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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에스겔 묵상
1. 에스겔은 어떤 책인가?
에스겔은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2차 바벨론 포로 시기에
여호야긴 왕과 함께 잡혀 가서 바벨론의 그발강가에서 살았다.
그가 포로로 잡혀 간지 5년 후부터 예언 사역을 했는데
이 때가 그의 나이 30세였다.
제사장의 직무를 시작할 수 있는 나이였다.
이 책은 바벨론에 잡혀 간 유다 자손들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또한 이방 여러 나라들을 향한 예언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아버지이시다.
자신을 배반한 집 나간 여인 같은 그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포로 시기의 유대인들을 에스겔 같은 선지자를 세우셔서
말씀하시고 위로하시고 소망을 주시고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끊임없이 교훈 하시기 때문이다.
결국 포로로 잡혀가서 거기서 멸절되지 않게 하시고
다시 그루터기처럼 일어나 자기들의 조국으로 돌아와
훼파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케 하시는 하나님은
정말로 고마운 아버지이시다.
선지자를 통해 말해보았자 그들이 완악하여
듣지 아니하는 고집 쎈 노새 같은 백성들이었지만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신실하신가!
에스겔서는 환상도 많고 비유도 많아서 어려운 책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구약의 요한계시록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이다.
그러나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주시는 교훈은 많다.
다 이해하려고 욕심을 부리면 어려워진다.
안식년 때 한국에 머무는 동안 여러 교회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목욕탕교회란 별명이 있는 서울의 우리들 교회라는 교회에
두 번 가서 주일 부흥회를 인도한 적이 있다.
그 때 담임이신 김양재 목사님에게 인상 깊은 간증을 들었다.
젊은 나이에 갑자가 남편과 사별하고 고통 속에 지낼 때
너무나 삶이 고달프고 힘들었는데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자살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날마다 에스겔서를 큐티 하면서였다고 하셨다.
에스겔서를 매일 매일 읽으며 노트에 자신의 큐티를 적고
그 말씀 붙들고 필사적으로 기도하면서
그 암울한 인생의 터널을 통과하였다고 하셨다.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큐티에 매달린 것 때문에
나중 하나님에게 쓰임 받았다고 김양재 목사님은 간증하셨다.
말씀 묵상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나에게는 에스겔서가 참 어려운 책 같은데
이 책을 붙들고 그렇게 열심히 큐티를 하며 힘을 얻었다니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2. 네 생물과 바퀴에 관한 환상
에스겔 1장을 펼쳐 읽자마자
우리는 네 생물과 바퀴의 환상 때문에 이 책이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설명을 듣고 나서 읽으면 조금은 쉬우리라 믿는다.
에스겔이 본 네 생물은 하나님의 일을 수종 드는
하나님의 천사들에 관한 이상(vision)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위한 날개와
하나님의 일을 봉사하기 위한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생물들은 사람, 사자, 황소, 독수리의 얼굴을 가졌는데
그것들은 각각 지능, 용맹, 힘, 그리고 날으는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지시가 떨어지면
서로 밀접한 연락을 취하면서(날개가 서로 둘씩 이어져 있음)
번개 같은 기동력으로 그들의 직무를 수행했다.
바퀴의 이상(vision)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는 막강한 군대가 있어서
완벽한 기동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벨론의 군사력에 주눅이 든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위대성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 바퀴가 땅에 닿아 있는 것(겔1:15)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건들에 깊이 관여하고 계신 것을 보여주며
바퀴 둘레에 눈이 가득한 것(18절)은
하나님께서 지상의 모든 사건을 일일이 다 보고 계시므로
그가 모르는 가운데 발생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생물의 머리 위에 있는 수정 같은 궁창과
생물들의 날개 소리를 통해서
에스겔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많은 물소리와 군대의 소리와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은 생물들의 날개 소리를 통하여,
그렇게 막강해 보였던 바벨론과 그 군대가
실상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멘.
3. 에스겔의 행위 예언
에스겔은 390일을 좌편으로만 누워 자야 했다.
그리고 40일은 반대로 우편으로만 누워 자야 했다.
그날들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범죄한 햇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주의 종 에스겔만이라도
조금 실감해보라고 하나님은 그런 행동예언을 명하신 것이었다.
그 14개월 동안 에스겔은 또한 정해 주신
조그마한 양의 음식만을 먹어야 했는데 그것은 패망 후에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이 먹게 될 음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사람의 똥으로 음식을 해 먹으라고 하셨지만
에스겔이 호소하여 쇠똥으로 대신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 백성들이 당할 고통을 미리 시연해 보이는 퍼폰먼스였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머리털과 수염을 깍아야 했는데
이것은 유대인 남자 성인으로서는 아무도 하지 않는 특이한 풍습이었다.
