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가치>-이 설교는 구원이 무엇때문에 가치있는 가에 대해 변증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구원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영원성에 있다. 구원이 영원하지 않다면 무가치하다. 영원성의 범주는 두 가지다. 하나는 행복의 영원성이다. 다른 하나는 불행의 영원성이다. 전자는 구원받을 때의 영원성이고, 후자는 구원받지 못할 때의 영원성이다. 영원한 구원이 주는 행복의 성격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연합되는 행복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므로 죄의 세력을 이기고 죄의 권세를 꺾는 행복이다. 성령과의 교제함의 행복함이다. 즉 하나님과의 일치됨의 행복함이다.
인간은 육신에 가치를 두는 자와 영혼에 가치를 두는 자가 있다. 육신에 가치를 두는 자는 영원히 지옥에 간다. 영혼에 가치를 두는 자는 구원받고 영원히 천국에 간다. 영혼보다는 육신에 가치를 두는 자에게 사단은 계속해서 변명하게 한다. 사단은 교묘하게 그의 마음에(머리를 지나 마음까지-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께서는 신앙의 좌소를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라고 했다. 목사님은 신앙은 머리로 이해한 지성적인 상태를 통과해 마음으로 까지 도달해야 거기에 정착할 수 있다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신도 머리를 지나 마음에 그 좌소가 있는 것이다), 영혼보다 육신에 가치를 둘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구구절절이 설명해 준다. "인간은 타락했다. 따라서 영혼도 타락했다. 타락한 영혼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이 더러운 몸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나는 이 세상에서 타락한 상태로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더 낫다. 이것은 너도 어쩔 수 없다. 타락은 네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타락은 하나님 책임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껏 타락해도 된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속임수다. 하나님은 타락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최상의 환경을 만드시고, 끊이 없이 선지자를 보내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기 아들을 죽음의 자리로 보내셔서 타락한 영혼을 구원하게 하셨다(하나님께서는 그 만큼 즉 자기 의 독생자를 희생해서라도 사람을 구원하려고 했다). 따라서 구원의 기회를 충분히 주시고 그 가치에 대해서 충분히 알게 해주셨다. 그럼에도 사단에게 속아 자신의 타락한 영혼을 핑계로 구원을 거부한 사람은 그 모든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한다.
한편,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성도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영혼의 구원을 등한시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모습으로 죄인들을 구원하라고 독려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어떤 때에 갑자기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영혼을 구원하실지 모르기 때문이다(사실, 에드워즈 목사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과 시기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개입하셔서 거듭나게 해 주셨다. 그래서 에드워즈 목사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성'은 매우 중요한 신앙의 뼈대이자 신학의 주제였다). 따라서 먼저 구원받은 자는 영혼이 영원히 구원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을 발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성도들에게 격려한다. 구원의 가치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 이 말씀은 자존심과 무지 그리고 불신앙에 대해 주님께서 수제자였던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므로 축복하셨던 제자입니다-교회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 자신이 머리돌이 되십니다-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이에 대해 중요한 변증이 되도록 만드심으로 그를 복되게 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심으로 귀하게 만드셨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실수는 바로 이것입니다. 21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 이전의 어떤 말씀보다 더 알기 쉽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여야 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바로 이 말씀이 베드로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그는 세상의 화려(華麗)와 영광으로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일반적인 착오였습니다. 그래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의 고난과 죽음의 이야기는 전혀 기대 밖이었습니다. 이는 지상 왕국에서 그리스도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인 베드로의 야망과 기대에 아주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가 교회를 세울 반석이 되고 그 왕국의 열쇠를 그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지상의 번영에 대한 잘못된 소원과 그리스도 왕국에 대한 본질적 무지 그리고 불신앙으로 흥분되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나무라며 말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23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 아주 신랄한 책망을 받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너의 마음이 하나님의 것인 하늘과 영적인 행복과 명예 그리고 영광에 초점을 모으지 아니하고, 사람의 것인 지상의 화려함과 명예 그리고 칭찬에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동일합니다. 주님께서 이를 계기로 하여 제자들에게 아주 알기 쉽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 나라의 백성들이면 너희는 이 땅의 좋은 것들을 기대하지 말고 오직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입니다. 24절과 25절의 말씀처럼 주님을 위하여 그들의 삶을 준비시켜야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라고 말합니다.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이 이야기가 그들을 힘들게 하고 실망시키지 않도록 주님께서 본문에서 영혼의 구원은 그들이 기대하는 세상의 화려함과 영광들 모두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영혼과 비교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영혼을 잃으면 어떤 것도 허사가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비교되는 것은 온 천하와 사람의 목숨(영혼)입니다. 이러한 비교는 모든 부, 은과 금, 명예와 영광, 화려함과 즐거움과의 비교입니다. 둘째로 비교되어야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익 (profit)과 가치 (value) 그리고 값어치 (worth)입니다. 셋째로 두 의문문에 매우 강하게 내포된 비교의 결정 (determination)과 그 결과입니다.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와 ‘어찌 바꾸겠습니까?’입니다. 온 천하가 목숨과 비교하여 더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목숨의 입장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일반견해와 다르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하는 것보다 이 세상의 것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음으로 나타납니다. 교 리 영혼의 구원은 온 천하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이 교리를 우리는 다음의 과정에서 특별히 얻으려고 노력해야할 것입니다. Ⅰ. 세상의 좋은 것들은 모두 다 그 끝이 있습니다. 첫째로,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은 언젠가 끝이 오게 됩니다. 지구 그 자체와 그것의 생산품들은 모두 불타버릴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뜨거운 열에 녹아내릴 것입니다. 하늘도 곧 지나갈 것입니다(벧후 3:10, 마 24:35, 계 20:11). 하늘의 군대들이 모두 해체되고 하늘들은 마치 그들의 군대가 포도나무의 낙엽과 무화과나무의 떨어지는 무화과처럼 떨어질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화염에 삼킨바 될 것입니다. 