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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필드 벤자민 브렉켄리지(Warfield Benjamin Breckinride;1851-1921)
* 찰스 하지의 제자 ============================================================================= http://blog.naver.com/mokpojsk/130004103987 '구프린스턴' 신학자들의 과학관 필자의 의도는 이러한 해석작업을 통해 신학이 과학에 접근할 때 얻는 결실과 더불어 맞닥뜨리는 어려움을 구프린스턴 학파의 예를 통해 보이는데 있다. 신학이 과학과의 관계설정을 위해 노력할 때, 신학은 그 시대의 과학이나 학문과 함께 가면서 신학적 진리의 보편성을 보다 설득력 있게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이 과학의 타당성과 한계를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설정해야 하는지는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핫지와 워필드는 공통된 변증학의 입장에 서면서도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었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은 복음주의권의 신학자와 과학자 사이에서 오늘날까지 진행되고 있다. 구프린스턴 변증학이 가진 양면성은 다음의 표현들로 요약할 수 있다. "모든 사실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러나 모든 이론이 진리는 아니다". "신학은 학문과의 통일을 지향한다. 그러나 학문은 신학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그들이 이러한 양면성을 기꺼이 수용했던 이유는 '학문을 통합할 수 있는 신학 모델'(a model of the sicence integrating theology)을 세우려 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필자는 구프린스턴 변증학의 두 원리인 '신학과 학문의 통일성' 및 '학문의 한계와 신학의 우월성'을 살펴보려고 한다. 리드는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된 세계는 세계의 실재가 아니라 인간의 관념(ideas) 또는 인상(impression)에 불과하다고 본 로크나 흄의 '경험비판'적인 인식론을 반대했다. 그는 인간에게는 감각경험을 통해 실재하는 세계를 직접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이 능력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공유하는 상식(common sense)에 의해 확인된다고 생각했다. 이 입장은 흄의 회의론이나 루소의 혁명적인 계몽주의 대신에 18세기와 19세기의 미국의 지식인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였던 인식론적 입장이었다. 이러한 상식실재론에 입각하여 구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상식적인 감각경험을 통해 인정된 사실에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즉 모든 사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사실이므로 그것이 어떤 학문에 의해 밝혀지든지, 신학적으로도 인정해야 하는 '부정할 수 없는 진리'(undeniable truth)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의 공통경험에 의해 알려진 사실은 신학과 다른 학문 모두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했다. =========================================================================
*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자
* 성경 무오의 교리를 방어한 신학자
- 찰스 핫지와 벤자민 워필드의 변증학를 중심으로 -
최태연 박사(천안대학교 기독교철학 교수)
1. 들어가는 말: 신학과 과학의 관계설정을 위한 구프린스턴 변증학의 의미
21세기는 과학기술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컴퓨터와 인터넷, 유전자와 생명복제라는 용어가 일상화 된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초전도체와 나노과학이라는 유행어가 다가오고 있다. 이렇듯 과학기술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동력기관이 된 오늘날 과학에 대한 신학적 평가를 통해 양자 사이의 관계를 바로 설정하는 일은 신학이 해명해야 할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개혁신학의 여러 전통과 학파들 가운데 구프린스턴 학파(the Old Princeton School)가 있다. 구프린스턴 학파란 1812년에 설립된 프린스턴 신학교가 1929년 행정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재조직되기까지 지속되었던 신학을 말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구프린스턴 학파의 신학적 전통은 그레샴 메이첸에 의해 새로이 설립된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 의해 이어졌다. 구프린스턴 신학은 창조세계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절대진리로 인정하는 개혁주의 진리관에 서 있다. 칼빈으로부터 출발한 개혁주의의 전통을 이어 구프린스턴 신학은 과학을 비롯한 그 시대의 학문의 기능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구프린스턴의 신학자들은 과학을 신학으로부터 배제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고 확인해 가는 과정에서 과학의 긍정적 역할을 인정했던 것이다. 반면에 그들은 끊임없이 과학의 연구결과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의해 평가하면서 과학지식의 한계를 신학적으로 설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구프린스턴 학파의 신학자들 가운데 조직신학과 변증학을 대표하는 두 신학자인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와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1921)의 과학에 대한 기본입장과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평가를 살펴봄으로써 과학과 신학의 관계설정에 대한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고자 한다. 필자는 먼저 구프린스턴 학파의 기독교 변증학이 가지고 있는 양면적 강조를 설명하고 이러한 양면성이 구프린스턴 신학자들의 과학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밝힐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핫지와 워필드가 가졌던 과학에 대한 기본입장과 진화론에 대한 평가에 구체적으로 접근해 보려고 한다.
비록 이 논문은 구프린스턴 학파의 변증학을 대표하는 핫지와 워필드의 방대한 저작들 가운데 극히 제한된 내용만을 제한적으로 다루지만, 21세기초의 한국의 개혁신학과 기독교학문에서 구프린스턴 변증학이 추구했던 신학과 과학의 관계설정에 대한 연구에 자극제가 되기를 희망한다.
2. 구프린스턴 변증학의 양면성
구프린스턴 변증학은 개혁주의 전통에 서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고 성경을 통한 특별계시를 최종 권위를 가진 진리로 높이는 반면에, 인간의 경험과 이성의 산물인 근대학문의 진리발견 가능성 역시 높이 평가하고 가능한 한 신학과 조화 내지 상호 보완하려고 했다. 이러한 노력은 성경, 신앙, 과학, 도덕, 문명이 서로 공통된 기반인 하나님의 창조에서 출발한다는 신앙에서 출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학문의 생명전개는 점차로 신학과 학문, 신앙과 문명 사이의 긴장을 점점 강화시켰으며, 구프린스턴의 신학자들이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진화론과 같은 첨예한 문제에 대한 내부적인 견해차를 드러내게 했다.
2.1 신학과 학문의 통일성
2.1.1 통일성의 근거: 사실(facts)과 상식(common sence)
구프린스턴 신학자들에게 신학과 학문의 통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공통적인 기반은 인간의 '감각'(sense)을 통해 주어지는 '사실'(facts)이었다. 사실은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감각기관(sense organ)을 통해 지각된(perceived) 사물이 그 사물의 실재(reality)와 틀림없다는 인식론적 입장에서 비롯된다. 구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이 입장을 장로교의 본고장인 스코틀랜드에서 성립된 '상식철학'(Common Sense Philosophy)으로부터 받아들였다. '상식 실재론'(Common Sense Realism)이라고도 부르는 이 철학은 스코트랜드의 목사이며 철학자인 토마스 리드(Thomas Reid, 1710-1796)에 의해서 창시된 영국 경험론의 한 흐름이다.
프린스턴의 설립자이며 첫 교수였던 아치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1772- 1851)는 그의 변증학 강의안 "진리의 본성과 확실성"(Nature and Evidence of Truth)에서 "감각은 적합한 대상과 적합한 영역에서 일어날 때 분명하고 확실한 정보를 준다. 그리고 감각대상을 잘못 파악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어떤 감각작용의 결과를 성급하게 판단하거나 추론하는데서 일어난다. 만일 어떤 판단이 정확하다면 그것은 이성의 빛에 의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성만으로는 감각의 오류를 결코 교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인식의 근거를 상식적인 감각에서 찾고 있다.
찰스 핫지는 알렉산더의 상식 실재론을 더욱 확장하여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신학을 성립시켜주는 '원리들'(principles)이 경험적인 사실로부터 도출된다고 주장했다. "자연과학에서 처럼 신학에서도 원리들은 사실들로부터 파생되지, 사실들이 원리들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물질의 속성, 운동법칙, 자기와 빛의 법칙 등은 정신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원리들은 사고의 법칙들이 아니며 사실로부터 연역된 것이다. . . . 신학자들에게 가장 비학문적인 일은 이론을 덕과 죄와 자유와 도덕적 의무의 본성에 대한 원리로 설명하고 그 다음에 이 이론으로 성경의 사실을 해명하는 일이다. . . .사실에 의해 이론이 결정되며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은 모든 학문과 신학의 근본원리이다. 귀납의 원리가 허용되고 충실하게 수행될 때 자연과학이 혼돈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신학도 동일한 원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사변으로 혼란스럽게 된다" 이처럼 구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신학과 학문의 통일성의 근거를 철저하게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경험에서 얻는 사실로 인정했다.
2.1.2 신학과 철학의 통일성
모든 지식의 성립근거를 감각경험에서 출발하는 구프린스턴 변증학에서도 이성(reason)은 특권적 위치(the prerogative)를 가졌다. 구프린스턴의 조직신학을 체계화한 찰스 핫지는 성경에 근거한 신앙은 반드시 사실과 일치하는 확실성을 요구하는데 성경 계시(revelation)가 사실과 일치하는지를 판단하는 역할을 철학적 이성이 맡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관점에서 핫지는 계시를 "정신에 대한 진리의 커뮤니케이션"(the communication of truth to the mind)이라고 정의하면서 우리가 계시를 믿기 위해서는 계시의 내용에 대한 지성적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영혼이 불멸한다든가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의미를 받아들이는데, 그 단어들의 의미를 모른다면, 우리의 정신에는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으며 아무것도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없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지식(knowledge)은 신앙(faith)에 필수적이다"
따라서 핫지에게 정당한 이성과 철학은 계시신학에 필수적이 된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이성의 권리와 정당성을 존중할 것을 요청한다. 이성은 항상 사실(facts)에 근거한 내용을 참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에, 확실하고 정당한 이성의 주장은 계시와 모순되지 않는다. 기독교가 거부하는 것은 건전하고 타당성 있는 이성 자체가 아니라, 이성을 무시하는 미신이나 사실을 왜곡하는 독단적 이성주의일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가장 특권적인 이성이 스스로를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합리적인 피조물인 인간으로부터 비합리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지식 없는 신앙을 요구하지도 않고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신앙이나 불확실한 신앙을 요구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미신과 [독단적] 이성주의와 동시에 대결한다. 전자는 타당한 확실성이 없는 신념이고 후자는 신앙을 갖기에 충분한 확실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되지 않으면 거절한다."
핫지는 신학과 철학은 이성의 정당성이라는 공통근거 위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진리를 통합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신학과 철학의 공통점은 첫째, "두 학문이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 그리고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가르치고 있고", 둘째 "두 학문의 방법이 본질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진리에 대한 인식을 추구하며", 셋째, "두 학문의 방법은 각각 정당하다고 인정되며", 넷째,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본성과 만물의 창조자이므로 진리로 인정된 우리의 본성의 법칙이나 외부 세계의 사실은 어느 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대립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경험과 이성을 바로 사용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이렇게 얻은 지식을 추론하여 만든 철학이 신학과 모순되지 않을 수 있다는 핫지의 낙관적 입장이 잘 드러난다. 따라서 핫지는 신학과 철학이 상호 보완하는 가운데서 통일된 입장에 도달해야 한다는 기대를 강하게 표현한다. "이러한 두 가지의 인식의 원천[철학과 신학]은 각자의 타당한 가르침에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 . 철학자는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며 신학자는 학문의 가르침에 무지하지 말아야 한다."
2.1.3 신학과 과학의 통일성
철학과 마찬가지로 과학이 창조세계의 '사실'을 밝혀내 주는 한, 과학은 신학이 제시하는 진리와 전적으로 조화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구프린스턴 신학자들의 입장이었다. 그들은 경험적 사실을 부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경험을 근거로 하여 세운 과학이론들에 대해서도 무시하지 않고 동반자로 인정하고자 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데에는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 이외에도 천동설을 끝까지 주장했던 로마가톨릭 교회의 오류에 대한 반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보다도 염두에 두었던 것은 과학과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하는 일부 부흥운동이나 재세례파 계통의 개신교회의 편협한 태도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했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뉴턴 물리학에 의해 대변되는 근대과학과 산업혁명이 이루어 낸 19세기의 문명에 대한 분리주의적인 태도를 버리고 문명과의 조화 속에서 기독교의 복음과 건전한 교리를 지키고 가르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핫지와 워필드는 신학과 과학과의 통일성을 더욱 강조한다. 핫지는 신학과 과학의 통일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실로 인정된 과학적 진리와 갈등에 빠지는 성경해석을 주장해서도 안되며 "신학자들은 성경이 이미 확립된 사실과 조화되도록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과 과학의 친화성은 신학에 과학의 귀납적 방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그의 신학방법론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연이 과학자에게 주는 의미는 성경이 신학자에게 주는 의미와 같다. 즉 자연과 성경은 양자에게 사실의 백화점이다. . . .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확실하게 만드는 [신학의] 방법은 자연이 가르치는 바를 확실하게 채용하는 자연[과]학자와 같다"
워필드는 핫지의 귀납적(inductive) 신학개념을 더욱 확장하여 학문으로서의 신학(theology as science)을 모색한다. 이때의 학문은 좁은 의미의 자연과학(natural science)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사실에 관한 '모든 지식을 통합한 상호연결체계'(a correlated system) 내지 '모든 것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는 하나의 체계'(one all-comprehending system)를 말한다. 워필드에게 지질학(Geology)은 지구에 관한 사실을 설명하는 하나의 학문으로서 존중되지만, 생리학(physiology), 심리학(Psychology), 천문학(Astronomy) 같은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실재세계에 대한 부분적인 사실을 제공할 뿐이다. 개별적인 자연과학의 연구결과에 대한 체계적으로 연결된 지식은 바른 합리적 추론을 통하여 얻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는 완전한 체계를 얻을 수 없고, 우주 전체와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관계를 계시를 통해 제시하는 신학만이 하나님과 외부세계와 인간자신에 대해 체계화된 지식을 보장해 준다. "하나의 학문은 그것이 대상으로 하는 주체-물질(subject-matter)의 객관적 실재로부터 정의된다. 신학이 전제하는 실재는 자연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이다. 따라서 신학은 하나님과 하나님과 우주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이다"
2.2 학문의 한계와 신학의 우월성
구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철학과 과학을 비롯한 학문의 권리을 인정하고 신앙의 진리와 경험 및 이성의 진리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그들이 계시에 근거한 신학과 인간의 능력에 근거한 다른 학문을 궁극적으로 동등한 권위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지, 합리적 이성이나 감각경험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프린스턴 신학자들은 다른 학문과의 조화를 지향하면서도 성경적 신앙(biblical belief)과 경건(piety)의 강조하는 신학을 수립했다.
아치발드 알렉산더는 1812년의 교수취임강연(Inaugural Address)에서 성경의 최종권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미래에 대한 구별되고 충분한 계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내용에 대해서 말입니다. . . 미래 세계의 존재는 더 이상 불확실한 추론이나 개연적인 추측에 의해 모여진 것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진정한] 증거의 문제입니다. 믿음은 나머지의 것에 확실한 근거를 줍니다. 이 [최종의] 진리를 위해 모든 사실과 복음의 가르침이 연결됩니다".
찰스 핫지 역시 철학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철학을 뛰어 넘는 권위를 성경 계시에서 찾는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철학은 진리에 대한 인간 지성의 결론인 반면에, 성경은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이다. 두 가지가 서로 대립이 되는 곳에서는 철학이 계시에 따라야만 한다". 핫지와 마찬가지로 워필드에게 학문에 대한 신학의 우위는 쓰여진 계시인 성경의 무오성과 절대성에 기인한다. "따라서 신학은 삶에서 제공된 사실들에 대한 귀납적 연구가 아니라, 쓰여진 계시에 의해 제공된 사실에 대한 귀납적 연구인 한, 신학은 모든 다른 과학보다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하다. 그러므로 신학은 모든 학문의 맏이이다."
워필드는 신학의 우월성을 두 가지 방향에서 확인한다. 첫째, 신학은 모든 학문의 지식을 종합한 완성된 체계이고 둘째,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데 그치는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상호 소통하는 경건의 학문이다. 워필드는 그의 조직신학과 변증학의 프로그램을 제시한 1894년의 논문 "조직신학의 이념"(The Idea of Systematic Theology)에서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강조한다. "신학 안에서만 다른 모든 학문들은 완성을 발견한다. . . 모든 다른 학문들은 신학에 보조적 역할을 한다. 그들이 제공하는 재료는 신학의 건축을 세우는데 사용된다. 신학은 하나님을 다루며 그 하나님과 우주와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이지만, 그 관계를 구성하는 사실들은 자연과 역사의 모든 사실들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 사실들을 과학적인, 즉 이해될 수 있는 형태로 제공하는 역할은 다른 일반 학문들의 고유한 기능이다. 따라서 학문적 신학은 다른 신학 분과(성경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의 머리인 것처럼, 일반 학문들의 머리이다"
동시에 워필드는 신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론 자체에 있지 않고, 복음사역과 경건에 있다고 말한다: ". . . 조직신학자는 최선의 의미에서 복음의 설교자이다. 그의 사역의 절정은 분명히 그가 파악한 진리의 논리적 체계화에 있지 않고 사람을 움직여서 그들의 힘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들의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의 구원자와 함께 그들의 삶을 결단하고 그 분을 귀하게 생각하고 모시며 그 분이 보내신 성령의 은혜로운 영향을 인정하고 강화하는 일이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신앙과 학문이라는 두 가지 영역이 근원적인 통일 속에 있다는 확신이 구프린스턴 신학자들이 가진 변증학을 가능하게 했다. 그들에게 계시는 한편으로는 인간이 발견한 사실과 모순될 수 없으므로 신학은 사실을 밝혀주는 학문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학문을 뛰어넘어 계시에 근거한 신학만이 일반 학문들이 밝혀낸 진리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를 보장해주고 절대적인 헌신을 가능하게 한다.
3. 찰스 핫지의 과학관
3.1 성경과 과학의 상호성
앞에서 이미 살펴 본 대로 찰스 핫지에게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 사실을 밝혀내는 학문작업이므로 신학과 근본적으로 반대되지 않았다. 그는『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1권에서 '창조'(creation)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그의 과학관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성경이 하나님의 성경인 것처럼 성경의 가르침과 과학의 사실사이에는 갈등이 있을 수 없다. 신자들이 다투는 대상은 이론이지, 사실이 아니다. 그런 이론들 중 여러 가지가 때때로 언뜻 보기에 그렇거나 실제로 성경과 불일치함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잘못된 것으로 입증되었거나 적절하게 해석된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되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교회는 계속 과학의 발견을 수용하는 성경해석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권위에 손상을 입히거나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핫지는 과학을 대하는 기본태도로서 사실과 이론의 차이를 전제한다. 창조의 사실은 변함이 없으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 사실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사실들이 추론을 통해 하나의 이론으로 엮어질 때 문제가 발생한다. 체계화된 과학이론은 해석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과 체계화된 이론 사이에서 신학은 이중의 노력을 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성경 계시의 빛 아래서 잘못된 이론의 오류를 지적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명백한 사실과 어긋나는 잘못된 성경해석을 교정해야 한다. 핫지는 이러한 신학의 태도가 어떠한 이론이든지 스스로를 입증할 수 있는 공평한 기회를 과학에게 제공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의 작은 행성 중에 하나이고 별들이 우주 전체에 편만 하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을 때, 신앙은 비록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곧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하게 성숙했다. 그리고 고대의 모든 책 중에 성경만이 유일하게 과학의 엄청난 발견과의 일치를 발견하고 기뻐한다. 그리고 만일 창조가 셀 수 없이 장구한 시대를 통해 지속된 과정이고 성경이 유일하게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입증될 수 있다면, [예일의] 대나(Dana)교수의 말대로 인간존재의 근원에 대한 생각은 '전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utterly incomprehensible) 차원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처럼 핫지의 변증학적 입장은 이미 해결된 지동설의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기원에 관한 문제 역시도 과학적 탐구를 통해서 성경의 가르침과의 조화를 입증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놓는다. 즉 핫지는 성경의 사실들이 근대과학에 의해 충분히 밝혀질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가졌다.
3.2 『다윈주의란 무엇인가?』에 나타난 진화론 비판
1859년 출판된 다윈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 이후,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진화론(the theory of evolution)의 문제에 대해 찰스 핫지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는 이미 『종의 기원』출판 후 3년 만인 1962년에 최초의 짧은 논평을 썼고, 마침내 1874년 『다윈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Darwinism?)이란 저술을 통해 진화론에 대한 그의 연구와 평가를 집약한다.
핫지는 다윈의 책이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연구가 아니라, 철저히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연구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식물과 동물의 다양성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진화론의 특징을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다윈주의는 세 가지 구별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진화 또는 모든 식물과 동물의 유기체가 하나 또는 아주 적은 수의 원시균류(primordial living germs)로부터 생겨나고 발전했다는 가정, 둘째, 이 진화가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또는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 셋째, 그의 이론의 가장 중요하고 독특한 요소로서 자연선택이 [초자연적 지성의] 설계(design)없이 비지성적인 물리적 원인에 의해 수행된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의 진화론의 설명원리 가운데 핫지가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원리는 바로 세 번째의 원리인 목적론을 거부하는 자연선택의 개념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물건을 손에서 떨어뜨릴 때, 그것이 우연이었다고 말하면, 그는 그 사건이 원인 없이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고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종이 우연한 생명전개에 의해 일어났다고 말할 때, 바로 다윈의 의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책 전체는 목적론에 반대하는 논증이다". 핫지가 다윈의 자연선택에서 목적론적 설명이 배제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주의 창조와 섭리과정에서 지성적 설계를 배제한다면 하나님이 의도와 목적에 의해 창조를 이해하는 가능성을 부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핫지는 다윈이 창조주(the Creator)의 존재 자체는 부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에서 초자연적인 목적 개념을 부정한 이유까지 설명한다: "왜 그는 하나님의 지성에 의한 결과에 대해 말하지 않았는가? 만일 하나님이 식물과 동물의 복잡한 기관들을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설계의 문제와 관련해서 단 한번에 그것들을 만들었는지 진화의 과정을 따라 만들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윈은 그것들을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시키는 대신에 설계나 목적개념 없는 설명방식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핫지는 진화론의 자연선택 개념이 초자연적 설계나 목적의 원리를 방법론적으로 배제할 때, 결국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신학과 결별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에 도달한다. "자연에서 설계의 부정이라는 전체 이론의 결론은 하나님의 부정일 수밖에 없다. 다윈씨의 이론은 자연의 설계를 부정한다". 따라서 그는 다윈의 진화론이 무신론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진화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얻었다. 진화론은 무신론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다윈씨 자신이나 그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이 무신론자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이론이 무신론적이고 자연으로부터 지성적 설계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무신론의 경향이 있다는 의미이다". 핫지의 이러한 판단은 성경과 과학이 원칙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지만, 다윈의 진화론 같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providence)를 무시하는 자연주의(naturalism)를 이론의 방법으로 삼을 때, 신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4. 벤자민 워필드의 과학관
4.1 신학과 과학의 분열에 대한 저항
신학과 과학의 관계를 비교적 연속적이고 낙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찰스 핫지의 상황과는 달리, 그의 후계자 역할을 맡았던 벤자민 워필드는 점점 연속성을 잃고 분열되어 가는 20세기 초반의 신학과 과학 사이에서 프린스턴 변증학의 입장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러한 학문적 추세에 대한 위필드의 저항은 1911년에 발표된 "인류의 고대성과 통일성에 대하여"(On the Antiquity and Unity of the Human Race)이라는 글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 이후 인간의 기원을 인간 이외의 다른 종에서 찾게된 나머지 불확실하게 된 인류의 통일성을 방어하기 위해 과학자들과의 의도적인 논쟁을 벌인다. 그는 더 이상 신학과 과학의 통일성에 대해 낙관론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는 상황 속에서, 인간의 기원에 대한 성경과 과학자들의 견해차이를 극단적으로 과장하려는 과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과 함께 그의 논의를 시작한다. "성경의 진술과 과학자들의 발견사이에 갈등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 신학자의 의무가 되었다. 그러나 양자사이의 대립은 인위적으로 조장된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를 [지나치게] 짧은 기간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인류사를 짧게 해석하는 성경해석은 그 정당성에 대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성경자료를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반면에 과학도 지구상의 인간 생명의 역사에 대해 지나치게 과도한 기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생명의 역사를 지나치게 장기간으로 보는 해석의 타당성을 엄밀한 연구자가 수용하기 위해서는 더욱 신중함이 요구된다".
워필드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는 지구상에서 생명의 역사를 너무 오래지 않게 파악했던 그 당시의 중도적인 고생물학자나 지질학자, 화학자들의 이론을 근거로 성경과 과학의 차이를 드러내려는 급진적인 진화론자들을 반박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과학연구가 지속됨에 따라 생명, 특히 지구상에 인간이 지속된 기간을 무제한적으로 생각하도록 요구하는 태도는 점차로 사라졌고 현재는 중도적 평가를 하는 것이 과학자들 사이에 일반적인 경향으로 보이는데, 지구상에서 인간의 생명이 지속된 기간에 대한 중도적 평가는 대체로 만년이나 이 만년 이상을 넘지 않는다". 위필드가 지구의 나이를 최고 4000만년까지 추측한 그 당시의 급진적 지질학자나 비록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지구상의 생명의 나이를 연장하려고 했던 진화론자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온건한 입장을 택하는 이유는 그의 관심이 과학연구의 결과를 가능한 한 성경과 조화시키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그 당시 '생물학적 진화론'(biological Darwinism)과 함께 대두되었던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에 대한 우려와 경고를 잊지 않는다. "인류의 통일성에 대한 성경과 현대과학 사이의 이러한 동의에 대해 만족하면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인종적인 이해관계에서 이러한 통일성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성경계시의 영향 밖에서는 인간의 통합성의 이념은 매우 약하거나 거의 무시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워필드는 신학과 과학의 분열뿐만 아니라, 과학의 이름아래 인간의 분열을 조장하는 인종적 편견에 대하여서도 신학적인 저항을 했던 것이다.