머리털은 기근과 칼에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하게 될
예루살렘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힘든 행위 예언을 에스겔 선지자는 순종함으로 감당했다.
몇해 전 나는 선교지 마다가스카르에서
외국인에게 돈을 노린 자해 공갈단 같은 자에게
느닷없이 길을 걷다가 뒤에서 자전거로 급습을 당하여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부상을 입었다.
아내가 집에 있는 파스를 있는대로 붙여주긴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팔이 아프고 부어 왔다.
아무래도 뼈가 부러졌는지
병원에 가서 X레이를 찍어봐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원래 2008년의 선교지에서 당한 교통사고로
이미 뼈가 10군데나 부러진 경험이 있어
장애인이 된 나의 상태였기에 조그만 다쳐도 나는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 괴한은 자기가 뒤에서 나를 자전거로 덮치고도
스스로 넘어진 후 죽겠다고 일어나지를 않았다.
사람들은 몰려들어 자기들 동족 편을 들고 경찰을 부른다 하며
협박을 하였지만 너희들 맘대로 해봐라 하면서
난 그냥 절룩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선교가 아무리 힘들어도 앞서간 선지자들의 수고에 비하면
아무런 불평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들의 고통을 생각해 보면
오늘의 우리의 삶은 차라리 사치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4. 혐오스러운 성전에서의 우상 숭배
에스겔 8장은 우리를 경악케 한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증한 우상 숭배가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 시간에 교회당에 무당을 불러 놓고
불상을 가져와 염불을 외우고 있는 상황과 같은 것이다.
이런 해괴한 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행했으니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기가 막히셨겠는가?
히스기야의 아들이었던 악명 높은 므낫세 왕이
예루살렘 성전 안 제단 문 어귀에
바알 우상을 세워 놓고 우상 숭배를 하였다.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우상 숭배의 죄를
그들은 성전 앞에서 서슴없이 자행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성전 내에 70 명의 장로들이 모여
비밀스러운 방을 만들어 놓고 우상을 섬겼다.
거기에서 행해진 우상숭배는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모든 이방신들을 섬기는 것이었는데
특히 곤충과 짐승 우상은 애굽에서 배운 것이었다.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본 또 다른 가증스러운 광경은
이스라엘 여인들이 성전 북문에 앉아
이방신 `담무스`를 섬긴 사실이었다.
담무스는 고대 바벨론 시대부터 숭배된 남신(男神)으로
여신 이슈타르와 함께 생산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그들의 우상숭배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25명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는 참람한 광경을 보았다.
이런 패악한 태양신 우상 숭배는
므낫세 왕 때부터 성행하여 예루살렘이 패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동방 태양에 경배하던 25인은
24 제사장 반열의 대표자와 대제사장을 포함한 숫자였을 것이다.
왕도 타락하고 백성들의 지도자들인 장로들도 타락하고
여자들과 제사장들까지 이토록 천인공노할 우상 숭배에 빠졌으니
그들이 망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 교회 안을 살펴보자.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무당을 찾아다니고
음행과 돈의 노예가 된 자들이 많다.
거짓말도 예사로 한다.
이것은 성전 안에서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모습이다.
한국 교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
5. 겔13:18의 해석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
람의 영혼을 사냥하고자 하여 부적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매고
수건을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만드는
부녀들에게 화 있을찐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을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는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 ”(겔13:18)
언뜻 이 구절을 읽으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위 본문은 당시 유다의 거짓 여선지자들의 행동인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그들이 선포한 예언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 취한
행위라는 견해로 부적은 편안한 안식을,
머리의 `수건`은 자유와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 다른 견해는 하나의 미신적인 행위라고 보는 견해인데
주술이 담긴 부적을 신의 지시를 받는 방편으로서
팔뚝에 달아 매고, 사람들의 머리에는 수건을 얹어
예언을 받을 준비를 시킨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바울 성경 연구 씨리즈, 에스겔 p76에서 참고)
예레미야처럼 에스겔 선지자도
거짓 선지자들의 비리를 낱낱이 지적하고
그들이 받을 심판을 엄중히 경고한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너무나 많은 거짓 선지들이 횡행하고 있다.
현재 아프리카에서도 각종 거짓 선지자와 이단들이
아프리카 교회를 바이러스처럼 병들게 하고 있다.
희한한 부흥사들이 여기저기 태형 텐트를 치고 사람들을 모아 부흥회를 한다.