지구가 자랑으로 삼았던 이 세상의 도시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꼭 껴안고 이 세상에서 신으로 섬겼던 금과 은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지상의 왕국들과 위대한 왕조들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군주들과 정복자들의 궁궐들은 어디에서 자랑할 것입니까? 이 세상의 거만한 인간들은 무엇을 영화롭게 하며 자신을 어떤 사고에서 높일 수 있겠습니까? 인간들의 마음을 그러한 것들에 두고 그것들로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던 인간 자신들이 불타버릴 그 동일한 불에서 그것들은 함께 모두 불태워질 것입니다. Ⅱ. 세계의 모든 것은 죽음에 처한 특별한 각 개인과 관련하여 그 끝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세계는 그와 더불어 끝이 납니다. 그와 관련된 모든 세상의 즐거움과 덕 그리고 명예도 끝나게 됩니다. 금과 은의 보물창고가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가 그것들을 꼭 품고 갈 수 없다면 세상을 떠날 때 그는 그것들을 영원히 두고 가야 합니다. 살았을 때 매우 화려한 가운데 살았던 것이 그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명령하면 가졌던 모든 것들이 호화롭고 빛나는 장식 가운데 정렬되고, 마치 발아래의 벌레만큼 그가 그것들을 존중하여 사용했던 것처럼, 다만 동료들에게 부와 명예를 나타내주는 것 외에 어떤 위로가 되겠습니까? 죽어가고 있을 때 사람들이 와서 절하고 그에게 무릎을 꿇고 굽실대는 것을 보는 것이 무슨 기쁨이 되겠습니까? 감각적 쾌락과 매우 풍요로운 삶과 기쁨 가운데 살아갔던 것을 생각하는 것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죽어가고 있는데 지구의 많은 부분들을 지배하고 온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죽어가고 있는데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Magnus)이 세계를 정복했다는 것이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주고자 한 사람에게 정복한 세계를 주고 떠나야 합니다. 그가 전 세계를 정복하였다 할지라도 죽음은 마침내 그를 정복할 것입니다. 세계가 품을 수 없었던 그는 마침내 매우 좁은 무덤에 매장되어야 합니다. 전에는 세계가 그에게 좁았는데 이제는 조그만 매장지로도 그에게 충분합니다. 날마다 사치스럽게 살고 화려한 옷을 입고 살았던 부자는 마침내 그의 생애에서 마치 집의 강아지처럼 여겼던 자에게서 한 방울의 물을 기대하고 주기를 간청합니다. 누가복음 1:19절 이하를 보십시오. 부를 조금이라도 나누어줄 마음이 없던 그 엄청난 부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고를 허물고 더 크게 짓고 그 안에 많은 것들을 쌓아둔 그는 영혼에게 말합니다. “수 년 동안 먹을 것을 쌓아 두었으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 불쌍한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부르면 네가 쌓아둔 이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입니다. Ⅲ. 세상의 좋은 것들은 매우 불확실하며 죽기 전에 사라지는 것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 죽지 않고 산다고 확신하면 세상의 것들을 즐겨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불확실하고 불안한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그러한 것들을 빼앗아가는 사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가장 확고하게 붙잡았다고 생각하자마자 그것들은 우리의 손에서 벗어납니다. 우리가 위험이 거의 없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이 빼앗겨지면 그는 살기보다 오히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임시적인 것을 즐기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날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세상에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기에도 만족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욥입니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더 많은 물질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욥기 1:3-4절을 보십시오.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니라.” 보십시오. 그에게 그 많은 것들을 잃어버릴 만한 위험은 조금도 있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어떻게 되는지 13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을 잘 보십시오.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욥 1:13-19). 하지만 이것이 모든 것이 아닙니다. 2장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의 가산(家産)을 불이나 물로 또는 바람이나 땅으로 얼마나 쉽게 잃게 되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요소에 의해 쉽게 파괴된다는 것이 어찌나 허무한지요! 세상의 명예와 평판을 얼마나 쉽게 잃어버리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장 고귀한 세상 영화로부터 가장 부끄러운 상태로 바뀌는지! 친구들과 친지들은 얼마나 불확실한지! 우리가 그들의 애인되는 것이 그들을 우리로부터 빼앗는 것으로부터 지키지는 못합니다. 죽을 때가 되면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이별을 막지 못합니다. 얼마나 많은 병들이 삶의 위로와 즐거움을 즐기려는 힘을 빼앗아갑니까? 그것들을 앗아가는 미리 알 수 없는 재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만일 사람이 어른이 되고 늙어도 이러한 어떠한 것도 생기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이 세상의 즐거움을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이 생(生)의 조그만 부분이 있습니다. 확실히 곧 나이가 들어 늙을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그 안에 즐거움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태양과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구름들이 비가 내린 후에 다시 되돌아올 때 말입니다. 집 문지기가 두려워하고 강한 자들이 항복하며 너무 작아서 분쇄기 멈출 때 말입니다. 창문을 통해 내려다바라보는 것들은 어두워지고 거리의 문들은 닫히어 질 때 말입니다. 곡식을 가는 소리가 낮아지며 우리가 새소리에 일어나고 음악을 하는 우리의 모든 딸들이 낮은 음을 가져올 때 말입니다. 우리가 높은 것은 두려워하고 공포가 길거리에 있으며 아몬드 나무가 무성하여 메뚜기가 짐이 될 때 말입니다. 마침내 사람이 우리의 먼 고향(long home)으로 돌아가고 애곡하는 자들이 거리에 흩어져서 소원이 끝나게 될 때 말입니다.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역주, 잠언 12:6-7). 바로 그때 전도자가 외쳤던 것처럼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우리도 울부짖을 것입니다(잠언 12장). Ⅳ. 하지만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또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세상 끝 날에 모두 파괴될 것입니다. 그것들은 개개인에게는 그가 죽을 때에 끝이 납니다. 어느 때는 죽기 전에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한 시기까지는 그 견고함은 별 볼일이 없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게 되면 그 즐거움은 죽기 전에 끝날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장수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그 시기가 오기 전에 끝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영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늘과 땅이 파멸될 때, 지상의 모든 것들이 불살라질 때, 바다가 말라질 때(계 21:1,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이 그 빛을 잃을 때도 영혼은 계속 살아있을 것입니다. 몸이 죽어 흙으로 돌아갈 때도 영혼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사고와 병 그리고 노환으로 인하여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끝날 때도 영혼은 계속 될 것입니다. 세상은 잠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은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큰 불에 더 이상 오래 견디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은 끝없이 영원히 존속할 것입니다. 세상의 유익과 즐거움은 몸보다 더 이상 오래 존속할 수 없습니다. 여러 차례 하지만 그렇게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계속 존속할 것입니다. 조금 가치가 있지만 항상 존속하여 영원히 존속하는 것은 잠시 존속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백 만년을 존속하는 것은 1분만 존속하는 것보다 훨씬 귀중한 것입니다. 천 년이 2분보다 긴 것보다 영원은 사람의 생애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긴 것입니다. Ⅴ. 세상의 모든 것이 영원히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거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풍부한 지혜로 인하여 누구보다 더 세상의 가치를 알았던 솔로몬은 그들보다 더 많은 경험과 좋은 기회들을 가졌습니다. 