4.2 섭리의 진화론적 해석 가능성
워필드는 그의 스승인 찰스 핫지의 변증학에 충실하게 자신의 변증학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모든 사실은 하나님의 사실이다"라는 핫지의 기본명제에 따라 신학과 과학의 통합의 가능성을 끈질기게 모색했고 새로운 과학연구의 결과를 신학을 정점으로 하는 지식체계 안에 일관되게 수용하고자 했다. 그는 관찰에 기초하여 사실을 귀납적으로 탐구하는 과학이론들이 신학에 비해 훨씬 더 다양한 해석(interpretation)의 산물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진화론의 경우, 이미 그의 전임자 A. A. 핫지가 진화론을 "과학적 작업가설"(a working hypothesis of science)과 (자연주의적) "철학"(a philosophy)으로 구분하고 신학이 거부해야 할 대상은 생명전개(evolution)의 가능성을 일반화시킨 철학이론인 진화론이지, 생명의 기원과 과정을 해명하기 위한 과학적 가설로서의 생명전개의 원리 자체는 아니라고 보았던 것처럼 워필드는 다윈 진화론이 함의하는 과학적 가설의 성격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잠정적인 과학의 성과에 대해 맹목적인 추종과 일방적인 거부 사이의 중간(moderate) 길을 가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핫지 못지 않게 자연과학에 조예가 깊었고 진화론이 가져온 과학계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던 위필드는 다윈의 진화론을 창조신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제시한다. 그는 마침내 1915년에 집필된 그의 마지막 칼빈연구인 "칼빈의 창조교리"(Calvin's Doctrine of the Creation)에서 이러한 해석을 펼친다. 그는 칼빈이 『기독교강요』(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에서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개념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처음 창조 이후 모든 사건의 중간원인에 해당하는 '제2원인(second causes)을 인정했다는데 주목한다. 워필드는 칼빈이 하나님의 창조를 무로부터 최초의 물질을 만드신 사건뿐만 아니라, 최초로 창조된 근원물질로부터 다른 사물들이 연속적으로 생성되는 과정까지도 포함시켰다고 해석한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는 이 모든 과정에 작용하기 때문에 창조는 무목적적인 자연선택에만 의존하는 기존의 진화론과는 다른 의미의 '생명전개' '(evolution)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바로 이해했다면 칼빈의 창조교리를 인간의 영혼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생명전개적인 성격(evolutionary one)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최초의 '혼돈 상태의 물질'은 하나님의 절대명령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지만, 아직 아무 형체도 없이 무엇인가가 될 가능성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존재하게 된 모든 사물은 인간의 영혼을 제외하고는 최초의 물질인 이 세계질료(world-stuff)가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원동력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전개되어 온 것이다. 물론 이러한 원동력들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칼빈은 우주의 존재와 운동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 강력한 유신론자(a high theist), 즉 초자연주의자(supernaturalist)이다. 그에게 하나님은 '궁극적 제일원인'(prima causa omnium)이며, 이 말은 세계질료의 창조에서처럼 모든 사물이 그 존재를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이 일차적인 세계질료의 변형조차 직접적인 하나님의 통치아래서 일어났고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의지에 기인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각은 단순한 진화론이 아니라, 순수한 생명전개론(pure evolutionism)이다".
여기서 워필드는 이른바 개혁신학의 전통적 교리의 하나인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ta)의 교리를 생명전개의 의미로 해석했음을 보여준다. 위필드는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현대의 과학과 조화 속에서 성경의 진리를 확인하고 변증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창세기 해석은 이미 핫지 시대로부터 지지되었던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ism) 또는 '오랜지구 창조론 (old earth creationism)을 더 적극적으로 밀고 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워필드는 칼빈을 생명전개의 원리를 인정한 신학자라고 까지 말한다: "의심할 나위 없이 칼빈은 진화론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생명전개의 교리(a doctrine of evolution)를 가르친다. 그는 무로부터의 직접적인 창조행위를 보전하는 이외에는 생명전개의 가르침을 반대하지 않는다. 무로부터 직접 창조되지 않은 모든 것은 연이어 전개되었다(evolved). . . . 이 가르침이 질서 지워진 세계의 산출양식을 설명하는데 사용되기 위해서는 창세기의 육일을 여섯 기간, 즉 세계의 성장의 여섯 시대로 늘려서 해석해야만 한다. 만일 칼빈이 그렇게 했더라면 그는 현대적인 생명전개론의 선구자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워필드가 현대적인 의미의 생물학적 진화론, 즉 다윈의 진화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에서 진화론을 "입증"(proved)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프린스턴 대학 학장 맥코쉬(McCosh)를 반대하면서 진화론을 하나의 과학적 가설(a working hyperthesis)로 보았다. "문제의 전모를 고려할 때, 우리가 진화론의 극단적 형태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와 생명전개론 사이에 필연적인 적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이라는 것과 기적적인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 어떤 형태의 이론도 기독교교리의 커다란 변형과 성경의 권위의 현저한 약화를 가져올 것이다". 핫지가 다윈 진화론의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가져온 무신론적 함의를 부각시킨데 반해, 워필드는 반대로 생명전개론을 통한 창조론과 섭리론의 해석가능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역시 다윈 진화론을 하나의 가설적 이론체계로 보고 무조적인 수용에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5. 나가는 말: 구프린스턴의 과학관이 주는 교훈
지금까지 구프린스턴 신학자들의 변증학적 입장과 그에 근거한 과학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과학관은 일관된 신학적 입장, 특히 변증학적 입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구프린스턴 신학자들에게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사실을 탐구하고 밝혀내는 작업이므로 신학과 근본적으로 대립되거나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과학은 계시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과학의 진리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과학이 신학과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 과학은 자신의 주장을 유보하고 신학의 최종권위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러나 구프린스턴의 변증학의 역사적 모습은 이러한 변증학적 원리에 대한 적용이 항상 일치된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신학과 과학 사이의 상호제약적인 기본입장에 충실한 두 사람의 신학자, 핫지와 워필드가 진화론에 대해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했던 사실은 구체적인 과학이론에 대한 신학적 평가는 신학과 과학의 차이점를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과학과 신학의 공통점을 더 강조할 것인가에 따라 달라짐을 보여 주었다. 핫지는 다윈 진화론의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이론과 성경적 창조론의 신적 작정과 섭리에 대한 교리가 결코 조화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 진화론을 거부했고 워필드는 진화론을 하나의 작업가설로 보면서 성경의 창조교리를 생명전개론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열어놓았다. 그러나 워필드는 다윈의 진화론 모델을 생명역사의 사실들을 밝혀주는 하나의 가설로 인정한 것이지, 이미 확증된 사실에 대한 과학법칙이나 의심할 수 없는 진술로는 보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학자들과 신학자들이 구프린스턴 신학자들의 변증학과 과학관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면 그들이 얼마나 그 시대의 학문과 과학과 치열하게 대결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통해 통합적인 신학을 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신학을 성경계시의 절대성과 경건한 신앙 위에 세우기를 애썼던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졌던 문제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그들은 19세기 미국의 지식인 사회가 가진 특정한 철학에 기초하여 일반 학문에 대한 상당한 낙관주의에 머무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낙관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경험과 이성을 사용하는 학문들의 연구를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기여하는 도구로서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통합적인 신학의 태도를 추구하는 길이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을 되돌아보면서 얻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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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와 미국문화 이 책의 원제는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THE SHAPING OF TWENTIETH-CENTURY EVANGELICALISM: 1870-1925"이다. 원제가 의미하듯 이 책은 20세기(1870-1925) 복음주의의 형성 배경에 대한 글이다. 마스덴은 이 책을 통하여 근본주의 운동내의 긍정적 가치를 재발굴하여 근본주의 운동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였다. 본서가 출간되기까지 근본주의 운동과 근본주의자들은 현대 복음주의 기독교 운동에 백해 무익한, 소위 소수의 모반자, 반지성주의자, 분리주의자 혹은 사회적 책임에 무관심한 반사회주의자로 매도당하며 기독교 주류로부터 소외되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미국의 근본주의 운동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미국 문화의 중심에 자리잡아 왔다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였다. 존 다비로부터 시작한 세대주의 운동이 미국에 이주하면서 여러 주류교단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어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나이애가라 대회이다. 이 대회에서 현대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대적하기 위해 프린스턴 출신 목회자들과 세대주의의 전천년주의자들이 연합하게 되었으며, 그 후 근본주의 운동은 상호 영향을 받으며 미국 기독교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해석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근본주의 운동의 흐름을 정확히 짚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고 다른 한 흐름은 19, 20세기 미국 기독교에서 근본주의 운동을 지나치게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국한시킴으로서 그 폭이 제한적이라고 비판하였다. 저자는 후자의 입장에 속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는데, 문화의 관점에서 미국 근본주의를 재구성하였다. 즉 근본주의 운동은 단순히 신학적인 면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스코틀랜드 상식실재론과 근본주의의 관계성에 관한 논의를 담고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성경의 권위와 상식 실재론과의 상관성은 미국 복음주의 학계 내에서 큰 쟁점이 되어 왔다. 미국 복음주의는 교리가 미국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상식 실재론의 영향을 받아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해석과,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상식 실재론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성경의 무오성과 교리 자체가 그 철학의 영향으로 근래에 만들어진 산물이 아니라 기독교 2천년의 가르침이라는 전통적인 해석이라는 두 개의 해석이 있는데. 마스덴은 전자에 속한다. 전자는 잭 로저스, 도널드 매킴, 마크 놀, 나단 해치 등이 지지하는 입장이다. 그들은 성경의 무오성 교리가 기독교 2천년의 역사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미국학계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스코틀랜드 상식 실재론의 영향을 받아 프린스턴 신학자 하지와 벤자민 워필드에 의해 1881년 처음으로 고안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후자를 대변하는 인물로는 제임스 아이 패커, 프란시스 쉐퍼, 케네스 갠저, 그리슨 아처 등 대부분의 미국 복음주의 학자들이 지지하는데, 1979년 시카고 선언을 통하여 이들의 성경관이 집대성되었다. 미국 신학에 미친 상식 실재론을 처음 거론한 것은 예일 대학교의 종교사 교수 시드니 알스트롬이다. 그는 1955년 Church History지에 '스코틀랜드 철학과 미국신학'이라는 글을 통해 미국 신학이 스코틀랜드 상식 실재론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고 조심스럽게 제기했다. 그후 플러신학교의 잭 로저스가 그의 제자 도널드 매킴과 함께 '성경의 권위와 해석:역사적 접근'에서 그 가능성을 더 구체적으로 발전시켰고, 1970년 샌딘이 그것을 받아들여 성경의 무오성 교리가 1881년 찰스 하지의 아들 A. A. 하지와 벤자민 워필드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관성에 대한 긍정론을 집대성하여 발전시킨 것이 본서 '근본주의와 미국문화'의 내용이다. 본서는 저자가 머리말에서 말하였듯이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와 라인홀드 니버의 영향 하에 '문화'와 연관지어 미국 근본주의를 해석한다. 본서는 근본주의의 발흥에 대한 일반적인 역사의 서술이라기보다는 대표성이 현저한 인물, 집단 혹은 사건들을 실례로 선정하여 종합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Ⅰ. 근본주의 이전 제1부는 위에서 이미 언급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미국의 기독교가 처한 위기적 상황을 설명하고,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의 근본주의와의 노선문제 그리고 무디의 부흥운동을 다루고 있다. 1.위기에 처한 미국의 복음주의 (1870년대) 대부흥운동과 복음주의에 의해 이끌어지던 시대. 상식철학은 실재에의 과학적 접근을 위한 확고한 기초를 제공하였기에 19세기 미국인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미국의 건국에 있어서 상식철학과 경험론은 국가의 도덕질서를 세우는 근간이 되었다. 상식철학에 내포되어 있는, 인간성에 대한 본질적인 낙관적 견해는 미국인들의 기질에 호소력 있게 다가왔다. 미국 개신교의 옛질서는 신앙과 과학과 도덕성과 문명의 상호관계 위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1869년 올리버 웬델 홈즈가 임박한 재난을 예언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성경이 과학적 표준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하였다. 1870년대에 복음주의자들이 홈즈의 명제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위협들의 심각성에 관하여 빈번히 논평하였다. 1873년 복음주의 동맹 모임에서 로스웰 히치콕, 암허스트 대학의 학장 스턴스 등은 기독교가 직면한 위기를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스턴스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래로 그리스도의 종교가 그 가장 순수한 형태에 있어서 지금 이 시대보다 대중의 마음에 더 강한 위력을 발휘했던 적은 없었다"고 하여 복음주의의 승리를 확신하는 언급을 하였다. 또한 프린스턴 뉴저지 대학의 학장 제임스 맥코시가 다윈주의와 성경을 조화시켜 발언한 내용에 대하여(50-) 조지 웰던, 챨스 핫지 등은 양자의 양립이 불가능함을 역설하였다. 로체스터 대학의 앤더슨 총장은 진화론을 '입증되지 않은 작업가설'이라고 주장하여 핫지의 입장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들이 19세기 미국의 기독교 내에서 표출되고 있었다. ** 이제 상식철학과 경험론으로 무마되어오던 과학과의 갈등은 성경비평과 진화론 앞에 새로운 설명을 요구받게 되었다. 2. 노선이 갈라지다. (1880-90년대)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유산에 대한 적어도 형식적인 존경심을, 도덕성, 훌륭한 체통, 질서 등에 대한 깊은 관심과 결합시킨 개신교 중산그룹들, 일명 '빅토리아인들'이 새로운 도시문제, 윤리 사회 노동 정치에 대해 "혁신적 보수주의"의 입장을 보인다. 이들의 목표는 옛질서의 여러측면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되 옛질서의 본질을 보존한다는 것이다. -헨리 워드 비처(1813-1887)는 그 시대 최고의 설교가로서 브루클린 교외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권장할 만한 도덕적 모범으로서 덕스러운 부(富)의 복음"을 설교하였다. 그는 온건 자유주의적 인물이었다. 그는 뉴잉글랜드 칼빈주의의 전통적 "추상적 교리"를 거부하고 상상력을 따르는 낭만주의적 초월적 시대풍조를 따랐다. 그는 과학에 있어서도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과학과 도덕성의 발전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보았다. 새롭게 부상하는 미국의 종교적 자유주의의 몇가지 경향이 여기에서 엿보이는데, 첫째, 하나님 나라의 발전이 문명의 발전, 특히 과학과 도덕성의 발전과 동일시된다. 둘째, 도덕성이 곧 종교의 본질이 되었으며, 또 사실상 종교의 본질과 동일시된다. 셋째, 초자연적인 것은 이제 더 이상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분명하게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자연적인 것 안에서만 자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발생된 이원론은 빅토리아 시대의 종교적 성향과 잘 일치했다. 이제 종교적 목표는 저급한 동물욕망을 극복하는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낭만주의의 영향 -조나단 블랜차드는 도덕적인 점에 대해 타협을 거부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안에 하나의 법 체계,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법 체계를 세우시고 인간의 마음을 창조할 때, 이성과 도덕적 감각이 그 법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이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에 입각한 블랜차드의 가설이었다. 바른 사고는 바른 삶의 원인이었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적이기도 하다. 미국의 남북전쟁 종식 이후 비처와 블랜차드는 미국의 기독교 이해에서 양대 마차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블랜차트 가(家)는 자신들과 성향이 가까운, 죄와 회심 및 거룩한 삶의 근본적 복음 메시지를 전파하는 부흥운동가들과 동맹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870년대 말 무디의 부흥운동과 교류였다. 블랜차드는 사설에서 후천년주의자들과 전천년주의자들(무디)이 상호 일치할 수 있는 점들을 강조하였다. 비처가와의 동맹이 깨어진 후 블랜차드로 대표되는 복음주의의 한쪽은 점차 기득권을 상실한 자들의 운동이 되어갔다. ** 반정립 역시 다윈주의의 영향 아래있다. 3. 무디와 새로운 미국 복음주의 무디는 성경의 무오류성과 전천년설을 믿었다. 그는 많은 근본주의자들이 받아들인 윤리적 강조점과 여러 가지 성결의 가르침을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은 사실상 후대 근본주의의 모든 특징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 가운데 다수가 실제로 20세기에 근본주의 운동을 조직하는 데 직접 참여하였다. 하지만 무디는 논쟁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그는 실용주의적 행동가였다. 그는 추상적인 자유주의에 찬성하지 않았으나 평화가 널리 퍼져야 한다는 희망하에 영향력있는 자유주의자들과도 우정을 쌓았다. 그는 말년의 한 설교에서 "사람들은 이 지독한 논쟁에 피곤과 싫증을 느끼고 있다" "그대의 싸움을 중지하고 일하러 나가 단순한 복음을 전하라."라고 하였다. -무디의 제국은 파라처치의 형태로, 교단과의 연결을 최소화한 자유사업체제의 하나의 종교였다. 젊은이의 훈련에 초점이 모아졌으며, "이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해 수만의 대학생들의 선교열정을 구현하였다. -무디는 '죄인들을 회심시키기 위해' 가장 적합한 것을 찾기 위해 모든 사상을 시험하였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하고 분명하였는데 '3R'이 그의 핵심적 교리를 잘 요약해준다. "죄에 의한 파멸Ruin",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Redemption", '성령에 의한 중생Regeneration"이 그것이다. 그는 쉬운 메시지를 통해 지옥불과 하나님의 진노를 설교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당대 미국의 실용주의적 분위기에 맞춘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회참여 등과 같은 문제는 회피하였는데 복음 전도로 향한 그의 최고 관심을 흩뜨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전도는 사회적 요망 사항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회심은 필연적으로 개인적 책임의식 앙양과 도덕적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무디는 미국 개인주의의 전성기에 활동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그 시대의 일반적 가설들에 의해 널리 확산되었다. 무디는 부흥운동진영을 두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 중 하나가 죄에 대한 승리를 강조하는 성결교리의 새로운 판이며, 또 하나는 전천년주의이다.이런 "세상이 점점 악해질 것"이라는 견해는 그 이전의 구속사역이 미국역사의 영적 도덕적 진보에서 가시화될 것이라는 지배적 전통에서 크게 멀어진 것이다. 근본주의는 항상 배타주의적 호전성과, 성결 및 영혼 구원과 결부된 평화의 정신, 이 양자 사이에서 긴장된 양면적 자세를 유지하였다. 무디의 전통에서는 이 후자의 요소가 그 운동에 지극히 큰 매력을 부여하였다. ** 무디는 오히려 실용주의적이고 공리적인 노선을 취함. Ⅱ. 연합의 형성 이 부분에서는 천년왕국 사상과 성결운동, 기독교 근본 진리에 대한 논쟁과 1910년대의 기독교와 문화에 대한 견해들을 다룬다. 이 시대와 천년왕국(1890년대) 1. 프롤로그: 부흥운동적 근본주의의 패러독스 - 근본주의는 때로 상호 모순성을 보이기도 한 상이한 전통들과 사상적 동향들이 모자이크처럼 뒤얽혀 있는 현상이었다. 이 운동의 한 주된 요소는 기타 온갖 관심사를 영혼구원과 실천적 기독교 신앙의 하위에 두는 현상이었다. 무디가 이 진영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와 가장 가까운 일부 동료들의 입장은 이점에서 현저히 달랐다. 무디는 화해를 깨는 신학적 입장의 표명을 원치 않았다. 무디의 자세는 부흥운동 유산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반대입장(루벤 토리)은 지성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사상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는 근본주의 내의 주요한 조직적 세력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런 차이는 후대의 근본주의 운동의 성격을 보여준다. 후대 근본주의 운동에는, 경건주의 전통의 부흥운동가들과 칼빈주의 전통의 교단적 보수주의자들(특히 프린스턴 신학으로 대표되던 자들) 사이에 동맹현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흥운동 진영 자체 내에도 이 두 전통, 즉 경건주의와 칼빈주의의 완연한 융합 양상이 있었다. 이러한 융합은 대각성 운동에서 처음 기원된 이래 미국 부흥운동의 중요한 양상으로 존재해 왔다. 17세기 청교도 운동은 고도의 지성적 신학을 강렬한 경건과 혼합하고 있었다. 19세기 미국 복음주의는 이러한 감정 강조의 경향 이면에 신조의 수호와 대중적 형식과 조직과 전략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 토레이, 피어선, 고든, 블랜차드, 어드맨, 스코필드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에게는 경건과 신조가 융합되었다. 무디는 지성체계보다는 행동을, 권위주의보다 자유를 선호하는 미국인이었다. 하지만 지성적 측면의 토리에 의한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의 이해가 미국문화와 관계를 설명하는데 단서를 제공한다. 2. 천년왕국론의 두 수정판 후천년설의 세속화- 독립전쟁시에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미국 대의(大義)의 승리와 미국적 원칙의 승리가 왕국의 표식이라고 선포하고 있었다. 이처럼 미국 시민종교가 탄생하면서 영적 소망은 어느 정도 세속화되 민족화되었다.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쟁성 및 민족주의를 안고 있는 문화는 미국적 기독교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지만 복음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종류의 진보를 하나님 나라 도래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미국인이 이런 문화적 진보를 선도할 운명을 안고있다는 신념에 쉽게 도달했다. 자신들이 지닌 기본적인 인식론의 범주를 새로운 자연주의와 역사주의에 의해 깊게 변화시켰던 보다 자유주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남북전쟁이후 점차 후천년적 역사관의 극적인 초자연적 측면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왕국은 인간의 삶과 모든 상호 관계 및 온갖 제도의 지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표현되는 것이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성경을 보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엇으며 진보에 관한 희망이 더 적었다. 그들은 성경이 사실의 문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믿을 만 하고 정확하며 성경의 의미는 명백하고, 가능할 때는 언제나 그 뜻이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리스도의 나라는 결코 이 시대에 혹은 인류의 자연적 발전에서 실현되지 않고 전적으로 미래에 존재하며 기원에 있어서 완전히 초자연적이고 이 시대의 역사와는 불연속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바로 이 점이 전천년설과 다른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천년왕국 사상의 전개는 당대의 독특한 역사관을 전개하는 지성적 성향과 19세기의 문화의 세속화 현상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 등과 맞물려있다. 이 두가지 요인의 집합은 물론 각개 요인으로부터 그 운동의 독특한 점들에 대해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결국 천년왕국은 역사철학의 여파와 자기변호적인 과학과의 일치에서 변증적으로 파생되었다. 3. 세대주의와 베이컨적 이상 세대주의는 17세기초 객관적인 경험론적 방법의 주창자였던 베이컨적 이상 및 그에 기반을 둔 스코틀랜드 상식실재론의 영향을 받았음을 설명한다. 세대주의자들의 문자주의와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에 대한 부동의 믿음, 성서의 "정확무오"에 대한 믿음 등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전제하에 주장된다. 이런 전제들은 보다 경험론적 성향의 성결교 전통이나 대중적이며 분파적이며 구어체 지향적인 오순절주의와 구별시켜준다. 이런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성경해석체계라는 것은 신학교가 아닌 소규모 성경연구그룹의 개인적 수준에서 근본주의가 발전하도록 하였다.세대주의와 결부된 지성적 경향은 근본주의에 특유의 색채를 부여하였다. ** 결국 과학과의 조화 혹은 일관성을 위해 성경무오설이 등장했다는 주장. 4. 역사, 사회 그리고 교회 역사 -세대주의자들이 인간을 거대한 우주적 투쟁(그리스도의 군대와 사탄의 앞잡이 간의)의 한 일원으로 보는 역사관은 19세기 중엽의 다윈과 마르크스의 사상, 지질학적 대격변주기등의 영향을 받았다.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의 역사를 지질학적 대격변주기와 동일한 방법으로 해석하였다. 세대주의에 의하면, "무죄"시대는 에덴에서의 타락과 함께, "양심"의 시대는 대홍수와 함께 끝났으며 "인간통치"시대는 바벨에서 와해되었으며, "약속"의 시대는 애굽에서의 노예생활로 종지부를 찍었다. "율법"시대는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로 최후를 맞았다. "은혜"시대는 대환난으로 종료된다. 천년 왕국 시대조차도 사탄이 "잠깐 놓임"(계 20:3)과 더불어 끝을 맺는다. 사회 -세대주의 전천년주의자들의 견해에는 사회적 혹은 정치적 진보의 여지가 없는 비관주의에 머문다. 세대주의자들은 사회적 혹은 정치적 문제들 그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다. 문명의 쇠퇴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명에 대한 환멸을 반영하는 당시의 비관적 양상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대두에 기여했다. 교회 -종말의 표적들 가운데 하나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천년주의자들은 선교 운동에 열정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교도 민족이 곧 회심하리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미국교회의 현상태보다 선교의 전망에 더 실망했다. 그들이 교회의 쇠퇴가 불가피하다는 부정적 입장이면서도 자교단으로부터의 분리를 자기 신조의 필연적 결과로 보지 않은 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종교를 일차적으로 제도적 차원보다는 개인의 차원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중요한 영적 단위는 개인이었다. 교회는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에 의해 연합된, 성화된 개인들의 집합체로 존재하였으며 부차적으로는 특정목적을 가진 영적 존재들의 네트워크로만 존재하였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들은 세상과 문화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다만 "개인이 어떻게 영적으로 분리된 승리의 삶을 사느냐"에 대하여 가르쳤다. ** 미국교회는 교회에 대한 이해에 있어 개인중심의 신앙의 파생물로서 교제권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성결운동 1. 승리하는 삶 -'성결운동', '오순절운동', '근본주의'등으로 불리게 된 종교 운동들은 1870-1890년 성령에 관한 관심의 고조가 미국 복음주의를 휩쓸던 때에 등장하였다. 성결운동은 근본적으로 감리교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성결 교리의 다수 작가들이 칼빈주의적 성향을 지닌 전도자들과 성경교사들이었다. 무디의 조력자들은 성령사역을 이끌었고 칼빈주의적 전도자들 및 성경교사들의 성결교회와 세대주의적 가르침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19세기 미국 복음주의의 성결교리는, 현 시대가 성령 부음의 시대이며, 성령부음의 시대는 사도행전의 첫 오순절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상에 기초를 둔다. 세대주의의 핵심적 가르침-즉 교회시대가 독특한 성령 시대라는 이론-도 역시 바로 그 점을 비중을 두고 있었다. 성결파 가르침은 웨슬리의 감리교는 물론 이전의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에도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사실상 세대주의의 수용을 위해 길을 닦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 거의 모든 미국 부흥운동에 영향을 주었던 웨슬리 전통 내지 감리교 전통은 말과 행위로 증명되는 개인적 체험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증거는 이성과 과학에 입각한 성경 권위의 변호와 충돌할 이유가 없었다. 감리교측 성결 운동의 주창자들과 나중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성경의 객관적 권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접어두고 체험을 중점적으로 역설한 반면, 세대주의적 성결파 교사들은 둘 다 강조하고자 하였다. 감리교측 성결파 전통과 개혁주의 성결파 교리를 접속시키고 있던 것은, 18세기 요한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이었다. 웨슬리는 성경이 인간에게 "완전하라"고 명한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하였다. 성경이 명하였으니 이 상태는 반드시 도달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반면 개혁주의 및 청교도들은 금생에 완전을 이룰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충돌되던 양자의 견해는 19세기 전반 미국 복음주의 부흥운동시에 하나로 종합되었다. 챨스 피니는 양자를 종합하였으며 1840년까지도 감리교의 성결에 관한 가르침과 아주 흡사한 것을 개혁주의에 소개하였다. 피니와 그의 동료들, 특히 에이서 메이헌(Asa Mahan)은 완전주의의 수정판인 오벌린 신학을 발전시켰다. 바르게 선택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중생을 넘어 성령의 특별 사역이 의지를 완전히 압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인간의 자유로운 중개행위와 하나님의 은혜로운 권능에 대한 완전한 의존성을 둘 다 인정하는 개념의, 이러한 특별 사역이 있을 경우, "금생에서 완전한 성화가 획득될 수 있다"고 보았다. 1840년부터 1870년까지 개혁주의자들에게는 피니가 감리교도들에게는 푀베 팔머(Phoebe Palmer)가 영향을 주었다. 