심지어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서로 짜고
집회 중 사람을 쓰러지게 하고
죽은 척 한 다음 관에 집어 넣고 관에 안수하고 기도하여
그 사람을 살려내는 퍼포먼스를 한다.
무지한 청중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가짜 목사에게 속아 헌금을 바친다.
물도 팔고 기름도 팔면서 거기에 강사가 안수하여 기도하였기에 능
력이 있어 무슨 병이든지 낫는다고 속여 장사를 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집집마다 전도하러 다니고 있고
시온주의라는 아프리카의 대표적 이단들이 뭇사람들의 영혼을 사냥하고 있다.
이런 혼돈스러운 아프리카 땅에서
오직 예수, 오직 성경을 부르짖으며 한국 선교사들이 분전하고 한다.
아프리카 대륙을 향한 한국교회의 관심이 더 필요한 때이다.
6. 마음 속에 있는 우상들(겔14장)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던 가증한 우상들을 보았던(겔8장)
에스겔 선지자는 이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살고 있던
유대 장로들의 마음 속에 있는 우상들을 보았다.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무릇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많은대로 응답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인하여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의 마음에 먹은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니라.“(겔14:3~5)
하나님은 그들을 유다에서 바벨론으로 유배시키심으로 그들을 징계하셨다.
그러나 그 진노 중에도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의 목숨을 살려주셨다.
그러나 그 모든 엄청난 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영적인 사람들인 체 했다. 그
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속을 들여다보시고
그들의 죄악을 하나님의 종에게 알려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당시라면 노아나 다니엘이나 욥이 와서
중보 기도해도 예루살렘의 완전 멸망을 구할 수 없을 거라고 하셨다.
우리 인간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우리 생각에는 죄 때문에 망하여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의 장로들이라면 완전히 변하여
회개하고 새사람 될 것 같지만 실제는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다.
우리 마음 속에는 어떤 우상들이 남아 있는가 스스로 살펴보자.
그리고 그 죄들을 토설하고 주께로 돌이키자. 아멘.
7. 배신자 예루살렘의 가증한 죄악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에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너를 돌아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긍휼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꺼린바 되어 네가 들에 버리웠었느니라.
내가 네 곁으로 지나 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내가 너로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오히려 벌거벗은 적신이더라.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16:3~8)
에스겔 16장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비유하여
남편을 배반하고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는 음부라고 하였다.
버려진 핏덩이를 데려다가 돌보고 키워주었더니
나중 교만하여져서 하나님께 등을 돌린 유대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질투와 심판의 말씀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처음 들에 버려졌던 아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유대 민족이 어떻게 형성되었던가?
이스라엘의 초기 족장시대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큰 세력도 없이 가나안에 얹혀 살았었다.
당시에 그들은 가나안의 패권을 쥐고 있던
아모리인들과 헷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외국인이요 나그네였다.
그들의 뿌리는 아직 견고하지 못했다.
그래서 본문 성경에 네 근본은 가나안이요,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 어머니는 헷사람이라 표현하였다.
그 속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국가 형성 과정은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갓 태어난 유아의 경우처럼 매우 위태했었다.
아기가 태어났는데 탯줄도 자르지 아니하고
누군가 돌봐주는 이가 없었다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외부적인 도움이 없이
이스라엘을 키워내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들은 나중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피투성이가 되어 울부짖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로의 폭정에서 보호해 주셔서
그들은 마침내 주님의 은혜로 들의 풀같이 많게 되었다.
제법 국가를 이룰 만큼 자랐다
.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벌거벗은 사람처럼
제대로 틀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해 주셨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정복케 하시어 그들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 주시고
다윗 왕조를 세워주셔서 주변 나라들이 부러워하고
심지어 조공을 바칠 정도로 강대한 나라를 만들어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때부터 자기 힘으로 그런 위업을 이룬 줄 알고
교만해지기 시작하더니 변질되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이방 나라의 신들을 바람난 여인처럼 음란하게 섬기고
애굽을 하나님처럼 의지하기 시작했다.
소돔,고모라의 형제들이나 되는 것처럼
타락한 죄들이 이스라엘 전역에 난무했다.
몸을 파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돈이나 선물을 받고 음행을 하지만
이스라엘은 오히려 자기들의 돈을 남자들에게 주어 가면서
음행을 행하였다고 하나님은 탄식하셨다.
불쌍하고 천한 그들을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사랑과 정성으로 키워 놓았더니
그들은 바람난 여자처럼 남편을 배신하고
동네 여러 남자들과 음행을 저지르고 다니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예루살렘에 임했다고
에스겔 16장은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인간들이 무엇이관대 하나님은
배신당한 연인처럼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실까?