바로 그가 탄식하여 말합니다.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역자주: 전도서 Ⅰ: 14)라고 말입니다. 그는 이와 같은 생각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전도서를 쓰자마자 그의 첫 번째 말은 “헛되고 헛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들의 헛됨을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다”란 말이 반복됩니다. 세 번째 그는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말하면서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고 탄식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행하는 모든 일을 해보았는데 결국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가 지혜, 즉 세상의 지혜를 가졌고 세상의 환희와 즐거움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집과 포도원 그리고 정원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과수원과 나무 그리고 이로 인한 모든 과일들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이전 예루살렘 거민 중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종들과 여종들, 소유와 가축들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금과 은, 남자 가수와 여자 가수들, 음악의 모든 종류들과 그의 눈이 바라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어느 것으로부터 마음의 기쁨을 회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이 헛되어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해아래 어느 수고도 유익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솔로몬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멍청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행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하나님보다 더 잘 아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모든 것에는 실망이 있습니다. 헛됩니다.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즐거움은 없습니다. 헛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대부분 위로보다 짐이 됩니다. 영원에 비교해 보면 다만 아주 작은 즐거움일 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결코 이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우리의 분깃으로 지정해 놓지 않은 것이 그의 선하심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살펴봅시다. 첫째로 부는 그 자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사람은 원하는 만큼 은과 금을 즐겨야한다면 곧장 그는 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富)가 어찌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세상의 왕들이나 영웅들도 가난한 자들과 같이 불행합니다. 그들도 가난한 자가 좋은 것들이 없음으로 고통 받는 것과 동일하게 그것들로 인해 문제와 고통에 처해있습니다. 부라는 것은 사람들이 하늘로 가는 도중에 이 세상의 황량함을 통과하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부가 많을수록 짐은 더 무겁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을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물질(poor provision)입니다. 그것으로부터 사람은 이 고립된 황량한 세상을 지나는 여행에서 힘을 얻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도 이 여행을 함에 있어서 져야할 인생의 모든 짐을 기꺼이 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세상의 부는 그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많이 가질수록 더욱 가지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은 갈증을 해소해주는 대신에 더 많이 마실수록 더 목말라하는 중독성 음료의 마심(poor sort of drink)과 같습니다. 둘째로 세상의 화려함과 명예입니다. 명예는 첫째로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별로 쓸모없는 즐거움으로 어깨를 으쓱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지나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매우 바보스럽고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의 쓴 맛을 곧 알게 됩니다.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모든 행복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점에서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견고하거나 본질적인 참 행복은 없습니다. 만일 공공의 선(善)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현명한 사람은 그것을 지는 것으로부터 벗어남을 즐거워 할 것입니다. 그는 위대하고 명예로운 자리들로 인한 엉클어짐과 어지러움보다 좀 더 세련된 생이나 몇몇 선택된 친구들과의 교제를 더욱 기뻐할 것입니다. 셋째로 세상의 쾌락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아무런 가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즐기기 전에 감각적 쾌락으로부터의 매우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 대부분은 즐김과 동시에 사라집니다. 큰 기대를 가졌던 사람은 이에 실망하게 됩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안으려고 할 때 사라지는 그림자나 환영(幻影)과 같습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완전히 즐기려고 하면 그 본질은 매우 짧은 시간동안만 유지됩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그는 그것을 미워하고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넷째로 친구들입니다. 물론 우정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우선합니다. 그러나 더욱 깊이 살펴보면 이것은 우리의 마음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일시적인 세상의 친구들은 악과 고통에서 우리를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가까이 하고 매달리지 마십시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복지와 안녕을 빌고 소원할 뿐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불행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너무 많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들은 문제와 고난에 대항하여 우리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친절하고 진실한 친구가 없습니다. 부하고 능력 있는 위대한 친구가 없습니다. 십자가와 문제 그리고 고난에서 보호할 수 있는 그러한 친구가 결코 없습니다(그래서 너무 많이 친구를 사귀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음으로 그들의 최상은 불확실합니다. 구별되어 깨끗하고 타락하지 않을 것 같은 친구도 불확실합니다. 가장 최상의 경우에도 인간 본성에는 가장 좋은 상태에서도 의지하거나 신뢰하는 확정성이나 확실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나 세상의 좋은 것들을 영원히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은 작은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가 마음에 안전한 만족을 주지 못하고 위로보다 고뇌를 가져오고 그것들이 풍부할 때조차도 기쁨보다 짐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화려함도 그러합니다. 쾌락은 즐기는 한 때의 그림자이고 허무일 뿐입니다. 세상의 쾌락도 그것을 좇는 사람들을 기만하고 실망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오래 지속될 수 없고 일반적으로 그것 후에 쓴 맛과 미움이 오기 때문입니다. 친구들도 그러합니다. 우정은 우리에게 좀체 유익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불행에서 우리를 지킬 수가 없고 더욱이 그 자신도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이 세상의 부와 영예 그리고 쾌락과 기쁨은 결국 가장 큰 허무이고 영의 고뇌가 될 뿐입니다. Ⅵ. 하지만 영혼의 삶과 구원은 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다고 할지라도 영혼의 삶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가치는 다음에서 그 진가를 보여줄 것입니다. 첫째, 영혼의 구원은 엄청난 곤궁에서 해방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구원에서 그 큰 행복은 참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A) 영혼의 구원은 엄청난 곤궁에서의 해방입니다. 