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발레리의 상징과 대비되는 우화적 역설의 아이러니 - 배정록 시집 『기린에게 쓰는 편지』 해설 박 남 권 한국문학예술 발행인 한국문인협회 감사
詩는 내면으로 불어오는 바람이나 파도를 잠재우는 그 어떤 존재의 표상이며 상징물이며 길이기도 하다. 時가 태양과 지 구의 흔들림과 변화에 의존하는 단순한 원리라면 詩의 길은 단순하면서도 단순하지 않은 복합이나 결합을 나타나게 하는 응축 분화의 작업과 음악적 운율이 내포하고 있어야 하고 거 기에 언어의 생명력이 한자리에 존재하는 존재해야 하는 길 이다.
"시인은 꿈에서 깨면 즉시 바보가 된다. 즉 지적知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라고 콕토가 말했지만, 폴 발레리의 미학이 더 마음에 든다. 그가 볼 때 시 작품이란 치열한 지성의 결실이기 에 그렇다.”고 말한 투르니에의 말은 여운을 남긴다. 배정록 시에 부합하고 시에 농축되어 침잠해있는 정신적 명상이 시의 기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하얗다 신경전을 벌이다 큰 키로 햇살을 덮는 아카시아
실수였다. 찔레의 무기를 몰랐다. 가시에 찔려 얼굴이 빨개진다. -<방심> 전문
배정록 시 <방심>과 폴 발레리의 아래의 시 -<해변의 묘지 >를 읽어보면 시의 치열함이 느껴지고 그 치열함에 자신도 모 르게 빠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 체험은 위의 시 <방심>에서 만 있는 현상은 아니고 대부분의 시에서 느낄 수 있다.
바둑 기사 조치훈이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고 했듯이 배 정록의 시에서는 한 줄도 그냥 허투루 쓴 구절은 발견할 수가 없고 그의 시에서는 핏빛 이슬이 맺혀 너무 진지한 시 정신을 읽을 수 있으며 청자의 입장까지도 진지하게 해준다.
그래 일렁이는 헛소리를 묵묵히 받은 바다여, 무늬로 그려진 표범의 가죽, 햇살이 비추이는 천만 가지 상념으로 구멍 뚫린 코트, 검푸른 물살에 취해, 정적을 닮아가는 소란스러움에서
힘으로 빛 번뜩이는 긴 꼬리 사납게 몰아치는 히드라여, -<해변의 묘지> 일부에서 - 폴 발레리
폴 발레리가 옥스퍼드 강연 <시와 추상성 시론>에서 시란 무엇인가, 시를 어떻게 쓰는가에 관한 강연에서 그의 시세계 를 볼 수 있고 그가 추구하는 시적 사상을 만날 수 있다. 시의 영역을 확장하여 시도한 가극을 위한 희곡 <나르시스 칸타타> 를 발표하면서 발레리의 명성은 날개를 달았다.
폴 발레리(Ambroise-Paul-Toussaint-Jules Valéry)는 남부 지 중해 연안의 항구에서 태어난 고향의 인연으로 장시 <바다 의 묘지>를 쓴다. 죽음에 대해 존재와 사람의 삶과 죽음이나 사후를 영적 사색으로 시도한 시적 통찰이다. 그는 앙드레 지 드, 말라르메와도 문학적 소통을 한 것으로 알려져 좋은 친구 는 문학에서도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법에 관한 서설>이라는 산문에서 작품성이 뛰어나 독자를 놀라게 한다. 그는 생애 후반기를 시학 강의에 전념하였다. 『 평론집 바리에테』로 잘 알려져 있고 산문『영혼과 무용』,『나무 에 관한 대화가, 폴 발레리의 이름에 빛을 더해준다. 배정록의 시를 보면서 발레리를 다시 생각하고 만나는 것도 우연이 아 닌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초췌한 모습의 젊은 여인 가녀린 목덜미 깊이 숙이고 인도 위에 앉아 아이를 안고 있다. 엄마를 보는 아이의 눈이 슬프다. 떨어지는 동전 소리 여인의 얇은 옷이 찬바람에 나부낀다.
어두워진 하늘 아래 구걸하던 여인이 서 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긴 했어도 두려움이 가득한 여인의 창백한 얼굴 아이는 사라지고 홀로 길 위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지폐 몇 장 쥐어진다.
