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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본인에 의한 클라니넷 추가와 관악기부분 약간수정
제1악장 Molto allegro (g단조, 2/2박자, 소나타 형식)
제 1악장 Molto allegro는 g 단조 2분의2박자로 서주가 없는 소나타 형식. 가슴을 에이는 듯한 슬픔의 제1테마가 바이올린으로 제시되고, 탄식의 소리와도 같은 체념의 제2테마가 바이올린과 목관으로 나타난다. 전개부는 주로 제1테마의 활용이고 제시부의 테마들이 확대되면서 제2테마를 거쳐 끝난다.
39번 교향곡 까지 에서 볼 수 있었던 아다지오 서주가 이 작품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비올라의 화음에 의한 반주 위에 우아하고 애수어린 제1주제가 바이올린에 의해 연주됨으로써 1악장이 시작된다. 이어 목관에 의한 격정적인 고조를 보이며 제1주제의 슬픈 선율이 오보에와 파곳의 화음을 수반하면서 바이올린에 나타난다. 이어서 B♭장조로 조바꿈을 하는 정렬적인 부 주제가 바이올린에 나타난다. 이 부 주제는 오히려 제2주제보다도 특징을 가지고 있고 재현부에서 확대되어 나오기도 한다. 한 마디의 쉼표를 거쳐 현과 목관의 대응으로 제2주제가 나온다. 이 제2주제는 잇달아서 2회 반복 제시되는데, 처음에는 현악기로 2째 마디부터는 관악기로 3째 마디부터는 다시 현악기로 연주된다. 두 번째에는 이제 까지와는 거꾸로 관악기에서 시작된다. 곡은 이어 제시부에 종결부로 이어지고 곡상이 약간 활기를 띄우나 이 악장의 애수감은 제1주제의 동기가 도처에서 나타나 지속된다. 제시부가 반복된 다음 곡은 전개부로 이어진다. 전개부는 주로 제1주제를 소재로 해서 발전되지만 그 서두의 동기는 곳곳에 모양을 바꾸어 나타난다. 특히 조바꿈의 교묘한 수법이나 목관에 나타난 악기 법은 뛰어난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어 플룻과 오보에의 대응에 의한 제1주제의 처음 동기를 사용한 반음계적 하강 악구를 거쳐 곡은 재현부로 들어간다. 재현부에서는 제1주제가 처음과 같이 바이올린에 의해 연주되지만 이번에는 파곳을 수반하고 있다. 뛰는 듯한 스타카토의 상승악구로 된 부주제는 확대되어 나오고, 제2주제도 정석대로 으뜸조로 바뀌어 재현되며 종결부로서 곡이 끝난다.
제2악장 Andante (E♭장조, 6/8박자, 소나타 형식)
모차르트의 견고한 구성력과 선명한 색채감이 뒷받침된 안식에 찬 느린 악장이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대선율 위에서 비올라가 제시하는 제1주제는 제2바이올린과 제1바이올린에 의해 모방되어 특징적인 부점 리듬의 32분음표 3도의 모티브를 만들어낸다. 제2주제의 접속부에 해당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이 음표가 처음의 선율과 결합되어 효과를 더해 주고 있다. 곡은 점차 고조되어 클라이막스를 형성하고 갑자기 조용해지며 제1바이올린이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의 반주위에 아름다운 제2주제를 노래한다. 이 흐느끼는 주제는 짧은 결미부로서 주제 제시부가 끝나지만 이 제시부는 오늘날 반복하는 것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전개부는 제1주제의 리드미컬한 동기와 32분음표의 음형을 결합시켜 전개시키고 있다. 이어 재현부로 들어가 주제 제시부가 거의 원형대로 재현되고 짧은 코다로서 곡을 끝맺는다.