영혼이 구원받은 그 비참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1. 그것 안에 영원히 좋은 모든 것들이 탈취당하기 때문입니다. (1) 이 세상에서 즐기곤 했던 모든 즐거움이 다 탈취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대해 즐거움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보는 것과 듣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옥에서는 그들의 정욕을 만족시켜줄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품에 꼭 품고 마치 신처럼 모셨던 세상의 부와 명예 그리고 쾌락과도 작별할 것입니다. 하늘과 하나님을 위해 아무런 관련이 없고 단지 그들이 좋아하는 정욕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수여할 수 있는 모든 행복에서 말입니다. 지금 다시는 더불어 즐길 수 없는 그것들과 작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은과 금 그리고 귀중한 보석과 진주들을 갖고 즐김으로써 자신을 기쁘게 하곤 했었다면 그들은 영원히 더 이상 그것들을 즐기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화려한 의상과 빛나고 번쩍이는 겉옷을 입는데 익숙해 있었다면 그들은 벌거벗은 몸에 대해 자기 자신을 영원히 감쌀 신랄하고 괴롭히는 불꽃과 같은 그 어떤 옷으로도 더 이상 입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지상 위에 멋지고 안전한 궁궐과 같은 화려한 집에 살곤 했었다면 그들은 거주지로 그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닥도 없는 움막과 황량하고 음울한 어두움의 토굴감옥과 같습니다. 밤에 쉽게 침대에 눕는 대신에 그들은 침대를 대신한 유황불 같은 바다와 그들이 도취하곤 했던 포도주와 소주대신에 타는 불꽃을 가질 것입니다. 그들에게 영원히 마셔야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불타는 격노의 컵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즐기곤 했던 사악한 교제대신에 지옥에서 그들의 교제를 저주하는 사이다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저주와 맹세, 음담패설과 타락한 대화대신에 그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가공할 만한 분노아래에서 심기 불편하고 으르렁거릴 것입니다. (2) 그들은 하나님과의 영적 즐거움과 연합(communion)을 탈취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동에서 그리고 서에서 나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은 버려져서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감이 있을 것입니다(마 8:11-12). 그들은 계속하여 문을 두드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응답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역자주)란 말씀만 들을 것입니다. 그들은 손과 발이 묶이어 어두운 데로 던져지고 결코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그들이 보는 것과 만일 그들이 바보가 아니었다면 동일한 것을 누렸을 행복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짜증과 고통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그들이 간과하고 지상에서 그렇게 경멸했던 하나님의 호의만큼 귀중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원하면 얻을 수 있었던 때에 그들이 그렇게 조롱하고 비웃었던 행복과 하늘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보게 될 것입니다. 비웃음과 조롱을 당하였던 사람들이 얼마나 현명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2. 구원받은 영혼이 구원받아야할 것으로부터 받는 비참은 무시무시합니다. 왜냐하면 인내해야하는 긍정적 고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한 불꽃이 몸의 어느 부분에 있으면 그것은 얼마나 그를 고통스럽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불의 바다로 모든 육체가 들어간다면 그 고통은 오죽 하겠습니까? 몸이 치통이나 두통으로 인해 아파할 때도 그런데 만일 몸 전 부분이 격렬한 고통 가운데 있다면 또한 몸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그러하다면 그 고통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3.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한다는 사실로부터 오는 고통은 아주 끔찍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하고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과 몸이 지옥 불에서 수백 만 년 불살라진 후에도 그것은 고통의 끝에 조금도 가까이 가 있지 못할 것입니다. 영혼은 이것을 알고 확신하며 이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중단됨이 없이 영원히 통렬하게 타는 듯한 불로부터 느끼는 고통을 참아야하는 것을 확신하다면 이에 대한 생각은 두려운 공포와 놀람으로 마음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 어떤 공포로도 마음을 가득 채우며 지옥-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영원히 끝없이 그러한 고통은 지속될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영혼이 구원받아야하는 고통들을 여러분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하고 완전하게 이해하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아주 무시무시하고 우리의 본성을 뛰어넘고 우리를 직접 죽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영혼의 가치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구출을 받아야하는 악의 크기에 따라 해방은 크고 작고를 표시합니다. 지옥으로부터의 영혼의 구원은 이 세상 모든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B) 영혼의 구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닙니다. 구원받은 영혼이 즐기는 행복은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구원받은 영혼은 모든 악으로부터 해방을 받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모든 좋은 것들의 선용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이러한 행복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1. 모든 악으로부터 해방을 받습니다. 신자의 행복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늘의 문에 그 어떤 악한 접근이 있을 수 없습니다. (1) 그들은 죄와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를 받습니다. 구원받은 영혼은 육체와 함께 모든 죄에서 떠납니다. 영혼이 그 몸을 떠날 때 죄의 몸을 떠나는 것입니다. 육체가 불살라질 때 모든 죄는 영원히 불살라질 것입니다. 영혼이 다시 육체와 결합한다할지라도 죄는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입니다. 육체는 타락 가운데 뿌려졌지만 이제 부패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불명예 가운데 뿌려졌지만 이제 영광 중에 일어날 것입니다. 약함 가운데 뿌려졌지만 이제 강함 중에 일어날 것입니다. 자연적 몸으로 뿌려졌지만 이제 영적 몸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이 부패되는 것은 이제 부패되지 않는 것으로 옷 입고 죽을 몸이 이제 영원히 죽지 않을 몸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자연적 죽음과 영적인 죽음은 모두 승리에 삼켜질 것입니다. 죄는 항상 이생에서 경건한 자에게 큰 고통과 문제입니다. 그들은 사망의 몸과 생명의 영 사이에서 자주 싸웁니다. 육의 법과 마음의 법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죽음 후에는 더 이상 그러한 싸움이 없습니다. 끈덕진 정욕의 공격이 더 이상 없습니다. 더 이상 사탄의 유혹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올무를 놓고 간계를 부리기 위해 결코 하늘 가까이에 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보이는 허무에 의해 유혹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영광과 탁월하고 무한한 한 세계에서 살 것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를 찬양하도록 그들에게 동기부여하고 격려할 것입니다. 그 영광과 비교하여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한 덧없음인지 그들로 보게 할 것입니다. 이생은 신자들에게는 이러한 반역자들에 대항한 전투입니다. 그들은 때때로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고민하고 괴로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모든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를 받을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삶은 전투가 아니라 영원한 승리의 삶일 것입니다. 구원받은 영혼은 흠이 없을 것입니다.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다”(엡 5:27)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시야 앞에서 거룩하고 비난받을 것이 없고 꾸지람을 받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빛 자체처럼 깨끗할 것입니다. (2) 영혼의 구원은 고통의 모든 수고로부터 자유로습니다. 