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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라도
누가복음 14:1-6
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2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눅 14:1-6 / [수종병자를 고치시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음식을 잡수시러 바리새파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셨다. 2) 마침 그 자리에는 수종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와있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를 고쳐 주시는가 지켜 보고 있었다. 3) 예수께서 거기 둘러서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물으셨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4) 그들이 대답을 하지 않자 예수께서는 그 병자에게 손을 얹어 고쳐서 돌려보내셨다. 5)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는데 안식일이라 해서 끌어내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6) 그들은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
본문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을 고치시는 기적의 이야기입니다.
바리새인에게 식사 초대를 받으신 예수님(1)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회당 의식이 끝이 난 이후에 다른 날과는 달리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여 랍비나 귀한 손님을 대접하였습니다. 이러한 풍습에 따라 바리새인 가운데 지도급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랍비로 여겨서 안식일의 식사에 초대하였고, 예수님은 그 초대에 응하여 바리새인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과는 달리 다른 바리새인들은 악의를 가지고 음해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습니다.
안식일에라도(2-6)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맞이한 것은 한 수종병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고창병이라고 불렀는데, 이 병을 메시지 성경에서는 관절 마디가 심하게 부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병은 신체의 여러 부위에 물이 고여서 살이 썩어져 가는 병으로 당시에는 불치의 병으로 여겼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불치의 병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생기는 병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병자를 마주한 예수님은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라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질문을 하신 이유는 그들의 악의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미 앞에서 두 번이나 안식일에 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6, 13장).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의 성수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한편, 이 병자가 이 집에 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로는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서이고, 두 번째로는 병 고침을 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거나, 세 번째로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바리새인들이 데려왔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 앞에 나왔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잘한 일은 바로 이 안식일에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수종병 든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기에 그 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아들이나 소의 이야기를 한 것은 일반적인 인도주의에서 안식일에 짐승들한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정당하므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안식일의 원리입니다.
적용: 당신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유함(치유)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 은혜를 다시 한번 기억하며 예수님의 은혜를 나누며 전하는 치유 받은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히말라야 삼나무처럼 뻣뻣하게 굴지 말고 갈대처럼 부드러운 사람이 됩시다. 바람이 불면 갈대는 부드럽게 휘어졌다 바람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곧게 일어섭니다. 옛날에 갈대의 끝부분은 성경을 쓰는 펜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반면 히말라야 삼나무는 강풍이 불어도 꼿꼿하게 서 있으므로 뿌리부터 꺾여 쓰러져서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 나무는 벌목되고 잘려져 지붕을 덮는 용도로 이용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불쏘시개로 사용됩니다.
< 설 교 >
호크마 주석
=====14:1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 '두령'(* , 아르콘)은 '지도자'를 뜻하는 이에 대해서는 (1) 바리새파에 속한 지배자(RSV,Creed), (2) 회당장(Marshall), (3) 바리새인의 계층가운데 지도급 인물(NEB,NIV), 등의 견해가 있는데 세번째 견해가 무난하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이 바리새인은 예수를 식사에 초대했고 예수께서는 그의 초대에 응했다. 여기에 묘사된 장면은 안식일의 회당의식이 끝난 후에 가지는 식사일 가능성이 높다. 안식일에는 회당의식이끝난 후에 가장 큰 식사를 하였으며 랍비들은 빈부에 관계없이 안식일에 손님 접대하기를 가르쳤고 그것은 종교적 의무로까지 여겨졌다 .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 여기서 '저희'는 그 곳에 있던 다른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며(3절) '엿보고있더라'(* , 파라테루메노이)는 문법구조상 미완료로 되어있어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신학적인 오류가 있는지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계속 감시하듯 지켜보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행위로 미루어 보건대 바리새인이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동기가 불순한 것이었던 것같다.
=====14:2
고창병 - 헬라어 '휘드로피코스'(* , 고창병)는 '물'을 뜻하는 '휘도르'(* )에서 온 후기 헬라어의 의학 용어로 이 곳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이 병은 '수종병(水腫病,dropsy)이라고도 하는데 신체의 세포조직이나 각종 강막(腔膜)이 협장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상태를 가리키며 대개 심장에 결함이 있거나 신장이 병들었을 때 발생한다.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 오르며 팔과 다리도 크게 부어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띠게 된다. 당시의 랍비들은 이 병을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발병하는 것으로 여겼다.이 병자가 이 집에 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서, (2)병 고침을 받기 위해, (3) 바리새인들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그를 데려옴 등.
=====14:3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 13:10-17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병고쳐주기 건에 먼저 질문부터 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렇게 먼저 질문하시는 것은 그들의 악의를 아셨기 때문이다(1절). 여기서 '합당하냐'(* , 여세스틴)는 직역하면 '그것이 율법적이냐'는 뜻으로 그들의 악한 의도를 예수께서 이미 간파(看破)하셨음을 말해준다. 앞에서도 두 차례에 걸친 안식일 논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6:1-11;13:10-17) 또다시 안식일 논쟁이 수록된 것은 안식일 문제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14:4
잠잠하거늘 - 그들은 자기들이 알고있는 율법 지식에 의거하여 당연히 합당하지 않다고 대답했어야 옳았다. 왜냐하면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가 아닌 이상 안식일에 고치는 것은 랍비적 규례에 의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환자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암시는 전혀 없기 때문에 생명의 위태함에 대한 여부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예수께서 그들의 저의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어떤 대답을 하든지 예수께서는 그 병자를 고쳐주리라는 결의를 감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 예수께서는 침묵하고 있는 율법사들과 바리섀인들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다.예수의 이 행위는 바리새인들의 사문화(死文化)된 율법 이해를 뛰어넘어 새로운 규범을 제시하는 의미가 있다. 즉 고통받는 사람을 보고도 아무런 동정의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안식일규범의 미신성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을 모든 형태의 고통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진정한의미에서의 안식일 규범을 가르치신 것이다.
=====14:5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 예수께서는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구체적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안식일에 대한 미쉬나의 규정에는 온건한 것이 있고 엄격한 것이 있는데 온건한 규정은 구덩이에 빠진 짐승을 구해낼 수 있도록 하나 엄격한 규정은 다만 구덩이에 꼴만을 넣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예수 당시에는 온건한 규정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바리새인 보다 훨씬 엄격했던 쿰란(Qumran)공동체에서는 구덩이에 빠진 사람만 구해낼 수 있고 짐승은 구해낼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따라서 당시 일반적으로 채택된 규정에 의하면 우물에 빠진 짐승을 건지는 것이 허용되었던 셈이다. 예수의 질문 속에 깔린 논리는, 곤경에 처한 짐승을 구하면서 고통 가운데 빠진 사람을 치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는 것이다.
=====14:6
대답지 못하니라 - 이 말은 4절의 단순한 침묵과는 달리 반대 논리로 맞서 대답할능력이 없었다는 뜻이다(롬 9:20). 그들은 예수에게 모종의 도전과 공격을 하려고 준비하였지만(1절)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지는 것들이 예수 앞에서 무기력하다는 사실 뿐이었다. 예수는 진리였으나 그들은 비진리였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은 왜곡된 판단력을 지닌 인간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등석
눅 14장 1, 7-14 / 김흥규목사(내리교회)
1. 설국열차의 객실 등급
요즈음 가장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직접 대본을 쓰고 감독한 “설국열차”라는 영화이지요. 정말 할리우드의 최고가는 거장들이 만들어낸 작품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좋은 영화입니다. 본래 이 영화는 불란서에 나온 만화가 원작인데, 봉준호 감독이 2004년 홍대앞 만홧가게에서 우연히 이 만화를 읽다가 영감을 얻어서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기상이변으로 지구가 온통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마치 노아의 방주가 그랬던 것처럼, 열차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이 설국열차는 영원히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 나가는데, 17년째 달려가는 도중에 열차 안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다루는 SF, 공상과학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열차는 객실마다 등급이 있습니다. 맨 앞쪽에 열차의 엔진을 장악한 채 절대 권력을 누리는 윌포드가 있고, 맨 뒤쪽 꼬리칸에 간신히 무임승차해서 목숨을 부지한, 마치 빈민굴의 거지들과 같이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댑니다. 꼬리칸은 말 그대로 생지옥입니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고 유리창도 없습니다. 꼬리칸에 탄 승객들은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덩어리를 식량으로 공급받기 전까지, 먹을 것이 없어서 어린아이들을 잡아먹어야 할 정도로 극한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설국열차는 꼬리칸에서 앞쪽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좋아집니다. 마치 3등석에서 2등석, 1등석, 특등석으로 환경이나 대우가 좋아지듯이, 앞쪽 칸으로 갈수록 사람들의 환경이나 생활수준은 점점 더 좋아집니다. 신선한 과일이 넘쳐나고 갓 잡아 올린 생선으로 초밥을 만들어 먹는 등, 그야말로 최고 수준의 사치와 호사를 누립니다. 영화는 바로 이 꼬리칸에 탄 억눌린 사람들이 객실을 차례로 점령하여 맨 앞쪽에 있는 엔진실을 점거해나가는 쿠데타, 혹은 혁명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설국열차야말로 제가 본 영화들 중에서 가장 철학적이며, 또 신학적인 영화입니다. 열차를 하나의 우주로 설정해서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하여 인류의 계급투쟁의 역사와 진보과정, 등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실제로 이 영화 안에는 수없이 많은 상징 장치들이 숨어 있어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마다 다양한 해석을 쏟아 놓습니다.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고, 정작 영화보다 SNS에 쏟아놓는 관객들의 영화평이나 해석이 훨씬 더 흥미로울 정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설국열차에서 설정한 객실의 등급이 인간의 계급질서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꼬리칸에서부터 맨 앞쪽칸까지 사람들의 신분질서는 물론이고, 신분과 지위에 따라서 환경과 대우까지 달라지는 인류의 역사와 현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2. 잔치자리에서 예수님이 주신 교훈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 14장에 있는 말씀도 이와 같은 신분질서나 위계질서와 관계가 있는 말씀입니다. 먼저 14장 1절은 이 말씀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씀인지 그 배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음식을 잡수시러 들어가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잔치자리에 식사초대를 받으셨던 것이지요.
바리새인은 예수님 시대의 저명인사입니다. 종교적 열심이 워낙 유별나서 “바리새”라는 말 자체가 “보통 사람과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바리새인은 예수님 시대의 유대 사회의 지배층 중에서도 맨 꼭대기에 있었고, 사람을 사귈 때에도 가난한 사람들, 죄인들, 장애인들과 상종하지 않는, 유난히 사람을 가려서 사귀는 사회종교적인 특권층이었지요. 그렇게 높은 신분질서를 자랑하고, 유난히 사람들을 가려 사귀는 바리새인의 집에 예수께서 식사초대를 받아 가셨습니다.
그 식사현장에서 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흔히 벌어지는 풍경을 보셨습니다.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보셨던 것이지요. 예수님 시대에 큰 잔치를 열고 손님을 초대할 때에는 자기 집안의 체면이 걸려 있기 때문에, 대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람들을 주로 초대했습니다. 초청 리스트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에 따라서 자기 신분도 덩달아 올라가고 내려갈 수 있기 때문에 주로 VIP들을 우선해서 초대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바리새인 집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다 내로라하는 특권층 인사들이기에 상석부터 골라잡았다는 말입니다.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이 흔히 일어나는 풍경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광경을 보시고 주인인 바리새인은 물론이고 잔치에 초대된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7-11절에서 초대받은 손님들이 어떤 처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둘째로, 12-14절에서 손님을 초대하는 주인이 어떤 자세로 손님을 초대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① 손님들에게 주는 교훈
먼저 예수께서 잔치자리의 손님들에게 주신 교훈은 이렇습니다. 8-10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잔치에 손님으로 초청을 받아 갈 때에 먼저 높은 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충고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내가 제일 높은 줄 알고 상석에 가서 앉아 있는데, 조금 있으니 나보다 더 높은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 때 잔치에 초대한 주인이 와서 “아무개 선생님, 자리 좀 비워주십시오, 그 자리에서 내려와 저 쪽 밑에 가서 앉으십시오.” 그럴 때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얼굴을 붉히며,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가 앉게 된다면 큰 망신이 된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하는 대신에 잔치 자리에 들어올 때부터 아예 맨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 때 주인이 “아무개 선생님, 왜 이렇게 뒷자리에 앉으십니까? 앞쪽에 가서 앉으십시오!” 하면, 그날 초대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지혜의 보고라고 일컬어지는, 오늘 봉독한 잠언서 25장 6절로 7절에 이미 기록된 지혜의 말씀입니다. 비록 자기가 얼마든지 높은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겸손하게 낮은 자리를 먼저 차지했다가 주인이 이리로 높은 데로 올라가라고 하는 말을 듣는 것이, 처음부터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주인이 저리로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고 하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그 지혜의 말씀을 인용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높임을 받는 문제인데, 누구에게 높임을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사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높임을 받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모임에나 식사자리에 당연히 상석에 앉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상석에 앉아 모임을 주관하고, 또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아야 마땅하지요! 하지만 높임을 받되 사람들이나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스스로 높임을 받으려고 할 때가 문제이지요. 무슨 모임이 있을 때마다 항상 상석부터 먼저 앉아 대접받으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나 하나님이 높여주시기 전에, 먼저 스스로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교만이 숨어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스스로 높임을 받으려고 하지 마시고, 사람들과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그런 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도 누가복음 14장 11절에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겸손은 마음 깊은 곳, 진심에서부터 우러나와야지, 더 높은 자리에 가서 앉고자 불순한 동기를 품고 낮은 자리에 가서 전략적으로 앉아 있다면, 이 또한 잘못일 것입니다. 진정한 덕이라는 것은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꼭 알맞은 상태입니다. 용기가 덕이라고 할 때, 용기가 지나쳐 만용이 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용기가 모자라 소심한 겁쟁이도 되지 않는, 만용과 소심함 사이의 꼭 알맞은 중간 상태가 진정한 용기입니다.