제3악장 Menuetto Allegretto (g단조, 3/4박자, 3부 형식)
모차르트가 쓴 미뉴에트의 최고 걸작의 하나로서 원래 무곡이었던 미뉴에트가 교향적 형태 아래 예술적으로 승화된 전형이라고도 할수 있다. 카논적인 구성과 엄격한 긴장감을 갖고 있지만 이 효과적인 처리는 산뜻한 대위법적인 처리로서 모차르트의 원숙한 경지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약간 감미로움을 느끼게 해주듯 제1악장의 애수어린 정서를 다시 회상시켜 주는 미뉴에트의 주제는 민요풍을 하고 있다. 4마디의 일반적인 분절법을 따르지 않고 3마디씩의 분절법을 택한 점 및 싱코페이션에 의해 박자감을 희석시킨 점 등으로 보아 우아한 궁정 무용곡풍을 벗어나 어딘가 한이 서린 민요같은 느낌을 보여준다. 주부인 미뉴에트는 2부로 구성되어 각기 반복되지만 이 주제는 제2부에 있어서 다시 정교한 대위법으로 처리된다.중간부인 트리오는 G장조로서 평화로운 목가적인 정서를 그리고 있다. 이 중간부도 2부로 나누어져 각기 반복해 나타나며 후반부에 나온 호른의 2중주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곡은 다시 주부인 미뉴에트로 되돌아가 재현되지만 이 두번째의 미뉴에트는 반복을 하지 않는것이 보통이다.
제4악장 Allegro assai (g단조, 2/2박자, 소나타 형식)
이 악장은 대단히 극적인 표현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베토벤과 같이 심오한 인간의 깊이을 느끼게 해주는 드라마틱한 표현이 아니라, 억제된 절제 속에서 저항하듯 점차 흥분의 열정속으로 극적인 폭풍우가 밀어닥친다. 그러면서도 무거운 저항이 소용돌이치는 분위기 속에 서두부터 격렬한 제1주제가 시작된다. 이 주제에 이어 나오는 부주제도 반복되고 화려한 경과적인 악구가 이어진다. 제2주제에의 연결부를 표시해 주는 이 부분은 전 관현악이 힘차게 울리고 거친 불협화음도 나타나지만 이에 비해 제2주제는 아름다운 선율이 조용히 제시된다. 이 제2주제는 제1바이올린이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의 반주를 수반해서 연주된다. 이 제2주제는 목관에 이어지고 제시부의 종결부로 들어가 앞과 같이 거친 부분이 되돌아 온다. 곡은 제시부가 반복된 다음 전개부로 이어진다. 전개부는 처음 주제의 동기가 호른을 제외한 각 악기의 동음연주로 나타나지만 이것은 곧 조바꿈을 한다. 특히 전개부에 있어서의 주제의 처리는 정교하게 꾸며져 그 끝부분에 가서 재현부로 이어지는 부분은 대단히 효과적이다. 재현부는 한마디 반을 쉰 다음 시작되지만 이 때문에 처음보다는 안정된 감을 준다. 재현부에서는 관례대로 제시부가 재현되지만 이번에는 제2주제가 확대되어 나오고 종결부도 규모가 크게 꾸며져 비장감마저 감도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글출처: 참마음 참이웃
18세기 교향곡의 전형을 벗어난 독특한 표현 방식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 G단조는 1788년 6월부터 8월에 이르는 짧은 시기에 작곡한 모차르트 ‘최후의 3대 교향곡’ 중 하나로 세 곡 중 가장 격정적이고 낭만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모차르트 사후 2년이 된 1793년에 빈의 악보상인 요한 트레크에 의해 출판될 당시 ‘거장의 마지막 교향곡들 중 하나이며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문구로 홍보될 만큼 관습에서 벗어난 독창성, 반음계적 표현, 풍부한 아이디어가 넘치는 걸작이다.
