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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통해, 설교를 준비하는 가운데, 어렴풋이 생각난 책이 있었습니다. 90년대 후반에 읽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고든 맥도날드의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입니다. 고든은, 이 외에도, “영적 성장의 길”, “누가 내 교회를 훔쳤는가?”를 통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의 길로, 독자들을 인도합니다. “교회를 훔쳤다”는 말이 불경스럽게 들리죠? 하지만, 이 분의 책을 읽어보면, 많은 이들이, 교회를 훔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말 1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라고 했던 유대인들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에서, 고든은, “폭풍은 찾아온다. 영혼이 시험받는 힘겨운 순간들은 떠오르는 해만큼이나 확실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신앙생활에서 지치고, 힘들 땐, 언제나 떠오르는 말입니다. 그는, 상품에 품질이 있는 것처럼, 영혼에도 품질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영성”입니다. 고든은, 우리가 영성을 추구할 때, 우리는, “자기발견 속에서 고통과 굴욕을 경험한다”면서, 영성은, “주변 세상을 본받지 않고, 하늘의 분별과 확신과 결정으로 충만한 내면세계를 따라 사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영혼”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서,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노인이 되고 싶은가”입니다. 그는, 여기서, 예수님의 생애를 말하며, “감사와 찬송의 삶을 살라”고 합니다. 책의 뒤에서 소개하는 중국인 목사님은, 신앙 때문에 18년간 강제 수용소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건강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그의 건강비결을 묻자, 그는, 수용소에서, 인분 치우는 일을 맡았는데, 이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수감원들을 철저하게 감시하는 간수들이, 이 곳 만큼은, 악취로 말미암아, 근접하지 않음으로,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가 즐겨 불렀던 찬송이, 찬442장의 “저 장미꽃 위에 이슬”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성도만의 특권입니다. 성도가 아닌 그들은, 노래할 뿐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감사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성도로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절벽 앞에 다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독수리의 날개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돌보며, 그 절벽에서, 안전하게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함께 하며, 그에게, 극복할 힘을 주십니다. “가지 않은 길”이란 시를 쓴, 미국의 서정시인 “프로스트”는,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라고 시작하여, “먼 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라며, 끝을 맺습니다. 본문 속의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보며, 광야를 지나는 가운데, 두 갈래의 길에 있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며 가는 길과 불평하며 원망하는 가운데 가는 길이었습니다. 민 21: 4을 보시면,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고 합니다. 이는,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음으로 마음이 상했다는 겁니다. 혹시, 우리도, 이들처럼, 우리가 원하는 빠른 길로 가지 못하고, 둘레길로 가는 것 때문에, 불평 속에 있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은혜를 되돌아보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추수 감사절을 맞은, 오늘 뿐만 아니라, 항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으로 가득한, 우리 신목교회와 우리 모두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7절을 보시면,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아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십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길은, 지중해 해안에 있는, 수르광야를 거쳐, 블레셋의 땅을 통과하는 길입니다. 이 길은, 차로 운전을 하면 약 4시간, 기차로는 약 3시간, 비행기로는 약 1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도보로 이동하면, 보름정도 걸린다고 하지만, 당시, 60만 명의 장정과 어린아이, 그리고, 여자와 노인까지 합하면, 약 3백만 명의 대규모가 이동함으로, 2 – 3 개월은 족히, 걸릴 겁니다. 그래도, 40년에 비교하면, 빠른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처럼 빠르고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의 본심이 드러나는 경우들이 몇몇 가지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자리입니다. 광야의 빠른 길로 가면, 이스라엘이 이 자리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광야를 지나는 가운데, 애굽에서 준비한 식량이 떨어지자 식량이 없다고 불만 불평을 했고, 식수가 떨어지자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했던 자들입니다. 출애굽 초기에는, 홍해가 가로막자 어떻게 했습니까? 출 14: 11을 보시면,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수르광야를 거쳐, 블레셋을 만나면 어찌하겠습니까? 블레셋은, 호전적인 민족입니다. 훗날, 두고두고 이스라엘의 채찍이 되기도 하고, 이스라엘의 유혹이 되기도 하지만, 지금, 블레셋을 만나면, 여지없이, 애굽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가나안을 염탐한 뒤, 보고할 때, 뭐라고 합니까? 그들은, 그들 자신을 몰랐지만, 하나님은 먼저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을 의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은, 이들을, 좀 멀더라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며, 신앙 훈련과 교육을 시켰던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그들은 몰랐습니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에서 출판한, “우리도 몰랐던 한국의 힘”을 보면,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힘 가운데 하나가 “빨리빨리”라는 정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빨리빨리”는, 우리나라 상표처럼 붙어 다닙니다.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안녕하세요”이고, 둘째가 “빨리빨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의식이 “빨리빨리”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발전도 빠르고, 또, IT강국이 되는 밑거름도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타국에서 300년에 걸쳐 이루어놓은 것을, 30년 만에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의식에는, 경쟁의식만 있게 되고, 조급증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천천히 가도, 괜시리 불안함이 엄습하게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의 신앙도 영향을 받아, 냄비신앙만 있을 뿐, 하나님이 찾는 뚝배기 신앙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갓 태어난 송아지는 빨리 걷고 싶어도 걷지 못합니다. 다리에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잠시 후면, 다리에 힘이 생기면서, 걷는 것은 물론, 뛰기도 합니다. 사 55: 8 – 9을 보시면,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지냈던 광야는, 하나님이 직접 가르치는, 신앙의 학교였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지나면서, 신앙이 무엇인지,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광야를 피한다면, 신앙을 알 수도 없고, 믿음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에 걸쳐 광야를 돌아서 가는 가운데, 하나님 의지하는 법을 배웠던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가리켜, “고통이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역정에서, 가장 경계하고 염려해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며, “내 자아의 만족”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신앙의 위인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빠지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광야에서 돌린 것처럼, 우리도 머나먼 길, 길고 긴 시간을 돌아가게 합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한 오늘, 우리는, 지나온 1년을 돌아보며,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제대로 왔는지를 반성하는 가운데, 부족하거나 불순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보다 앞서 가시며,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추수 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 모두 위에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9절을 보시면,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접 오셔서, 성취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게 되자,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약 400년 전, 요셉이 하나님의 언약을 확신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내어 보낼 때,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나갈 것을, 유언으로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골이 되어서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그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겁니다. 