여인의 눈물이 보인다. 웅크리고 앉은 작은 몸이 가엾다.
엄마를 기다리며 창밖만 보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슬프다.
어젯밤 내가 또 꾸었던 꿈 -<21세기> 전문
배정록 시인 고향이 경북 영양이다. 영양은 조지훈 시인과 이문열 소설가의 고향이기도 한 문학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 래서인지 배정록 시인의 시는 문학의 본류를 흐르는 강한 자 존의 물길이 보이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부러지더라도 굽 히지 않는 곧음의 정신이 두드러진다. 그렇다고 단순히 직선 적인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 <21세기>에서는 아름다운 연민의 정을 밑바탕에 깔고 있어 조화가 균형이 잡 힌다. ‘떨어지는 동전 소리 / 여인의 얇은 옷이 찬바람에 나부 낀다. // 어두워진 하늘 아래’ 떨어지는 동전의 초라함과 여 인의 얇은 옷과 찬바람의 대비는 절묘하다. 거기에 더하여 어 두워진 하늘을 덧붙여 시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하여, 21세기 를 공유하고 있는 우리의 삶이나 시인의 삶이 그렇게 밝지만 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모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질문하고 답 을 미리 써서 ‘어젯밤 / 내가 또 꾸었던 꿈’이라고 문을 닫아거 는 치밀함이다.
휠만도 하지. 평생을 쟁기질에 호미질에 아이들 뒷바라지에 허리 펴고 한숨 쉬고 또 숙여야 했으니 휠만도 하지.
실컷 자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이젠 쌀밥걱정 없어 행복하다고 양지바른 언덕 위에 노란 참외를 심어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쓱쓱 닦아 건네시던 농사꾼 어머니
갈라질 만도 했지. 얼음물로 빨래를 하고 잡초를 뽑고 그렇게 6남매를 키워놓고도 니들은 개처럼 컸다고 그렇게 키웠다고
예쁜 옷 사주지 못해 미안하다. 더 공부시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늘나라 가셨는데 이제 볼 수 없는데 보고 싶다며 이름 불러 달라고 시냇물 흐르는 강둑에 앉아 목 놓아 울고 났던 어느 날
양지바른 언덕 위 밝은 햇살 아래 하얀 분에 자줏빛 립스틱에 살아서 입어보지 못한 옥빛 주름치마에
팔을 벌리고는 부르는구나! 이리 오라고 어미 왔으니 이리 와서 안기라고
어머니 할미꽃 되어 찾아오신 그리운 내 어머니 -<할미꽃> 전문
봄에 피는 할미꽃은 참 아름다운 꽃이지만 할미꽃이라는 이 름을 가진 탓에 아름다운 꽃의 대열에 들지 못한다. 어머니라 는 이름과 할미꽃의 시를 읽기도 전에 아주 잘 맞는 시적 대비 이며 은유로 어머니의 숨겨진 아름다움과 할미꽃의 감춰진 미 의 연결로 시의 함축과 은유의 세계를 표현한다. ‘휠만도 하지.’로 툭 던지면서 시를 연다. 그러면서 ‘평생을 쟁기질에 호미질에 아이들 뒷바라지에 / 허리 펴고 한숨 쉬고 또 숙여야 했으니 휠만도 하지.’ 묻고 답을 하는 형식으로 은 밀한 속내를 공개한 뒤, 다시 ‘휠만도 하지.’ 확인을 한다. 그 렇게 반복을 함으로 인해 어머니의 세월을 인고의 세월로 색 칠을 하는 것이다. ‘양지바른 언덕 위 밝은 햇살 아래’ 는 어머 니의 무덤을 말하는 것이다. ‘하얀 분에 자줏빛 립스틱에’는 어 두운 무덤의 이미지를 양지바른 언덕과 밝은 햇살과 어울리는 색의 배합에 맞추기 위해 쓴 고심의 결실이며 어두움을 밝게 표현하는 슬픔을 슬픔이 아닌 상상의 색으로 환치한 우수함이 다. ‘살아서 입어보지 못한 옥빛 주름치마에’ 역시 다시 무덤의 옥빛 잔디를 표현하는, 살아서는 헐벗고 살았지만 아름다운