마찬가지로 겸손 역시 자기보다 훨씬 더 높이려는 교만도 아니고, 자기보다 훨씬 더 낮추는 비굴도 아니고, 꼭 자기 자신만큼 되는 것, 교만과 비굴의 중간쯤 되는 상태가 겸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품게 되는 고민은 어떻게 하면 자기를 높이는 교만에 빠지지 않고서도 자기를 존중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자기를 비하하지 않고서도 겸손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는 교만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비굴하지도 않은 꼭 여러분 자신만큼 되는 겸손한 분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② 손님들 초대하는 주인에게 주신 교훈
이와 같이 손님들에게 주는 교훈보다, 이제 손님을 초대하는 주인들에게 주는 예수님의 교훈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사실 고대 근동지방에서 손님 초대는 아주 신경을 써야 할 까다로운 문제였습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초대하는가에 따라서 자기 신분이 결정된다고 믿는 사회였기 때문에, 대개 지체 높은 사람은 자기보다 신분이 높거나 비슷한 사람들을 초대하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결혼식이나 팔순 잔치에 대통령이나 장관들, 혹은 우리 사회에서 꽤 유명한 분들이 하객으로 몰려오면 주인의 위치도 그만큼 덩달아 올라가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신분과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잔치자리에 초대받아 온 다면 자신이 모욕을 받는다는 생각이 그때나 지금이나 팽배해 있습니다.
식사자리야말로 쌍방교류 혹은 상호 보상을 전제로 한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초대한 사람들은 또 나를 초대해서 대접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모든 식사초대와 대접이 일어난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와 같은 식사초대의 풍습과는 전혀 다른 손님 초대를 주문하십니다. 12-1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다름 아닌 당신을 초대한 바리새인에게 주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의 식사초대는 항상 “GIVE & TAKE”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누구를 초대할 때에는 반드시 그 손님이 답례의 표시로 자기를 초대해줄 것이라는 기대와 계산을 하고 초대합니다. 그러기에 부유하고 신분이 높은 사람을 초대해서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대접을 잘 해주면 반드시 그만한 대접을 다시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만일 이와 같이 대접받을 생각을 갖고 누구를 초대할 생각이라면, 초대하지 말아야 할 사람 네 부류와 초대해야 할 사람 네 부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초대하지 말아야 손님들 넷이 있습니다. 벗, 즉 친구와 형제, 친척, 부한 이웃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서로 친한 사이이므로 대접 받았으면 또 대접할 소지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언급하신 것 같습니다. 대접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값없이 은혜로 베푸는 선물이 되어야만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내가 이만큼 대접받았으니 나도 이만큼 대접해서 갚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대접, 즉 전적인 은혜로 아무 값없이 베푼 선물이 되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초대해서 잘 대접해놓고도, 다시 그만큼 대접을 받으면 대접한 은공이 사라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은혜로 베푸는 선물이 아니라 상거래 행위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잔치자리에 꼭 초대하라고 권하는 네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그리고 맹인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이야말로 예수님 시대의 최하층민으로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변방으로 밀려난 OUTCASTS,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온전하고 흠 없는 것을 존중하는 사회에서 이와 같이 흠 있는 사람들은 초대받기가 참으로 어려운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잔치를 배설해서 손님을 초대하려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먼저 초대하라고 권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은 갚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해서 자기도 그만큼 대접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이 받은 것은 말 그대로 은혜의 선물로서의 대접이지, 상거래 행위로서의 대접이 아닙니다!
3. 거꾸로 매겨지는 구원열차의 등급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 교회가 항상 조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명한 사람, 잘난 사람, 깨끗한 사람, 건강한 사람, 그런 이들만 찾아오는 교회가 아닌, 무명한 사람, 못난 사람, 더러운 사람, 마음과 몸에 장애가 있고 상처가 있는 사람을 불문하고 누구나 다 올 수 있는 교회, 그런 천국 잔치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옛날 미국 서부시대에 자동차가 나오기 전에 역마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대개 한 여섯 명 정도 탈수 있는 역마차였지만, 1등석에서 3등석까지 얼마의 요금을 내는가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등급은 좌석의 크기나 제공하는 음식의 종류가 다른 것에 있지 않았고, 역마차가 어려운 환경에 빠질 때 승객들이 어떻게 처신하는가에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비가 오는 날 바퀴가 진창인 웅덩이에 빠진다든지, 언덕배기가 너무 높아서 올라가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이때 1등석에 탄 승객들은 좌석 밑으로 내려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역마차가 어떤 위기를 만나더라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2등석 승객은 문제가 생길 때 역마차 밖으로 나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역마차 옆에서 그냥 걸어가면 됩니다. 하지만 3등석 손님들은 바퀴가 웅덩이에 빠져 꼼짝달싹 하지 않는다든지, 언덕배기에 올라가기 힘들 때라든지 하면, 일단 역마차에서 내려와 운전사와 함께 역마차를 힘을 다해 밀어서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육체적인 노동을 감수해야만 하는 승객들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 예수님이 지정해주시는 좌석은 다르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1등석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대접만 받는 좌석이 아니라 섬기고 희생하고, 아무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대접하는 그런 나라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1등석에 타시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겸손히 섬기십시오! 아무 보상도 칭찬도 기대도 하지 말고 초대받기가 어려운 소외된 이웃을 대접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이야말로 설국열차가 아닌 구원열차의 1등석 승객들이 다 되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아니 우리 교회가 잔치를 열고 손님들을 초대한다면 어떤 사람들을 초대해야만 할까요? 이런 질문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대접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선행을 대신 갚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14절). 아멘!
와서 내 식탁에 앉으라
이윤재목사 / 눅 14:1-6
일년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을 맞이했습니다.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지난 주 추석때고향에 갔는 데 옛날 시골 초등학교로 가는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코스모스가 만발해 있었습니다. 옛날 친구들과 함께 코스모스 길을 걷던 생각이 나서 한참을 걸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친구는 없지만 이제는 주님과 함께 걷는구나 생각하며 길을 걸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번 가을에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주님과 사마리아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걸으시면서 매주 한 가지씩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어떤 말씀을 주실지 기대가 됩니다.
오늘의 주제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옛날, 한국교회 초기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목사님이 먼 길을 떠나 하루종일 여행하다가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여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사람이 많아 한 사람이 한 방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에 들어가 보니까 방은 어둡고 거기 한 사람이 있는 데 인상이 아주 험악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경계하면서 반대쪽 벽을 바라보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서로 모르는 사이고 불안하기도 해서 서로 보따리를 가슴에 품고 잡니다. 밤새 뒤척이다가 잠도 제대로 못잤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서로 바라보고 통성명하는 데 아, 이게 웬일입니까? 한 사람은 목사였고 또 한 사람은 장로였습니다. 그것도 같은 지방의 목사, 장로였습니다. “내가 누구요. 당신은 누구입니까?”하고 물으면 될 것을 어두운 방에서 서로 오해하다가 불안한 하룻밤을 지낸 것입니다.
실제로 오해가 낳는 비극은 이보다 훨씬 큽니다. 사람끼리 오해하면 서로 풀면 됩니다. 목사가 도둑같고, 장로가 깡패같이 보이지만 날이 밝고 인사하다 보면 다 풀립니다. 문제는 신앙에 대한 오해입니다. 제가 어릴 때 저의 교향교회에 한 전도사님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부부인데도 같이 잠을 자지 않습니다. 각자 다른 방에서 잠을 잡니다. 이들이 서로 존중하고 아끼는 데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에게는 평생 자녀가 없습니다. 이 부부는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비록 부부관계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순결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깨끗하게 살겠다”. 또 자라면서 그런 교인도 보았습니다. 몸에 큰 병에 걸렸는 데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모든 병은 하나님이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병은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감사로 받아야지 병원에 가면 안된다” 이 믿음 때문에 그는 병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목회하면서 이상한 교인을 만났습니다. 시간도 있고 믿음도 있는 데 일부러 열심 안내는 교인입니다. 그저 주일 예배만 나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중독중에 가장 큰 중독이 종교중독입니다. 열심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중독이 되면 열심 자체를 위해 열심을 내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우상이 됩니다. 저는 자신을 우상으로 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열심을 안냅니다”. 상당히 어려운 말입니다.
가끔 그런 분들을 봅니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기 때문에 십일조 안한다“. ”교회는 300명 넘으면 기업이다. 그래서 나는 300명 미만 교회만 다닌다“.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데 문제는 그 이유가 충분히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받은 어떤 때 어떤 사람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생각이 자라 신념이 되고 확신이 됩니다. 그때부터 그는 그렇게 믿고 삽니다.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그것이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믿는대로 평생을 살아 갑니다. 문제는 그것이 오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성경적이 아니고 잘못된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이냐 묻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여행하는 중 어떤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눅14: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은 우리로 말하면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됩니다. 금요일 오후 3시가 되면 이스라엘의 모든 자동차가 멈춰서고 모든 관공서, 학교, 가게가 문을 닫습니다. 택시까지 끊어져 처음 이스라엘 간 사람은 당황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오후 6시부터 그 다음 날 오후 6시까지 섬처럼 조용합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았다면 그것은 분명 식사에의 초청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금요일 저녁, 가족이 다 함께 모여 안식일 식사를 합니다. 이때 가끔 외국인도 초청합니다. 저도 여러번 유대인 가정에서 안식일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1절 마지막 부분이 걸립니다.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엿보는 것은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엿보는 신앙은 남의 실수를 기다리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신앙의 초점이 자기를 성찰하는 데 있지 않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려는 데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말한대로 “매일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며 사는 사람은 남을 바라볼 틈이 없습니다”. 한번은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들이 프란치스코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사람들이 선생님을 성자라고 말합니다”. 프란치스코가 말했습니다. “그대들이 내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 것을 알 것이요”. 프란치스코는 매일 자기를 들여다 보느라 남을 들여다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엿보았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인데 안식일은 일하지 않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 집에 수종병 든 사람 하나가 있었습니다. 수종병이란 몸에 물이 차서 부어 오르는 병입니다. 그냥만 부어도 아픈 데 물이 차서 부었다면 얼마나 고생스럽겠습니까? 그 사람이 예수님이 그 집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과연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지 안 고치는지 그것을 엿본 것입니다. “오늘은 안식일이기 때문에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만일 예수가 병자를 고친다면 그것은 안식일을 어긴 것이다. 과연 예수는 안식일에 일하냐 그렇지 않느냐?”
여러분, 두말할 것이 없이 안식일은 일하지 않는 날입니다. 히브리어로 “안식일”을 “샤밧”이라고 하는 데 이 말은 "일을 그친다"는 말입니다. 구약은 적어도 12번이상이나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2장에 처음 나오고 출20장, 신5장에 계속 나옵니다. 어느 정도 일하지 말라고 말합니까? 출20:10,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그 집에 사는 사람뿐아니라 짐승들까지 일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출16장은 더 구체적입니다. “안식일에 먹을 것을 구하거나 만들지 말라”. 그래서 유대인은 지금도 안식일 전날 음식준비 합니다. 출35장은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안식일에는 아예 불도 피우지 말라”. 음식을 위한 불이든 난방을 위한 불이든 불을 피우는 것은 노동이기 때문입니다. 현관등도 안 켭니다. 이 정도로 일을 금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환자 잎에 있습니다. 더구나 그 환자는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를 고친다면 그것은 명백히 율법을 어긴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할 것인가? “병자를 고치면 안식일을 어기고 안 고치면 병자가 죽고“.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율법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먼저 율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구약에는 모두 613개의 율법이 나옵니다. 365가지는 하지 말아야 할 율법이고 248가지는 해야 할 율법입니다. 율법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삶의 규칙입니다. 이것은 “하라”, 이것은 “하지 말라”. 반드시 필요한 질서요 법규입니다. 그 질서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를 안전하게 행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법과 질서는 필요합니다. 신자의 삶에 어떤 질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대표적인 기독교시대가 청교도시대입니다. 청교도는 영국국교의 타락으로부터 교회의 순결을 지키고자 교인들을 철저히 단속했습니다. 그래서 1676년 로버트 바클레이라는 청교도 목회자는 신자는 예수님을 닮아 심각하고 사려깊어야 하며 웃음이나, 스포츠, 게임, 조롱, 농담은 일체 삼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때 신자가 노름하다 걸렸다든지 주일날 장사하다 발각되었다든지 남녀가 무분별하게 놀다 발각되면 큰 일 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웃고 즐기는 극장이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웃기 위해 살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것은 죄 때문에 통회하기 위해 산다”.
한국교회도 이 청교도에 영향을 받아 처음부터 매우 엄격한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1901년에 신앙생활의 7가지 기본 강령이 생겼습니다. 모든 신자가 지킬 7가지 교회 질서입니다. 첫째 예배출석을 철저히 할 것, 둘째 주일을 반드시 지킬 것, 셋째 부모에게 효도할 것, 넷째 일부일처제를 지킬 것, 다섯째 인가귀도 할 것, 여섯째 근면 성실할 것, 일곱째 금주 금연할 것, 당시 교회는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세례도 안주고 교회직분자가 이렇게 하면 파면까지 했습니다. 1914년에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절대 장로로 세우지 말라는 원칙도 공포했습니다. 매우 엄격한 신앙 질서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나쁜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이 흩으러지면서 한국교회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런 규제가 한국교회의 세속주의, 편의주의, 안일주의를 막아 냈습니다.
문제는 규례가 좋은 것이지만 절대적 규범으로 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인이어서 한번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절대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의 본질은 자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주장이 옳아서만이 아니라 자기가 주장했기 때문에 옳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죄는 본질에 있어서 자기 주장이고 은혜는 본질에 있어 자기 항복입니다. 은혜안에 산다는 것은 매일 부흥회에 참석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지 않고 상대화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늘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내 생각은 이래. 그러나 그저 내 생각일 뿐이야.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면 언제라도 바꿀 수 있어. 네 생각은 어때?”. 율법이 좋은 것이지만 가끔 그것이 우리를 부자유케 하는 것은 그것을 절대화할 때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교회를 담임하던 목사님이 은퇴하고 새 목사님이 왔습니다. 새 목사님은 젊고 패기가 있어 이런 저런 일들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전임 목사님이 하던 일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뜻있는 안수집사 몇 명이 은퇴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도 아시다 싶이 새로 오신 목사님이 너무 성급하게 일을 벌여 우리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심지어 목사님이 심혈을 기울여 오신 일도 중단시켰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교회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말씀드리기는 뭐 하고 목사님이 불러다 이야기해 주세요”. 그랬더니 이 은퇴 목사님이 한참 있다가 이렇게 한 마디 했습니다. “내 교회인가 뭘. 하나님의 교회지”. 그래도 안수집사들이 계속 이야기 하자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인가 뭘. 사람이지”
제가 이 이야기를 듣고 한참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안에 이런 저런 규칙도 있고 내규, 정관도 있고 심지어 성경을 출처로 한 많은 규율, 법규도 있지만 그것들이 모두 하나님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규율이나 질서가 너무 강조되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내 교회인가 뭘. 하나님의 교회지”. “내가 하나님인가 뭘. 사람이지”.