모차르트의 카탈로그에 의하면 이 교향곡은 1788년 7월 25일에 완성되었으나 그 악보는 오늘날에 흔히 연주되는 악보와 조금 다르다. 오리지널 악보에는 클라리넷이 편성되어 있지 않지만, 1791년 4월 16일과 17일에 빈에서 살리에리의 지휘로 이 교향곡이 초연되었을 때는 한 쌍의 클라리넷이 추가된 새로운 악보로 연주되었고, 오늘날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클라리넷이 추가된 개정판을 선호한다. 그래서 1974년에 출판된 도버 출판사의 총보를 보면 오리지널 악보 윗부분에 클라리넷 파트와 개정된 오보에 파트의 악보가 추가된 것을 볼 수 있다. 오리지널과 개정판을 비교해보면 클라리넷의 음색이 첨가된 점 외에 악보 상의 큰 차이점을 발견하기 힘든데, 이는 모차르트가 개정판에서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를 많이 첨가하기보다는 오리지널 판에서 오보에가 맡았던 역할의 대부분을 클라리넷으로 바꾸기만 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가 1791년의 연주회를 위해 이 교향곡에 클라리넷을 새롭게 편성한 것은 당대의 뛰어난 클라리넷 연주자인 안톤 슈타틀러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슈타틀러는 모차르트에게 많은 영감을 준 음악가로 모차르트는 그를 위해 클라리넷 협주곡(K.622)과 클라리넷 5중주(K.581)를 작곡하기도 했으니, 모차르트가 1791년 빈의 콘서트에서 안톤 슈타틀러와 그의 남동생 요한 슈타틀러가 교향곡 40번의 클라리넷 파트를 연주할 수 있도록 오리지널 악보를 수정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모차르트가 클라리넷의 음색을 특히 좋아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는 만큼 오늘날 교향곡 40번은 오리지널 판보다는 개정판이 더욱 자주 연주되지만, 최근 들어 클라리넷이 없는 오리지널 판을 연주하는 지휘자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은 18세기 교향곡의 전형을 벗어난 독특한 표현방식으로 인해 그 어떤 작품보다 음악평론가들 사이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작곡가이자 음악평론가인 로베르트 슈만은 이 교향곡에 감탄하며 “가볍고, 고대 그리스적 우아함이 깃들었다.”고 말했던 반면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실내악적인 작품”이라 말했고, 로빈스 랜던은 “모차르트의 조울증을 반영한 작품”이라 했으며, 잭 웨스트럽은 “오페라의 정신”이 나타난다고 했으니 이처럼 다양한 의견을 불러일으킨 작품도 드물 것이다.
불안과 초조로 가득 찬 도입부의 파격적인 표현
1악장: 몰토 알레그로
1악장 도입부에서부터 비범한 표현은 돋보인다. 마치 숨이 넘어갈 듯 긴박감에 넘치는 비올라의 반주음형에 이어 8분음표 두 개와 4분음표 하나로 이루어진 불안정한 리듬이 계속되면서 우리를 어디론가 몰고 가는 듯한 느낌이다. 불안감을 야기하는 이 리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면서 위로 상승했다가 다시 하강하는 아치형 선율선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마치 무언가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처럼 들리기도 한다. 모차르트는 본래 알레그로 아사이(Allegro assai)로 지정했던 템포를 더 빠른 템포 지시어인 몰토 알레그로(Molto Allegro)로 바꾸어 주제 선율에 담긴 긴박감 넘치는 리듬의 추진력을 더욱 강조했으며, 발전부에서는 현악기군이나 현악기와 목관악기 사이의 대화를 실내악적으로 표현하는 한편, 이와 대조적인 오케스트라 전체 합주의 웅장한 울림을 교대로 배합하며 극적인 효과를
대개는 느린 템포의 서주로 시작해 웅장하고 확신에 찬 팡파르로 시작되기 마련인 18세기 교향곡 1악장의 도입부가 터질 듯한 불안과 초조로 가득했으니 당대 청중이 이 교향곡을 듣고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다. 1악장의 음악적 내용은 이토록 파격적이고 드라마틱하지만 1악장의 형식을 찬찬히 뜯어보면 18세기 교향곡으로서는 손색이 없는 완벽한 소나타 형식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하나의 선율을 여러 악기로 중복하지 않고 투명한 텍스추어를 강조하고 있어 모차르트의 음악적 의도는 선명한 음향으로 재생된다.