이 세상에선 선한 사람이라도 종종 많은 고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치 피의 바다와 같은 여행이 될지 모릅니다. 이 세상은 매우 문제가 많은 세상이며 십자가의 고난과 실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걱정과 염려로 가득하며 두려움과 근심으로 가득합니다. 선한 사람은 이 세상에 의해 미움을 받고 그들에 의해 조롱당하고 낙심되고 핍박을 받습니다(히 11:35-38).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더 나은 부활을 얻을지 모르는 해방을 수용하지 않음으로 고통당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독한 조롱과 징계를 받습니다. 심지어는 묶기기도 하며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들은 돌에 맞기도 하고 칼에 찔려 갈기갈기 찢겨져 버려지기도 합니다. 그들은 양가죽과 염소 가죽을 입고 어슬렁어슬렁 다닙니다. 가난하고 고통을 받고 고문당하면서 말입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있어서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늘에 이르게 되면 더 이상 그런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더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행과 악, 사고와 병, 수치스러움과 불명예, 두려움과 염려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수고에서 이제 쉼을 얻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피로 더럽히진 옷들을 씻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씻겨질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도 없습니다. 슬픔과 울음도 더 이상 없습니다. 2. 그들은 좋은 모든 것의 즐거움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하늘에 가서 영혼이 모두 온전히 만족할 것입니다. 오성과 이해력(understanding)은 하늘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두움과 희미함에서 나와서 하늘의 빛으로 가득한 장소로 옮겨질 것입니다. 여기 이 땅에서 가지는 그러한 오성이 이제 거의 필요 없음으로 인해 현명한 사람들이 갖게 될 큰 즐거움입니다. 성인들이 하늘에서 무엇을 즐기고 어디에서 그들의 지식과 오성이 그렇게 확장될 것입니까? 의지가 거기서 완전히 만족할 것입니다. 소원하는 바는 무엇이나 그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감정도 만족할 것입니다. 사랑도 커지고 만족할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장소에서 하늘들의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와 영광의 궁궐에서 살 것입니다. 지상에 있는 왕자의 궁궐이 그렇게 영광스럽다면 여호와의 궁궐은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사람이 만든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이 그렇게 빛나고 시바 여왕으로 하여금 황홀하게 만든 만큼 영광스러운 것이라면 절대자가 스스로 자기 손으로 만드신 성전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러한 영광스러운 장소에서 사는 것은 하늘의 행복 중에 가장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성인들과의 교제가 있습니다. 옛 거룩한 성인들, 모세와 욥 그리고 다윗과 엘리야 등, 선지자들과 사도들, 그 외에 예루살렘에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비전 그것이 모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행복의 암시일 뿐입니다. 무한한 영광과 권능의 하나님을 얼굴을 대하는 것처럼 뵙는 것과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그를 아는 것과 그와의 가장 친밀한 앎과 그의 팔에 안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에게 세상에서는 허용될 수 없었던 그러한 특권 말입니다. 하나님의 비전과 결실은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형시키는 것처럼 친밀하고 분명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3. 이러한 행복은 영원합니다. 하늘의 행복이 그 자체 얼마나 위대합니까? 만일 그것이 영원하지 못하다면 그것으로 손상을 입을 것입니다. 하늘의 성인들 그들이 수천 년 동안만 하늘을 즐겨야하고 그 후 그것이 끝난다고 하면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큰 실망감을 줄 것입니다. 그들이 그러한 큰 행복을 잃어야한다고 생각하면 큰 슬픔일 것입니다. 그것은 빛에 하나의 구름일 것입니다. 달콤함에 하나의 쓴 맛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영원히 즐길 것이고 이것은 즐거움을 배가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5절에서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영혼은 그렇게 위대합니다. 그들은 죄의 모든 방식과 시험 그리고 문제와 고통에서 자유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직접 사시는 궁궐에서 살 것입니다. 그들은 소원하는 모든 것과 함께 교제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와 심지어 여호와 자신 그리고 영원하신 삼위이신 한분을 볼 것입니다. 그와 친밀하게 교제할 것입니다. 그들의 행복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동안 지속될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이 그러한 행복에 처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입니까? Ⅶ. 영혼의 구원은 이 세상 모든 것보다 더 귀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을 잃게 되면 세상은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 타락한 영혼이 빠지는 그러한 비참에는 세상의 어떤 즐거움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본문이 잘 말하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것은 ‘세상에서 모든 것을 얻고도 마지막에 영혼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하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쾌락과 명예에 젖어 산다고 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금과 은으로 장식되고 머리에 왕관을 쓰고 손에 홀을 잡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모든 부와 명예가 혀끝을 서늘하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당하는 고통의 불꽃만을 더욱 사르게 하는 것입니다. 지옥에서 금과 은을 가질 수 있다한들 그것이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것을 바라본들 그것은 동일한 것을 지상의 더 나은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더 큰 가책과 고문으로 그를 가득 채울 뿐입니다. 살았을 때의 번영이 얼마나 컸으며 그런데 지금은 어떤 비참에 빠졌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더욱 고통만을 증가할 뿐입니다. 이에 대한 모든 생각들은 그에게 떨어지는 타는 듯한 지옥불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토록 신음의 소리를 발할 것입니다. 둘째. 영혼이 사실상 그 사람이므로 영혼을 잃은 자에게 세상은 아무런 유익이 될 수 없습니다. 사실상 영혼이 그 사람이므로 그것이 없는 몸은 마치 하나의 막대기나 돌에 불과합니다. 생각하고 즐거워하고 좋은 것을 즐기는 것은 영혼입니다. 고로 영혼이 없는 몸은 아무것도 즐길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혼이 없는 외적 감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몸은 영혼이 없이 세상의 즐거움과 좋은 것들을 즐길 수 없습니다. 감각은 영혼 없이 만족할 수 없습니다. 눈은 기쁜 광경을 볼 수 없고 귀는 음악을 들을 수 없습니다. 혀는 아무런 맛을 느낄 수 없으며 감각은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가치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이 죽으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즐길 사람이 없으면 그 좋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성경의 “영혼”은 종종 “자신” (self)으로 번역됩니다]. Ⅷ. 하나님께서 스스로 영혼에 높은 가치를 두셨기 때문에 영혼의 구원이 세상 모든 것보다 더 귀중합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영혼을 세상 모든 것보다 더 높은 가치를 두시다면 영혼의 구원은 세상 모든 것보다 더 귀중합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모든 지혜 위에 뛰어나신 분이고 그래서 분명 영혼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를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세상 모든 것보다 더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첫째. 