어떤 분이 지난 해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보수주의입니까? 진보주의입니까?” 아마 선거때 누구를 찍었나 엿보려고 던진 질문일 것입니다.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저는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진보주의자도 아닙니다”. 그랬더니 “그럼 뭡니까? 회색분자입니까?” 문제는 보수와 진보 이분법이 아니라 보수는 보수인데 무엇에 대해 보수이며 진보는 진보인데 무엇에 대하여 진보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분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성경에 대해서는 보수적입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해서는 진보적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한없이 보수적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서는 한없이 진보적입니다”. 문제는 보수냐 진보냐가 아니라 보수나 진보를 절대화하여 한 쪽으로 고착시키려고 하는 우리의 죄성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번 고착되면 바꾸려고 하지 않고 사람을 보수와 진보중 하나로 구분하여 그를 그 이상으로는 봐주지 않으려는 우리의 편협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보수적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 다른 사상을 배타할 만큼 보수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진보적일 수 있지만 우리를 지켜온 가치와 전통을 깡그리 무시할만큼 진보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둘로 나눠져 있고 우리 사회도 지금 심각하게 둘로 나눠져 있습니다. 보수는 보수를 절대화하고 진보는 진보를 이상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어떤 절대도 어떤 이상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의 절대시고 하나님만 우리의 이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입니까? 한 가지를 정한 다음 다시 바꾸지 않게. 우리가 하나님입니까? 우리가 가진 생각이 항상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 틀렸다고 믿게?”. 율법과 규율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내 식탁으로 오라
자, 이렇게 율법에 고착되어 있는 바리새인을 향한 주님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함께 식탁에 마주 앉는 것입니다. 식탁 이야기는 성경에 많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4복음서에 다 나오지만 누가복음에 가장 많습니다. 눅5장에서 예수님이 세리 레위 집에 식사합니다. 7장과 14장에서 바리새인들과 두 번 식사합니다. 10장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 식사하십니다. 19장에서 여리고의 삭개오의 집에서 식사하십니다. 마지막으로 24장에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 식사하십니다. 식사도 많이 하지만 하는 식사를 주제로 한 말씀도 많습니다. 11장에 밤중에 떡을 찾은 친구 이야기가 있습니다. 15장에서 돌아온 탕자를 환영하며 잔치를 베풉니다. 14장에서 어떤 주인이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합니다.
다시 1절을 보시겠습니까? 눅14: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이 그날 바리새인 집에 식사하러 가서 생긴 일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하러 갔습니다. 예수님은 식사하러 갔는 데 바리새인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예수님은 환대의 마음으로 갔는 데 바리새인은 냉대의 자세로 나왔습니다.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굳어진 바리새인을 향한 주님의 생각이 무엇입니까? “저는 지금 네가 하는 그 일에 목숨걸고 있구나. 그런데 나를 보아라.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 나를 보라. 내가 너희 집에 왔지 않니? 왜 나를 제쳐두고 다른 일을 하니?” 예수님은 단순히 바리새인과 식탁에 마주앉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신앙의 본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바로 무엇 무엇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이것 저젓 할 일이 많지만 지금 우리 앞에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핵심입니다. 율법도 말씀도 내규도 정관도 교회 제도도 질서도 그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안식일도 주일성수도 봉사도 목회도 예배도 찬양도 그 무엇도 예수님이 주인입니다. 지금 바리새인은 신앙의 중심인 예수님을 제쳐 놓고 다른 것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인 데 예수님없는 안식일 준수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없는 교회 내규, 예수님 없는 교회 질서, 예수님없는 교회 제도, 예수님없는 교회 직분, 예수님 없는 교회 봉사, 예수님없는 교회 예배, 예수님 없는 설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신앙의 중심이신 예수님이 앞에 있는 데 그를 제쳐 놓고 다른 무엇을 하면 그것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우리가 늘 속는 것이 이것입니다. 판교개발이 이루어진 지 몇 년 된 어느날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판교에 사람들이 입주하면 많은 사람들이 금방 올 줄로 알았습니다. 물론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그런 일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교인들의 복지부동을 탓하고 저의 무능을 탓했습니다. 어느날 새벽에 나왔는 데 하나님께 원망이 나왔습니다. “하나님, 아시죠? 제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제가 하루 하루 어떻게 사는지 아시죠? 저요. 오직 목회만 하고 있다고요. 남들 잘 가는 골프도 안하고 남들 자주 가는 휴가도 안하고 월요일날도 교회 붙어 있고 그렇게 사는 것 아시잖아요? 그런데 왜 저를 축복하시지 않습니까? 왜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게 못하십니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렇게 따짓듯 물었는 데 한참 있다가 제 마음속에서 누군가 이렇게 묻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언제나 나 하나로 만족하겠니?”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자주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한다고 했고 예수님이 전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찾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제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로 때로 행복했지만 때로 불행했습니다. 불행의 원인이 무엇인가 생각했더니 그 이유는 내가 예수님도 원하고 다른 것도 원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믿음이 왜 나쁜가요? 열심히 일하고 말씀대로 살고 딴 짓 안하고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고, 그러나 바리새인에게 없는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찾아 갔는 데,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제쳐놓고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기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영락없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무릎꿇고 부른 찬송이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입니다.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너 홀로 앉아서 울지만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오세요”. 늘 누르는 노래였지만 그날따라 새로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아니고는 아무 것도 안하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교회보다는 더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교회 상황과 상관없이 예수님을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내 식탁으로 오라.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칠 때 내게로 오라. 내게 와서 마시라. 내 식탁은 풍성하니 내게 와서 먹으라”.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에게 나가 그와 마주 앉아 도란 도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봉사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해서 예수님을 감동시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도 예수님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세요. 그와 함께 식탁에 마주 앉으세요”.
그들도 내 식탁으로 오게 하라
예수님이 식탁에 앉았을 때 한 사람이 집에 들어왔습니다. 수종병걸린 사람이었습니다. 몸에 물이 차서 온 몸이 붓고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 그가 예수님앞에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를 고치나 엿보고 있는 데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서더니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닿자 즉시 나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눅14:5,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최소한 사람은 소나 나귀보다는 존중받아야 합니다. 소나 나귀도 안식일에 건져내는 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사람이겠습니까?
우리 말 “안식”은 히브리어로 크게 세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먼저 “샤밧”입니다. 이 말은 일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을 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월요일은 다른 날에 비해 심장마비 발생율이 50%나 높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말에 너무 과음하고 과식하고 과로해서 몸을 피곤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몸을 쉬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첫째 안식입니다. 둘째는 “메누하”입니다. 이 말은 “평온함”, “기쁨”이란 뜻입니다. 시23:2절에 “쉴만한 물가”가 “메누하”로 되어 있습니다. 샤밧이 몸을 쉬는 것이라면 메누하는 영혼이 쉬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안식일을 시작할 때 마치 여왕을 맞이하듯 하나님께 나오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모든 가족이 정장을 하고 회당에 갑니다. 마치 여왕을 뵈옵든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것, 그래서 “메누하”, 기쁨을 맛보는 것,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안식입니다. 세 번째 안식이 있습니다. “샬롬”입니다. 이것을 “평화”로 번역하지만 더 줗은 번역은 “살림”입니다. “샬롬”은 살림입니다. 살리는 것입니다.
지금 같은 방에 두 안식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안식은 지키는 안식입니다. 예수님의 안식은 살리는 안식입니다. 수종병이든 손마른 자든, 귀신들린 자든,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고친 사람만, 4복음서에 7번 나옵니다. 안식은 살리는 것입니다. 신앙도 살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국 한 가지가 아니고 두 가지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종교입니다. 신앙은 대신 예수님 식탁으로 내가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살려 그앞에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교단 총회에서 우리 교회 곽준상 장로님이 전도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장로님이 평소 하시는 일은 교회 주변을 다니며 전도하는 일입니다. 특히 호반상가에 입점한 가게들에 집중적으로 전도했습니다. 새벽에는 기도하고 낮에는 전도하고, 새벽에는 자신이 예수님께 나아가고, 낮에는 다른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이것이 살리는 삶입니다. 모든 장로님들이 수고하지만 함장로님, 주일 아침 6시에 나와 교인을 영접하기 시작해서 오전 10시에는 입주하는 백현 4단지에 봉고차 몰고 가서 한 바뀌 돌고 사람들을 싣고 교회로 옵니다. 살리는 일입니다. 장로님의 일은 이런 일입니다.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살리는 일을 하고 있는가?” 백현 전도에 나선 20여명의 전도자들이 발에 물집이 생기도록 수고하고 있습니다. 살리는 일입니다. 이번에 우리가 계획한 새생명 축제도 살리는 일입니다. 단순한 행사가 아닙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과 접촉한 기회를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참여하고 초청해야 합니다.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과 있는 것
이성우목사(왜관감리교회) / 눅 14:1~6
한번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지도자의 집으로 떡을 잡수시러 들어 가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이 끝나는 토요일 저녁이면 다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 예식을 ‘합달라’라고 하는데, ‘합달라’라는 뜻은 ‘분리’라는 의미입니다. 이때 떡을 먹으며 향을 맡으며 시편 128편을 다 같이 암송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3)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6)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바로 이 합달라 예식에서 생긴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의 행동을 가만히 엿보고 있었습니다. 항상 안식일에 율법에 금하고 있는 병자들을 고치시고 계셨기에, 그 증거를 잡으려고 벼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할 증거를 눈이 시뻘겋게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마침 바리새인의 지도자의 집에는 수종 병, 곧 고창 병 환자가 있었습니다. 고창 병이란 팔다리가 부어오르고 살갗이 물러지는 불치병인데, 부도덕한 생활을 할 때 생기는 병이라고 합니다.
고창 병 환자가 바리새인의 집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떡을 얻어 먹으려고 왔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예수님이 계신다니 병 고침을 받으려고 결사적으로 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데려다 놓았을지도 모릅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당당하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시고 수종병 환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 없는 세 가지와 예수님 안에 있는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 안에 없는 것 세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 안에는 우연이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가셨다는 것은 사형수가 사형 집행관 집에 갔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칼을 갈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나서에 나오는 요나 이야기는 우연은 결코 이 땅에 없음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배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선원들이 배에 틀림없이 죄인이 있다고 제비를 뽑자고 하였습니다. 이방인들도 풍랑에도 뜻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요나가 뽑혔습니다.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바다로 던져지고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습니다. 이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큰 물고기는 3일 동안 요나를 뱃속에 품고 있었으나 소화시키지 못하고 니느웨 성에 토하고 말았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하나님의 계산된 섭리뿐이었습니다. 풍랑이라는 자연현상에도 우연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셔서 수종 병자를 고치신 것에는 하나님의 어떤 섭리가 들어 있는 것일까요? 안식일에 율법을 어기고 영혼을 사랑하여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시려는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율법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려는 계획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우연은 없습니다. 섭리만 있을 뿐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 안에는 원수가 없습니다. 당시 예수님에게 가장 큰 원수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강력한 집단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가장 핵심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예수님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 같은 바리새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잘못 가르치고 계신 것을 찾아내어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알고도 바리새인의 두령 집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원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다 사랑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해야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우연이라는 것이 없고, 예수님 안에는 원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고, 누구든지 구원시키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 안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수종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고침을 받았습니다. 안식일에는 병을 고치면 안 된다고 주장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물은 저수지에서 공급을 받고, 전기는 발전소에서 공급을 받듯이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며, 모든 문제의 해답은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 안에는 문제가 없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나 예수님 안에는 우연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원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문제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해결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님 안에 있는 세 가지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 안에는 표적이 있습니다. 수종 병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은 표적입니다.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어느 의사도 포기한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표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가복음 16장 17~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성경에서 가장 많은 표적은 병 고침의 표적입니다. 수종 병자가 예수님 안에서 나은 표적이 주어진 것처럼,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선포되는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런 표적들이 나타나며,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표적이 나타남으로 복음이 더 힘 있게 증거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놀라운 표적이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 안에는 침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에는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에게 두 번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러나 그들은 잠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담대하게 병을 고치신 후에 또 두 번째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랬더니 이들은 이번에도 역시 대답하지 못하고 또 침묵만 지켰습니다.
믿음은 행함이지 말이 아닙니다. 일이라는 것은 행동이지 입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는 침묵뿐이지 뭐라고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침묵 속에 자기 할 일을 꾸준히 해 나가는 사람의 종말은 웃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침묵이 있습니다. 말보다 행동입니다. 계획보다 실천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표적이 있고, 예수님 안에는 침묵이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종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불치 병자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하시고, 생명의 행동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두 번째 물으신 본문 5절 말씀은 우물에 빠져 죽어가는 아들이나 소에게는 어떤 법도 금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인 무디 목사님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5천만 원이 급히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 돈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쓸 돈이니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간절히 기도한 후에 예배 시간에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인이 봉투를 가지고 자꾸 강대상으로 올라오려고 하는데, 예배 위원들이 자꾸만 막는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이 모습을 보다가 사연이 있는 줄로 알고 그 여인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봉투를 무디 목사님 앞에 놓고 제 자리로 가서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상담 내용이거나 편지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서 봉투를 뜯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봉투 안에는 5천만 원짜리 수표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2천만 원이라고 썼다가 그 위에 다시 5천만 원이라고 쓴 가게 수표였습니다. 알고 보니 처음에는 왠지 무디 목사님에게 2천만 원을 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2천만 원이라고 썼다가 왠지 마음에 차지 않아서 5천만 원으로 고쳐 쓴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일성수에 감춰진 메시지
이한규목사 / 눅 14장 1-6절
< 안식일의 참된 의미 >
요새 한국 교회가 많이 어려워지고 있다. 교회의 초대형화, 세습, 싸움, 종말과 치유와 예언을 내세운 이단의 기승 등이 가장 큰 원인이다. 외적인 대박 성장을 목표로 한 각종 세미나도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쳤다. 준비되지 않은 목사 문제도 심각하다. 최근에 ‘장로교 OO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사람과 대화하는데 그는 가룟 유다가 누구인지도 잘 몰랐다. 성경이나 신학을 잘 모르는 그런 사람에게 목사 안수를 주면 한국 교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3일 전에 한 성도가 기독교선교연맹(C&MA)의 ‘전문인 목회자 연구과정(MSP)’에 대해 문의하면서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아는 한 여자 권사가 있는데 초졸 출신이지만 아주 신앙이 뜨거운데 신학 공부를 하고 싶어 해요.” 그때 내가 “MSP는 원칙적으로 대학원 이상 졸업한 사람만 받아요.”라고 하자 그는 “그 권사는 안 되겠네요.”라고 하면서 통화를 끝냈다.
