는 뜻으로 원한이 뼈에 사무침을 이르는 말을 욕식기육(欲食其肉), 착한 것으로 자손에 줄 것을 힘써야 좋은 가정을 이룰 것임을 일컫는 말을 면기지식(勉其祗植), 미리 말한 것과 사실이 과연 들어맞음을 이르는 말을 과약기언(果若其言), 얼굴의 생김생김이나 성품 따위가 옥과 같이 티가 없이 맑고 얌전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여옥기인(如玉其人), 용이 그의 못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영걸이 제 고향으로 돌아감을 이르는 말을 용반기연(龍返其淵), 어떤 일을 할 때 먼저 그 방법을 그릇되게 함을 이르는 말을 선실기도(先失其道) 등에 쓰인다.
▶️ 兩(두 량/양, 냥 냥/양)은 ❶상형문자로 両(량), 两(량)은 통자(通字), 两(량)은 간자(簡字), 刄(량)은 동자(同字)이다. 저울추 두개가 나란히 매달려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둘', '한쌍'을 뜻한다. 兩(량)은 무게의 단위이며 나중에 돈의 단위에도 쓰고 또 둘, 쌍의 뜻으로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兩자는 '둘'이나 '짝', '무게의 단위'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그동안 兩자는 저울추가 나란히 매달려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해석했었다. 兩자가 '무게의 단위'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兩자의 금문을 보면 이것은 마차를 끌던 말의 등에 씌우던 '멍에'와 '고삐 고리'를 함께 그린 것이었다. 두 개의 멍에가 있다는 것은 말 두 필이 마차를 끌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兩자는 본래 '쌍'이나 '짝'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었지만, 후에 저울을 닮았다 하여 무게의 단위로도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兩(량/양, 냥/양)은 양쪽의 두 나라를 양국(兩國), 양쪽의 옆면을 양측(兩側), 관련이 있는 두 쪽의 사물이나 사람을 양자(兩者), 앞면과 뒷면의 두 면 또는 사물의 양쪽의 면을 양면(兩面), 어떤 관계의 두 사람을 양인(兩人), 두 쪽이 다 큰 것을 양대(兩大), 남성과 여성 또는 암컷과 수컷의 양쪽의 성을 양성(兩性), 북극과 남극이나 양극과 음극 또는 서로 반대되는 양쪽 극단을 양극(兩極), 동물이 물 속이나 땅 위의 다 삶을 양서(兩棲), 두 마리의 범 또는 역량이 비슷한 같은 두 용자를 비유하는 말을 양호(兩虎), 두 집안을 일컫는 말을 양가(兩家), 이러기도 어렵고 저러기도 어려움을 양난(兩難), 둘로 나눔을 양분(兩分), 두 가지의 서로 대립되는 논설이나 의논을 양론(兩論), 좌우의 두 어깨를 양견(兩肩), 좌우의 두 눈썹을 양미(兩眉), 신랑 신부 두 사람이 쓸 두 벌의 이부자리를 양금(兩衾), 양면을 갈아 조개의 다문 입 모양으로 세운 날을 양인(兩刃), 한글과 한문을 양서(兩書), 아버지와 어머니를 양친(兩親), 장기에서 말 하나를 죽이고 상대방의 말 둘을 잡는 수 또는 그렇게 잡는 일이나 한꺼번에 둘을 잡는 일을 양득(兩得), 두 과부가 슬픔을 서로 나눈다는 뜻으로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동정한다는 말을 양과분비(兩寡分悲), 양손에 떡을 쥐었다는 뜻으로 가지기도 어렵고 버리기도 어려운 경우를 이르는 말을 양수집병(兩手執餠), 둘 중에서 하나를 가림을 일컫는 말을 양자택일(兩者擇一), 남자와 여자가 사회적으로나 법률적으로 성별에 의한 차별이 없이 동등하게 받는 대우를 일컫는 말을 양성평등(兩性平等), 용과 범이 서로 친다는 뜻으로 강자끼리 승부를 다툼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양웅상쟁(兩雄相爭), 두 마리의 봉황이 나란히 날아간다는 뜻으로 형제가 함께 영달함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양봉제비(兩鳳齊飛), 좌우 양쪽에 날이 있어 양쪽을 다 쓸 수 있는 칼이라는 뜻으로 쓰기에 따라 이롭게도 되고 해롭게도 되는 것을 이르는 말을 양인지검(兩刃之劍), 콩알 두 개로 귀를 막으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소한 것이 큰 지장을 초래함을 이르는 말을 양두색이(兩豆塞耳), 두 다리의 여우라는 뜻으로 마음이 음흉하고 욕심이 많은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을 양각야호(兩脚野狐), 두 아이가 시기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을 이르는 말을 양소무시(兩小無猜), 양편의 의견을 듣고 시비를 공평하게 판단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양편공사(兩便公事), 가난한 두 사람이 함께 모인다는 뜻으로 일이 잘 되지 않음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양궁상합(兩窮相合), 양쪽에 다 이유가 있어서 시비를 가리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을 양시쌍비(兩是雙非),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다툰다는 뜻으로 힘센 두 영웅 또는 두 나라가 서로 싸움을 이르는 말을 양호상투(兩虎相鬪), 장기에서 두 개의 장기 짝이 한꺼번에 장을 부르는 말밭에 놓이게 된 관계 또는 하나의 표적에 대하여 두 방향에서 공격해 들어감을 일컫는 말을 양수겸장(兩手兼將) 등에 쓰인다.