팔머부인은 뉴욕시에서 "화요 모임"을 통해 성결의 갱신을 촉진시켰다. 성경 연구와 기도, 찬양, 개인적 간증을 위한 크고 작은 규모의 그러한 집회는 성결을 부각시키고 복음주의적 가르침을 확산시키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팔머부인의 사역은 1867년 '성결운동 촉진을 위한 전국 캠프 집회 협의회'(National Camp Meeting Association for the Promotion of Holiness)의 창설에 영향을 주었다. 팔머의 가르침의 핵심은 거룩한 헌신 행위에 의해 획득된다는 극적인 제2의 축복이었다. 이 헌신행위는 "제단 위에 모든 것"을 올려놓는 다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관건은 믿음의 행위였다. "당신이 성화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성화된다" 그 결과는 바로 지금 모든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 현재적 순결화(성화)였다. 19세기 말 이 체험은 "성령세례"로 널리 묘사되었다. 남북전쟁 이전 웨슬리안 감리교와 자유감리교회가 창건되었고 1865년 윌리엄 부스는 동부 런던에서 "기독교 선교회"(1880년에 구세군으로 됨)를 조직하였고 1880년 하나님의 교회(인디애나 주 , 앤더슨)가 창립되어 성결파 교리를 가르쳤다. 주로 캠프 집회운동으로부터 분열해 나와 결국에 가서 나사렛파나 필그림 성결교회 등을 형성했다. 한편 개혁주의 전통 내의 복음주의자들도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1858년의 부흥운동은 성결파 가르침을 특색으로 하는 소규모 기도모임을 낳았다. 1870년경에는 미국 개신교 부흥운동 어느 곳에서나 성결파의 사상이 퍼져잇엇다. 1873년에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영국에서 초기 무디 부흥운동 시기에 등장한 피어솔, 한나 스미스, 윌리엄 보드먼의 성경 연구와 성결운동 집회가 열렸다. 이듬해에 보다 큰 대회로 발전하였고 1875년에 케직의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District)에 영구적으로 정착하였다. 영국 국교회 성직자 웨브 피플로(H. W. Webb-Peploe)가 근 50년간 케직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금생에서 죄악된 본성이 근절될 수 있다고 믿은 감리교 유형의 완전주의에 반대하였다. 그런 생각은 결국 그리스도보다 자아를 신뢰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그들은 금생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본성의 원초적 부패성으로부터 발생하는 죄로 얼룩져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케직의 생각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는 170-172쪽을 참고할 것). 1870년대 중반 이후 케직형태로 수정된 성결파의 가르침은 미국으로 돌아가 무디의 사역과 연결되었다. 1871년 무디는 성령체험을 하였는데 그의 체험은 "바로 그 기쁨의 현장에서 자신이 죽지 않도록 하나님께 손을 멈추어 달라고 간청해야만 했다"고 말할 정도로 강렬하였다. 케직의 가르침은 무디가 영국에 있는동안 발생했고 교리적 논쟁을 피하고 실천적 경건과 봉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무디의 사역과 흡사하였다. 무디는 케직의 견해를 모두 따른 것은 아니지만 그와 매우 유사한 견해들을 가르쳤다. 케직의 가르침에 있어서 무디의 조력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이슈는 "봉사를 위한 권능"이라는 실천적 개념이었다. 특히 증언을 위한 권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종말론, 성령세례, 케직, 성결운동 1980년대 제자훈련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테제들이었다. 2. 성결운동의 사회적 차원 세대주의와 케직에서 두드러진 인물이었던 아더 피어선은 구제선교, 시 복음화, 고아사업, 대학생과 청소년 운동, 여성 사역, 성경학교, 온갖 종류의 선교, 극빈자들 사이에서의 복음전파, 교회 연합을 위한 노력, 의료선교, 신유 기도와 영적 삶의 증진 등을 비롯해 광범위하고 다양한 "인류애적, 선교적, 영적 운동들"을 논하였다. 이것은 성결운동의 사회적 차원을 강조한 것이었다. 1894년에 개최된 브루클린 대회는 "삶과 봉사에 있어서의 성령"이란 주제를 내걸어 사회적 관심을 표명하였다. 남북전쟁 이후 시대의 전천년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이 특정한 성결파 교리를 수용했든 하지 않았든, 신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성화 사역에 대한 그들의 강조는 강력한 도덕적 추진력을 제공함으로써 영혼 구원의 열성을 보완하였다. "사회사업 조직을 갖춘 제도적 교회"형태(성공회 스티븐 팅 부자의 홀리 트리니티 성공회 교회: 빈민구제에 힘을 기울였고 뉴욕의 빈민들을 위해 교회의 일년 수입을 제공)는 개신교도들이 복음 전파와 사회사업 및 공동체 봉사를 한데 묶을 수 있는 주요한 방법이었다. 심프슨(A. B. Simpson)은 1880년대에 도시빈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독교 및 선교 동맹을 창립하였다. 동 시기에 들어온 구세군도 도시의 소외 계층을 위해 유사한 사역을 실시하였다. 1880년대에 이들 조직체들은 다수의 구조 선교회, 타락한 여성들을 위한 보호소, 구제 프로그램들을 세우고, 이민자들 중에서 일하며, 빈민들에게 직업을 구해 주었다. 복음 전파가 언제나 그들의 중심 목표였으나 사회 사업과 복음전도 사업이 병행하였다. ** 빈민과 연관된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반작용과 당시 산업혁명의 부작용이 사회에 보편화되는 것에 대한 실천적 성찰이 일어났다. 3. 대반전 1900년경부터 1930년 사이에 대반전이 일어났다. 이 시기 모든 진보적인 사회 사업은 정치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부흥운동적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의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매우 작은 역할로 좌천되었다. 1865년부터 1900년까지, 칼빈주의적 전통으로부터 경건주의적 견해로 변천한 과정이 변화의 요인을 제공하였다. 즉 칼빈주의 전통은 정치가 하나님의 나라를 진보시키기 위한 의의 깊은 수단이라고 보았던 반면 경건주의적 견해는 정치적 행동을, 악을 억제하는 수단 이상의 것으로 보지 않았다. 또한 성결파 운동의 발흥은 율법의 시대의 종말과 성령시대의 도래를 통해 세대주의적으로 복음을 사적 차원에서 보도록 규정하였다. 대반전의 제2차 단계는 1900년경부터 1930년 사이이다. 이 시기에 세대주의 혹은 성결파적 교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공공복지를 위한 사업에 너무 깊게 개입하는 것을 꺼렸지만 모든 사회적 활동과 관심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종교적 요인과 함께 대 반전의 이면에는 사회적 요인도 작용하였다. 무디 시대로부터 1920년대 근본주의 논쟁을 통과하기까지 이 부흥운동적 복음주의 운동의 지지권은 주로 개신교 백인 중류 계급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요인은 불충분한 설명이다. 결정적인 요인은 1900년 이후 일어난 자유주의적 사회복음에 대한 근본주의의 반응이다. 1차 대전 당시에는 '사회적 기독교'가 자유주의와 철저히 동일시되어 가고 있었으며 많은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었다. 근본주의자들은 무엇이든 사회복음같이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전의 복음주의자들은 공적인 혹은 사적인 사회적 프로그램들을, 그리스도의 중생 사역의 보완적 부산물로 이해하였다. 죄에 대한 회개 이후 그에 합당한 삶이 따라야 했다. 그러나 사회복음은 정치적 문제에만 비중을 두었다. 월터 라우센부시는 '하나님이 관심을 보이는 유일한 것"은 "종교적 윤리"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신앙의 선언 및 신학적 교리는 도덕적 행위 특히 사회적 행위의 자극요인이 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태도와는 반대로 보수 복음주의자들은 진리가 실용주의적 테스트에 의해서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도 확인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하나님은 행위에 대해서만큼 신조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신다는 것이 그들의 견해였다. 사회 복음이 사회적 관심사를 배타주의적인 방식으로 강조한 것은 보수적인 이들에게는 위험 요소로 보였다. 그들은 사회복음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음으로써 획득되는 영원한 구원의 메시지의 의의를 잠식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유주의에 대한 공격이 가열되면서 부흥운동과 사회복음을 둘 다 견지 할 수 있다는 입장은 점차 방어하기가 곤란해졌다. 1차 대전 이후 미국의 중산층의 자신들의 현상 유지에 대한 갈망이 일단의 견해에 고착된 상태로 머물러, 반자유적이며 동시에 비사회참여적인 형태로 동결되었다. 4. 성결운동과 근본주의(1900-1910년대) - 1899년 무디 사후에 복음주의 운동 내에서는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다. 세대주의 운동은 휴거가 '대환란'이전에 일어나느냐 이후에 일어나느냐를 놓고 양분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찰스 파햄과 시모어의 오순절 운동의 등장이었다. 이들은 감리교의 성결파적 견해, 즉 죄악된 본성이 근절되는 완전 성화의 '제2축복' 후에는 제3의 축복, 즉 방언을 수반하는 '성령세례'가 온다고 주장했다. 무디성경학교와 성결파 교리의 저술가 힐스와의 논쟁은 곧 감리교측 성결파와 케직교사간의 반목으로 이어졌다.케직은 완전한 성결을 부정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장로교 정통주의에서는 케직이 서로 모순되는 캘빈과 알미니우스를 동시에 붙잡으려한다고 비난하였다. 사실 인간의 자유의지와 개인의 체험, "간증"을 중요시하는 것이 미국의 부흥신학이다. 케직의 가르침은 성경학교 운동에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를 보완해 주는, 최소한 두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첫째로, 케직의 가르침은 신앙에 대한 중요한 주관적 확증을 제공해줌으로써, 이것을 성경과 상식으로부터 나온 객관적인 논증과 병행될 수 있게 하였다. 둘째로, 전천년주의는 사회 전반에 대한 성령의 정복적 권능을 낙관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이런 평가를 포기하는 입장이었으나, 케직은 개인적 "승리"를 약속해 주었다. 1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 개신교의 지배요소는 그래서 개인적 경건, 낙관주의, 행동주의이고 이것은 논쟁을 유발시키는 특징을 수반하고 있었다. ** 케직은 근본주의적 비관주의와 계몽적 미국 낙관주의, 성결파적 체험 중심주의와 장로교적 이성중심주의의 변증적 도출이었다. 1. 논쟁의 소용돌이 -세대주의와 성결교리가 발생한 사회적 원인들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국부적 원인을 따져볼 때, 양자가 문화적 상태에 대한 반응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두 운동은 어느 것도 근본주의와 동일한 시공간을 점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각각, 당시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던 근본주의 사상에 중요한 요소를 보태주었다. 이들을 그 자체로서 근본주의의 일부가 되도록 만든 것은, 명백했던 세속화의 한 측면, 즉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에 대한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반발이었다. 1870년대 후기부터 주요 교단 내에서는 보수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 사이의 대립이 있어왔다. 현대주의에 대처하기 위해 보수주의자들, 세대주의자들, 성결운동가들이 근본주의와 손을 잡았다. 여러 교단에서 아주 강렬하게 토론된 것들은 성경의 권위, 성경의 과학적 정확성, 혹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초자연적 요소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교단들의 독특한 교리들이나 전통들을 놓고 그와 유사한, 그리고 그와 밀접하게 관련된 논쟁이 벌어졌다. 예컨대 장로교인들 사이에서는 엄격한 칼빈주의, 침례교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침례가 그런 논점이었다. 거의 모든 교단이 그러한 모종의 이슈로 싸움을 겪었다. 남북전쟁기 남부의 신학은 강한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신학적 보수주의는 후대의 근본주의를 닮은 많은 특징들을 창출해 놓았다. 여러 중요한 근본주의 지도자들이 남부출신이었다. 청교도와 스코틀랜드 철학 및 베이컨의 영향을 받은 남부의 사고는, 성경은 다윈의 가설같은 사변적 가설들과 반립하는 엄연한 진실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극히 존중하도록 자극하였다. 남부에서 현대주의는 발을 붙힐 수가 없었다. 남부가 보수적 견해로 정리되어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부에서는 새로운 종교적 이상들을 부추긴 문화적 변화의 세력이 너무나 강하였으므로 논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북감리교와 미국 성공회는 최초 이런 현대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교수를 퇴임시켰으나 1908년 송사 이후 이런 공판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지역적 자율성이 한층 더 많이 보장되었던 침례교는 다양성도 한층 더 크게 발전하는 가운데 주요 파당들, 즉 교단적 전통주의자들,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들, 공공연한 자유주의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고백주의적 칼빈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뉴잉글랜드 침례교회) 교리적 자유를 강력히 역설하였다. 비교적 개방적인 이런 분위기에서 성경 비평과 자유주의적 신학 경향이 북미주 연합의 침례교 가운데에서 일찍 출현하였다(그 실례는 235-237을 참조할 것). 침례교 내에서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견해들은 서로에 대한 관용과 공개토론의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보수주의의 조화와 협력과 행동주의 정신 그리고 대다수 평신도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2. 장로교와 진리 북장로교인들 사이의 논쟁은 치열하였다. 장로교인들은 개교회주의적인 침례교와는 달리 교권적 치리회를 두고 있었기에 신학적 차이점의 공존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장로교 보수파는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와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유산을 이어받았다. 이들은 고도로 명료하고 극도로 신학적인 종교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앙고백과 대소요리 문답은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1729년 이 신조가 채택된 이후 이들은 이것들에 대한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미국을 형성하는데 역시 일익을 담당하였던 뉴잉글랜드와 영국 청교도 전통 출신 장로교인들은 신조에 대한 보다 폭넓은 해석을 주장했다. 이들은 부흥운동과 관련을 맺었다. 부흥운동은 19세기 초엽과 중엽 신 학파(New School)운동에서, 보다 융통성 있는 칼빈주의의 변형판을 가져왔다. 펜실베니아, 프린스턴 신학교, 남부에서는 그 세가 강했던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구학파(Old School)는 뜨거운 경건주의적 혈통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교리에 치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표준이 성경이 내포한 교리체계를, 인간적으로 가능한 한도 내에서 사실과 가장 가깝게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프린스턴을 중심으로 한 장로교의 논쟁과정은 247-264을 참고할 것). 상식철학의 난제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신학적 도덕적 일탈의 현실이었다. 워필드는 이를 화란의 바빙크와 카이퍼의 견해를 참조하여 제1원리에 대한 편향적 시각으로 인해 이런 오류들에 매몰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1890년대 장로교의 방어전략-교권적 조처와 소수근본교리의 방어에 전념-은 근본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근본주의 5개 조항"은 1910년 장로교 5개항을 따른다: 성경의 무오성,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 육체적 부활, 기적의 진정성. 장로교와 근본주의의 연합은 1903년 결성된 Bible league of north america를 중심으로한 잡지 Bible champion을 통해서였다. 3. 근본 진리들 "The Fundermentals"(1910-1915)紙는 현대주의에 반대하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연합전선을 상징한다.고등비평의 문제점 지적과 이단 주의의 논박, 복음설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전천년설이나진화론에 대해서는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기독교와 문화에 대한 1910년경의 네가지 견해 - 전천년주의의 문화적 비관론은 Our Hope의 편집자인 아르노 게벨라인, 1910년 '시대의 표적'을 저술한 뉴욕시 제일침례교회의 목사 아작 핼디먼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핼디먼은 기근, 지진, 역병, 전쟁 혹은 군사력 증강 등은 때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겼다. 한편 기업가의 새로운 부(富)는 시대적 종말을 보여주는 특징들이고 유럽도시들의 상업적 유대관계와 교류는 바벨론의 문자적 재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는 대부분의 개혁을 점증하는 사회주의의 위협과 연결지었다. 그는 이 사회주의를 무정부주의와 동일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개혁이 연상시켜준 것은 "무법"의 확산에 대한 예언이었다. 민주주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2. 중도적 입장의 긴장상태 - 1914년에 미니애폴리스 중심가의 한 교회 목사였던 라일리는 "의미심장한 시대의 표적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핼디먼과 게벨라인과는 달리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다수의 지도적인 전천년주의자들처럼 라일리의 배경에는 부흥운동과 경건주의식 사회개혁이 결합되어 있었다. 제도적 측면에서 이러한 결합의 강점 가운데 하나는 활기찬 도시 목회의 건설이었다. 그는 강력하게 사회 개혁을 주창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의해 도시로 부름을 받았다고 그는 말했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도시에서 도시의 죄뿐만 아니라 도시의 고통도 보아야 하며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자에 맞서 가난한 자의 편에 서야 하며 자본가에 맞서 정직한 노동자 편에 서야 한다고 단언하였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일해야 하며 시의 공직에 개혁자들을 선출하고 도시의 모든 악덕을 없애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는 특별히 도시 개혁의 임무를 위탁받았다"고 역설하였다. 3.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기독교 문명의 보존 - 브라이언은 문명에 있어서의 성경과 종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특히 금주와 평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세기 전반기에 기독교적 경건의 이상들은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미국의 국가적 이상들과 병행하였다. 이러한 이상들은 성경 안에 계시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상식적인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신적인 법 안에 계시되어 있었다. 평화와 세계적 조화의 희망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남북 전쟁이후 다소 손상을 입었던, 복음주의 유산 안의 낙관주의적 기질에 속한 것이었다. 그의 사고 안에는 신적인 법에 대한 믿음과 미국이 도덕적으로 세계를 선도할 운명에 있다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었으며, 나아가 "인간이 일단 진리를 보고 이해하기만 하면 즉각 전심으로 그 진리를 수용케 된다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끈질긴 믿음"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의 기독교 정신은 1911년 위노나대회(297-298)의 정신과 유사하였다. 양자는 각각 전통적 기독교를 보존하려는 열망과, 견해가 다른 이들과 기꺼이 협력하려는 자세 및 실제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강조를 동시에 표출하였다. 이런 요소들은 그 시대 보수 복음주의 대부분에 전형적인 것들이었다.기독교는 문명을 진보시킨다는 믿음이다. 4. 말씀으로 문화를 변화시킴 - 구학파 전통의 후예들은 문명의 복지에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이 세대에 하나님 나라의 표적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하였다. 그 관심의 가장 강한 표출 가운데 하나가 워필드의 후천년주의에서 출현하였다. 그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 예수가 단순히 전쟁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러 나오신다"고 생각했다. 악이 완전히 제거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으나 그리스도의 재림 전 온 세계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교회의 영적 '황금시대'가 앞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이 시대의 하나님 나라 발전에 관해 워필드보다 제한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메이첸은 1912년 프린스턴 신학교의 개강식 강론에서 "문화와 기독교"의 문제를 다루었다. "교회의 거대한 위기가 주로 지성적 영역에 놓여있다. 복음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는 지성적 풍토에 기인한다. 싸움의 열쇠는 대학에 있다. 문화적 위기는 지성적 위기에 근거하므로, 문화를 회피하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메이첸의 관심은 문화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예술과 과학을 파괴하고 거기에 무관심하기보다 오히려 우리는 지극히 진실한 인도주의자의 열성을 다해 그것들을 장려하도록 하자. 그러나 동시에 우리 하나님 섬김에 그것들을 거룩히 바치도록 하자"고 하였으며, 기독교는 "단지 모든 족속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사상 속에도 깊이 침투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간의 차이를 지우거나 혹은 반면에 세상에서 물러나 일종의 현대화된 지성적 수도 생활 속으로 은둔하는 대신, 세상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기 위해 즐거이,열정적으로 나아가도록 하자"고 하였다. 이것은 개혁주의 전통이었다. 개혁주의 전통은 메이첸이 표현한대로 모든 문화를 하나님 섬김에 거룩히 바치는 것이 종교적 의무이자 장기적인 실제적 요망 사항이라고 보았다. 그는 계속 넓은 마음과 인도주의적인 자세를 유지하고자 했으며 무디성경학교, 브라이언, 선데이와도 함께 했다. Ⅲ. 위기시대:1917-1925 1. 제1차대전,전천년설,미국근본주의: 1917-1918 제1차대전 초기 평화주의와 국가에 대한 충성을 부인하던 전천년주의는, 전쟁을 통해 미국에 대한 충성은 야만에 대항하는 문명을 옹호하는 의무라는 견해로 급변한다. 공격하는 편에 섰을 때, 혹은 평화기에는 평화주의자이던 그들이 수비하는 전쟁에서는 전쟁을 옹호하게 된 것이다. 반정치적이던 근본주의는 1918년 전쟁이 끝날 무렵은 미국의 기독교 문명 옹호를 주요목표 가운데 하나로 삼을 만큼 애국적 성향으로 바뀌었다. ** 지성적 기반은 메마르기 쉬우나(유연성 없이) 감성적 기반은 어떤 경험에 의해 너무 다른 입장으로 급변할 수 있다. 2. 근본주의와 문화적 위기:1919-1920 전쟁직후 위기의식은 도덕적 토대의 붕괴와 볼셰비키 사상에 대한 것이었다. 전천년주의자들은 급속히 복음전도와 기도, 대망사상보다 퇴보적 경향의 저지에 관심을 쏟았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교리적인 것이었다. 즉 반민주주의적 진화론 철학에 대한 공격이었다. 전쟁의 영향이 근본주의 운동에 새 문화적 차원을 부여한 것이다. 사회위기의식은 새로운 유형의 근본주의 지도자, 도덕적 개혁가를 전면에 부상시켰다. (윌리암 라일리) 이러한 애국과 복음전도와 성경주의의 상호결합 위에 복음주의 진영의 재결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전천년주의의 악덕에 대한 공격은 청굗 전통이 도덕적으로 억압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대중의 관념과 근본주의를 하나로 얽어매는데 일조하였다. ** 전쟁의 승리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역할에 기독교적 소명감을 부여케 하였다. 3. 근본주의의 양면공세:1920-1921 교회에서의 전통신앙교리를 부인하는 자들과의 투쟁, 미국문화에서 반진화론 투쟁을 개시하였다. 자유주의적 초교파 세계운동의 저지와 침례교내 신조의 채택, 선교사업을 통한 연대의 강화가 나타났고, 반진화론 이슈는 전천년주의와 교단적 근본주의의 중심인 북부에서 남부까지 급속히 확산되어 전국적 관심사로 대두되었다. ** 승리에서 온 현대주의를 미국에서 몰아내야한다는 투지와 문제의 핵심을 현대신학과 진화론으로 파악하는 판단이 어울어진 행동이 나타난다. 승리는 때로 자기자리를 떠나게 한다. 4. 자유주의자들은 각 교단에서 밀려날 것인가:1922-1923 해리 에머슨 파스딕의 1922년 설교를 통해 침례교는 근본주의자의 분리로, 장로교는 자유주의의 패퇴로 막을 내렸다. 메이쳔의 "기독교와 자유주의"는 자유주의를 기독교가 아닌 새로운 종교로 인식하도록 했다. 5. 공세의 차단과 분열:1924-1925 매슈스는 이에 대해 "현대주의의 신앙"에서 복음주의적 기독교를 이해하고 이를 살아있는 사람들의 필요에 적용하는데 있어 과학적, 역사적, 사회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현대주의라고 정의한다. 이의 기본전제는 개념이나 믿음이라는 것이 외적 실체의 거울이 아닌 진화론적 문화적 발달로 형성된 마음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그래서 하나님이 된 인간 안에 계시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안에 계시되었으므로, 완벽한 도덕적 삶을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와 같이 실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진보의 법칙이며 인간사회가 안전하게 세워질수있는 토대라는 것이다. 이 무렵 승리는 근본주의로 기우는 듯 보였다. 그러나 교단의 분열로 몰아가는 근본주의 급진파에 온건한 보수파가 제동을 걸면서 급격한 분리주의자들의 쇠퇴와 입지의 약화를 가져왔다. 교리적 순결의 보존과 복음전파의 진척에는 뜻을 같이한 양세력이 분리문제에서 갈라짐으로써 이 운동의 사멸을 자초한다. 6. 에필로그:전위,재배치,재기: 1925-1940 1925년 진화론 교사에 대한 테네시 데이턴 재판에서 제닝스 브라이언이 클래런스 대로에게 당한 반대심문과 조롱은 여론을 급속히 근본주의에 적대적으로 돌변시켰다. 이때부터 대중에게 근본주의는 농촌적, 전근대적, 몽매주의의 동일어로 비취게 된다. 이 후 근본주의자들의 스캔들은 이런 여론의 악화를 더욱 가중시키고, 편집증적 문체는 대중과의 격리를 심화시켰다.모든 교파에서 스스로 혹은 결의에 의해 밀려난 근본주의자들은 따로 신학교와 교단을 만들게 된다. 1930년대 이후 이제 근본주의는 이들 스스로 근본주의자라고 불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세대주의자들과, 교단내 잔류한 세력, 이런 흐름에 이끌려 새롭게 들어오는 독립적인 성결교, 오순절파 그리고 이민교단에 의해 다시 재성장을 이루었다. 이제 이런 새로운 포스트근본주의 연합체는 복음주의로 다시 불리우며 비록 복음주의적 하위문화가 "근본주의"를 의미상 지나치게 배격하지만 이 말은 근본주의의 가장 큰 투쟁(교리의 수호와 현대사상의 비판)의 특성을 묘사하는 유용한 단어로 남아있다. IV. 해석 1. 사회현상으로서의 근본주의(문화위기에 대한 배타성과 신조의 강조) 근본주의는 종교적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1차 대전에 뒤이은 문화적 위기의식이 이 운동을 중요한 여러 방향으로 모양짓고 수정하였다. 급진적인 성결운동 및 오순절 집단과는 달리 근본주의는 사회의 변두리에만 존재하기 힘들었다. 근본주의는 일부 부유 계급과 일부 빈곤 계급에 호소력이 있었으며 또한 특별히, 그 포부와 이상이 본질적으로 중산층 빅토리아풍이었던, "존경할 만한" 개신교 및 북유럽 노동자 계급에 호소력이 있었다. 모든 종교 집단은 특정 사회 기반에 따라 그 특성이 달라진다. 사회적 요인들은 종교 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며, 또 이것들은 명백하게 확립된 투철한 신앙 이외의 일반적 종교 행동을 예측하게 해주는 최선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또한 근본주의 체험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혈통을 가진 미국 개신교도들에게, 다른 인종 집단의 이민 체험과 유사한 무엇인가를 제공했다. 근본주의의 지도층은 주로 앵글로 색슨 집단에서 나왔다. 이들은 바다를 건너와 터전을 잡는 이민의 직접체험은 없었지만 그들도 유사한 체험을 하였다. "국내 이주자들"인 이들은 무수한 경쟁적 이상들을 가진 문화에 직면하여 나름대로의 세력권을 형성하였고 도시에서 응집력을 가지고 개인적인 투철한 신앙과 신조에 큰 강조점을 둔 현상이다. 2. 정치적 현상으로서의 근본주의 (미국적 정치화) 정치가 아닌 신앙과 신학이 근본주의자들의 전반적 시각형성에 있어서 수위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화적 체험은 이차적 문제 특히 정치관의 형성과 많은 관계가 있었다. 진보적인 정서의 소멸은 자유주의의 사회 복음 지지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반발과 관련된 복합적 현상이었다. 그들은 현대주의와 진화론 뿐 아니라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해서도 불안감을 가졌고 때로는 반유대적 정서조차도 여기에 흡수되었다. 동시에 근본주의자들에게는 무조건적인 애국심이 자라고 있었다.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국가여야 한다는 후천년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조직적인 정치사상은 드러나지 않지만 근본주의자들은 보수적이고 공화적인 색채를 가졌다. 1차대전 이후 정치화는 우연이었다. 그들은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 표류하여 보수로 밀려갔다. 위로부터 물려받은 선입관과 상투적 신조에 입각하여 이슈들에 우발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것은 선과 악의 투쟁이라는 역사관의 구도 자체에도 원인이 있다. 연계된 사회주의, 진화론, 유대주의는 투쟁의 대상이라 생각하고, 이 투쟁은 신학과 교회를 넘어 학교로까지 확대되었다. 3. 지성적 현상으로서의 근본주의(상식철학적 과학이해) 근본주의는 진정한 과학은 사실에 입각하지만 진화론은 단순한 가설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일단의 박약하고 사변적인 가설들을 선호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사실들을 배제하는 세계관은 아주 불합리하고 그 결과가 참담한 것이었다. 이것은 베이컨적 과학적 사고의 모델과 인식을 해석과정으로 보고자하던 칸트 이후 철학적 전통과의 패러다임의 충돌이 빚은 현상이다.양측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의사소통도 불가능했다. 근본주의의 연합 또한 이런 자유주의에 대한 공동전제가 잇어 가능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 최우선적인 영원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진리는 불변하고 진정한 과학과 양식에 의해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견해이다. 그들은 성서의 사건을 사실로 인정하여 과학적 증명과 과학에 연관지어 설명하였다. 양식을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신앙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이런 견해는 상식철학에 근거한 것이다. 근본주의는 자체의 기독교 신앙을, 진리와 도덕에 대한 19세기의 특정 미국적 사상과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4. 미국적 현상으로서의 근본주의 근본주의적 신앙은 미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만큼 뚜렷하고 침투적인 역할을 한 곳은 거의 어디에도 없었다. -사회적 요인들 미국의 인종적, 교단적 다양성은, 새로운 지역적 다양성까지 가세해, 새로운 사상에 대한 수용 혹은 불용과 관련하여 독특한 경향을 창출하였다.영국은 안정적 사회에 오래된 의사전달의 통로가 잇엇고 지방교구까지 대학의 이슈가 잘 전달되었으나 미국은 이런 차이가 투쟁을 야기했다. 또한, 가치기준 형성에 주도적이었던 미국 복음주의의 TRANSPOSITION은 더욱 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종교문화적 전통 저항없는 부흥운동을 가졌던 전통은 부흥운동에 의해 촉진된 성경주의와 초대교회주의를 형성했다. 성경주의는 종교적 개인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부흥운동으로 고무되었다. 근본주의는 초자연과 자연의 엄정한 차별을 두었다. 이는 부흥운동의 일반적 추진력이 구원받은 자와 잃어버린자 간의 반정립에 대한 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음과 관계있다. 따라서 자연과 초자연의 반정립이 아닌 종합에 기초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과학적 자연주의의 특징을 이루는 주제들이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었다. 다윈설과 고등 비평은 둘 다 자연적 발전 과정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은 부흥운동의 인식적 기초에는 용납될 수 없는것이었다. 또한 오랜 칼빈주의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은 엄밀히 공식화된 종교적 진리의 진술에 대한 지성적 동의를 요구하였다. 근본주의에는 미국의 이러한 문화적, 종교적 전통에 이미 강력히 자리잡고 있던 교리적 경향을 강조하는 특징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성적 경향 영국이 전통의 점진적 발전에 뿌리깊은 인식이 존재한 반면 미국은 합리적 규정,새출발,과거와의 단절을 요구했다.이는 역사의 진화적 발전과 현재의 과거의 산물로 이해하는 가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직접적이고 초자연적인, 혹은 적어도 섭리적인 개입을 당연시하는 성경 역사로부터 자신들의 역사를 해석해 온 미국의 체험은 역사를 성경의 렌즈를 통해 관찰함으로써 성경을 역사의 렌즈를 통해 보아야 한다는 고등 비평 사상과 양립할 수 없었다. 짧은 역사에 기인하여, 과거와의 연속성보다는 새로움과 미래를 향한 전진을 강조한 경향은 세대주의의 등장을 가능케 하였다. 18세기중엽의 사고를 넘지 못하던 미국은 낭만주의의 도입도, 이에 따른 과학의 제2혁명(?) 즉 고정법칙이 아닌 변화과정의 분석의 이해로의 이행도 늦었다. 다양한 인종성은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이기보다 퇴행적으로 고착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최근에 이런 경향은 다시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조지 마스든 저, 박용규 역, 생명의 말씀사, 1997.
