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배운 적도 없고, 따로 공부한 적은 더욱 없다. 나무 깎는 이야기다. 조언을 들은 적조차 없으니, 배운 적 없는 음식 만들 듯 내 멋대로다. 자습 인생! 그게 내 정체다. 글쓰는 것도 사진도, 무얼 심고 거두는 것까지도, 내가 할 줄 아는 건 모두 혼자 익혔다. 나무와 하나가 되는 시간, 스스로 황홀경이라고까지 표현하는 삶의 구간이 좋을 뿐이다. 이른 아침, 순한 빛이 걸어오는 마당에서 나무와 맞는 그 시간. 방아쇠수지증후군이라는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자꾸만 손을 혹사하는 이유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 것만으로 즐겁기 때문이다. 치열하게 살았다. 넘어질 기회도 없었는데 쉬어야 한다.
다 헛소리고 군소리다.
나무를 깎다 보면 저절로 성격이 교정된다. 난 성격이 무척 급한 편인데, 나무는 절대 급한 성격을 받아주지 않는다. 더구나 나처럼 전동공구를 쓰지 않는 사람에게 급한 성격은 ‘쥐약’스럽다. 톱질부터 그렇다. 힘을 줄수록 빨리 잘릴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기운만 빠지지 효과는 없다. 흥부와 흥부마눌님 마주 앉아 박 타듯 슬근슬근 밀고 당겨야 한다. 그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결과물은 삐뚤빼뚤이다.
천천히 천천히… 인생살이도 그러하여서.
전동 톱을 쓰지 않는 한, 톱이 바뀔 리 없으니 내가 바뀌는 수밖에 없다.
칼질은 더 그렇다. 남들은 쉽게 보지만, 통나무를 깎아 종구락(표주박, 사진) 하나 만들려면 수천 번까지 칼질한다. 기계로 깎으면 몇 분이면 되는 일이다. 천 번을 깎아야 완성물이 나오게 돼 있다면 반드시 천 번의 칼질을 해야 한다. 힘을 더 준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결과물을 빨리 얻거나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칼질의 도를 이루는 것뿐이다. 암만 칼을 밀어도 깎인 게 안 보여서 조급증이 일지만, 무조건 칼질을 한 번 한 만큼은 깎인다. 눈으로 보이든 보이지 않든 확실하다. 처음에는 얼마나 답답했던지. 단단한 나무를 원망하고 무딘 칼날을 탓하기도 했다.
그런 조급증을 조금이라도 고친 건 그리 오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주 우연히 짧은 영상 하나를 봤는데(중국이 배경인 것 같았다), 두 팔이 없는 사람이 톱질을 하고 있었다. 발로? 아니다. 입으로 톱을 물고(물기 좋도록 만든 톱으로) 톱질하고 있었다. 입으로 하는 톱질을 상상해 보셨는지? 몸을 앞뒤로 움직여 밀고 당기는 건 어떻게 할 수 있다고 해도, 힘은 조금도 얹을 수 없다. 즉 톱질이 거의 안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씩 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슬근슬근…. ‘집념’이나 ‘의지’처럼 조금 진부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게 있었다. 차라리 ‘득도’라는 말이 먼저 생각났다.
그는 톱을 문 입이 아닌 불편한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 내면의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표시는 안 나지만 한번 오갈 때마다 오간 만큼 잘린다고 믿습니다. 언젠가는 잘릴 테니 그때까지 해보는 거지요.“
부끄러웠다. ‘언젠가’라는 부사 속에 나무를 깎는 이유가 모두 들어있다.
아침산책 나가려고 다 준비했는데, 와락비기 내려서 쓴다.
/페북친구 이호준님의 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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