그분이 세상 모든 것을 영혼을 위해 만드셨기 때문에 영혼이 세상 모든 것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이 영혼을 위해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항상 최고요 최선입니다. 목적은 수단보다 더 탁월합니다(finis est pretantior mediis). 세상 모든 것은 영혼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지구, 바다, 하늘, 가축, 숲, 모든 것들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고 그의 사용에 적합하다고 추론하는 것보다 더 단순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성 외에 성경은 또한 우리에게 간단히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삶의 터전으로써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나서 거주민으로서 인간을 만드시고 그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위임하셨습니다. 고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심으로 세상보다 인간에 더 높은 가치를 두셨습니다. 세상은 하나의 천막이거나 집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거주민들은 집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거주민을 잃으면 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둘째. 그분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종, 즉 선지자들을 많이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에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돌보심의 예로써 이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6:15 “그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의 사신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예레미야 7:25 “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그리고 25장 4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끊임없이 보내셨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사람의 구원을 위해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북돋우는 하나님의 돌봄과 관심의 위대하고 놀라운 예입니다. 또 사람들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것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직접 교제를 하십니다. 절대자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이야기하셔야만 한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매우 자주 하십니다. 거의 세상의 창조 때부터 바빌론으로의 포로기까지 말입니다. 그들을 격려하고 북돋울 뿐 아니라 매우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기도 합니다. 자연의 과정이 얼마나 자주 변경되고 자연의 법칙들이 사람들의 영혼의 안녕을 위해 멈추어서야만 했습니까? 홍수 전에는 하나님은 선한 사람들과 얼마나 자주 교제를 하셨습니까? 마치 그분께서 아담과 아벨 그리고 에녹과 노아와 말입니다. 홍수 이후에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요셉 등 말입니다. 그것은 모두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그러했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하여금 마치 마른 땅을 건너는 것처럼 건너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놀랍고 경이로운 방법으로 시내 산으로 내려오셔서 모세와 마치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요단은 갈라지고 가나안인들은 이스라엘의 자손 앞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동안 이스라엘 민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셋째. 사람의 영혼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죽게 하셨습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값진 일을 하셨습니까? 그분이 하늘의 가장 높은 곳 자기 품에서 이 땅으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죽도록 그를 보내셔야만 하다니! 우리의 영혼 구원이 어째든 도움이 되지 않을, 또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하나님께서 사람들 사이의 가장 가깝고 친밀한 관계보다 부정(父情)적으로 더 가깝고 친밀한 바로 그 사람을 실체에서 그 자신으로 버리게 하시다니! 그분을 영혼의 구원을 위해 비참하게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하는 사람을 보내시다니! 그러므로 영혼의 구원은 분명코 가장 값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영혼의 구원을 위해 자기의 독생자를 주시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말미암은 영혼의 구원보다 더 귀한 일이 무엇입니까? 가장 귀한 독생자를 악하고 잔인한 자들의 손에 넘기어 모진 고난을 당하도록 그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 풍부한 이성으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가장 귀중하고 가치 있는 일 외에 그 어떤 것을 위해 잔인하게 고난을 당하고 죽도록 내버려두겠습니까? 이것을 하나님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하셨습니다. 영혼의 구원은 분명코 세상 모든 것보다 더 귀중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은과 금을 갖고 세상의 쾌락과 명예에서 살도록 그의 아들을 죽도록 주셨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보다 영혼에 더 높은 가치를 두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의 구원이 모든 세상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것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적 용 추론 Ⅰ. 본성적으로 우리는 길을 잃고 타락한 비참한 유산(遺産)인이요 존재인데 어찌 우리 영혼이 그렇게 귀중합니까? 세상 모든 것보다 영혼의 구원이 더 가치 있습니까? 세상 모든 것을 잃은 것보다 영혼을 잃은 것이 더 귀중합니까? 본성으로 타락된 상태는 얼마나 끔찍합니까? 우리 영혼은 본성적으로 타락한 영혼입니다. 자연적으로 타락한 유산과 조건하에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분노에 매여 있고 영원히 그의 화를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엡 2:3). 우린 자연적으로 계속되는 비참함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자연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요3:18)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주받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육체의 죽음으로 심판을 받은 것은 참담한 피조물로서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물며 영적이고 영원한 사망으로 심판을 받은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본성으로 그러합니다. 추론 Ⅱ.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이에 대하여 그들은 영혼을 부인하고 이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어리석음입니다. 단지 그들은 세상의 쾌락과 헛된 이익을 난봉(難捧)하게 추구합니다. 그들은 그것들이 마치 상상할 수 없는 가장 귀중한 것들인 것처럼 정말 헛된 것들을 위해 애씁니다. 그리고 그것들의 실재는 부인합니다. 마치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처럼 세상을 위해 삽니다. 하지만 그것은 잠간이면 사라지고 쓰러지는 환영과 같습니다. 그들은 그것들과 이별해야하며 그것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의 가장 위대한 것이 얼마나 바보와 같고 주정뱅이와 같은지요!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돌봅니다. 그들은 세상을 사랑합니다. 이로써 그들 자신의 영혼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자, 어찌된 일입니까? Exh.] Ⅰ. 우리의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만일 온 세상을 얻고 영혼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영혼과 무엇을 바꾸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영혼을 돌보라고 설득하는 가장 힘 있는 설교를 우리는 들었습니다.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우선 들었습니다. 세상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을 얻으려고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과 에너지를 쏟지 않으려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세상을 얻으려고 얼마나 사람들은 분주합니까? 한번 이 도시를 살펴보면 세상을 추구하는 온갖 종류의 진지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사람들은 왜 애쓰지 않습니까? 왜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을 위해 우리자신을 투자하고 소비합니까? 