후천년설- 18세기초 영국에서 구체화된 후천년설은, 미국에서 대각성운동 시절에, 특히 조나단 에드워드에 의해 촉진되었다. 19세기 초에 많은 미국의 후천년주의자들은 사탄 세력의 패배가 임박했다고 믿었다. 교황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명백한 사양 상태를 보이고 있었으므로 문자주의적 경향이 강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통치의 1,260일(게시록 11장) 1860년대에 즈음해 종식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들은 문화적 진보에서 천년왕국의 도래 징후를 찾아내었는데 노예제도와 억압 및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현행의 노력들이 성공할 것을 믿었고 과학과 기술, 학문이 큰 업적을 달성하리라고 예측했다.
신앙의 변호(1870-1910년대)
1. 이 시대를 정죄함 ; 극단적 전천년주의의 입장
그러나 핼디먼이 근본적으로 반세상적으로 극단적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으며 북침례교 안에 머물러 있었다. 반면 게벨라인은 세상으로부터의 분리가 세상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한다고 하였다. 그는 1899년 감리교로부터 분리해 나왔고, 1914년의 예언 사경회에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부르심은 분리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분리는 반세대 후 근본주의 싸움의 패배시 근본주의의 표상이 되었다.
1910년 이후 이런 견해는 약화되고 복음전도가 최우선으로 주창되었지만 여전히 낙관주의적이고 사회 개혁주의적이었다. 성경학교 특히 무디성경학교는 이런 생각을 대표하며 사회적 신조에 대한 포용적 태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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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설계와 자연신학
- 지적 설계의 철학적 신학적 위치 -
김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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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설계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 근래에 들어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지적설계운동(Intelligent Design Movement)은 초월적인 원인에 의한 생명체의 설계에 대해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일련의 움직임이다. 우리 모두 지적설계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을 알고 있듯이 이 운동은 종교적인 운동보다는 과학적인 운동으로 그 입장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표면적인 입장을 취한다 하더라도 그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 상, 설계자에 대한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고 이것은 곧 유신론에 대한 관심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 지적설계운동은 과거 아퀴나스에 의해, 18세기 에는 팔레이의 시계공 논증으로, 최근에는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 운동에 의해 기독교 내에서 줄기차게 주장되어졌던 가장 기본적인 유신론적 논증의 연장선 상에 있다. 현재 우리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생명체의 복잡성이 계속해서 과학적으로 밝혀지면서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이 생명체의 설계를 인식할 수 있을 때가 곧 올 것 같지만, 몇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는 생명체의 복잡성을 보인 연구결과가 그리 많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책은 마이클 베히의 "Darwin's Black Box"외에는 없다. 설계 논증에 대한 자료는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의 지적설계운동의 과학적 자료가 풍부한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우려는 지적설계의 목표 그리고 운동의 방향성이다. 무엇을 위해서 움직이는가? 좁게는 올바른 과학의 성취인가? 기독교 학문의 실현인가? 선교적 수단인가? 아니면 그 무엇인가? 지적설계운동이 반드시 기독교인(개신교인과 카톨릭교인)만이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적설계의 본질적인 의미로 보나, 참여하는 이들을 고려할 때 기 독교적인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진다. 셋째로는 지적설계운동을 하기 위한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있어야 하지 않나하는 것이다. 철학적·신학적 배경지식 없이 과학 지식만을 가지고서 주장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라면 신앙의 선배들이 쌓아놓은 지식을 버려 두지는 않을 것 같다. 본 글은 크게 지적설계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어떤 이에게는 재미있는 주제로 보이겠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이 글의 내용이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적 얘기로 보일 수도 있으며, 필자로서도 그와 같은 점들이 다소 걱정된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야만 했던 유럽의 종교개혁은 이와 같은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에 의해 일어났으며, 이 땅 전역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진화론의 등장이 가능했으며, 우리 문화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이 유발되었음을 아는 이들에게는 단지 학문적인 고리타분한 주제로 보이지는 않으리라 믿어본다. 이 글의 주된 목적은 지적설계와 연관된 질문들에 대한 철학적·신학적 배경지식을 제공하는 데 있다. 물론 개인적인 결론은 내리겠지만, 그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 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다양한 신학적 입장을 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장하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 속에서 실패와 성공을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1. 접촉점 우리가 지적설계를 바라보면서 가지게 되는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창조주에 의한 지적설계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인가?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공통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공통 영역"으로 받아들여지는가? 두 번째 질문은 지적설계이론은 그와 같은 "공통 영역"으로서의 지적설계라는 사실을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알려줄 수 있으며, 또한 지적설계가 사실임을 사람들이 어떠한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가? 와 같은 것이다. 또한 만약 그와 같은 공통 영역이 존재 한다면, 소위 지적설계이론이 사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비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이 방법론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지적설계를 받아들이게 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인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얻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입장들의 차이점을 분석해 보려고 한다.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있어서, 기본적으로 파악해야 할 요소가 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에 대한 것이며, 두 번째로는 그 계시를 받아들이는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이 두 가지 대상에 대한 관점을 정립하는 것은 모든 유신론적 논증과 논의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이며,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가장 일차적인 준비임에 틀림없다. 이 두 가지 관점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신학자들마다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문제는 앞글에서 지적설계와 지적설계이론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본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인정할 수 있는 "공통 영역"이란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과 그와 같은 것을 인식시킬 수 있는 방법론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에 있어서 다양한 입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크게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고 다시 개신교 내에서 칼빈주의와 비칼빈주의 입장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리스도를 변증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공통된 영역의 존재 유·무에 대한 입장은 접촉점(point of contact)에 대한 입장으로 다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과연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접촉점은 무엇인가? 이 접촉점에 대한 견해는 기본적인 인간론과 자연신학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시키며, 세부적으로는 과학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의 다양성을 유발시킨다. 이에 대한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의 신학자 반틸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의 접촉점에 대한 입장 그러면 이제부터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가 바라보는 접촉점에 대한 입장차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를 위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입장 차이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로마 카톨릭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개신교와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그의 조직 신학 책에서 다음과 같이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카톨릭의 입장으로 볼 때 인간의 지성과 의지 라는 본성은 손상되지 않았다. 인간의 타락은 조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던 은혜의 소멸을 의미할 뿐, 인간은 창조 당시 부여받은 지성과 의지를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올바른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얻어진 결과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그 기원을 따라가다 보면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본성에서 발견되는 혼란은 인간의 부분적인 비이성적 요소에 의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본질적으로 그 책임은 인간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입장은 이와 다르다.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지음을 받았을 때에 인간의 본성에는 대혼란의 소지가 전혀 없었으며, 그 대혼란은 죄의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범죄함으로써 타락한 인간의 모든 기능은 비정상적으로 움직인다"4라고 보았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개신교에서는 본래적 의는 창조와 더불어 동시에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며 또한 자연적인 것임을 주장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카톨릭에서는 그것이 초자연적으로 주어졌다는 의미이다. 이 둘의 차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에 대한 기본적인 견해차이에 서 비롯된다. 로마 카톨릭은 인간의 이성이 가치 있는 것이며, 인간의 타락과는 전적으로 무관하여, 지금도 유용한 것이므로 인간의 이성을 통해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다고 바라보았다. 이와 같은 입장은 이후 자연신학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뒷부분에서 다룰 하나님의 존재 증명은 이와 같은 전제하에서 이루어진 작업들이었다. 그러면 개신교는 어떤가? 칼빈이 말한 것처럼 개신교에서는 인간의 이성은 죄로 인해 타락하였고 손상되었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인간의 이성에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밀쳐내고 인간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으려고 하는 죄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칼빈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입장 차이가 무슨 문제가 되는가라고 의문시하는 이 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내용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우리가 관심 있는 접촉점에 대한 답을 찾는데 이 점이 중요한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의 신학은 인간의 지성, 이성은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 또는 그 어떤 것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공통적인 영역, 접촉점이 존재하며 인간은 이성을 통해 이것을 발견하여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다는 설명을 하게 된다. 이것이 실제 로마 카톨릭의 자연신학에 있어서 기본적인 전제인 것이다.6 그렇다면 개신교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공통된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인가? 만약 인간의 이성이 타락하여 완전하지 않다면, (순수한 이성을 통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함께 인정할 수 있는 공통된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7 만약 그런 영역이 있다면 인간은 스스로 공통된 영역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필요치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입장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였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제 더 나아가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없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냐는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카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말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칼빈이 말한 것처럼 인간 안에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씨앗"이 있으며, 인간의 이성은 인간이 지닌 피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신의식(sense of deity)이 있으 며, 이를 전제로 한 이성 내에서 모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계시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냐에 대한 문제는 자연신학에 대해서 논할 때 살펴볼 것이다. 반틸은 로마 카톨릭의 입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칼빈주의 대 비칼빈주의 개신교 내에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을 믿는 보편론적(universalistic) 입장과 특수한 사람들만 이 구원을 받는다는 특수주의적(particularistic) 개념이 그것이다. 벤자민 워필드는 이 두가지 입장의 핵심은 최종적인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인가 아니면 사람의 선택에 의해서인가 라는 의견 차이에 있다고 말한다.10 필자가 이해하기에는 칼빈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 같다. 만약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우리는 현실적으로 구원받지 못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위의 가정이 맞다면 구원은 마치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 다시 말해 최종적인 결정은 사람에게 있다는 결론으로 빠지게 된다. 이것은 마치 로마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칼빈주의자들은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활동을 보편주의적인 구원으로 보려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인간이 자율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면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11 이것은 더 나아가서 로마 카톨릭처럼 하나님에 대한 의식작용을 고려하지 않고도 인간이 스스로 행동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의미 있고 가능하다고 보는 것으로 확장될 위험이 있다. 이런 애매한 입장은 문제의 여지가 많고, 로마 카톨릭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되 절대 주권적인 하나님의 존재에는 관심이 없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본다. 이와 같은 우려는 실제 유추론(Analogy)을 쓴 버틀러의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접촉점은 없다는 것인가? 우리가 지금까지 논한 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올바른 복음에 대한 변증에 있어서 인간 모두의 공통적인 접촉점으로 온전한 이성을 가정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인간론에 기초하여 증명된 하나님은 하나의 실체로서의 하나님일 뿐, 창조와 섭리의 성경적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세속 철학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잃어버리고 구별됨이 없게 되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13 그러므로 자연계시나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오는 특별계시에 대해서 인간의 본성에 의지하여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인간은 진리를 완전히 파악하고 습득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롬 1:19-20).15 다만 로마서 1장 21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을 뿐이다. 즉 올바른 개혁주의 입장은 인간이 스스로를 아는 자의식이 하나님을 아는 신의식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제를 받아들일 때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영역이 있으며, 접촉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이나 일부 개신교는 이와 같은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자율성 또는 궁극성의 가정을 죄의 결과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 스스로가 생각해 낸 인간에 대한 정의16와 성경이 말한 인간에 대한 정의17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 일반계시와 자연신학 이제 우리는 지적설계와 관련된 두 번째 질문을 하려고 한다. 지적설계운동은 자연신학의 일종인가? 그리고 생물의 복잡성을 일반계시로서 받아들일 때 어느 정도까지 기대할 수 있는가? 그와 같은 기대는 성경적인가?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들을 살피기 위해 계시와 자연 신학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 자연신학을 논함에 있어서 계시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하는 것이 올바른 글의 순서라고 생각된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주시는 것을 일반적으로 의미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 정통주의에서는 일반적으로 자연계시(일반계시)와 초자연계시(특별계시) 이렇게 두 가지로 크게 계시를 분류한다. 일반계시18는 창조에 근거하여 자연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의 역사와 자연법칙 등에 의해 나타난다. 이 계시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며 또한 인간의 정신과 종교적인 본성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명확히 알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죄가 일반 계시의 증거를 파괴해 버렸기 때문이다.(창 3:17-19, 로마서 8:18-25, 고후 4:4) 따라서 일반 계시는 인간은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고 변명할 수 없게 하는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19 그러나 일반 계시에는 여러 가지 가치가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일반계시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알 수 있게 해주며,20 양심을 통해 율법을 수행하고,21 하나님을 탐구할 수 있게 해준다.22 특별계시는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의미하며, 하나님이 특정한 때, 특정한 사람에게 자신에 대한 특별한 것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특별계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를 의미하며,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다른 계시가 이해된다. 그리스도는 이전의 모든 계시의 목표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의 결론이다.23,24 자연신학이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을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이라고 부른다. 자연신학은 자연계의 사실들로부터나 특별계시에 의해 도움을 받지 않은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25 자연신학은 자연, 역사 그리고 인간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며, 그것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단지 이성에 기초하여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에 이르 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자연 신학의 핵심이다. 성경 혹은 계시와 관계없이 인간의 직관, 도덕적 통찰 및 이성적 추론에 근거하여 신학을 하는 것이다.26 결론적으로 자연신학은 초자연적인 계시와 특별한 어떤 것에 호소하지 않고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27 자연신학은 몇 가지 중요한 신념 위에 기초하고 있다.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일반적인 계시가 있다는 것, 인간은 자연 세계로부터 지각하고 배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 정신과 하나님의 창조물 사이에는 일치점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 자신을 알리며, 인간은 자연적인 제한과 죄와 타락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물 사이에는 일치점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 자신을 알리며, 인간은 자연적인 제한과 죄와 타락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물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고, 인간 정신의 질서는 기본적으로 우주의 질서와 동일하다는 것이 자연 신학의 전제이다.28 자연신학은 수 세기동안 철학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다양한 입장이 나타나게 되었다. 크게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입장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29
바르트와 부루너의 자연신학 논쟁 과거 로마 카톨릭적인 입장의 자연신학은 우리의 고려대상은 아니다. 이성을 통한 직접적인 하나님에 대한 증명은 개신교 내에서는 이미 포기되어진 입장이다. 문제는 개신교 내에서 자연신학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개선해 나가느냐 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한 최근의 논쟁은 신정통주의 신학 내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이것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 입장차이를 알아보 자. 18세기말부터 영향을 미치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대가 20세기초에 나타나기 시작했 는데 대표적인 신학 사조로 우리는 신정통주의를 들 수 있다. 신정통주의는 위기의 신학, 변증법적 신학,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신학사조의 대표적인 신학 자로 우리는 칼 바르트와 에밀 부루너를 들 수 있다. 이 두 신학자는 공통된 입장을 가지 고 있다가 갈등을 겪게 되는 데, 그 주된 이유는 일반계시와 자연신학에 대한 입장차이에 있었다. 바르트 신학의 본질은 절대적인 그리스도 중심주의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여 예 수 그리스도로 끝난다. 그는 계시, 특히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신학의 토대를 두고 있다. 부루너 역시 바르트처럼 하나님은 오직 계시에 의해 알려지며, 계시는 예 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강조했다. 계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낸 것 을 의미하며, 이것이 신학의 규범과 내용이 된다.32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느냐는 것이 바르트와 부루너의 논쟁점이었다. 바르트는 완전히 부정적이며, 부루너는 긍정적이다. 이 말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부루너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도 없으며 참 하나님도 알 수 없음을 주장하기 때문에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이 논쟁점은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접촉점의 문제였는데 인간의 본성과 타락에 대한 해석 그리고 종교개혁의 정통주의와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인해 갈등이 생겨났다. 이 갈등은 1934년 부루너가 "자연과 은총(Nature and Grace)"33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시작 되었고, 바르트가 1934년 "아니오(No)!"라는 이름으로 부루너에 반대하는 책을 출판하면서 가속화되었다.34 이들 책에서 각각 언급되어진 부루너가 본 바르트의 입장35과 부루너의 주장36은 주석을 참조하기 바란다.37,38 인간의 형상과 접촉점 부루너와 바르트의 논쟁의 핵심적인 사항은 인간의 형상에 대한 부분이다. 크게 바르트와 부루너는 6가지 주장에 대해서 서로 반론을 거듭하고 있는데 주된 내용은 인간의 형상에 대 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부루너는 바르트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할 능력과 자유의지를 소유했었는데 이것이 죄로 인해 상실되었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부루 너는 인간의 타락의 결과의 영향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형식적(formal)39인 면과 물질적(material)40인 면,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하자고 제안한다. 물 질적 형상은 죄로 인해 완전히 상실되었으나, 형식적 형상은 소멸되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바르트는 인간이 주체로서 이성적이며 책임을 갖고 있으며,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전제를 인정 하지만, 부루너가 물질적 형상이 파괴되었는데도 인간이 계시에 대한 수용 능력을 가진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한다.41 부루너는 하나님의 창조자체가 계시이며, 인간이 이를 인식하는 것은 죄의 영향이 있긴 하 지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물론 자연계시를 통해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런 계시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부루너는 구속 은총에 대한 접촉점을 논하면서 인간은 계시를 인식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앞에서 말 한 대로 인간에게 형식적인 형상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부루너가 계시 의 수용성(receptivity)에 대해서 말한 것은 물질적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가진 수용능력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가 아닌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형식적인 가능성을 뜻할 뿐이다. 죄인 이라도 이것을 가지고 있으므로, 죄에 대한 개념을 알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42 그러나 바르트는 인간에게 형식적 형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과 접촉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접촉의 가능성까지도 준비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부루너의 주장은 은총과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개혁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부루너의 태도는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는 데에 도움을 필 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하나님의 계시 행위를 위해 다소간은 인간이 협력해 주고 있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43 그러나 "자연과 은총"이란 책에서 거듭 부루너가 말하는 것은 이것은 오해라는 것이다.
부루너의 주장은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일반계시에 대한 입장과 거의 같은 의미이며, 바르 트에 비해서 성경적인 면이 있고 칼빈의 교리에 더 근거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 다. 그러나 바르트의 반론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부루너의 자연신학은 자연신학 자 체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 때문에 충분한 주의가 필요하다.45 부루너가 말한 인간의 형식적 형상과 계시의 수용 가능성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부루너는 인간의 형식적 형상을 통한 접촉점에 대해서 말한 후에 이어 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에는 좁은 의미에서는 인간성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모든 지식을 포함한다."라는 식으로 확장을 시도하고 있음에 주의 해야 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부루너의 이런 부분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46
3.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들 세 번째 질문은 지적설계는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시도인가? 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지적설계를 통한 논증과 함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과거의 논의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 다. 우리는 크게 4가지의 논증에 대해서 살펴볼텐데, 안셀름의 존재론적 논증, 토마스 아퀴나스와 리처드 테일러의 우주론적 논증, 설계 논증이 그것이다. 안셀름의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 안셀름은 1033년에 이탈리아 피드몽의 아오스타라는 곳에서 태어났으며 켄터베리 대주교가 된 사람이다. 그는 "제2의 어거스틴"이라고 불려질 만큼 신학적으로는 어거스틴을 따랐던 인물이다. 일반적인 안셀름의 입장은 "Credo, ut intelligam(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는 그의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앙 우선주의를 나타낸다. 안셀름이 추구한 입장은 인간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이성은 하나님의 진리를 증명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앙은 맹목성을 띈 것이 아니라, 신앙적 이성의 증명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47 안셀름의 존재론적 논증은 그의 책 프로슬로기온(Proslogian, 1079)이라는 책에 처음 등장하는데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라는 개념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책은 논리적 논증을 하는 책은 아니었으며, 고백형식의 책이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하나의 논증으로 본 것이다. 안셀름의 존재론적 논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완전한 존재에 대 해서 생각하고 있는데, 만약 그런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단순한 마음속의 개념이라면 그것은 완전 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안셀름의 논증은 후대에 긍정적인 평가48와 부정적인 평가49가 함께 이루어졌다. 동시대에 살았던 가우닐로라는 수도사는 이에 대해 "바보를 위한 답변"이 라는 책에서 "완전한 섬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완전한 섬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안셀름의 논증을 반박했다. 일반적인 비판은 "어떤 개념을 정의하 는 것과 그 존재가 존재하는 것이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일 수 있냐는 것 이며,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관찰을 통한 확인이 없는 한 아무 것도 주장할 수 없다고 비판 한다. 통상적인 안셀름에 대한 해석은 그가 자연신학에 몰두했다는 것인데, 신앙에 의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바르트는 이에 대해 서 다른 설명을 한다. 그는 안셀름의 작품을 다룬 책에서 안셀름이 경험과 계시에 호소하지 않은 채 오직 이성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안셀 름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완전한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기만 하면, 하나님을 이성적 으로 부인할 수 없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Credo, ut intelligam(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라는 그의 신조로 볼 때 안셀름의 존재론적 논증에 대한 올바른 이해인 것으로 생각된다.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 우주론적 논증이란 우주의 존재나 우주에 관한 몇 가지 일반적인 사실들로부터 첫째 운동자 (a first mover), 첫 원인(a first cause), 또는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즉,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에로 논증하여 가는 논의를 말한다.50 초기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주어졌으며, 대표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5가지 방식51이 있다. 아퀴나스의 5가지 방식은 대부분 비슷하게 보이는 데, 인과관계를 통해 추론하다보 면 모든 것의 근원적인 존재인 하나님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논증은 호기심을 끌고, 단순한 신앙이나 기독교적인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객관적인 증명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52 그러나 아퀴나스의 논증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비판53을 받았다, 총신대 문석호 교수는 아퀴나스에 대해 다 음과 같은 평가를 한다.