한번 택하시고 사랑하시면
결코 변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언약을 지키시며 돌아보신다.
타락하여 배반하면 끝까지 추적하여 매를 때려서라도
돌이키게 하시고 결국은 독생자까지 보내셔서 말씀을 들려주신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제대로 당해 보지 않아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애인에게 배신당한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쓰라리고
기가 막히셨을까 생각하면 하나님이 참 안되셨다는 생각까지 든다.
하나님은 자신의 찬송을 부르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서 자기 것으로 택하셨건만
그들은 나중에 우상에게 찬양을 돌렸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라고 그들에게 복을 주었더니
그들은 하나님께 받은 복을 우상의 제물로 갖다 바쳤다.
참 질이 나쁜 족속들이다.
그런 인간들을 완전히 멸절시키시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시키시어 하나님을 다시 섬기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그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너무나 크고 놀라워
우리는 주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8. 여호와의 칼(겔21장)
겔21장 전체는 하나님의 심판의 칼로 인해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며
시드기야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내용이다.
덧붙여 암몬에게 내려질 완전한 멸망도 예언되었다.
일단 21장에 나오는 어려운 표현들을 공부해 두면 유익할 것이다.
♣ 내 칼(겔21:5)
'칼'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심판의 도구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B.C. 612년에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B.C. 605년에는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격퇴하여
당대의 지배권을 장악한 바벨론을 말한다.
'내 칼' 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로
바벨론이 선택되었다는 의미이다.
♣ 내 아들의 규(겔21:10)
'내 아들`은 시드기야를 의미하고 '규'는 왕권을 상징한다.
같은 절에 나오는 모든 나무는 주변 국가를 상징하며
특히 가장 큰 강대국이었던 바벨론을 가리킨다.
시드기야는 시국을 잘 분별하지 못하여
바벨론을 업신여기다가 두 눈이 뽑히고 비참하게 끌려 갔다.
♣ 넓적다리를 칠지어다(겔21:12)
극한 슬픔과 탄식을 표현할 때 나타내는 행위이다(렘 31:19).
가슴을 치는 행위보다 더 극한 상황에서 쓰는 표현이다.
♣ 랍바(겔21:20)
당시 암몬의 수도였고, 현재는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을 말한다.
♣ 화살들을 흔들어(겔21:21)
이는 고대 근동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전투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점으로
화살을 화살통에 넣어 흔든 후 먼저 나오는 화살을 좋은 점괘로 선택했다.
♣ 희생제물의 간을 살핌(겔21:21)
고대 근동 지역의 사람들은 피가 고여 있는 간을
생명이 거하는 장소로 생각하여, 제물을 신에게 드린 후
그 간의 색깔을 살펴보고 전투의 향배를 짐작하였다.
♣ 칼을 그 칼집에 꽂을지어다(겔21:30)
암몬 족속에게 하는 말로,
바벨론의 침공에 대해 대적하지 말라는 뜻이다.
특별히 겔 21:3~4을 보면 여호와의 칼이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 임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 의미심장하다.
“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칼을 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지라.
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 터이므로
내 칼을 집에서 빼어 무릇 혈기 있는 자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
(겔21:3~4)
사실 이스라엘과 유다가 타락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촉발하므로
그들이 이방족속에게 삼킨바 되었지만
그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죽고 혹은 포로로 끌려갈 때
그 모든 백성들이 모두가 다 악한 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는 에스겔이나 예레미야 그리고 다니엘 같은
출중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인들도 함께 망하는 운명을 피하지는 못하였다.
국가는 공동 운명체이다.
다니엘 같은 믿음의 사람도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그래서 나만 의로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족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우리가 날마다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9. 두로에 대한 애가(겔27장)
겔26장부터 성경은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을 선포한다.
두로는 당시 지중해에서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무역 도시로서 그 성을 중심으로
매우 부요하며 강성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온전히 아름답다고 자찬했다.
두로는 마주 대하는 섬이 있었고 그 섬이 더 중심이었는데
“네 땅이 바다 가운데 있음이여(겔27:4)”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두로를 세운 자들은 그 아름다움을 긍지로 여기며
부요한 물질로 아름답게 꾸미는데 열중했다고 한다.
당시 두로의 영광은 실로 찬란했다.
그들은 스닐(헤르몬 산)의 잣나무 판자로 배를,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돗대를, 바산의 오크나무로 노를,
깃딤섬의 회향목으로 상아 갑판을,
애굽의 수놓은 베로 돛을 만들어 깃발을 삼았고,
엘리사 섬의 청색, 자색 베로 차일(갑판 위의 천막)을 만들었다.
