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회 숲 문화 기행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숲과 우리의 전통문화에 관심이 있으신분은 7월의 식물과<세계문화유산>에 빛나는 전통 민속마을을 돌아보고자 합니다.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1.기행코스 : 포항 기계면 봉강재-경주양동마을-기청산식물원
<기청산 식물원>
위 식물원은 포항시 청하면에 위치한 식물원으로 평지에 가꾸어진 유일한 식물원이다. 서울대 농대 임학과를 졸업한 이삼우 원장께서 정직하게 농사를 지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귀감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이곳에서 과수원, 조경수 등을 심어 가꾸다가 식물원으로 인가 받아서 경영하고 있다. 전체면적이 27,000 평정도로, 자생식물원, 울능도식물원, 관찰원 ,약초원, 식용식물원, 향기,향수원 등으로 되어 있어서 전체가 사람의 장기를 형상화하여 설계 되었다.
<양동마을>
201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11년에는UN 공공행정상(PSA)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1992년에는 영국의 찰서 황태자가 방문하기도 하였다..
손중돈 선생과 동방 5현에 속하는 회재 이언적 선생이 나신 곳이기도하다.
전통 민속마을 중 가장 큰 규모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특이하게 손(孫), 이(李) 양성이 서로 협조하며 5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온 전통문화 보존 및 볼거리,역사적인 내용 등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마을이다.
전국에 6개소의 전통민속마을이 있으나, 마을의 규모,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묻지 않은 향토성 등에서 어느 곳보다 훌륭하고 볼거리가 많아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도 이 곳을 방문했다.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이를 에워싸고 있는 고즈넉한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 경주손씨와 여강이씨의 양 가문에 의해 형성된 토성마을로 우재 손중돈선생, 회재 이언적선생을 비롯하여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하였다.
마을은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20km쯤 떨어져 있으며, 마을의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등선과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토담으로 이어지며,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을 비롯하여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 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봉강재>
*명칭 : 봉강재
*지정번호: 문화재자료 제201호
*지정일시 : 1987-12-29 *소재지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552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인 태사공(太師公) 윤신달(尹莘達:893∼973)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1751년에 창건한 재사(齋舍)로서 28세손(世孫)인 윤광소(尹光紹)가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재임시 헌금 50량과 목재 15칸분을 헌납하여 창건한 후 27세손 윤동도(尹東度)가 경상감사(慶尙監司)로 재직시(1762년) 수축(修築)하고 1763년 경상감사 윤광안(尹光顔)과 안동부사 윤성대(尹聲大)에 의해 위토(位土)를 늘리고 재사를 중수하였다.봉강재는 조선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존한 건축물로 평면구성에 독특한 점이 있으며 치목수법이 우수하며, ㄱ자형팔작지붕에 접처마로 정면6칸, 측면4칸의 구조로 되어 있다.
태사공(太師公)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가 남달리 뛰어났고 장성하여서는 고려 왕건의 막료(幕僚)가 되어 고려의 건국(建國) 및 국기(國基)다지는 일에 많은 공을 세웠다.
공(公)은 918년 신숭겸 등과 함께 왕건(王建)을 도와 궁예를 추방하고 고려 창건에 공을 세웠고, 후백제의 견훤을 복속시킬 때와 신라 경순왕을 귀순시킬 때 공이 컸으며, 나아가서 견훤의 아들 신검을 토멸하여 후삼국(後三國)을 통합하는 많은 공을 세워 삼국통일후 건국 공로로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의 서훈(敍勳)과 태사(太師) 삼중대광(三中大匡)의 관직이 내렸다.
그후 944년(혜종1년)에 혜종(惠宗)이 공(公)을 두려워한 나머지 공(公)을 신라 유민을 다스리는 경주대도독(慶州大都督)으로 내보내는 한편 공(公)의 아들 선지(先之)를 인질로 하여 개경에서 봉직(奉職)케 함에 본의 아니게 혈육별리(血肉別離)의 고통을 겪게 된다.
30년 재임 기간중 한 번의 반란도 없이 이역땅 경주에서 선정(善政)을 베풀다가 973년(광종24년) 81세로 결국 임지(任地)에서 일생을 마치니 신라유민(新羅遺民)들은 공(公)의 유덕(遺德)을 흠모(欽慕)하여 여기 금닭이 알을 품은(금계포란지형:金鷄抱卵之形)형상의 경주 기계현 벌치동(현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구봉산(九峯山)아래 예장(禮葬)하였다. 그러나 이 묘소는 후손이 천리 원거리에 있었기에 실전 직전에 이 지방의 토호(土豪) 이하지가 전래하던 묘비를 동강내어 땅속에 파묻고 투장(偸葬)을 감행하였다.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나 영조 연간에 이르러 경주 종인 참봉 도(燾)가 전래하는 야설에 의하여 이를 탐지하고 요로에 알렸더니 당시 영부사 지완(趾完)과 판부사 지선(趾善), 판서 헌주(憲柱), 선지 봉조(鳳朝), 영장 봉정(鳳廷)과 경주부윤(慶州府尹) 리(理) 등이 힘을 모아 심묘(尋墓)에 전력하였으나 확증을 잡지 못하다가 영조 13년(1737년)에 양래(陽來)가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7일간에 걸쳐 전 묘역을 샅샅이 파헤쳐 묘비 동강을 발견함으로써 확증을 얻어 비로소 심묘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곧 봉분을 개축하고 석물(石物)을 다시 다듬어 세웠다.
그후 1751년 광소(紹光)가 재실(齋室)을 창건하고 봉서암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승려를 상주시켜 묘역을 수호케하다가 수 차례의 중수(重修)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구봉산 아래 송림이 울창한 곳에 옛부터 이 마을 사람들이 왕릉이라 칭하기도 한 큰 묘소 동측에 위치한 봉강재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재실 정면에 봉서암이라는 현판과 재실루 상단에 봉강재·태사공분암(鳳岡齎·太師公憤庵)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평면구성은 ㄱ자형으로 타지방의 일반적인 평면과 약간의 차이가 발견된다. 전체적으로 보아 깨끗한 감을 주고 유지관리에 세심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잘 다듬은 화강석 기단 위에 화강석 정평주초(定平柱礎)를 놓고 원주(圓柱)를 세운 정면6칸, 측면4칸의 익공식 3량가(樑架) ㄱ자 팔작와가(八作瓦家)겹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평면상으로는 통문5칸의 온돌 강당 전면에 툇마루를 놓고 우측에 문중의 원로인이 거처하는 고문실이 온돌 2문으로 연립하고, 그 전면에 통문 루가 강당 우측 ㄱ자 평면 끝에 자리하고 있다.
강당의 좌측단 온돌1칸은 1977년 보수할 당시 부엌칸을 개수 변경한 것이다. 강당 천장은 고미반자로 처리하였고 루(樓)는 처마도리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판대공을 이용하여 원형 종도를 받는 3량(樑)을 채택하고 있다. 기둥은 모두 원주를 쓰고 도리도 모두 굴도리를 사용하였으며 주요 구조부재(構造部材)의 치목(治木)은 주로 도끼나 자귀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재사 전면 좌우측에 동서재는 195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구조적으로 별다른 특색이 없고 각주에 납도리를 사용한 홑처마 박공와가로 구성되어 있다. 재사(齋舍)우측의 회의실은 1981년에 신축한 철근 콘크리트 라멘조(造)로 지붕은 겹처마팔작와가로 정면5칸, 측면2칸의 통문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 [참조]가까운 곳에 경북 지방문화재 267호 분옥정이 있음
자료제공 -포항시청문화재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