잔디 치마를 입은 어머니의 사후를 아름답고 밝게 전개한다. “아빠, 이~만큼 사랑해.” 아이가 양팔로 원을 그리며 말했다. 나는 그런 아이를 보며 더 크게 원을 그리며 말했다. “나는 너를 이~이~만큼 사랑해!” 아이가 눈을 크게 뜨며 “우와!” 하더니 양팔을 마구 돌려대었다. “봐봐 아빠, 나는 아빠를 이~이~이~만큼 사랑해!” 천사보다 예쁜 아이 ‘…… 나는 너를 바람개비보다 더 사랑한단다.’ - 서문 중에서
도롯가로 아흔여섯 포기의 해바라기를 심은 적이 있습니다. 가을이 되자 해바라기에선 예쁜 꽃이 피어났었지요. 그리고 다음 해에 계간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을 하였습니다. 여기에 실린 아흔여섯 편의 졸시는 그 의미를 되새 기고자 함입니다. 시인으로 이끌어주신 문학의 봄 개동 선생님과 존재 만으로도 힘이 되어주시는 강순덕 시인님 감사합니다. 미천한 글임에도 격려의 말씀 잊지 않으시고 흔쾌 히 출간을 결정해주신 한국문학예술 박남권 시인님께 도 감사 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 모습만 보일 때면 팔을 벌리며 쫓아와 안기며 업어 달라던 아이가 있습니다. “초등학생이 되었는데 부끄럽지도 않니?” 여린 팔로 목을 감싸 안으며 아이는 이렇게 말했었지요. “뭐가 부끄러워! 내 아빤데.” -<시인의 말> 중에서
“아빠, 이~만큼 사랑해.” 많은 시인의 시집을 읽기도 하고 해설을 쓰면서 맨 먼저 읽는 부분이 <시인의 말>이다. 그러 나 그 많은 <시인의 말> 중에 딸아이와 아빠와 사랑의 대화를 쓴 것은 처음이다. 배정록 시인이 쓴 <시인의 말>에서 어떤 < 시인의 말>보다 더 큰 감동이 밀려오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도 하게 되는 반면교사가 된다. 사랑이라는 그것도 어린 딸과의 사랑은 어떤 사랑보다도 아름답기 때문에 감동은 당 연한 귀결이다.
“나는 너를 이~이~만큼 사랑해!” “봐봐 아빠, 나는 아빠를 이~이~이~만큼 사랑해!”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사랑이 절대 사랑이라는 것이 더 큰 의 미가 된다.
시 <가을 하늘 속으로>에서 ‘맑디맑은 가을 하늘 / 들녘에 펴 놓은 볏단 위에 누워 하늘을 본다. ’ 고 하여 시인은 아무런 구 속이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자유를 갈구한다. 그 자유의 정신 이 시를 쓸 때 시인 자신만의 독특한 시를 쓰게 한다. ‘어머닌 논에서 이삭을 주우시고 / 아버진 소를 몰고 집으로 들어가신 다. ’에선 고향의 전원 풍경과 소 몰고 가시는 아버지, 이삭 줍 는 어머니, 고된 농사지만 단란하고 따뜻한 가정의 모습이다. 순박한 농부의 모습을 영상으로 전개하여 아버지 어머니의 관 계를 더 가깝게 하며 화자와의 거리도 단축한다. ‘이대로 뒤집혀 하늘로 떨어진다면 / 구름처럼 자유롭게 떠 다닐 수 있을까? ’ 하여 다시 자유를 강조한다. ‘그러다 문득 글짓기를 잘했던 친구를 만나 구름 위에 앉아 시를 써보는 상 상까지 '시인은 어렸을 때부터 이미 시를 쓰는 상상을 하고 꿈 을 키워온 문학소년 이였다.