누군가가 “초졸 출신은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될 수 없나요? 왜 사람을 차별해요?”라고 한다면 맞는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것이다. 뜨겁기만 하면 안 된다. 냉철한 머리와 준비된 지식도 필요하다. 성경과 신학을 잘 몰라서 영혼을 이상하게 이끌면 누가 책임지는가? 목사 안수를 신분 상승의 사다리로 여기고 대박 은사, 대박 치유, 대박 기적을 내세워 대박 신화를 쓰려는 사람을 잘 걸러내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더 어려워진다.
정당한 과정과 배움도 없이 목사가 되면 이단이나 이단의 먹잇감도 되기 쉽다. 사람은 짧은 인생을 살면서 많은 경험을 직접 할 수 없기에 공부란 간접경험을 통해 바른 지식을 쌓고 바른 원리를 배운다.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성령의 역사를 내세워 자기 위치를 단번에 높이려는 태도는 기복적이고 거짓된 태도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 목사가 되면 끊임없이 가짜 뉴스, 가짜 대박, 가짜 은사, 가짜 진리로 사람들을 미혹하면서 정당한 식성, 정당한 과정, 정당한 경쟁을 무시하고 교회의 가치를 망가뜨린다.
이단은 정당하게 진리와 진실과 실력으로 승부하기보다 기존 교회를 공격하는 그럴듯한 논리를 주로 앞세워 기존 교인을 미혹한다. “왜 교회는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는가? 왜 성경에 없는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가? 왜 성령의 은사와 기적을 무시하는가?” 그런 주장들로 교묘하게 접근하고 미혹해서 사람들의 재산과 노동력을 짧은 시간에 털어먹고 자기 세력을 불린다.
어떤 이단은 수요예배에 대해서도 따진다. “성경 어디에 수요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이 있느냐?” 물론 성경에 수요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은 없다. 그래도 고난과 핍박이 심했고 지금처럼 다양하게 말씀을 접할 매체가 없었던 시절에 주중에 하루를 정해 예배를 드리면서 생긴 전통까지 잘못된 것처럼 공격하는 것은 그 의도가 선하지 않다. 그런 식으로 이단은 성경을 내세워 기존 교회를 공격하고 기존 성도들을 미혹할 때가 많다.
안식일 논쟁도 마찬가지다. 오래 전 창조 시대의 안식일이 지금의 토요일이라는 증거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일주일의 하루를 안식일로 구별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토요일로 삼았고 기독교에서는 안식일을 예수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인 주일로 삼았다. 결국 구약 시대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신약 시대에 주일을 지키는 것은 본질적인 의미와 속성은 같다.
그런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외면하고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잘못되었고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자기들이 더 바른 진리의 길을 따른다고 하면서 기존 교인을 미혹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가? 그런 미혹에 넘어가지 말라. 중요한 것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알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안식일은 일주일의 한 날을 정해서 하나님을 정기적으로 예배하는 날로 삼는 것이다. 그 한 날을 교회에서는 신약 성경의 원리를 따라 주일을 안식하고 예배하는 날로 정한 것이다. 안식일의 중요한 가치는 ‘날짜 자체’에 있지 않고 ‘예배 자체’에 있다.
< 주일성수에 감춰진 메시지 >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도 예배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예배는 삶의 활력과 믿음의 능력을 증대시킨다. 예배의 회복은 인생과 가정의 회복을 낳고 사회와 국가의 회복도 낳는다. 결국 주일성수는 ‘쉬는 날(the rest day)’을 ‘최상의 날(the best day)’로 만드는 비결이다. 주일성수에 감춰진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1. 하나님을 사랑하라
왜 성도가 주일을 지키는가? 주일이란 날짜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왜 자녀에게 주일성수를 가르치는가?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필자는 가정에서 목회자처럼 보이려고 하지 않고 일반인처럼 살려고 했다. 특히 자녀에게 목회자의 자녀라는 굴레를 씌워 극기와 절제의 삶을 살도록 강요하지 않으려고 했다. 새벽기도나 성경읽기도 강요하지 않았고 “네가 목사 딸인데 어떻게 그렇게 행동하니?”라는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다만 단 한 가지 요구한 것이 주일성수였다.
얼마 전에 성적이 좋고 모범생이었던 한 여고생이 성적이 떨어진 것을 비관해서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가출했다. 그 학생을 CCTV에 찍힌 정보들을 취합한 경찰의 공조수사로 몇 백 킬로미터 떨어진 타도에서 며칠 만에 찾아내어 자살사이트를 통해 만난 사람과 동반자살을 꾀하기 직전에 극적으로 구했다. 그 딸의 어머니가 말했다. “이제까지는 좋은 일이 있는 것이 행복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아무 일도 없는 것이 행복이었음을 깨달았어요.”
부모는 성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필자는 아이들의 학교 성적표를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무관심해서가 아니었다. 성적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실제로 체감시키기 위해서였다. 그처럼 한국 부모들이 중시하는 성적조차 전혀 보지 않으면서 한 가지만 꼭 하라고 요구한 것이 바로 주일성수였다. 성적에 부모가 집착하면 자녀가 “부모님은 나보다 성적이 더 보셔.”라고 생각하면서 무언의 상처가 남는다. 반면에 주일성수를 꼭 하라고 하면 상처가 안 된다. “우리 부모님은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해서 그렇게 하셔.”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2.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이 공격할 틈을 엿보는 상황에서도 안식일에 수종병자를 데려다가 고쳐 보내셨다. 그 예수님의 행위와 교훈에는 안식일이 어떤 날인지에 대한 감춰진 의미가 있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람과 생명을 사랑하는 날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안식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면서 사랑의 교제도 하는 날이다. 그 안식일의 삶을 이웃 사랑으로 발전시켜 더 큰 안식을 예비하라. 남을 위해 불편함과 귀찮음을 기꺼이 감수함으로 생명력이 충만해지는 것이 궁극적인 안식이다.
육체적인 쉼을 통해서도 안식을 얻지만 힘들어하는 사람의 필요를 채워줄 때도 안식을 얻는다. 즉 하나님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나타내어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면 더 큰 안식을 누릴 수 있다. 또한 안식일에는 종이나 동물도 쉬게 했다. 안식일은 이웃 사랑은 물론 생명 사랑과 자연 사랑을 새롭게 일깨우는 날이기도 하다. 결국 안식일의 의미를 일상에서 잘 적용하려면 자연도 힘써 보호하려고 해야 한다. 환경 파괴는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것이고 자연에 내재된 하나님의 은총을 무시하는 것이며 결국 사람까지 파괴하는 것이다.
자연 사랑은 사람의 인격과 시대정신과 신앙심을 어느 정도 알려준다. 작은 들풀과 벌레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라. 자연은 하나님의 일반계시의 통로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때도 많다. 만물은 저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무언의 메아리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자연 사랑으로 발전해 나타난다. 타자에게 유익을 주면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도 유익을 얻는다. 자연을 해치지 말고 약자를 괴롭히지 말고 이웃 사랑을 힘써 실천하라. 그런 삶을 새롭게 다짐하는 날로 삼으라는 것이 주일성수의 또 다른 의미다.
3. 자기를 사랑하라
주일성수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도 있지만 “자기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도 있다. 자기를 사랑하려면 자기를 잘 관리해야 한다. 주일성수는 자기 관리를 위한 대표적인 삶이다. 자기 관리는 시간 관리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틈새 시간의 여백을 창조적으로 잘 관리하라. 삶의 여백이 삶을 다채롭고 아름답게 만든다. 특히 주일성수를 통해 그 빈틈과 여백에 하나님이 비집고 들어오시게 만들면 그 영혼은 더욱 견고해진다.
가끔 보면 어떤 부흥사는 설교를 2-3시간 한다. 조리도 없고 논리도 없이 사람을 웃게 만들고 감동을 많이 주는 스토리들을 자기 설교에 취해 죽 열거하니까 그렇게 시간이 많이 가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하는 것을 정확한 설교를 잘 준비하지 못한 수치로 여기기보다 설교 잘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긴 설교로 도식적인 웃음과 감동을 주는 것을 “은혜 받았다.”라고 표현한다면 그런 가벼운 은혜가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시간 관리와 말 관리는 여백의 삶을 위한 중요한 실천 덕목이다.
2-3시간 설교를 20-30분 설교로 줄여 똑같은 메시지와 감동을 주려는 땀과 기도의 흔적이 없다면 깊은 말씀을 통한 깊은 삶도 없게 된다. 마음의 빈틈에 하나님이 임할 공간을 제공하기보다 매번 쓰는 부흥 설교 레퍼토리대로 자기 생각과 스토리와 유머로 가득 채워놓는 것을 은혜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 오늘날 많은 교인들을 기복적이고 미성숙하게 만든 요인 중의 하나다. 매주일에 듣는 자기 담임목사의 순박한 설교가 잠깐 와서 전하는 부흥사의 화려하고 긴 설교보다 실제로는 영혼을 더 살찌운다. 쉴 틈과 여백도 없이 너무 아등바등 살지 말라.
여백과 침묵을 위한 삶의 공간을 힘써 마련하라. 그런 삶을 위한 가장 좋은 훈련과목이 주일성수다. 주일성수는 깊은 영적인 세계로의 여행과도 같다. 또한 세상적인 삶과 일과 생각과 말에서 잠깐 벗어나 거룩한 합죽이가 되는 통로다. 마음의 빈틈에 하나님을 모시는 주일성수를 중심으로 삶을 재편하고 단순화시키라. 주일성수를 통해 깊이 있는 삶을 추구하라. 그런 깊이 있는 삶을 통해 수준 높은 삶도 펼쳐지고 믿음과 행복도 견고해진다.
< 주일성수에 목숨을 걸라 >
시간을 잘 관리하고 요긴하게 쓰라. 사마천은 역적을 변호했다고 거세를 당했지만 한 맺힌 상태로 살지 않고 그 시간에 책을 썼다. 그것이 130권의 방대한 <사기>다. 존 번연은 12년의 옥고를 치르면서 불후의 명작인 <천로역정>을 썼다. 그런 작업이 자투리 시간을 선용해서 얻은 결과다. 부스러기 시간도 소중히 여겨 선용하는 탁월한 시간 관리자가 되라. 그런 시간 관리의 교과서와 같은 삶이 바로 주일성수다.
얼마 전에 둘째 딸과 대화할 때 남편감의 우선순위에 대해 이렇게 충고해주었다. 1순위는 욕과 반말과 상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 남자가 좋겠다고 했다. 2순위는 이간질과 거짓말과 험담을 하지 않고 약속을 잘 지키는 남자가 좋겠다고 했다. 3순위는 좋은 일에 돈을 쓸 줄 아는 후덕한 남자가 좋겠다고 했다. 4순위는 정서와 문화가 잘 맞는 남자가 좋겠다고 했다. 5순위는 외모와 행동에서 혐오감을 주지 않는 겸손한 남자가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장 특별한 우선순위로서 주일성수를 하는 남자가 최고라고 말해주었다.
주일성수는 모든 좋은 삶의 뿌리와도 같다. 인생에서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가? 작은 약속을 지키는 것은 사람의 싹수를 잘 보여준다. 성도에게 주일성수는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약속으로서 내일의 축복과 행복을 약속하는 예언적인 싹수다. 주일성수의 싹수가 노랗게 되지 않고 파랗게 되게 하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주일성수를 하지 못할 형편일 때도 돈에 지지 않고 과감히 주일성수를 앞세우려고 하는 것은 가장 복된 결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돈에 집착하지 않는 훈련을 다방면으로 힘써 하라. 특히 주일성수를 통해 돈을 극복하는 훈련을 꾸준히 하고 좋은 일에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조금씩 훈련하면 그 삶이 얼마나 윤택해지는가? 돈과 성공에 끌려 다니는 이유는 내면의 공허 때문인 경우가 많다. 내면이 든든하면 웬만한 세상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런 내면을 갖추려면 가끔 침묵도 하고 자연도 찾아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주일성수다.
물질에 너무 집착해서 주일성수도 어기고 나눔도 실천하지 못한다면 큰 불행이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려고 하되 주일을 범하거나 가정을 외면하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하지는 말라. 또한 가정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주일에 교회 대신 교외로 가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가 진정으로 필요함을 절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주일성수에 목숨을 걸라. 주일성수를 삶의 기초로 삼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면 인물 성도의 삶이 그렇게 멀지 않을 것이다.
말석에 앉으라!
