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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의 교회론의 문제점 - 이천우 목사님(개혁주의 신앙공동체)
기성교회를 바벨론 음녀라고 하며
기성교회 목사와 예배 등 대부분의 제도를 부정한다.
기독교를 바벨론이요 음녀라고 보아
기성교회는 타락해 죽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지도 않고
불태워질 것이라고 한다
(윗트니스 리, [주의 회복에 관하여], pp.12∼13.,
윗트니스 리, [성경의 핵심], pp.94∼97, p.103.,
윗트니스 리, [그리스도냐 종교냐], pp.210∼211.,
윗트니스 리, [일곱영], pp.10∼11, p.49).
기성교회의 목사와 예배를 부정하고
(웟치만 니, [사역의 재고],
pp.240∼244, p.251, pp.257∼269),
침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으며
(웟치만 니, [그리스도인 50 필수과정 1],
pp.7∼18., 윗트니스 리, [진리공과-제1단계-제3권],
pp.86∼89., [진리시리즈2-구원이란 무엇인가?]),
성령 충만을 위해 '오 주 예수여!'를
반복적으로 주문처럼 외우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윗트니스 리, [성경의 핵심], p.138., 윗트니스 리,
[그 영과 몸], pp.27∼28, pp.55∼61,
p.83, p.93, p.110, p.115., 윗트니스 리, [일곱영],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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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 교회론 비평
지방 교회는 "지방교회의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방교회란 한 도시에 한 교회가 나타난 것을 의미하며
가장 성경적인 교회의 나타남을 말한다.
최초의 지방적인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이며,
예루살렘 안에는 사도, 장로, 집사, 오순절, 방언, 침례, 복음전파,
떡떼는 모임, 병고침 등도 있었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한 교회로 모였다.
성경에서 교회는 한도시,
즉 한 지방에서 한 교회로 나타난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됨의 간증을 나타내기를 추구하기 때문에
어떠한 교파로 통합하지 않고, 다만 피로 씻음받고, 거듭나고,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들로서 각 지방에서 함께 하나로 모이고 있다.
우리는 모든 참된 믿는이들을 환영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 자매들인 그들과의 교통을 추구한다.
이 땅 위의 주님의 간증이 확대되고,
그분의 신부가 그분의 곧 다시 오심을 위해 예비되도록
그 간증이 더욱 강화되는 것이 우리의 참되고도 간절한 갈망이다.
주님이 오늘날 이 땅 위의 그분 자신의 사역을 존귀케 하고
옹호하시기 바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입장' 4항에서
"우리는 각 지방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의 하나 됨의 입장 위에 선다(마 16:18, 계 1:1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피로 구속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이
각 도시에 있는 교회의 지체들임을 인정한다(고전 1:2, 12:23-26)."라고 천명되고 있으며,
'우리의 사명' 3항에서 "믿는 이들이 각 지역에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를 단체로 나타낼 수 있도록
각 도시에 교회를 세운다(행 8:1, 13:1, 20:17, 고전 1:2,
계 1:11, 2:1, 8, 12, 3:1, 7, 14, 행 15:41, 고전 16:1,
갈 1:2, 고전 16:19, 고후 8:1)."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교회를 세워 나갈 것인지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에서 두드러지는 지방교회의 교회에 대한 이해와 관점은
윗트니스 리가 쓴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내용에서
잘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어떤 조직체가 아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나님의 집이다'를 말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해지고 있는 지방교회의 교회론은
지극히 성경적인 이해요 관점입니다.
문제는 교회의 출현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윗트니스 리는 교회의 출현은 지방인 것과
이 지방교회의 특성이 '우주적'인 것을 들면서
지방교회의 행정을 언급하고 있는데
"각개 지방 교회를 단위로 독립적이다"는 것입니다.
요지는 각개 지방 교회는 행정적인 독립성을 띤다고 하는 것으로
각지방 교회가 독립적 단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지역에 하나의 지방교회만이 존재하는 것이요
각개 지방의 교회는 독립적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교회의 지방성을 유지하고 보존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정면에서 지방적이어야 하고
또한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독립성은 분명히 그렇습니다.
모든 지교회(Local Church)는 한분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으며
따라서 한분 그리스도의 지시와 명령을 따릅니다.