2악장: 안단테
2악장 안단테는 매우 독특한 음악으로, 첫 8마디가 흐르는 동안 그 어떤 뚜렷한 주제 선율을 발견하기 힘들다. 오로지 저음현으로부터 서서히 전염되는 8분음표의 맥박만이 집요하게 반복되는 사이 바이올린이 쉼표로 분절된 단편적인 선율 조각들을 내뱉을 뿐이다. 이윽고 호른과 첼로가 8분음표의 맥박을 바탕으로 한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하면 제1바이올린이 서서히 상승하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선율로 본격적인 악상을 전개해나간다. 어두침침하면서도 감각적이며 고통과 애수가 혼합된 이 악장에서 모차르트는 1악장에서 구사했던 고통스러운 반음계 화성의 세계를 계속 탐구해 나간다. 2악장에선 특히 두 개의 음표로 2도 음정을 하행하는 작은 동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고전주의 관현악의 이디엄을 확립한 만하임 악파의 기술적 용어로는 ‘한숨’을 쉬는 것을 의미한다.
갈등의 3악장 미뉴에트와 폭발하는 4악장의 격정
3악장: 미뉴에트. 알레그레토
3악장 미뉴에트에 이르면 바흐의 음악을 방불케 하는 다성음악과 복합 리듬이 펼쳐지며 더 이상 프랑스 궁정에서 추던 우아한 미뉴에트의 느낌을 찾아보기 힘들다. 3악장이 시작되면 바이올린과 플루트가 한 패가 되어 3/4박자를 2박자의 음악으로 바꾸어놓으면 비올라와 첼로 그리고 나머지 관악기들은 본래의 3박자를 고수하며 팽팽하게 대립한다. 엇갈린 리듬에서 오는 긴장감이 3박자의 우아한 미뉴에트를 지극히 투쟁적인 음악으로 바꾸어놓는다. 다행히 중간 트리오 부분에선 G장조의 편안한 음악이 나타나며 미뉴에트의 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하는 듯하지만, 더욱 격렬한 4악장으로 이어지면서 이 교향곡에 감돌던 갈등과 격정은 열병처럼 번져나간다.
4악장: 알레그로 아사이
4악장은 모차르트가 쓴 음악 중 가장 격한 음악이다. 만하임 악파의 용어로 ‘로켓’이라 부르는 상승하는 선율에 이어 전체 오케스트라가 큰 소리로 무례하게 끼어들며 폭력적으로 응답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제1주제의 이중적 성격은 계속해서 4악장에 갈등 상황을 만들어내고, 발전부에 이르러서는 다성적인 모방을 거듭하며 격하게 움직여 간다. 그러나 고전주의 음악답게 이러한 정신분열적 이중성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리듬 패턴은 그 모양새를 계속 유지하면서 서서히 돌파구를 찾아나가며 마무리된다. 글 최은규(음악평론가)
출처:네이버캐스트 오늘의 클래식>명곡 명연주 2010.12.13
그의 많은 교향곡 중에서 단조는 <제25번>과 <제40번> 2곡이 있으며 모두 G 단조로 되어있다. 이 G 단조 작품에는 어두움과 비극적인 슬픔이 풍부한 감정으로 처리되고 있다. 너무나도 유명한 Mozart의 교향곡 40번은 Schubert가 '천사의 음성이 들린다'라고 표현했을 만큼 애수가 깃들여 있는 곡이다.
그의 3대 교향곡 중에서도 가장 보편성을 띤 것으로 1788년 6월 26일에 시작하여 8월 10일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특기할 만한 것은 그의 만년의 교향곡 16곡 중 단조로 쓴 것은 오직 이 한 곡 뿐이다. 따라서 내용에 있어서도 인간의 슬픔을 표현하였다. 그런데 이 부분의 비애란 노골적으로 나타낸 감상과 어두운 것이 아니라, 맑은 기품으로 간소하게 처리되어 인간미가 풍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슈베르트는 "천사가 이 가운데서 노래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고 평했다.
모차르트 최후의 3대 교향곡 중 두번째 곡으로서, 39번의 밝고 맑음, 40번의 장려함과 대조적으로 그윽한 애수를 담은 비극미를 특색으로 한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비극미는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보여주는 병적, 주관적 비극미가 아닌 객관화되어 밝고 아름다운 선율로 표출되는 비극의 승화에 그 특징이 있다. 이는 모차르트가 살았던 시대가 절대음악을 추구하는 시대였다는 시대적 배경 또한 무시할 수 없겠으나, 모차르트의 작품이 가지는 비자서전적인 특질이 중요한 원인인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모차르트가 단조 작품을 만들어내는 시기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환경이 불우해지는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작품에서 자신의 불행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것을 찾으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일이다.