이동휘목사(평강교회)/ 눅 14:1-11
1. 율법 전문가인 바리새인들의 우두머리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회당에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회당의식이 끝난 후, 큰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빈부에 관계없이 안식일에는 의무적으로 손님을 접대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 지도자가 안식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초대한 것은, 존경하는 마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율법적으로 어긋난 것이 없는가를 찾아내려는 데 혈안이 되어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율법을 범하는 가르침이나 행위가 있으면 고발조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없애려는 아주 불순한 동기로 예수 그리스도를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 마침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있었습니다. 수종병은 심장에 결함이나 신장이 병들었을 때 발병하는 병으로 얼굴, 팔 다리 등이 부어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질병입니다. 당시 율법사들은 이 병을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발병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 바리새인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기 위해 이 수종병 든 사람을 일부러 데려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세운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흉계를 이미 알고 계시는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너희들이 알고 있는 율법에 적법하냐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그들 율법사들과 바리새인 지도자는 자기들이 알고 있는 율법 지식에 따라 당연히 합당하지 않다고 대답했어야 옳았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가 아닌 이상,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은 그들이 적용하고자 하는 율법적 규례에 의하면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환자는 수종병으로 그 병은 당장 생명이 위태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자기들의 의중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따라서 자기들이 어떤 대답을 하든지 예수께서는 그 병자를 고쳐주리라는 결의를 감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악의를 정확하게 간파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그 수종병 든 사람을 고쳐서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다시 질문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서기 200년경, 랍비 예후다 하나시가 회당에서 많은 유대인들에 ‘토라’, 즉 모세 오경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 율법서를 이해하기 쉽고 기억하기 쉽게 요약 정리해서 만든 것이 ‘미쉬나’(Mishna)인데, 그 규정 중에는 안식일에 대해서는 온건한 규정도 있고 아주 엄격한 규정도 있습니다. 온건한 규정은 구덩이에 빠진 짐승을 구해낼 수 있도록 했지만, 엄격한 규정은 다만 구덩이에 꼴만을 넣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예수 당시에는 온건한 규정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편 바리새인 보다 훨씬 엄격했던 쿰란(Qumran)공동체에서는 구덩이에 빠진 사람만 구해낼 수 있고, 짐승은 구해낼 수 없도록 규정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일반적으로 채택된 미쉬나 규정에 의하면 우물에 빠진 짐승을 건지는 것이 허용되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이를 알고 계시는 예수께서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같은 질문은, 곤경에 처한 짐승을 구하면서 고통 가운데 빠진 사람을 치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사들과 바리새인 지도자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식사에 초대하고 그 자리에 병든 자 하나를 미끼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 범법자로 만들어 고발하려던 율법사와 바리새인 지도자의 악랄한 흉계가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 규례를 가지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발하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에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2:1-14 /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라며 안식일 규례를 범했다고 비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다윗이 자기 일행과 함께 배가 고팠을 때 한 일을 읽어 보지 못했느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차림빵을 그의 일행과 함께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 규정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그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가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단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나님의 집,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시며 안식일의 참된 뜻을 깨우치셨습니다. 이어 예수님이 그 곳을 떠나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를 가졌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면 끌어올리지 않겠느냐? 사람은 양보다 더욱 귀하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네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손을 펴자 완전히 회복되어 다른 손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을 나가서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고 의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는 안식일의 참된 뜻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2.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 율법이 사람을 위해 주어진 것이며, 그 안식일의 주인되시는 예수께서, 초대되어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들을 보셨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연회석은 디귿(ㄷ)자 형으로 배열되어 있고 상좌(上座)는 그 세 면의 중앙부분을 말합니다. 그리고 음식상에 앉는 순서가 손님들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정해져 있었습니다. 가장 귀한 손님은 대개 제일 나중에 도착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둘러보시니까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가운데 상석에 앉으려는 경쟁이 역력해 보였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상석, 윗자리와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랍비, 선생님이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두고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되 그들이 하는 행위, 즉 자기 자신을 높으려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23:1-12을 보겠습니다.
(마23:1-12)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께서는 이 초대받은 자리에 가셔서 상석을 둘러보니 과연 바리새인들이 경쟁적으로 상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7-11절입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점을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가장 엄격한 격식이 요구되는 결혼식의 잔치를 비유의 상황으로 설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매우 각별한 격식이 요구되는 혼인 잔치에서는 어디에서나 상석에 앉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례히 자기가 상석에 앉아야 한다고 여겨 먼저 상석을 차지했다가,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이 그 잔치에 참석하게 되는 때는 난처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혜서인 잠언에서도 자기를 낮추는 덕목,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잠25:6-7) (6)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7)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예수께서는 이같은 자기를 낮추라는 겸손을 바리새인들에게 대놓고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혼인잔치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하여 말씀하신 것은 그만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교만하고 완악한가를 깨우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보다는 더 중요한 사실은 바로 교만함이 얼마나 어리석은가이며 사람의 높고 낮음이 자신의 욕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었습니다. 인간의 높고 낮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이지, 인간의 자기 추구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높이려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려는 자는 높아지리라” 라는 문장이 ‘수동태’로 되어있다는 것은, 사람은 높아짐을 당하거나 낮아짐을 당할 수 있을 뿐 그것을 결정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편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 가장 아름다운 자세, 가장 지혜로운 자세가 바로 겸손임을 깨우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겸손한 마음을 본받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비로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빌2:1-12)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제1세기, 예수 당시에는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너무나 초라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학문도 집안 배경도 없는 목수의 아들이 그나마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저항없이 죽었으니 그를 믿는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미련하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 초라함, 그 약함, 그 땀과 눈물과 피, 홍포에 쌓인 패배자 같은 그 예수가 곧 자기를 비우신 하나님, 낮은 데로 내려오신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낮은 데로 내려오셨을 뿐만 아니라 종의 형체를 가지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죽기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기 위해 사람의 종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빌2:9) ...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1950년대 미국의 지성을 대표하던 라인흘드 니버 교수는 인간의 타락은 교만 때문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권력의 교만이요, 그 다음은 지식의 교만이요, 그리고 덕망의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은 권력을 잡기까지는 가장 약한 위치에서 자신의 당선을 호소하며 매달리다가도 일단 권력의 정상을 정복하고 나면 자신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마침내 그것은 살아 있는 우상이 되어 자신을 그 자리에 치켜세운 사람들 앞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는 “사다리 꼭대기에 다 올라간 사람은 아래만 내려다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내려다본다는 말입니다. 절대화된 권력은 모든 영광은 자신에게 돌리고, 모든 과오와 책임은 수하 사람에게 추궁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는 절대 무오의 하나님 처럼 처신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런 사람들은 권력이 절대화되면 될수록 더욱 신경질적이 되고 오만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민심을 외면하거나 민심과 동떨어진 판단과 행정을 자행하게 됩니다. 배운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 자신의 학설이나 지식에 대해 절대적 확신을 가진 나머지 다른 것에 대해서는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지식은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 살아 있는 지식이 되고 보다 진리에 가까운 지식이 될 수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식으로 인류에 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지식의 노예가 되거나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오만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덕이 높은 사람들은 분명히 고매하고 존경할 만한 인격자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들 스스로 자신을 완전한 존재로 착각할 때도 있습니다. 만사를 자기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볼 줄 알지만 자기 자신의 장단점은 예외로 여기거나 정당화하기 쉽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교만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게 하기 때문에 언제 폭발할는지 알 수 없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명 비평가들 중에는 로마 제국 멸망의 원인이 과도한 성장에 있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도한 성장은 질의 저하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은 마침내 껍데기만 치장하고 속이 빈 인간과 사회를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이 저주에 합당한 결말을 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소돔 성 멸망의 이유를 이렇게 지적하였습니다.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 행하였음이라.”(겔 16:49-50) 즉 경제적인 풍요와 환경의 태평함이 그들을 교만하게 하였고, (곧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하였고) 이 교만 때문에 유황불의 심판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상좌에 앉지 않고 말석에 앉는 영적인 겸손을 가졌다면 멸망을 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나라 백성이 영광에 이르고자 한다면 지도자들은 물론 국민 모두가 말석에 앉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군인의 표상이며 베트남전의 영웅 채명신 장군이 2016년 11월 25일 서거하여 서울 국립 현충원 사병 묘역에 안장 되었습니다. ‘장성묘역 대신 나를 파월 장병이 묻혀 있는 병사 묘역에 묻히기 원한다.’는 그의 유언에 따른 것입니다. 호화로운 장군묘역을 마다하고 전우들 옆에 잠들고 싶다고 사병묘역에 묻혀, 그는 죽어서도 깊은 감동을 국민들에게 주었습니다. 생전에 그에 대한 많은 일화(逸話)들이 있습니다. 채 장군은 초급 장교 시절부터 사병들에 대한 사랑이 유별하여 특히 대위 시절에는 장교 숙소를 마다하고 사병 숙소에서 병사들과 같이 생활했다고 합니다. 월남 전쟁 당시 이야기입니다. “월남전 당시 장병들이 김치를 먹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고국에서 온 김치 깡통을 따자 핏물이 나왔습니다. 기술이 없어서 녹이 슬었던 것입니다. 이때 채 장군이 ‘나는 여러분이 이걸 안 먹으면 2주 뒤 일본 김치가 도착할 것이고, 김치 값은 일본 사람 손에 간다.’ 고 했습니다. 그러자 장병들이 ‘핏물이라도 먹겠습니다. 고국의 부모형제에게 돈이 가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 자리에 채 장군도 울고 장병들도 다 울었다고 합니다. 왕이나 대통령, 그리고 장군들이 겸손하기는 극히 어려운 것입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자신을 낯추어 낮은 자들을 섬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필리핀의 막사이사이(Romon Magsaysay)는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가난에 지지 않고, 역경에 꺾인 일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나의 직책은 대통령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항상 이 나라의 한 병사다’ 라고 하면서 겸손하기만 했습니다. 실로 지도자는 겸손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아무리 경험이 많고 쌓인 지식과 삶의 지혜가 많을지라도 겸손해야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B.C.570년경, 바벨론 제국 느부갓네살이 왕이 하루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앞으로 교만하게 되면 들짐승처럼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단 4:25) (25)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이 꿈은 아무리 대제국 바벨론 왕이라도, 하나님께서 나라와 왕을 세우기도 하시고 파하기도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여 겸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꾼 후 정확히 1년이 지난 어느 날, 느부갓네살 왕이 왕궁 옥상을 거닐며, 이렇게 말합니다.
(단4:30) (30)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 말이 입에서 나오자마자 짐승처럼 네 발로 왕궁을 뛰쳐나가 들에서 짐승처럼 지내게 되었습니다. 다니엘4:31-33을 보겠습니다.
(단 4:31-33) (31) 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32)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33) 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이렇게 교만하지 말라는 경고를 잊어버리고 교만을 피우다 결국 짐승처럼 사는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만은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 벨사살 왕은 부왕이 교만하여 한 때 짐승처럼 들에서 살았던 것을 알고도 거룩한 성전의 기물들을 가지고 술잔치를 벌이며 우상을 숭배하고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고로 ... 그 날 밤에 죽임을 당했습니다.’(단5:22-31) 참으로 겸손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거나 지위가 높아지거나 하면 너무나 쉽게 교만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요(잠언15:33),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언16:18)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기 전에는 세상에 말석에 앉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 앞에 나아와 예수의 겸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심, 곧 십자가에 죽으심”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의미하며, 여기 “본체”는 단순한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을 비롯한 정체(identity) 전부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한 정체를 지니신 분이셨지만 죄의 종이 된 인간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이 말은 왕의 왕이신 분이 스스로 가장 천한 노예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역사에서 왕들이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왕복을 벗어버리고 평민의 옷으로 위장해서 감찰한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그가 직접 평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노예와 같이 되셔서 그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영광스러운 지위에 계속 계실 수 있으신 분이 죄의 노예 상태에서 신음하는 자들과 고통을 같이 나누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지극히 낮추셨습니다. 낮추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본받아야 하는 성도는 마땅히 예수님의 겸손을 따라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섬기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처럼 인생의 가장 밑바닥인 종의 형체를 입고 자기를 낮추었을 때 죽기까지 복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마음을 가졌을 때 비로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권력에 굴종하는 비굴함이 아니라, 진리에 복종하는 겸손함이며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동안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환난과 곤고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에 인내함으로써 예수님의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우리는 끝까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겸손함과 하나님의 뜻, 곧 진리에 복종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던” 예수처럼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생활로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는 영광스러운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공동체
눅 14장 1~24절 / 이수영목사
비교적 긴 오늘 본문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먼저 1-6절을 봅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식사하러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같이 있던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엿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앞에 수종병 든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 날이 안식일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 수종병 든 사람을 고쳐주실지 아닐지를 엿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종병이란 간이나 콩팥 같은 데가 좋지 않아서 세포조직 사이나 위나 늑막 같은 체강에 비정상적으로 물이 고이는 증세를 가리킵니다. 안식일에 식사하자고 예수님을 청한 자리에 예수님 앞에 수종병 든 사람이 왜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어쩌면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올무를 씌울 기회를 만들고자 일부러 꾸며놓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그 수종병 걸린 사람을 가리키며 고쳐주실 것인지를 물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말로 묻지는 않았어도 그때의 그들의 표정과 주위의 분위기는 완전히 "자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며 예수님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3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생각을 다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되물으시기를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하셨습니다. 절묘하게 공을 그들의 손에 넘기신 것입니다. 그들은 "합당하다"고 답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답하기도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합당하다"고 대답했다가는 율법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 될 것이고, "아니라"고 대답했다가는 몰인정한 사람들이 될 판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빠뜨리려고 파놓은 함정에 순식간에 자기들이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잠잠했다"고 본문은 전합니다. 그들이 가만 있자 예수님께서는 그 수종병 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보내시고는 또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7-11절을 봅니다. 우선 7절을 보면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했습니다. 거기에 초청된 사람들이 서로 상석에 앉으려 했나 봅니다. 그 광경을 보신 예수님께서 딱하게 여기시고 그런 자리에서 취할 지혜로운 처신에 관해서 한 마디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8-11절이 그 말씀입니다: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라. 그리하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 하는 것이 여기서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이어지는 12-14절에는 예수님께서 그 잔치자리를 베푼 주인에게 하신 전혀 다른 내용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다시 말하면,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베푸는 것은 좋은 일이나 가까운 사람들끼리 서로 주고받고 하는 것은 하나도 칭찬 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되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과 몸 불편한 이들을 불러 먹이는 것이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보상을 받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한 사람이 나서서 한 마디 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이렇게 화제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나라]에로 옮겨가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그 기회를 놓지지 않으시고 한 가지 비유로 하나님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16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비유에서 본래 큰 잔치에 청함을 받고도 오지 않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뒤에 데려온 사람들은 이방인들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들어있는 이 몇 가지 이야기들 사이에는 별다른 공통점이나 상호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신 일과, 사람들 많은 잔치자리에 가면 낮은 자리에 앉는 것이 지혜로운 처신이라는 말씀과,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먹이려거든 가난하거나 몸 불편한 이들을 부르는 것이 칭찬 받을 일이라는 교훈과, 본래 청함을 받은 자들은 오지 않고 뒤늦게 다른 모든 이들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하나님나라에 관한 비유말씀들은 각각 독립적인 이야기들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잇달아 하신 말씀들입니다. 자연히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무 생각 없이 이말 하셨다 저 말 하셨다 하신 것이 아니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용상 서로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 이야기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주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공동체]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 예수님의 이름 아래 모인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의 공동체는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할지에 관하여 오늘 본문의 모든 이야기는 각각 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면 주님의 공동체가 어떠해야 할지에 관하여 오늘 본문의 첫 번째 이야기는 무슨 가르침을 줍니까? 그 이야기 속에 중심사건은 뭐니 뭐니 해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수종병 걸린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신 일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능력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수종병 걸린 사람이 낫기를 바라는 사랑의 관심은 없이 예수님을 시험하려한 자들의 불순하고 악의적인 시도가 좌절된 것입니다. 문자적인 율법주의에 대해 주님의 사랑이 승리한 것입니다. 주님의 공동체는 이러한 공동체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없고 남의 행실을 엿보며 정죄할 기회만 찾는 율법주의가 판치는 공동체는 주님의 공동체라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공동체가 어떠해야 할지에 관하여 오늘 본문의 두 번째 이야기는 무슨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까?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먼저 낮은 자리에 앉으려 하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오르려다가 끝자리로 밀리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고, 낮은 자리를 택함으로써 오히려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러워지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언제나 가슴에 새기고 겸손함을 좇음으로써 아무도 상처받고 떠나가는 일이 없는 공동체가 주님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든지 말든지 겸손하게 맡겨진 일에 묵묵히 충성을 다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잘난 듯이 드러내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기를 알려서 빨리 권사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려고 애쓰는 공동체는 주님의 공동체답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의 공동체가 어떠해야 할지에 관하여 오늘 본문의 세 번째 이야기는 또 무슨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까? 그 이야기의 요점은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베푸는 것은 좋은 일이나 가까운 사람들끼리 서로 주고받고 하는 것은 하나도 칭찬 받을 일이 아니며, 되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과 몸 불편한 이들을 불러 먹이는 것이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보상을 받을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청하여 식사를 대접하는 바리새인 지도자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셨습니다. 자기와 가까운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돈 있는 사람들끼리만 만나고 서로 청하며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공동체는 주님의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몸 불편한 이들이 소외되거나 망각되지 않고 여기저기서 청함을 받으며 따뜻한 대접을 받는 공동체가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며 상 주실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새로 온 교우들이나 아는 이 별로 없는 교인들이 발붙이기 힘들만큼 냉냉하고 텃세 심한 교회는 주님의 공동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공동체가 어떠해야 할지에 관하여 오늘 본문의 네 번째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얻는 가르침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부르심에 만사를 제쳐놓고 즉각적으로 응답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최우선적인 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그 무엇보다 앞서며 모든 일 위에 궁극목적으로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 속에서 큰 잔치에 초청을 받고도 응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새로 산 밭을 살펴보는 일을 더 중히 여겼고, 다른 하나는 새로 산 소 다섯 겨리를 시험하러 가는 일을 더 중히 여겼으며, 또 다른 하나는 장가들어 얻은 아내를 즐겁게 하는 일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보다 다른 세상일들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주님의 공동체를 이루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동체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이들이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는 관심 없고 물질적인 일과 세상적인 행사와 인간적인 즐거움에만 열심을 내는 교회는 주님의 공동체라고 불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놓을 줄 알아야 할 터인데, 오히려 오만 가지 일 때문에 항상 하나님나라 일을 제쳐놓고 사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진정한 주님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믿음이 있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삶의 궁극목적으로 삼기만 하면 그 누구든 다 들어올 수 있고 모든 사람과 어울려 주님의 잔치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먼저 부르심을 받았든 뒤늦게 부르심을 받았든 막차로 부르심을 받았든 다 함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집 주인은 종에게 이르기를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했습니다. 또 그 종이 이르기를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하자 주인은 종에게 다시 명하기를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했습니다. 이렇게 어디에서 왔건, 신체적 여건이 어떠하건, 소유한 것이 많든 적든 잔치자리에 나아온 이들은 모두 주인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주님의 공동체에서는 그 구성원들의 출신지역이나 삶의 환경이나 학력의 고하나 능력의 다소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라는 사실 하나로 모두가 동등한 한 식구가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 교회는 과연 주님의 공동체라 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냉철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가 진정한 주님의 공동체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청함을 받은 자
눅 14장 1~24절 / 허남길목사
◈ 서 론 ◈
인간에 있어서 최고 기쁜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 주신 것이다.즉 복된소식, 기쁜소식 이런것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음을 주셨는데 그 복음을 그리스도라 한다.