시돈과 아르왓 사람들은 뱃사공들이었고,
두로의 박사들은 선장들이었고,
그발의 노인들은 배의 틈을 막는 자들이었고,
바사와 룻과 붓 사람들, 또 아르왓 사람들은 두로의 병사들이었고,
그들은 방패와 투구를 갖추었다.
두로는 당시에 세계적 무역 항구이며,
거기에는 다시스의 은과 철과 주석과 납,
야완과 두발과 메섹의 노예들, 놋그릇들,
도갈마의 말들과 전마(戰馬)들과 노새들,
드단의 상아와 흑단, 아람의 남보석, 자색 베,
수놓은 것, 가는 베, 산호, 홍보석, 유다와 이스라엘의 밀,
꿀, 기름, 유향, 다메섹의 포도주, 흰 양털, 단의 백철,
계피, 창포, 드단의 짐승을 탈 때 까는 담요,
아라비아와 게달의 어린양, 숫양, 염소,
수바와 라아마의 각종 고급 향재료와 보석과 황금,
간네, 에덴, 스바, 앗수르, 길맛의 청색옷, 수놓은 물품들 등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부요하고 화려한 해양국가였다.
그러나 이렇게 풍부하고 부요하고 강성했던 두로가
속절없이 멸망할 것이라고 에스겔은 선포한다.
본 장의 교훈은
우리의 현재의 부요와 영광이 아무리 두로와 시돈처럼 크다 할지라도
우리가 범죄하고 교만하여 하나님과 대적이 되면
다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애가대로 두로는 오늘날 그 영광의 흔적이 없고
6천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는,
그물 말리는 빈곤한 어촌에 불과하다고 한다.
10. 애굽을 위한 애가(겔29장)
겔29장~32장 네 장에 걸쳐 성경은 애굽의 멸망에 대해 길게 예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애굽의 패망에 대한 슬픈 애가를 지어
여러 나라 여자들이 구슬프게 그 노래를 부르게 하셨다(겔32:16).
애굽은 당시의 많은 나라들이 사자처럼 용맹하고
약소국을 보호해 줄 존재로 여겼으나 하나님의 평가는 달랐다.
그들이 사자가 아니라 큰 악어라고 하셨다(겔32:2).
이 큰 악어가 강을 휘저어 강을 더럽게 하였는데
함께 사는 다른 물고기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는 애굽의 우상숭배가 주변국에 영향을 미쳐
다른 나라들까지 더럽힌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한 때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번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왕의 두 팔을 사정없이 꺾어 버리셨다.
바벨론 왕의 팔은 들어주고 바로의 팔은 꺾어 버리셔서
결국 바벨론에게 패퇴하게 만드셨다.
하나님이 내 팔을 들어 주시는냐, 꺾어 버리시느냐는 내 운명을 결정한다.
복싱 경기를 마치고 심판이 양 선수의 손을 잡고 있다.
누구의 손이 올라가느냐가 승패를 나타낸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잡고 계신다.
내 손을 올려주시면 나는 인생의 승자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팔을 내리시면 나는 패자의 삶을 피할 수가 없다.
뭇 나라와 모든 인생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의중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애굽은 이전의 강국 앗수르가 망한 것처럼
망하게 될 것이라고 에스겔은 예언한다.
앗수르가 망하여 음부로 내려간 것처럼 그들도 구덩이로 내려 갈 것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가 음부에 내려가던 날에 내가 그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며
깊은 바다를 덮으며 모든 강을 쉬게 하며
큰 물을 그치게 하고 레바논으로 그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며
들의 모든 나무로 그로 인하여 쇠잔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그로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음부에 떨어뜨리던 때에
열국으로 그 떨어지는 소리를 인하여 진동하게 하였고
물 대임을 받은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로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그러나 그들도 그와 함께 음부에 내려 칼에 살륙을 당한 자에게 이르렀나니
그들은 옛적에 그의 팔이 된 자요 열국 중에서 그 그늘 아래 거하던 자니라.
너의 영화와 광대함이 에덴 모든 나무 중에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 나무와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서 할례 받지 못하고 칼에 살륙 당한 자 중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 모든 군대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라. “(겔31:15~18)
애굽이 망하여 그 백성들이 죽어 지옥에 떨어졌는데
미리 지옥에 와 있던 이전에 망했던 주변 나라들의 영혼들이
지옥에서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왜냐면 그 막강하던 애굽도 결국은 망하여
자기들이 있는 음부에까지 내려오니 그것을 보고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당시 음부, 즉 지하 구덩이 지옥으로 떨어진 나라들은 애굽뿐만 아니라
앗수르, 엘람, 메섹과 두발, 에돔, 시돈 등의 나라가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
모두 애굽 이전에 교만하여 망했던 나라들이다.