모차르트에게 프라그에서 성공한 오페라 <돈 지오반니>가 완성된 것은 1787년 가을이지만 이무렵 그는 빈곤에 허덕이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피가로의 결혼”을 쓴 이후 1790년까지의 4년간에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많은 작품을 써야 했다. 그런데 이 어려운 시기에 쓴 <돈 지오반니>와 3대 교향곡은 그의 뛰어난 독창성을 보여준 그의 대표적인 명작으로 정평을 받고 있다. 빈곤과 생활고에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이 3대 교향곡과 같은 화려함과 낭만이 넘친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묘한 아이러니인 동시에 그의 상상력과 시정이 얼마나 풍부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모차르트는 일생 동안에 50곡이 넘는 많은 교향곡을 작곡했지만 그 가운데 단조로 쓰여진 곡은 불과 2곡 밖에 없다. 곧 25번과 이 40번이며 모두 같은 g단조로 되어 있다. 이 40번은 정열적이면서도 정서가 넘친 악상을 가지고 있고 비극적인 동시에 병적이라고 할만큼 어두운 면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교향곡 속에서 낭만적인 표현의 선구적 징조가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인간의 고통 속에서 빚어진 위안의 마음이 보인다는 제1악장에서는 모차르트 만년의 내성적 깊이, 즉 부친 레오폴드의 죽음, 오페라 <돈 지오반니>에서 돈 지오반니의 죽음의 장면, 친구의 죽음 등을 통해 모차르트가 ‘죽음’을 의식하게 되었고, 현실을 현실로서 받아들이는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생각 등이 아름다운 선율과 낭만적인 색체감, 풍부한 화성에 의해 남김없이 표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 교향곡을 작곡할 당시의 모차르트의 어려운 생활환경이 이 곡의 비극성을 더욱 의식하게 해주고 있다. 모짜르트와 같은 천재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창작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극성과 곡상이 일치되어 이 교향곡은 19세기 이후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의 하나로 인정 받고 있다. 그러나 이 곡의 가치는 이러한 정서적 매력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든 음악적인 요소가 정교하고 완벽하게 결합되어 조화와 통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정감과 지성이 이렇듯 균형을 이루고 있는 교향곡도 드물 것이다. 글출처: 참마음 참이웃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기념 축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의 축하연설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모차르트가 작곡한 교향곡이야말로 이 축제의 진정한 서막이라 여깁니다. 이제 연주하게 될 교향곡은 모차르트가 작곡한 세 개의 마지막 교향곡(39, 40, 41번) 중에서 가운데 곡입니다. 분명 이 세 개의 교향곡은 인간이 목적지로 가기 위해 택한 일종의 길을 나타냅니다. 이 마지막 세 교향곡의 첫 곡은 E플랫장조인데, 이것은 사랑의 조성이며 동시에 ‘의례적 장중함’의 조성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시작해 모차르트는 G단조 교향곡으로 넘어가 앞선 모든 것이 의심되는 깊이 있는 단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리고 ‘주피터 교향곡’의 현란한 C장조로 이어지는데, 이 곡에서는 모든 것이 해결되고 전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사람들이 하모니 속에 평온함을 느끼게 합니다. 모차르트는 41개의 교향곡을 작곡했지만 G단조는 25번 교향곡과 함께 두 곡밖에 없습니다. 당시에는 G단조가 죽음과 슬픔의 조성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한숨의 동기’가 나오는 첫 주제 악장에서는 단 한 개의 음도 바로 연주되지 않습니다. 모든 음은 위에서 아래로, 또는 그 반대로 연결되는 자식음인 ‘아포지아투라’(appoggiatura)를 갖고 있어서 매우 단순하고 당연한 것이 흐릿해집니다. 마치 물방울을 통해 보는 것처럼 불명료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악장은 ‘주피터 교향곡’에서 살짝 숨겨져 있기도 한 푸가 주제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E플랫장조인데 마치 첫 번째 악장의 악몽을 완전히 없애려는 듯,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을 호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언어가 무색해지고 우리가 그 앞에서 잠잠해져야 하는 이 놀라운 음악을 들으신 후에 저는 이제 모차르트와 그를 기념하는 올 한 해에 대해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아니, 어떤 축하연설도 이 음악에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제가 모차르트의 음악 외에 다른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인데, 이제는 모두가 음악 외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 오스트리아는 모차르트와 동일한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차르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돈을 벌고 사업과 관련된 것이어서 유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모차르트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고 지난 200년이 넘게 우리에게 요구해온 바는 너무나 단순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엄숙히 그리고 주의 깊게 그의 음악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의 말없는 간청과 호소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쭐해하기보다는 진실로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를 축하하고 있는데 그것이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축하하고 싶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모차르트가 빈과 잘츠부르크에서 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천재의 가차 없는 엄격함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데, 우리는 경제적 증대 효과와 사업상의 거래로 그를 축하하고 그의 음악을 모든 종류의 경영 채널을 통해 조각조각으로 흩어 보내고 있습니다. 