1. 복음
그리스도 - 히브리어로 "메시라" 똑같은 말씀이다.그런데 그리스도라 이러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처음 듣는 사람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를 잘 모른다. 그리스도의 뜻은 본래 단어의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이런 뜻인데 의미상으로는 인간을 구원할 구주다. 구주라는 말은 "사람을 구원하실 분이시다" 이런 말이다.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할 존재이다. 왜그러냐 하면 모든 사람이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할 존재들이다. 모든 사람들이 괴로움과 고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평안을 얻어야할 존재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번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다. 거기에서 해방을 받아야 한다. 돈이 없어서 지식이 없어서 지식이 있으면 지식이 있어서 돈이 있어서 어쨌든 사람은 묶기에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사람은 자유함을 얻어야한다. 인간의 모든 문제가 다 좋은것만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해방 받는 길을 복음이라고 한다. 누굴 통해서 하셨냐 하면 하나님은 구주를 통해서 이 일을 하신줄 믿는다.
인간이 하나님께 지음 받을 때 영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다. 문제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영혼이 보이지 않음같이 인간의 근본문제는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이다. 보이는 문제 같으면 오히려 좋겠는데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꾸 착각하고 자꾸 속고 잊어버리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지만 매일 우리가 영혼이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나 말씀을 들을 때는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또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우리가 생명이 있다. 생명은 언뜻 보면 육신 같지만은 생명은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생명을 늘 잊어먹고 살고 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으나 잊어먹는다.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근본 문제도 돈이 없는 것 같고 건강이 안 좋은것 같고 정치를 못하는 것 같고 그렇게 보이지만은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영적인 문제고 눈이 보이지 않는다. 정치도 잘하고 제도도 바르게 고쳐나가면은 조금 나을 수도 있으나 아무리 제도를 바꾼다 할지라도 나라의 범죄는 일어나고 부정부패는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왜그러냐하면 사람의 중심이 바뀌지 않으면 제도로써는 고칠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도 부정부패가 일어나고 죄가 일어나고 고통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제도로써는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사람의 문제가 생명을 잃어버린 문제이다. 이 생명은 육신의 생명이 아니고 영적 생명을 잃은 것이다. 이 영적 생명은 하나님이 함께 하도록 지음 받았는데 하나님을 떠나 버린 것이다. 왜냐면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이 죄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인 죄를 말하는 것 아니고 근본 죄라 한다. 윤리적인, 도적질도 죄고 남 때리는 것도 죄고 사기치는 것도 죄다. 그러나 그것도 죄지만 그것보다 근본 죄가 있다. 그게 무슨 죄냐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죄다. 인간의 교만적인 죄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할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에 많은 짐승들도 있는데 짐승은 낳으면 스스로 살아가는 짐승도 있다. 그런데 사람만큼은 반드시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고 다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지 스스로는 살수가 없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만 되고 또 다른 사람과 더불어 서로 도와가고 서로 사랑하게 살도록 지은바 되었으므로 인간만큼은 낳아서 혼자 놓아두면 100% 다 죽는다. 살모사 같은 짐승은 나무에서 새끼를 놓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낳아놓으면 낳자마자 걸리는 다 물어 버린다. 씨앗도 뿌려놓으면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사람은 낳아놓으면 다 죽는다. 키워야 되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태어난 자도 없고 스스로 자라는 자도 없고 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인하는게 죄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께 하나님을 떠나려고 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 떠나 버리는 것이다. 왜 엡2:1 허물과 죄로 죽었다... 이 죽은 것을 다른 표현으로 마귀에게 종이 되었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이것이 저주다. 저주는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저주 이다. 복은 무엇이 복이냐 하면은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세 가지 문제가 아니고 한 가지인데 다른 표현인 것이다. 예)여러분께서 저를 부를실 때는 목사님이라고 부른다. 저하고 같이 사는 분은 자기야 라고 부른다. 자녀가 부를 때는 아빠라고 부른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떠난 것이 영적 죽음이다. 다른 방향속에서는 마귀는 종이 되어 버린 것이다. 또 다른 방향속에서는 이것이 저주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문제와 영적인 문제이니깐 돈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돈 많은 사람도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고 돈 없서도 가지고 있다. 지식이 많아도 가지고 있고 지식이 없어서도 가지고 있고 권력이 있어도 갖고 있고 권력이 없어서도 갖고 있고. 잘생겨도 갖고 있고 못생겨도 갖고 있다. 아픈 사람도 갖고 있고 건강한 사람도 같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이 문제가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한 명도 없다. 그런데 이 문제는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이 할 수가 없고 해결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은 하나님이 제일 잘 알고 하나님만 해결하실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낸 분을 우리는 그리스도라 한다. 구주라고 한다. 이 성격은 생명이 성경적이기 때문에 항상 해결하는 것이 어떻게 되었느냐면 첫째로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냐면은 1+1+1=3 이라고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는 성부하나님, 성령하나님, 성자 하나님 세분이 아니고 한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수학은 1+1=2이다 라고 한다. 생명은 한사람 남자+여자는 1이 되기도 하고 0도 되고 2도 된다. 3도 되고 6도 된다. 왜냐면은 아내와 남편 그리고 자식인 것이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것이고 수학은 생명이 없는 것에 대한 것이다. 그러면 세상에 살 때 생명이 없는 계산을 이렇게 하면 안된다. 돈 5만원 빌려주고 50만원 받으면 안되는 것이 때문이다. 생명 없는 것은 사기꾼에 해당하는 것이다.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 5000명이 먹고 12광주리 남은 것이 생명적인 계산에 해당하는 것이다. 홍해가 육지같이 갈라졌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이 생명적인 계산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데서 창조하셨다, 처녀가 아들을 낳았다 그러면 생명적인 계산법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 이유가 뭐냐하면은 머리가 계산하는 방향이 어디냐면은 수학적인 계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수학적인 계산법으로 믿을려고 하니깐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성경도 안 믿어지고 하나님도 안 믿어지고 일도 안 믿어지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했는데 망조가 드는 것이냐며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깐 자주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막 화가 나니깐 술을 마신다 왜 자기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잊어버리려고 술마시는데 깨어 나면 또 이해가 안되고 이해가 안되고. 술로서는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술로서 해결이 되지 않는데 길이 없기 때문에 술을 마시는 것이다. 또 폐인도 되어 버리는 것이다. 머리 좋은 사람이 이렇게 되는 것이다. 머리 나쁜 사람은 사람은 이런지 저건지 구별이 안되가지고 아무 때나 착하게 살면 되는가보다 하는 것이다. 머리 좋은 사람이 인생을 방황하는 것이다. 왜 그러냐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볼 때는 자꾸 말이 되지 않는 말만하니깐 보기 싫다고 한다. 한사람 아담이 죄를 다 지었다 이 말씀을 하니깐 말도 안된다고 한다. 한사람 죄지었으면 자기 혼자 죽지 왜 우리가 무슨 상관이냐... 그리고 한사람이 예수님이 승리했다. 그런데 다 믿으면 구원 받는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수 있냐 말이다. 한사람 승리했으면 된거지 왜 우리가 다 이기냐... 그러니깐 성경 말씀을 들을수록 말도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 자꾸만 어려워진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없는데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다. 그 것만 믿으면 뭐가 없냐 창조하신 하나님이 처녀에서 왜 아들을 못 낳느냐 딸도 낳게 하시는 분이신데... 처녀에서 아들을 낳는 것이 뭐가 문제인 것이냐.. 없는데서 창조하신 하나님이 죽은 자를 왜 못살리시겠느냐...모든 것도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홍해를 못 가르시겠느냐... 아무것도 없는데서 만드신 하나님이 왜 물고기2마리 보리떡5개로 못 먹이시겠느냐...이 관점(성경)으로 보면은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되어 있고 사실은 세상은 성경적으로 되어있는데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바르게 잘해야 된다. 롬5:17 한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 즉....생명안에서 왕노릇하리라....이것도 사실은 우리는 아멘하고 믿지만은 불신자가 볼때는 말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2. 세상에 지혜로운 자
그래서 복음의 성격은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냐고 하면은 세상적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에게는 숨겨두었다 이렇게 말씀 하셨다. 세상에 지혜로운 사람이다. 하나님께 지혜로운 사람은 나타내었는데 세상적으로 볼때는 우둔한자에게는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신다.; 우둔하다는 것을 보고 어린이라고 표현했다. 어린이에게 나타내시고...시8편에도 어린아이에게 나타냈다...마11:2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똑똑한 이 머리를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깐 이해를 못하겠다고 한다. 못 믿는다 말이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처녀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아멘 하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지혜로운 자다 라고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죽었는 자가 살아났는지 알게 뭐냐...그러니깐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고전1:18절-31절 (이하) 인간적인 머리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표적도 믿지 않는다. 다르다고만 한다. 또 헬라인들. 세상의 모든 철학은 어디냐하면 헬라에서 온 것이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 텔레스..전부다 헬라이다. 헬라인은 이렇게 자꾸 세상 지혜를 구한다. 구하는데 십자가의 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 안 맞다는 것이다. 또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니라...하나님의 지혜가 말씀이다. 이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문벌 좋은 자가 많고 지혜 있는 자가 많고 하는 말씀은 인간 본인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말이다. 높은 사람들은 복음이 믿어지지 않는다. 합당하지 않다. 그러니깐 그 사람, 자기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겸손한 자에게만 복음이 복음으로 들릴 줄 믿는다. 왜 복음의 성격이 이렇게 되어져야 될 이유가 무엇이냐면 눈에 안보이지요 생명적이지요 복음이 생명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지혜로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불신자들 볼 때는 우리는 모자라는 사람으로 본다. 왜냐면은 욕해도 가만있고 돈 벌어서 헌금으로 받치고 날씨 좋은 날도 예배드리고 처녀가 아들 낳았다고 하는데 아멘 이라고 하고 죽었다고 살아났다고 하면 힘내서 살고 천국간다 하고 그러기 때문이다. 본문을 보자.
3. 본문
1)1-6절
고창병은 창자에 병이 든 것을 말한다. 1-6절까지 말씀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로 믿고 구주로 믿고 영접하고 그 분 앞에 살아가는 사람이냐하면은 이런 율법적인 사람은 안된다.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주일은 하나님께 지켜야 한다. 그러나 주일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말씀에 은혜받고 예배를 드리므로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분 가정과 삶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일을 율법으로 드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오늘 지키지 말라가 아니고 분명히 지켜야 되지만 안식일을 통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멸망시키고 하니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맘속에는 생명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 사람 중심, 복음 적인 사람이여야 복음이 들어간다.
