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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됐어’ ‘됐어’ 하면 당신이 말 놓는 것 아닌가” “초면인데 당신이라는 소리 하지 마” “내가 나이가 제일 윈데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하면 되나”…. 손님들끼리 싸움이 났다. 그러자 주인 아줌마가 나선다. “웃사람이 아무나 되나” “뭐라고? 에잇!” 와당탕탕…. 주인 아줌마가 손님을 사정없이 밀치자 기세 좋던 주객이 술상 너머로 나자빠지면서 그릇이 깨지고 사방에 술이 튀고 순간 술집은 아수라장이 된다. 주점 ‘부산포’는 억수로 야단법석이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난장판이던 술자리는 금세 평정을 되찾는다. 싸움하던 손님 중 한쪽이 점잖은 체면에 참는 것인지 조신하게 화해의 술잔을 건넨다. 방금까지 폭발할 듯한 기세던 상대 손님도 못 이기는 척 술잔을 받는다. 그리고는 주거니 받거니 잔이 바삐 오간다. ‘부산포 대장’(주인 직함이다)도 천연덕스럽게 담배를 피워문다. “여기선 거의 매일 그래요. 잘 싸우고 또 금방 친해지고." 약간 삐딱하다고 할까, 반골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드나든 탓에 1980년대 초반에는 보안대에서 몇몇 손님(대부분 교수님들)에게 ‘부산포(당시엔 ‘골목집’) 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는데, 후일 그 보안대 사람들도 부산포의 단골이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
[대폿집 기행] 순천 남원골
나는 지금 가고 있다. 붉고도 붉은 지리산의 가을을 바라보며 전라도 순천으로 가고 있다. 지나친 아름다움은 오히려 슬픔을 일으키는 건가. 굽이굽이 남도의 가을 산야는 그저 바라만 보는데도 눈물이 날 지경이. 그러나 풍경은 슬픔을 슬픔으로만 끝나게 하지 않는다. 가슴팍 가득 한(恨) 덩어리를 가진 소리꾼이 울음을 참아내며 비장하게 토해낸 절제된 동편의 한자락처럼 장엄함으로 승화되어 펼쳐지는 풍경이다. 판소리를 하는 대폿집 ‘남원골’은 물 맑기로 유명한 순천 시내, 옥천과 동천 사이 뚝방길에 있었다. 여름이면 풀벌레 축제가 열린다는 곳이다. 관광음식점이나 요정 중에서 음식을 팔며 창이나 전통 공연을 하는 곳이 있다는 말을 이따금 들었지만, 주민들이 언제든 편하게 드나들며 술 한잔과 판소리 창에 취할 수 있는 대폿집이 순천에 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설레었던가. 작은 간판을 따라 누추한 건물 2층으로 올라간다. 1970년대 말부터 순천 동외동(지금의 장천동)에서 ‘소입’(笑入)이란 매력적인 상호로 장사를 하다 얼마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간판이 주모의 고향을 딴 ‘남원골’로 바뀌었다. 전성기에는 ‘소입네’ ‘주모’로 불렸다는 쉰일곱 이희숙 여사가 반겨 맞는다. 방 한켠에는 아쟁과 가야금, 북과 장구가 놓여 있다. 북채는 탱자나무를 손으로 깎아 만든 것이다. 누군가가 흥을 못 이겨 벽지 위에 행서로 호방하게 휘갈긴 큼직한 붓글씨가 눈길을 끈다. ‘유어예’(遊於藝). ‘예술로써 즐긴다’는 뜻인 듯한데 심상치가 않다. 서예가 우보 김병규가 흥에 겨운 나머지 마치 폭발하듯 벽에다 먹을 튕기고 온 몸을 떨면서 쓴 글씨다. 그날의 열기가 후끈 느껴진다. 함께 간 임 선생이 몇몇 가까운 지우들을 불러냈다. 모두 이곳 단골들이다. 남도인들을 빨래 짜듯 짜면 국악 소리가 뚝뚝 떨어진다던데 정말 그런가 보다. 과거 순천 일대서 술깨나 먹었다는 사람치고 ‘소입’에 안 다닌 사람이 없었단다. 