그들이 지옥에서 서로 마주쳐 보면서
서로를 인해 조금의 위로를 받는다는 게 불쌍하다.
나만 지옥 온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조금의 위로는 될지 모르겠지만
천국 가는 것에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지금도 예수 믿고 천국 가자고 사람들에게 전도하면
완악한 사람들은 복음을 거절하면서 혹시 지옥이 있다고 해도
나만 지옥 가는 것이 아닐 테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멸망길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애굽의 패망의 애가를 읽으면서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열국이 다 음부로 떨어졌어도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음부로 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그들보다 적다거나
그들에게 선한 모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서가 결코 아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백성`이라는 점 때문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천국에 이를 때 내가 남보다 착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 때문임을 잊으면 안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애가를 지어 애굽의 패망에 대한 슬픈 노래를 부르게 하셨는가?
그것은 애굽이 불쌍하기 때문에서가 아니었다.
슬픔의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열국의 여인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망한 애굽의 애가를 부를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노래는 무서운 교훈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인생의 허무함과 속절없음을 노래할 때
그것을 듣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교훈을 받는가?
아~! 하나님이 마음에 없으니 저들이 저런 노래를 부르는구나 하고
우리는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갖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소원을 품게 된다.
어쨌든 애굽의 슬픈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신 하나님은
그 노래를 듣는 모든 자들에게 인생의 허망함과
하나님의 영원성을 생각케 하시려는 의도가 있으셨다.
11. 나 여호와가 거기 있었느니라(겔35장)
에스겔 35장은 이스라엘의 원수인 에돔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그런데 에스겔 35장에 에돔의 멸망이 처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에스겔 25장에도 이미 에돔의 멸망이 예언되어 있다(겔 25:12-13).
에돔의 남쪽인 데만에서부터 북쪽 끝인 드단까지
황무지가 되리라고 예언한다.
에서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나라 에돔은 아말렉과 함께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최대의 원수였다.
우리는 에스겔 35장을 읽으면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에스겔 25장에서 이미 에돔의 멸망이 예언되었는데
왜 에스겔 35장에서 또 언급하는가?’ 하는 것이다.
에스겔 33장 이후의 주제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겠다는 것인데
왜 에돔의 멸망을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는 가운데 끼어 넣어
다시 언급하는 것일까?
답은 에돔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비교하는데 목적이 있다.
즉 이스라엘도 죄를 지었고 에돔도 죄를 지었지만
에돔은 영원히 황무하여 회복되지 않고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아도 회복이 된다는 것을 비교하고자 하는 것이다.
에돔은 한 때 이스라엘과 유다가 망해서
그것이 자기 차지가 되었다고 좋아했었다.
에스겔 35장 10절이다.
“네가 말하기를 이 두 민족과 이 두 땅은 다 내게로 돌아와서
내 기업이 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나 여호와가 거기 있었느니라”
이 본문에서 두 민족은 이스라엘과 유다이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망했을 때 그들은 좋아하며
자신들의 기업으로 삼으려고 획책하였다.
그러나 그때에 그곳에 하나님이 계서서 그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그들이 한 말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옛적에 큰 자인 에서가
동생인 야곱을 섬기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돔은 오히려 하나님이 틀렸다고 대들었다.
에스겔 35장 13절이다.
“너희가 나를 대적하여 입으로 자랑하며
나를 대적하여 여러가지로 말한 것을 내가 들었노라”
그래서 하나님은 에돔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며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겔 35:4,6,9).
에돔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결정타를 맞고,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해 망했다.
그리고 에돔은 하스모니안 왕조 때에
모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에 편입되었다.
결국 에돔은 정체성을 상실해 버리고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에돔과 이스라엘은 모두 죄를 지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에돔은 망했고 이스라엘은 회복되었다.
에스겔 35장이 에돔의 영원한 멸망을 예언한 장이라고 한다면
에스겔 36장은 이스라엘은 심판 받아도 회복된다는 내용이다.
에스겔 35장 10절을 다시 보자.
“네가 말하기를 이 두 민족과 이 두 땅은 다 내게로 돌아와서
내 기업이 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나 여호와가 거기 있었느니라(the LORD was there)”
히브리어로
‘나 여호와가 거기 있었느니라’는 ‘여호와 삼마’이다.
에스겔서의 마지막 절은 48장 35절인데
회복될 이스라엘 땅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다.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아멘.
하나님의 여러 이름 가운데
에스겔서에만 나오는 이름이 ‘여호와 삼마’이다.