추악하며 수치스러운 것이죠. 어떻게 그것이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반성의 한 해가 의미를 가지려면 우리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모차르트가 전하는 메시지의 일부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차르트는 우리의 시상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그의 격동하며 요동치는 폭풍을 갈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한 해는 실로 우리를 위한 기회인 것입니다.
모차르트가 이룬 성과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술 자체입니다. 그것은 음악이고 우리는 그 음악을 통해 이루어 온 것과 지금도 이루어 가고 있는 것, 또 이루지 못한 것을 설명해야 합니다. 음악과 예술은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것은 실용적인 것과 균형을 맞추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철학자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예술이며 음악이라고 말할 때 저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매혹적인 선물이며 마법의 언어입니다.
현 세대들은 행복의 기대치가 물질적인 것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당장 쓸모 있는 것에만 점점 집중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성공과 동일하고, 성공은 재산과 같다. 나는 더 많이 소유할수록 더 잘 살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이미 학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술 과목들, 상상력에 도전하는 모든 것들과 인간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혹자는 '필수불가결하게 되고 싶은' 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대부분의 것들이 억압받고 있습니다.
요즘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노래를 하도록 권유받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노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노래해야 할지 모르고 아예 아는 노래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이해하는 것은 이미 3, 4, 5세 때 시작됩니다. 이후에는 이것이 방송이나 워크맨에 맡겨지게 됩니다. 만일 예술교육이 독서, 쓰기, 그리고 수학과 동일한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미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실용주의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면, 물질주의와 탐욕이 우리 시대의 맹목적 종교가 될 극도의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단순한 기술 훈련이 아니라 완전한 교육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음을 다급하게 경고합니다! ‘피사 연구’(Pisa Study)처럼, 음악을 다소 경시하는 경향이 우리의 교육 목표가 잘못 설정되었다는 증후입니다. 저는 예술에 대한 관심이 상류층에서 확고하게 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장 고급화된 형태의 예술은 아무도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없을 때 결국 공허한 외침이 되리라는 것이 진실입니다. 음악은 교만하고 자기만족적이며 특권을 갖고 있는 소수만의 신비한 언어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고, 어린 나이부터 안테나가 바르게 맞추어졌다면 그 부유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술의 보이지 않는 힘은 강력하고 위험스러우며 그 효과는 파괴적입니다. 그런 이유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것을 활용하려 애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술은 언제나 권력에 반대하고 그 어떤 지배도 받지 않으며, 길들여질 수도 전유될 수도 없기에 그들의 시도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예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이지만 말의 언어보다도 진리에 더 가깝습니다.
위대한 작곡가들의 음악은 항상 그 시대의 영적 상황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해 왔습니다. 모차르트의 G단조 교향곡이 처음 연주되었을 때 사람들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음악어법이 허용될지에 대해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때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이 교향곡이 극단적인 음악언어의 형태라고 느꼈습니다. 아무도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갈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술은 어떤 깨달음에 이르도록 인도하며 때로는 강제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아야만 하는 거울입니다. 거울은 보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예술을 단지 미학적이거나 대중적인 어떤 것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취합니다. ‘듣기 좋은’ 음악을 듣고, ‘보기 좋은’ 그림을 보면서 되도록이면 파괴적인 경험에 노출되거나 철저하게 분쇄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게 됩니다.