‘한 번쯤 언덕에 누워 / 그렇게 하늘을 쳐다보고도 싶지만 / 그 하나 하기조차도 어렵기만 한 세상이다. '언덕에 누워 옛 생 각을 하는 한가로움에 빠져들고 싶지만, 현실은 그런 사소한 꿈도 같기 어려운 것이라는 자조를 하면서 ‘하늘이 아무리 맑 아도 / 지구는 뒤집어지지 않았었다.’라고 역설을 말한다. 사 실 지구는 엄청난 속도의 자전을 하며 그로 인해 수천수만의
뒤집어짐을 강행하지만 지구는 뒤집히지 않았다고 세상의 자 유나 본질을 지구에 비유하는 것이다. ‘맑은 하늘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모습’이라고 하고 싶은 말을 바로 해서 막연한 지구 에서 화자 자신의 세계로 돌아오는 태연함이다.
시 <개 미>에서도 직설적 표현과 은유를 자유자재로 전개 하고 나도 여전히 등장하여 시인이 시 쓰기에 얼마나 많은 시 간을 투자하여 수련을 치열하게 했는가를 보여준다. ‘개미 두 마리 / 먹이를 옮긴다. / 제 몸보다 / 더 큰 먹이를 물고 / 땡 볕 아래에서 / 영차, 영차’ 여기까지는 자연스러운 개미의 일 반화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한 번에 / 큰놈 가져다 놓고 / 놀려는 것이 분명하다. / 풀잎의 그늘 아래에서 / 빈둥거리며 / 놀려는 것이 분명한 거야.’ 하며 개미의 일반적인 상식을 과 감하게 깨부수는 일반화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으로 아무도 쓰 지 않는 부분을 시인만이 쓸 수 있다는 용기와 대담함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 시는 단순한 옛것의 답습이 아닌 새로움도 필 수로 있어야 한다고 항변한다. 그러면서 역설의 전개는 계속 되어, ‘그럼 그렇지. / 주위를 살핀다. / 본 건 있어서 / 치밀 함도 가졌다.’ 그렇지만 다음부터는 다시 개미의 일상화로 돌아온다. ‘땅 도 참지 못해 / 열기를 토하던 날 / 두 손 들고 무릎 꿇고 / 안 대를 쓰고…… / 쉰내가 났다.’ 고 열심히 땀 흘리는 개미가 우
리가 처한 이 사회라고 이 사회는 편견이 난무하는 사회라고 비판의 칼을 듭니다.
태어나 일어서며 높이 고개를 드는 짐승 어떻게 알았을까? 평생을 누울 수 없는 일어섬의 삶이란 걸 어미의 사랑 속에 꿋꿋이 자라 그만큼의 어른이 되었을 때 그땐 너에게도 너를 닮은 새끼가 있었다.
산다는 것은 냉혹한 현실 매서운 눈 번뜩이며 기회를 노리는 사냥꾼들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새끼를 지켜내던 너는 어느 깊은 밤 그들과 싸웠다. 젖을 빨던 새끼를 지켜내려 발버둥을 쳤지만 끝내 지켜내지 못하고 떠나보낸 너 너의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울렸고 하늘도 슬퍼 비를 내렸다. 그날 밤 입은 상처에선 고름이 나고 살이 썩어가고 새끼를 죽인 사냥꾼들은 또 너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누우면 일어서기 힘든 몸 잠시만이라도 누워 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한 채 절뚝이며 도망을 치던 너는 사흘째 되던 밤 새끼가 그랬듯 그렇게 쓰러지고 말았다.
살과 가죽이 발라지고 뼈가 으스러지고 한 번도 땅을 놓지 않았던 발굽이 남아 그것이 너였음 을 말해 주고 있었다.
목이 길어 멀리 보아도 넘어지면 일어서기 힘든 짐승아 차라리 짧은 목의 짐승으로 태어나고 땅속 작은 벌레로 태어나지 무엇을 보겠다고 제 몸보다 더 긴 목을 가지고 태어났니? 다음 세상에선 목 긴 짐승으로 태어나지 마라. 나무 위가 아니어도 멀리 보지 않아도 키 작은 수풀과 날아다니는 벌들의 날갯짓은 아름다 움이니 일어서지 못해 서서 잠들어야 하는 그 모습으로는 태 어나지 마라. 들꽃을 쓸고 가는 바람으로 태어나고 하늘 날며 노래하는 종달새로 태어나라. 목 긴 짐승으로 태어나지 마라. 높은 곳만이 좋은 것이 아니니 누워 자도 걱정이 없는 평범함으로 태어나라.
