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홍장(朴弘長)
[본관] 무안(務安)
[무과] 선조(宣祖) 13년(1580) 경진(庚辰) 별시(別試) 병과(丙科) 22위(30/44)
[생졸년] 1558년(명종 13)~1598년(선조 31) / 향년 40세
[거주지] 영해(寧海)
조선시대 아이만호, 선전관, 제주판관 등을 역임한 무신으로,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사임(士任). 증 사복사정 박지몽(朴之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공조참의 박영기(朴榮基)이고, 아버지는 현감 박세렴(朴世廉)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이다. 병사(兵使) 박의장(朴毅長)의 아우이다.
1580년(선조 13) 무과에 급제한 뒤 아이만호(阿耳萬戶)가 되었고, 그 뒤 선전관·제주판관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조방장(助防將)이 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향하였다. 1596년(선조 29) 대구부사(大丘府使)로 있을 때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통신사의 부사가 되어 정사 황신(黃愼)과 더불어 강화의 중책을 띠고 일본에 갔다.
도요토미[豊臣秀吉]가 조선사절을 멸시, 국서에 답하지 않았으나 조금도 굴함이 없이 국가의 체면을 욕되게 하지 않고 돌아온 뒤 가자(加資: 품계가 오름)되었다. 그해 순천부사를 거쳐 상주목사 재임 중에 죽었다. 사후에 형 박의장과 함께 영해(寧海)의 구봉정사(九峰精舍)에 제향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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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조 학사집(鶴沙集)
통정대부 상주 목사 박공 묘갈명 병서(通政大夫尙州牧使朴公墓碣銘 幷序)
공은 휘(諱)가 홍장(弘長), 자가 사임(士任), 무안 박씨(務安朴氏)이고, 고려(高麗)의 전주(典酒)를 지낸 휘(諱) 진승(進昇)이 비조이다. 사복정(司僕正)에 추증된 휘 지몽(之蒙), 공조 참의에 추증된 휘 영기(榮基), 병조 판서에 추증되고 연일 현감을 지낸 휘 세렴(世廉)이 증조(曾祖), 조부, 아버지이다. 어머니 영양 남씨(英陽南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고, 가정(嘉靖) 무오년[戊午年, 1558(명종 13)]에 영해(寧海) 원구리(元丘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초서를 잘하였고 문장을 잘 지었다. 무예에 두루 통하여 만력 경진과(庚辰科)에 합격하였다. 아이 만호(阿耳萬戶)를 거쳐 조정으로 들어와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외직으로 나가 제주 판관을 역임하여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임진란을 당해 머물러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그리하여 판서공의 상을 당했어도 오히려 돌아올 수 없었는데 대부인(大夫人)이 소를 올려 애걸하고서야 체직될 수 있었다. 해남(海南)에 이르러 영암 군수에 제수되었다는 말을 듣고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대구 부사로 이직되었으니, 서애(西厓) 유 선생이 천거한 것이다.
전란을 당한 백성들을 위무하고 둔전(屯田)을 마련하고 갑옷과 병기를 손질하니 고을이 마침내 완전하게 되어 우뚝이 남도(南都)의 철벽(鐵壁)이 되었다. 조정에서 그 노고를 포상하여 군자감(軍資監)ㆍ장악원 정(掌樂院正)에 거듭 발탁하였으나, 그것을 그대로 따르기 어려웠다.
병신년(丙申年, 1596, 선조 29)에 명나라에서 양방형(楊邦亨)과 심유경(沈惟敬)을 보내어 평수길(平秀吉)을 봉하여 국왕(國王)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조정에서 공을 통정대부로 승차시켜 판서(判書) 황신(黃愼)의 부사(副使)로 함께 가게 하였다.
오사포(五沙浦)에 도착했을 때 수길(秀吉)이 패란하고 태만하다는 말을 들은 일행이 두려워서 감히 나아가지 못함에, 공이 상사(上使)에게 나아가기를 극력으로 청하여 그 나라 도성에 도착하였다. 수길(秀吉)은 명을 받지 않고 명나라 사신과 우리나라 사신들에게 함께 돌아갈 것을 다그쳤다.
또 큰 소리로 재침하기 위해 병사들을 출동시킬 것이라고 하였다. 공이 먼저 치계(馳啓)하려고 했으나 명나라 사신들이 난색을 표했다. 공이 상사에게 도모하여 몰래 군교(軍校)를 보내어 계달하였다. 돌아와서는 순천 부사(順天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대구의 백성들이 원하였기 때문에 곧장 대구 부사로 옮겼다.