아퀴나스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알리스트 맥그라스와 같은 이들은 이와 같은 평가는 철학 자나 신학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하기도 있다. 아퀴나스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간단하게 여기서 정리하고, 우주론적 논증에 대해서는 최근에 나온 철학자 리처드 테일러의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정리를 해보도록 하자.55 우주론적 논증에서 중요한 질문은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느냐?" 라는 질문 이다. 우주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는 무엇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테일러 가 주장하는 것은 유신논증들은 "모든 긍정적 사실이나 진리에는 왜 그런 사실이 있는지, 또는 왜 그 진술이 참된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와 원인이 있다"라고 보는 충분 이유의 원리 (a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를 전제한다고 말한다.56 이것을 전제하면서 테일러가 주장하는 것은 "충분 이유의 원리"로부터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존재만이 아니라, 세상 자 체에 대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우주는 다른 진리에 의존하므 로 우주에 대한 설명은 우주 밖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테일러가 보기에 세상이 존재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세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에 의존하고 또 그것은 또 다른 것에 의존하고 이렇게 의존하는 것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이 다. 둘째는 세상은 영원하고 멸할 수 없는 창조자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설명은 충분한 이유를 계속적으로 거부하므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어서 두 번째 설명을 채택한다. 그러나 이 논증에 대한 비판 중 가장 큰 주장은 충분 이유의 원리를 가정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우주의 각 부분들이 의존적이라 해서 전체 우주가 의존적인가? 테일러의 설명은 부분이 의존적이므로 우주 전체가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기계의 각 부분이 작다고 해서 그 기계 전체가 작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57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우주론적 논증은 충분 이유의 원 리를 어느 선까지 적용하느냐에 달려있다. 유신론자들은 이것을 우주 전체에까지 적용하 여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것이며, 무신론자들은 부분에만 적용할 뿐 우주 전체에 대해서 는 적용하지 않을 것이다.58 그러므로 이 논증은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전통적인 자연신학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다. 우주론적 논증의 큰 문제중의 하나는 이 논증이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통해 나온 최초의 부동자가 성경의 인격적인 하나님을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테일러와 아퀴나스 가 단지 증명을 통해 하나님을 보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이 논증에 큰 의미를 부 여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59 설계 논증 설계논증으로 가장 알려진 사람은 윌리엄 팔레이(william paley)일 것이다. 물론 아퀴나스의 5가지 방식에도 설계 논증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설계논증을 얘기할 때는 팔레이를 떠올리므로 그의 설계 논증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팔레이는 18세기 인물로 케임브리지의 연구원이면서 유명한 수학 강사였으며 부주교를 지내기도 했다. 팔레이가 설 계 논증으로 유명한 것은 그의 마지막 책이었던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자연 현상으로 부터 수집된 신의 실존과 속성에 대한 증거들)"이라는 책 때문이다. 설계논증은 칸트가 말한 것처럼 가장 오래되고, 가장 분명하며, 인류의 공통적 이성과 가장 잘 조화되는 논증으로 평가받는다. 이 논증이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세상은 설 계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설계의 흔적은 설계자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다. 따라서 이 세상은 설계자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팔레이가 "자연신학"이란 책에서 시계공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했던 것도 이 내용이다.60 팔레이가 시계공의 예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주도 이처럼 제작자가 있다는 사실이었 다. 설계 논증은 데이비드 흄의 "자연 종교에 대한 대화들" 이라는 책을 통해 가장 잘 비판 되어졌다. 흄이 보기에 이 논증이 우주에 적용될 때 우리들 모두는 우주의 기원과 존재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추측에 의한 근거만이 있다고 보았다. 팔레이의 책 본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만약 시계에 대한 경험이 없는 이는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시계공에 대해서 생각 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전지식이 필요한 데, 우주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경험한 것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흄은 다음과 같이 5가지로 비판을 한다.
팔레이는 설계의 흔적으로 생물학적 특징들 예를 들어 낙타의 혹이나 날개의 특징, 인체의 정교한 조직 등을 제시한다. 또한 눈의 정교함에 대해서 제시하면서 우연의 가능성을 배제 한다. 자연주의적 설명은 이 놀라움을 설명하기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찰스 다윈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우리는 그의 자서전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찰스 다윈이 설계 논증을 받아들이다가 진화론적 입장으로 빠져나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가 보기에 생명이 생존하기 위한 투쟁과 죽음 등이 있는 것으로 봐서 세상이 설계되어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무로 성장하지 않는 수많은 도토리들, 결코 수정되지 않는 꽃가루들이 그러하며, 침을 통해 애벌레 속에 알을 낳는 말벌을 보면 유충이 안에서 애벌레를 파먹고 사는 것도 그러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윈에게 놀라움이었다. 세상에는 설계된 것 같은 흔적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흔적들도 많은 것이다. 이 문제는 "세상에 어떻게 악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62 설계 논증에서 가장 의문시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설계 논증도 모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으므로 전통적인 자연신학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뒤에서 다루겠지만 지적설계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설계논증을 반복하려는 것은 아니다.
4. 결론 : 지적설계와 자연신학 자연과학에 대한 칼빈의 입장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흔적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은 "과학자 창조(Science and Creation)"라는 책을 통해서 세계의 질서에 대해서 감탄하며,63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글을 쓰곤 했다.64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것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신학적 고찰에 있어서 종교개혁자 칼빈의 입장이 중요한 주춧돌 역 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이 자연과학에 부정적이었다는 일반적인 평가는 왜곡된 면이 있으며, 오히려 칼빈은 자연과학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65 그의 인 간에 대한 신학적 입장은 자연과학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기준을 주고 있다. 칼 빈에 대한 오해의 시작은 칼빈의 "인간의 전적인 타락" 주장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 같다. 사람들은 칼빈의 주장은 곧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연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과 동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은 오해에 불과하다. 오히려 칼 빈은 자연질서와 역사,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 기 때문이다. 칼빈의 그와 같은 생각의 배경은 우리가 앞에서 사용했던 칼빈의 용어 "신의식", "종교의 씨앗" 등의 용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이 보기에 인간에게는 종교에 대 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고, 양심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모두가 복음의 선포에 있어서 접촉점이 된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는 피조세계의 질서를 경험함으로 써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자연신학의 의의 정통적인 자연신학에 대한 부정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바르트주의자들을 제외한 개 신교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자연신학은 나름대로의 의의가 있다. 자연신학을 거부하는 것은 바르트의 경우처럼 과학과 신앙의 분리로 이어지고, 탐구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제시하게 된다. 부루너가 지적한 것처럼 신학의 내용에만 관심을 가지고, 방법에는 무관심한 것은 복 음을 들어야 할 비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생명체의 설계를 주장하 면서 생명체의 설계 흔적을 찾고자 하지 않는 것은 악하고 게으른 종의 모습과 동일하다. 비록 그런 설계 흔적을 찾는 노력의 결과가 모든 이들에게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이런 노력을 필요한 것이다. 과거 잘못된 전제하에서 시작된 왜곡된 자연신학이 있었음도 사실이며, 그 부정적인 영향이 있었음도 사실이지만, 과거 신앙의 선배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사실이 올바른 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계몽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증거에 입각한 평가로 볼 때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합리성 의 전제를 기초로 다시 자연신학을 시도 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잘못된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갈 올바른 길은 새로운 합리성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길을 걸어갈 때에 극단적인 칼빈주의로 빠져서 인간의 어떠한 참여도 부정하는 오류에 빠지지 말 아야 하며, 극단적인 알미니안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 중간 어디쯤인가 우리가 걸어갈 길이 보일 것이다. 증거주의를 넘어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들을 보면서, 그 모든 논증들이 모든 사람들 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전제가 되지 못함을 보았으며, 증거의 부족에 대한 비판을 면치 못한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인이 자연과학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새로 운 목표라는 것이 "새로운 증거를 더욱 찾아내어서 이 논증을 완성해야 하는 그것"인가? 그 와 같은 생각은 다시 로마 카톨릭의 정통적인 자연신학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닌가? 앞에서 살펴본 유신논증들은 무의미 한 것은 아니다. 이 논증들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이들 에게는 하나님의 존재를 더 명확하게 인정하게 해준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전적으로 부 정하는 이들에게는 설득력을 잃고 만다. 다시 말해서 이 논증들은 사람에 의존적이어서,66 그 설득력이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만족하는 증명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으며, 과학사회에서도 그리 많지 않으며, 무엇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만 한다는 이유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모든 인간이 하 나님에 대한 신의식을 전제하지 않고도 온전한 증명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은 결코 종교개혁적인 입장도 아니다. 어떤 이들은(예를 들어 복음주의적 증거론자들) 명확한 합리적 증거를 대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앙 지상주의에 의거한 힘없는 그리고 무책임한 논증 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은 결국 우리들을 회의주의자로 이끌고 갈지도 모른다. 최근 미국 노틀담 대학교의 알빈 플란팅가(alvin Plantinga), 예일 대학교의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Nicholas Wolterstorff), 시라큐스의 윌리엄 알스톤(Willim Alston)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 인식론"이 주장하는 것은 참된 이성으로의 회복이다. 이들은 기존의 증거주의의 문제점 을 지적하면서 사람 의존적인 증명에 대한 논증과 함께 새로운 합리성을 정의하려고 한다. 코넬리우스 반틸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면서 전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적설계운동 에 있어서 이와 같은 입장은 긍정적이라 생각되어진다. 세속적인 합리주의에 의거하여 하나 님을 보일 수도 없으며, 보인다는 것은 허울좋은 선포이며, 보인다 해도 성경적인 하나님은 아니다. 성경 저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지적설계의 증거를 제시하면서도 전제에 대한 기본적인 구별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과학 계몽주의적 증거주의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사람에 의존적인 증명을 강조하고, 합리성에 대 한 새로운 정의를 시도하는 것은 모든 증명에 사람의 신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 미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것은 이어서 세계관의 문제로 이어진다. 세계관이 다르면 고 학도 다르다는 것인가? 3명의 유명한 칼빈주의 개혁자를 꼽으라 한다면, 벤자민 워필드와 헤르만 바빙크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를 둘 수 있다. 이 중 카이퍼와 워필드는 과학에 대 한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워필드가 보기에 과학은 객관적이며 통일적인 것이었다. 카이퍼의 입장은 그가 보기 에 비겁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보였다.
과학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이제 둘로 구분되어지는 데, 비그리스도인들과 동일한 방법론과 동일한 바탕 위에다 신학적 원리들을 첨가하여 과학을 한다고 생각하는 워필드파와 전제에 대한 강조를 통해 구분을 강조하는 카이퍼파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워 필드가 있었던 시기와는 다르다. 미국을 비롯한 모든 나라에서 모든 학문에서 그와 같은 통 일된 그 무엇을 이루기란 불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부분적인 이론에서는 일치할지 모르 지만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서로 다른 결론을 얻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기원을 바라보며, 창 조 진화의 서로 다른 입장이 가능한 것을 보면서, 과연 과학이 서로 다른 전제 속에서도 동 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워필드의 입장은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겠다는 복음주의 증거론자들의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지적설계에 대한 철학적·신학적 위치 지금까지 모든 내용은 글의 서두에서 제시했던 4가지 질문들에 대한 철학적·신학적 위치를 알기 위한 준비들이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마무리 부루너의 외침처럼 현재와 같은 과학시대에 올바른 자연신학을 회복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다. 그러나 잘못된 우리 모두 자연신학으로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지적설계운동은 먼 훗날 실패한 운동으로 평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실패를 한다해도 그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올바르다면 실패를 한다해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다. 잘 못된 영향이 혹 남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다음 세대가 짊어지고 가야할, 우리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일들이다. "실패해도 즐거운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세대가 꿈꾸는 일이 다. 끝으로 부족한 글을 읽어준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여러 서적을 통해 자신들의 고민 을 나누어준 여러 신앙의 선배들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전하고 싶다. 끝으로 책을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이안 바버(Ian G. Barbour)의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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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워필드의 구원의 계획
제1장 개념의 차이
1. 자연주의자와 초자연주의자간의 쟁점
벤자민 B.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구원에 있어서 자연주의자와 초자연주의자들간의 쟁점을 먼저 다룬다. 그는 이들간의 차이가 “아주 단순하지만, 아주 절대적인 문제”임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구원 받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시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자들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스스로 구원하도록 계획하셨다고 본 반면, 초자연주의자들은 “하나님 자신이 개입해서 그들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셨다”고 보았다.
“교리사에서 철저하게 자연주의적인 구원 계획은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로 알려진다. 순수한 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을 구원하는 데 행사되는 모든 능력은 본래부터 인간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초자연주의자들의 고백은, “영혼을 구원하시는 이는 주 하나님이시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여 선언한다.” 하지만 이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영혼을 구원하는 데 행사되는 모든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단언한다. 즉, 구원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이 어떠한 부분을 담당하든지간에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이며, 따라서 영혼을 구원하는 이는 하나님, 오로지 하나님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데 행사되는 능력의 일부나 대부분이 아닌 모든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2. 초자연주의자들의 견해차(사제주의자, 복음주의자)
초자연주의자들은 “영혼을 구원하는 데 행사되는 모든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에 일치한다. 그러나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방법으로 영혼에게 미치게 되는지 그 방법에 관한 개념에 있어서 다르다.” 즉,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에게 당신의 은혜를 베푸심으로 구원하시는가, 아니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운 도구의 중재로 구원하시는가라는 문제이다.
사제주의의 입장: “사제주의의 전형적인 형태는 로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 공급된다. 로마교회에서 가르치기를, 교회는 구원의 도구이며,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이 구원이 인간들에게 전달된다고 한다. 교회와 교회 의식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은혜는 교회의 직무에 의해서, 그리고 교회의 직무를 통해서 전달되면, 그 외의 방법으로는 전달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는 “교회가 있는 곳에 성령이 계신다는 사실”과, 교회에서만 구원이 이루어지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의 방편이 “필수적인 방편”으로 제시되며, “엄격한 의미에서 방편이 없이는 구원도 없으며, 방편은 구원의 실제적인 출처”가 되는 것이다.
복음주의의 입장: “복음주의는 오직 철저한 초자연주의라고 생각되는 것을 보존하려고 애쓰면서,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모든 중재적인 요소를 일소하고, 구원을 위해 영혼으로 하여금 오로지 하나님께만 의존하게 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직접적인 은혜로써 역사하시게 한다. 복음주의자가 은혜를 기다리는 것은 은혜의 방편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대해서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원하시는 장소와 시간과 방법에 있어서 실제로 유효하다고 선포한다.” 복음주의는 “사제주의 입장”과 같이 방편이 “필수적인 방편”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영혼과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신 하나님 사이에 있는 어떠한 중재적인 요소들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3. 복음주의자들의 견해차(보편 구원론자들과 제한 구원론자)
“모든 복음주의자들은 영혼을 구원함에 있어서 발휘되는 모든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이 구원하는 능력이 영혼에게 직접적으로 베풀어진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구원하는 능력을 동등하게 또는 최소한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실제로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든간에-베푸시느냐, 아니면 단지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말하자면 실제로 구원 받는 사람들에게만 그 능력이 베푸시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들은 서로 다른 입장을 표명한다. 여기서 구분점은, 하나님이 당신의 전능하시고 반드시 효력 있는 은혜로써 인간들을 구원하시기로 실제로 작성하셨다고 생각되는가, 아니면 실제로 구원에 대한 보장이 없이 그들이 구원받도록 단지 당신의 은혜를 인간들에게 부어주셔서 제한적으로만 그들이 구원받도록 작정하셨는가 하는 문제다.”
보편 구원론자들의 입장: “영혼을 구원함에 있어서 발휘되는 모든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이 능력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에게 행사되지만, 인간의 구원을 바라시면서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위해 그리고 그들에게 베푸시는 모든 사역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며 “당신의 구원의 은혜 안에서 영혼에 직접 역사하심으로써 그 영혼을 구원하신다면, 그리고 또한 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서 모든 영혼들에게 똑같이 역사하신다면, 분명히 불가피하게 따를 수밖에 없는 결과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다고 강하게 주장한 “열정적인 복음주의자들이 때때로 나타났다. 이들은 나타나서,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으며,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하신 은혜로써 모든 인간들 안에서 구원을 행하시므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다고 증거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복음주의적 보편 구원론자들은, 실제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명백하고도 강경한 성경의 선포에 의해 강요를 받아, 이 철저한 보편 구원론으로부터 언제나 물러났다.” 보편 구원론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일관성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다른 복음주의자들의 입장: 보편 구원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다른 복음주의 자들은 “구원의 과정 문제에 관련되는 제한 구원론은, 구원하시는 이가 하나님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과정 그 자체에 속하는 것”이라고 본다.…“이들은 하나님은 구원의 전 과정을 통하여 집단으로서의 인간을 다루지 않으시고, 일 대 일로 개개의 인간들을 다루시며, 당신의 은혜를 이들 각자에게 베푸시고, 또한 당신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들 각각을 구원으로 인도하신다고 주장한다.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인간들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시고, 또한 당신의 구원의 은혜는 반드시 구원이라는 결과를 초래하는 전능하신 능력이므로, 인간들은 각각 그리고 모두의 경우에 자신이 구원받은 영광을 단지 보편적인 구원의 기회에 돌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이다.”
4. 제한 구원론자들의 견해자
제한주의자들(Particularists) 사이에도 의견의 차이가 있다. 가정적인 보편 구원론자들과 제한 구원론자들의 의견이 다른 것이다. 이들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실제로 인간들을 구원하느냐, 아니면 단지 이들에게 구원의 가능성만을 열어 주느냐 하는 문제”이다.
가정적인 보편 구원론자들의 입장: 이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모든 인간들에게 차별 없이 적용 되지만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구체적인 구속 사역으로 돌리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마련해 준 것이며,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준 것이며, 인간들이 구원받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해 준 것이며, 또는 그와 유사한 성격의 것이라고 습관적으로 늘 말한다.”
철저한 제한 구원론자들의 입장: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은 그 자체적으로 실제로 구원하는 구원의 행위라고 주장하며, 그것은 예정된 자들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한다.”
가정적인 보편 구원론자들과 철저한 제한 구원론자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실제로 인간을 구원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벤자민 B. 워필드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자들은 반드시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입장에 서 있다.“만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인간들을 실제로 구원한다고 하면, 단지 우리가 보편 구원론의 모든 제시를 따르지 않기로 준비되어 있으며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다고 선포하지 않는다는 조건 안에서, 하나님이 구원의 사역을 베푸시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게 될 것이며, 제한 구원론은 바로 이러한 성격 안에서 제시되는 것이다.…영혼을 구원함에 있어서 발휘되는 모든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진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범위는 실제로 구원받는 총회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며, 틀림없이 오직 유일한 사역(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하나님은 자신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며 인간 스스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제한 구원론자들은 구원의 원천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과정에서도 제한주의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구원의 모든 과정에 있어서도 똑같이 제한주의가 옹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원하시는 이는 주 하나님이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모든 사역에 있어서도 모든 자들에게 차별 없이 역사하지 않으시고 다만 일부 인간들만을, 말하자면 그가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들만을 위해서 역사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릴 수 있으며, 구원의 모든 사역을 하나님께만 돌려 드릴 수 있게 된다.”
5.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
이들의 차이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주관하심에 있어서 단지 인간으로 다루셨는가 아니면 죄인들로 다루셨는가 하는, 즉 인간을 두 종류로 구분하는 문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작정은 단지 아직 범죄하지 않은 인간들에 관계된 것인가, 아니면 이미 죄를 범한 인간들, 곧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들로서 여겨진 인간들에 관계된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일부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사고의 순서에 있어서 구별의 작정을 앞에 두며, 심지어 창조의 작정보다도 앞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하는 모든 자들은, 사고의 순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간 구별의 작정을 타락의 작정 앞에 둔다.” 즉 하나님께서 타락 전 인간들을 구원받을 자들과 유기할 자들을 미리 작정하시고 죄를 허용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한된 사람들만을 따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존재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태초에 창조된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 워필드는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지 제한된 사람들만이 창조되거나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창조되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태초에 창조되고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 단지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타락이 허용된 것이다.
제2장 자력 구원설
(AUTOSOTERISM)
단 두가지의 구원 교리가 존재한다. 첫째는‘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교리로서 기독교의 공통된 교리이며, 둘째는 구원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주장으로서 보편적인 이방 종교의 교리이다.’
1. 펠라기우주의
교회 안에서 가르쳐진 최초의 조직화된 자력 구원 체계는 펠라기우스주의이다. “자력 구원의 체계는 최초의 인간이 빠진“타락”을 일체 부인하고, 따라서 그것이 죄든 아니면 단순한 연약함이든, 과거 역사로부터 내려오는 어떠한 악의 전가(轉嫁)도 부인함으로써 스스로 자기 체계를 보호하였다. 모든 인간은 아담이 창조된 것과 같은 상태로 태어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와 같은 상태에서 삶을 지속한다. 아담은 타락함으로써 기껏해야 우리에게 나쁜 본보기를 보여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본보기를 선택하지 않는 한 우리가 따라갈 걱정은 없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옛 죄에 대해 책임을 요구받고 그에 대한 공정한 심판을 감내해야 하지만, 그 옛 죄에 대해 책임을 요구받고 그에 대한 공정한 심판을 감내해야 하지만, 그 옛 죄가 어느 면으로나 의로운 것을 행할 수 있는 우리의 본래적인 능력을 빼앗거나 축소시키지는 못한다. 펠라기우스는 선포하기를, “나는 말한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준수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모든 의를 이루는 완전한 능력에 대한 이와 같은 단호한 주장을 보존하기 위해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도움이라는 의미에서의 모든“은혜”를 부정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이러한 도움은 인간에게 필요치도 않으며 실제로 주어지지도 않는다. 반면, 모든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성취한다.”
펠라기우스주의 교리의 특징은“하나님은 인간에게 빼앗을 수 없는 자유 의지를 부여하셨고, 이 자유 의지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모든 것을 완전히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큰 은사에 하나님은 율법과 복음의 은사를 더하여 주셔서 의의 길을 비추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 길을 가도록 하셨으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까지 주셔서 과거의 죄를 속죄하시고 앞으로 의를 행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마련해 주셨으며, 특별히 선한 모범을 세워 주셨다는 거다. 이러한 장려하에서, 그리고 자기들의 뿌리 깊은 자유의 능력 가운데서 자기들의 죄에서 돌아서서 의를 행하는 자들은 의로우신 하나님에게 영접받을 것이며,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보상받을 것이다’라고 보았다.
“바로 이것이 최초에 교회 안에서 공표된 자력 구원의 순수 교리였으며, 아울러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승된 모든 자력 구원의 전형이다.”
2. 은혜와 자유 의지간의 커다란 충돌
자력 구원론의 교리는 결국 5세기 초에 어거스틴으로 인하여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어거스틴의 교리 핵심은, “오직 은혜”였다.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의 유일한 기원은 은혜라는 주장이며, 이러한 주장은 모든 의를 행할 수 있는 인간의 독자적인 의지의 절대적인 능력을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의 교리만큼이나 철저하게 한 가지만을 고집한다.……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각각의 단일한 행위에 있어서 의로운 것을 알 뿐 아니라 또한 행하며, 따라서 우리는 은혜 없이는 경건에 속한 어떠한 것도 가지거나,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속하였으며”, 은혜 교리의 대변자인 어거스틴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돌려졌다.……하나는 믿음의 종교였고, 하나는 행위의 종교였다. 즉, 하나는 자신에 대해 실망하여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종교이며, 다른 종교는 자기를 완전히 신뢰하는 종교다.”
이들간의 논쟁은 결국 어거스틴주의가 승리하게 되어 진다. “최종적으로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 곧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악된 사람들을 위한 종교로 남게 되었고, 단지 구원이 필요 없는 자들에게나 맞는 단순한 윤리적 교리로 썩어 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3. 펠라기우스주의와의 논쟁의 결과와 오렌지 회의로 인한 어거스틴주의의 교리 저지
“펠라기우스주의자와의 논쟁의 결과는 은혜의 필요성이 인식되었고, 반펠라기우스주의와의 논쟁의 결과로는 은혜가 선행한다는 사실이 인식되었으나, 이러한 인식의 유효성은 오렌지 회의의 치명적인 절충안으로 말미암아 부정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어거스틴주의의 승리의 행군은 저지당했고, 오직 은혜만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순수한 구원 고백은 교회의 이러한 특성 안에서는 영원히 불가능하게 되었다.”
4. 중세시대의 상황
중세기는 행위 구원(a work-salvation)이 존재하여 율법주의가 판을 친 시대였다. “반펠라기우스주의안에서, 구원을 이루는 근본적인 행위가 구원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돌려지지 않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를 유효하게 만드는 인간 의지의 동의에 돌려진다.”결국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은혜를 유효하게 만든다고 본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의 장려를 받는 가운데서도 자기 스스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든 국면에서 자신들의 “선행”이 부족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무섭게도 허구를 놓지 않았다.”
5. 마틴 루터의 등장으로 인한 종교 개혁
하지만“마틴 루터가 출현함으로써 거짓은 사라졌다. 로마 교회 안에서 그동안 억눌려 왔던 어거스틴주의는 더 이상 억압당할 수 없었다. 교회는 자신을 속박하여 어거스틴주의를 수용할 수 없었다. 당시 교회 안에는 어거스틴주의를 위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어거스틴주의는 교회의 벽을 허물어 버리고 그 억압으로부터 빠져 나왔다. 그 폭발은 우리가 종교 개혁이라고 부르는 형태로 나타났다.” 종교 개혁자들의 근본 교리는 인간의 완전한 무능력과 하나님의 절대 은혜이며, 인간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6. 멜랑크톤의 사상
“열정적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구원의 공로를 돌린 어거스틴주의의 단체 안에서까지 멀지 않아 자력 구원의 옛 누룩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처럼 새롭게 “은혜로부터의 떨어짐”을 종교 개혁의 사상 안으로 주입시킨 인물은 다름 아닌 멜랑크톤이었다.”
멜랑크톤의 교리의 발전을 세 시기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 번째 시기에서 멜랑크톤은 루터와 칼빈과 같이 순수한 어거스틴주의자였다.……1527년에 시작되는 두 번째 시기에, 멜랑크톤은 의지에 대한 자신의 전반적인 교리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1532년부터 계속되는 세 번째 시기에서 멜랑크톤은, 비록 순전히 형식상의 능력이기는 하지만, 인간 의지에게 구원의 과정 중 일부 자리를 허용한다.……이것을 시발점으로 신인 협력설이 루터 교회 내에서 급속도로 형체”를 갖추게 되어 진다.