그러기에 A교회가 B교회를 간섭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의 교단은
당회가 노회와의 관계 속에서
상하, 계급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교회 정치의 원리 면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는 행정적인 독립성을 띠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방교회가 교회론에서 큰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은
교회는 '지방적'이어야 한다는 것에서
'교회는 어느 지방에서든 하나이다'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 지방에 단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
결코 두 개나 그 이상의 교회가 있을 수 없다.
한 지방에 두 개 이상의 교회가 있게 되는 순간
곧 교회의 일원성은 파괴되고 만다"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윗트니스 리는 어떤 뜻에서 이러한 말을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지상에 이런 저런 이름으로의 교회,
곧 교파가 존재한데 대한 반발로서였습니다.
윗트니스 리는 이를 교회의 일원성을 역행하는
'교회 다원화 경향'으로 봤습니다.
한 도시 안에서 장로교회가 있는가 하면 감리교회도 있고 성결교회도 있고,
침례교회도 있고 루터교회도 있고 구세군도 있고, 카톨릭교회도 있고 말이죠.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인데
무엇 때문에 '칼빈'의 간판을 걸고,
'루터'의 간판을 걸고,
'웨슬레'의 간판을 걸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를 영적 음란이라고 보았습니다.
한 여인이 여러 명의 남편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윗트니스 리는
각 지방에 여러 개의 교회가 있으나
여러 종류의 교회일 수는 없으니
단 한 종류의 교회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교회의 수는 많을지언정
많은 종류의 교회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가 종류별로 나누이는 것을
그리스도의 몸이 나누이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나누일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물을 근거로,
인도자나 은혜를 끼친 자를 근거로,
받은 바 은혜를 이유로,
성경 해석의 견해 차이 등으로
나누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서 교회는 모든 입장을 버리고
지방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분열교회에서 회복교회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이런 까닭에 지방교회는
자신들을 '회복교회'라고도 부릅니다.
윗트니스 리의 이러한 교회관,
곧 지방교회의 이러한 교회관은
첫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나누일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따른 것으로
그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어떤 교파로의 이름으로 있든지 간에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어떤 교파로의 이름으로 있든지 간에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인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말하는 교파의 교회이든지간에,
또는 루터주의 신학과 신앙을 말하는 교파의 교회이든지간에,
웨슬레주의 신학과 신앙을 말하는 교파의 교회이든지간에
그 교회가 참된 신앙에 의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참된 교회라고 하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적'입니다.
즉 '보편교회'입니다.
그러나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말하더라도
참된 신앙에 의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참된 교회를 이루고 있지를 않다고 하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적'이지를 못합니다.
즉 '보편교회'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카톨릭 교회[로마 카톨릭 교회]를
참된 교회로 말하지 않는 것은
그 교회가 '카톨릭'(Catholic)이어서가 아닙니다.
'Catholic'이란 말은 '보편의'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를 참된 교회로 말하지 않는 것은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인데
그것은 예배를 비롯한 그릇된 교리의 신학 사상과 제도와 정치 때문입니다.
하지만 웨슬레 신학 사상과 신앙을 말하는 교파의 교회인데
그 교회가 올바른 신학과 신앙에 서서 나간다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교회'에 속하여 있는 것입니다.
가령 감리교회의 교단 교회이고 성결교회의 교단 교회인데도 불구하고
개혁교회의 신앙으로 교회를 이루어 가는 교회가 있는데
그러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교회'인 것입니다.
하지만 장로교회의 교단 교회로서
개혁주의 교회임을 말하는 고신을 말하고 합동을 말하고
이런 저런 교파를 말할지라도
개혁교회의 신앙에서 이탈하여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가령 순복음교회식의 신앙을 말하고
성시화 운동을 해 나가고
영성훈련을 강조하며
개혁교회의 신앙에서 이탈하여 있다면,
이러한 교회는 어떤 교파의 장로교회일지언정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교회'는 아닙니다.
지방교회는 장로교회이니 감리교회이니 하는
이런 저런 여타의 교회의
또 다른 이름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비록 '회복교회'라는 의미를 부여하고서
분열교회와의 차이를 가지며
차별을 둘지라도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울교회, 부산교회 등 등 지방교회의 이름으로 말할지라도
소위 웟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를 따르는
'지방교회'로서의 이런 저런 이름의 지방교회가 아닌가요?