이보다 앞서 공이 이미 걱정과 근심으로 병에 걸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증상이 심각해져서 사직하고 돌아왔다. 상주 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무술년(戊戌年, 1598, 선조 31) 8월에 집에서 운명하였다. 12월에 초수동(椒水洞) 선영 곁에 장사 지냈다.
아! 공의 기국(器局)은 준엄하고 단정하였으며 의기가 분발(奮發)하였다. 제주(濟州)에 보패(寶貝)가 많았지만 조금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궁노(宮奴) 중에 병든 사람은 법으로 살피고 다스렸다. 임금이 파천했다는 말을 듣고 울면서 침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백씨(伯氏) 절도사(節度使) 공이 전투에서 불리하다는 소식을 듣고서 크게 통곡하며 며칠간 먹지 않으면서 개연(慨然)히 군영에 힘을 보태려고 하여 세 마리의 준마를 구해 항상 조련을 시켰다. 일찍이 중군(中軍)의 말이 도체부(都體府) 이원익(李元翼) 상국의 진중에 들어왔다.
세 준마도 나란히 달렸는데 그 빠르기가 나는 듯하였다. 온 군사들이 쫑긋이 보았다. 도체부가 매우 기뻐 맞이하여 위로해 주었다. 처음 일본에 도착했을 때 수길(秀吉)이 군문 밖에 비단무늬를 펼쳐놓고 병사들의 위용을 크게 떨치고 있었으며, 창검은 서릿발 같았다.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말에서 내려 걸어갔으나 공만 홀로 말을 채찍질하며 나아갔다. 하루는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숯불을 피워놓고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장차 사신들을 이 화염 위에 올려놓겠다.”라고 함에 공이 대답하기를, “어찌 옷을 벗고 불속으로 들어가지 않겠느냐?”하였다.
따라온 집안사람이 울면서 오열하자 공이 성을 내며 매질을 하였다. 때마침 우모(雨毛)가 내리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자 관백(關伯)이 두려워서 그만 두었으니 기이하도다. 돌아오려고 할 적에 일본 측에서 준 선물을 물리쳤고 따르는 자의 짐을 뒤져서 왜검 두 자루를 돌려주고, 단지 일본지도만 가지고 돌아왔다.
대저 공의 어짊으로 병란을 맞아서 그 충성은 금석을 꿰뚫었고 그 용맹은 삼군을 통솔하여 난리를 평정하고 위기에서 구원하였으니, 곧 그의 직분이었다. 변란이 일어나 몸이 해외에 묶였을 때 사신으로 돌아가서 하늘이 갑자기 목숨을 빼앗아가서 끝내 뜻을 펴지 못하고 재주를 팔리지 못했으니 하늘은 무슨 의도인가.
공이 백성들을 다스림에 특별한 정사를 베풀어 부임하는 곳마다 모두 떠난 뒤의 그리워함이 있어서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였으니 다만 여사(餘事)일 뿐이다. 부인은 월성 손씨(月城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후손이고 직장(直長) 보(普)의 따님으로, 아들은 없고 딸만 둘 있었다.
장녀는 진사(進士) 이시청(李時淸)에게 출가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신일(莘逸)은 아들 해(諧)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차남 부일(傅逸)은 아들 정(棖)ㆍ비(柲)ㆍ항(杭)을 두었다. 차녀는 충의위(忠義衛) 윤탕빙(尹湯聘)에게 출가하여 아들 성(晟)과 향(晑)을 두었다.
측실 소생의 아들 민(珉)을 두었는데, 그의 아들 문징(文徵)이 공의 행적을 죄다 모아 참봉(參奉) 이휘일(李徽逸)에게 차례대로 서술해 줄 것을 청하였다. 참봉은 학행이 있어 말을 믿을 만하다. 이에 마땅히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공의 충정은 / 公之忠
나라에 목숨을 바칠 수 있고 / 足以殉國家
공의 용맹은 / 公之勇
바다의 파도를 잠재울 수 있었건만 / 足以息海波
공의 수명은 / 公之命
어찌하여 이리도 짧았나 / 其如苦短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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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옷을 …… 않겠느냐 :
이휘일(李徽逸)의《존재집(存齋集)》권6에는 ‘내 장차 옷을 벗고 불속으로 들어가겠다.[吾將解衣就之]’라고 되어 있다.