50년 전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을 때, 저는 일 년에 몇 차례 모차르트의 G단조 교향곡을 연주해야 했는데 그것은 항상 부드럽고 아름다웠습니다. 청중들은 행복에 젖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고 곡이 끝나면 ‘모차르트 행복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제 책상 위의 진실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멜로디, 화음, 그리고 리듬, 모든 것이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정말로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미뉴에트 악장의 ‘로맨틱한 트리오’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마도 2차 대전 후라는 시대 상황에서 사람들이 가장 극명하게 정반대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현란한 하모니와 순수한 행복감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모차르트 음악에 관한 해석이 다소 밝고 긍정적인 면은 강조하고 파괴적인 면은 억압하는 양상이었습니다.
이 교향곡은 개인적으로 저의 ‘운명 교향곡’(제 개인의 운명에 관한 교향곡)이 되었고 제 인생을 영구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로 17년을 지낸 어느 날, 저는 더 이상 그 곡을 그런 식으로 다시는 연주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오케스트라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 교향곡은 많은 문학작품이나 공예품과 똑같이 위대한 본보기가 됩니다. 예술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가? 또 청중은 무엇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가? 모차르트는 계속 이 한계에 매우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모차르트는 인간으로서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정말 불가사의합니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인생은 서류상으로 매우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결코 모차르트에 관한 진실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입니다. 그의 음악만이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인물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이중적 견해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두 명의 모차르트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 아이, 활달하고 외향적인 젊은이, 모차르트의 친구들은 그가 결코 우울해한 적이 없으며 젊어서부터 세련된 필체로 편지를 쓴, 교양 있고 재치 넘치며 자기 확신에 찬 인물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전기를 통해 아는 경제적ㆍ예술적 위기를 겪고 가정사에 문제를 안고 있는 모차르트, 그는 부자였을까요, 가난했을까요? 그는 아버지와 다투었을까요, 아니면 그 관계가 조화로운 사랑의 관계였을까요? 빈에서 초연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성공하지 못하자 모차르트는 예술가로서 실패했을까요?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한 마디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스바르트 슈펭글러(Osward Spengler)가 말했듯이 자연은 과학적으로 다루어져야 하지만, 역사에 대해서는 시를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모차르트는 진실한 바로 그입니다. 이해할 수 없고 생각을 넘어서며 어떤 평가를 내리기가 불가능한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의 척도가 모차르트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모차르트는 다른 행성에서 온 것 같습니다. 오직 자신의 음악을 통해 살고 있습니다. 매순간 심각하고 농담을 하고 있을 때조차도 숨 막힐 듯 답답합니다. ‘음악적 농담’(Musikalischer Spass)도 오페라 <자이데>(Zaide)에서 나오는 ‘유령과 같은 분위기의 웃긴 아리아’처럼 어둡습니다.
아버지가 어린 모차르트에게 천재성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가족에게 틀림없이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유쾌하고 총명한 어린아이를 대면하고 그가 악어와도 같이 무시무시한 존재임을 발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는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서 떨어지는 유성과 같습니다. 연주하는 어린아이가 어른이었던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는 천재를 양육하는 모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악마적 존재는 그의 환경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는 ‘양육될’ 수 없고 가족에게 사랑받는 존재임과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아주 초기 작품에서 예술가로서 모차르트의 길은 외부 환경과는 정반대로 절대적으로 확고하며 놀라운 확신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심지어 아이일 때도 모차르트는 정서적으로 경험하거나 겪을 수 있었던 범위를 넘어서는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젊은 청년으로 남아 있고 또 언제나 젊은이였던 모차르트에게 사랑과 죽음, 비극과 죄, 그리고 행복에 관한 가장 극단의 비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우리로 하여금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하고, 그 다음 하늘을 올려다보게 합니다. 아마도 그는 신의 손에 들린 펜대였을 것입니다. 글쓴이 : 라라와복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