하지만 짐승아 높은 곳에 올라서면 목부터 젖혀지는 두발짐승으론 태어나지 마라. 혼자만이 잘난 척 으스대는 거만함이 되지 말고
죽을 때에야 빈손임을 알게 되는 어리석음이 되지 마라.
짐승아 짐승아 키 큰 짐승아 죽어서야 새끼를 품에 안고 누운 ....... 너, 기린아. -<기린에게 쓰는 편지>
배정록 시인의 이번 시집 제목이 되기도 하는 시 <기린에게 쓰는 편지 >는 기린이 키는 제일 크지만 한평생을 서서 살아야 하는 짐승으로 시인 자신의 삶을 의인화한 시를 통해서 보는 자전적 시로 보인다. 『이솝 우화가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것은 짐승이나 동물들의 특징을 제대로 알고 의인화를 했기 때문 에 독자에게 이해를 쉽게 하고 재미있게 다가가기 때문이다. 배정록의 시에도 의인화가 상당히 많은 편이고, ‘혼자만이 잘난 척 으스대는 거만함이 되지 말고 / 죽을 때에야 빈손임 을 알게 되는 어리석음이 되지 마라.’ 와 같이 의인화마다 아 주 독특한 짐승의 특성과 특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가장 정 확한 은유를 적용함으로 해서 시가 단순한 본래의 짐승 이야 기보다 훨씬 뛰어나다. ‘나무 위가 아니어도 멀리 보지 않아도
/ 키 작은 수풀과 날아다니는 벌들의 날갯짓은 아름다움이니’ 얼마나 아름다운 詩句인가
청자가 다시 시를 읽게 하고 마음을 흔들어 강하게 다가가는 것이다. 이것이 배정록의 자랑이며 우수함이다.
보이는 것은 산뿐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복사꽃 돌무더기 비탈밭엔 쟁기 끄는 어미 소의 눈동자가 있었다.
보이는 것은 그리움뿐이었다. 술래 잡는 아이들과 떠난 사람들이 벌이는 소박한 잔치 내리는 햇살은 변함이 없었다.
노을이 물들었다. 언제나 그곳에 있었는데 맨발로 뛰어와 반겨주시던 어머니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보이던 것이 안갯속으로 숨어버렸다. 잡초는 수풀이 되었다. -<고향 생각> 전문
시 <고향 생각>을 보면 시인의 고향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 를 알 수 있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마음 한가운데 자리하는 것 이지만 시인의 고향 사랑은 특이하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면 유년의 생활과 기억이 자리하고 있고 아버 지 어머니가 연결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지금 고향을 자주 가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루지 못하는 것이 그리움이라는 강을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시 <내 동생>에서의 특징은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이다. 그 죽음은 상당히 오래된 과거이지만 시 전반부는 현재형의 시제 를 쓰고 있다는 그래서 생동감을 더해주고 동생의 사랑도 실 감이 나게 한다. ‘새 옷은 아니어도 / 분홍색 꽃이 있다는 이유 만으로 / 신이 난 내 동생’ 그러나 죽음의 시점이 과거이기 때 문에 과거와 현재를 순환하는 ‘어머니 허리 잡고 / 백 원만 더 달라며 보채다가 / 아버지께 호되게 야단맞고도 / 자기가 산 과자 하나를 / 내 손에 건네주던 마음 착한 내 동생’ 오늘 아침 의 일처럼 생생하게 보인다.
‘하늘에 박힌 수많은 별들 사이로 / 개똥별 하나가 떨어지던 날 / 처마 밑 마당에선 / 모기를 쫓으려 짚단을 태웠고 / 반디 는 담장 너머로 / 예쁜 그림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이 구절만 본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구절은 없을 그런 밝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러나 이 밝음 뒤에는 어두운 구절이 대비를 이룸 으로 해서 주제가 더 선명해지는 구도이다.