[주02] 우모(雨毛) :
하늘에서 솜이 무수히 쏟아지는 괴변을 말한다.《한서(漢書)》〈오행지(五行志)〉에, “천한(天漢) 원년 3월에 하늘에서 흰 털이 비
오듯이 내리고, 3년 8월에 하늘에서 또다시 흰 털이 비 오듯이 내렸는데, 경방(京房)의《역전(易傳)》에 ‘간사한 사람이 등용되고
어진 사람이 쫓겨나면 하늘에서 털이 쏟아져 내린다.’ 하였다.” 하였다.
[주03] 이휘일(李徽逸) :
1619~1672.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문(翼文), 호는 존재(存齋)이다.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의 아들이자, 갈암(葛庵) 이
현일(李玄逸)의 친형으로, 계부인 이시성(李時成)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외조인 경당 장흥효의 학문을 이어서 이현일에게 전하여
이황의 학맥을 이었다. 저서로《존재집(存齋集)》ㆍ《홍범연의(洪範衍義)》가 전한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황만기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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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通政大夫尙州牧使朴公墓碣銘 幷序
公諱弘長。字士任。務安朴氏。高麗典酒諱進昇。鼻祖也。 贈司僕正諱之蒙。贈工曹參議諱榮基。贈兵曹判書行延日縣監諱世廉。曾祖考也。妣英陽南氏。贈貞夫人。嘉靖戊午。生公于寧海元丘里第。善草隷善屬文。旁通武藝。中萬曆庚辰科。歷阿耳萬戶。入爲宣傳官。出判濟州。瓜滿。値壬辰亂。留爲助防將。丁判書公憂。猶不得解歸。大夫人上言陳乞。乃得遞。到海南。聞除靈巖。到任未幾。移大丘。西厓柳先生薦之也。撫瘡殘設屯田繕甲兵。邑遂以完。屹然爲南都鐵壁。朝廷褒其勞。荐擢軍資,掌樂正。而難其代仍之。丙申。天朝遣楊邦亨,沈惟敬。將封平秀吉爲國王。朝廷陞公通政。副黃判書愼偕行。到五沙浦。聞秀吉有悖慢語。一行洶懼莫敢進。公力請上使前。至其國都。秀吉不受命。促天使及我國使偕還。且聲言再調兵將出。公欲先馳啓。天使難之。公謀于上使。潛遣軍校啓之。旣還。除順天。因大丘民願。仍大丘。先是。公已憂悴成疾。至是。症遂劇。辭歸。拜尙州不赴。戊戌八月。卒于家。十二月。葬椒水洞先塋側。嗚呼。公器局峻整。義氣奮發。濟州多寶貝。 毫毛不敢近。按治宮奴之病民者以法。聞大駕播越。涕泣不入寢室。伯氏節度公戰不利。大慟不食累日。慨然欲效力兵間。得三駿馬常調習。嘗以中軍馳入都體府李相元翼陣中。三駿齊驅。其疾如飛。一軍聳觀。都體府迎勞喜甚。初到日本。秀吉鋪文繡轅門外。大張兵威。劍戟如雪。人皆股慄下馬步。公獨策馬而進。一日。淸正熾炭火。使謂曰。將置使臣其上。公答曰。敢不解衣以就。跟行族人泣嗚咽。公怒杖之。會有雨毛之異。關酋懼而止。異哉。將還郤日本贐遺。搜從者行橐。還二倭劍。只携日本地圖而行焉。夫以公之賢。當搶攘之際。其忠貫金石。其勇冠三軍。剗亂扶顚。 乃其分也。變作而身滯海外。使還而天遽奪壽。卒之志不展而才不售。天何意哉。公治民有異政。所莅皆有去後思。立碑以頌德。特餘事也。配月城孫氏。鷄川君昭之孫。直長普之女。無子有二女。長進士李時淸。子二。曰莘逸。子楷。文科。曰傅逸。子棖,柲,杭。次忠義尹湯聘。子二。晟,局。側室子曰珉。子文徵。乃能摭取公行蹟。請李參奉徽逸敍次之。參奉有學行。其言可徵信。是宜銘。銘曰。
公之忠。足以殉國家。公之勇。足以息海波。公之命。其如苦短何。<끝>