2) 7-11절
잔치 집에 초청을 받았는데 높은 자여야 한다. 나중에 보니깐 더 놓은 사람이 왔다. 가서 높은 사람이 왔으니깐 내려오너라. 내려 와서 말석에 앉혀 놨다.... 이게 무슨 말씀이냐면은 복음은 높아지고 자 하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교만하고 높아지려는 사람은 들리지 아니하고 겸손한 사람에게만 들린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는 것이다. 높아지려는 생각을 가지면 사단에게 속는 것이다. 세상 사람은 높아지려고 난리다. 높아질수록 어려운 것인데 말이다. 예) 대통령 180억사건... 예수 믿는 자가 자꾸 높아지려고 하면 불신자 보기에는 예수 믿는 자가 매력이 없게 보인다. 성경은 낮아지고 겸손한 자가 복이 있다 하였다. 바리새인, 율법사들이 자기들은 굉장히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인데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한다. 그 주님의 말씀을 모른다. 항상 높아지려고만 한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은 섬기는 자, 낮아지는 자가 되어야 된다. 오래 교회 다닐수록 낮아지고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하며 직분을 자랑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직분이 높을수록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낮아질 때 축복이 된다. 직분을 통해서 교만해지면 그것이 축복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 때문에 실패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만한자에게는 복음이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신다.
3) 12-16절
어떤 사람에게는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냐 하면은 항상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사람이다. 내가 이렇게 대접하면 저 사람은 나에게 뭘 줄까 하는 사람, 내가 이렇게 물질을 쓰면 저 사람이 나에게 이걸 주지 않겠냐.. 이런것들. 아부파, 계산파. 이런 물직적이나 세상적인 계산을 이득을 얻기 위해서 초청하고 사주고 하는 사람은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다. 얼마나 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옳지않느가. 초청을 하게 된다면 초청하는 자체로만 감사하라. 대접하는 자체가 귀중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몇 번 대접하다가 안주니깐 욕하고 다닌다. 그것이 왜 그렇냐면은 머리가 나도 해줬으니깐 이만 해줘야 되지 않느냐 하는 그런 말이다. 여기서 다툼과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장사인 것이다. 절대 사랑이 아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마찬가지 인 것이다. 댓가를 바라는 중심은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헌신을 하든지 선물을 하든지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베풀던지 어떤 것도 요구하지 말고 그 사랑자체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이어야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 가슴속에 뿌려지는 것이다. 모든 것을 계산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형제도 친구도..계산이 맞지 않으면 버리는 것이다. 그걸 보고 의리 없다고 한다. 하나님 앞에 정말 옳은 사람은 계산적인 사람이 되어지지 말아야 한다. 교회 일도 꼭 계산해야 되는 사람도 있다. 계산하면 딱 맞는데 이것이 딱 맞다. 하나님 편에서는 너무도 안 맞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 일은 계산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구원을 받는 것이 계산으로 된 일이 있는가. 계산이 되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기도하고 우리가 힘을 합치면 하나님께서 해 나가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머리가 바꿔져야 하는 것이다. 바꿔져야만 복음이 믿어지고 그것이 사실이고 그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 율법사가 바리새인들이 항상 계산적이다. 벗어나야만 복이 있는 사람이다.
4) 17-24절
초청을 했다 그러나 오지 않았다. 무슨 뜻이냐 하면은 구원에 대한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복음에 합당치 않는 것이다. 예수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나라 천국 가는 이걸 별로 귀중히 여기지 않는다. 예수믿고 복음 전하라하면 나는 바빠서...라고 말한다.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이냐면 바울이 말하기를.... 질그릇에 보화를 담는 것 같다 했다. 사람들은 예배 드리는 가치를 모르면 다음주에 예배드리지 한다. 예배시간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이 예배를 받으시고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가 관계된 것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인자하시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고 복되게 하고 가장 귀중한 시간이라는 걸 깨닫는 사람은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쁨과 감사함으로 즐거움으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왜 그렇지 못하느냐 참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고 육신적인 가치에 답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으면 다 어디 갔다고 하는 것이다. 초청해서 온다는 사람 없다. 확 돌아온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런 사람 많이 만나도 실망하지 말자. 육신적으로 말을 들으면 안되는 것이다. 나는 부족하다 하는 사람, 나는 능력이 없다, 나는 자격이 없다, 나는 구원 받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이 초청이 될 것이다. 나는 능력이 없다, 자격없다 하는 사람이 와서 구원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서 복음도 전하고 초청도 하는데 오지 않는다고 이상하게 생각지말고 당연하게 여기자. 오겠다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을 불러서 복음을 듣게 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복음이 증거 되냐면은 어떤 것보다 예수믿고 구원받는 것 같이 진리를 아는 가치가 우리 생명보다 귀다하다는 사람은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다. 돈이 최고다 하는 사람은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이 없다. 진짜 가치있는 것을 귀중하게 여길줄 알아야 한다. 육신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중심이 되면 육신적인 것만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는 복음이 합당치 않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된자라고 했냐면은 아래와 같다.
4. 마5장
마5장의 이런 자의 중심이 복이고 오늘과 같은 본문의 사람에게는 복음이 받아지지 않는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합당하다.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긍휼히 여기는자(사랑받고 사랑하길 원하는자), 마음이 청결한 자(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며),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일커름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은 자꾸 시기 시켜서 이간시키고 이런 사람은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 우리가 화평되고 사람도 화평이 되고 영적인 화평을 원하는 자에게 복음이 증거된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 왜냐면은 복음의 성격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복음의 성격이 생명이고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누구에게...그래서 처녀가 아들을 낳았다 이 말이 사실로 증거되면 우리 인간의 문제가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믿고 바라는 자는 심령이 가난한자가 되는 것이다. 율법적인 사고를 가지지 말고 복음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 그러는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다. 자꾸만 높은 사람이 아닌 낮은 사람, 대가를 계산하는 자, 사랑으로 섬기는자, 그리고 겸손한 자가 복음이 합당한 것이다.
구원의 가치를 알고 온유한 자 겸손한자, 심령이 가난한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앎에서 삶으로 나아가라
눅 14장 1~6절 / 오정호목사
믿음의 가족여러분!
지난 한가족 수련회를 통하여 받은 도전은 무엇입니까? 믿음생활의 요체는 믿음과 인격의 변화입니다. 변화없는 신앙생활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믿는 우리는 생각과 삶의 형태가 날로 새로워지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과거의 삶을 반복하거나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불투명할지라도 믿음의 발걸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변화의 은혜와 축복을 유보하지 말고 변화의 당사자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아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앎에서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이는 "예수믿으며"에서 "예수따르며"로 나아간다고 표현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은 관계(關係/Relationship)속에서 성장합니다. 본문은 세가지 관계 즉 주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성숙은 그 신앙 인격을 말해 줍니다. 이웃과의 관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테스트하는 시금석(試金石)이 됩니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신에 대한 바른 인식은 주님의 진리를 삶으로 옮겨내는 즐거움을 누리게 해줍니다. 앎에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 세 가지 관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변화되어야 합니까?
첫째, 앎에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1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頭領)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1절a). 예수님을 초대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의 두령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그는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유력한 지도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것이 소문나면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그는 담대하게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했습니다. 그는 종교적인 관심이 대단한 사람이요, 자기의 창고를 열어서 나눌 줄 아는 윤리적인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주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종교적이었지만 예수님을 경배하거나 예배하지는 않았습니다. 육신의 떡에는 관심이 많고 자신의 떡을 나눌 줄도 알았지만 생명의 떡, 영적인 양식에 대해서는 둔감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물리적인 공간인 자신의 집에는 초청 했지만 그의 심령과 인격 속에 예수님을 모시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남에게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있고 윤리적인 인간으로 칭찬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리를 넘어서서 주님과의 관계에서 주님을 경배하고, 삶의 왕좌에 주님을 모시는 은혜와 축복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바리새인 지도자는 주님을 자기 집에 초청했지만 실상은 주님을 자신의 문밖에 세워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6:29). 어떤 성도들은 대인관계, 구제사업, 대(對)사회적인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관심을 계속 발전시키시기에 앞서 먼저 주님과의 관계가 명확해야합니다. 주님의 일은 주님을 잘 믿음에 있습니다.
이 시대에 바람직한 변화가 없는 것은 진실로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생명의 구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문밖에 세워두면서도 윤리적인 우월성을 앞세워 하나님의 호의를 기대하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진 사람이 많습니다. 주님은 주님을 아는 지식이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는 삶으로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과거에 믿었던 주님과의 관계가 날마다 새롭게(refresh) 업그레이드(upgrade)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 예수님을 역동성 있게 믿는 삶의 관계를 형성하길 원하십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예수를 잘 믿는 겁니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은 지식의 영역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에 의식적으로 계획적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주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앎에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2~4절).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2절). 고창병(蠱脹病, dropsy)은 몸에 물이 차서 얼굴과 손발이 붓는 일종의 수종병(水腫病)을 의미합니다. 자신과 그 가족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였겠습니까? 그 병자는 가족들에게 오랜 버림을 받아 밥 한 그릇 얻어먹을 요량으로 혹은 예수님께 고침 받을 희망으로 찾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을 궁지에 빠뜨리려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공모하에(누가복음 13장 참고) 그 시간에 나타났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 병자가 잔치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안식일에 병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3절). 마음의 수군거림을 아신 주님은 이일이 율법에 합당한지를 질문합니다. 주님의 도전적인 질문에 대해서 그들은 침묵하였습니다. "저희가 잠잠하거늘"(4절a). 지식인이 가지는 맹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불리할 때는 가만히 침묵합니다. 지도자는 타인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열고 긍휼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육신이 연약한 자들,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 지식이 부족한 자들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길 원하십니다.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줄 지식이 없느니라"(잠언 29:7).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언 14:31). 신앙은 대인관계에서 표현됩니다. 참된 신앙인에게는 연약한 자, 부족한 자, 아픈 자들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 그 형편을 이해하려고 고민하는 거룩한 몸부림이 있습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바리새인 지도자는 결코 아픈 사람에 대한 배려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주셨을 때 그를 포함한 무리들이 아무 말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6절). 때에 맞지 않는 침묵은 참된 지도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18년 동안 귀신들린 병자를 고쳐주셨을 때도 동일하였습니다(누가복음 13:10~17). 18년 동안 귀신들려 몸이 꼬부라져있던 사람을 자유케 하신 주님을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하여 분내어 정죄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바라볼 때 인간의 죄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웃에 대한 존재와 한계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표준에 맞는 사람만 기뻐하지 말고, 그 표준에 미달되는 사람도 넉넉한 마음으로 품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마음의 장벽이 무너져야 됩니다. 우리가 힘이 있을 때 격려하고 베풀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 서로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셋째, 앎에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4~6절).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로 평생 변화 받아야 될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들은 비겁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잠잠하거늘"(4절a).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6절). 우리는 속에 있는 것들을 숨겨놓지 말고 이야기(clear communication)해야 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갈라디아서 6:7a). 어떤 자들은 학력, 소유, 외모, 타인의 평가, 과거의 성공 때문에 자기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본모습에 가면을 씁니다. 실상 가면을 쓰지 않는 인생은 아무도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때는 자기자신의 본 모습을 내어놓고, 늘 은혜가 필요한 사람으로 자기를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이 주목하는 바리새인은 주님께로부터 결코 배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다면 개인적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가면 쓴 모습을 고백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침묵하였고 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삶의 변화와 성숙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은혜받을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것은 인생의 끝이 아니고 변화의 출발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출발점이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날까지 우리는 계속 변화되어야합니다. 우리는 앎의 기쁨 뿐 아니라 변화의 기쁨의 당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온전히 순종하기에 힘씁시다. 이웃에 대한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존재와 한계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평생 변화 받아야 될 대상으로 인식하고 날마다 주님앞에 나아가 주님께 배웁시다. 우리의 삶과 가정의 중심에 오셔서 우리를 친히 다스리시고 은혜 베푸시는 주님과의 막힘 없는 교제를 통해 앎에서 삶으로 나아갑시다. 예수 믿는 연륜에 따라 변화의 기쁨도 체험합시다.
이런 복을 주소서
이런 복을 주소서
머리의 지식이
손발의 봉사로 연결되는 복을 주소서
너무도 굳어있는 어리석은자의 정신을 부드럽게 하사
지식의 거듭남이 손발의 변화로 열매맺게 하소서
이런 복을 주소서
유아독존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동행하는 따뜻한 심장을 주소서
정죄의 칼날을 갈기보다
형제의 눈물을 헤아릴 줄 아는
따뜻한 인간성을 회복시키소서
이런 복을 주소서
자신을 바라볼 때
세상의 누추한 잣대를 들이대거나
자아의 때묻은 탐욕을 덧씌우지 않게 하소서
제 삼의 관점
우리주 예수님의 은총에 아멘하는
순전한 마음 주소서
이런 복을 주소서
주님주신 모든 것을 은혜로 알아
두렵고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는
믿음의 복을 주소서.
아는 것을 삶에 적용합시다
눅 14장 1~6절 / 최창훈목사
여러분! 우리가 믿음생활을 통해 은혜를 경험하며 도전을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생활의 요체는 믿음과 인격의 변화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는 생각과 삶의 형태가 날로 새로워지는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삶을 반복하거나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가 불투명할지라도 믿음의 발걸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예수 믿으며”에서 “예수 따르며”로 나아간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은 관계 속에서 성장합니다.
본문은 세 가지 관계 즉 주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 성숙은 그 신앙 인격을 말해 주고, 이웃과의 관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테스트하는 시금석이 되고,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신에 대한 바른 인식은 주님의 진리를 삶으로 옮겨내는 즐거움을 누리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아는 것에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 세 가지 관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1.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1절을 보면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의 두령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그는 유력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청한 것이 소문나면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담대하게 예수님을 초청한 것을 보면, 그는 종교적인 관심이 대단한 사람이요, 자기의 창고를 열어서 나눌 줄 아는 윤리적인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주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종교적이었지만 예수님을 경배하거나 예배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육신의 떡에는 관심이 많고 자신의 떡을 나눌 줄도 알았지만, 생명의 떡, 영적인 양식에 대해서는 둔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물리적인 공간인 자신의 집에는 초청했지만 그의 심령과 인격 속에는 예수님을 모시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들 역시 사회적으로 남에게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있고 윤리적인 인간으로 칭찬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리를 넘어서서 주님과의 관계에서 주님을 경배하고, 삶의 왕좌에 주님을 모시는 은혜와 축복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 바리새인 지도자는 주님을 자기 집에 초청했지만 실상은 주님을 자신의 문밖에 세워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요6:29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대인관계, 구제사업 등, 사회적인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관심을 계속 발전시키시기에 앞서 먼저 주님과의 관계가 명확해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잘 믿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바람직한 변화가 없는 것은 진실로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생명의 구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문밖에 세워두면서도 윤리적인 우월성을 앞세워 하나님의 호의를 기대하는 자가당착에 빠진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님을 아는 지식이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는 삶으로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과거에 믿었던 주님과의 관계가 날마다 새롭게 업그레이드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 예수님을 역동성 있게 믿는 삶의 관계를 형성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본질은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를 잘 믿는 것은 지식의 영역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에 의식적으로 계획적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주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2절을 보면 “주의 앞에 고창 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고창 병이란 몸에 물이 차서 얼굴과 손발이 붓는 일종의 수종 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자신과 그 가족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였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병자는 가족들에게 오랜 버림을 받아 밥 한 그릇 얻어먹을 요량으로 혹은 예수님께 고침 받을 희망으로 찾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을 궁지에 빠뜨리려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공모하에 그 시간에 나타났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 병자가 잔치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3절을 보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아신 주님은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고 이 일이 율법에 합당한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주님의 도전적인 질문에 대해서 그들은 “잠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식인이 가지는 맹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에게 불리할 때는 가만히 침묵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타인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열고 긍휼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육신이 연약한 자들,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 지식이 부족한 자들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시기를 원하십니다.