‘해진 신발 신고 마당 위를 뛰어다니며 / 내일은 수영모자 쓰 고 물장구치며 놀 거라고 / 또 / 내일은 강가에 가도 되지? / 가서 물장구치며 놀아도 되지? / 아침이슬보다 / 밤하늘별보 다 / 더 예쁘고 착했던 동생은’ 이렇게 동생의 아름다운 기억 을 아주 밝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설명함으로써 동생의 죽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이다. ‘그날 밤 /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결 정타이다. 마지막 9회 말 공격에서 만루 홈런을 날리는 것이 다. 그리곤 애써 슬픔이나 눈물을 감추고 ‘너와 함께 먹은 골 뱅이가 / 마지막이란다.’ 다시 평정심을 찾는 모습은 대단하 다. 시의 쾌거이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사람에게로 시집을 와 고생만 해 온 엄마가 있다. 단칸방 한 편에 토마토를 심고 분꽃을 심으며 행복해하던 너 의 엄마 100원이 싸다며 세 정거장 거리의 시장으로 가서 파 한 단을
사오던 날 네 엄마 국을 끓이다 소리죽여 울었다. 하루 일당 4만 원, 떼는 수수료 5천 원 비 오는 날이면 그마저도 할 수 없는데 네 엄마 그 돈을 가지 고 방값 주고 용돈 주고 몸 상할라 곰국 끓여주며 20만 원을 저 금을 했다. 그렇게 1년을 모아 친구에게서 빌린 셋방 보증금 200만원을 갚 았을 때 우리에게도 돈이 생겼다며 네 엄마 얼마나 기뻐했던지
아이야. 네 엄마는 세상에서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길을 가다 어깨를 부딪쳐 시비를 걸어오면 엄마는 나대신 그 사 람과 싸웠고 헤진 앞치마를 산다며 시장에 가놓고는 정작 사오는 것은 나의 양말이었다. 아빠 손에 로션 쥐어주며 활짝 웃던 네 엄마는 그걸 사며 얻은 샘플용으로 1년을 버티고 2년을 버티었다. 이마에 열이라도 날 때면 밤새도록 그 곁에 앉아 이마를 만지고 물수건을 올려주던 사람……
그랬던 사람이 바퀴벌레 보며 기겁을 하던 겁 많던 네 엄마는 네가 태어나고 몇 년 후 용역회사를 찾아 청소 일을 시작했다. 아파트 입주청소에서부터 공장이나 창고, 건설현장 폐기물 정
리까지 하며 고된 나날을 보내게 되었지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닦으며 검사를 하던 얄미운 여인네와 작업 중인 줄도 모르고 물탱크 뚜껑을 닫아버린 사람 여자가 그런 일 한다고 실없는 농담이나 던지던 남정네들 손발이 갈라지고 피부병이 생겨도 일 있는 날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나가던 네 엄마는 가진 것 없는 집에서 태어나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로 시집을 온 가난이 라는 죄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어린 너를 유치원에 맡기고 시작된 그 일을 너도 잊지 않았지? 너는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은 우등생이고 모범생이었지만 엄 마는 그런 네가 부모직업을 써오라는 과제물을 가지고 올 때면 거친 손으로 주부라고만 썼었다. 아빠는 회사원이고 엄마는 집에서 살림만 하는 사람이라고, 그 렇게 말하라고…… 왜인지 아니? 왜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으로 집을 나가지 않았는지 그 이유 를 알고 있니? 네 친구들이 볼까 두려웠기 때문이란다. 학교 선생님들이 볼까 두려웠단다. 엄마가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오로지 네가, 네가 엄마 때문에 부끄러워할까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란다. 그랬던 사람이 네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제대로 된 화장품 한 번 발라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
아이야 너는 엄마처럼 살아선 안 돼. 엄마처럼 그저 괜찮다고만 하며 살아선 안 돼. 네가 원하는 길을 선택해서 살아야 해. 못난 남편 만나 고생만 하다 죽은 엄마처럼 너는 네 인생을 포기하며 살아선 안 되는 거야. 비웃는 사람들에겐 화를 낼 줄도 알고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에겐 당당히 맞설 수도 있어야 해. 너는 눈치 보는 일을 하지 말고 굽실거리는 사람 되지 말고 고개 들고 큰소리치는 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 100원이 싸다며 먼 시장까지 가서 파 한 단 사오는 사람 되지 말고 쉬지 않고 뛰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너지는 인격 앞에서도 아무 소리 못 하고 굽실거려야 하는 이 시대의 아버지, 어머니…… 네 엄마와 같은 사람들의 손을 잡고 힘 되어줄 수 있는 힘 있고 가슴 따뜻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해.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해. 자만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고 늘 푸른 소나무처럼 네 엄마처럼 아빠를 사랑하고 너를 사랑한 엄마의 그 사랑처럼 너는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야 해.