이렇게 스스로 모순을 안고 있는 교회가
지방교회[회복교회]입니다.
무엇보다도 지방교회는 자신들을 회복교회로 말하면서
다른 교회들은 '분열교회'로 몰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서 분열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나누어져 있는 교회이기 때문이죠.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있는 생명 없는 죽은 교회이니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교회'인 교회들마저
부정하고 거부하는 잘못을 행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아울러 지방교회는 각 지방에 오직 하나의 지방교회가 존재할 뿐임을 말합니다.
가령 초대 교회에서의 예루살렘교회, 안디옥교회, 고린도교회, 데살로니가교회,
갈라디아교회...이렇게
한 지역에 하나의 교회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하여 가는
사도의 교회 설립 시기에 있어서는
성령께서 각 지역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 나가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온 땅에 충만케 하여 나가시는 것을 나타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각 지역[지방]에 세워진 교회에
그 지역[지방]의 이름으로 교회가 불려지는 것 외에는
달리 다른 이름으로 불려질 까닭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처럼의 조직적인 교회의 형태도 아니었습니다.
각 지역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지역[지방]교회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각 개교회는 지교회로 불려집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으로서이며
또한 오직 한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는
지역 교회로서입니다.
그러나 이 지역 교회가
단지 지방의 이름으로만 교회 이름을 할 수 없는 실정에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지방의 이름을 포함해서
이런 저런 명사의 이름으로 교회를 부른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교회'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교의 다원주의'처럼
'교회의 다원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방교회가 서울, 부산, 대구 등
한 지방에 있는 여러 집회소를
서울, 부산, 대구 등 하나의 지방교회로 부르면서
제1집회소, 제2집회소 등으로 명명한다면
이것이 한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가
이런 저런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한편, 지방교회의 교회론에서 문제되는 점은
교회의 직분에서 목사직을 세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지방교회는 목사직를 두지 않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가르치는 자와
회중 간에 아무런 구별이 없이
단지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릅니다.
이는 소위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제도권적 담임목사 제도를
결코 용납치 않는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말씀 증거의 사역이
모든 형제들에게 동일하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말씀 증거의 사역은
실질적으로는 몇 몇 형제들에게 제한적으로 편중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점은 성경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워나가시는 일을 위해
교회에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위해서 목사를,
그리고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 나갈 수 있도록 하며
거짓된 진리로부터 신자를 보호하는 일을 위해서 다스리는 장로를,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의 자비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일을 위해서
돕는 집사의 삼직을 원리적으로 두셨기 때문입니다.
지방교회가 교회에 목사직을 두지 않는 것은
사실은 성직제도를 부인하는 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인데
이는 지방교회가
형제교회의 영향을 크게 받은 데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방교회와 형제교회는
모두가 제도권 교회를 교파 교회라고 부르며 혐
오할 정도로 격하시켜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목사직을 세우지 않게 된 배경은
처음부터 성경의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래 형제교회를 체계화시킨 대표적 신학자인
J.N. 다비라는 영국 성공회 목사가
스스로 목사직을 사임하고
영국의 플리머스 지역에서
일단의 무리들과 더불어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제교회의 시발을
플리머스 형제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웟치만 니는 영국으로 건너갔을 때
이런 형제교회의 교회운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곧 지방교회를 통해서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2) 지방교회의 신학 및 성경 해석의 관점 비평
지방교회는 형제교회의 신학과도 유사합니다.
이는 모두가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방교회와 형제교회 모두가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함에 있어서
소위 영해적 해석(알레고리적 해석)의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계시록의 빌라델비아교회가 다름 아닌 형제교회요,
나아가 지방교회를 가리킨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지방교회를 흠 없는 교회,
가장 이상적인 교회,
가장 성경적인 교회로 지칭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이 두 교회는 제도권 교회는 아예 교회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제도권 교회는 다 죽은 교회요
차지도 덥지도 않은 라오디게아교회처럼 여깁니다.
또 하나의 다른 예를 들면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상처받은 자는 죄인이요,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요,
레위와 제사장들은 타 종교지도자들이요,
주막은 교회요,
사마리안인이 다시 갖다 돌아오겠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비유한다고 해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이들의 영해적 해석은
참으로 자의적이며
주관적인 성경 해석으로서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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