7. 하나님께서는 믿을 줄 미리 아신 자들을 예정하셨다는 사상의 등장
‘색슨(Saxon) 신학자들, 곧 호헤네그(Hoe van Hohenegg)와 레이서(Polycarp Leyser)는 1631년 봄 라이프찌히 회의에서 확신 있게 루터교의 교리로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우리를 택하셨다. 그러나 이 선택은 한 인간이
그리스도를 진실로 그리고 계속해서 믿을 줄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따라 이루어
진 것이다. 하나님은 믿을 줄을 미리 아신 자들을 복되게 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예정하셨고 선택하셨다”
이러한 사상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닌 인간 의지에 달렸다는 것이다.
8. 결론
벤자민 B. 워필드는 인간 의지에 달린 구원관을 배격한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그 어떠한 공로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해졌기에 의지의 능력이 없다. “어떻게 병든 의지가 치료를 해줄 수 있는가? 문제의 장소는 우리의 의지다,” 의지가 병들었기에 그 의지로는 우리를 치료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그리스도는 회개하는 자들을 구원하실 정도로 능력만 갖고 계신 것이 아니라 사람
들을 회개시킬 수 있는 능력자이시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을 하늘로 데려가실 것
이나, 더욱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그 새로운 마음 안에서 믿음의 역
사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으시다. 그는 능력으로, 거룩함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하여
금 그것을 사랑하게 하시고, 그 이름을 경멸하는 자로 하여금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의 모든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 이전과 마찬가지로 구원 이후에도 나타나기 때문이다……하나님은 자
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신 후에, 하나님이 이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옮기실 때까지
능력으로 그들을 계속해서 거룩하게 하시며, 경외와 사랑 안에 그들을 보존하신
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
제3장 사제주의
1. 사제주의란 무엇인가?
“구원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에 직접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세우신 기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주장으로서, 이 기구를 수단으로 하여 당신의 구원의 은혜를 인간들에게 전달하신다는 것이다. 이 기구들이 집행을 위해 인간의 손에 위임되므로, 인간적인 요인이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와 이 은혜의 인간 영혼들 안에서의 효과적인 사역 가운데 끼어들었다. 그리고 이 인간적인 요인은 참으로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적절하게 사제주의적 체계”라고 불려진다. “구원의 순수한 초자연주의를 위하여 모든 개신 교회는 주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인간들의 영혼 위에 그의 은혜로써 역사하시며, 어느 한 사람의 구원이라도 같은 인간의 신실함이나 변덕스러움에 맡기지 아니하셨다고 주장했다.”이에 반해 개신교는 구원에 있어서 어떤 중간 매개체 없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2. 사제주의의 원리
“사제주의 원리는, 철저하게 발전되고 논리적으로 잘 짜여진 로마 교회의 조직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 조직에 따르면, 주 하나님은 인간을 직접적으로 구원하기를 전혀 바라지 않으시며, 반대로 인간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모든 사역을 교회의 중재를 통하여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중재의 임무를 행하기에 적절한 능력들을 교회에 부여하신 후, 구원의 전 사역을 교회에 위임하였다”라는 것이다.
사제주의는 구원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닌 “교회에게 자신들의 구원을 기대”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구원의 직접적인 근거를 그리스도나 또는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지 않고 교회에 돌리는 것이다.”
3. 사제주의와 복음주의적인 신앙의 구분
“사제주의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가 주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고 능력으로 옷 입은 인간들에게 우리가 구원을 기대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사제주의와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구분하는 쟁점이다.”
4. 사제주의의 특징
“첫째, 사제주의적인 교리는 영혼으로 하여금 모든 은혜로운 사역들의 근원이신 성령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고, 그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영혼과 모든 은혜의 근원 사이에 일단의 기구들을 삽입하여 영혼으로 하여금 그 기구들을 의지하도록 유혹한다. ……그리고 은혜의 수단인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사고 속에서 성령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복음주의적인 신앙은 “영혼이 직접 하나님을 의지하고, 구원을 위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교회의 기능을 높이 평가한다. “그가(성령) 원하시는 때,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방법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고, 일률적으로 그의 사역이 허락되는 곳에서 사역하는 마치 자연적인 세력인 양 취급한다. 사제주의는 교회를 “구원의 기구”(institute of salvation)라고 말하며, 또는 심지어 “구원의 창고”라고 말하는데, 이는 구원이 필요할 때마다 이용할 수 있도록 저장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말한다.
셋째, 구원의 주도권은 성령께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있다. “……교회와 성례, 곧 은혜의 수단들은 성령께서 구원을 이루시는 가운데 사용하시는 도구로 생각되어야 하는데도, 그 대신에 오히려 성령이 은혜의 수단인 교회가 구원을 이루는 가운데 사용하는 도구가 된다. 주도권은 은혜의 수단인 교회에 있으며, 성령은 은혜의 수단의 처리에 맡겨진다. ……근본에 있어서, 사제주의는 하나님의 사역들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사용하는 인간의 처분에 맡겨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위해 인간을 사용하시는 분으로 사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제4장 보편 구원론(UNIVERSALISM)
1. 보편 구원론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죄인의 구원을 원하시되, 개개인의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차별이 없이 똑같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한다.……표면상, 주 하나님 한 분께서 마음에 직접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구원을 행하신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모든 자를 똑같이 구원하신다면, 물론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구원받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2.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구원 범위
성경은 보편 구원론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셔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즉 온 세상은 선택되었고 보편적인 예정은 보편적인 언약에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반박한다. 그리고 예정은 소수에 속하며, 제한적이며, 선택된 자의 숫자는 정해져 있으며, 이들의 명단은 이들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확장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기’때문이다. 그러나 이 교리로부터 하나님이 편파적이시며 차별 대우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전혀 나올 수 없다. ……성경은 분명하게,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마지막 날에 구원받는 무리와 버림받는 무리의 두 부류가 있게 되며, 이들은 각기 자신에게 속한 영원한 운명으로 보내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3. 보편 구원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
보편 구원론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보편 구원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편협함과 사람에 대한 차별 대우 라는 비난으로부터 하나님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구원에 선택하셨으며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를 통해 그들 모두를 그 복된 목표로 인도하신다고 주장하게 된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4. 보편 구원론에 대한 반박
“편협함과 사람에 대한 차별 대우”라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의 처지를 잘 인식하지 못한
결과이다. 하나님은 모든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 그러나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는 거룩한 재판장께서 죄인을 구원
하심에 놀라움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모두 발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랑이 줄어들었다고 항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에게 도덕적인속성이 있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 그리고 말로 할 수 없는 구원의 은혜가 빠져 있다.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5. 벤자민 B. 워필드의 결론
“구원은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들의 마음에 최종적으로 고정시켜야 하지 않을까? 즉, 자신이 구원받는 기회는 어떠한 사람에게나 구원의 기회가 아니며, 만일 죄악된 혈통의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하면 그것은 틀림없이 인간이 주장할 권리가 없는 전능하신 은혜의 기적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이러한 것을 하나의 사실로 숙고하면서 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탄복하는 경배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 사고가 우리 마음에 고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죄인들에게 자기들의 형벌을 피할 수 있는“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그리고 모든 죄인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단지 바로 공의의 개념을 조롱하는 것이며 아울러 사랑의 개념을 조롱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제5장 칼빈주의
1. 구원에 관한 칼빈주의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들이 모든 경우에 구원받는 개인들을 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구원의 진행에 있어서 제한 구원론은 칼빈주의의 증표다.……칼빈주의자는 충분한 자각을 가지고, 주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전체적으로 크게 인류를 대하지 않으시고, 구체적으로 실제로 구원받는 개인들을 대하신다고 주장하는 자다.……제한 구원론을 부정하는 것은 해석상 구원하는 은혜의 직접성, 곧 복음주의와 구원의 초자연주의, 곧 기독교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고 주장한다. 논리적으로 이 부정은 기독교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인 것이다.”
2. 서로 다른 다양함을 가진 칼빈주의
“칼빈주의의 서로 다른 다양함은 사상사(思想史)에 나타났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제한 구원론을 어느 자리에 두느냐에 따라 서로 구별되며, 아울러 하나님의 작정의 순서에 있어서 선택의 작정을 어느 자리에 두느냐에 따라 서로 구별된다.”
1) 타락 전 선택론자들
이들은 “선택”의 작정을 작정의 순서상 타락의 작정 이전에 둔다. “선택이 타락의 작정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며, 타락의 작정을 선택의 작정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
2) 타락 후 선택론자들
이들은 “선택의 작정이 논리적으로 타락의 작정 뒤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선택이 타락의 작정을 전제한다(타락의 작정이 선택보다 우선함)고 생각하며, 따라서 일부 인간을 영생에 선택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인류를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유념하신다.”
3) 구속 후 선택론자들
“구속은 모든 인간들에게 동등한 관련을 가지며, 단지 이 구속이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내용에 있어서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별하시고, 이러한 의미에서 제한 구원론적으로 행하신다”는 것이다. “선택이 사고의 순서에 있어서 타락의 작정과 아울러 구속의 작정 다음에 설정되었다고 주장”한다.
4) 일치주의
“이들은 우리가 중생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구원에 관련하여 인간 의지를 “수동적”인 것으로 생각하기를 꺼리며, 구원 얻음을 그 의지 자체의 확고한 행위에 참으로 의존한 것으로 간주하기를 열렬히 원했다.”……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권고의 사역은 “성령의 무오한 지혜 가운데서 구원하기로 선택한 자들의 마음 상태에 적합한 사역이며, 이들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 곧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옴과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붙드는 행위로 말미암아 확보하는 사역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사고의 원리는 은혜가 일치되게(적합하게)베풀어짐으로써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것인데, 이는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은혜로운 설득을 행하시되 저들이 복음에 애착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주의 깊게 그리고 무오하게 응하는 방식으로써 행사하시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와 같이 주의 깊은 방식으로 행사하지 않은 데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일치주의의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만일 내가 단지 스스로 행할 수 있도록 설득될 수 있다고 한다면, 구원받아야 할 자를 결정하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는 사실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이와같이 칼빈주의에는 타락 전 선택설, 타락 후 선택설, 구속 후 선택설, 일치주의등. 네 가지 유형을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주의의 이 네 유형 모두는 유사하게 칼빈주의적일 뿐 아니라 동등하게 칼빈주의적이라고 요구할 수 있으며, 아울러 칼빈주의에 대한 각자의 해석에 있어서 각자가 허락한 입장과 그에 대한 강조에 따라 탁월한 순서에 배치되도록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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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다음 신지식
자료 : 그러므로 거룩을 설교하는 것이 복음전도의 진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복음전도에 관하여 아주 다른 개념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전도자는 거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오직 한 가지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려는'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음에야 그들로 하여금 거룩하게 인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입니다. 복음전도의 전체적인 목적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에게 죄가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였으며, 어째서 그들이 현재 이러한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어째서인가 하는 것을 말하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빛이시오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룩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요점, 곧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거룩하게 되는 성화를 분리하여 놓는 것은 제가 볼 때는 성경의 진수와 같은 교훈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일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선택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은 바로 그러한 목적을 향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거룩을 우리들이 가입하려고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은 전적으로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거룩하지 아니하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화와 구속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선택하기로 결심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기업이 될 것을 정하는 우선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곧 그리스도 전체 안에 있든지, 아니면 '그리스도 밖에' 있든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안에' 있으면 여러분은 거룩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들이 거룩함을 위하여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게 되어야 하며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진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의 이러한 진술에 비추어서 볼 때에 필연적으로 진리입니다. 바울에 의하여 우리들이 생각하여야 할 것은 우리들이 거룩의 가능성을 가지고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선택함을 받은 것은 거룩을 실현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거룩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만들기 위하여 창세 전에 우리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들을 선택하여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가지신 계획이 바로 그것입니다. 거룩의 가능성이 아니라, 거룩의 실현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러한 엄숙한 선언을 합니다.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그들의 삶에서 어떤 거룩의 표증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선택'을 받고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많은 교리를 말하고, 그가 선택을 받았고 예정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만족하는 것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에게서 거룩의 요소가 없다면, 그는 선택을 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지적으로는 정통적이면서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선택을 받은 사람, 그는 선택함을 받아 거룩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 거룩한 것이 하나도 나타나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그가 선택함을 받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엄숙한 생각들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의 진술에 비추어서 볼 때에 이러한 것들은 필연적인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결정적인 간격이다. 그것은 신자의 삶에 대한 전 관념이 근거하는 토대이고, 일상적인 죽음의 경험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서도 진정으로, 결정적으로, 참인 간격이요 옮김이다. 죄가 죽음 안에서 또는 죽음으로 지배하는 영역과의 단번에 확정된 바꿀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사도 바울이 이 구절에서 제시하는 대비는 이 변화가 가져오는 결정적인 간격을 부각시키는 데 기여한다. 죽음은 죄 가운데서 죄의 종으로서 봉사하는 것을 뜻한다(롬 6:6, 16, 17, 20절). 죄는 우리의 죽을 몸에서 우리를 지배한다(12절). 순종은 죄의 사욕에 드려진다(12절).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며 종으로서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다(13, 19절). 우리는 의에 대해서 자유롭다(20절). 죄는 우리를 주관하고 우리는 법 아래 있다(14절). 죄에 대하여 죽음은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의 몸이 멸하여 우리가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6절).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다(7절).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다(10, 11절).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며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12, 14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 의의 종이 되고 거룩함에 이른다(13, 19절). 우리는 은혜 안에 있다(14절). 우리는 기독교적 가르침의 모범을 마음으로 순종한다(17절). 그 열매는 거룩함에 이른 것이요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22절). 이러한 대비는 결정적인 변화를 증거한다. 대비를 약화시킬 가능성은 없다. 그것은 삶과 행위의 모든 측면에서 나타난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삶을 평가하는 모든 척도에 절대적인 차별이 존재한다. 이것은 은혜의 규정들의 지배하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의 능력과 죄에의 종사와의 결정적이고 확정적인 단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주의 구원론에 관한 소고
개혁주의 구원론에 대한 小考
Ⅰ. 연구의 필요성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많은 문제들의 궁극적 원인은 결국 강단의 문제로 귀결되고, 이는 곧 설교의 문제요, 한국 교회 내에 팽배해 있는 교리상의 문제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의 이신칭의 교리의 재발견으로 개혁 교회는 구원론에 있어서 이신칭의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스코필드 주석의 영향과 샌디먼파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믿기만 하면 구원얻는다는 식의 신앙지상주의(Believism)가 만연되게 되었고, 한국 교회도 C.C.C. 선교 단체의 사영리 교리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구원론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고, 그러한 결과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구원론의 개념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종교개혁자 존 칼빈(J. Calvin)은 구원에 있어서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였던 존 머레이(J. Murray)교수는 '확정적 성화' 교리를 통하여 성화가 구원론에 있어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역설하였다. 교회사를 통하여 보더라도 청교도들이나 설교의 황태자 챨스 스펄젼(C. H. Spurgeon)이나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 마틴 로이드 죤스(D. M. Lloyd Jones)등의 설교자들의 설교에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바로 회심의 문제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소논문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서 재고의 작업 없이 일반화되고 있는 구원론의 문제를 역사적 개혁주의의 관점에서 한국 교회의 구원의 교리에 대한 평가 작업을 시도하려고 한다. 성경에서 명백히 증거하고 있는 가시적인 유형 교회 내의 알곡과 가라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가 본 논문을 통하여 작은 문제 제기라고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Ⅱ. 역사적 개혁주의 구원론
'그리스도인'을 두 개의 그룹이나 또는 등급으로 구분 짓는 것이 비성경적임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챨스 핫지(C. Hodge), 제임스 보이스(J. M. Boice), 로버트 답니(R. Dabney), 존 번연(J. Bunyan),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89년의 침례교도 신앙고백, 남침례교 신앙 선언문등에서 나타나 있다.
죠지 휫필드(G. Whitefield)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챨스 스펄젼에게 극찬을 받았던 경건한 주석가 매튜 헨리(M. Henry)는 그의 마태복음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들어있는 모든 은혜는 우리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구주로서 그분으로부터 받을 혜택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챨스 스펄젼은 그의 학생들에게 이런 경고를 했다. '만일 공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주님의 뜻을 분명히 안다고 공언하면서 그 뜻을 전혀 따를 의사가 없다면 그의 주제넘은 말을 그냥 받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확지시키는 것은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사람이 우상들에게 붙잡혀 있고 아직도 마음이 죄를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단순히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순간에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을 확장시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만약 그렇게 복음을 전한다면 나는 거짓말쟁이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자며,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의 색욕거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구프린스턴의 탁월한 조직 신학자였던 A.A.핫지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이 만약 그리스도를 성화를 위한 분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칭의를 위한 분으로도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죄인이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거룩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죄들 속에서 머물면서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나의 죄들 속에서 머물면서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저를 지금 성화시키지 마십시오. 그러나 지금 저를 의롭게 해주십시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받아 주시겠습니까? 당신이 혈액 순환과 공기의 흡입을 분리시킬 수 없듯이 칭의를 성화와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호흡과 혈액의 순환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어느 한쪽이 빠지면 안 됩니다. 이 두 가지 활동은 동시적이며 하나의 생명체를 이끌어 갑니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칭의와 성화를 다 같이 가져야 합니다. 이 둘은 함께 공전하면서 하나의 삶을 이룹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성화가 없는 칭의만을 위해 영접하려고 시도한다면 실패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성화되지 않은 것처럼 의롭게 되지도 않습니다.'
스펄젼은 그의 설교에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그것은 사실상 구원의 결과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이 아니라, 우리의 나쁜 습관, 악한 심성, 더러운 마음, 습관적인 죄악으로부터 구출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죠나단 에드워즈나 청교도들도 이러한 믿기만 하면 구원얻는다는 식의 신앙지상주의를 배격했다. 한국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로이드 죤즈를 오해한 나머지, 로이드 죤즈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죄의 심각성, 율법의 필요성, 심판의 엄중성을 간과한채, 죄에 뒤따르는 건전한 죄의식을 영적 우울 증상으로 매도하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강조하는 사람을 행위론자(신자의 행위로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사람)와 알미니안(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통탈할 노릇이다. 아더 핑크(A.W. Pink)는 회개 없는 복음은 복음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경고했다.
마틴 로이드 죤스는 그의 에베소서 설교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길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칭의와 성화를 떼어내는 것처럼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같이 성경을 완전하게 오해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수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은 언제나 거룩이라는 차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뒤에 거룩하여지기로 결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두 문제를 비논리적으로 구분하고 떼어놓는 것처럼 비성경적이고 위험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거룩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에서 시작이 되고 거룩에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거룩은 구원의 시작이자 끝인 것입니다. 구원의 전체 과정은 우리들을 그리로 인도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데로 우리들을 인도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제나 거룩으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죤 머레이 교수도 그의 조직신학 선집에서 확정적 성화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유비에 따라서, 죄 안에 또는 죄에 대하여 산 사람은 죄의 영역 안에서 살며 활동한다-그것은 그의 삶과 활동의 장이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더 이상 그 영역에서 살지 않는다. 그것과의 연계는 끊어졌으며, 그는 다른 영역으로 옮겨졌다. 여전히 죄의 영역에 사는 사람들은 가장 심각한 어조로 '나는 그를 찾았으니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Ⅲ. 결론
필자가 짧은 이 소논문을 통하여 말하고자 했던 것이 완전주의(Perpectionism)는 물론 아니다.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와 같이 필자도 완전주의를 거부한다. 지상에 있는 성도중 그 누구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화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그러한 문제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다시 말하여 회심하지 않은 자연인을 예배당에 출석하고 믿음을 표시하는 것 만으로 아무런 검증도 거치지 않은 채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통하여 한국 교회는 심각한 구원론에 있어서의 혼동을 겪고 있다. 이에 이러한 구원론에 대한 재발견과 새로운 조명이 이루어져서, 죠나단 에드워즈(J. Edwards)가 구원에 있어서 성도의 열매를 매우 강조하면서 실제로 자신의 노샘프턴 목회지에서 그러한 원리를 적용시켰던 것처럼 한국 교회도 이러한 실천적 개혁주의 구원론에 대한 적용이 목회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본 소논문을 마치고자 한다.
참고문헌
어네스트 롸이씽거, 거짓 신자, 이중수 역, 양무리서원, 1993.
존 머레이, 조직신학 선집 Ⅱ, 박문재 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1.
마틴 로이드 죤스, 에베소서 강해 1권, 서문 강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84.
조엘 비키, 청교도 전도, 김홍만 역, 청교도신앙사, 2002.
마틴 로이드 죤스, 로마서 강해 7권, 서문 강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77.
제프리 윌슨, 뒤틀린 복음, 이중수 역, 양무리서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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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해석 방법론연구
- 메시야적 해석을 중심으로 -
성기문
목차
1. 서론
1.1 문제제기
1.2 내용요약
2. 본론
2.1 신구약의 상관성
2.2 기독론적 해석
2.3 모형론적 해석
2.4 메시야적 해석
3. 결론
참고문헌
1. 서론
1.1 문제제기
구약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등한히 읽혀지는 성경이다. 이것은 신앙인들의 개인적인 국면에 속한 문제만은 아니다. 실제로 신약성경만 별도로 출판되기는 하지만 구약성경이 별도로 출판된 적은 없다(물론 구약성경 중 시편은 예외적으로 예배적 측면의 배려에서 신약성경의 부록으로 추가되기도 한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선호(選好)의 문제가 아닌, 기독교 교회 자체의 신학적인 경향을 반영한다. 또한 이 문제는 한국교회에서도 예외없이 적용될 수 있는 동일한 문제이다.
우선적으로 이러한 신구약간의 관계성을 올바로 이해한 근거하에서만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구약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의 방법론에 대해서 정당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제시되는 의문점은 이것이다. 신약없이 구약은 기독교적일수 없는가? 구약은 신약에 대한 장황한 서론일뿐인가? 신약에 의해서 구약의 모든 부분은 폐기되었는가? 구약에 대한 존중은 율법주의이며 신약은 은혜와 상치되는 것인가?
신약과 구약과의 관계성에서의 문제는 둘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갈등구조속에서 존재한다. 우리가 만약 구약연구의 가치만을 강조한다거나 구약만을 (신약없이) 배타적으로 이해한다하더라도 그러한 경향의 구약 연구가들이 모두 기독교 신학자가 아닌, 유대교 신학자가 되는 것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신약만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보고 구약을 등한히 한다면, 행위보다는 은혜를 강조하는 것만이 진정한 기독교 신학자가 되는 길인가? 모든 구약해석의 방법론은 신약에서 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합당한 견해인가? 과연 일견(一見)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신구약의 관계를 해소시켜줄 방안은 없는가? 이와 더불어서 우리는 구약에 나타난 메시야해석에 대해서 개괄적으로라도 살펴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그 내용적인 면보다는 역사적 이해와 방법론들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1.2 내용요약
본론에서 우선 신구약의 상관계성을 개괄적으로 다루어 볼 것이다.
1) 구약신학적 해결들
(1) 구약이 본질적인 성경이고 신약은 구약을 해석하는 부록이다.
(2) 구약은 '그 명칭'에 대한 독자적인 증거이며, 신약은 그것의 기독교적 후속물이다.
2) 신약신학적 해결들
(1) 신약이 본질적인 성경이고 구약은 신약의 비기독교적인 전제이다.
(2) 신약은 구약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약속을 증거하는 것임을 밝힌다.
3) 성경신학적 해결모색들
(1) 신구약은 동일하게 기독교인의 성경이다.
(2) 신구약은 상호관련이 있다.
(3) 신구약은 하나의 구속사를 형성한다.
(4) 신구약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
이후에는 특별히 구약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기독론적 해석과 모형론(혹은 예표론)적 해석과 메시야적 해석방법론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살펴보는 메시야적 해석방법론에서는 우선 구약의 메시야 해석사에 대해서 살펴 보고 접근 방법론(즉 1) 신-왕 어투, 2) 극단적인 분리, 3) 기독론적 접근, 4) 예언적, 구속사적 접근)과, 그 역사적 발전을 살펴본다.
2. 본론
2.1 신구약의 상관성
우리는 우선 신구약의 상관계성을 개괄적으로 다루어 볼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을 "新, 舊約"으로 범주화하는데서 신구약성경의 상관성에 대한 오해가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극단적인 분리, 혹은 단절은 구약만을 성경으로 여겼던 유대인들이나 신약만을 성경으로 여겼던 말시온주의자들(Marcionists)에게서 그 예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대대로 기독교회에서는 신구약의 통일성에 대해서 잘 변호하였다. 물론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알레고리적 해석의 위험성도 있었지만, 대부분 말씀의 문자적 이해 가운데서 역사적 발전으로 이해하였다. 우리는 신구약의 관계성을 "신약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에 나타나 있다"라고 말한 어거스틴에게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중세에 접어들면서 성경의 사중적 이해가 발달하게 되었고 신구약의 연속성은 인정되었지만, 구약의 불완전성과 신약의 완전성이 제시되었다. 종교개혁시대에는 성경상의 연속성과 다양성 모두가 인정되었으나 루터의 기독론적 해석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발달이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자, 구약을 저급한 윤리나 이방종교의 영향을 받은 종교적 산물로 여기게 되었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신구약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결책들이 제시되었다.
1) 구약신학적 해결들
(1) 구약이 본질적인 성경이고 신약은 구약을 해석하는 부록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놀드 판 룰러(Arnold van Ruler)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구약성경이 신약성경보다 신학적으로 우월하다고 본다. 구약과 신약은 모두 동일한 하나님을 가르친다고 본다. 구약과 신약은 동일하게 계시라는 범주에 들어가며 구약에서부터 신약으로의 계시의 발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유형론적으로 이스라엘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수렴된 것으로 보며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한 구원의 문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신정국가의 설립에 있는 것이므로 기독교국가란 단지 이스라엘의 전통을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곧 이스라엘의 원형(antitype)이다. 구약없이 신약은 이해될 수 없기에 복음해석(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전거로서 구약은 복음전파에 사용될 수 있다.
요약컨데, 그의 주장은 1) 신구약에는 근본적인 불일치가 있다. 2) 구약은 신약과 비교하여 남은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이다. 4) 창조론은 구원론보다 더 중요하다. 5) 하나님의 나라는 구약의 핵심적인 개념이다.
(2) 구약은 '그 명칭'에 대한 독자적인 증거이며, 신약은 그것의 기독교적 후속물이다.
코르넬리스 H. 미스코테(Kornelis Miskotte)의 견해를 보면, 상당부분에서 판 룰러와 유사하다. 그러나 구원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으로 본다고 말한다. 구약은 간접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등한히 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미스코테의 중요성은 "구약 스스로가 말하도록 하라"는 그의 주장인 것이다. 즉 신약의 기본적인 메시지가 구약에 있는 것이므로, 구태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의 메시지를 주입시켜서 구약을 읽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2) 신약신학적 해결들
(1) 신약이 본질적인 성경이고 구약은 신약의 비기독교적인 전제이다.
우리는 여기서 루돌프 불트만의 견해를 본다.