그런데 10여년 전, ‘소입’이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단골들에게도 연락이 없었다. ‘집 주인이 가게 비워달라 해서 갑자기 이사갔다’는 뒷소문만 무성했다. 애가 탄 술꾼들은 소리 하는 술집을 찾아 차로 1시간쯤 떨어진 다른 도시까지 원정을 다니기도 했다.(그렇게 찾아갔건만 소리 하는 곳은 요정이나 대형 한식집이라 하룻밤 술값이 50만원은 족히 나왔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뚝방 옆으로 옮겨온 ‘남원골’ 소식을 듣고 술꾼들이 뛸 듯이 기뻐하며 달려왔을 때, 소입네가 한 말은 “그게, 거시기해서…”였다고 한다. 소박한 술상이 준비됐다. “노래방 때문에 안방은 조졌어.” 소입네가 싱건지(물김치) 무청을 손으로 쩍쩍 찢으면서 푸념한다. 살얼음이 보송보송 붙어 있는 긴 무청은 보기만 해도 속이 확 풀린다. 5~6년 전까지만 해도 화덕 놓고 홍어에 막걸리로 장사를 했다. 여기선 술상이 밥상이 되고 밥상이 술상이 된다. 소입네 먹는 밥에 안주 얹어 먹으면 밥상이 되고 그 상에 술 곁들여 먹으면 술상이 된다. 이 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다슬기탕. 봄·여름이면 순천의 ‘상사’란 아주 깨끗한 호수에 들어가 다슬기 잡아다 된장도 없이 소금, 무만 넣고 담백하게 끓인다는데 ‘남원골’ 다슬기탕은 술꾼들 사이에선 최고의 인기 안주다. 소쿠리에 풋전(부침개)이 담겨 나왔다. 고추며 ‘소불’(부추) 등을 넣어 만든다는데 정확히 그 재료를 못 알아듣겠다. 여하튼 보통 때 먹는 부침개와는 무언가 다른데, 자꾸만 손이 가고 배부를 때도 계속 먹게 되는 희한한 안주다. 싱건지며 풋전이 따로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술에 곁들여 나오는 안주라니 그저 흐뭇할 따름이다. “소캐로(솜으로) 가슴을 찍고 죽을 일이다.” 슬슬 사라지려는 우리 소리의 말로가 기가 막히다는 뜻인가 보다. 소입네는 남원에서 태어나 ‘남원 춘향여성 농악대’에서 국악을 공부했다고 한다. 명창 O씨, K씨 등이 동문이다. “슬픔이 파도를 많이 탈” 정도로 힘들게 소리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예술은 안아주어야 한다, 겉멋이 아니라 속멋이 있어야 한다, 속 궁합 안 맞으면 어떻게 살거요” 하면서 소입네가 내 잔에 술을 가득 붓는다. 술이 몇 순 돌아간 뒤 모두가 청해 소입네가 춘향가 한 대목을 부른다. “내 사랑 내 사랑 내 알뜰 내 간간이지야, 오호어, 둥둥 네가 내 사랑이지야….” 이 도령이 춘향을 만나 정을 나누는 유명한 사랑가다. 여리디여린 체구에서 어찌 저런 소리가 뿜어져 나오는 걸까. 고수는 술 손님 중 천선생이 맡았다. 절묘한 북장단이 예사롭지 않다. 꽤나 오래돼 보이는 북에는 한자로 글귀가 적혀 있다. “名鼓何有別處兮(명고하유별처혜)/ 苦生眞聲就是也(고생진성취시야).” “명고가 어찌 별다른 곳에 있단 말인가, 고생에서 우러난 이 소리야말로 진정한 명고의 소리리라.” 답가로 한 손님이 가락을 잇는다. ‘천생아재’와 흥보가 중 박타는 대목을 불렀다. 지리산이 움직이는 것 같다. 창이 끝나자 주모가 “간만에 존 소리 들었소”라며 경탄한다. 이곳에서는 김씨, 이씨, 혹은 미스터 김, 미스터 리 대신 서로를 ‘김 한량’ ‘이 한량’으로 부른다. 먹고 논다는 한량이 여기서는 ‘멋을 알고 풍류를 안다’는 존칭쯤 된다. 마지막으로 임 한량이 인생을 사계절에 빗대어서 노래한 단가 ‘사철가’를 부른다. “잘 한다!” “얼씨구!” 대폿집 소리꾼은 더욱 신이 나서 열창하고 좌중은 추임새로 화답한다. 한바탕 소리 잔치가 끝났다. 새벽이 왔다. 밤새 먹은 술값을 치르니 8만원. 가게문을 나서니 옥천에서 부는 바람이 상쾌하다. 나도 이제 ‘사 한량’이다. |
첫댓글 가보고자 자료를 찾던 중 순천의 남원골을 드디어 발견. 근데 언제 가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