이러한 요셉의 믿음을, 이스라엘은 대대로 전하면서,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400년간 그의 유언과 함께, 유골을 지켰던 겁니다. 요셉의 유골을 400년간 지킨 이스라엘도 칭찬할 만하지만, 요셉의 유언을 보면서, 오늘의 우리도, 이와 같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확신하며,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룹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성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믿음은, 그대로 이뤄집니다. 히 11: 1을 보시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정확합니다. 마 5: 18을 보시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면,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죽어봐야 알지 어떻게 아느냐고 말하는 기독교인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본문의 사건을 즉흥적으로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400년도 훨씬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룬 겁니다. 창 15: 16을 보시면,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고 합니다. 이것을 이룬 겁니다. 사람의 약속은, 경우에 따라, 환경에 따라 무효가 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정확합니다. 출애굽의 현장에서, 요셉의 유골을 보는, 이스라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요셉의 유골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있겠습니까? 그들은 광야를 지나는 가운데, 요셉의 유골을 보면서, 그들이 존경하는 요셉의 유언을 기억했을 겁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이 약속은, 요셉의 유골보다도 더 확실하며, 더 신뢰할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신구약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생의 광야를 가는 동안, 성경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우리가 성도로서 가는 모든 길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천국으로 통합니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이것이 마음에 새겨졌다면,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불신하지 않습니다. 영국의 시인 가운데 “프란시스 톰슨”이 있습니다. 그는, 7살 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줄줄 암송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기억력에 감탄하여, 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는, 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시시하다면서,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의사가 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수업을 받는 가운데, 많은 피를 보자, 이 또한 포기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군인으로 만들고자 군사학교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얼마 있다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이 또한 포기했습니다. 결국, 그에게 맡겨진 것은,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늘 잘 되는 것은 아니죠? 결국, 여기에서도, 좌절합니다. 그리고는, 방탕한 삶을 살다가 인생의 끝자락에서, 지나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가운데, 한 편의 시를 썼습니다. 그 시가, “천국의 사냥개”입니다. 원제이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말한다면, “거룩한 추적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에서, 그는, “하나님은 나를 물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을 피해 살려고 이리 저리로 도망 다녔지만, 끝없는 천국의 사냥개는 나를 쫓아와서 나를 물고 추적했다. 내가 좀 더, 일찍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섰더라면, 내 인생이 이렇게 패망하고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텐데. 내가 이렇게 42세의 짧은 인생을 살고 마무리하지만, 돌아보면, 하나도 내어놓을 것이 없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는 길에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프란시스 톰슨이 후회한 것은, “거룩한 추적자에게 잡혀, 좀 더 일찍 하나님 앞에 섰더라면”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그 길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그 길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까? 시 23: 3절을 보시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도우시며,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에게 직접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신 하나님을 외면하지 말고, 맞이하심으로, 하나님께 믿음으로, 감사하고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1 – 22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서, 우리를 인도하며 진행합니다.
본문 21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라고 하고, 22절을 보시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하나님은,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앞서서 인도했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가시며”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친히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음을 강조합니다. 이 기둥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솔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선포하는 겁니다. 민 9장을 보면, 성막이 만들어진 이후엔, 성막과 함께 구름 기둥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은 행군을 했고, 구름이 머물면 진을 쳤습니다. 여기서의 특이점은, 행군과 멈춤이 규칙적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어느 때는, 구름이 하루만 머물기도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 달, 혹은 1년 씩 머물기도 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행군하거나 멈추는 모든 행위가, 하나님께 달려있지, 이스라엘이나 모세의 결정에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성도된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도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하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떠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께서 눈동자 같이 지켜주실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시 121: 4을 보시면,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어거스틴”이 설교부탁을 받고, 낯선 지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도자를 선정하여, 그를 따라 갔는데, 그가 길을 잘못들어,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설교를 하지 못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마음이 상했습니다. 인도자도 매우 미안해했고, 자신이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인도자의 실수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어거스틴을 살해하기 위해, 대적들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인도자의 길을 막았던 겁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 입니다. 우리를 지금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이레의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감사와 찬양의 이유는, 우리자신과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떠나지 아니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며, 인도하여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