하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것을 부인합니까? 잠간 있으면 떠나고 영원한 이별을 고해야하는 것에 그렇게 신경을 쓰십니까? 하지만 얻게 되면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무관심하십니까? 변하고 시들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착이 그토록 크십니까? 좀과 녹이 쓰고 파괴될 수많은 일들에 그토록 의존하십니까? 하지만 좀과 녹이 쓰지 않고 도둑과 강도가 들어올 수 없는 보물들에는 왜 전혀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영원히 즐길 수 있고 무한한 가치와 값어치를 지닌 것에 대해 무관심해하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일이겠습니까? 무가치한 세상과 영원히 지속될 무시무시한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주지 않는 것 그리고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 것에 애쓰는 것은 얼마나 미련한 짓입니까? 주의하지 않으면 피할 수 없이 빠지는 비참과 주의 없는 사람들이 빠른 발걸음으로 빠져가는 비참에 무관심해하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서는 즐길 수 없는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억척스럽게 일하고 세상과 이생의 쾌락을 위해 시간을 보내며 자신이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한 무관심한 자는 얼마나 바보스럽습니까? 세상을 즐기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지만 그것(세상)을 즐기는 자신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 것 말입니다. 주거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만 그 안에 거주할 자신에 대해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바보스럽고 미련하게 비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맙시다. 이 현재를 영혼의 구원을 위한 수단 외에 더 이상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다. 가장 귀중하고 불멸의 영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부인하지 마십시다. 혼동하게 만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영혼을 부인하려는 위험과 둘째로 그것에 대한 용서하지 못함 (inexcusableness)입니다. 첫째. 위험성입니다. 영혼을 부인하게 되면 영혼은 현재적으로 분명하게 잃게 됩니다. 마치 돌을 붙잡지 않으면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영혼을 부인하면 잠시 후에 지옥 불에 떨어져 있을 것입니다. 영혼을 오랫동안 부인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더 악하여지고 경로에서 그것을 멈추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타락한 상태의 영혼은 자연적으로 지옥과 파멸로 향합니다. 마치 돌은 지구의 중앙으로 향하는 것과 같습니다. 멀수록 더 빨리 격렬하게 돕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이를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영혼의 구원을 부인하는 용서하지 못함을 생각해봅시다. 1. 우리는 불능(不能)을 변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혼을 돌볼 수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하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 아직 없다는 것이고 고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아닙니다. 결코 그 어려움을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돌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 우리가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어떤 사람도 음식을 구하려고 힘쓰는 데 매우 큰 어려움이 있다고 변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한 변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합니다. 그것은 지속되는 불타는 것에 앉아 그것을 피하고 비껴서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입니다. 이러한 변명을 하지 않도록 하십시다. 사람들이 세상을 얻으려고 하는 것처럼 불멸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애쓰도록 합시다. 그러면 의심할 여지없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지옥으로부터 해방을 받을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과 하늘의 즐거움, 성도들과 천사들의 교제를 포함한 모든 복을 누릴 것입니다.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뵙고 여호와 자신의 아름다운 비전과 복되신 한 하나님 안에 영원한 삼위를 뵐 것입니다. 3. 무지를 변명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아야할 영혼을 알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 애써야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돌보아야할 만큼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얼마나 완전하게 이를 배웠습니까? 얼마나 자주 영혼을 돌보아야한다고 배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배웠습니까? 우리는 읽을 수 있는 성경을 가지고 이 땅에 삽니다. 이것들을 읽는데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습니다. 만일 읽지 않으면 우리의 잘못입니다. 그러한 기회가 있다는 것에 대해 무지하면 그 책임을 우리 아닌 어떤 사람이 지겠습니까? 이 시대뿐 아니라 이 시대 후에도 그러한 변명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에 결코 알지 못했다면 우리는 지금 영혼구원의 가치와 그것을 부인하는 위험성을 충분히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영혼을 바로 돌보아야할 몇 가지 지침을 말하겠습니다. 1. 길을 걸을 경우 분명 길을 잃게 될 것이라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걸어서는 안 됩니다. 길을 잃지 않으려면 우리는 잘못된 길로 가서는 안 됩니다. 파멸로 인도된 길로 계속해서 가면 마침내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파멸할 것입니다. 죄와 불법의 방법들은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반대되는 길은 파멸로 인도하여 결국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러한 길로 가지 마십시다. 2.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찾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약하고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할 수 없습니다. 손을 펴서 돕지 않으시면 우리는 파멸과 비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 절벽에서 무시무시한 어떤 구덩이로 떨어지는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는 계속 떨어지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아야하고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필연코 길을 잃게 될 것입니다. 3. 이러한 일에 있어서 우리는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영혼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를 위해 노력하고 애써야 합니다. 작은 관심과 애정은 이를 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찾기만 하는 것이 다가 아니고 힘써야 합니다. 어려움이 없었던 것들은 결코 위대하고 탁월하지 않습니다. 부란 어려움이 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명예와 평판도 어려움이 없이 획득된 것이 아닙니다.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 있기 전에 끊임없이 노력해야 얻어집니다. 그러한 것도 가장 큰 노력을 요하는데 하물며 영혼의 구원과 하늘은 노력과 고통 없이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부지런함과 노력을 요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의 경주와 전쟁으로 비유됩니다. 경주하고 싸우는 데 힘의 최상이 소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생과 노력도 아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의무에 방해하는 것들을 우리는 거부해야 합니다. 정욕을 죽이고 영적 적대자와 격렬하게 싸워야 합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하는 모든 것들에 대항하여 힘을 모아 싸워야합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 11:12)라고 말씀하십니다. 최선을 다하여 달려야하고 공기를 치듯이 싸워야합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달리지만 상을 받을 사람은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단련시켜 복종시켜야합니다. 