▶️ 端(끝 단, 헐떡일 천, 홀 전)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설 립(立; 똑바로 선 모양)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耑(단)으로 이루어졌다. 直立(직립)의 뜻이다. 또 음(音)이 斷(단)과 통하는 데서 빌어 자른 끝의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端자는 '바르다'나 '단정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端자는 立(설 립)자와 耑(시초 단)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端자의 갑골문을 보면 立자가 아닌 止(발 지)자와 耑자가 결합한 모습이었다. 耑자는 잡초의 뿌리와 이파리를 표현한 것으로 '시초'라는 뜻이 있다. 여기에 발을 뜻하는 止자가 더해진 端자는 이파리가 앞으로 곧게 뻗어 나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端자는 '바르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지만 耑자의 의미가 강하게 남아있어서인지 '시초'나 '끝'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그래서 端(단, 천, 전)은 성(姓)의 하나로 ①끝 ②가, 한계(限界) ③처음, 시초(始初) ④길이의 단위(單位) ⑤실마리, 일의 단서(端緖) ⑥까닭, 원인(原因) ⑦막료(幕僚) ⑧예복(禮服) ⑨조짐(兆朕) ⑩생각, 느낌 ⑪등차(等差), 등급(等級) ⑫가지, 갈래 ⑬문(門), 정문(正門) ⑭도대체(都大體), 대관절(大關節) ⑮때마침, 공교(工巧)롭게도 ⑯단정(端整)하다 ⑰바르게 하다 ⑱바르다 ⑲살피다, 그리고 ⓐ(숨을)헐떡이다(천) ⓑ홀(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마칠 료(了), 뾰족할 첨(尖), 끝 말(末), 다할 극(極), 그칠 지(止), 마칠 종(終)이다. 용례로는 일의 처음이나 일의 실마리를 단서(端緖), 실마리 또는 일의 첫머리를 단초(端初), 어떤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상태에 있는 것을 단적(端的), 바르고 얌전함을 단정(端正),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음을 단정(端整), 바른 말을 함 또는 그 말을 단언(端言), 바르게 정돈된 모양을 단연(端然), 단정한 사람을 단인(端人), 단정하게 차림을 단장(端裝), 단정하게 앉음을 단좌(端坐), 올바르고 공평함을 단평(端平), 연극이나 영화의 대수롭지 아니한 말단의 역 또는 그 역을 맡은 사람을 단역(端役), 행실이 단정하고 겉모양이 아름다움을 단려(端麗), 바른 뜻을 단지(端志), 단정하고 아담함을 단아(端雅), 단정하고 선량함을 단량(端良), 단정하고 정중함을 단중(端重), 바르고 단정한 행동을 단행(端行), 단정하고 아름다움을 단화(端華), 물건의 뾰족한 끝 또는 시대의 사조나 유행 같은 것에 앞장서는 일을 첨단(尖端), 괴롭고 번거로운 일이나 귀찮고 해로운 일을 폐단(弊端), 일이 일어남 또는 그러한 실마리를 발단(發端), 자기가 믿는 이외의 도나 옳지 아니한 도를 이단(異端), 한 끝이나 사물의 일부분을 일단(一端), 일이 흐트러져 가닥이 많음을 다단(多端), 사물의 맨 끝 또는 조직의 가장 아랫부분을 말단(末端), 맨 끝이나 맨 끄트머리로 몹시 궁하여 여지가 없음 또는 극도에 이르러 어찌할 수 없음을 극단(極端), 떠들썩하게 벌어진 일을 야단(惹端), 수 없이 많은 갈래나 토막을 만단(萬端), 온갖 일의 실마리 또는 여러 가지 방법을 백단(百端), 일의 실마리 또는 사건의 단서를 사단(事端), 구멍 속에서 목을 내민 쥐가 나갈까 말까 망설인다는 뜻으로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양 또는 어느 쪽으로도 붙지 않고 양다리를 걸치는 것을 이르는 말을 수서양단(首鼠兩端), 일이 얽히고 설키다 갈피를 잡기 어렵다는 말을 복잡다단(複雜多端), 일이 많은 데다가 까닭도 많다는 말을 다사다단(多事多端), 일부러 말썽이 될 일을 일으킨다는 말을 고심사단(故尋事端),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다는 말을 필유사단(必有事端), 일일이 가려낼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의 갈피를 이르는 말을 천서만단(千緖萬端), 무릎을 거두고 옷자락을 바로 하여 단정히 앉음을 이르는 말을 염슬단좌(斂膝端坐), 만감이 착잡하게 일어난다는 말을 백단교집(百端交集), 만 가지로 깨닫게 가르치다는 뜻으로 친절하게 가르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만단개유(萬端改諭), 몸 형상이 단정하고 깨끗하면 마음도 바르며 또 겉으로도 나타난다는 말을 형단표정(形端表正)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