이스라엘이 쓰러질 때 에돔 족속이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대적하며 비웃었지만 하나님이 그곳에 계셨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돌보시는 땅을
에돔이 어떻게 함부로 차지한단 말인가?
가나안 땅은 여호와 삼마의 은혜가 있다.
하나님이 그곳에 계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은 징벌해도
때가 되면 고토에서 회복시키지만 에돔은 영원히 멸망시키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때로는 악하여 징벌을 받을지라도
에돔처럼 영원히 황무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교회가 약하고 미련하고
때로는 세상보다 더 악한 죄를 저지른 경우가 있다할지라도
교회가 망하지 않고 확장되는 이유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다.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회에 계시며, 진리를 보존하시고,
성령의 능력을 부으시고,
악한 사단의 모든 공격에서 보호하셔서 영광을 받으신다.
아멘. 아멘.
12. 마른 뼈들의 환상(겔37장)
에스겔이 본 유명한 마른 뼈의 환상이 겔37장에 적혀 있다.
에스겔이 살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였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하나님을 떠나 부정과 우상숭배로 가득 찬 배역의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강대국 바벨론을 사용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고난을 주셨다.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고 솔로몬 성전은 훼손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세월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결론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회복의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주님은 어느 날 에스겔을 불러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로 데려가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셨다.
가죽도 없고 힘줄도 없이 뼈만 남아 흐트러진 마른 뼈들은
패배하여 절망 속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나타낸다.
마른 뼈를 보는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이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에스겔은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대답했다.
이때 하나님께서 뼈들에게 살아나라고 명령하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죽은 뼈들에게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을 좆아 즉시 뼈들에게 명령했다.
그때에 기적이 일어나 마른 뼈들이 살아났다.
그런데 그 안에 아직 생기가 없었다.
이때 하나님은 또 생기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들어가라고 하라 하셨다.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할 때 능력이 나타난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대로 대언하니
동서남북 우주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에너지가
죽은 시체 안으로 들어가 시체가 움직이게 되고 군대가 되었다.
우리 현대인들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익숙해서 잘 알고 있지만
이런 영적 활동같은 하나님의 기적에 대해서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며 신뢰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때
성령의 생기를 하나도 의심 없이 과감하게 그대로 사용하셨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있다. 겔37:12절을 보자.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나는 우리 모두가 절망의 무덤에서 나오길 축원한다.
병에서, 귀신의 속박에서 절망에서 나와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뛰는 기적이 있길 선포한다.
통독을 함께 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성령의 생기가 들어가
모든 일에 의욕이 있고 담대한 군사처럼 승리의 삶을 누리길 원한다.
겔37:15절부터는 회복과 부활의 메시지가 선포되는데
이스라엘이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될 것을 예언한다.
그리고 그 통일 왕국의 지도자는 다윗이 될 거라고 하신다(겔37:24).
그리고 그 통일 왕국에 하나님의 처소가
영원히 함께 할거라고 약속 하신다(겔37:29).
이는 장차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예언하는 성경이다.
다윗왕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 영원토록 왕이 되셔서
그의 백성들을 온 세상에서 모으시고 통일왕국을 이루사 천년동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다스릴 것이다. 아멘. 할렐루야!
에스겔 37장은 독자에게 새예루살렘과 메시야의 천년왕국을 증거하는
요한계시록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우리를 위해 회복과 메시야 왕국을 예비하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리자. 아멘.
12. 새 성전에 대한 환상
겔40장에서 48장까지는
새 성전에 대한 환상을 기록하고 있는데 에스겔서의 마지막 단원이다.
이 마지막 부분을 크게 세 가지 요점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40장에서 43장까지는 회복된 새로운 성전에 대한 환상이고,
44장에서 46장까지는 새로운 성전을 통해서
다시 회복된 새로운 예배에 대한 예언이고,
47장과 48장은 하나님이 회복된 백성들에게
다시 주시는 새로운 기업에 대한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세 가지 요점을 기억하자.
“새로운 성전, 새로운 예배, 새로운 기업”.
에스겔서 40장에서 48장까지의 예언이
구체적으로 어떤 시기를 겨냥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성경의 예언 해석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역사적 시기에 관한 문제이다.
그 이유는 성경의 예언자들이 앞 일을 예언할 때
마치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역사를 보기 때문이다.
즉, 어느 한 시기만 보지 않고
연이어진 산등성이를 보듯이 역사를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두 사건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연이어진 사건인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망원경으로 산을 바라볼 때
한 망원경의 렌즈 안에 가까운 거리에 있는 광경과
좀더 먼 곳에 있는 광경이 같이 잡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에스겔서 40-48장의 내용은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 땅에 다시 돌아와서 성전을 짓고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사실에 관한 예언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은
신약 시대에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새로운 언약의 시대에 관한 상징적인 교훈들을 함축시킨
예언으로도 볼 수 있다.