4.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야합니다. 마음을 하늘로 향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부르심의 목적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늘의 것들에 대해 묵상하십시다. 늘어짐이나 주눅이 듦이 없이 하나님의 명령의 방식으로 달리십시다. 노력이 시작과 맞으면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계속적으로 약하여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직접 전쟁에 참가한 것이라면 지금 서서 머뭇거릴 수 없습니다. 적들이 앞에 있다면 휴식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매 순간 삼키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Exh.] Ⅱ.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그들의 영혼은 우리의 영혼만큼 귀중합니다. 영혼만큼 귀중한 것이 없는데 만일 영혼을 잃으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의 몸이 고통을 당하고 죽어가고 있다면 그를 구원하려고 손을 펴지 않겠습니까? 자, 우리를 살펴보면 슬픈 가운데 있는 수많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봅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 물에서 나오도록 구원의 손길을 펴지 않겠습니까? 죄와 불법에 빠져 불과 유황불에 죽어가는 가난한 영혼들을 보면 어찌하겠습니까?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다. 아마 우리는 지속적인 패망과 멸망으로부터 영혼을 구원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각자가 할 수 있는 것을 현재적으로 행한다면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최선을 다합시다. 아픈 자를 보고 돕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16:26에 대한 부가 (appendix) 첫째. 세상적인 것들에 대해 더 적게 이에 반해 영혼의 일에 대해 더 많이 마음을 쓰도록 하십시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거나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거나 적당한 시간과 방식을 관찰하는 데만 신중하다면 무엇이 이 좋은 일을 하는 기회가 되는지 신경을 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로부터 그들 자신에게 죄송해하고 또 말합니다. “무슨 목적으로 내가 나 자신을 그것들로부터 설득하고 고양시키는지, 또 그들의 악함과 나쁜 언어 그리고 무례하고 퇴폐적인 대화를 꾸짖을 것인가? 그것들은 바람의 한번 붐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만 웃고 비난할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비난을 받고 그들은 결코 더 나아지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행동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살펴보면 좋은 목적을 말할 기회들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진지한 이해력을 가지면 그것이 그 시대에 간주될지 아닐지 마음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그의 심장에 인상을 남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 매우 다양하게 역사합니다. 이 다양성 때문에 때때로 그들은 번영에 있기도 합니다. 때때로 그들은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슬픔이나 애통에 빠지기도 합니다. 번갈아 하나님은 인간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씁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동료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말하는 기회를 줍니다. 그러한 점에서 세심한 사람은 이치에 맞게 좋은 효과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사탄의 손으로부터 그의 형제의 영혼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잠언 25:11-12에서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사과니라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중함은 기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설득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선택하는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돼지와 같은 어떤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진주를 찾으려고 발밑을 뒤지고 다시 돌며 우리에게 세를 놓으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좀 더 나은 도덕과 시민정신이 있고 어떤 사람은 자연적으로 더 부드럽습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없으면 우리는 가까운 친구들을 만들고 사귈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좀 더 특별히 사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일에 있어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과 그들의 영혼에 있습니다. 둘째.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방법은 우리의 표본에 있습니다. 종교와 영적 마음을 권면하는 방식에 대해 그 어떤 반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마음을 보도록 하고 사물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알게 하고 말보다 행동에 더 주의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혼의 좋은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짐과 영원한 구원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함을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보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것이 정말 그러는지 아닌지 생각하고 무엇이 좋은 단계인지 사고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6을 보십시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조용하게 악한 대화와 퇴폐적인 행동들을 꾸짖고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삼가고 그러한 교제로부터 우리 자신을 배제함으로 또 다른 것들에 대한 맛인 대화를 사용함으로써 말입니다. 그것은 영혼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고 수많은 죄를 가리는 것입니다. 셋째. 다른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촉진하는 다른 방법은 은혜의 수단들을 촉진시키고 격려하는 일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보상되고 즐거워하고 격려를 받도록 노력함으로써, 주일성수와 말씀선포 그리고 성례와 같은 거룩한 것들에 모든 존경을 보임으로써, 그것들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또는 사람들의 영혼을 영향을 미치는 것을 함으로써 말입니다. Exh. Ⅲ. 사람의 영혼의 구원이 그렇게 귀중하다면 영혼의 회심을 위해 하나님의 영이 많이 발산(effusion)되도록 그 시대의 성취를 위해 진지하고 신실하게 기도해야합니다. 사람의 영혼이 세상 모든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극소수의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통탄할 노릇이고 두려운 일입니다. 대부분이 저주에 있고 지옥에 갈 것이며 하늘로 가는 길은 협착한데 멸망의 길은 넓어 많은 사람들이 떼 지어 들어간다는 사실은 무서운 일입니다. 세상에 큰 변화가 있을 때가 올 것입니다. 이교와 우상숭배 그리고 다른 잘못된 종교들로 어두움에 싸여있는 나라들은 진리로 비추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젊은 자나 늙은 자에게 부어지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은 것 같이”(사 11:9) 지구를 덮을 때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경건의 능력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렘 31:34);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롬 11:25-26). 이러한 표현들은 모든 나라들이 기독교화되고 보기에도 거룩하게 되고 대중-지상에 사는 큰 무리들-들이 하나님의 구원하는 지식으로 가득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혼의 가치에 참으로 민감한 사람들 모두 이러한 영광의 때를 생각하고 고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들을 자기의 경륜 아래에 두었다할지라도 때가 가까이 왔으며 그것들을 위해 진지하게 기도하도록 그들을 격려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성취시키기 전에 자기 백성들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에스겔 36:37-38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느니라.” |
출처: 청교도 도서관 원문보기 글쓴이: 천국 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