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말 설악산에서 시작한 단풍은 11월 초순 내장산에서 절정을 맞는다. 우리 땅의 단풍 기상도는 늘 그렇다. 내장산 단풍 소식이 들릴 무렵, 사람들은 불현듯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서둘러 단풍 구경에 나서면서 내장산은 몰려든 사람들로 홍역을 치른다. 내장산이 없었다면 단풍 구경 제대로 못하고 겨울을 맞을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내장산은 몰려든 인파에 휩쓸려 허둥지둥 단풍 구경하고 돌아서기에 아까운 산이다. 내장(內藏)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안으로 간직한다’는 뜻이고, 내장사의 옛 이름이 ‘신령을 숨기고 있다’는 영은사(靈隱寺)이니 예나 지금이나 ‘숨기고 감추어 간직하는’ 뜻만은 변함없다. 산세는 내장 9봉이라 일컫는 아홉 개의 봉우리가 말발굽형으로 안을 둘러싸고 있다. 이처럼 안으로 감춘 산세는 임진왜란 때에 우리의 세계문화유산을 지켜낸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정읍의 안의와 손홍록 두 선비가 ‘조선왕조실록 825권 830책과 고려사 등의 기타 전적 538책’을 내장산으로 옮겨 지켜낸 것이다. 당시 다른 사고에 보관하던 실록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내장산 산행은 추령에서 시작해 내장 9봉을 종주하는 산길을 으뜸으로 꼽지만, 설렁설렁 단풍구경을 하기에는 내장사에서 원적계곡을 거쳐 벽련암까지 작은 원을 그리는 코스가 아주 좋다. 거리는 3.6㎞ 넉넉하게 2시간쯤 걸린다. 산길은 그 유명한 108그루 단풍터널 입구인 내장사 일주문에서 시작한다. 하늘도 땅도 사람들도 온통 붉은빛으로 물드는 길에 서면 저절로 함박웃음이 지어진다. 연두색, 초록색, 붉은색, 흰색으로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이 길을 걸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했을까. 어쩌면 사람들의 웃음과 행복을 구경한 단풍나무들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이곳 단풍나무는 100여 년 전, 내장사 스님들은 깊은 골에 자라는 단풍나무를 캐어다가 백팔번뇌를 모두 벗어나라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108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느리게 걸어 다다른 내장사. 절 마당에 서면 왠지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방을 둘러보니 내장 9봉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둘러싸고 있다. 이 자리에 내장산 아홉 봉우리의 정기가 모인다. 정혜루 앞에서 오른쪽 길을 택해 원적계곡으로 들어서면 호젓한 숲길이 이어진다. 북적거리던 내장사와 달리 사람들이 뜸해서 좋다. 원적암 입구에서 돌계단을 오르면서 왼쪽에 자리한 모과나무를 유심히 봐야 한다. 300살이 넘은 우락부락한 풍치가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나무줄기에 손가락만 한 단풍나무 한 그루가 자랐고, 기특하게도 붉은 단풍잎을 매달았다. 원적암을 지나면 600년 묵은 우람한 비자나무가 앞을 막는다. 내장산은 단풍 말고도 남방계 식물과 북방계 식물들이 어우러지기에 생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는 더 이상 북쪽으로 뻗어가지 못하고 이곳에 떼 지어 모여 사는 북방한계 군락지를 형성한다. 이제 길은 평지처럼 순한 산비탈을 타고 돌다가 너덜지대를 만나는데, 이곳을 ‘사랑의 다리'라고 부른다. 연인을 업고 소리 내지 않고 지나면 아들을 얻는다는 속설이 얽힌 곳이다. 너덜겅을 가만히 밟아보지만 덜컥! 돌 사이에 틈이 있어 소리가 안 날 수 없다. 이곳을 지나면 옛 내장사 자리였다는 벽련암. 암자 뒤로 힘차게 솟은 서래봉 암봉의 기상이 웅혼해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내장산의 최고봉은 신선봉(763m)이지만, 그 형세나 기상으로 보아 서래봉(624m)이 주봉 역할을 한다. 암자 마당에서 스님이 건네주는 녹차를 ‘벽련선원’ 현판이 적힌 누각에 올라 조망을 즐기며 마신다. 건너편으로 장군봉에서 연자봉으로 이어진 주릉과 연자봉에서 내려와 전망대가 세워진 문필봉으로 흘러내리는 지릉이 눈에 들어온다. 저 산세를 풍수지리에서는 제비가 모이를 먹이는 형국이라 한다. 문필봉이 제비 머리, 양 날개가 장군봉과 신선봉에 해당한다. 연소(燕巢), 즉 제비둥지에서 새끼가 모이를 받아먹는 자리가 바로 벽련암이다. 벽련암을 나와 백년수 약수로 달아오른 몸을 식히고 내려오면 다시 내장사 일주문에 닿는다. <이 기사는 대구시체육회가 후원합니다.>
▨주변 명소 △전봉준 공원과 생가 내장산 입구 내장저수지 옆에 조성되어 있는 이 공원은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정읍시에서 조성했다. 1894년을 의미하는 높이 18.94m의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전봉준 동상 등이 있고, 주변에 수목원, 조각공원 등이 있어 가족 나들이로 좋다. 또한 정읍 장내리 조서마을에는 초가 세 칸인 전봉준 생가가 자리 잡고 있다. △백양사 내장사와 함께 내장산국립공원에 속하지만, 전남 장성에 자리 잡고 있다. 내장사와 더불어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특히 백양사로 이어진 진입로의 애기단풍이 선홍빛으로 물드는 것이 일품이다. 또한 단풍나무 말고도 300~700년 묵은 비자나무들이 떼 지어 자라는 비자나무의 북방한계선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숙식 자가용은 88올림픽고속도로 순창 나들목으로 나와 정읍을 찾아간다. 버스는 우선 광주로 갔다가 내장사행 버스를 탄다. 내장산은 30가지 반찬이 나오는 산채정식이 유명한데, 30년 전통의 한일관(063-538-8981)이 으뜸이다. 정읍 시내에 한정식집 ‘정촌’(063-537-7900)은 1만 원의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남도 밥상을 만끽할 수 있다.
<사진 설명>우리나라의 단풍은 설악산에 시작해 내장산에서 절정을 맞는다. 내장사 단풍터널은 눈이 멀 정도로 화려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