아내로 살기 전에 엄마로 살기 전에 너는 네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러다 인연 되는 사랑을 만나거든 마음을 다해 사랑을 해라. 엄마처럼만 사랑을 하렴.
아이야, 내 딸아.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너를 한 번에 찾을 수 있고 합창하는 노랫소리 속에서도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은 네가 자랑스러워 벽돌을 지고, 이삿 짐을 날라도 매일 다른 현장으로 팔려가는 품팔이 삶이어도 아 빤 조금도 힘들지가 않단다. 아빠가 사는 것은 오직 네가 있기 때문인 것 그 자리에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너의 아빠로만 살며 널 지 켜줄 테니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말고 아빠 같은 사람 만나지 말고 멋지게 네 인생을 걸어가야 해.
아이야, 내 아이야. 너는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해. 눈치 보지 말고 기죽지 말고 허리 펴고 고개 들고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빛나는 따뜻함이 되어야 해.
네 엄마처럼 살지 마라.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말고 세상의 중심이 되어 살아가라. 속 깊은 아이야 착한 아이야 엄마를 쏙 빼닮은 세상에 하나뿐인 사랑하는 나의 딸아. -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말고> 전문
시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말고>는 배정록 시인이, 이 시집을 내는 목적이 되는 시이며 이 시집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 기는 시이며 이 시집의 주제적 태마가 되는 시이기도 하다. 그 리고 이 시를 읽으면 시의 구절마다 핏빛 이슬이 맺혀 이슬방 울 뚝뚝 떨어져 흥건히 쌓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냥은 넘 어가기 어려운 안개들이 쫙 깔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의 세계를 경험하고 안개의 여행을 해야 한다.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말고 세상의 중심이 되어 살아가라.’ 는 힘겹게 외치는 배정록 시인의 목소리가 높은 산정에서 울려 퍼진다. ‘단칸방 한 편에 토마토를 심고 분꽃을 심으며 행복해 하던 너의 엄마 / 100원이 싸다며 세 정거장 거리의 시장으로 가서 파 한 단을 사오던 날 / 네 엄마 국을 끓이다 소리죽여 울 었다. ’시에서 함축이 중요하다 비유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때
로는 직설적으로 그대로를 쓰는 것이 훨씬 더 감동을 주는 경 우가 있다. 이 시가 바로 그 경우이다. ‘빌린 셋방 보증금 200 만 원을 갚았을 때 우리에게도 / 돈이 생겼다며 네 엄마 얼마 나 기뻐했던지’ 딸에게 어머니의 실상을 그대로 알려주어 과거 어렸을 때 미처 알지 못했던 사건이나 일들을 자세한 실체적 사실의 예를 들어 알려주는 사랑이다. ‘네가 엄마 때문에 부끄 러워할까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란다. / 그랬던 사람이 네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제대로 된 화장품 한 번 발라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 '시로서는 장시이지만 작은 분량의 글 로 아주 긴 시간의 내용을 그려내 장편 소설로나 써야할 내용 을 시 한 편으로 묶어 낼 수 있다는 것은 감동이다.
결론적으로 배정록 시인의 시의 주제와 태마는 진정한 자유 와 인간 냄새가 나는 행동을 토대로 하는 행동을 추구하고 불 의에 타협하지 않는 정신을 추구하는 자세를 가진 시이며 사 랑을 실천한다. 사랑은 승천한 아내 사랑이 절실하고 아버지 와 어머니에 대한 사랑도 크다. 하지만 가장 큰 사랑은 딸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이 그의 시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좋은 시 를 쓰게 하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배정록은 그런 절실한 시 를 하늘에 새기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언제나 푸른 하늘에.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이 세상을 덮는다. 시의 세계에 눈이 내리는 것일까. 세상은 눈으로 덮여 어두움은 환하게 빛으로 연다. 배정록 시인이 딸의 손을 꼭 잡고 환하게 눈 쌓인 길을 간다. 봄이 오늘 길이다. 봄이 온다.
2016. 정월. 도서관 논문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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