잠 29:7절에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줄 지식이 없느니라”고 했고, 잠14:31절에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대인관계에서 표현됩니다.
참된 신앙인에게는 연약한 자, 부족한 자, 아픈 자들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 그 형편을 이해하려고 고민하는 거룩한 몸부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바리새인 지도자는 결코 아픈 사람에 대한 배려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주셨을 때 “그를 포함한 그곳에 모인 무리들이 아무 말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때에 맞지 않는 침묵은 참된 지도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18년 동안 귀신들린 병자를 고쳐주셨을 때도 동일하였습니다.
18년 동안 귀신들려 몸이 꼬부라져있던 사람을 자유케 하신 주님을 회당장은 오히려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하여 분 내어 정죄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바라볼 때 인간의 죄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웃에 대한 존재와 한계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표준에 맞는 사람만 기뻐하지 말고, 그 표준에 미달되는 사람도 넉넉한 마음으로 품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마음의 장벽이 무너져야 됩니다.
우리가 힘이 있을 때, 격려하고 베풀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 서로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3.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로 평생 변화 받아야 될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들은 비겁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4절을 보면 “저희가 잠잠하거늘”라고 했고, 6절을 보면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속에 있는 것들을 숨겨놓지 말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갈6:7절을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고 했습니다.
어떤 자들은 학력, 소유, 외모, 타인의 평가, 과거의 성공 때문에 자기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본모습에 가면을 씁니다.
실상 가면을 쓰지 않는 인생은 아무도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는 자기자신의 본 모습을 내어놓고, 늘 은혜가 필요한 사람으로 자기를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이 주목하는 바리새인은 주님께로부터 결코 배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다면 개인적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가면 쓴 모습을 고백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침묵하였고 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삶의 변화와 성숙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은혜 받을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것은 인생의 끝이 아니고 변화의 출발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출발점이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날까지 우리는 계속 변화되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는 것에 대한 기쁨뿐 아니라 변화의 기쁨의 당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온전히 순종하기에 힘씁시다.
이웃에 대한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존재와 한계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평생 변화 받아야 될 대상으로 인식하고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께 배웁시다.
우리의 삶과 가정의 중심에 오셔서 우리를 친히 다스리시고 은혜 베푸시는 주님과의 막힘 없는 교제를 통해 앎에서 삶으로 나아갑시다.
그래서 예수 믿는 연륜에 따라 변화의 기쁨을 경험하시는 고현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신앙
눅 14:1-6 / 최종혁목사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것, 보는 것,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지는 것을 중요시 합니다. 아침에 나올 때 시간이 없으면 밥을 포기하시나요, 씻는 것을 포기하시나요? 대부분 밥을 포기하실 것입니다. 집은 천막에 살아도 차는 좋은 것을 타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겉모습을 가꾸는 데 들이는 시간의 절반만 우리의 보이지 않는 부분(장기)을 신경쓴다면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지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드러날 때 정말 큰 문제가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생활,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한 신앙생활이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각으로 하나님도 나를 그렇게 보실 거라고 생각하는 착각이 내 신앙생활에 스며든다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그런 것을 형식주의, 율법주의신앙이라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열매(봉사, 섬김)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알맹이가 빠져 있는 열매입니다. 알맹이는 없고 겉만 그럴듯하게 치장하고 중요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은 감추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깨끗한 것으로 모든 것을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만나게 될 본문의 바리새인들을 통해서 혹시 우리에게 그런 면이 있지 않은지 함께 생각해보고 경고와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Ⅰ. 예수님의 상황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1절)
“안식일에” – 시간
다시 한 번 안식일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가르치기도 하시고, 귀신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하시는 그런 일들을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래서 안식일을 두고 예수님께서 그들과 논쟁하는 장면들이 복음서에 종종 등장합니다(눅 6, 13장).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두고 그런 논쟁이 벌어진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고 유대인들은 그 잘못된 생각, 혹은 잘못된 전통(그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을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안식일이 중요했던 이유 중 하나는, 안식일을 지키는 모습이 그들의 정체성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10계명을 생각해 보면, 부모를 공경하거나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 탐하지 않는 것은 일반적인 도덕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것, 우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당시의 다신론적인 문화를 생각해보면 좀 특별한 부분이지만 아주 유별나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다른 종교에서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들의 식사 문화가 이방과는 전혀 달라서 유대인인 것이 분명히 드러났던 것처럼,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그들에게는 유대인인 것을 드러내는 분명한 표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다른 날과 구분하여 지킬 것을 말씀하셨고, 이 날은 ‘하나님을 위한’ 날이며 또한 사람을 위한 날이었습니다. 바쁜 일상의 일을 내려놓고 쉬면서 창조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왜’ 안식일을 지키는지는 잊어버리고 ‘어떻게’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지에만 몰두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동기보다는 보이는 행위에 중점을 둔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막 2:27). 평안히 쉬면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기보다, 혹시나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이방인들과는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눅 6:5), 이런 잘못된 생각, 전통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들과 안식일에 대해서 논쟁하시며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이고, 무엇이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인지 가르치셨습니다.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 장소
산헤드린의 멤버로서 바리새인이면서 지도자였을 수도 있고, 바리새인 중에서 지도자격인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특별히 바리새인 중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었던 사람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 집에 가신 이유는 떡을 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안식일에는 요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전날에 먹을 음식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점심일수도 있고 저녁일 수도 있습니다. 점심에 주로 떡(빵)을 먹은 것을 생각하면 점심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 다르게 말하면, 바리새인의 소굴에 식사 교제를 하러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전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선포하신 심판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결국 그들을 날개 아래로 부르시는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셨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영적 소경으로서 유대인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던 지도자들, 바리새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가신 것입니다.
누가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이렇게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서 식사를 하러 가신 경우가 이미 두 번 기록이 되었고,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이번 식사에 대한 말씀은 24절까지 이어집니다. 이전의 식사 분위기는 화기애애하지 않았고 이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누가는 여기서 ‘엿보고 있더라’는 말로서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부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을 감시하며 고소할 거리를 찾고 있었다.
오늘 본문과 유사한 사건이 6장 6~11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치실 때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고 있었고(6:7),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무엇이 ‘옳으냐’고 물으시며 병자를 고치시자 그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눅 6:11)”
11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에게 화를 선포하셨을 때의 그들의 반응은 이러합니다. “[53]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눅 11:53-54)”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는 표현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잡기 위해서 매복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몰래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결국 영접한 바리새인도 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어떻게든 책잡아 무너뜨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유심히 예수님이 안식일을 잘 지키는지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2절)
마침, 예수님 앞에 한 병든 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병 고침을 구했을 수도 있지만, 정황상 바리새인들이 이 사람을 예수님 앞에 데려다 두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예수님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던 그들은 지금 미끼를 던지고 예수님이 덥석 물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수종병”
고창병, 부종 등으로도 불리는 병이고, 율법에서 말하는 유출병(레 15:1~12)에도 포함되는 병일 것입니다. 체액이 비정상적으로 유출되어 세포, 관절 등이 부어 오르는 증상을 말합니다. 팔, 다리, 복부 등이 부어올라 비정상적으로 커져서 장기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증상으로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간, 신장, 심장의 기능에 문제가 있을 때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데,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수종병을 성적인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처한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계속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어떻게든 흠집을 내고 고소할 거리를 찾고 있는 바리새인들 가운데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예수님 앞에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기에) 부도덕한 죄인이 있었고, 이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여기서 어떻게 하실 지를 멀리서가 아니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확실하게 이 예수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안식일을 어기는 자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아님을 확인하고 증언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셔야 할까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Ⅱ. 예수님의 질문 1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3절)
“대답하여”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고 하는데, 딱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말을 했지만 생략되었을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이 상황을 다 아시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 – 그 자리에 다른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었던 사람의 식사 초대였던 만큼, 특별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초대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 수종병 든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지금 이 상황은 바리새인들이 만든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예수님은 두 차례 질문을 하셨는데, 첫 번째 질문은 ‘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법적으로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물으셨습니다. 여기서의 법은 당시 상황에서 모세의 율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교사는 율법을 연구하는 자들이었고 바리새인은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의 전문가들로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을 보고 회당장은 분노했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는 것을 가지고 고발하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물으심으로써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법에 따라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인지 생각해 보게 하셨습니다.
사실 그것은 그들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율법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평소 하던 일을 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병 고치는 것도 일이니 안식일에는 병을 고치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외가 있었는데, 생명이 위급한 경우였습니다. 지금 당장에 죽게 되는 상태라면 의료 행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4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은 잠잠했습니다. 예수님과 말로 논쟁을 하려면 할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병 고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일이 되는 것이 문제라고, 그래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말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병을 고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침묵은 정직한 침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시는 의도를 알고, 침묵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이 맞다고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어느 쪽으로 대답을 해도 자신들에게 이롭지 않기 때문에 대답을 회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합당하다고 하면 자신들의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고, 합당하지 않다고 하면 지금 이 아픈 사람 앞에서 자신들의 평판이 좋지 않게 되고, 불쌍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이들의 침묵은 전략적인 침묵일 수 있습니다. 아무런 말로 하지 않음으로써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일을 하게하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확실히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논쟁하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는 지금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병을 고치게 해서 책잡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적은 보고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이적을 보고 확실히 믿지 않기 위해 이적을 바라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바리새인들이 잠잠히 있을 때 예수님은 이 병자를 붙잡으셨고, 고치셨고,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병자를 통해 예수님을 고소할 것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 병자를 불쌍하게 여기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곳에 있으면서 바리새인들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도록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이제 예수님을 공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좀 애매하긴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큰 일’을 하시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 병자를 붙잡는 일을 하셨습니다. 고치시는 것은 아마 다른 경우를 생각해 보면 말씀으로 하셨을 것입니다. 집으로 보내는 것도 딱히 ‘일’의 범주에 넣기는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히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이기 때문에 이들의 기준에서 공격을 할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잠잠했고,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Ⅲ. 예수님의 질문 2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5절)
처음 질문이 법에 대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 질문은 그들의 동기에 대한 질문입니다.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너희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냐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실제로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알고 던지신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우물이 많았고 우물에 아이들이나 짐승이 빠지는 경우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일들이 있을 때 그들은 주저 없이(“곧”,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끌어냈습니다.
왜 그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은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그들의 아들이나 짐승이 우물에 빠지면 주저 없이 우물에서 끌어냈을까요? 왜 그런 일은 안식일에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이 상황이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내 아들이 우물에 빠졌는데 안식일이니까 더 버티면 저녁에 아빠가 구해줄게라고 말할 아버지는 없습니다. 내 소가 우물에 빠져 죽으면, 또 돈을 들여서 소를 사야 합니다. 당시 소는 정말 큰 재산이었습니다. 결국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일에 대해서는 법을 관대하게 적용하고, 그렇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적용한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하셨고 그 근본정신이 무엇인지가 판단의 기준이 된 것이 아니라, 나의 이익이 판단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말로는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이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무엇을 명령하셨고 그 명령을 주신 근본정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나의 이익이 판단기준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너희 아들이 수종병에 걸렸다면, 그리고 내가 너희 아들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너희가 안다면, 안식일이니 고치지 말라고 하겠느냐?” 그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고쳐 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여기 바리새인들이 수종병 든 자를 단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한 미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의로운 자로서 ‘보여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있어서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십일조를 하고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식사 전에 예식으로서 손을 씻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참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어떠하심을 나타내는 데는 그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지만, 실제로는 돈을 사랑했습니다. 금식하고 기도했지만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게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금식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낮아져서 전적으로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킨다고 말했지만, 수많은 안식일의 세부 조항을 만들어 더욱 더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자신들은 그것을 잘 지킨다고 자랑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으로 자신들이 정결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이들이 가난한 자를 구제했을까요? 당연히 했습니다. 내가 자비로운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들이 정말로 알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책잡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그 마음속까지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정말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이런 형식적인 신앙을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나의 이익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근본정신은 ‘엄격함’이나 ‘율법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공의롭고 자비로우신 분이신 것처럼, 율법의 근본정신은 공의와 자비입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하면 안 되니까 아픈 사람은 계속 아프게 두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보여지는 신앙을 가진 이들의 마음은 이미 냉랭해졌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었으며 오로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6절)
이번에도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4절에서는 자발적으로 잠잠했던 것이라면, 여기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해서 고소할 증거를 찾으려던 그들은 도리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대답을 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한다고 했다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왜 이 수종병 든 자에게 긍휼을 보이지 않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그들 자신의 긍휼 없음이 드러나길 원하지 않았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전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이런 모습은 유별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들이 다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에 더 신경을 씁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느 쪽에 더 신경을 쓰고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하는 일은 왜 더 잘 못하게 될까요? 가까이에 있는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존경하는 일은 왜 다른 성도를 섬기는 것보다 더 어려울까요?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물어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의 개인 신앙생활도 겉으로 잘 보여진다면 우리는 그런 일에도 더 열심을 내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렇다는 말은 우리에게도 형식주의, 율법주의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엇을 보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저 겉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은 그것만 볼 수 있는 사람들이지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실 수 있고 그것을 먼저 보십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까? 나의 유익을 위해서 합니까? 그렇다면 보이는 일에 집중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 눈에 띄는 일에 열심을 내고, 더 좋은 방법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하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의도치 않게’ 퍼지게 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이것이 시작입니다. 사람에게 보여지는 신앙생활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었습니다. 곡식과 유사한 가라지는 세상에 정말 많습니다. 열심히 봉사를 하고 말씀을 잘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바리새인을 존경하고 그들에게 환호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들을 그런 시각으로 보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예배보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시작해서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베풀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미 6:8).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고, 하나님께서 보기 원하시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그것에 초점이 가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