그는 발전주의적 접근방법을 사용해서 예수 안에서 완전해진 "윤리적 유일신론"이 발생했고 이스라엘 속에서 발전했다는 점에서 구약을 기독교의 원천이라고 본다. 구약에서 발전한 신약이지만, 덜 세련되고 원시적인 것은 비신화화를 통해서 제거되어야 한다. 즉 유대주의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또한 실존주의적인 입장에서 新實存(예수 혹은 복음)으로서 舊態의 實存(구약, 율법)을 깨뜨려버려야 한다고 한다. 신약은 구약에 대한 연속도 아니며, 새롭게 변화된 무언가이다. 기독교인에게는 구약자체는 계시가 될 수 없다.
(2) 신약은 구약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약속을 증거하는 것임을 밝힌다.
프리드리히 바움게르텔(Friedrich Baumg rtel)은 불트만과 유사한 점들이 있다. 구약은 신약의 안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나, 신구약사이의 불연속성의 문제에서 그렇다. 신구약은 대조된다. 구약과 신약사이의 성도들도 강력하게 대조시킨다. 구약은 특성상 예언이 아닌, 약속으로 보아야 한다.
3) 성경신학적 해결모색들
(1) 신구약은 동일하게 기독교인의 성경이다.
빌헬름 피셔(Wilhelm Vischer)는 구약에 우선적인 강조를 두나, 구약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한다. 구약은 베일에 가리워져 있고 예수 사건에 의해서만 명확하게 드러난다. 전성경이 동등하게 기독교의 성경이라고 본다. 구약은 그리스도의 개념을, 신약은 예수의 개념을 설명해주므로, 구약은 신약을 지향하며 신약은 구약을 회고한다. 즉 사도들의 복음선포란 신약의 예수가 구약의 그리스도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약해석의 핵심이다. "성경의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만을 증거한다(Everywhere the Scripture is About Christ Alone)."
(2) 신구약은 상호관련이 있다.
우선 모형론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1) 약속-성취적 신구약성경의 관계접근과 관련된 해석사를 의미하는 것 2) 알레고리와 상징주의와 긴밀한 연관을 지닌 성경해석형태의 두가지의 별개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 (전자의) 모형론에서는 1) 예표(prefiguration), 2) 상응점(correspondence)의 두부류로 나뉜다. 다음은 모형론의 개념이 아닌 것들이다. 1) 모형론은 석의가 아니다(즉 문법적, 역사적 연구를 主로 하는 석의가 아니다). 2) 예언이 아니다(모형론은 회고적이지만, 예언은 예견적이다). 3) 알레고리가 아니다. 4) 상징주의가 아니다. 4) 어떤 방법론이나 체계가 아니다.
(3) 신구약은 하나의 구속사를 형성한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에 따르면, 구약은 미래지향적이다. 새로운 구원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 신약의 중심사상이다. 그는 구약내에서는 물론 신구약사이의 불연속성과 연속성이라는 극단적인 견해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이스라엘 관계의 참된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있다"는 의미에서 통일성을 제안한다. 그는 거기에 구조적 유비가 있다고 주장한다.
(4) 신구약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
프리젠(Vriezen)은 구약신학의 대상은 이스라엘의 종교가 아니라 구약성경이며 구약신학은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케뤼그마적이다. 그에 따르면, 구약은 고대 동양의 책으로 여겨지며 역사적, 문학적 비평방법론은 구약연구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며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구약과 신약에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과 결정적인 불연속성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연속성이나 불연속성을 강조하거나 조화하려고 했지만, 프리젠은 그러한 요소들을 신구약관계의 이해에 핵심적인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각의 주장들에서 우리는 배워야할 부분들이 있다. 신구약은 각각의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호간 매우 밀접한 관계성 속에서 존재한다. 이러한 본질을 무시한 채, 양극단을 걸으려는 작금의 현실은 상당한 문제거리로 남는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할 바는 신구약성경은 하나의 성경이며 두성경중 어느 하나를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게 가정하는 것을 거절해야 한다. 그러나 어쨋든 구약을 하나의 중심사상으로 이해하려는 생각은 지금까지는 성급하며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2.2 기독론적 해석
기독론적 접근방법전반에 대해서 오즈본은 자신의 책 "The Hermeneutical Spiral"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피셔Vischer(1949)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 사건에 근거해서 성경의 모든 부분을 해석
해야 한다. 구약과 신약 모두가 그리스도가 누구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헹스텐베르크, 바르트와 많은 루
터파 신학자들이 오늘날의 기독론적 접근방법의 인기가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 방법은
몇가지의 이익이 있다: 즉 그것은 많은 성경신학자들 사이에서 지나치게 과도한 역사화의
경향(historicizing tendency)으로부터 보호하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분석적
방법(the analytic approach)은 반대로 가끔 실제로 신약이나 구약의 예언적 목적을 의식하지
않는 구약신학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대체로 이러한 해석의 흐름에서는 강점보다도 더 상당한 위험요소들이 있다. 거
의 모든 지지자들은 구약본문들을 예견된 "그리스도의 모형들(types of Christ)"등에 맞추기
위해서 알레고리화하며 영적인 해석(spiritualize)으로 만든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행위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구약은 사라져 버린다. 주관적인
사색과 환원주의는 그것을 일련의 예언적 행위들도 환원한다. 본문의 의도, 자체적인 가치로
서의 정경상의 구약성경, 그리고 야웨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체험들
의 가치가 "관련성(relevance)"의 제단에 모두 희생된다. 언약들 사이의 연속성을 입증할만한
더 나은 방법이 있어야 한다.
2.3 모형론적 해석
반복되는 것 같지만, 우리가 히브리서에서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듯이, 모형론적 해석도 신구약에서의 그리스도 이해에 상당한 유익을 준다. 모형론적 해석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무엇이 모형(type)이냐는 것이다. 그 구성요소는 1) "그것이 상징(혹은 모형)하는 인물이나 사건(혹은 사물)의 참 표상이어야 한다... 2) 모형은 반드시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구원계획 속에서 구약의 모형이 신약의 실체(혹은 원형)을 가리키도록 주권적으로 역사를 설정하셨다. 3) 어떤 모형은 항상 미래의 어떤 것을 예표한다. 반면 상징은 어떤 사물의 현재나 과거 혹은 미래를 가리킬 수도 있다." 모형론은 우리에게 신구약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다양성과 함께 통일성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다분이 그러한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수의 학자들은 모형론과 상징주의 혹은 알레고리를 구별하지 않는다. 모형론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1) (역사비평적 관점에서 행해진 것이지만) 구약에 대한 신약의 모형론적 해석은 참된 역사적 이해가 아니고, 단지 신약기자들의 견강부회식 읽기에 불과하다.
2) (일관된 의지와 목표를 가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假定의 정당성의 문제.
2.4 메시야적 해석
성경을 읽을 때, 구약의 모든 부분들이 전부 메시야를 예견하고서 기록되었던 것인가에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본문자체의 당시의 시대적 의미는 발견할 수 없는가? 시대적 의미와 미래적 메시야적 의미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의 의문이 생긴다. 그에 대해서, 트렘퍼 롱맨에 따르면,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이해에 있어서(특별히 그에게 있어서 시편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주의사항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시편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두가지 오류가 있다. 하나는 시편의 본
래의 배경을 소홀히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좁은 의미에서 보면, 메시야적 시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또 하나의 오류는 시편이 예기하고 있는 것, 기대하고 있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에 비추어 시편을 읽을 때, 신약은 우리의 시편이해를
변화시킨다.
즉 설교나 적용시에 신약이 행하고 있는 데에서 메시야적 해석을 멈출 것인가, 아니면 더 나아갈 것이냐의 문제는 기독론적 해석이나 모형론적 해석과 마찬가지의 난점에 봉착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이 이중적 성취(double fulfilment)나 이중적 해석의 범주로 빠지게 되어서는 않된다.
舊約의 메시야的 解釋史
우선 우리는 신약시대부터 현재까지의 구약의 메시야 예언에 대한 대략적인 해석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각각의 성경구절에 대한 이해에 대한 세부적인 언급은 다루지 않는다.
新約의 경우
신약은 예수가 인격으로서의 메시야(the Messiah in person)이며 그가 모든 메시야적 요구사항들을 성취하였다고 본다. 이것은 예수 자신의 견해이며 사도들의 견해였고 초대교회의 견해였다. 즉 구약의 예언들에 대한 신약의 관점은 거의 모든 구약의 예언들을 메시야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직간접의 언급이 존재한다고 믿음이었다.
敎父들의 경우
바나바스(주후70-130)는 해석상 과도한 알레고리를 사용했다고 여겨지나 그는 신약의 구약에 대한 메시야 해석을 따랐다. 이레니우스(115년경-200)는 창3:15, 민22:12와 24;17등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년경-215)는 구약을 신약의 메시야를 예보하는 것으로 보았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186년경-254)은 노아와 이삭과 야곱의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된 사건들을 예언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타나시우스(296년경-373)는 구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를 강조하였고 그의 구속사역을 특별히 개략적으로 진술하였다.
크리소스톰(345년경-407)은 후대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야곱이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하였다고 말했다. 어거스틴은 아브라함이 그리스도가 자신의 허리에서 나올 것을 알았고 말했다.
猶太敎의 경우
필로(주전20년경-주후45)는 나름대로의 구약에서의 "영적이며 동시에 지상적인"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37년경-100)은 예수에 관한 기록을 남겼으며 예수의 초인간적 지혜와 기사(奇事)를 행하는 자로 묘사함으로서 메시야적으로 이해한 것 같다. 물론 궁극적으로 기독교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도 구약을 메시야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宗敎改革者들의 경우
종교개혁자들은 일부 구약구절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적으로 말하였다고 생각했다. 마틴 루터(1483-1546)는 특별히 이신칭의적, 기독론적 해석방법론으로 유명한데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며 심지어는 그리스도와 상반되는 (즉 행위와 율법을 강조하는) 성경을 격하시키는듯한 표현을 하기도 했다. 울리히 쯔빙글리(1483-1531)는 루터의 메시야구절에 대한 해석에 동의하였다. 존 칼빈(1509-1564)은 원복음(즉 창3:15)에 대해서나 유다에 대한 예언을 메시야에 직접적인 예언으로 여긴다.
現代學者들의 경우
19, 20세기초에 다루어야 할 학자들은 특별히 패튼 J. 글로그(Gloag), 헹스텐베르크(Hengstenberg), 그리고 벤자민 B. 워필드(Warfield)이다.
글로그는 자신의 책 "Messianic Prophecies"에서 "예언의 본질과 중요성"을 다룰 때에, 이전시대와 당시의 학자들의 견해(영국, 독일, 프랑스의 학자들)를 다루었다. 그 당시는 이신론(deism)이 지배하던 시대여서 예언이나 예언된 메시야에 대해서는 등한히 여겨지던 시대였다. 덧붙여서 그는 유대학자들의 견해도 살펴보았다.
에른스트 W. 헹스텐베르크(1802-1869)는 당시의 독일경건주의학풍의 시조라고 볼 수 있다. 그의 구약의 기독론(Christology of the Old Testament)은 경건주의학자의 탁월한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그 추론의 상당부분이 다른 원리들과 절차를 통하여 얻어진 실제적인 동일한 결론들에 도달했던 사람들에게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많은 비평들이 그의 저작은 경건주의적이긴 하지만, 역사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못하다는데 집중되기도 한다. 어쨋든 그는 현대 보수주의신학의 아버지로서의 자격을 갖추며 당시까지의 보수적인 기독론적 구약해석에 한 지평을 이루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구프린스톤학파(Old Princeton School)를 이끌었던 벤자민 워필드도 구약의 메시야 해석을 살펴볼 때 반드시 살펴보아야할 학자들 중의 하나이다. 그의 논리나 분석은 탁월하며 그는 헹스텐베르크, 비니(Binnie), 알렉산더(J. A. Alexander), 허만 바빙크(Herman Bavink)등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특별히 구자유주의학파들의 결함(특별히 역사비평)을 비평하였다.
現在의 學者들의 경우
메시야 개념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현재의 문헌들은 다음의 네가지 범주들로 구분될 수 있다. (1) 신-왕 어투, (2) 극단적인 분리, (3) 기독론적 접근, 그리고 (4) 예언적, 구속사적 접근.
(1) 신-왕 어투(THE DIVINE-ROYAL FORMULA)
엥넬(Engnell)이 대표적인 학자로서 그는 양식, 편집비평을 사용하여 구약이 이교신화에서 차용한 신-왕 어투를 차용하였다고 주장한다. S. 모빙켈(Mowinckel)은 가나안의 왕권모델을 차용해서 이스라엘의 언약 개념에 수정하여 차용하였다고 말했다. 에드? 쟈콥(Edmund Jacob)은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희망은 다윗시대보다 우선하지만, 현재의 메시야 신탁의 기원은 아뒷시대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는 메시야적 전승이란 단순히 왕과 그의 보좌에 대한 위임(즉 기름부음)에 대한 언급일뿐이라고 말한다. 어쨋든 이스라엘의 지역왕에 대한 개념이 신약의 우주적인 통치자인 주로 이상화되었다고 말한다. 발터 아이히로트(Walter Eichrodt)는 선지자들이 고대 신화적인 전승들을 보존하였지만, 완전한 신적 주권의 환상에 굴복하였다고 주장한다. 메시야의 구속적 역할의 개념은 억압과 바빌론 포로기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2) 극단적인 분리(THE RADICAL DISJUNCTURE)
구약의 메시야와 신약의 그리스도사이의 단절을 말하는 부류는 유대학자측과 기독교인학자측의 양쪽에서 나타난다. 기독교 학자측에서는 J. L. 맥켄지(MacKenzie)로서 신약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알레고리로서도 모형(type)으로서도 예보되거나 예시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유대교 학자들측에서는 J. 클라우스너(Klausner)와 예헤즈켈 카우프만(Yehezkel Kaufman)등이 있다. 카우프만은 신약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약속한 인격의 메시야였다는 여하한의 제안을 거부하고 구약의 메시야 개념을 이스라엘 민족자체에 적용하여 고전적인 유대교 사상으로 회귀한듯 보인다.
(3) 기독론적 접근(THE CHRISTOLOGICAL METHOD)
이 관점에는 다섯가지 설명이 우선해야 한다. 첫째설명은 신정통주의적 조직신학자들이 추종한다. 둘째설명은 보수, 복음주의적인 입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메시지의 핵심이라고 항상 주장해왔댜는 것이다. 세째로, 폰 라트는 자신이 구약을 연구할 땐 신-왕 어투로 기울더니, 신약을 연구할 때는 기독론적 해석으로 기울었다. 네째로, 신약저자들의 구약해석방법론일 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다섯째로 그리스도를 인격으로서 보다는 관계성이나 차용된 메시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구약학자들로서 이러한 기독론적 해석의 예는 "The Witness of the Old Testament(W. Vischer)"와 "Throne of David(A. G. Herbert)"이다.
(4) 예언적, 구속사적 접근(THE PROPHETIC REDEMPTIVE-HISTORICAL APPROACH)
다음의 세저작들이 이부류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는 유기적, 점진적, 역사적 계시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신적 계시는 언약맺음과 언약갱신시에 다양하게 그리고 상당한 계시로서 주어졌다. 마틴 J. 빈가르던(Wyngaarden)은 언약의 왕국적 상황과 언약의 씨앗과 약속을 강조한다. J. 쉘하스(Schelhaas)는 이스라엘의 민족형성이전의 메시야개념의 관련성을 제시하는 구절들에 대한 세부적인 주석적 연구를 하였다. 그러나 언약신학적(성경신학적) 방법론이 개혁주의신학계에서는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신구약의 통일성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장점과 유익을 주는 것은 사실이나, 주지하다싶이, 구약의 핵심사상을 언약만으로 포괄할 수 있는가에는 의문이 있다.
구약의 메시야론의 내용과 역사적 전개
구약의 메시야론은 의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메시야 교리는 그 역사적 성취에 도달하는 변혁적인 봉우리들(climacteric plateaus)와 함께 그 성취에 있어서 영원한 것으로,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단일하고 단일화된 계획에 위치한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구약내의 메시야관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볼 수 있다.
약속의 뿌리
족장이전시기의 약속의 뿌리는 아담과 이브에게 주어졌던 원복음(protoevangelium)이라고 불리워지는 창3:15과 셈에게 약속하신 창9:26-27이다. 전자의 구절은 뱀의 씨와 여자의 씨사이의 항구적인 적대감과 최종적인 여자의 씨의 승리를 말하고 있다. 후자인 창9:26-27의 경우에는 중요한 해석상의 난점이 존재한다. "그가 셈의 장막에 거할 것이다"에서 거한다는 표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것이냐의 문제와 "그"가 과연 하나님인가, 아니면 야벳이냐의 문제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그 주어를 하나님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이 본문은 하나님이 셈의 후손으로 말미암는 복을 말해주고 있다.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
하나님은 셈의 후손들 중의 하나인 아브라함을 만나시고 그로부터 하나님의 약속이 나올 것임을 말씀하신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약속의 상속자들의 반열에 들어간다. 특별히 하나님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다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그대로 행했을 때, 하나님이 이삭을 대신할 제물을 스스로 준비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기뻐했던 것은 바로 "예수의 때를 보고 기뻐함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하나님의 아브라함의 선택은 이어서 야곱의 제왕적 예언(창49:8-10)과 발람의 예언(민24:17)으로 연결되었다. 여기서 "실로"라던지, "별", "홀(笏)"로서 더 명확해졌다. 즉 단순히 약속의 씨는 사람으로서 뿐만 아니라, 유다지파를 다스릴 왕자이어야 했다.
영원한 제사장직
미래에 임할 그 씨는 왕권과 함께 제사장직과 선지자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엘리 집안의 멸망이후로, 하나님은 신실한 제사장을 세워서 그에게 영원한 집을 세워서 자신의 기름부음받은 자앞에서 영원이 걷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삼상2:35). 그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서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이 제사장직을 수행할 것이다(시110:4,6).
모세와 같은 선지자
신명기18:15,18에서 유대인들 가운데서 모세와 같이 선지자가 하나 나올 것인데, 이 참선지자들의 계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모세는 이미 왕(신33:5)으로 불리웠고 이스라엘의 첫 제사장이었으며(출34:3-8) 사사로 행했다(레10:16-20).
다윗의 확실한 자비들(The Sure Mercies of David)
하나님의 메시야 예언은 선지자 나단에 의해서 더 명확해진다(삼하7장, 대상17장). 하나님은 다윗의 왕위를, 왕국을, 그리고 왕좌를 영원히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만방이 그앞에서 무너져 내릴 것이며 그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응하게 될 것이다(시72:10).
여호와의 종
왕권과 승리의 주제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게?) 고난받는 메시야의 주제가 함게 나온다. 지명된 대속에 근거한 보속, 혹은 구원의 원칙은 이미 모세에 의해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가르쳐졌다(출12;14). 그러나 이 개념은 특별히 이사야의 여호와의 종개념에서 더욱 명확하게 나타난다.
사람의 아들(人子)
다니엘서에서 우리는 사람의 아들의 개념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인자는 통치하며 지배하는 왕으로서의 메시야이다. 그는 하늘의 구름과 함께 임하실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구약성경의 상관성으로부터 몇가지 해석방법론을 다루었고 그것들의 장단점도 살펴보았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해주며 해석의 핵심이 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들의 해석방법과 구약내의 역사적 전개도 살펴보았다. 이 연구를 통하여 신구약사이에 통일성과 하나의 맥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성경신학과 구약신학과의 조화점을 명확하게 규명하지는 못했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해석방법론을 메시야적 해석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제하는 가운데서 어떻게 신구약을 조화롭게 해석할 것인가도 살펴보았다. 신구약의 통일성이라는 측면에서 구약은 항상 신약을 지향하고 신약은 항상 구약을 회고한다는 명제에는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할과 비중의 측면에서는 상당히 다른 견해를 내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의를 통하여 (한계점을 내포하고는 있지만) 각각의 논의들과 방법론에 있어서의 교훈거리들을 얻게 되었다. 구약의 구절들에 대한 신약적 해석에 대한 것은 다루지 못했지만, 구약자체의 메시야 개념의 발달에 대해서는 다루어 보았다.
여기서 아쉬운 점이라면 명확하고 자세한 논의가 제기될 수 없었다는 점과 (주제자체의 무거움과 난해성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여러가지 논의에 대해서 다루어보고 특별히 메시야적 해석이라는 측면에서 그 역사적 발전을 중심으로 다루어 보았다는데 그 의의를 두고 싶다.
현재까지 가장 완벽하게 신구약의 관계성이나 구약을 꿰뚤어서 신약에게로 인도하는 신학은 제시되지 않았다. 어찌보면, 구약자체의 역사적, 문법적인 연구와 더불어 성경신학적인 연구방법론은 한동안 평행선을 긋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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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룡과 개혁파 정통신학 / 최덕성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죽산 박형룡 박사(1897-1978)는 개혁파 정통신학(Reformed Orthodoxy)을 보급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1 그가 꽃다발처럼 엮어 한국교회에 소개한 신학은 오늘날에도 한국장로교회 신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한국기독교 전체를 두고 볼 때 그것은 강세(强勢)를 보이고 있다. 박형룡이 가르친 신학은 고신교회와 보수계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다.
고려신학교 설립자들이 전 장로교회신학교(평양)의 교수였으며 만주 동북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박형룡을 초대 교장-교수로 초빙한 것은 그가 지향하는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계승하고 전수받기 위한 목적이었다. 고신교회는 정통신학운동으로 출범했다. ‘정통신학’은 박형룡이 소개한 개혁주의 신학을 뜻한다. 고신파는 박형룡이 고려신학교를 떠나면서 보인 신행불일치 행보는 유감스럽게 생각했지만 그가 소개한 신학에는 높은 존경심을 보여 왔다.
박형룡은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보급하고 파수하려는 강박관념으로 살았다.2 신학저작 전집을 출간하면서 “이 모든 문서들에서 한국장로교회의 전통적 정통신학을 보수 전달하려는 일편단심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은 전국 교계가 알아주시면 합니다”3고 고 말했다. “우리의 사상적 환경은 변천무상할지라도 우리 교회는 이 신앙을 영구히 지켜 변치 말기를 성심으로 축원한다”4고 말했다. 1953년에 장로회총회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신학교육의 목표와 신학 노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들은 학생들에게 명확한 신학적 자아의식을 가지도록 할 것이며, 한국교회 신학의 수립에 정신(挺身)할 것이다. 한국교회 신학의 수립이란 결코 우리가 어떤 신학체계를 창작함이 아니라 사도적 전통의 정신앙(正信仰)을 그대로 보수하는 신학, 우리 교회가 70년 전 창립되던 당시에 받은 그 신학을 우리 교회의 영구한 소유로 확보함을 이름이다.5
박형룡은 순수한 청교도적 개혁신앙을 주지(主旨)로 삼아 그것을 전달하고 한국교회가 영구히 보존하기를 희망했다.
이 글은 보수계 한국장로교회가 큰 폭으로 수용하고 있는 박형룡의 정통신학의 역사신학적 위치를 밝히는 데 있다. 고신, 총신, 합신 등만이 아니라 장신 측에서도 소중하게 여기는 정통신학의 신앙노선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박형룡이 한국문화와 사회의 격변기라는 시대 환경에서 바울, 어거스틴, 칼빈이 가르치고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18-19세기 구프린스톤신학자들이 체계화한 신학을 소개하고 한국교회가 그것을 영구히 보존하기를 바랐으며, 박형룡이 사도적 전통과 동일시하면서 바른 신학으로 여겨 소개한 신학에는 청교도주의, 세대주의, 한국적인 요소 등이 가미되어 있다는 것을 밝힌다. 박형룡이 강조한 개혁주의 정통신학은 개혁파 정통신학, 개혁주의 신학, 개혁주의, 칼빈주의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1. 신학적 갈등의 시대
박형룡은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창건한 해에 평안북도 벽동에서 출생하여 서당교육을 받았다. 그는 가슴을 울리며 실존적 결단을 재촉하는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박형룡은 신성중학교(평북 선천)와 숭실전문학교(1916-1920, 평양)를 졸업하고, 26세에 중국의 국제도시 남경의 금릉대학교(1921-1923)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감부열 선교사의 권유를 따라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수학(1923-1926)하고 신학사(B.Th.)와 신학석사(Th.M.)학위를 동시에 받았다. 이듬해에 켄터키주 루이빌시에 있는 남침례교신학교의 박사 과정에 두 학기를 등록했다. 귀국 후에 ‘자연과학의 반기독교적 영향’(Anti-Christian Influences from Natural Science)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하여 철학박사 학위(1932년)를 받았다. 박사과정에서 변증학을 전공하고, 신학과 심리학을 부전공했다.6
박형룡은 귀국하여 산정현교회의 전도사, 숭실중학교의 성경교사, 숭실전문학교의 강사로 봉사했고, 1928년에 장로회신학교 임시 교수, 1931년에 전임 교수가 되었다. 그는 남궁혁 박사·이성휘 교수에 이어 세 번째로 이 학교의 한국인 교수가 되어 변증학, 신학난제, 기독교 윤리 등을 가르쳤다. 장로회신학교가 펴내는 『신학지남』에 여러 편의 논문을 기고했고, 강의안과 몇 편의 논문을 모아 처녀작 『기독교신학난제선평』(1935)을 출간했다.
박형룡은 1938년 여름에 장로회신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폐교되는 등 일제의 기독교 박해가 심해지자 그 해 가을에 동경으로 망명했다. 1942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동북신학교에서 교수했다. 광복 후 고려신학교의 초청을 받아 귀국하여 교수, 교장으로 부임했으나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미국북장로교, 미국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연합교회 등의 선교부와 한국장로교 총회의 지원을 받는 신학교육을 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한국장로교회의 신학교육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사 청산문제나 공적 참회고백의 필요성에는 느슨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 박형룡은 고려신학교를 떠나 총회파와 합류하여 장로회신학교(1948, 서울)를 세웠고, 1951년부터 1972년까지 장로회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에서 학자, 행정가로 활동했다.