겔 40장 서두에 한 사람이 등장한다.
척량하는 장대를 지닌 어떤 사람은
성육신 하시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
구약 시대에도 종종 나타나셨는데 그때에 두 가지 모습으로 등장하셨다.
하나는 일시적으로 잠깐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는
천사의 모습으로 구약 시대에 활동하시기도 하셨고
또 하나의 형태는 사람의 모습이다.
예수님이 사람처럼 등장하셨다.
특정한 어떤 인간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어떤 사역을 성취하시는 성자 하나님,
그것이 구약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다. 겔40장 4절을 보자.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
하나님이 그에게 보이시는 모든 계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마음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인격적인 응답을 강조할 때 이 세 가지 표현이 항상 등장한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생각하라.”
요한계시록 1장 3절을 보면
계시록의 첫번째 메시지를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제 40장 5절 이하의 말씀을 살펴보자.
여기에는 앞으로 새롭게 회복될 성전의 담 그리고 문, 성전의 층계,
성전의 현관 등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계속 나온다.
그러나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
것은 6절과 10절에 나오는 동쪽을 향한 문이다.
성전이 무너질 때 동쪽 문을 통해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던가?
하나님의 성령께서 동쪽 문으로 서서히 떠나가시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겔10장).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동쪽 문을 떠나서 동쪽에 있는 감람산으로 올라가서
서서히 예루살렘 시가지를 넘어 성전과 그 백성을 떠나가시는 모습을 보았었다.
이제 새로운 성전이 회복될 것을 예언하면서
이 성전의 중요한 것으로 동문이 또 한번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겔42장 20절을 보자.
“그가 이와 같이 그 사방을 척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장과 광이 오백 척씩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이렇게 주님의 계획대로 성전이 회복되면서 마지막으로 담이 세워진다.
그 담을 통해서 담 안의 거룩한 것과 담 밖의 속된 것이 구별된다.
주 예수님과 그의 말씀은
우리를 세속에서 구별시켜 주는 담과 같은 역할을 한다.
오늘도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품고 사는 우리가 되어야겠다. 아멘.
13. 주의 영광이 성전 동편으로 돌아오다(겔43장)
겔 43장은
주님의 영광이 성전으로 돌아오는 감격스런 장면이 나온다.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겔43:1~2)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아마도 펑펑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감격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갔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성전도 무너지고 백성들도 버림받은 상태로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성전은 회복될 것이고
주의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다.
그들은 우상을 버리고 죄를 떠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온다.
여기서 흥미있는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날 때는 서서히 떠났었다(겔10장).
한 단계 한 단계씩 떠났다.
교회가 망할 때도 조금씩 조금씩 망한다.
한꺼번에 망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부패할 때도 조금씩 조금씩 자신도 모르게 부패한다.
우리 개인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한꺼번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
한 가지 한 가지, 주님을 향한 열심을 서서히 잃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른 것에 관심을 서서히 갖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나와 함께했던 하나님의 영광도 내게서 서서히 떠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와 함께
다시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올 때는 한 순간에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흥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될 때에는 서서히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터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를 향해서 달려오며
회개하는 역사가 폭발적으로 한 순간에 일어난다.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런 놀라운 부흥이 일어날 때가 있었다.
백성들이 회개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왔다.
이제 겔43장 3절을 보자.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異象)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숫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성전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돌아오신 주님은 성전을 심판하시던 바로 그분이라는 것이다.
그 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자
기 백성들이 죄악 속에 빠졌을 때에 심판하시던 주님은
그 백성들이 회개했을 때 다시 회복시키시는 동일하신
주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장면에서 확인한다.
계속해서 4절을 보자.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이제 완전한 성전이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면 성전이 아니다.
건물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건물이 성전 모양을 갖추었기 때문에 성전인 것이 아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시기 때문에 성전인 것이다.
에스겔서는 `여호와삼마`로 마치고 있다. `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라는 복된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은
주의 긍휼과 자비에 힘입어 용서함을 받고 새예루살렘에 다시 임하여
거기 영원히 자신의 백성들과 여호와 삼마로 함께 하신다.
이것이 에스겔의 결론이요, 기독교 복음의 총 결론이다.
그래서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도
새예루살렘의 영광을 보여주며 마치는 것이다.
여호와 삼마!
주께서 거기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계신다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복된 진리이다. 아멘.
- 꿀송이 보약큐티 1년 1독 성경통독학교
노록수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