박형룡은 『신학지남』에 기고한 ‘차대에 종교가 소멸될까?’(1928)7를 시작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1976)에 이르는 많은 논문들을 발표했다. 4권의 『표준성경주석』, 4권의 설교집, 7권의 『교의신학』, 변증학, 험증학(驗證學)을 집필했다. 이것들을 모아 『박형룡박사저작전집』(1978년) 15권을 출간했다. 이 책들은 개혁파 정통신학을 소개한 것들로, 한국장로교회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신학적 골격 형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박형룡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구프린스톤신학과 일치했다. 프린스톤의 신약학자이며 변증학자인 그레이스앰 메이첸(J. Gresham Machen) 박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그는 상해에서 프레지덴트 매케리호에 승선하여 미국으로 가던 선상에서 일본에서 유학하는 한국 학생들이 발행하는 『학지광』(學之光)이란 책에 실린 ‘무종교자의 종교관’이란 논문을 읽었다. 이 논문에서 기독교를 공격하는 것을 접하고서 의분을 느껴 신학적 변증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8 이를 계기로 “기독교 복음진리의 변증 옹호에 정력을 집중했다.”9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현대주의 신학 갈등을 잘 알고 있는 보수계 선교사 마포삼열(Samuel Moffet)과 배위량(William Baird)은 그로 하여금 변증학에 관심을 갖도록 영향을 미쳤다.
박형룡이 신학을 공부하며 학문활동을 왕성하게 한 시기는 세계 신학계의 격변기였다. 미국은 대륙에서 밀려 온 두 가지 신학사조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첫 번째 경향은 리츨(Albert Ritschl)의 윤리 신학이었다. 기독교의 궁극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며, 윤리가 종교의 지고의 선(善)이며 아울러 인간의 이상이라고 믿었다. 실용주의 경향을 가진 미국 기독교계는 이러한 윤리신학에 매력을 느껴 이를 적극 수용했다. 두 번째 흐름은 19세기 말부터 독일에서 발달된 성경비평학이었다. 미국의 여러 신학교들이 이를 수용했다. 리츨의 윤리신학과 독일의 성경비평학은 이를 추종하는 현대주의자들과 저지하는 근본주의자들의 갈등을 가져왔고, 창조론과 진화론에도 서로 다른 견해를 드러냈다.
프린스톤신학교도 이 돌풍을 피할 수 없었다. 개혁파 정통신학의 보루인 이 기관은 이성을 최고의 재판관으로 삼으면서 맹위를 떨치던 영국의 이신론(Deism, 17세기)에 대항하는 복음 전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워졌다. 프린스톤신학교는 칼빈이 봉사한 생피에르교회의 목회자이고 제네바 신학자인 프랜시스 투레틴(Francis Turretin)의 개혁파 전통신학을 전수받았다. 아치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찰스 하지(Charles Hodge), 아치발드 하지(A. A. Hodge),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그레이스앰 메이첸(J. Gresham Machen)으로 이어지는 신학 전통을 따르는 학교였다.
프린스톤신학교는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며 ‘영감된 무오(無誤)한 성경의 권위’10를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성경본문에 대한 문헌적인 비평방법이 성경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성경이 성경을 해석’ 하도록 하는 것이 신학자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학방법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근대 과학방법과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 관련이 있다. 찰스 하지는 이러한 맥락에서 “성경과 신학자의 관계는 자연과 자연과학자의 관계와 똑같다. 성경은 사실의 보고(寶庫)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분별하는 방법은 자연과학자가 자연이 가르치는 것을 분별하기 위해 채택하는 방법과 똑같다”11고 말했다.
한편, 프린스톤신학교를 운영하는 미국북장로교회는 뉴욕의 제일장로교회가 침례교 목사 해리 포스틱(Harry E. Fostick)을 부목사로 청빙하는 것을 시작으로 근본주의-현대주의 갈등을 겪었다. 포스틱이 1922년 5월 21일 주일 아침에 ‘근본주의자들은 승리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 문제로 미국북장로교회가 신학적으로 양분되어 있을 때 필라델피아 아치스트리트장로교회의 목사 클라렌스 매카트니(Clarence E. Macartney)는 ‘불신이 승리할 것인가?’라는 글로 응답했다. 메이첸은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23)를 저술하여 현대주의 신학을 반격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가 아닌 ‘별종 종교’이며, 자유주의와 기독교의 병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규명했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 목사들은 자유주의 신학과 설교에 반발하면서도 화평주의, 포용주의 태도를 보였다. 칼빈주의를 지향하는 목사들이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동안, 다수의 중도파를 대변하는 지도자들은 포스틱의 손을 들어주었다. 진화론을 수용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교회를 개방했다. 자유주의 신학의 대명사인 오번선언서(Auburn Affirmation, 1924)는 처음에 150명의 목사들이 서명을 했으나 6개월 뒤에는 1,270명 이상이 서명했다. 미국북장로교 총회가 결정한 다섯 가지 근본 신앙조항인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 부활, 초자연적 이적 등을 하나의 학설,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독교의 근본 도리들을 사실상 부정한 것이다.12
프린스톤신학교 교수들 사이에도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견해 차이를 수용하는 관용파와 엄격한 태도를 지닌 보수파의 갈등이 표출되었다. 개혁파 정통신학자들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고 생각하여 격분하고 있는 동안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정치적으로 접근했다. 칼빈주의 신학으로 유명한 이 학교는 미국북장로교회와 함께 좌경화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 지지자들의 정치적 수완에 정통신학 지지자들이 따라 가지 못했다. 근본주의-현대주의 갈등은 프린스톤신학교의 좌경화로 막을 내렸다.
자유주의 신학의 승리와 프린스턴신학교의 좌경화에 반발하는 몇몇 교수들은 프린스톤신학교의 신학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필라델피아 근교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프랜시스 베이컨의 과학방법론과 스코틀랜드상식실재론과 관련된 구프린스톤신학 전통을 따르지 않고 ‘이성에 대한 신앙의 수위(首位)’와 전제주의 방법(presuppositional apologetics)을 지향하는 ‘웨스트민스터신학’을 태동시켰다.13 프린스톤신학은 ‘신앙에 대한 이성의 수위(首位)’를 중요하게 여겼다.
박형룡은 1923년 무렵에 프린스톤신학교가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에 휩싸이는 것을 보면서 메이첸(G. Machen)의 신약학, 그린(W. Green)의 변증학, 하지(C. Hodge)의 조직신학, 워필드(B. Warfield)의 성경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바탕을 둔 장로교 고백주의 전통을 배웠다.
박형룡이 프린스톤에서 배운 것은 칼빈주의, 개혁주의, 개혁파 정통주의, 개혁주의 정통신학이라는 명칭을 가진 신학이다. 그는 자신이 신약학을 가르치는 메이첸에게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메이첸은 프린스톤신학자 가운데 가장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그는 『바울종교의 기원』(1921)과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1930)이라는 저서를 출간했고, 미국북장로교회가 오번선언서에 서명한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목사, 선교사)을 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박형룡은 메이첸의 신학노선을 따랐다.15 한숭홍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는 박형룡이 메이첸으로부터 4가지 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 극단적인 배타적 변증적 신학방식, (2) 칼빈주의적 정통주의, (3) 강한 반론과 비판의 논쟁술, (4) 교단 분열과 신학교 분리 설립의 선례 등이다.16 위 두 번째와 세 번째 지적은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박형룡은 귀국하여 줄곧 개혁파 정통신앙의 전사(戰士)로 활약했다. 한국교회 안에 “천태만상의 이사상(異思想)의 가지가지가 유혹의 촉수를 움직이고 있다”17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는 김재준이 『신학지남』에 기고한 권두언을 문제 삼고 이의를 제기했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장로교신학교 기관지에 기고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창세기 저자 문제와 교회의 여권 문제에 반대 입장을 밝혔고, 성경의 무오성과 축자영감설을 강력히 천명했다.
박형룡도 근대과학 정신과 고등비평에도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집필한 ‘아빙돈 주석’을 구독하지 못하게 했고 총회가 『표준성경주석』(1956)을 만들어 내도록 했다. 그는 김재준의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성경관을 혹독하게 평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의 본질을 간파한 그가 자유주의 신학이 한국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박형룡을 근본주의자로 분류하기도 한다.18 근본주의는 1920년대 미국에서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일어난 전통적 기독교 신학운동이다. 독일신학과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는 ‘객관적’ 계시의 말씀인 성경과 그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앞에서 언급한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초자연적 이적 능력 등을 불신했다.19
근본주의 운동은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에 직면하여 『근본주의자들』(The Fundamentalists)이란 잡지를 중심으로 응전의 전열을 가다듬었다. 캘리포니아 어느 석유회사 소유자가 재원을 부담하여 출간한 12권으로 엮어진 이 책 300만 부가 보급되었다. 프린스톤신학자들은 메이첸의 주도하에 공동의 적이던 자유주의 신학을 대항하기 위해 이 운동에 동참했다. 프린스톤신학은 지성적이며 교리 우선적이고 변증적인 특징을 지닌 점에서 다른 근본주의자들과 같지 않았다. 그들은 근본주의 안에 달갑지 않은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20
디모데 웨버(Timothy Weber)가 지적한 대로 미국 근본주의 운동은 복합적인 현상 속에 일어난 신학 운동이다.21 1920년 당시의 근본주의는 여러 가지 신학 전통을 포함하고 있었다. 칼빈주의자, 알미니우스주의자, 오순절파, 침례교인, 장로교인, 세대주의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근본주의 안에는 새로운 신학지식을 거부하는 반지성적인 인사가 있었는가 하면 지성적이며 주지주의적인 사람도 있었다. 세대주의 천년왕국론자, 오순절주의자, 경건주의적 부흥운동주의자도 있었다. 온건한 보수주의자와 전투적 근본주의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지리·사회·정치·교육·신학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었다. 도시와 시골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다.
박형룡은 개혁주의 곧 개혁주의 정통신학과 근본주의를 동일시했다. “근본주의는 별다른 것이 아니라 정통주의요 정통파 기독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역사적·전통적·정통적 신앙을 그대로 믿고 지키는 것 곧 정통신앙과 동일한 것이니만큼 이것은 곧 기독교 자체라고 단언하는 것이 가장 정당한 정의일 것이다. 근본주의는 기독교 자체이다”22고 말했다. 그리고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를 “방지하려고 노력하는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이며 교회의 “참된 사도적 전통”을 파악하려는 자들이며, “순복음 진리를 신앙과 행위로써 지키고자 하는 자들”23이라고 했고, 박형룡은 보수주의와 근본주의를 동일시하기도 했다. “근본주의라는 별호(別號)를 얻은 보수주의”라고 말했다. 『파수군』에 기고한 ‘근본주의 신앙’(1961)에서도 근본주의를 정통신앙과 동일시했다.24
신복윤 교수(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의학)는 정통파[칼빈주의]와 근본주의를 동일시하는 박형룡의 입장에 당황하면서 “장로교회의 전통적 입장인 칼빈주의는 근본주의가 아니다”25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이러한 걱정은 박형룡이 말하는 근본주의를 칼 매킨타이어, 훼이스신학교, 밥존스대학교 계열의 전투적 근본주의(Militant Fundamentalism) 또는 종파적 근본주의(Sectarian Fundamentalism)와 같은 것으로 보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박형룡은 반지성적인 극단의 근본주의자가 아니었다. 근본주의는 오늘날 신학계에서 비하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박형룡이 소개한 개혁주의 정통신학은 사도적 복음에 충실한 신학이며, 1920년대까지 프린스턴신학교가 표방해 오던 지성적이며 유서 깊은 역사적 칼빈주의이다.
2. 개혁파 정통신학
박형룡은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1976)에서 자신의 신학적 전통을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26이라고 말했다. 네덜란드 개혁주의 신학을 수입하는 데 거부감을 표명하면서 “어떤 젊은 세대 인사들은… 장로회신학교 당시에는 신학은 내용 없는 무엇이었다고, 이제 개혁주의 신학을 새로이 개발하여야 될 것 같이 말하고 있다”27고 했다. 박윤선은 미출간 논문 ‘한국에서의 칼빈주의’28에서 장로회신학교(평양)의 교육이 철저한 칼빈주의를 전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논문에서 박윤선은 개혁주의를 선호하고 보수주의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새로운 눈을 제시했다.
박형룡은 광복 이후 한국장로교회가 매몰되어 있던 개혁주의 신학의 회복에 열중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란 말을 점차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개혁주의란 말을 제한 없이, 막연히 사용하여 마치 유럽 대륙에서 발전된 개혁주의를 우리 교회에 새로이 직접 수입해 오려는 것이 아닌가는 생각이 들게 한다”고 걱정한다. 장로교회는 개혁파 신학을 포함하고 있지만 “개혁주의보다 한술 더 뜬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29을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교회가 “개혁주의를 모른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드물게 썼고 혹은 장로교회란 말에 그것을 포함시킨 것뿐[이므로]… 개혁주의를 새로이 개발하거나 수입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유럽 대륙의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주의를 가미하여 가진 장로교회이니 전자(유럽 개혁주의)의 직접 수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소유하고 있는 청교도적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확고히 보수하면서 그것의 해설에 필요한 보완을 행할 것뿐이다”30고 말했다. 이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 드러난 영국 청교도 신학이 유럽의 개혁주의 신학보다 더 정통적인 신학이라는 것이다.
박형룡은 종교개혁운동의 신앙고백적 규범들을 굳게 붙잡으면서 사도들과 교부들이 구현된 진리와 연속성을 가지는 ‘올바른 교훈’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의 신학은 16세기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개혁파 정통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신학전통은 편의상 초기, 전성기,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1560년-1640년까지는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신앙고백을 공교하게 정립한 시기이다. 1565년에 이르러 개혁파의 선두 주자들인 쯔빙글리(Zwingli), 칼빈(Calvin), 부처(Bucher), 오에이콜람파디우스(Oemcolapedius), 베미글리(Vermigli), 히페리우스(Hyperius), 무스쿨루스(Musculus)가 세상을 떠나고 불링거(Bullinger)만이 남았다. 개혁파 신학은 우르시누스(Ursinus), 올레비아누스(Olevianus), 잔키우스(Zanchius), 베자(Theodore Beza), 유니우스(Junius), 폴라누스(Polanus) 등이 발전시켰다. 도르트총회에 참석하여 세심한 신앙개요를 제시하고 신조주의를 정착시킨 왈래우스(Walaeus), 폴리안더(Poliander), 루베르투스(Lubbertus), 고마루스(Gomarus), 에임즈(Ames), 알스테드(Gomarus) 등이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발전시켜 나갔다.
개혁파 정통신학은 그 전성기인 17세기에 이르러 폭넓은 신학적 성찰을 성취했다. 신앙고백을 중요하게 여기고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대항하는 더욱 날카로운 논쟁을 펼쳤다. 부르만(Burmann), 투레틴(Francis Turretin), 마스트리히드(Mastricht), 마키우스(Mackius), 레이(Leigh), 오웬(John Owen), 픽테트(Pictet) 등이 이 신학을 이어갔다.
개혁파 정통신학은 18세기에 들어서서 스태퍼(Stapfer), 베네마(Benema), 무어(Moor) 같은 정통주의 후기 학자들의 저술을 거치며 다듬어졌다. 그 무렵의 대학교들은 기독교를 전통적인 개념으로 논의하지 않고 성경에서 떠난 명확하지 않은 형태의 사고를 점차 선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파 정통신학자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위대한 신학적 통찰을 전승하면서도 중세 후기에 유행하던 스콜라주의 학문방법 곧 상세하고 합리적이며 논쟁적인 방법으로 학문활동에 임했다. 이러한 특징은 교회가 이성의 시대라고 하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한 결과이다.
유럽의 개혁파 정통신학은 실질적인 변화 없이 프린스톤신학자들과 미국 개혁교회 신학자들에게로 연결되었다. 찰스 하지(Charles Hodge), 알렉산더 하지(A. A. Hodge),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 등의 작품에서 그 진수가 드러난다. 하지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은 프란시스 튜레틴의 『변증신학강요』(Institutio Theologiae Elenticae)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칼 바르트(Karl Barth)와 에밀 부르너(Emil Brunner)는 신정통주의자이지만 그들의 신학체계의 전체적인 구조와 기본 정의에는 정통주의의 충격이 남아 있다. 정통신학은 신론과 성경론을 강조하면서 발전했고, 성경을 교리의 유일한 절대적인 규범으로 규정하고 고백했다.31
개혁파 정통신학자들은 칼빈파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더욱 합리적으로 체계화하여 고백문서로 남겼다. 제2스위스신조(1566), 도르트신조(1619),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1648) 등은 대표적인 개혁파 신앙고백서이다. 1618-1619년 사이에 화란 도르트에서 소집된 도르트총회(Synod)는 알미니우스가 주장하는 구원론을 반박하면서 자신들이 고백하는 것을 일목요연하게 적은 신조문을 채택했다. 그 핵심의 첫 글자들을 모아 튤립(TULIP)으로 표현했고, 이것이 이른바 칼빈주의 5대 교리이다.32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청교도주의는 네덜란드 지역의 교회 움직임과는 다르게 정치적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웨스트민스터총회(Assembly)에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1648)를 작성했다. 아일랜드의 더불린대학교의 신학부 교수이며 칼빈주의자인 제임스 어셔(James Usher, 1581-1656)가 작성한 104조항의 아이리쉬 신조(The Irish Articles)를 기초로 만들었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예정, 언약사상, 죄의 용서,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이며,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는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혁파 정통신학의 심장에는 칼빈사상이 관통하고 있다. 양자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칼빈은 성령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거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칼빈주의자들은 성경 자체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을 증거한다고 역설했다.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이 고심하여 작성한 『교리문답서』(Catechism, 1538)를 좋게 사용하지 않았다. 반면에 예정론을 중요한 것으로 여겨 심도 있게 다루었다.33 그들은 칼빈이 가진 신앙의 역동성, 열정, 구속사역에 대한 감격 등을 대체로 자신들의 메마른 지성 안에서 다루었다.34 칼빈이 신앙을 가슴(heart)의 문제로 본 반면에 칼빈주의자들은 점차 교리를 인정, 수긍, 수납하는 것을 신앙과 동일시했다.35
앞에서 언급했듯이 박형룡은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전통을 “구주 대륙의 칼빈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 사상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36에서 찾았다. 한국장로교회는 “청교도적인 영미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선교를 받아 출발하고 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들을 교의와 규례의 표준으로 채용하여 수행함으로 이루어진”37 교회이다. 박형룡은 미국북장로교회의 신학을 정통신학의 근간으로 삼았다.
이 신학 전통은 박형룡이 말한 대로 약 300년 전에 유럽에서 체계화된 칼빈주의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중심의 영국신학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거쳐 미국에 건너가서 거기서 약 200년 동안 새롭게 발전된 것이다. “청교도형의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를 받아 20년 간 자란 한국장로교회는 교의와 규례의 표준인 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를 채용함으로 청교도 개혁신학 위에 법적으로 확립했고, 아울러 이들이 장로회신학교(평양)를 설립하고 그들의 신학으로 교역자를 양성해 냄으로 전 교회의 신학사상과 신앙생활을 청교도적 개혁주의 풍토로 인도했다.”38
개혁주의 전통에서 만들어진 ‘12신조’는 한국장로교회가 오랫동안 교리 표준으로 수납해 온 고백문서이다. 12신조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니라”39는 선언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삼위일체·창조·인간·자유의지·신조·성령·예정과 선택·신자의 본문·심판과 형벌에 대해 고백한다.
한국장로교회는 다양한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건설되었다.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 칼 큐츠라프, 중국에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던 존 매킨타이어와 존 로스 등 스코틀랜드 선교사들과 캐나다와 호주의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건설에 이바지한 바가 적지 않다. 그러나 한국장로교회의 신앙의 정형화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주로 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간하배 교수(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선교학)와 박용규 교수(총신대학교, 교회사)는 한국장로교회의 역사를 반위(antithetical)개념으로 파악하여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대립의 역사로 보았다. 간하배는 이러한 구도 안에서 한국장로교 신학사상의 뿌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국에 처음으로 복음을 가져온 분들 대부분이 청교도적인 선교사들이었다. 일본이나 인도의 경우와는 달리 한국은 이 땅에 처음 찾아 온 선교사들이 대부분이 보수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이 면에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 수십 년 간 북장로교회에서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보수주의자라는 말을 듣고 있다. […] 한국교회가 보수주의적이라는 이유의 일부분은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미국에서 왔다는 사실에 있다. 미국교회는 영국이나 유럽에 있는 교회들보다 언제나 더욱 보수적이었다. 그리고 한국이 국가적으로 복음의 문호를 개방할 당시의 미국교회는 무디를 위시한 여러 부흥사들의 설교를 통해 전국적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시기였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에 나왔던 초대 선교사들 중 많은 분들이 이 부흥운동 기간에 회심의 경험을 했다는 것을 뜻한다.40
주한 미국 선교사 허버트 블래어(Herbert E. Blair)도 이와 비슷한 구도로 장로회신학교의 신학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성경은 거듭 강조되고 연구된 유일한 교과서이다. 이와 같이 모든 목사들에게 이런 신학적인 인상을 끼쳐 준 신학교는 역시 대부분 선교사들의 손에 있었다. […] 웨스트민스터신앙표준과 정치에 관한 장로교 형태를 수학하는 역사적 말씀으로 의심 없이 확실하게 받아들였다. 이러한 기초에서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된 복음 이야기를 솔직한 바울의 초자연적 해석으로 가르치고 한국교회는 [그것을] 무조건 받아들였다.”41
그러나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을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로 나누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던 선교사들을 제외한 초기 선교사들 대부분은 정통신학을 따르고 있었고, ‘12신조’에 일치하는 신앙을 고백했다. 그러나 다른 특징을 지닌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미국개혁교회(RCA) 출신인 언더우드 같은 부흥회-청교도형 인물이 있었다. 고등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을 위험한 사조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1920년에는 메이첸의 『신앙이 무엇인가』가 번역 출간되고, 베트너의 『개혁파 예정론』이 번역되어 신학교재로 사용되었다.42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전천년 견해가 없어서는 안 될 진리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선교사 게일(James Gale)은 블랙스톤(W. Blackstone)의 『예수의 오심』(Jesus is Coming)을, 언더우드(Underwood)는 무어헤드(W. G. Moorhead)의 『모세의 법』(Mosaic Institution』을 번역했다. 게일과 언더우드는 세대주의 신학의 상징인 『스코필드관주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을 공동으로 번역했다. 시대 종말에 대한 관심, 성경의 문자적 해석, 절대적 권위로 성경을 강조한 세대주의는 한국의 문화와 시대 정서에 상당히 어울리는 것이었다.
미국북장로교회 한국선교부의 연례보고서(1922)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사역하던 40명의 선교사 목사들은 7개의 신학교 출신이었다.43 프린스톤, 맥코믹, 샌안셀모(현 샌프란시스코신학교), 뉴욕의 유니온, 뉴욕비브리컬신학교를 졸업생들이었다. 무디성경학교 등 약 10개의 성경학교 출신들도 있었다. 그 밖에도 미국남장로교회의 여러 개 신학교 출신들과 캐나다교회와 호주장로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개혁주의 전통 아래에서 신학교육을 받았으나 교단 배경이 다르고, 교회 전통이 달랐다.
미국에는 세 그룹의 개혁주의 공동체가 존재한다. 첫 번째 그룹은 무오한 성경과 그것에 포함된 기독교 교리를 철저히 고수하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대·소교리문답을 최대의 신학적 표현으로 수납하여 찬동하며, 이 고백 표준문서들을 구성하고 있는 중심적 원리에 따라 사는 것이 기독교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들이다. 구파(Old School)에 충실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교리와 그것에 따르는 고백이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폐합되고 없어진 미국북장로교회와 미국남장로교회는 모두 이러한 고백주의 전통을 따랐다.
두 번째 그룹은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에 강조를 두면서 교리, 성경의 권위, 개혁파의 역사적 신조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네덜란드계 미국 개혁교회가 여기에 속했다.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도가 주이심을 확신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기독교 원리들을 알아내고, 직업을 거룩한 소명으로 보며, 기독교 세계관 또는 인생관에 강조를 둔 전통이다. 뉴번스위크신학교, 웨스턴신학교, 칼빈신학교가 이 노선에 서 있었다.
세 번째 그룹은 다양한 신학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며 교리에 느슨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대각성운동 유형의 경건주의를 강조하고, 교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리보다는 경건한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전통을 지닌 신파(New School)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부흥운동을 지지하면서 구파(Old School)에 속하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으로부터 분리했다. 신파와 구파는 1758년에 연합했다. 이때부터 미국장로교회는 경건주의―부흥운동주의와 교리를 앞세우는 고백주의가 병립하면서 내면적으로 갈등을 겪었다. 경건주의―부흥운동주의 장로교인들로 구성된 신파계는 뉴잉글랜드의 회중교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44 이들은 점차 현대주의, 자유주의 신학으로 기울어졌고, 반면에 교리주의―고백주의 장로교인들은 전통적 기독교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미국북장로교회는 청교도 전통 아래에 있었다. 청교도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개혁주의 신앙공동체이다. 엄격한 칼빈주의를 강조하고, 깊은 경건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문화창달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다. 미국의 초기 청교도들은 후천년 개념을 가지고 뉴잉글랜드가 하나님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의 사회생활이 기독교화 되기를 기대하면서 청교도들에게서 물려받은 문화비전과 경건주의적 부흥운동을 결합시켰다.
18세기에 이르러 신파계의 신학에 변화가 찾아왔다. 그들은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부인하며, 성경의 권위에 도전했다. 유럽계 장로교인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하는 근본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동참자 가운데는 신파계 사람들도 있었다. 엄격한 고백주의를 따르는 유럽계는 근본주의 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신파계, 경건주의, 부흥운동에 가까운 장로교인들과 얼마 동안 협조했다. 메이첸을 비롯한 고백주의 장로교인들은 근본주의 운동이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데 필요한 지성적 기반을 제공하면서 휘튼대학, 무디성경학교 등 부흥운동적 근본주의와 세대주의 노선의 장로교인들과 긴밀히 협력했다.
근본주의 운동의 양상은 세대주의의 출현으로 복잡해졌다. 세대주의는 개혁주의 토양에서 생성되었다. 그러나 엄격한 유럽계 고백주의자들은 세대주의자들이 율법시대(구약)와 은혜시대(교회)를 나누는 것을 꺼려했다. 유럽계 장로교회보다는 부흥운동, 사회운동, 경건주의적 특성을 가진 신파계가 세대주의를 더 쉽게 수용했다. 이들은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본주의운동 기간에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열매 최덕성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의 박형룡과 개혁파 정통신학에 대한 글인데, 잘려서 나오네요. 이런 좋은 글이... 아쉽지만, 부분적으로라도 보시면, 조금이나마 남는 게 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내용 소개) 워필드 벤자민 브렉켄리지(Warfield Benjamin Breckinride;1851-1921) 소개--->'구프린스턴' 신학자들의 과학관 (핫지,워필드 중심으로)--->근본주의와 미국문화 --->지적설계와 자연신학---->B.B.워필드의 구원의 계획--->개혁주의 구원론에 관한 소고 --->구약해석 방법론연구 (메시야적 해석을 중심으로 )--->박형룡과 개혁파 정통신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